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2FM 라디오 전영혁의 음악세계
퇴근하여 현관문을 열자마자 거실 한쪽에 놓인 소포에 눈길이 쏠렸습니다. 무슨 소포일까. 잔뜩 궁금해진 눈길로 다가갔더니 소포는 이미 뜯겨져 있었고 그 안에 시집 몇 권이 차곡차곡 들어 있었습니다.
드디어 왔구나. 몇 날 며칠 기다리던 시집이 드디어 도착했구나. 시집을 잡는 순간 말할 수 없는 희열이 벅차올랐습니다. 비록 여러 시인들의 시가 가득 실려 있는 공저시집이었지만 내 개인시집만큼이나 반가웠습니다. 더구나 시집이 깔끔하게 제작된 탓에 기분은 날아갈 듯했습니다.
딱딱한 시집표지를 반질반질한 종이로 덮어씌운 화려한 장정에는 붓으로 덧칠한 듯한 그림 한 폭이 낙관처럼 꼭 찍혀있었습니다. 눈시린 하늘과 맞닿아 있는 확 트인 길을 배경으로 붉은 꽃술을 늘어뜨리고 있는 꽃줄기 하나, 그 길을 밟으며 신발에 연기가 날 듯 뛰어가는 아이, 금방이라도 소리를 내지를 것 같은 아이의 마음속은 벌써 6월의 햇살에 젖어있는 듯했습니다. 그 그림의 위쪽에 반짝 빛나는 시집의 제목 <전영혁의 시가 있는 음악세계>. 참 특이했습니다.
6월의 산천을 흠뻑 적신 싱그러운 녹음의 향기가 은은한 음악과 함께 확 풍겨올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나는 마음 속 깊이 가라앉는 음악을 들으며 천천히 책장을 넘겼습니다.
그 속에 6월의 녹음 같은 싱그러운 시들이 가득 들어차 있었습니다.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시인들의 시들, 저 싱싱한 시들, 물안개 가득 차오르고 맑은 햇살에 마구 뒹군 것 같은 조약돌 같은 시들 속에 나의 시 한 편도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산속도 오래되면 등뼈가 휘어지는 법이다
산등성이마다 튀어나온 굵은 바위들이
봄날이면 몸살나게 뒤척인다
산등성이 곳곳에 박힌 굵은 뿌리들
홍역처럼 꽃망울 앓아 피우고
고사목으로 굳어진 나무, 등뼈처럼 허리가 휜다
이 깊은 산속에도 진달래는 지천인데
그 꽃향기 아랫마을 내려가지 못해
산속에만 꽃내음이 가득 찬다
진달래 뿌리는 엉기고 엉겨 그 속에서 잔뿌리가 나고
꽃들도 지치고 지쳐 여린 꽃잎 다시 지는데
아무도 없는 이 산속 진달래는 왜 피는가
보아줄 이도 없는데 연지곤지 예쁘게 단장하고
분홍색 색동저고리로 손짓하지만
나는 잘 안다, 새들이 수시로 들락이는 저 산속
낙타처럼 누워있는 산등성이로 와서
우리들이 알 수 없는 언어로 몇 마디 지껄이고 가면
진달래는 더 붉어 홍당무가 되고
부끄러워 속옷 간신히 숨기는 저 자태
분명히 누군가 온다는 소식이다
- 새들도 언어로 소식을 전한다
이 시가 실린 사실만으로도 가슴이 달아올랐습니다. 다른 시인들의 시에 흠뻑 젖어 사각사각 책장을 넘길 때 문득 석달전의 일이 떠올랐습니다.
저녁 회식자리에서 걸판지게 들어마신 술로 잔뜩 취기가 올라있을 때 휴대폰이 울렸습니다.
“유진택 선생님이시죠.”
“그런데요”
“여기는 KBS 2FM 라디오 전영혁의 음악세계입니다. 이번에 저희가 2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시집을 엮는데 그 시집 속에 선생님 시 한 편을 넣게 되었습니다. 자세한 말씀은 이메일로 보내드릴테니 저작권법에 위배되지 않게 허락한다는 사인 좀 부탁드립니다.”
마지막에 이름을 밝힌 아주 맑고 고운 여자의 목소리가 끊긴 후에야 난 정신을 되찾았습니다. 한껏 달아오른 취기도 달아나는가 싶더니 마음은 말할 수 없는 감동으로 물결쳤습니다.
<전영혁의 음악세계>, KBS 2FM 라디오 방송, 그리고 내 시 한편, 며칠 후에 도착한 이메일을 열어 보고난 후 난 내 시가 어떻게 실렸는지 그 사연을 알게 되었습니다.
KBS 2FM 라디오 방송에 <전영혁의 음악세계>라는 프로가 있었습니다. 밤이 이슥한 심야시간대(새벽 2시-3시)에 음악을 틀어주는 관계로 잠이 많은 사람들은 전혀 몰랐습니다. 더구나 라디오 방송이라 라디오를 즐겨듣지 않는 사람들은 그 프로의 존재조차 알지 못했습니다. 나 역시 그랬습니다.
그러나 그런 시간대에도 방송을 즐겨듣는 청취자들이 많은 것 같았습니다. 낮보다 밤의 분위기를 더 잘 타는 사람들, 보나마나 그들은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이 늘 끓어 넘치는 분들 같았습니다. 만물이 다 잠든 밤, 쥐 죽은 듯이 고요한 어둠을 쓸어않고 은은한 음악 한 편에도 눈물짓는 사람들, 반짝이는 별들을 제 가슴 속에 왕창 집어넣고 동이 튼 후에야 달콤한 잠에 빠지는 사람들 같았습니다.
그런 사람들한테 매일 밤 시 한 편씩을 들려주니 감정이 사무치는 것은 뻔한 노릇이었습니다. 음악방송이 시작된 86년 4월부터 20년 동안 주옥같은 시를 매일 밤 한 편씩을 낭송해주었으니 방송된 시의 분량만 해도 자그마치 7000여 편에 이른다고 했습니다.
그 시간에 나의 시 몇 편도 낭송되는 행운을 얻었습니다. 두 번째 시집인 <아직도 낮선 길가에 서성이다>(문학과 지성사) 속에 잠자고 있던 몇 편의 시들이 내가 세상모르고 잠든 시간에 전파를 탄 모양이었습니다. 그렇게 전파를 탄 시들 중에 애청자들의 마음을 애틋하게 사로잡은 시 한 편이 이번에 묶여 나온 시집 속에 선정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이 시집은 아주 특별한 의미로 다가왔습니다. 안 그래도 시집이 읽혀지지 않는다고 하는 세월에 방송으로 흘러나간 시들을 한데 모아 한 권의 시집으로 묶었다는 사실은 아직도 시가 살아 있다는 상징성을 충분히 보여주었습니다.
난 이 시집을 받고 나서 희망을 가졌습니다. 한 달에도 숨 쉴 틈 없이 쏟아져 나오는 시집들 앞에 주눅들 법도 했지만 그래도 알게 모르게 감동을 받는 독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작년에도 그랬습니다. 어느 날 잘 알고 지내는 형님 집에 놀러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그 형님이 보험설계사에게 받았다며 멋지게 복사된 종이 한 장을 내밀었습니다.
바로 내 시였습니다. 모 잡지에 실린 나의 시를 복사해 보험설계사가 고객 관리 차원에서 나눠주는 것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언뜻 생각해도 시는 돌고 돌았습니다. 진한 향기를 묻힌 시들이 아득한 길을 흘러와 다른 사람들의 마음 속으로 스며들었습니다.
시집이 한 군데 꽂혀 먼지만 쌓여가는 것 같아도 그 속에 들어 있는 시들은 은은한 꽃향기가 되어 밖으로 흘러넘쳤습니다. 전영혁의 음악세계에서 묶여나온 시집 역시 똑 같았습니다. 이 시집 속에 실린 수십편의 시들이 오랜 세월 방송으로 흘러 퍼진 시들이었다니 누군가의 가슴을 흔들어주고 눈물 짓게도 했을 것 같았습니다.
아득히 무너져 내리는 어둠 앞에서 희망을 가진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초롱초롱한 별빛을 타고 밤하늘을 나르며 하룻밤만이라도 별이 되어보는 상상도 했을 것입니다. 나도 시집 속의 시들을 읽으며 꿈 많은 독자가 되어보았습니다. 금방 받은 시집이라 책장을 넘길 때마다 싱싱한 감촉이 묻어났습니다.
어떤 시들은 성성하게 별빛 향기가 서려 있었고, 어떤 시들은 어둠 속으로 흘러내리는 따스한 눈물이 되어 내 가슴을 적셔주었습니다. 오늘 밤은 또 누구의 시가 별빛 물든 어둠을 타고 애청자들의 가슴을 적실까요. 괜히 궁금했습니다. 밀려드는 잠도 뿌리치고 한 번이라도 그 방송을 들어봐야겠습니다.
언젠가 내 시가 울려 퍼졌던 그 방송을 들으며 감미로운 시들을 별빛 총총한 밤하늘로 던져 올리겠습니다. 시집의 표사를 쓴 박남준 시인처럼 “상처와 슬픔이 가득한 그리하여 위안이 되어주던 음악을, 일그러지고 비틀어진 영혼의 절규를, 어둠속에 던져지는 햇살의 불기둥 같은 노래를”깊은 밤 라디오에 귀를 기울이며 듣고 싶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