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고(古)의 서술(述)
중경(仲景)이 이르기를 "복만(腹滿)하여 불감(不減)하고, 감(減)하여도 말하기에는 부족(不足)하면 당연히 하(下)하여야 한다. 복만(腹滿)하고 시(時)로 감(減)하여도 다시 여고(如故)하면 이는 한(寒)이니 당연히 온약(溫藥)을 투여(與)하여야 한다." 하였다.
화원화(華元化)가 이르기를 "사람의 백병(百病) 중에서 치료(:療)하기 어려운 중에는 수(水)보다 출(出)한 것은 없다(: 수가 가장 어렵다). 수(水)는 신(腎)이 제(制)한다. 신(腎)은 사람의 본(本)이다. 신기(腎氣)가 장(壯)하면 수(水)가 신(腎)으로 환(還)하지만 신기(腎氣)가 허(虛)하면 수(水)가 피(皮)로 산(散)한다. 또 삼초(三焦)의 옹색(壅塞)으로 영위(營衛)가 폐격(閉格)하면 혈기(血氣)가 따르지 않고 허실(虛實)이 교변(交變)하게 되니, 수(水)가 기(氣)를 따라 유(流)하므로 수병(水病)이 된다." 하였다.
단계(丹溪)가 이르기를 "수종(水腫)의 맥(脈)은 침(沈)이 많다. 병(病)으로 양수(陽水)가 되어 양증(陽證)을 겸하면 맥(脈)은 반드시 침삭(沈數)하다. 병(病)으로 음수(陰水)가 되어 음증(陰證)을 겸하면 맥(脈)은 반드시 침지(沈遲)하다.
만약 편신(遍身)이 종(腫)하고 번갈(煩渴)하며 소변(小便)이 적삽(赤澁)하고 대변(大便)이 폐결(閉結)하면 이는 양수(陽水)에 속(屬)하니, 선(先)으로 오피산(五皮散)이나 사마음(四磨飮)에다 마(磨)한 생지각(生枳殼)을 첨가(:添)한 것으로 하고, 중(重)하면 소착음(疏鑿飮)으로 한다. 만약 편신(遍身)이 종(腫)하고 번갈(煩渴)하지 않으며 대변(大便)이 당(溏)하고 소변(小便)이 소(少)하지만 삽적(澁赤)하지 않으면 이는 음수(陰水)에 속(屬)하니, 마땅히 실비산(實脾散)이나 유기음(流氣飮)으로 주(主)하여야 한다." 하였다.
서동고(徐東皐)가 이르기를 "경(經)에 이르기를 '장(臟)이 한(寒)하면 만병(滿病)이 생(生)한다.'고 하였다. 맥경([脈經])에 이르기를 '위중(胃中)이 한(寒)하면 창만(脹滿)한다.'고 하였다. 비(脾)는 음(陰) 중의 지음(至陰)이다. 따라서 경(經)에 이르기를 '태음(太陰)이 지(至)하면 축만(蓄滿)이 된다.'고 하였다.
대체로 비습(脾濕)이 유여(有餘)하면서 양(陽)이 없어서 시화(施化)할 수 없으면 마치 토(土)에 오랫동안의 우수(雨水)가 내리면 니(泥)가 되는 것과 같으니, 어찌 만물(萬物)을 생화(生化)할 수 있겠는가? 반드시 화풍(和風)과 난일(暖日)을 기다리고 습(濕)이 거(去)하고 양(陽)이 생(生)하여야 자연(自然)스럽게 생장(生長)한다. 따라서 마땅히 신열(辛熱)한 약(藥)으로 치(治)하여야 한다." 하였다.
또 이르기를 "경(經)에서 이르기를 '하(下)하면 창(脹)이 낫는다(:已).' 하였다. 이는 습열(濕熱) 음식(飮食)이 유여(有餘)하면서 비위(脾胃)가 충실(充實)한 경우를 말한다. 상한(傷寒)에서 사기(邪)가 리(裏)로 들어가 복만(腹滿) 견실(堅實)하고 대변(大便)이 비(秘)하면서 불리(不利)한 것을 치(治)할 경우 중경(仲景)은 마땅히 삼승기탕(三承氣湯)으로 하(下)하였으니, 이것은 가능(:可)하다.
만약 비허(脾虛) 내한(內寒)으로 인한 부족(不足)으로 기(氣)가 정미(精微)를 운화(運化)할 수 없어서 복만(腹滿)이 되었으면 마땅히 감온(甘溫)으로 보비(補脾)하는 것을 위주로 하여야 하고 신열(辛熱)을 조금 좌(佐)하여 옹체(壅滯)된 기(氣)를 행(行)하게 하여야 하니, 비토(脾土)가 왕건(旺健)하게 되면 창만(脹滿)이 운행(運行)하면서 나을 수 있다. 곧 경(經)에서 말한 색인색용(塞因塞用)의 종치(從治)하는 법(法)이다.
의(醫)하는 자들이 이를 살피지 않고 오직 '하(下)하여야 창(脹)이 낫는다(:已).'는 것을 고집(:執)하면서 급히 효(效)를 얻으려고(:獲) 한다. 병(病)하는 자들도 창만(脹滿)이 괴로워(:苦) 이(利)하는 약(藥)을 행(行)하여 통쾌(通快)하기를 구하려고 한다. 일시(一時)에 잠시 쾌(快)하면 진기(眞氣)가 더욱 상(傷)하고 복창(腹脹)이 더욱 심(甚)하여지니, 죽음(:去死)가 멀지 않는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속(俗)에서 말하는 '기(氣)에는 보법(補法)이 없다.' 는 것은 비색(痞塞)에 보(補)하기가 어려운 것 같아 보이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정기(正氣)가 허(虛)하여 운행(運行)할 수 없으므로 병(病)이 되었다는 것은 생각지도 못하는 것이다. 경(經)에서 말한 '장(壯)하면 기(氣)를 행(行)하면 낫는다.'는 경우가 이것이다." 하였다.
또 이르기를 "수종(水腫)은 본래 비허(脾虛)로 인하여 수(水)를 제(制)할 수 없으므로 수(水)가 지(漬)하여 함부로 행(行)하기 때문이다. 당연히 인삼(人蔘) 백출(白朮)로 보비(補脾)하니여야 하니, 비기(脾氣)가 실(實)하게 되면 저절로 건운(健運)하여 수(水)가 스스로 행(行)한다. 대체로 단지 보중(補中) 행습(行濕) 이소변(利小便)하여야 마땅하고, 절대 하(下)하면 안 된다. 단지 이진탕(二陳湯)에 인삼(人蔘) 창출(蒼朮) 백출(白朮)을 가한 것을 위주로 하고, 혹은 황금(黃芩) 맥문동(麥門冬) 초치자(炒梔子)를 좌(佐)하여 간목(肝木)을 제(制)하여야 한다. 만약 복창(腹脹)하면 후박(厚朴)을 소(少)하게 좌(佐)하고, 기(氣)가 불운(不運)하면 목향(木香) 목통(木通)을 가하여야 하며, 기(氣)가 함하(陷下)한 것 같으면 승마(升麻) 시호(柴胡)를 가하여 제(提)하여야 한다. 반드시 보중(補中) 행습(行濕)하면서 승제(升提)하는 약(藥)을 가하여야 대변(大便)이 윤(潤)하고 소변(小便)이 장(長)하게 된다." 하였다.
또 이르기를 "제가(諸家)들은 수종(水腫)을 치(治)할 때 단지 도습(導濕) 이소변(利小便)할 줄만 알고 이 일도(一途)에만 고집(:熱)하니, 여러 거수(去水)하는 약(藥)을 써서 왕왕(往往) 많이 죽게 된다. 또 도수환(導水丸) 주거환(舟車丸) 신우환(神祐丸)의 류(類)를 써서 대하(大下)하게 하니, 이들은 죽음을 재촉(:速)하는 징조들(:兆)이다.
비기(脾氣)가 극(極)히 허(虛)하여 종(腫)하면 이를 하(下)할수록 더 허(虛)하여지니, 비록 목전(目前)의 쾌(快)를 위해 겁(劫)하지만 암암리에(:陰) 정기(正氣)를 손(損)하니 화(禍)를 돌이킬(:旋踵 발길을 돌리다) 수 없다. 대법(大法)은 오로지 중궁(中宮)의 보(補)를 위주로 하고, 협(挾)한 바를 보고서 가감(加減)하여야 하니, 그렇지 않으면 죽게 된다. 당연히 엄씨실비산(嚴氏實脾散)에 가감(加減)하여야 한다.
요(要)는 종치(從治)인 색인색용(塞因塞用)의 이치(理)를 아는 것이니, 그 연후에 수종(水腫)의 치(治)를 말할 수 있을 뿐이다." 하였다.
손일규(孫一奎)가 이르기를 "내가 오하(吳下: 강소성 소주시)에 있을 때 휘(諱: 죽은 사람 이름)가 진(震)인 오씨(吳氏)가 있었으니, 고상(:博雅)한 선비(:士)이었다.
하루는 우연히 고창(蠱脹)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오씨(吳氏)가 나에게 따져 묻기로 '고(鼓)에는 충(蟲)이 있는가? 없는가?' 하였다.
내가 갑작스러워 선뜻 대응(:應)하지 못하다가 오래도록 골똘히 생각하고는 대답(:對)하며 이르기를 '혹 있을 수 있다. 본사방([本事方])에서는 '제복(臍腹) 사지(四肢)가 모두 종(腫)하면 수(水)이다. 단지 복(腹)은 창(脹)하면서 사지(四肢)가 종(腫)하지 않으면 고(蠱)이다.' 하였다. 거기에 주(注)하면서 '고(蠱)는 곧 고창(蠱脹)이다.' 하였다. 이를 참고(參)하건대 고인(古人)들에게는 일찍이 고(蠱)와 고(鼓)가 동명(同名)이었다. 또 고(蠱)라는 글자에는 세 마리의 충(虫)이 머리에 있으니, 어찌 어떤 의미(:旨)가 없겠는가? 내가 말하는 고창(鼓脹)은 곧 요즘 말하는 기허(氣虛)의 중만(中滿)이니, 그 외(外)는 견(堅)하고 중(中)은 공(空)하여 마치 고(鼓)과 비슷하므로 명(名)한 것이다. 그들이 말하는 고증(蠱證)은 중(中)이 실(實)하고 물(物)이 있어 적취(積聚)가 이미 오래된 것이므로, 이치(理)로는 혹 있을 수 있다.' 하였다.
이에 오씨(吳氏)가 이르기를 '그대는 진실로 총민(:敏)하도다! 내 사촌 형수가 고병(鼓病)을 3년이나 앓았는데, 복(腹)이 대(大)하여 마치 키(:箕)와 같고 때로 창통(脹痛)하며 사지(四肢)가 수삭(瘦削)하였다. 삼오(三吳)의 이름난 방제(劑)를 두루 복용(:嘗)하여도 낫지 않았다. 오(吳)의 세속(俗) 풍습에는 죽으면 대부분 화장(火葬)을 하였는데, 이에 복(腹)이 소(燒)할 때 갑자기 포(炮)와 같은 소리가 울렸으니(:響聲), 사람들이 모두 놀랐다. 이에 보니, 충(蟲)이 복중(腹中)에서 터져 나왔으니(:爆出) 그 높이(:高)가 2~3장(丈) 정도이었고 소(燒)한 곳의 하늘(:天)이 어둡게(:昏) 되었다. 갑자기 땅(:地)에 떨어진(:墜) 것이 있었으니 자세히 보니 모두 회충(:蛔)이었다. 적어도 천에서 만 마리 정도가 되었는데, 그 장(長)은 1척 정도이었다. 충(蟲)의 복(腹) 속에 다시 작은 충(蟲)이 살고 있었으니 많으면 15~16조(條)이거나 10조(條)이거나 혹 5~6조(條)이었다. 충(蟲)이 사람의 복중(腹中)에서 이와 같이 번식(蕃息)하였으니, 어찌 사람이 창(脹)하여 죽지 않을 수 있겠는가? 참으로 애석(惜)하도다! 여러 서(書)에는 언급(言及)조차 하지 않았었다.' 하였다.
내가 이를 듣고는 미묘(:恍然)하여 마치 꿈에서 막 깨어난 듯하였다. 그러나 그 기이(:異)함을 직접 보지는 못하였다.
그런데 1593년(:歲萬曆 癸巳年)에 회음(淮陰)에 갔을 때 향관(鄕官)인 왕씨(王氏)의 아들을 보았다. 16살에 결혼한 후 복(腹)이 창대(脹大)하고 안(按)하면 괴(塊)가 있었으며 형(形)이 작은 과(瓜)와 같았고 사지(四肢)가 수삭(瘦削)하며 발열(發熱)하여 주야(晝夜)로 불퇴(不退)하였으니, 이미 반년(半年)이 되었다. 의사들(:醫)이 오직 퇴열(退熱) 소창(消脹)하는 제(劑)를 투(投)하였으나 그 창(脹)이 더 심(甚)하게 되었고 그 열(熱)이 더 치(熾)하게 되었으며, 후중(喉中)과 양쪽 귀(:耳)가 모두 창(瘡)하였다.
내가 진(診)하여 보니 맥(脈)이 활삭(滑數)하였고 그 순(脣)을 보니 홍(紅)하였으며 그 복(腹)은 동(疼)하였고 또 비감(肥甘)한 것을 많이 기(嗜)하였다.
내가 '여러 복통(腹痛)은 순(脣)의 색(色)이 반드시 담(淡)하고 음식(飮食)을 기(嗜)하지 않는데, 이와 같다면 충(蟲)이 아닌가?' 라고 생각하였다.
이에 아위적괴환(阿魏積塊丸)을 투여(投)하였다. 복용하고는 과연 충(蟲)을 수십(數十) 마리를 하(下)하였다. 대(大)한 것 2마리에서, 1마리는 홍(紅)하였고 1마리는 흑(黑)하였으니, 장(長)이 1척(尺)여 되었고, 충(蟲)의 몸(:身)에는 홍선(紅線)이 머리에서 꼬리까지 관(貫)하였고 충(蟲)의 복(腹) 속에는 다시 충(蟲)이 있어 대(大)한 것에는 수 조(條), 소(小)한 것에도 3~4조(條)가 있었다. 충(蟲)을 하(下)하니 열(熱)이 점차 감(減)하였고 창(脹)이 점차 소(消)하였으며, 3번 하(下)하니 나았다.
이에 전(前)에 들은 것이 헛말이 아님을 믿게 되었다."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