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10. 02
정부의 소득주도성장 정책 강행과 통계 왜곡 논란 과정에서 황수경 전 통계청장이 경질되자, 언론에 황 전 청장을 그리스 금융위기 때 형사기소를 당했던 안드레아스 게오르기우 전 통계청장과 비교하는 글들이 등장한다.
게오르기우는 "그리스에서는 통계가 격투기다. 통계를 조작하지 않은 게 나를 기소한 이유"라며 법정 투쟁을 이어갔다. 황 전 청장도 청와대의 '압력'에 굴복하지 않아서 경질됐다는 진단이 따라온다.
국내 언론 보도에는 그리스 정부가 정치적 이득을 얻으려고 한 일이 국민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고만 나온다.
그러나 더 큰 이득을 얻은 세력이 있다. 투자은행 골드만삭스는 그리스 국채를 대량 매입해 장부상 축소된 것으로 만들어주고 유럽연합(EU)에 가입한 뒤 그리스 정부에 되돌려주는 '은밀한 작업'을 해줬다. 이 과정에서 골드만삭스는 무려 6억유로(약 7800억원)의 수수료를 챙겼다고 한다.
골드만삭스가 실제 번 돈은 이보다 훨씬 많을 것이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골드만삭스는 JP모건 등 다른 투자은행들과 함께 그리스 금융위기 가능성에 투기할 수 있는 '이트락스(iTraxx)'라는 신용부도스왑(CDS)지수 거래시장을 런던에 만들어냈다. 당시 그리스 부채 축소를 알고 있는 극소수 금융인들에게는 언젠가 이 사실이 드러날 것이기 때문에, 또 그 사실을 퍼뜨리면 '쇼트(short)'로 떼돈을 벌 수 있는 '황금어장'을 만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그리스 금융위기가 터지면서 대규모 쇼트가 벌어졌고 iTraxx지수 수요도 폭증했다. 금융위기 정점이던 2010년 초 지수 계약액이 1월 529억달러(약 60조원)에 달했고 2월에는 1093억달러(약 120조원)로 두 배나 껑충 뛰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통계 왜곡에는 항상 수혜자와 피해자가 있다. 피해자들은 보통 그리스 국민처럼 아무것도 모르고 당한다. 국내에서 문제가 된 가계소득 통계도 일반 국민은 그 내용을 거의 모른다. 그러나 정치적·경제적 이해관계가 걸린 사람들은 필요에 맞게 통계를 왜곡하거나 조작할 유인을 갖고 있다.
필자는 이번 가계소득 통계 논란에서 장하성 청와대 정책실장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확인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다. 그렇지만 그가 학자 시절 통계를 왜곡한 것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얘기할 수 있다. 2015년 출간한 '왜 분노해야 하는가'에서 당시 장 교수는 한국이 세계에서 가장 불평등한 나라라고 주장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새정치민주연합 대표 시절 2015년 관훈토론회에서 "우리나라 소득 불평등은 세계 최악"이라는 취지의 발언을 한 데에 이 책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러나 그 내용은 초등학생이 봐도 말이 안 되는 괴담 수준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3개국 중 한국의 임금 불평등도가 29위인데, 비정규직을 감안하면 꼴찌일 것이라고 '짐작'한 뒤, 그러니까 전 세계 196개국 중에서 꼴찌라고 비약했다. '세계에서 가장 불평등한 나라'라는 말을 제목과 책 중간에 강조했지만, 본문에서는 해명하지 않는 '이중 플레이'를 했다. 그리고 그는 청와대에 입성하는 수혜자가 됐다.
그 피해자는 국민이다. 국민을 과도한 '분노'에 빠지게 만들고 과도한 정책을 내놓게 해서 시행착오와 낭비를 양산한다.
정부는 벌써 통계 전문가들이 필요 없다고 판단한 분기별 가계소득 통계를 되살리기 위해 매년 150억원 이상의 예산을 책정해놓았다. 더 큰 문제는 사회적 분열이 악화되는 것이다. 통계 수치에 동의하지만 그 해석이 서로 다르다면 얼마든지 토론하고 간극을 줄여나갈 여지가 있다. 그렇지만 수치 자체를 믿지 못하면 대화의 여지가 없어진다. 정책에 대한 대외 신뢰도까지 떨어진다. 그리스와 유사한 사태가 한국에서 벌어지지 말라는 보장이 없다.
장 실장은 자신이 최고위 경제정책 결정자로서 자격이 있는지 스스로 물어보고 진퇴를 결정하는 것이 낫다. 차제에 문 대통령은 통계청장도 객관적 통계를 내놓을 수 있다고 전문가들이 광범위하게 동의할 수 있는 인물로 재임명해야 할 것이다.
신장섭 / 싱가포르대 교수
매일경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