<목회 경험담>
초심 - 굵고 짧은 목회
(사진 안영철 전도사) 안영철 목사
1988년 3월, 용인지구 송전교회에서 퇴계원교회로 발령을 받아 당시 도르가회장 강명희 집사댁으로 이사를 갔다. 이삿짐을 풀기 전, 이리 저리 들은 이야기들을 종합하여 결론을 내린 과제는 세 가지였다. 교회가 건축을 거의 해놓고 헌당을 못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땅도 교회건물도 모두 남의 명의(名義)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담임목회자 사택이 준비되지 않은 상태라는 것이다. 마지막 과제는 들은 바에 의하면, ‘서중한합회에서 가장 분위기가 쌀쌀맞고 텃세가 센 교회가 퇴계원교회’라는 것이었다. 이제 막 목회를 나와 2년차를 맞이한 인턴 전도사가 풀기에는 결코 만만치 않은 벅찬 과제였다.
이 과제들을 어떻게 풀까?
일단 사택문제부터 정면돌파 정공법을 사용하였다. 무조건 건축 중인 교회 지하로 2월말 경에 이사를 가겠다고 했다. 그랬더니 며칠 후 당시 장지일 수석장로로부터 연락이 오기를 교회 지하는 아무래도 사람 살기 어려우니 여수석 집사댁에 살면 어떻겠냐고 하여 흔쾌히 수락하였다. 그렇게 우리는 퇴계원교회 사역을 집사댁에서 이삿짐을 풀고 살았다.
집사님 가정은 우리 가정, 연로한 집사, 강명희 도르가회장으로 3가정이 한 마당 한 지붕에서 살았다. 교회를 가려면 미나리를 재배하는 논길을 지나서, 아랫동네의 기찻길을 건너서 갔다. 그 가정에서는 키타 연주하며 찬양을 곁들인 조석예배를 드렸다. 교회의 여러 문제를 기도하여 응답을 받았고, 말씀을 준비하며, 동네 이웃 가정들을 사귀며 살았다. 지금 생각해도 주마등처럼 아름답게 채색된 내 평생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소중한 추억이 담긴 행복한 순간들이었다. 지금쯤 그들 모두 어디서 어떻게 지낼까? 꽃님이 할머니께서는 지금도 여전히 살아계실까? 또 그 작은 아이 꽃님이는 지금쯤 얼마나 컸고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고 교회는 잘 다니고 있을까 궁금하다.
사택은 그 해 말쯤 교회 날개 방을 수리하여 이사를 하였다. 그 다음 해엔 방경섭 집사댁 1층으로 사택을 옮겼다. 목회자는 ‘교회 우선, 다음으로 내 가정’이다.
교회명의 이전 문제는 어떻게 풀까? 고민하다 얻은 결론은 이 역시 30일 작정 금식기도로 정면 승부수를 두고 시작하였다. 새벽 4시경에 일어나 교회에서 새벽 기도회를 마치면, 교회 뒷산 산기도로 들어갔다. 처음 1주일간은 아침 식사 시간 맞추어 하산하였다. 그 다음 주는 새벽에 올라가 점심때가 되어서야 내려왔고, 마지막 3째 주에는 새벽 캄캄한 산길을 더듬어 올라가 오후 2, 3시경에야 내려왔다.
그런 뒤에 교회에는 희한한 일들이 일어났다. 작정 금식기도 10일 만에 난데없이 건축업자가 ‘교회 건물 명의(名義) 이전’을 해주겠다고 전해왔다. 매 안식일마다 교인들이 전도하지 않은 낯선 사람들이 한 명 또는 일가족이 우르르 교회로 몰려오는가 하면, 평생 팔을 들지 못하던 어느 여집사님의 팔이 쑥 올라갔다. 중풍으로 눈을 감지 못하고 잠을 청해야 했던 어느 여집사님은 눈을 감고 잘 수 있게 되었다. 그 다음에도 기적들은 무슨 고구마 줄기처럼 연속적으로 일어났다. 첫 해에 증가한 교인수는 80명, 그 다음 1년 동안에 증가한 교인수가 120명, 부임했을 때 200여명이었던 퇴계원교회가 2년 만에 350명이 넘었다.
나의 좌우명 중에 하나가, ‘예수님처럼, 굵고 짧게’다. 그래서였을까? 어느 날 새벽기도회를 위하여 강단에 섰는데, 목이 잠겨 발성이 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 낫겠지… 했으나 며칠이 지나도 그대로여서 위생병원에서 진찰을 받았다. 기관지 확장증이었다. 당장 수술해야 한다고 하여 입원하여 수술을 받았다.
초심과 열심이 가져온 결과였다. 당시 어떤 목사님이 병문 와서 해주었던 말처럼 ‘목회는 단거리 경주가 아니고 장거리 경주’인데 뒷심이 부족했던 것이다. 대책 없이 뛰어놓고 뒷감당을 못했던 것이다. 또 한편, 그 큰 교회에 ‘나 홀로 목회’를 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당시엔 합회에 부목사를 요청해도 보낼 전도사도 없었던 시절이었다. 지금은 4, 5명의 목회자가 함께 뛰는 교회로 성장했다니 감사~.
마지막으로, 당시 쌀쌀맞다는 교회 분위기는 어떻게 되었을까? 부임 년도의 합회장은 김군준 목사님이었고, 그 다음해 합회장은 주영봉 목사로 바뀌었다. 그 해 가을쯤 안식일에 방문하여 예배가 끝나고 식후에 소감을 말씀하셨다. ‘돌아본 서중한합회 교회들 중에 가장 사랑이 넘치는 교회’라는 것이었다. 이 모두가 당시 온 성도들이 초대교회의 열심으로 돌아가 ‘오직 교회, 오직 예수, 말씀, 그리고 오직 기도, 오직 전도’로 나와 함께 2년 동안 생사고락을 함께한 결과였다.
퇴계원교회 성도들… 주마등처럼 여러분의 얼굴이 26년이 지난 지금도 눈앞에서 아른거린다. 사택 생활을 오랫동안 해보아 그 형편을 누구보다도 헤아려 많은 배려를 해주셨던 장로님, 집이 아닌 교회로 퇴근했던 장로님, 선교열정에 활활 불타올라 내 집 타는 줄도 몰랐던 장로님, 안식일 해질녘이면 버섯단지로 우르르 몰려가 버섯 따주기에 함께 해주셨던 교우들… “여호와의 증인” 교회에 여러 해 다니다가 말씀에 녹아 개혁한 여집사님, 떠오르는 목회 추억들을 모두 다 기록하기에는 지면이 다 부족할까 하여 이만 총총 난필을 줄입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
(초대 담임 목회자, 현 동두천교회 담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