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임 봉익대부 김휘 공이 벼슬을 그만두고 이곳으로 물러나 산 지 오래이다. 우연히 사는 곳 동쪽에서 언덕 하나를 발견했는데 둥글게 높이 솟아 마치 배를 뒤집은 듯한 형상이었다. 마침내 그 위에 정자를 지었다. 소나무로 서까래를 만들고 짚으로 지붕을 이었으며 울퉁불퉁한 땅을 평평하게 다지고 무성한 수목을 베어 내었다. 주위를 돌아다니고 사방을 돌아보는 데 불편한 것이 없었다. 비서감 김구용에게 정자의 이름을 지어 달라고 해서 추흥정 세 글자로 편액을 걸고, 내게 기문을 청했다. 나는 한두 가지 그럴듯한 점을 찾아 글을 지었다.
천지의 운행은 끝이 없고, 사계절의 경치는 같지 않다. 나의 즐거움도 그와 함께 한두 가지가 아니다. 내가 상상하기에 이 정자는 봄이면 햇살이 따뜻하여 봄바람이 솔솔 불어오고 숲과 들에 꽃과 풀이 선홍빛을 띠거나 짙푸를 것이다. 이 때 소리 높여 노래하고, 배회하노라면 "나는 중점과함께하겠다."라고 한 공자의 기상이 솟아날 것이다.
여름이 오면 쇠와 돌도 녹일 듯한 뜨거운 햇볕이 하늘에서 쏟아지고 대지가 용광로처럼 달아오를것이다. 이때 아름다운 나무 그늘에서 맑은 바람을 쐬고 옷깃을 풀어헤친 채 산보하면 열어구처럼 세상 밖을 노니는듯한 느낌이 들 것이다. 겨울이 오면 차가운 북풍이 불고 기러기가 구름속에서 울며 눈이 내려 강과 하늘이 한 빛깔이 될 것이다.
이때 일옆편주를 타고 오가면 고아한 흥취가 섬계를 방불케 할 것이다. 그런데 김 비서감은 어째 가을의 흥취만 골라 이름을 지었는가?
여름은 덥고 겨울은 추우니 사람들이 모두 괴롭게 여긴다. 오직 화창한 봄과 시원한 가을만이 사람에게 알맞다. 비록 그렇지만 화창한 기운은 사람을 게으르게 만들기 쉽다. 가을이 와서 시원한 바람이 불면 하는 끝부터 땅끝까지 맑게 탁 트인다. 그 기운이 사람에게 붙으면 부귀와 공명을 얻으려 애태우는 마음도 맑고 시원하게 바뀐다. 사계절의 경치 중에는 가을이 제일이고, 가을의 경치는 이 정자가 제일이니, 김 비서감이 이름 지은 뜻은 여기에 있으리라.
어떤이들은 이렇게 말한다. 이 정자에서즐길 수 있는 봄과 가을, 겨울의 풍경은 그대가 남김없이 자세히 말했다. 그런데 가을 흥취가 좋은 이유는 말하지 않았으니 어째서인가? 나는 이렇게 답하겠다.
훗날 김 비서감을 데리고서 복건 차림에 명아주 지팡이를 짚고 이 정자에 올라 한 부제의' 추풍사'를 노래하고, 반악의 '추흥부'에 화답하면, 가을 흥취가 좋은 이유를 가까이에서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것으로 기문을 삼는다.
이숭인(1347~1392) 호는 도은, 목은 이색, 포은 정몽주와 함께 삼은으로 불렸다. 동문선에 다수의 시문이 실려있고, 문집 도은집이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