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하회마을을 둘러보고 나니 병산서원 표지판이 보인다. 병산서원까지는 '유교의 길'로 연결되어 있다. 유교의 본고장이라 불리는 안동 다운 이름이다. 2km 남짓한 거리라 충분히 걸어갈만하지만 아무래도 시간이 부족할듯 싶어 운전대를 잡았다. 서원까지는 울퉁불퉁한 비포장 흙길이다. 걸어가는 이들에게 흙먼지라도 날릴까봐 속도를 최대한 낮췄다. 유교의 근본은 자고로 '인'과 '예'가 아니겠는가. (최근에는 이 길이 깔끔하게 포장됐다고 한다)
병산서원은 도산서원, 소수서원(영주), 남계서원(함양), 옥산서원(경주), 필암서원(장성), 도동서원(달성), 무성서원(정읍), 돈암서원(논산)과 함께 자랑스러운 세계문화유산애 올라가있다. 조선은 성리학이 국가통치이념이었던 시대로 서원은 성리학을 전파하던 주 교육기관이었다. 서원의 순수 목적은 지방 선비들의 학문 정진이었지만 갈수록 당쟁의 온상이 되고, 당파싸움에 빠져들며 조선 후기 사회를 병들게 한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흥선대원군은 1871년 전국에 서원철폐령을 내렸고 47개만 남겨지게 됐다. 이때 살아남은 곳 중 하나가 병산서원이다.
병산서원에 도착하니 눈앞에 낙동강의 은빛 백사장이 한폭의 풍경화처럼 펼쳐져있다. 잠시 세상과 단절하여 오로지 학문에 정진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환경이다. 요즘 학생들은 백색소음이 들리는 카페에서 공부하는데, 옛날 선비들은 자연속 고요한 공간을 사랑했다.
병산서원앞 풍경
병산서원의 출발은 고려시대 풍악서당이다.
고려 공민왕은 홍건족의 난을 피해 개경을 버리고 안동까지 피신하게 된다. 이 때 공민왕이 전란속에서도 풍악서당에서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들의 모습을 보고 감동받아 이곳에 토지와 서책을 내렸다. 200년 후 류성용 선생은 조용한 환경의 병산으로 서당을 옮겼다. 그의 타계후 그를 추모하는 존덕사를 짓고 위패를 봉안하며 서원이 됐다.
병산서원은 서애 류성용과 그 아들 류진을 배향한 곳이다.
서애 류성용은 조선후기 실학의 대가이자 명재상이다. 임진왜란 때 도체찰사에 임명된 류성용은 권율과 이순신을 파격적으로 등용해 나라를 구했다. 그가 저술한 <징비록> 은 국보 132호로 임진왜란 연구에 귀중한 자료다. <징비록> 또한 병산서원에서 출판했다.
사욕을 이기고 절제하는 삶을 살라는 의미의 복례문
서원 입구에 '복례문'이라는 글씨가 쓰여있다. '복례(復禮)'는 논어 <안연>편에 나온다. 공자의 제자 안연이 '인(仁)'에 대해 묻자 공자가 말하기를 '자신의 사욕을 이겨 '례(禮)'로 돌아가는 것이 인을 실행하는 것이니, 하루라도 자신의 사욕을 이겨 예로 돌아간다면 천하사람이 모두 어질다고 할 것이다'
요즘 시대에 유교와 성리학은 고리타분하게 받아들여지지만, 스스로 욕망과 탐욕의 유혹을 이겨내고 절제하는 삶을 살아야 함은 만고의 진리이다. 이곳을 드나든 선비들은 매일 이 문구를 가슴속에 새겼을 테다.
북례문 위에는 서원의 분위기를 압도하는 거대한 누각이 있다. 병산서원의 백미인 '만대루(보물 2104호)'다.
만대루는 요즘으로 치면 단체 교육을 받는 대강당이다. 막힘 없이 자연과 하나되는 열린 공간 속에서 선비들은 스승과 동료들과 학문에 대해 토론했다. '그 자체가 감동적이다' 라는 유홍준 교수의 극찬을 받는 만대루 통나무 계단은 안타깝게도 막혀있어, 만대루까지 올라갈수는 없었지만 한눈에 보기에도 누각에서 보는 풍경이 얼마나 아름다웠을지 짐작이 된다.
만대루는 당나라 시인 두보의 <백제성루>의 구절에서 나온 이름이다. 백제성은 삼국지 속 유비가 최후를 맞은 바로 그 곳이다.
'취병의만대 백곡회심유'
"푸른 병풍처럼 둘러쳐진 산수는 늦을 녘 마주 대할만 하고, 흰 바위 골짜기는 여럿 모여 그윽이 즐기기 좋구나"
시원한 개방감이 느껴지는 만대루
학문의 이치는 흐르는 강물처럼 막힘이 없어야 하며, 성인의 경지는 잡히지 않는 바람과 같은 법이다. 봄이 오면 은은한 꽃내음이 나는 것처럼 군자는 드러내지 않아도 향기가 전해지는 법이다. 지금이나 그때나 군자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을까.
입교당과 누각대 마루 한켠에는 앙상한 가지만 남은 배롱나무가 심어져있다. 봄에 왔으면 그 풍취가 대단했을 듯하다. 서원에 가면 특히 배롱나무가 많이 심어져있는데 그 이유가 있을까. 배롱나무 줄기 껍데기는 매끈하다. 즉 껍데기가 없는 가식없는 순수한 모습으로 살겠다는 선비들의 바램이 배롱나무에도 담겨있다.
마당 양옆으로는 같은 형태의 건물이 나란히 마주하고 있다. 학생 기숙사 건물이다. '좌고우저'라는 유교 원리를 쫓아 동재에는 상급생들이, 서재에는 하급생들이 기거했다. 지리 하나도 성리학적 유교이념에 따라 배치해 놓은 모습에 이곳이 얼마나 엄격한 학문적 규율에 의해 움직였을지 알수 있다.
서원 안 배롱나무. 겨울은 인내의 시간이다
만대루를 사이에 두고 양옆에는 기숙사가 있다
입교당
드디어 서원의 중심인 입교당이다. 입교는 <소학> '입교' 편에 하늘로 부여받은 착한 본성에 따라 인간윤리를 닦아가는 가르침을 바르게 세운다는 뜻에서 인용됐다. 역시 어느 곳이나 유교의 흔적이 없는 곳이 없구나. 입교당 마루에 앉아 있으니 만대루 사이로 낙동강의 물결이 보석처럼 영롱하다.
마당 한켠에 난 좁은 문을 허리를 굽혀 들어가니 서원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공간이 있다. 바로 유생들의 식사와 사당관리인들이 거처하는 일종의 생활집이다. 유생들이 열심히 학문에 심취할 수 있도록 뒷바라지를 하던 이들이 머물던 곳이다. 엄격한 신분구조인 조선시대 사회에서는 당연한 일이긴 하다. 내가 먹는 음식하나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면서 어찌 학문을 닦으려 하는가라는 옛 성인의 말처럼, 진정한 학문의 출발은 뜻을 세우는 '입지(立志)'에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일어서는 '자립(自立)'에 있는 것이 아닐까 쓸데없는 생각을 해본다.
이런. 나야말로 학문의 길이 꽤나 멀었구나!
병산서원 앞 홀로 자립하고 있는 나무 한그루
목판과 유물을 보관하던 장판각
향사때 제관들이 출입하던 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