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01. 21
올해 첫 화두는 ‘사면’이다.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이명박·박근혜 두 전직 대통령의 사면’을 거론한 이후, 정치권은 1월 내내 이 문제로 들썩이고 있다.
사면권은 헌법 제79조에 명시된 대통령의 고유 권한이다. 일반사면의 경우 국회의 동의를 얻어야 하나, 특별사면은 이마저도 필요치 않다. 이에 역대 정부는 정략적인 판단 하에 특별사면을 활용해왔다. 법무부가 정보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1980년 이후 김대중 정부에서 가장 많은 사면이 이뤄졌다. 그리고 김영삼·노무현 정부가 그 뒤를 이었다. 흔히 정치인 사면 시 ‘국민 통합’이, 기업인 사면 시 ‘경제 살리기’가 명분으로 등장했다.
정당화하는 법 조항과 그럴듯한 명분에도 불구, 법적 안정성을 훼손한다는 지적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박광현 광주여대 경찰법학과 교수는 학술지 <법학연구>를 통해 “사면권은 헌법적 관점에서 법치주의(법적 안정성) 훼손, 권력분립원칙과 평등권 위배를, 형사법적 관점에서는 형벌의 목적인 일반예방과 특별예방 측면에서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 역대 정부는 정략적인 판단 하에 특별사면을 활용해왔다. 법무부의 정보 공개 자료를 참고했다. / ⓒ그래픽=시사오늘 박지연 기자
문재인 대통령 역시 사면을 통한 ‘국민 통합’의 필요성에는 동감하면서도, ‘법적 안정성 훼손’에 입장을 더했다. 그는 신년 기자회견에서 “재판 절차가 이제 막 끝났고, 사안의 중대성을 감안해 엄하고 무거운 형벌이 선고됐다”며 “선고되자마자 돌아서서 사면을 말하는 것은, 비록 사면이 대통령의 권한이지만 대통령을 비롯한 정치인들이 말할 수 있는 권리는 없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과연 사면권을 통해 국민 통합을 이룰 수 있을까. 문 대통령의 우려처럼 “사면을 둘러싼 극심한 분열이 있다면, 국민 통합을 해치는 결과”를 가져오진 않을까. 정치적 이유로 법원의 판결을 뒤바꾸는 것은 정당한가. 이는 과도한 권력으로, 제왕적 대통령제를 강화시키는 것은 아닐까. 이러한 질문에 답을 찾기 위해 24년 전 선례를 찾았다.
<시사오늘>은 과거의 인물, 그리고 과거의 사건에 대한 당대 신문들의 평가를 재조명하며, 보수와 진보 언론 양극단의 평가를 비교해왔다. 여기서 ‘어떤 평가가 옳은가’에 대한 가치 판단은 전면 배제한다. 판단은 ‘사상의 자유’를 만끽하면서도, 동시에 ‘과잉 이념’의 시대에 지쳤을 독자들에게 맡길 예정이다. 이번 여덟 번째 ‘옛날신문 보기’는 1997년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의 사면이다.
‘사면’ 카드엔 ‘선거 전략’이 숨어있다?
▲ 이번 여덟 번째 ‘옛날신문 보기’는 1997년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의 사면이다. / ⓒ시사오늘 김유종
임기가 1년이 채 남지 않은 시점, 김영삼 전 대통령(YS)은 사면 카드를 꺼내들었다. ‘국민 대화합’ 차원에서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의 사면을 검토한다고 설명했다.
YS는 사면은 하되, 부정축재에 대한 추징금에 대해서는 반드시 환수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그는 “이미 오래 전부터 전두환·노태우 두 사람을 내 임기를 마치기 전에는 석방할 생각을 갖고 있었다”며 “이들이 부정 축재한 돈은 어디까지나 국민의 돈이었기 때문에 이들을 감옥에서 석방하더라도 부정 축재한 돈은 환수해야 했다(회고록下, 376쪽)”고 회고했다.
긴 시간 군부 독재와 맞서 싸워온 YS는 왜 사면을 주장했을까. ‘역사 바로 세우기’를 통해 두 사람을 구속시킴으로써 평생의 목표를 달성한 것이 아니던가. 왜 차기 대권 후보들 역시 YS의 제안에 그 누구도 반발하지 않았을까. “국민 대통합을 이뤄 당면한 경제난국(IMF) 극복에 국가 역량을 총집결하기 위해 특별사면을 단행하기로 한 것”이란 청와대의 설명만으론 부족한 감이 있다.
▲ 〈동아일보〉(좌)와 〈한겨레〉(우)는 ‘TK 대권 지지율’에서 사면의 속내를 파악했다. / ⓒ네이버뉴스 라이브러리 갈무리
언론은 ‘TK 대권 지지율’에서 그 속내를 파악했다. 정치권이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의 사면을 통해 TK 지역의 지지율을 얻고자 한다는 의미다.
전·노 씨 사면 여권의 계산 “파문 일겠지만 대선 유리”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전·노씨에 대한 조기 사면론의 속 배경에는 김 대통령이나 차기 대선 후보의 입장에서나 ‘잃는 것보다는 얻는 게 더 많다’는 계산이 깔려 있다는 점이다. (중략) 여권 대선 후보로서는 사면으로 얻을 수 있는 반사이익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이 문제는 이른바 TK(대구·경북 지역) 정서와 관련이 있다는 시각이 지배적이기 때문에 어느 후보도 외면하기 힘든 사안이다. 또 한 가지 현 정부와 관계가 원만하지 않은 불교계의 요구라는 점도 대선 전략과 관련 무시할 수 없는 측면이다.
- <동아일보> 1997.06.15. 4면
[사설] ‘화합’ 핑계 사면은 안 된다
정치권에서 거론하고 있는 사면론은 오는 12월의 대통령 선거를 의식한 정치적 판단에 근거하고 있다. 전·노씨의 사면을 주장함으로써 대구·경북 지역 주민들의 정서를 끌어안자는 계산인데, 정작 이 지역 주민들은 이러한 정치권의 자의적 판단에 분노마저 느끼고 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은 김 대통령이 자신이 구상하고 있는 다음 정권 창출을 위해 ‘국민 화합’이나 다음 정권의 부담을 덜어준다는 명분을 내세워 전·노씨 등을 사면하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다.
- <한겨레> 1997.04.18. 3면
이낙연 대표가 제안한 사면 역시 민주당의 ‘선거용 전략’이란 의혹이 제기됐다. 곧 있을 서울·부산시장 보궐선거와 제20대 대통령 선거에서 중도층을 끌어안기 위한 전략이란 설명이다. 뿐만 아니라 최근 민주당의 지지율 하락 국면을 뒤집기 위해, 야권을 분열시키고 있다는 분석도 뒤따랐다.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는 “사면을 선거에 이용하려는 시도가 있다면 용납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홍익표 민주연구원 원장은 KBS 라디오 <김경래의 최강시사>에 출연해 선거용 의혹을 일축한 바 있다. 홍 원장은 “이 대표 개인 입장으로는 정치적 손해면 손해지, 이득이 될 부분은 아니었다”며 “단순히 선거용이나 정치적 이해관계를 놓고 한 판단은 아니라고 본다”고 말했다.
사면을 반긴 정치권과 언론
12월 18일 김대중 전 대통령(DJ)이 제15대 대통령에 당선되자, YS는 그와의 오찬 회동에서 12·12 및 5·18 관련자에 대한 사면 의사를 밝혔다. 당선자 신분이던 DJ 역시 이를 지지했다. 사흘 후 국무회의를 통해 사면 안이 곧바로 의결됐다. 이로써 두 전직 대통령은 구속 수감 2년여 만에 석방됐다.
각 당은 성명을 통해 일제히 사면 결정을 환영했다. 한나라당은 “이번 조치가 암울했던 한 시대를 마감하고 국민화합과 화해, 그리고 새로운 통합과 번영의 시대를 여는 전기가 되길 바란다”고, 국민회의는 “두 전 대통령에 대한 사법적 단죄 그 자체는 법치주의 차원에서 당연한 것이지만, 두 사람의 사면은 국민화합 차원에서 국민적 동의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 말했다. 자민련 역시 “망국적 지역감정을 해소하고, 화해와 협력의 새 장을 열어야 할 것”이라 밝혔다.
▲ 〈경향신문〉(좌)와 〈조선일보〉(우) 사설에는 화합의 시대를 기대하는 목소리가 담겼다. / ⓒ네이버뉴스 라이브러리 갈무리
언론 역시 마찬가지였다. 21일자 각 신문 사설에는 화합의 시대를 기대하는 목소리가 담겼다. 동시에 두 전직 대통령을 향해 사죄하는 심정으로 받아들일 것을 강조했다.
[사설] 전·노 사면 대화합 계기로
전·노씨 등에 대한 사면·복권은 건국 이후 가장 불행했던 갈등의 역사를 이제 ‘진정한 화해’를 통해 국민통합의 디딤돌로 승화시킬 수 있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실로 18년만의 종결인 것이다.
우리가 이번 사면·복권 결정을 ‘진정한 화해’라고 부르는 것은 이 두 사건의 최대 피해자가 가해자들을 용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중략) 이번 김 국민회의 총재의 대통령 당선은 ‘한(恨)’을 스스로 푸는 계기가 된 것이고, 이제 피해자가 가해자를 용서했다는 점에서 우리 국민 모두가 진심으로 하나 되는 국민 통합의 새로운 출발점에 서게 됐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전·노 두 전직 대통령은 다시 한 번 역사 앞에 사죄하는 심정으로 이를 받아들여야 한다.
- <경향신문> 1997.12.21. 3면
[사설] 악연의 해원(解冤)
우리는 이 조치가 우리 정치사의 마지막 앙금과 갈등을 해소하는 좋은 계기가 되기를 희망한다. (중략) 김 대통령과 김 당선자는 과거에 전·노 전직 대통령과 가장 불편한 관계 속에서 만난 악연이 있기 때문에 그 네 사람이 해원을 한 것은 우리 감성적인 측면에서도 각별한 무엇을 던져준다.
이것으로 우리는 과거의 모든 응어리와 악연과 상극의 시대가 깨끗이 역사의 저편으로 넘겨지기를 바란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20세기를 졸업하고 21세기의 새 장(章)을 열어야 한다. (중략) 전·노 전직 대통령이 석방된다고 해서 또 TK 운운하는 말이 나와서도 안 되고, PK니 호남 지역이니 하는 편 가르기 말들도 없어져야 한다.
- <조선일보> 1997.12.21. 3면
국민은 사면을 바라지 않았다
▲ 1997년 〈한겨레〉(좌)와 2021년 〈리얼미터〉(우)의 여론조사 결과 국민들의 사면 반대 입장이 앞섰다. / ⓒ네이버뉴스 라이브러리·리얼미터 갈무리
정치권과 언론의 환영에도 불구하고, 당시 국민들은 사면 반대 입장이 앞섰다. 1997년 <한겨레> 여론조사에 따르면, 사면 자체에 대해 반대가 54.7%로 찬성(41.0%)보다 13.7%포인트 앞섰다. 여기에 ‘조건없는 사면’이란 단서가 붙으면 73.8%가 반대했다. 또한 연령대가 어릴수록 반대율이 높았다.
이러한 추세는 2021년 <리얼미터> 조사에서도 나타났다. <오마이뉴스> 의뢰로 6일 발표된 결과에 따르면, 반대가 48.0%로 찬성(47.7%)보다 0.3%포인트 앞섰다. 1997년만큼 연령에 비례하는 결과는 아니었으나, 60·70대 이상은 찬성 20~40대는 반대를 한다는 점에서 유사했다.
1997년과 2021년 공통적으로, 국민들은 사면이 ‘국민 통합(화합)’에 기여할 것이라 믿지 않았다. 1997년 <한겨레>가 사면의 배경을 묻는 여론조사에 67.9%의 응답자는 ‘정치적 득실계산’ 때문이라 답했다. 순수한 ‘국민 화합’으로 본 응답자는 26.5%에 그쳤다. 한편 11일 YTN 의뢰로 실시한 조사에서도 56.1%의 응답자가 ‘국민 통합에 기여하지 못할 것’이라 답했다. ‘기여할 것’이라 본 국민은 38.8%에 불과했다.
국민들의 의사에 반하는 특별사면이 헌법상 권한 행사라 할지라도 정당하다고 볼 수 있을까. 국민감정에 맞지 않은 자의적인 권한 행사는 정당성을 상실한다. 이에 더해 국민들은 정치권이 명분으로 내세운 ‘국민 통합’의 기여도 역시 믿지 않았다.
그렇다면 왜 대통령은 일견 부당해 보이는 사면권의 기로 앞에 서게 될까. 김재윤 건국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그 이유를 정치권과 언론계에서 찾았다.
김 교수는 “전두환·노태우에 대한 특별사면 논의가 대법원의 확정판결이 나오기도 전부터 정치권, 언론계를 흘러나왔다”며 “(특별사면 단행은) 대법원에서 확정판결이 나온 지 불과 8개월 만의 일로, 김영삼 정부에서 ‘역사 바로 세우기’ 차원에서 진행된 12·12 군사반란과 5·18 내란에 대한 과거청산작업이 국민에 대하여 얼마나 기만적이었는가를 극명하게 보여줬다”고 꼬집었다.
특히 학술지 <형사정책연구>에 투고한 논문에 따르면, 특별사면이 국민 통합에 기여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담겨있다. 그는 “판결문의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그리고 시민들의 경악과 분노가 가라앉기도 전에 단행된 특별사면, 범죄의 종류나 형의 경중, 형기 및 반성유무, 그리고 피해에 대한 배상 여부를 불문하고, 국민적 공감대와는 거리가 멀게 행해진 무분별한 특별사면이 역대 정부에서 지속적으로 행사된 역사는 오·남용의 역사라고 말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조서영 기자 sisaon@sisaon.co.kr
출처 : 시사오늘(시사ON)(http://www.sisaon.co.kr)
※ 자세한 조사개요와 결과는 리얼미터 홈페이지 또는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를 참조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