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맘의 강물, 예천의 내성천 이야기
박천익/대구대 명예교수
내성천은 필자가 어린 시절 물놀이를 하며 동심을 키우던 강이다. 그곳 백사장에서 친구들과 씨름도 하고 술래잡기도 하며, 더워지면 강물에 뛰어들어 헤엄을 배우던 곳이다. 강과 함께 성장한 어린 시절의 꿈이 자라던 곳, 그래서 내성천은 내 맘의 강이 되었다. 그곳에서 수 세월 익힌 수영 솜씨는 훗날 물에 빠진 동료 교사의 생명을 구하는 귀한 일을 할 수 있게 했다.
필자는 대학으로 직장을 옮기기 전 잠시 대구의 K 고교에서 교사로 근무했었다. 고 3 담임을 했던 1977년 여름, 학교는 여름방학을 시작했다. 한 학기를 마친 교사들은 팔공산 동화천 계곡으로 종강 파티를 열기로 했다. 먹거리를 준비해서 팔공산 동화천 계곡을 가던 중, 호수나 다름없는 동화천을 수영해서 건너기로 했다. 수영에 자신이 없는 교사들은 먼 길을 돌아서 오기로 하고 수영에 자신이 있었던 교사들은 모두 동화천을 헤엄쳐서 건넜다.
내 곁에 수영을 하며 따라오던 2학년 담임 L 교사는 키가 크고, 외모도 준수했고, 필자보다 한 살 위의 해군 출신이었다. 테니스, 배구, 스케이트 등 만능 스포츠맨이던 경북대 출신 L 교사는 “난 수영을 잘 못 하는데~” 하며 내 뒤를 따라 헤엄을 치기 시작했다. 해군 출신에다 만능 스포츠맨이던 그가 수영을 못한다는 말은 겸양의 말씀일 뿐이라고 생각하며, 우리는 모두 유유히 동화천을 헤엄쳐 갔다. 모두가 큰 저수지 같은 동화천을 건넌 후 강을 내려다보니, 해군 출신 L 교사가 강을 건너오지 못하고 강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모두 큰일 났다고 생각하며, 백방으로 L 교사를 구할 방도를 찾았으나, 뾰족한 수가 없었다. 끈이나 로프도 없고, 산골이라 전화기도 없어 당시에는 휴대폰이 없던 시대이니 모두가 발만 동동 구르고 있을 뿐이었다. 순간 필자의 머릿속에는 내일 지방신문에 “대구의 K 고교 L 교사 동화천에서 익사하다”라는 기사가 나올 것을 떠올렸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필자는 순식간에 그를 구하고자 강물에 뛰어들었다. 모두가 놀라서 소리쳤지만, 이미 일은 저질러졌고, L 교사 구하기 생사의 일촉즉발 드라마가 시작되었다.
어린 시절 내성천 강물에 빠진 동네 아이를 구한 경험이 있는 필자는 붙으면 둘 다 죽는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헤엄을 치며 근거리에서 L 교사의 몸을 발로 차서 강가로 밀어내었다. 물에서는 사람의 몸이 가벼운지라 대여섯 번 발로 차며, 강가로 밀어내었더니 L 교사는 강가의 큰 바위 위에 덜컥 걸렸다.
동화천 칼바위에 필자의 발가락이 찢어져 피가 철철 흐르는 줄도 몰랐고, 찢어진 발이 아픈 줄도 전혀 몰랐다. L 교사 구하기 대구출작전에 혼이 빠진 우리 일행은 드라마 같은 위기상황을 극복하고 무사히 종강 파티를 할 수 있었다. 젊은 날의 그 일은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뛰는 추억이다. 첫 직장인 대구의 K고교 교사로 3년 반 근무했던 기간 중 가장 잊을 수 없었던 기억이며, 내 삶에 내성천이 더욱 깊이 자리하게 하는 뜨거운 사건이었다.
지금은 대구 최고의 입시 명문고교가 된 수성구의 K 고교 앞을 지날 때면, 그때의 일이 생생하게 떠오르곤 한다. 그 아슬아슬했던 동화천의 여름 이야기는 내성천에 대한 내 마음을 한층 더 새기게 하고 있다. 나에게 물을 겁내지 않게 하여, 귀한 생명을 구할 수 있는 기회를 준 내성천이 감사하고, 영원한 내 맘의 강이 되게 했다.
내성천은 봉화군 물야면 오전리 선달산(1,236m)에서 발원하여 영주시, 예천군을 거처 문경시 영순면 달지리에서 낙동강과 합류한다. 내성천은 낙동강 지류의 하나로 본강의 길이가 110.69㎞이다. 내성천의 명칭은 내성면(현재의 봉화군 봉화읍)을 거치면서 이름이 지어졌다. 강폭이 넓고 강속이 유유하여 경북 북부지역 사람들에게는 오랜 세월 정서의 강으로 남아 있다.
내성천 활주 사면에 위치한 무섬마을은 광활한 모래톱을 지닌 동네로 강변이 아름답고 역사적 가치가 있어, 민속 마을로 지정되었다. 나라의 지원으로 고택과 마을이 잘 관리 보존되고 있으며, 지금은 전국각지에서 문화체험 장소로 사랑을 받는다. 조선 시대인 1666년 필자의 선대 어른 박 수(朴燧)가 병자호란 후 출사를 포기하고 선비정신으로 은둔하며, 그곳에서 집성촌을 이루었고, 후일 박수의 증손녀와 결혼한 김 대(金臺)(선성 김씨)가 들어와 삶으로써 박(朴)·김(金) 집성촌이 되었다.
필자는 반남 박(潘南 朴) 씨 28대인데 19대조(祖)가 무섬에서 예천군 보문면 간방리 내성천 강변이 아름다운 곳에 이주 정착함으로써 간방리(澗芳里)는 반남 박씨 집성촌이 되었다. 필자 고향 간방1리(일방)는 옛날에는 내성천 백사장이 한 바다처럼 넓었으나, 지금은 모래사장도 현저히 줄고, 강섶 상당 부분에 수양버들이 들어차고, 쑥부쟁이, 달개비, 수갈대 등 잡풀이 무성하게 덮어 세월의 무상을 절감케 하고 있다.
그 옛날 오랜 세월 1급수에만 사는 보호 어류였던 흰수자마도 이제는 살지 않고, 강물에 서식하는 수종도 변하고 있다고 한다. 필자가 어린 시절 숱하게 잡아 올리던 잉어, 메기, 모래무지, 뱀장어 등 명품 물고기들은 간데없고, 새로운 이름 모를 잡종 어류들이 강의 주인이 되고 있다니 인생무상과 세월 무정이 절절하다.
고교시절에는 눈내린 내성천 백사장을 걸으며, 마인강 기슭을 노래하던 독일의 요한 볼프강 괴테와 영국의 절름발이 시인 바이런의 시(詩)를 좋아했던 필자가, 경제학자로 일생을 보냈으니 지금 생각하면 인생은 알 수 없는 아이러니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현재는 내성천 동쪽 산등성이를 타고 아담한 한맥 노블리아 골프장이 만들어져 있어, 가끔 친구들이나 동료 교수들과 고향의 포근함을 새기는 골프를 즐기러 가기도 한다.
골프장 부근의 ‘김실네 청국장’ 식당은 필자의 초등학교 후배가 운영하고 있는데, 청국장이 맛있어 고향에 들를 때는 가끔 찾는다. 또한, 예천읍에는 한우 육회와 쇠고기 불고기가 명품식사로 이름 나 있어 더러는 예천읍에 들러 한우 식사를 즐기기도 한다.
인근의 보문사 절은 신라 시대 때 지은 작지만 천년 고찰이다. 고려 때 불교 정풍운동의 선구승 지눌 스님이 기거하던 곳이다. 그는 영천 거조암(사)에서 고려 불교의 정해결사(定解結社)를 시작했던 명승이었다. 정해결사란 불교계의 일대 혁신 운동으로 미혹한 중생도 마음을 바로 닦으면 부처가 될 수 있으며, 그러기 위해서는 선정(禪定)과 지혜를 함께 닦아야 한다는 정혜쌍수(定慧雙修)를 제창한 것이다. 예천 보문사는 고승이 수도하던 내공이 서린 사찰이다. 조용하고 아담한 이 사찰은 천년이 넘는 역사를 말하듯 절 분위기가 작지만, 품위 있고 정결하다.
내성천은 예천의 말미에 이르러 용궁 ‘회룡포’라는 신비의 강섬을 만든다. 회룡포는 내성천이 350도(度)로 강물이 돌아서 가기 때문에 생긴 육지의 섬이다. 예천군으로부터 약 17㎞ 떨어진 회룡포는 문경시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회룡포 전망대는 회룡포를 가장 완전하게 볼 수 있는 고지에 위치한다. 시원한 솔바람을 맞으며 내려다보는 전경은 마치 전설의 동네를 보는 듯도 하다.
아늑한 섬동네를 가려면 뿅뿅다리를 건너야 한다. 뿅뿅다리는 임시로 만든 철판 다리인데 두 사람이 함께 지나가면, 어깨가 부딪힐 정도로 좁은 다리이다. 예천군의 설명에 의하면 옛날의 나무다리를 고쳐 건설하면서 구멍 난 철재 다리를 놓았는데, 사람들이 걸으면 밑에서 물이 뿅뿅 솟아난다고 해서 뿅뿅다리라고 했다고 한다. 동네의 북쪽과 남쪽에 두 개의 다리가 있다. 내성천은 이렇게 흘러 문경 영순면 달지리를 지나면 낙동강과 합류한다.
고향은 누구에게나 영원한 삶의 향수이지만, 세월이 갈수록 들릴 시간이 줄어드는 것 같다. 세월 따라 고향의 친구들도 줄어들고, 있는 몇 안 되는 친구들마저도 늙어 가는 현실이 가는 세월과 함께 씁쓸하게 느껴진다. 그렇지만 어린 시절의 아름다운 추억으로 가득한 내성천은 예나 지금이나 영원한 내 맘의 강물이다.
첫댓글 醴泉의 어원은 중국에서 나라가 태평할 때 단물이 솟는다는 샘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천은 조선의 유명한 풍수학자인 격암 남사고(1509~1576)가 전쟁과 난리 등을 피할수 있는 이른바 십승지(十勝地)중 한곳으로 예천군 용문면을 지명한 곳인데 이번 수해로 큰 피해를 입어서 더욱 안타깝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