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03. 13
코로나19가 발생하기 전이었다. 강원도의 한 고등학교에 특강을 하러 갔는데 교장실 앞 복도 벽에 역대 교장들의 사진이 죽 걸려 있었다. 같은 해에 서초동 대법원에 특강을 하러 갔다. 역시 1층 로비에 역대 대법원장의 초상화가 죽 걸려 있었다. 사진과 유화로 그린 초상화라는 차이가 있을 뿐 두 곳의 디스플레이 형식은 판박이였다. 서로 다른 장소에서 동시에 펼치는 퍼포먼스를 보는 듯했다.
조직의 수장을 이미지로 남겨 전시하는 전통은 두 곳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청와대 세종실에는 이승만 대통령부터 박근혜 대통령까지 역대 대통령 11명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얼마 후면 문재인 대통령의 초상화도 추가될 것이다. 11명의 초상화만으로도 1948년 대한민국 수립부터 현재까지의 우리 역사를 압축해 보는 것 같다. 11명 모두 한 명의 얼굴로 자신의 시대를 대변하지만 그 이면에는 블라인드 처리된 수많은 동시대 사람들의 얼굴이 겹쳐 있다. 대통령 자리를 놓고 마지막까지 혈전을 벌였던 정적부터 각 당의 지지자들까지 합하면 그 사연의 높이는 거대한 산을 이룰 것이다. 초상화의 전시는 그 자리를 지켰던 사람의 권위를 드러낸다. 어디 그뿐인가. 그들의 개인사와 재임 기간의 치적 혹은 악행까지도 낱낱이 증명한다. 그 사람이 거기 있었다는 단순한 사실을 넘어, 그 사람과 함께한 사람들과의 관계와 그로 인해 발생한 사건들을 통째로 보여주는 무시무시한 증거다. 그때 그 사건의 결과가 지금 내가 살고 있는 현재까지도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포함해서 말이다.
대통령에서 학교 교장까지 자신들의 수장을 연대기적으로 진열한 풍조는 비단 최근에 나타난 현상이 아니다. 조선시대 왕실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전북 전주 경기전에 현존하는 ‘태조(太祖) 어진(御眞)’이 대표적인 경우다.
▲ 조중묵 외. ‘태조 어진’. 1872년. 비단에 색. 218×150㎝. / 어진박물관 소장. 국보 제317호
‘태조 어진’에서 이성계는 익선관을 쓰고 곤룡포를 입고 용상에 앉아 있다. 익선관과 곤룡포는 왕의 평상 시 집무복이다. 그런데 곤룡포가 붉은색이 아니라 청색인 것이 특이하다. 이에 대해 조선미는 ‘한국의 초상화’(2009)에서 “중국 황제의 곤룡포가 황색인 데 반해 황태자나 친왕은 붉은 홍포를 착용한다”고 하면서 이 그림이 중국으로부터 대홍색 곤룡포를 하사받은 1444년(세종26년) 이전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어진 속의 태조는 정면을 보고, 공수(拱手) 자세를 하고 있다. 공수는 왼손을 오른손 위에 놓고 두 손을 맞잡아 공경의 뜻을 나타내는 자세다. 가슴과 어깨에는 금색으로 용 문양이 새겨졌는데 용의 발톱이 5개인 오조룡이다. 곤룡포의 윤곽선은 매우 각지게 그려졌고, 상체는 8각형인 반면 하체는 넓고 풍성해 당당하면서도 위엄이 넘친다. 용포의 양쪽 트임새로는 하늘색과 붉은색의 안감이 살짝 드러났다. 왕이 앉은 어좌에는 붉은색 바탕에 황금색으로 용이 새겨져 있다. 색채도 눈에 확 띈다. 청색의 곤룡포, 붉은색의 어좌, 화려한 양탄자가 조화를 이루어 화려함과 장엄함을 보여준다. 당당하고 위엄이 넘친 태조의 모습을 과시하기에 충분한 작품이다.
그러나 초상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런 외적인 묘사가 아니다. 가장 중요한 부분이 얼굴이다. 그렇다면 ‘태조 어진’의 얼굴은 어떠할까. 전체적으로 선묘 위주로 그려 매우 평면적이다. ‘영조 어진’과 비교해보면 정면상과 7분면상이라는 차이 외에도 피부색, 곤룡포의 질감 표현, 선염 처리에서 매우 딱딱해 사실감과 자연스러움이 떨어진다. 특히 태조와 영조의 수염 표현을 보면 그 차이를 확연하게 느낄 수 있다. ‘태조 어진’에서는 수염에 흰색과 검은색을 교대로 그려 마치 붙여놓은 것같이 뻣뻣하고 부자연스럽다. 반면 ‘영조 어진’에서는 수염들이 한 올 한 올 자연스럽게 흘러내려 마치 살아 있는 사람의 얼굴을 보는 듯하다.
▲ ‘태조 어진’ 세부
초상화로 남은 왕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물의 외형을 그리면서 ‘포토샵’을 한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요즘 같으면 사진 찍을 때 얼굴에 난 검버섯이나 기미, 주름살 같은 것을 포토샵으로 처리해 ‘뽀샤시’하게 눈속임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태조 어진’에서는 정반대다. 이마 위의 반점까지 세밀하게 그려 넣었다. 피부과 의사인 이성낙은 조선시대 초상화를 보고 피부 질병을 진단한 박사논문을 쓴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다. 그는 ‘조선시대 초상화에 나타난 피부 병변 연구’(2014)에서 ‘태조 어진’을 보고 “오른쪽 눈썹 위에 지름 0.7~0.8㎝ 크기의 작은 혹 모반인 모반세포가 있다”고 서술했다. 굳이 태조의 얼굴에 이런 반점까지 그려 넣어야 할까. 실제로는 있었더라도 초상화에서는 지워버리고 말끔하게 그릴 수는 없었을까. 그런 생각은 조선시대 초상화에서는 상상조차 불가능했다. 그래서 초상화는 ‘터럭 하나라도 다르게 그리면 그 사람이 아니다’라는 철칙이 기본이었다. 왕의 얼굴이라도 예외는 없었다. 그 덕분에 우리는 태조의 실물을 가감 없이 마주할 수 있다.
‘태조 어진’ 속의 이성계를 보면 상당히 체구가 크고 카리스마가 넘친다. 정면상에서 오는 효과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 이성계는 풍채가 좋고 무술 실력이 뛰어났다고 전해진다. 정몽주가 이성계의 초상화를 보고 지은 찬문에 의하면 “풍채가 호걸스러운데 봉우리 같은 콧날이여. 지략은 깊고 커서 제갈량 같은 용이로다”라고 평가할 정도였다. 사람을 처음 볼 때 몸체가 크면 일단 기선을 제압하는 효과가 있다. 하물며 한 집안의 시조이자 한 나라의 태조가 몸집이 왜소했더라면 모양새가 빠진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데 다행히도 태조는 집안을 벗어나 나라를 세운 것도 모자라 외모까지 받쳐 주지 않은가. 이씨 집안의 자손들인 조선의 왕들은 시조이자 태조인 이성계가 자랑스러웠을 것이다. 꼭 정치적 이유 때문만이 아니라도 자신들이 어려움에 봉착할 때마다 시조의 초상화 앞에 가서 빌었을 것이다. 부디 이 자손을 잘 돌봐주십사, 하고 말이다.
조선시대에는 태조부터 순종까지 왕의 초상화를 그린 어진을 수없이 많이 제작해 진전(眞殿)에 모셨다. 종묘가 국왕의 신주를 모신 제사공간이라면 진전은 어진을 모신 제사공간이다. 왕실에서는 진전에서 1년에도 여러 차례 제사를 지냈다. 제사는 자손이 조상을 잊지 않는 효의 실천임과 동시에 왕실의 번영을 꾀한다는 상징적 의미의 실천이었다. 그중에서도 조선 왕조를 개창한 태조 이성계의 어진은 압도적으로 많이 제작되었다.
▲ 조석진 외. ‘영조 어진’. 1900년 이모. 견본채색. 110×68㎝. / 국립고궁박물관
태조 이성계의 초상화를 많이 그린 이유
‘명종실록’에 의하면 태조 어진이 1548년에 26점이나 제작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성계가 단지 이씨 집안의 시조가 아니라 조선 전체의 왕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정책이었을 것이다. 다른 왕들의 어진은 대부분 서울의 문소전에만 봉안되었다. 그러나 태조의 어진은 문소전을 비롯해 경주의 집경전, 개성의 목청전, 평양의 영숭전, 전주의 경기전, 영흥의 준원전 등 여섯 곳에 봉안하였다. 전 국토에 태조의 위엄이 미치고 있음을 드러내고자 한 의도였다. 그러나 현재는 전주의 경기전에 있는 ‘태조 어진’만이 전해질 뿐이다.
‘태조 어진’은 1872년에 제작된 이모본(移模本)이다. 이모본은 원본을 보고 옮겨 그린 그림이다. 원본은 1410년에 제작되었다. 그림을 그린 화가는 박기준(朴基駿), 조중묵(趙重默), 백은배(白殷培) 등 8인이었다. 이 중 조중묵을 제외한 나머지 화가들은 당대 최고의 궁중화가였다. 이모본을 제작하게 된 배경은 경기전에 봉안된 ‘태조 어진’이 너무 낡아 새로 제작하기로 결정했다. 시작은 4월 7일부터 초본을 내고 한 달 정도의 작업 끝에 완성되었다. ‘태조 어진’이 1872년에 제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영조 어진’과 같은 자연스러움이 결여된 데는 이유가 있다. 이모할 때는 최대한 원본에 충실하게 그려야 한다. 즉 작업할 때 원본에 대고 유지(油紙)로 초본을 뜨기 때문에 이모본에서 주인공의 모습이 변할 수 없다. 따라서 비록 제작 연대는 1872년이지만 ‘태조 어진’은 1410년에 그려진 원본을 거의 그대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초상화나 사진이나 그것을 제작할 당시의 원형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동네 골목대장이 아니다
청와대 세종실에는 박근혜 대통령에 이어 문재인 대통령과 윤석열 대통령의 초상화가 올라갈 것이다. 한 조직의 수장을 초상화로 남기는 전통은 그 조직의 역사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조직도 조직 나름이다. 대통령은 한 조직의 수장이 아니라 나라를 대표하는 사람이다. 그 나라 안에는 좌파도 있고 우파도 있고 중도파도 있다. 그 모든 사람들을 정파에 상관없이 나라의 구성원으로 생각해야 대통령의 자격이 있다. 부디 이번 20대 대통령은 스스로의 지위를 동네 골목대장으로 떨어뜨리지 말고 전 국민을 대표하는 큰 조직의 우두머리가 되기를 바란다. 이제 다시는 갈라치기, 내로남불, 제 식구 감싸기 등으로 동네 골목대장만도 못하다는 비판을 받는 그런 대통령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래서 임기가 끝나고 초상화가 걸릴 때쯤이면 많은 사람들이 그리워하는 진정한 리더가 되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조정육 / 미술평론가
출처 : 주간조선(http://weekly.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