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봉산 선인봉 가는길 중간에 도봉산장이 있고,
산장 못미처 등산로 좌측 옆에 일명 '김경균'바위가 있다.
일명 색소폰 바위라고도 불렸다.
우측 칸테를 잡고 올라가는 동작이 고도의 밸런스를 요하는 어려운 무브이며 그 후 김경균 이라는 글자를 홀드삼아 오르락 내리락 하는 동작도 있다.
김경균바위 보울더의 초등자는 재미산악인 이기범씨(60)이고, 재등자는 정승권(정승권등산학교 교장)씨이다.
김경균바위를 등지고 등산로 건너편 사면을 5분 정도 오르면 짱구바위가 있다.
아래에서 보면 약 110도 정도의 오버행이라 사람의 얼굴로 치면 이마가 툭 튀어나온 모양이라 짱구라고 지은 것같다.
짱구바위에는 세 개의 크랙이 있는데 그 중 가장 좌측에 있는 크랙이 '강적크랙'이다.
예전에 이 크랙의 등반이 극히 어렵고 완등하는 클라이머가 없었는데, 막 피어나 꽃을 피우기 시작하는 자유등반의 붐을 유도하자는 의미에서 강적크랙을 자유등반하는 초등자에게 포상금을 걸었었다.
이는 선의의 경쟁을 유도하여 우리 산악계의 암벽 실력을 한 단계 끌어 올리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 생각에서 였을것이다.
당시 완등자에게 걸린 상금이 100만원이었다.
그 후 월간 '산'지에 강적크랙에 관련된 기사가 실렸다.
국내의 최고 등반가들이 짱구바위로 몰려들었다.
1989년. 권오환이 김유형보다 몇 달 앞서 적극적으로 등반을 하였지만 결국 김유형에게 초등을 내주고 말았다.
최석문의 말에 의하면 권오환이 핑크포인트(확보물을 미리 설치하고 추락없이 등반하는 것)로 등반을 끝내었지만
김유형이 캠을 설치하면서 깔끔하게 등반을 끝내 초등자로 공인을 받게 되었다고.
89년도의 일이고 강적크랙의 난이도가 5.12c 였으니 크랙난이도를 떠나 자유등반 5.12 등반가로서도 최초라고 한다.
생각해보면 90년대 초중반 전국암벽등반대회가 선운산 속살바위에서 열렸는데 당시 결승루트가 5.12 였으니 강적크랙 등반은 그 보다 5~6년 앞선 일이라 더욱 의미와 가치있는 등반임에 분명하다.
석문은 이 강적크랙을 끝내기 위해 벌써 11일째 이 곳을 찾았다고 했다.
며칠 전 암장에서 운동 중 쉬는 시간에 이야기를 하다가 석문의 강적크랙 등반 이야기를 들었다.
핑크포인트로는 등반을 끝낸 석문이지만, 캠을 설치하면서 완등을 목표로 삼은 터라
또 그래야만 제대로 된 등반이라고 믿는 그 들의 생각은 참으로 건전하고 진취적인 사고방식이다.
마침 등반계획이 없는 날이기도 해서 함께 가기로 했다.
11월 늦가을의 도봉산은 포근했다.
전 날 비가 내려 쌀쌀할 법도 하건만 보온을 위해 준비한 두터운 옷을 입고 걸어가기 힘들 정도였다.
몸을 풀기 위해 두 사람이 번갈아가며 한 판씩 등반을 한다.
캠을 설치할 곳에 마킹을 하고 손을 넣고 재밍을 할 곳과 제대로 발 디딜 곳 없는 바위면의 작은 돌기에도 표시를 해둔다.
몸풀기를 빼면 사실상 첫 번째 등반을 시작하면서 석문이가
"형, 원래 세 번째 판이 가장 등반이 잘되요.
그 동안 해보니 그렇더라구요. 처음에는 몸도 안풀리고 바위에 적응도 해야 해서..."
이 말을 하고 가볍게 등반을 시작하는 석문.
그래서 그 판은 별로 기대도 하지 않고 스스로에게 마음의 부담을 덜어서 일까,
단 번에 크랙끝까지 올라가는 그.
그리고 마지막 고빗사위를 넘어서며 기합을 넣는다.
'이얏~ !'
'이야야~!!'
마지막 퀵드로에 클립을 하며 환호성을 외치는 석문.
등반을 끝나고 내려오는 그의 손가락은 터지고 벗거져 피가 흐르고 있다.
하강을 마친 석문과 주먹을 부딪히며 하이파이브를 해준다.
강적크랙의 난이도는 5.12c로 알려져 있지만 체감 난이도는 조금 높다고 한다.
석문의 평가는 5.12+
손가락이 굵은 남성들은 크랙에 손이 잘 들어가지를 않고 재밍도 어려운 구간이 많아 여러가지 기술을 써야 하며
특히 발 스탠스가 없어 정확하게 발끝으로 찍고 체중을 실지 않으면 터지기 일쑤다.
석문은 중국의 리밍이나 인디언 크릭에서 다수의 5.12a.b 크랙을 온사이트로 끝냈다고 한다.
그것만 보더라도 강적크랙은 난이도상의 5.12c를 넘어서는 어려운 크랙임이 분명하다.
※후에 루트를 완등한 클라이머들 (손정준, 손승민, 최석문, 이명희 ...)의 의견을 모아 5.13a 로 매겼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