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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 고을에서 옛날을 회고하다.
학송 전유형
고금의 모든 글이 다 고려의 흥하고 망함만을 말했지 포은 정몽주·화담 서경덕 두 선생의 도(道)와 덕(德)을 말하지는 않았으므로 이 시를 짓는다.
하늘이 잠시 은허(殷墟)를 살아있게 하여
오랫동안 보지 못했어도 사라지지 않았으니
오동나무 위에는 영원토록 달이 비추고
버드나무 가지에는 영원토록 바람이 분다.
달빛은 포은(정몽주) 어른을 생각나게 하고
바람은 스스로 복제공(復齊公:서경덕)을 전하는데
가슴 아프게도 왕림수(王林水)는
예같이 곡령(鵠嶺:개성 송악산) 동쪽으로 졸졸졸 흐르는구나.
[原文]
開城府懷古
閱古今諸作皆言 麗朝興亡之數 而不及鄭徐兩先生道德 故作此詩四韻律
天假殷墟存活物
不逢亥會未消融
梧桐上照千秋月
楊柳邊來萬古風
月色想他圃隱叟
風光傅自復齊公
傷心最是王林水
依舊潺湲鵠嶺東
王林水名盖王林洞水也
[출처] 학송집
@ 정몽주 [ 鄭夢周 ]
요약
고려 말기 문신 겸 학자. 의창을 세워 빈민을 구제하고 유학을 보급하였으며, 성리학에 밝았다. 《주자가례》를 따라 개성에 5부 학당과 지방에 향교를 세워 교육진흥을 꾀했다. 시문에도 뛰어나 시조〈단심가〉외에 많은 한시가 전해지며 서화에도 뛰어났다.
본관 영일(옛 연일). 자 달가(達可). 호 포은(圃隱). 초명 몽란(夢蘭)·몽룡(夢龍). 시호 문충(文忠). 영천(永川)에서 태어났다. 1357년(공민왕 6) 감시에 합격하고 1360년 문과에 장원, 예문검열(藝文檢閱)·수찬·위위시승(衛尉寺丞)을 지냈으며, 1363년 동북면도지휘사 한방신(韓邦信)의 종사관으로 여진족(女眞族) 토벌에 참가하고 1364년 전보도감판관(典寶都監判官)이 되었다.
이어 전농시승(典農寺丞)·예조정랑 겸 성균박사(禮曹正郞兼成均博士)·성균사예(成均司藝)를 지냈고, 1371년 태상소경보문각응교 겸 성균직강(太常少卿寶文閣應敎兼成均直講) 등을 거쳐 성균사성(成均司成)에 올랐으며, 이듬해 정사(正使) 홍사범(洪師範)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明)나라에 다녀왔다. 1376년(우왕 2) 성균대사성(成均大司成)으로 이인임(李仁任) 등이 주장하는 배명친원(排明親元)의 외교방침을 반대하다 언양(彦陽)에 유배, 이듬해 풀려나와 사신으로 일본 규슈[九州]의 장관에게 왜구의 단속을 청하여 응낙을 얻고 잡혀간 고려인 수백 명을 귀국시켰다.
1379년 전공판서(典工判書)·진현관제학(進賢館提學)·예의판서(禮儀判書)·예문관제학·전법판서·판도판서를 역임, 이듬해 조전원수(助戰元帥)가 되어 이성계(李成桂) 휘하에서 왜구토벌에 참가하였다. 1383년 동북면조전원수로서 함경도에 침입한 왜구를 토벌, 다음해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올라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가서 긴장상태에 있던 대명국교(對明國交)를 회복하는 데 공을 세웠다.
1386년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고 이듬해 다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수원군(水原君)에 책록되었다. 1389년(창왕 1) 예문관대제학·문하찬성사가 되어 이성계와 함께 공양왕을 옹립하고, 1390년(공양왕 2)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도평의사사병조상서시판사(都評議使司兵曹尙瑞寺判事)·경영전영사(景靈殿領事)·우문관대제학(右文館大提學)·익양군충의백(益陽郡忠義伯)이 되었다. 이성계의 위망(威望)이 날로 높아지자 그를 추대하려는 음모가 있음을 알고 이성계 일파를 숙청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1392년 명나라에서 돌아오는 세자를 마중 나갔던 이성계가 사냥하다가 말에서 떨어져 황주(黃州)에 드러눕자 그 기회에 이성계 일파를 제거하려 했으나 이를 눈치챈 방원(芳遠:太宗)의 기지로 실패, 이어 정세를 엿보려고 이성계를 찾아보고 귀가하던 도중 선죽교(善竹矯)에서 방원의 부하 조영규(趙英珪) 등에게 격살되었다.
의창(義倉)을 세워 빈민을 구제하고, 개성에 5부 학당(學堂)과 지방에 향교를 세워 교육진흥을 도모했다. 그리고 성리학에도 밝아 《주자가례(朱子家禮)》에 따라 사회 윤리의 기반을 확립하려고 하였다. 그리고 1392년(공양왕 4)에는 고려의 기존 법률 체계와 원나라의 법률, 1367년에 새로 제정된 《대명률(大明律)》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하여 《신율(新律)》을 편찬해 고려의 법률 체계를 재정비하려 했다. 나아가 외교와 군사에도 깊이 관여하여 국운을 바로잡으려 했으나 신흥세력인 이성계 일파의 손에 최후를 맞이했다.
시문에도 뛰어나 시조 〈단심가(丹心歌)〉 외에 많은 한시가 전해지며 서화에도 뛰어났다. 고려 삼은(三隱)의 한 사람으로 1401년(태종 1) 영의정에 추증되고 익양부원군(益陽府院君)에 추봉되었다. 중종 때 문묘(文廟)에 배향되었고 개성의 숭양서원(崧陽書院) 등 11개 서원에 제향되었다. 문집에 《포은집(圃隱集)》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정몽주 [鄭夢周]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 서경덕 [ 徐敬德 ]
요약
조선 중기의 유학자로 학문 연구에서 격물(格物)을 통해 스스로 터득하는 것을 중시했으며, 독창적인 기일원론(氣一元論)의 철학을 제창하였다.
본관은 당성(唐城), 자(字)는 가구(可久), 호(號)는 복재(復齋)이다. 송도(松都, 개성의 옛 이름) 화담(花潭) 부근에 서재를 짓고 학문에 전념하여 화담이라는 별호로 더 알려져 있다. 시호(諡號)는 문강(文康)이다. 평생 관직에 나가지 않고 송도에 머무르며 학문 연구와 교육에만 전념하여 황진이(黃眞伊), 박연폭포(朴淵瀑布)와 함께 ‘송도 3절(松都三絶)’로 불리기도 한다.
1489년(성종 20년) 황해도 개성 화정리(和井里)에서 종8품 수의부위(修義副尉)를 지낸 서호번(徐好蕃)의 아들로 태어났다. 하급 무관의 집안에서 태어나 거의 독학으로 공부하였다. 어려서부터 탐구심이 많아 어머니의 심부름으로 들에 나물을 캐러 갔다가 종달새가 하늘로 날아오르는 이치를 생각하느라 밤늦도록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고, 14세 때에는 <서경(書經)>을 공부하다가 태음력(太陰曆)의 수학적 계산에 의문이 생기자 보름 동안 궁리하여 스스로 터득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18세 때에는 <대학(大學)>에서 “그 뜻을 성실히 하려는 사람은 먼저 그 아는 것을 극진히 해야 하고, 아는 것을 극진히 하는 것은 사물의 이치를 연구하는 데 있다”는 구절을 읽고 “학문을 하면서 먼저 격물(格物)을 하지 않는다면 글을 읽어서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고 탄식하고는 만물의 이름을 벽에 써서 붙여 두고 날마다 그 사물의 이치를 깊이 탐구했다고 한다.
19세 때에 종6품 선교랑(宣敎郎) 이계종(李繼從)의 딸인 태안 이씨를 아내로 맞이하였고, 21세 때인 1509년(중종 4년)에는 경기·영남·호남 지방을 돌아보았다. 당시 조정에서는 1498년(연산군 4년)의 무오사화(戊午士禍)를 시작으로 잇따른 사화로 수많은 선비들이 참화를 당했다. 게다가 서경덕은 우주의 근원과 자연의 질서를 탐구하는 데 학문의 뜻을 두고 있었기에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그는 개성 화담 부근에 서재를 짓고 은거하여 연구와 교육에 전념했으며, 신분에 관계없이 제자를 받아들여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31세 때인 1519년(중종 14년)에는 조광조(趙光祖)에 의해 실시된 현량과(賢良科)에 천거되었으나 이를 사양하였다. 1522년에는 조식(曺植)·성운(成運) 등과 지리산·속리산 등을 유람하면서 교유하였고, 여러 편의 기행시를 남기기도 했다. 43세 때인 1531년(중종 26년)에는 어머니의 요청에 따라 식년시(式年試) 생원과(生員科)에 응시해 합격하기도 했으나 대과(大科)에 응시하거나 벼슬길에 나가지는 않았다.
1540년에 다시 김안국(金安國) 등에 의해 조정에 추천되었으나 출사하지 않았고, 1544년 조정에서 후릉참봉(厚陵參奉)의 벼슬을 내렸으나 이를 사양하였다. 그리고 그 해 원리기(原理氣), 이기설(理氣說), 태허설(太虛說), 귀신사생론(鬼神死生論) 등을 저술하여 자신의 사상을 체계화하였다. 1546년(명종 1) 58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개성의 숭양서원과 화곡서원에서 제향(祭享)되었다. 1567년(명종 22년)에 호조좌랑(戶曹佐郞)으로, 1575년(선조 8년)에 우의정(右議政)으로 추증되었으며, 1585년에 신도비가 세워졌다. 문집으로는 <화담집(花潭集)>이 전해진다.
제자로는 <토정비결(土亭秘訣)>을 지은 이지함(李之菡), 허균(許筠)의 아버지인 허엽(許曄),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박순(朴淳) 등이 널리 알려져 있다. 그리고 박주(朴洲)·남언경(南彦經)·민순(閔純)·이구(李球)·박민헌(朴民獻)·홍인우(洪仁祐)·장가순(張可順)·이중호(李仲虎) 등 수많은 문인이 있었다. 그러나 서경덕의 주기(主氣) 철학은 후대의 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지만, 경세론이나 윤리설보다는 형이상학적인 본체론을 중심으로 하였기 때문에 하나의 학파로 발전하지는 못했다. 그의 제자인 허엽은 동인(東人)이 되고, 박순은 서인(西人)이 되는 등 정치적으로도 나뉘었다.
철학사상
서경덕은 성리학 뿐 아니라 도가 사상이나 역학(易學)·수학 등에 대한 이해도 깊었다. 그는 학문을 하면서 격물치지(格物致知)의 태도를 중시하였고, 성현의 말이라고 해서 그대로 따르지 않고 스스로 회의하고 사색하여 깨닫는 자득지학(自得之學)을 강조하였다. 그는 스스로 사물의 이치를 따지지 않고 독서에만 의존하는 것은 쓸모없는 일이라고 비판하며, 직접 자연과 사물의 이치를 탐구하려 했다.
이러한 태도는 성현을 본받고 따르는 의양(依樣)을 강조했던 이황(李滉) 등 다른 성리학자들과는 많이 다르다. 이황은 “사물을 직접 알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고 자부하지 않았고 또 설사 안다고 해도 그 타당성이 의심스러우니 오직 성현을 따르는 것이 배움의 가장 온당한 방법”이라며 의양을 강조했으며, 서경덕에 대해서는 “그의 학설에는 한 편도 병통(病痛)이 없는 게 없다”며 매섭게 비판하였다. 그러나 이이(李珥)는 “화담(花潭)은 자득(自得)이 강한데, 퇴계는 의양의 맛이 많다”고 하면서, 서경덕의 깨달음이 이황과 같이 독서에 의존하는 학자에 비할 바가 아니라고 높게 평가하기도 했다.
이처럼 서경덕은 격물을 중시하며, 독서에만 의지하기보다는 자연을 탐구하고 스스로의 합리적 사유를 통해 진리를 인식하려 했으며, 주돈이(周敦頤)·소옹(邵雍)·장재(張載) 등 북송(北宋) 성리학자의 사상을 재해석하여 기(氣)를 중심으로 하는 독창적인 사상을 제창했다.
당시 조선의 성리학자들은 주희의 사상을 표준으로 삼아 이(理)와 기(氣)를 서로 독립된 실재로 구별해서 보는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의 관점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이(理)가 기(氣)에 앞서며, 이(理)가 기(氣)를 주재(主宰)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서경덕은 “기(氣) 바깥에 이(理)가 없다”며 기일원론(氣一元論)의 관점에서 만물의 운동과 변화를 설명하였다. 그는 장재(張載)와 마찬가지로 우주의 본체를 태허(太虛)라 하였는데, 태허를 ‘하나의 기(一氣)’로 보았다. 태허의 기가 아직 발하지 않아 말끔하여 형체를 갖추지 않은 상태를 선천(先天)이라 하고, 이미 발하여 만물로 형상화된 상태를 후천(後天)이라 한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사물의 생멸과 변화는 선천에서 후천으로 옮겨가는 이러한 기(氣)의 운동으로 이루어진다.
선천의 기는 본래 하나이지만, 그것이 모이고 흩어짐에 따라 천지만물의 변화가 나타난다. 선천의 일기(一氣)는 형체를 갖추지 않아 감각할 수 없지만, 후천의 기는 형체를 갖추어 감각할 수 있다. 그러나 기(氣)가 새롭게 생겨나거나 없어지는 것은 아니며 또한 기(氣)는 소멸되지도 않는다. 이것을 ‘일기장존설(一氣長存說)’이라고 하는데, 서경덕은 이를 촛불에 비유해서 설명한다. 촛불을 켜면 초가 점차 없어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기(氣)가 흩어져 형체가 바뀔 뿐이라는 것이다. 사람의 삶과 죽음도 마찬가지로 사람이 생겨나는 것은 기가 모이는 것이고, 죽는 것은 기가 흝어지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서경덕은 기(氣)의 운동은 다른 무언가에 주재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처럼 서경덕은 이(理)가 기(氣)를 주재한다고 본 주자학과는 달리 기(氣)가 스스로의 작용으로 만물로 형상화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어떠한 것도 기(氣)보다 앞서 존재할 수 없으며, 이(理)는 단지 기(氣)의 작용으로 형상을 갖춘 후천(後天)의 질서를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여기에서 이(理)와 기(氣)는 서로 구별되는 실재가 아니라, 이(理)는 단지 기(氣)의 운동을 법칙화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기일원론(氣一元論)의 관점이 제시된다.
서경덕의 사상은 이황을 비롯해 주리론(主理論) 계열의 성리학자들에게 비판을 받았지만, 이이 등 주기론(主氣論) 계열의 학자들에게는 큰 영향을 끼쳤다. 이이는 서경덕의 사상이 이(理)와 기(氣)는 서로 떠날 수 없다는 ‘이기불상리(理氣不相離)’의 요체를 분명하게 터득했다며 높게 평가했다. 하지만 서경덕의 일기장존설 등은 비판하며 이(理)를 궁극적 실체로 인정하여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의 관점에서 주기(主氣) 철학을 발전시켰다. 이이의 기호학파(畿湖學派)의 학맥을 이은 임성주(任聖周)는 성즉기설(性卽氣說)을 주장하며 서경덕과 마찬가지로 기일원론의 관점에서 기의 활동만으로 우주만물이 표현되며 이(理)는 기(氣)의 작용을 설명해 주는 원리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서경덕 [徐敬德]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 은허
은허(殷墟)는 실제 발굴조사를 통해 중국 최고의 왕조로 확인된 은 왕조의 수도다. 하남성 안양시 소둔촌 유적지에서 출토된 유물과 유적은, 은허가 은을 중흥시켰던 반경(盤庚)에서부터 마지막 주(紂) 왕에 이를 때까지 은 왕조 후대의 수도였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전설에 따르면 은 왕조 이전에 하(夏) 왕조라는 왕조가 존재했다고 하지만, 은허처럼 유적이 발견되지는 않았다. 따라서 존재가 확인된 왕조 중에서 은 왕조가 중국 최고의 왕조다.
탕(湯) 왕에 의해 처음 시작된 은 왕조는 B.C. 16세기~B.C. 11세기에 번영을 누리며, 현재 하남성을 중심으로 황하 하류 지역에서 세력을 확장했다. 최초 수도가 어딘지는 확실치 않지만, 몇 차례 수도를 옮기는 과정에서 최후의 수도가 바로 은허였다.
은허는 흔히 상(商)이라고도 불리는데, B.C. 14세기 말에서 B.C. 13세기 초 사이에 재위했던 반경(盤庚)에 의해 세워졌다. 그후 B.C. 1027년, 주(紂) 왕 시대에 주(周) 나라의 무(武) 왕에게 멸망당할 때까지 은허는 수도의 기능을 담당했다.
은허는 1899년 하남성 안양시 소둔촌에서 발견되어, 1928~1937년에 걸쳐 중앙연구원 역사언어연구소의 이제(李濟)와 동작빈(董作賓) 팀에 의해 발굴조사되었다. 그후 중일전쟁의 발발로 잠시 중단되었다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 후 중국과학원에 의해 조사가 재개되어 현재도 조사가 계속되고 있다.
은허 유적은 약 24평방킬로미터 내에 흩어져 있는 유적군을 가리킨다. 소둔촌에서는 왕궁과 사원 등 정치와 종교 시설의 흔적이, 소둔촌 북쪽과 남서쪽에 있는 강촌(崗村)에서는 집단으로 조성된 왕들의 묘가 12기나 발견되었다. 둘레가 20미터 이상 되는 대규모 묘도 존재하는데, 청동기 등의 많은 부장품과 다수의 순장자도 함께 묻혀 있어서 역대 왕들의 묘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리고 소둔촌의 'H127갱'에서는 1만 7,096개의 갑골이 발견되어 은의 역사를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사료가 되었다. 거북 껍질이나 동물의 뼈에 새겨진 갑골문자가 한자의 기원이 되었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은허에는 청동으로 만든 무기와 제기, 백자 등의 유물들이 함께 매장되어 있었는데, 이는 고고학에서 상당히 귀중한 자료가 되었다. 특히 청동기(靑銅器) 기술이 뛰어났으며, 동기(銅器)에 새겨진 문양을 통해 그 정교함을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청동기는 특권계급의 전유물로 일반 시민은 사용할 수 없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농사 도구로는 석기가 사용되었으며, 청동기는 제사나 의식 등에 사용되었다.
황하가 탄생시킨 은 왕조의 역사
B.C. 5000년 무렵, 화북지방에서는 황하를 중심으로 하는 신석기 시대가 시작되었다. 이것이 바로 황하 문명의 시작이었다. 황하 문명은 시기적으로 크게 두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시기적으로 앞선 쪽을 앙소문화(仰韶文化, B.C. 5000~B.C. 3000년), 뒤이어 나타난 쪽을 용산문화(龍山文化, B.C. 2000~B.C. 1500년)라고 부른다.
앙소문화라는 명칭은 하남성 앙소촌에서 처음 유물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붙은 것이다. 앙소문화의 분포 지역은 황하 중류 지역으로, 주로 지금의 하남성, 산서성, 감숙성 부근이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용산문화라는 명칭은 산동성 용산진(龍山鎭)에서 처음 유물이 발견된 것에서 유래했다. 분포 지역은 황하 하류 지역에서 점차 세력을 넓혀, 요동 반도를 지나 장강 유역으로까지 확장된 것으로 보인다.
앙소문화와 용산문화를 거쳐 중국 각지에 도시국가가 생겨나고, 이런 도시국가들이 연합해서 은이 탄생되었던 것이다.
은 시대에는 한 곳에 정착해서 농업에 종사하는 정주(定住) 농경이 뿌리를 내리고, 인근 지역이나 유목민과의 교역도 점차 늘어나게 되었다. 씨족제도는 왕실이나 귀족에 대한 숭배에서 점차 조상과 자연신을 숭배로 변하기 시작했고, 그에 따라 왕위 계승도 형제 상속에서 친자 상속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리고 은은 일종의 신권(神權) 국가로서 왕은 상제(上帝), 즉 하늘을 섬기는 최고 실력자였다. 당시 왕들은 점을 쳐서 하늘의 뜻을 살핀 후에 정치를 했다.
주(周) 시대에는 은처럼 신권정치로 백성들을 다스리는 것에서 벗어나 제후 중심의 봉건제도를 확립하게 되었다. 이러한 변천은 신을 정점으로 한 사회에서 인간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로 변화해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은허 [anyang] (고대유적, 2007. 6. 4., 모리노 다쿠미, 마쓰시로 모리히로, 이만옥)
@ 鵠嶺 (곡령)
산 이름. 경기도 개성시(開城市)에 있는 송악(松嶽)을 달리 이르는 말. 扶蘇. 神嵩. 崧山.
《新增東國輿地勝覽 4, 開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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