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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二 부. 소 설
1. 춘원 이광수 문학비
가. 춘원과 운허스님
한국문학사를 읽으면서 이광수의 문학비 한 번 보지 않고 그냥 넘어갈 수는 없었다. 그가 친일작가라는 세간의 비판을 감수하더라도 우리 근대문학사에서 춘원의 문학적 자취를 제외한 채 문학을 말할 수 없다는 이유 때문이다.
2005년 5월 26일, 염두해 두었던 문학비답사 일정대로 새벽 5시에 일어나 준비를 하고 있는데 아내는 벌써 일어나 간단한 음식을 준비하고 있었다. 먼 길 가는 사람을 빈속으로 보내지 않는다는 것은 아내가 살아온 지론의 하나다. 처음 타보는 고속철도KTX를 07시37분에 타서 서울도착이 09시25분이었으니 숫자상으로는 2시간 8분이 걸린 셈이다. 원래 계획은 1시간 50분 정도로 알고 있는 고속이었으니 10여 분 늦은 것인가. 동대구역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북구 팔달교까지 오는데 1시간여 걸리는 것을 감안하면 엄청난 속도인 것이다. 그러한 속도를 타고 죽은 문학가 춘원 선생을 찾아 과거로 되돌아가는 여행을 한 것이다. 전철을 타고 의정부시까지 가는 데는 어려움이 없었으나 의정부시에서 21번 광릉내행을 타는데 엄청난 착오와 우여곡절이 있었다. 봉선사 입구에 내려 산채비빔밥으로 허기를 채웠다. 말이 산채비빔밥이지 그냥 몇 가지 나물이 고작이고 국물도 변변치 않았다. 입구에서 이백여 미터란 푯말을 보고 들어가서 처음 만난 건물은 운허 스님이 쓴 ‘운악산 봉선사’라는 한글글씨의 봉선사 입구 건물이다. 운허대종사를 알지 못하고 갔던 필자는 그의 글씨에서 노기(老氣)에서 나오는 진솔한 마음을 전하는 것 같아 기뻤다. 10여 보 오른쪽에 춘원의 문학비가 운허당용하대종사추모비, 봉선사중창비 등과 자리를 같이 하고 있다. 춘원의 비음에 의하면 그는 해방 전 해인 1944년에 양주군 사릉 땅에 집을 짓고 4년 남짓 돌베개 생활을 한 적이 있는데 한 해 겨울 이 곳 봉선사에서 입산 수도한 일이있다 한다. 그런 인연으로 이곳 봉선사 들머리에 그의 문학비가 있게 된 것이다. 더욱이 당시 봉선사는 그의 팔촌 아우 운허 스님이 주관하는 절이었다.
이곳 봉선사에 와서 소득이 있었다면 대종사 운허 스님을 알게 된 것과 전국에서 유일?하게 사찰 경내의 간판을 전부 한글로 써 놓았다는 사실의 두 가지다. 우선 대웅전(大雄殿)을 ‘큰 법당’이라 하였고 큰 법당의 주련시를 모두 한글로 써 놓았다. 모든 불경과 불사를 한자 또는 한자음으로 써 놓아 대중신도를 마음으로부터 멀게 하였던 불교계에서 이 같은 한글불교문화가 어떻게 가능한가를 말하려는 듯 했다. 큰 법당 기둥에는 다음과 같은 주련시가 있다.
온 누리 티끌 새어서 알고
큰 바다 물을 모두 마시고
허공을 깨고 바람 얽어도
부처님 공덕 다 말 못하고
쉬운 우리말에 그 의미는 바다와 허공을 넘어 전 우주적이다. 생각컨대 불교의 언어는 모두가 비유이고 상징이다.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이치는 비유와 상징이라는 언표(言表)를 통해 현세의 족적을 부정하고 내세를 긍정하는 것이니 부처님 공덕을 말로써는 다 말하지 못하고 말을 떠나 말 밖에서 찾아야 한다는 원효의 절언지법의 다름 아니다. 다시 큰 법당 우측으로 방적당(放跡堂)이 있는데 중봉 금인석의 글씨다. 방적당은 속계의 자취를 없앤다는 선방(禪房)일 것이라고 혼자 해석하고 다시 보니 봉선사 능엄학림이라는 간판이 있다. 그래서인지 방안에서 흘러나오는 말도 스승과 제자의 문답소리로 들린다. 감히 그 엄숙한 사문(?)을 열 수가 없었다. 봉선사는 조선 명종 이래 교종(敎宗)의 대표적인 사찰이었음을 상기시킨다. 봉선사는 고려 광종 20년(969)에 법인국사 탄문(坦文)이 운악산(雲岳山) 기슭에 창건하고 운악사라 칭하다가 조선 세종조 7개 종파를 선종과 교종 양종으로 통합할 때 혁파되었다가 예종 1년 89칸으로 증축하면서 봉선사라 하였다 한다. 봉선(奉先)의 의미는 1469년 정희왕후 윤 씨가 그 선왕(先王)인 세조의 능침(陵寢)을 보호하기 위해 증축하였던 사실에 연원한다. 그로부터 봉선사는 임진왜란,병자호란,6.25전쟁 등 전란이 있을 때마다 소실되는 비운을 겪었던 것이다. 봉선사에는 조선초기(1469)에 조성된 봉선사대종이 있다. 육안으로 독해가 어려운 상태이나 성화5년 7월이라는 조성연대가 보인다. 성화 오년(成化五年)은 중국연호로 1469년 예종원년이 된다. 숭정대부행형조판서겸경연지사진산군신 강희맹봉교찬의 강희맹(姜希孟)과 가정대부행석분위대호군겸춘추관동지사신정란종봉 교서의 정난종(鄭蘭宗)의 이름이 보인다. 대종에는 숙인 효대왕전하 비룡구오(龍飛九五)...적유14년이라는 구절이 있어 조성경위를 말하고 있다. 춘원은 큰법당 왼편에 있는 다경향실에서 거처하며 친일의 공격을 피해갔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경향실은 전쟁에 소실되고 그 터에 돌 하나만 남아 있다.
춘원이 봉선사에서 수도한 적이 있다고 앞에서 말한 바 있지만 춘원은 1946년 4월에 주지 운허스님이 세운 광동중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친 일도 있다. 크낙새가 서식하던 국립공원 광릉숲과 연결되어 있는 이곳 봉선사는 곳곳에 운허의 자취가 남아 있으니 봉선사중창기도 그가 쓴 글이다. 운허는 그의 법호요 법명은 용하(龍夏)다. 속성은 이씨,관향은 전주,본명은 학수(學洙)다. 그는 식민지시대 국내외를 오가며 민족독립운동을 하였고 가는 곳마다 학교를 세워 민족교육을 솔선했던 교육자다. 그는 일본 헌병의 눈을 피해 불교계에 입문했다가 경화선사에 의해 득도하니 월초화상의 적손이요 석가세존 후 제77세 법손이 된다. 수도승으로서 대종사의 위에 오른 사람이요 혁혁한 독립운동가 교육가였으니 큰 인물이다. 비문에는 그가 남긴 유고 중 회갑일을 맞아 지은 자부시가 있다.
흐르는 세월 무심히 보냈으니
환갑일을 맞은 들 장할 것 없어라.
바다에 뜬 좁쌀신세 소동파가 개탄했고
단명도 장수도 없단 말 왕우군이 의심했네
동녘엔 먼동이 트려는데 봄은 이미 깊었으니
가슴에 큰 뜻 품었건만 귀밑머리 희여졌네
떠돌이 나그넷길 외롭다 슳어 말자
아직은 건강하니 여생을 가꾸리라
그러나 생각하면 독립운동을 했던 운허 스님이 변절로 이름 높은 춘원을 숨겨주고 많은 사람의 돌팔매질을 막아주었으니 핏줄의 힘이 얼마나 강한 가를 알게 하는 일이다.
나. 비음 :
새로운 한국문학의 선도자로 이름 높은 춘원 이광수 “春園 李光洙” 선생은 1892년 음력 2월 1일 평안북도 정주定州에서 전주 이씨 종원鍾元의 맏아들로 태어나고 58 세 되던 1950년 7월 12일 서울 효자동 자택에서 북쪽 공산군에게 끌려간 후 4반세기가 지난 오늘날까지 소식이 묘연하다.
그의 생애와 업적, 정열과 번뇌, 깨달음과 가르침, 모든 것이 이미 천과 만으로 세어야할 출판물로 천하에 알려졌고 길이 남아 있지 아니한가. 여기 낱낱이 기록할 필요도 없고 너비도 모자란다. 젊어서는 인간본위의 자유사상을 남 먼저 도입했고이어서 나라와 겨레 섬김의 정신을 또는 도산 안창호 安昌浩의 인격 혁신혁신운동을 고취했으며 만년에는 종교적인 신앙과 구원의 길을 모색했으니 그런 연유로 1944년 양주 楊州군 사릉思陵 땅에 마을집을 장만하여 4년 남짓 돌베개 생활을 하는 동안 한해 겨울을 가까이 있는 봉선사奉先寺로 입산수도한 일이 있으니 곧 그의 팔촌 아우 운허耘虛 스님이 주관하는 절이다.
이제 소식모르는 임을 안타까이 그리는 그의 아내 허영숙과 멀리 미국땅에서 대학교수와 강사로 봉사하는 아들 영근, 딸 정란. 정화 들이 이 터에 돌을 세워 어버이를 길이 사모하는 뜻을 바치고자 하매 삼가 후학 朱耀翰이 글을 짓고 原谷 金基升이 글씨를 쓰니라. 1975년 가을
기념비를 세우기 위해 미주로부터 귀국했던 허영숙 부인은 미처 완공을 보지 못 보신 채 9월 7일 80세의 천수를 마치시고 이 곳에서 머지 않은 샘내공원 묘지에 길이 누으셨으니 실로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3) 비 좌면(左面)
형제여 자매여 /무너지는 돌탑밑에 꿇어 앉어 /읊조리는 나의 노래를 /듣는가 듣는가
형제여 형제여 /깨어진 질향로에 떨리는 손이 /피우는 자단향의 향내를 /맡는가 맡는가
형제여 자매여 /님 네를 그리워 그 가슴 속이 /그리워 성문 밖에 서서 울고 /기다리는 나를 보는가 보는가
(1925년)
님아 향기로운 꽃가지로 결은 관을 /저 깊은 벼래에 던지어 버리라 /내 머리에는 가시관이 가장 합당하도다 /가시관을 내 머리에 꽉 눌러 씌우라 /님아 그리하여서 이마에 수없는 상채기에서 /흐르는 아프고 쓰린 피를 열손가락으로 /찍어 뿌리며 통곡하게할지어다 /님아 내게는 오직 아픔과 울ㅇ,a에 합당한 가시관이 맞는도다 가시관이 맞는도다
(1925년)
내 몸이 무엇이오 /한 때에는 죽을 것이 /고락을 헤오리까 /한바탕 꿈이로다 /조구만 목숨이나마 /겨레 위래 바치리라
(1931년)
4) 비 우면(右面)
춘원의 글......그러나 내 자식들이나 가족 또는 친우들이 내 죽어간 뒤에 구태여 묘를 만들어 주고 비를 세워준다면 그야 지하에 가서가지 말릴 수야 없는 일이나 만일 그렇게 되어 진다면 내 생각으로는 “이광수는 조선 사람을 위하여 일하던 사람이다” 하는 글귀가 쓰여졌으면 하나 그도 마음 뿐이다.
(1936년)
먼 길 가는 손님네야 내 노래 듣고 가소 /다린들 안 아프리 잠간 쉬어가소 /변변치도 못한 노래 그래도 듣고 가소 /길가에 외로 앉어 부르는 내 노래를 /저기 저 손님네야 한 가락만 듣고 가소 /가도 가도 길이요 새면 또 날이다 /끝없는 길손 불러 끝없는 내 노랠세
(1936년)
나는 사는 날까지 이 길가에 앉어 있으렵니다 /그리고 이야기를 하고 노래를 하렵니다
누구시나 행인은 들어셔도 좋습니다 /가고 싶으면 아모 때에 가셔도 좋습니다
(1937년)
2. 금동 김동인 문학비
가. 비음
小說家 金東仁 先生 文歷
우리 近代文學開拓期에 큰 빛을 남긴 琴童 金東仁 先生은 西紀 千九百年 平壤에서 出生 그곳 崇實中學校를 거쳐 日本 明治學院과 川端美術學校에서 文學과 美術을 함께 공부하여 弱冠 十九歲에 이미 處女作을 發表했고 三一運動에 가담하는가 하면 春園 李光洙 先生과 雙璧이 되어 우리 小說文學을 搖籃期로 이끌었으며 또 심화된 意識을 던져 風流의 멋을 살 줄 아는 豪放性으로 當世에 人間 있음을 誇示했다.
作品傾向은 耽美的 自然主義였으며 <배따라기>,<감자>,<발가락이 닮았다>,<金姸實傳>,<젊은 그들><운峴宮의 봄> 등으로 우리 近代文學史를 살찌게 하다가 1951年 戰亂 中에 서울에서 외로이 그 人生歷程의 終章을 닫았다. 父母는 金大潤 長老와 玉 氏遺族으로 夫人 金瓊愛 女史와 日煥,光明,天明,玉煥,姸煥,銀煥이 있다.
西紀 1976年 十月(한국소설가협회 건립/ 비제 김동리/ 비문 유주현/ 글씨 오효선)
나. 김동인의 [춘원 연구]
한국 신문학 60년사에서 최초의 본격적인 작가론으로 평가되는 김동인의 [춘원연구](삼천리)는 1934년 그의 나이 34세에 썼던 글이다. [춘원연구]는 일관된 문학논리로 쓴 문학평론이라기보다는 춘원의 문학을 연대순으로 탐색하면서 그 위에 춘원의 전기적 사실을 용해시킨 춘원 이광수론이다. 세간에는 김동인의 [춘원연구]를 말하여, 춘원을 깎아내리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쓴 것이라고 말하는 것을 보았다. 춘원을 공격하기 위하여 [춘원연구]를 썼던 김동인은 [춘원연구]를 통해 오히려 춘원문학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음을 증언하는 자리가 된 것은 아이러니칼한 일이다. 아울러 김동인이 춘원 이광수연구를 통해서 보여준 그의 비평적 분석은 그의 창작물과 함께 객관적으로 평가해야할 소이연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김동인의 성격상 지고는 못산다는 오만함이 또는 춘원문학을 극복할 수 있는 작가는 김동인 자기밖에 없다는 우월의식에서 연구된 것이라는 풍문은 일고의 가치도 없는 풍문이다.
김동인의 [춘원연구]는 그 서언에서부터 우리의 과거 역사를 부정하는 단계에서 출발하고 있다. 즉 우리는 자랑할 만한 국가를 역사적으로 가져보지 못했다는 견해를 말한다. 김동인이 말한 자랑할 만한 국가란 힘있는 국가를 가리키는데 이것이 [춘원연구]와 무슨 맥락을 같이하는 지 모호할 뿐이다. 김동인의 말에 따르자면 외세지배를 받고 살아온 조선의 역사는 전부 부정되어야 하고 그로 인해 조선의 문화유산 나아가서 조선의 문학유산은 보잘 것 없는 것이 되고 말아야 한다. 이것은 개화기 문인들이 조선의 전통을 부정하던 것과 동일한 인식구조에 속하는 일이다. 이해조가 그의 [자유종]에서 춘향전,심청전,흥부전 등을 음탕교과서,처량교과서,허황교과서로 매도한 것과 동일선상에 세울 수 있다. 이씨조선의 고려문화 파괴와 이씨조선의 상대적인 문화의 빈곤도 평민문학 외는 볼 것이 없다는 지적이다. 그가 국초 이인직을 혜성과 같은 존재라고 극찬하면서 그 뒤를 이은 작가가 춘원 이광수라고 말한 점으로 미루어 이들은 공히 전대의 문학을 부정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 것이 된다.
김동인의 부정적인 역사관이 춘원문학을 부정하려는 전제로서 의도되었다 하더라도 내용상 맥락이 닿지 않는다면 그것은 잘못된 가설일 수 있다. 당연히 긍정해야 할 것조차 부정하려는 부정의식은 자신의 논법을 부정함으로써 타당할 수 있는 오류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김동인의 [춘원연구]는 작가론이다. 작가론으로서 이광수론의 원형은 춘원의 고아의식에 집중되어 있다. 춘원에 대한 정신분석학은 춘원이 왜 인간적으로 파탄하게 되었으며 그의 이원적 성격이 문학에서 어떤 양상으로 굴절되었는가를 보는 일이었다. 그는 춘원의 작품을 춘원의 해적이 위에 병열하여 두고 작가는 실제 작품의 창조자며 책임자라는 관점에서 조명한 것이다. 즉 춘원의 고아의식은 춘원으로 하여금 이원적 성격을 만들었고 그의 이원적 성격은 식민지처세에서 또는 [무정]의 이형식으로 투사되었다는 견해인 것이다.
예컨대, 춘원의 첫 작품은 <어린 벗에게>(1914,[청춘])인데 이 작품에서 춘원은 사랑의 문제를 다루었다. 김동인은 <어린 벗에게>에서 보여준 춘원의 ‘사랑’은 <人間愛가 아닌 小愛였다>고 지적한다. 그 원인은 춘원이 가난하게 살았고 고아출신이기 때문에 사랑을 알 수 없었다는 것이다.
김동인의 [춘원연구]는 무엇보다 이광수의 [무정]을 분석하는 자리에서 가장 빛났고 있다. 특히 [무정]과 [개척자]를 비교하려는 그의 안목은 뛰어난 것이다. 그러나 [춘원연구]에서는 주로 [무정]만 말한 것이지 [개척자]에 대해서는 평론할 가치가 없다는 한 마디로 생략해버렸다. 김동인은 춘원에게서 [무정] 하나만 문제삼아도 충분하다는 판단을 한 것인가. 김동인의 식견으로서는 춘원의 정치문학 나아가서 한국신문학 최초의 장편소설로 치부되는 [무정]을 부정해야 했는데 결과는 [무정]을 신문학 최초의 장편소설로 인정하는 데 일조를 한 셈이 된 것이다. 아울러 [춘원연구]에서 [무정] 비판을 통하여 김동인 스스로 대가적 면모를 보였던 것도 사실이다..
김동인은 춘원의 역사소설<단종애사>(1929)에 맞받아 <대수양>(1931)을 내놓았고 춘원의 동경 조선유학생 감독부기숙사에서 쓴 [무정](1917)에 대하여는 장편 <젊은 그들>(1929)로서 대응하였다. 그러나 김동인은 [무정]을 승인한 반면 그의 첫 장편<젊은 그들>은 실패한 작품으로 평가하고 말았다. 그 이유로는 <젊은 그들>을 썼던 시기가 파산한 지 2, 3년 뒤에 불과하고 신문사의 요구로 쓴 흥미위주의 ‘통속소설’이라는 것이다. 김동인은 스스로 신문소설 내지 통속소설을 본격소설이 아니라는 점에서 부정적이었다. 신문소설을 부정하면서 신문소설을 쓰지 않을 수 없었던 문학과 삶의 이율적 배반성은 김동인문학의 한 좌절의 양상으로 볼 수 있다.
김동인은 [춘원연구]에서 특히 이형식의 줏대없는 성격을 들어 춘원자신의 이원적 성격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또 이형식이 대동강으로 영채를 찾으러 갔다가 그냥 상경하고 이튿날 선형과 약혼하는 과정을 들어 사건의 필연성이 없음을 지적한다. 동인은 영채가 기찻간에서 김병욱을 만나게 되고 병욱은 영채에게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기다릴 이유가 없다고 역설하는 것에 대해서도 형식에 대한 영채의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었다고 분석한다. 연애는 이지의 산물이 아니라 감정의 산물이며 더구나 영채의 18 년 간의 정조지키기와 자살의 시도 그리고 형식이 결혼했다는 소식을 듣고 놀라는 장면 등은 사랑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분석한다. 김동인은 고아로 자란 춘원이 사랑에 대해 알 리가 없을 것이며 이형식의 성격불통일도 춘원의 고아의식이 원형이라는 지적이다. [무정]의 마지막 단계에서 남녀 청년들이 수해로 인해 삼랑진역에 내리게 되는데 거기서 자선음악회를 열어 수해민에게 봉사하고 나아가 ‘민족애로써 4인이 융화’를 꾀한 것은 ‘용한 일’로 적절한 삽입이라고 긍정하는 것을 보았다. 만약 버지니아 울프가 삼랑진 장면을 목격했더라면 남녀의 회합 이미지를 그의 유명한 페미니즘을 들어 양성론(兩性論)으로 말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김동인은 [무정]의 가치를 언어와 그 기교문제를 들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조선국어체로서 이만치 긴 글을 썼다 하는 것은 조선문 발달사에 있어서도 특기할 만한 가치가 있다.
김동인은 춘원의 역사소설을 제외한 장편소설은 모두 [무정]의 아류에 지나지 않는다 하고 춘원은 이 [무정]으로 하여 신문학사에 지울 수 없는 작가가 되었다고 [무정]을 높이 평가한다.
[무정]은 식민지치하를 배경으로 하고 봉건사상과 개화사상이 갈등하는 상황을 표면으로 한다. 말을 바꾸면 소설 [무정]은 외세침입과 민족상실이라는 비극적 상황 위에 근대화와 봉건시대의 퇴조 등 여러 겹의 모순과 병리가 혼재하는 상황을 다루고 있다. 한편 당대 조선인의 개화 내지 근대화를 위하여 구시대의 인습적인 껍질을 벗기려는 이형식,영채,병욱,선형,신우선 등 청년들이 근대화에 접근하는 의식의 틀에서 대화를 할 수 없었는가 하는 아쉬움이 남는 작품이다. 특히 영채와 형식이 만나 대화하는 것은 그들이 외국유학을 떠나면서 기찻 간에서 만나는 것까지 포함하여 전후 두 번에? 불과하다. 대화자체도 극히 형식적이며 짧은 대화였다. 대신 이형식의 독백은 서술이 길었다. [무정]이 안고 있는 근대화의식의 허실과 전통에 대해서 깊은 비판이 있어야 할 것이다. 동인은 이 문제에 대해서는 날카로운 비수를 들이댄 셈이다. 김동인은 [무정]이 시대상을 여실히 그린 셈이라고 지적하면서도 [무정]과 동학, [무정]과 페미니즘, [무정]과 근대의식 등 소설의 잠재된 형이상학을 도출하는데는 미흡한 느낌이다. 물론 김동인은 소설에서조차 시대,사회적 이야기를 하지 않을려는 의도를 비친 바 있었는데 그의 평론의 경우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리고 춘원문학을 두고 <춘원은 문명비평가인 동시에 하나의 사상가였다 그의 작품에는 思想이 들어 있어서 作品의 큰 중량이 되었다>는 평가가 정당하다면 춘원의 사상에 대해서 한 마디 있어야할 것이었다. 김동인은 [창조]의 정신이었던 산문체문장, 구어체문장, 리얼리즘의 문제와 결부시켜 [춘원연구]를 분석인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앞서 말한 춘원의 고아의식을 들어 [무정]을 보았듯이 춘원의 고아적인 이원적 성격이 결국 동지들을 둔 채 상해망명으로 이어졌다고 분석하였다. 이러한 춘원의 이원적 성격은 춘원의 식민지 처세에서 확인되는 것인데 <춘원은 어듸까지던 文學의 人이지 政治의 人이 아니며 筆의 人이지 實行의 人이 아니다>라고 결론짓는다. 춘원의 정신분석적 연구가 1900년대 말에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참고할 때 김동인이 1935년도 [삼천리]에 춘원의 고아의식을 발표했다는 사실은 문학평론가 김동인을 다시 자리매김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러한 김동인이 1930년대 한국 신문학을 말하는 자리에서 30년대의 한국소설이 아직도 춘원의 [무정] 수준을 넘지 못한다고 평한 것은 [무정]의 가치를 인정함과 동시에 스스로의 논리적 전제를 부정하는 것이 된다. 이로써 춘원의 [무정]은 역설적이게도 김동인의 [춘원연구]에 의해 그 문학사적 가치를 제대로 평가받은 셈이 되는 것이다.
3. 횡보 염상섭 문학비
가. 비음
‘標本室의 靑개구리, 除夜, 暗野, 萬歲前, 金伴指,電話,二心,三代,牧丹꽃필때,曉風,두
罷産,一代의 遺業,驟雨,未亡人,夫婦,어머니 등을 남기다.’
나. 염상섭을 찾는 길 - 도봉구 천주교 묘지
서울시 도봉구 방학동 천주교묘지에는 소설가 염상섭 이무영과 시인 박지수의 묘가 있다. 먼저 찾은 것이 이무영의 묘다. 정면에 ‘농민문학의 선구자 소설가 이무영 선생 묘비‘라 쓴 이무영묘를 답사한 것은 5월 12일 오후 3시다. 비음에는 ’이무영 선생을 추모하며 생시에 우정을 나누던 문우 교직 전우와 그 훈도를 받던 후배와 제자들이 이 돌을 세워 징표로 남긴다(1908-1960)‘고 하였다. 자녀는 육 남매를 두었다.
그러나 횡보의 문학비를 찾는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피로에 지치고 우울에 지쳐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에서 손을 적시며 어떻게 할 것인가를 생각한 것이다. 카메라도 고장 났으니 자꾸 다녀봤자 소용없는 일이라 에라, 고장난 카메라나 뜯어보자 하면서 길에 앉아 볼펜으로 쳐져 있는 얇은 검정테이프를 들어올리기를 여러 번 한다. 이렇게 효공 선생, 무영 선생은 렌즈에 담았으나 횡보 선생은 찾을 수 없었다. 관리 사무실로 내려가서 橫步 선생 묘를 물었더니 책임자인 듯한 사람이 앉으라 하더니 큰 소리로 성묘를 왔으면 소주 한 병이라도 가져 왔는냐고 다그친다. 의외의 큰 소리에 묘지가 어디 있는지 모르는데 소주가 당하는냐고 했으나 는 이렇게 해서 소주 1 병, 명태포 1 마리를 사서 길을 안다는 일꾼 둘, 나 셋이서 다시 산을 올라간 것이다. 멀지 않은 곳에 누워있는 횡보 선생이다. 선생의 묘는 계곡을 건너 오른 쪽 산줄기에 있다. 매점에서 사온 명태와 소주병을 제단에 올려놓으니 동행한 일꾼들이 이왕이면 절도 하시지요라고 한다. 절을 하고 나니 소주는 일꾼의 몫이 된다. 생각하면 매점주인이 횡보의 묘를 성묘케 한 셈이다. 필자를 도운 이는 김성균 일꾼. 그는 횡보 선생 묘소를 찾아 많은 사람들이 온다며 글을 쓰기 위해서 찾아 왔는냐고 묻는다. 그는 영화배우 박노식 묘, 야인시대의 쌍칼 박태인의 묘가 바로 위에 있다고 가리킨다. 드라마 야인시대가 끝난 지 얼마 안 되는 시점이다.
내려오면서 김씨는 ‘여기 한 500년쯤 된 바둑판이 있다’고 소개한다. 얼마 전에 신문기자 등 수십 명이 와서 사진을 찍어갔다는 것이다. 내려가 보니 넓은 화강암에 바둑판을 새겨놓았다. 가로 세로 19 줄이었다. 옛날엔 15줄 또는 18줄 바둑판이었다는 말에 비추어보면 조선조 후기의 것으로 추정된다. 돌의 변을 깎아서 드러나게 하였고 양변에 두 개의 큰 구멍을 파놓은 것은 바둑알을 담는 그릇으로 보인다. 바둑판이 놓인 바로 밑으로 크지는 않으나 깊은 계곡이 있고 맑은 물, 우거진 나무들, 평탄한 지대와 험하지 않은 계곡 들을 미루어 조선시대 선비들이 정자를 짓고 바둑을 두었음직한 상황이다.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추정한다는 것이다. 내려오면서 관리사무실에 들려 찬물 한 바가지로 목을 추기니 하루의 피로가 풀린다. 처음 만났을 때 목소리가 컸던 그 관리인은 매우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묘지를 찾았는냐고 친절이다. 소주 한 병이 사람을 부드럽게 만든 것이다.
4. 無影 이무영 문학비
가. 문학비문
1) 사람이란 흙내를 맡아야 하느니라. 대처(도회) 사람들이 암만 고량 진미로 음식을 만든대도 시골 음식처럼 구수한 맛이 없느니라. 마찬가지야 사람이란 흙내도 맡고 된장내도 나고 해야 구수우한 맛이 나는 게지. <第一課 第一章> 중에서
2). 절기에 가장 예민한 것이 농군이다. 그 중 앓는 사람이 비 오는 날을 미리 알듯이 그들은 일자무식이라도 생리로 절기를 안다. 물소리만 듣고도 그것이 해빙머리의 물소리인지 여름철의 물소리인지를 용이하게 구별하고 풀 한 잎 나무 한 가지를 만져만 보고도 못자리를 할 때인지 갈보리를 심을 때인지를 짐작하고 또 그것은 정확도 하다. <農民> 중에서
3) 具 常의 추모송
한평생 붓 기울여 농민의 삶그리셨네
흙에 사는 그 보람을 모두에게 일깨웠네
이나라 현대문학에 새밭을 일구셨네
토박이 농사군과 한 모습을 하셨었네
그 푸짐한 마음씨도 흙내음을 풍겼었네
세월이 야박하오매 더더욱 그리웁네
( 시, 구 상/ 글씨, 이길상 )
나. 비음
이 땅의 農民의 삶과 흙의 意味를 진하게 形象해주고 간 小說家 李無影 선생은 一九0八年 一月 一四日 이곳 음성군 음성읍 碩人里 오리골에서 李德汝씨의 차남으로 義兵亂 中에 태어났다. 本名은 甲龍 兒名을 龍九라 쓰고 여기서 幼年시절을 보낸 先生은 徽文高普를 거쳐 渡日 소설수업에 전념하여 一九二七年 處女長篇小說 <依支할 곳 없는 靑春>을 若冠未滿에 出刊發表하므로써 한국문단에 첫발을 내디딘 후 一九三二年 동아일보에서 한국 최초로 실시한 희곡현상모집에 <한낮에 꿈꾸는 사람들>이 당선되어 희곡작가로도 활약 一九三四年 동아일보 학예부기자로 입사하기 전후하여 많은 단.중.장편소설과 희곡을 발표하였고 九人會멤버로 [조선문학] 창간 주재자로 눈부신 무학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一九三九年 보다 적극적으로 작가정신을 불태우기 위한 決斷을 내려 농촌으로 들어가 <第一課 第 一章>부터 시작되는 一連의 農村農民 제재소설을 의욕적으로 창작 발표하는 한편 이 무렵의 작품을 제3단편집 <흙의 奴隸>에 묶고 제4단편집 <山家>와 장편 <鄕歌>를 [무영농민문학선집] 1.2권으로 간행하였으며 이론서인 [소설작법]을 펴내는 등 旺盛한 작가생활을 전개하였다. 一九五十年 한국전쟁의 발발로 해군에 투신 국방부 정훈국장 등을 역임하면서도 會心의 장편소설 <農民>을 발표하고 <農軍> <老農> 連作으로 발전시켜 나갔다. 그 뒤 PEN클럽 文總, 自由문학자협회 <自由文學>誌의 지도적 역할을 담당하면서 계속 작품을 발표하고 1955年 <農夫傳抄> 등으로 서울市 文化賞을 수상하였고 단국대학교수로 강의와 평론활동을 하면서 제7단편집 [壁畵]를 내놓고 시대정신을 짙은 한국적 체취로 부각한 많은 작품을 쓰다가 一九六十년 四月 二十一日 民主喊聲 속에 他界 하였다. 遺作은 [李無影代表作全集](전5권)에 대다수 수록되었고 遺族으로 未亡人 高日新 女士와 慈林 玄民 聖林 美林 祥林 二男 四女, 幽宅은 서울 倉洞 天主敎 墓域에 있다.
다. 이무영 묘비문
‘농민문학의 선구자 소설가 이무영 선생 묘비‘
비음 :’이무영 선생을 추모하며 생시에 우정을 나누던 문우 교직 전우와 그 훈도를 받던 후배와 제자들이 이 돌을 세워 징표로 남긴다(1908-1960)‘
(서울 도봉구 방학 3동천주교묘지)
5. 빙허 현진건 문학비
가. 비문
비문:<그는 한 숨을 쉬며 그 때의 광경을 눈 앞에 그리는 듯이 멀거니 먼 산을 보다가 내가 따라 준 술을 꿀컥 들이키고
“참 ! 가슴이 터지더마 가슴이 터져”
하자마자 굵직한 눈물 두어 방울이 뚝뚝 떨어진다. 나는 그 눈물 가운데 음산하고 비참한 조선의 얼굴을 똑똑히 본 듯 싶었다.> (<고향>에서)
나. 비음 :
현진건은 대구에서 태어난 한국 사실주의 문학의 대표작가이다. 그가 치욕의 일제치하에 살면서 극명하게 묘사한 현실은 그대로 ‘조선의 얼굴’이었다. 생애를 통하여 끝내 불의와 타협하지 않은 지조와 문학정신을 기리고자 여기 비를 세운다.
1965년 11월 9일 / 운산 윤장근 짓고/ 현사 김승호 쓰고/빙허문학건립위원회 세움/
6. 백릉 채만식 문학비
가. 비문 - 소설 < 탁 류 >
‘백마강은 공주 곰나루[熊津]에서부터 시작하여 백제 흥망의 꿈자취를 더듬어 흐른다. 풍월도 좋거니와 물도 맑다. 그러나 그것도 부여 전후가 한참이지 강경에 다다르면 장꾼들의 흥정하는 소리와 생선 비린내에 고요하던 수면의 꿈은 깨어진다.
물은 탁하다.
예서부터가 옳게 금강이다. 향은 서서남(西西南)으로 밋밋이 충청 전라 양도의 접경을 골타고 흐른다. 이로부터서 물은 조수까지 섭슬려 더욱 흐리다. 그득하니 벅차고 강넓이가 훨씬 퍼진게 제법 양양하다
이렇게 에두르고 휘돌아 멀리 흘러온 물이 마침내 황해 바다에다가 깨어진 꿈이고 무엇이고 탁류째 얼러 좌르르 쏟아져 버리면서 강은 다하고 강이 다하는 남쪽 언덕으로 대처(大處=市街地) 하나가 올라앉았다. 이것이 군산(群山)이라는 항구요, 이야기는 예서부터 실마리가 풀린다.‘(생략)
나. 월명공원의 문학비
백릉 채만식(白菱 蔡萬植) 문학비문
채만식의 문학비는 군산시 월명동 월명공원에 있다.
백릉 채만식 선생은 이 고장이 낳은 작가로 그의 업적은 한국문학사에 찬연히 빛나고 있다. 그는 1902년 옥구군 임파면 읍내리에서 채규섭 씨의 아홉남매중 다섯째 아들로 태어나 중앙고보를 거쳐 일본 와세다대학 영문학과를 중퇴했다. 그후 동아일보 등 기자로 있다가 1945년 봄 낙향하여 해방을 맞았고 이어 이리시로 옮겼다가 1950년 6월 11일 그곳 마동에서 지병인 폐환으로 홀연 타계했으니 향년 49세였다.
1925년 [조선문단]지에 처녀작 <세길로>로 등단한 이래 왕성한 창작활동을 통하여 무려 118편의 장단편소설과 희곡을 남겼다.그는 독특한 諷刺的 방법으로 당시대의 사회적 모순을 통렬하게 비판했는데 <레디메이드 人生>,<小妄>,<痴叔>, <太平天下> 등의 작품들을 꼽을 수 있다. 그러나 그의 대표작은 <濁流>로서 1937년 ‘조선일보’에 연재된 장편소설로 풍자적 작품과는 달리 철저한 리얼리즘의 수법으로 世態의 묘사에 뛰어난 작품이다.
<濁流>의 배경은 이곳 항구도시 群山이다. 일제의 가혹한 수탈에 농민이 어떻게 몰락해야 했으며 都市化 과정에서 한 고장의 삶의 풍속이 어찌하여 타락할 수밖에 없었는가를 歷史와 現實이라는 삶의 혼탁한 現場으로서 깊이 있게 표현되었다. 米豆場의 하바리꾼으로 전락한 丁 主事와 애정의 비리.금권만능의 부조리 등에서 끝내는 살인으로 이어지는 기구한 운명으로 희생되는 딸 初鳳을 통하여 당시의 사회상을 극명하게 묘파했다. 더불어 이 고장 사투리를 윤택하게 구사함으로써 鄕土色을 짙게 풍겨 주었다.
<濁流>는 한 시대의 역사적 현장으로서 세태의 혼탁한 흐름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으로서 인간의 탐구에 크게 기여한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이제 유서깊은 이 고장 도도히 흐르는 바다를 굽어보는 자리에 정성을 모아 여기 영구불망의 한 돌을 세워 그 업적을 길이 추모하게 되었으니 기쁜 마음 그지없다.
/1984년 6월 11일/글 洪石影/글씨 송하경/
다. <탁류>의 중심무대 - 미두장 -
[탁류]에서 ‘미두장은 군산의 심장이요, 전주통(全州通)이니 본정통(本町通)이니 해안통(海岸通)이니 하는 폭넓은 길들은 대동맥이다’고 하였듯이 미두장은 군산상권의 중심지에 위치한다.
군산시 내항으로 가기 전 네거리가 당시의 중심거리였는데 이곳에 미두장이 있고 탁류에 나오는 조선은행군산지점과 군산세관도 있다. 군산조선은행은 한때 카페로 사용되었으나 지금은 비어 있다. 탁류시대의 오욕을 세월이 지운 흔적일 뿐이다. 일제시대의 미곡창고 건물도 상당수 보존된 상태다. 당시 악명 높았던 구 군산세관 본관은 기념물 제87호로 지정되어 있다. 군산세관은 일제가 조선 농민을 착취하던 창구였다는 흔적은 간 곳 없고 현재는 근대 중엽의 건축사적 의미가 있다는 말과 붉은 벽돌을 벨기예에서 수입하여 지었다는 제국의 껍데기만 남아 있다.
다만 군산미곡취인소였던 당시 미곡장(1925년)은 없어지고 돌 하나만 남아 있다.
여기는 소설 濁流의 중심 무대인 米豆場祉이다 미두장의 본래 명칭은 군산미곡취인소(群山米穀取引所) 이다. 따로는 市場이라고도 부르는 목재 이층건물이었다.이곳은 군산의 상징이며 치외(治外)법권의 공인된 도박장이었다. 곱추 장형보의 꾐에 빠져 미두에 손을 댄 丁主事는 ‘미두’에서 ‘하바꾼’으로 전락해 빈손으로 하바를 하다가 돈을 갚지 못하면 봉변을 당하기 일쑤고 그러자면 끼니를 거를 때가 많았다. ‘미두’는 일본 대판(大阪)의 미곡시세를 놓고 사고파는 증권시장과 같은 도박장이었다. ‘하바꾼’은 ‘미두’에서 전락한 사람들이 하는 일종의 갓사리 같은 것이다. 군산 미두는 일제가 호남의 농촌자본을 노리는 식민정책의 표본이었던 것이다. <濁流>의 소설 무대는 바로 이곳 미두장을 중심으로 전개된다./글 이병훈/(1996년 7월 30일)군산문화원.
군산시내에는 지금도 일제시대 미곡창이었던 곳이 있고 옛 창고의 지붕 또는 건물벽이 당시의 잔해로 남아 있다. 지금은 도정공장, 모텔, 게임장, 수퍼마켓 등으로 변해 있다.. 당시 군산에서 중심지로 알려진 월명동 월명공원에서 항구로 빠지는 월명터널(?)이 하나 있는데 사람들은 시내에서 항구로 쌀을 운반하기 위해 터널을 만들었다고 한다. 현재 군산항에는 당시 선박이 출입할 수 있도록 만든 ‘뜰다리(浮橋)’가 있고 1925년 당시의 미두장도 몇 군데 보인다. 군산시 학생도서관에 가면 일제치하 당시의 군산시내 자료가 사진으로 남아 있다. 특히 학생도서관에 ‘군산항평면도’가 남아 있다. 이 지도는 일제강점기인 1922년부터 1931년까지 9 년 간에 걸쳐 당시 일본인에 의해 만들어진 군산항만지도다. 지도제작은 9 년 간 하루에 6 번씩 관측해서 금강의 조류. 수심. 토사. 풍랑 등을 종합하여 만든 것이다. 군산항만지도의 중요성은 당시 군산 앞바다의 수심을 수치로 표시해놓았다는 점이다. 군산항의 쌀더미를 본국으로 운송하기 위해 치밀하게 측량한 결과를 지도상에 나타낸 것이다. 일제침략은 군사적인 힘과 과학적인 치밀성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주는 자료다.
라. 생가와 묘지- 이무영 기
채만식의 생가와 묘지는 시 외각지에 있다. 생가는 복원사업을 할 양으로 현재는 방치되어 있다. 양철지붕이 허무러진 흙벽을 덮고 있는데 울타리도 없이 우물터만 남아 있다.산을 배경으로 앞이 틔여 있어 전망은 좋은 편이다. 생가에서 다시 나오면 묘지로 들어가는 길이 있고 묘지가 봉도 높지 않게 만들었다. 모비에는 ‘1902.6.17生,1950.6.11 卒,2001년 6월 碑 吉成이 다시 세움‘이라 하였다. 자 게열,손 석재,석환.
‘諷刺 또한 先生의 性格의 一面이셨다. 1959년 李無影 記’, 비음에는 ,采翁 蔡萬植 先生 1950年 49歲를 一期로 여기에 묻히시다. 30年 間의 作家生活에 “濁流”外 百餘의 快作에 剛直 總高의 先生의 面 躍然하시다.‘
7. 가산 李孝石 문학비
가. 허생과 동이가 만났던 장평천(長坪川)
팔석정은 봉평면 평촌리에 있는데 지금은 정자는 없고 팔석정이라고 새긴 글자만 전해진다고 하나 현장에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조선 중기 양사언이 강릉부사로 부임하고 8일 간 머물렀던 곳이라 한다. 팔각정 주변 경치는 사경구이(四景九異)라 하여 기암,절벽,노송 등이 덕거천과 흥정천과 합류하여 절경을 이루고 있다. 석대투필(石臺投筆), 석실한수(石室閑睡), 석평위기(石坪圍棋), 석구도기(石臼搗器), 석지청련(石池靑蓮) 등 기암 절벽의 모양새에 따라 붙인 절경들이다. 그 중 石池靑蓮의 넉자는 확연히 볼 수 있다. 봉래산, 방장산(方丈山,지리산), 영주산(瀛州山,한라산)을 삼신산이라 하여 가상적인 선경을 비유 자연을 즐긴 선조들의 석천고맹(泉石膏盲)을 알 수 있다. 신라군에 쫓겨 달아나던 진한 왕자 태기가 이곳에서 항거했다하여 태기산이라 불렀던 태기산은 이곳 봉평군의 주산이다. 이효석의 생가지 물레방아 일대를 거쳐 소백산을 넘어오니 경상도 쪽으로 넘어오는 고개 저수령(低首嶺)이 있다. 고개가 가팔라 머리를 숙여 밑을 보며 걸어야하던 저수령이다. 용평은 들어올 때 울고 나갈 때 우는 곳이다. 들어올 때는 오지(奧地)라 울고 나갈 대는 인정(人情)에 운다는 용평이다. 버스는 소설 <메밀꽃 필 무렵>의 현장을 지난다.장평천(長坪川),노루목재,어울목, 허생이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던 현장이다. 허생원이 나귀를 타고 가다가 강물에 빠졌는데 그 강이흫정천(興亭川)이 아니고 장평천(長坪川)이다. 소설에는 허 생원과 동이가 혈육의 정을 처음으로 확인하는 대목이 있는데, 동이가 물에 빠진 허 생원을 등에 업고 냇물을 건너는 장면이 있다. 그것이 장편천이다.
나. 생가
<물레방앗간>
허 생원과 성서방네 처녀가 사랑을 나누던 곳
‘돌밭에 벗어도 좋을 것을 달이 너무도 밝은 까닭에 옷을 벗으러 물레방앗간으로 들어 가질 않았나’(메밀꽃 필 무렵 중에서)
그리고 물레방앗간 앞에 또 하나의 문학비 <메밀꽃 필 무렵>이 있다.
<메밀꽃 필 무렵>
이효석 문학의 터
밤중을 지난 무렵인지 죽은 듯이 고요한 속에서 짐승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들리며 콩포기와 옥수수 잎새가 한층 말에 푸르게 젖었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붉은 대궁이 향기 같이 애잔하고 나귀들의 걸음도 시원하다.
(메밀꽃 필 무렵 중에서)
이효석은 시골에서 남녀가 은밀히 만날 수 있었던 장소로 물레방아,메밀밭을 설정함으로써 독자로부터 정서적인 동의를 얻어낸 셈이다. 가산의 문학현장을 찾는 대부분의 여인들은 달과 물레방아, 메밀밭이 있는 이곳 봉평에서 사랑을 위한 공간으로 봉평을 놓치지 않으려 한다. 메밀꽃 마을에서 연인을 만났으면 하는 심정이다.
놀라운 사실은 가산의 묘가 답사하던 며칠 전에 가족에 의해 밤중에 파주로 옮겨졌다는 것이다. 가산은 1남 2녀의 자녀를 두고 있다. 두 자녀는 미국에 있고 장녀 이나미 여사가 한국에 있다. 이 여사는 창미사 발행 <이효석문학전집> 8권을 간행했다. 모인의 말로는 군비와 유지자들의 도움으로 가산전집을 발간했다 한다. 한 노인은 1983년 당시 5만원을 주고 샀는데 15년 지난 지금도 5만원 한다는 것이다. 묘지 이전문제는 군민들 모두가 이전반대를 하였고 강원도 평창군의 관광명소로 주민들의 생계에도 직결된다는 점을 건의하였으며 대체로 그렇게 하기로 타협을 보았는데 갑자기 묘지를 이장했다는 불만이다. 주민들은 말하기를 다른 길로 통할 수 있는 길이 있으므로 군에서 굳이 가산의 묘지 쪽으로 도로를 낼 필요도 없었다는 것이다. 가산의 문학현장과 묘가 있음으로 하여 해마다 많은 관광객이 찾아오는 것으로 봉평면 주민들의 생계와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강원도 봉평은 한국의 오지요 고지대에 위치하고 있다. 지난 수해에도 예외는 아니어서 산사태가 난 곳이 그대로 방치되어 있다. 메밀꽃이 한창 흐드러져 있고 이제 푸른 대궁이가 낮은 키를 유지하며 간간히 소금을 뿌려 놓은 듯 흰 화분을 내밀고 있는가 하면 능금도 배도 나무에 달려 있으나 하나같이 탱자만한 것뿐이다. 주민들은 남쪽지방의 능금과 배 맛과는 다르다는 말을 하고 있으나 콩알 만 한 배에 배맛이 있을 것인지.
물레방앗간에서 안으로 1 킬로미터 정도 들어가면 가산의 생가가 있다. 안내판 널빤지에 이효석의 생가임을 알리는 글씨가 초라하게 붙어 있다. 메밀밭은 남자들보다 여자들이 더 좋아한다. 메밀밭이 우리에게 어떤 성적인 유혹을 가져오는 것일까. 메밀꽃의 하얀 대궁이가 온 들을 수놓을 때 탄성을 지르지 않는 사람은 없다. 서울과 대구에서 온 사람들은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는데 어느 노인은 사진 찍으라고 메밀밭을 가꾼 것이냐고 소리친다. 늦게 심은 메밀밭은 아직도 대궁이가 푸르게 솟아 있다. 언제 결실을 볼 것인지 궁금한데 푸른 것은 가망이 없다고 한다. 6.25 전쟁에 참가 다리를 잃고 의족을 했다는 노인은 자신의 의족에 의미를 부여하려는 듯 1 킬로미터 길을 열심히 걸으며 봉평을 자랑한다.
가산의 생가는 고개를 넘을 일은 없으나 산으로 둘러싸인 길을 걸어야 한다. 가산의 생가로 들어가는 어귀에는 잡목은 무성하고 소나무는 말라 줄기만 허옇다. 나무가 왜 저런가 물은 즉 군내 소나무가 모두 재선충에 말라 버렸다 하면서 현재 봉산서재 주위의 장송만 제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한다. 그것도 군에 건의를 해서 봉산서원(蓬山書院) 주변의 장송만이라도 건재하다는 것이다. 효석의 생가는 배산임수라는 명당은 아니지만 보는 이로 하여금 편안한 느낌을 주는 곳이다. 스트렛트 지붕의 일자 한옥에 ‘可山 李孝石 生家’란 글자가 처마 밑에 달려있긴 해도 문인의 생가란 향기는 나지 않는다. 洪종률이란 문패가 달려 있는 집에서는 큰 물푸레나무밑에 의자,탁자 등을 놓고 메밀묵과 동동주를 팔고 있다. 그나마 일찍 온 서울 사람들이 차지하고 있어 동동주 맛도 기다려야 했다. 생가 옆으로 꽤 큰 밭이 있고 큰 유실수들이 듬성듬성 있어 가라앉은 기분을 돋우고 있다. 생가 주변에는 나무가 많고 메밀밭,푸성귀들이 가득 심어져 있어 부농이라는 인상을 주고 있다. 한국문협에서 세운 문인표지판이 있다. 가산의 생가는 산밑에 있고 산으로 막힌 집이다. 산이 기역자(ㄱ) 모양으로 둘러 있어 可山인가. 앞은 터져 훤하고 집 왼편으로 넓은 밭이 각종 유실수로 하늘을 보고 있다. 가산의 생가는 어린시절 가산으로 하여금 정서적인 안정과 마음의 평화를 주었을 것으로 생각되는 곳이다.
다. 문협 표지석-생가
可山 李孝石 先生의 生家
1995년 12월 4일
이 집은 우리 나라 현대문학의 거목이신 가산 이효석 선생의 생가이다. 12월 23일에 출생하여 유년기를 보내는 동안 이곳의 아름다운 풍광과 순후한 인정에 접하면서 훗날 <메밀꽃 필 무렵>을 비롯한 수많은 주옥같은 문학작품을 구상한 곳이기도 하다.
이제 광복 50주년을 맞아 한국문인협회가 선생의 드높은 문학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여기에 이 글을 새긴다.
1995년 12월 4일/사단법인 한국문인협회 이사장 황 명/SBS문화재단 이사장 윤세영
라. 시인 황금찬의 비문
허공을 지나는 구름이어, 옷깃을 스쳐가는 바람 긴 여로에 오른 길손이어, 잠시 이곳에 발을 멈추고 저 하늘과 이 땅 사이에 찬란하게 피어올려 꺼질 수 없는 민족문학의 등대를 세운 가산 이효석을 기념하는 문학비 앞에서 잠시나마 생각하는 촛불이 되어지라
가산 이효석은 강원도 평창이 낳은 불후의 작가이며 한국 현대문학의 기수이기도하다 모든 것은 세월 속에 묻혀 가고 시간이 가면 끝이 온다고 하지만 1942년 이후 가산의 문학은 흐르는 세월안에서 오히려 살아오고 시간이 갈 수록 그의 예술은 빛을 더해 가고만 있다.향토의 정을 깊이 둔 그의 문학정신은 이국토에 길이 이어 살 겨레의 가슴마다에 광명의 강물이 되어 다함 없이 구비처 흘러 갈 것이다. 메밀꽃 필 무렵,향수,낙엽기,산정,황제,모두 한국 문학의 한 맥으로 살아 있다. 예술가는 사라저 가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작품 안에 살아 있는 것이다.
1980년10월18일, 황금찬 짓고 전면 유진오 쓰고 후면 박경종 쓰다 도안 원승덕
마. 비문의 연보
바. 율곡과 판관대(判官垈) :
판관대는 강릉 오죽헌에서 서기 1530년음 12월 26일 탄생한 율곡 이 이 선생의 잉태지로 전하는 곳이다. 조선시대 강릉부에 속했던 이곳은 강원도 평창군 龍坪面 白玉浦里로 부르는데 마을 뒤로 松項峙, 노정현, 마전치 등 산마루가 부챗살처럼 둘러 있고 앞에는 양지동에서 흘러나오는 興亭川이 판관대를 돌아 錦塘山 밑에서 束沙川을 만나 큰 줄기를 이루는 곳으로써 산태극, 수태극이라 부르는 곳이니 동방의 성현이 잉태할만한 곳이라 할 것이다. 율곡 선생의 어머니 신 사임당 행장에도 蓬坪에 살았다는 기록이 보이거니와 강릉땅에서 지내던 신사인당이 용을 현몽하고 서기 1536년 음력 2월에 이곳 봉평으로 오자, 서울에서는 수운 판관직에 있던 부군 李元秀 공이 말미를 얻어 이곳으로 오게 되니 그 때에 율곡 선생이 잉태한 것으로 전해온다. 당시 원수 공의 벼슬이 판관이므로 이 곳을 판관대라 부른다. 그 후 조선 현종 때(1662) 이러한 내력이 알려져 사패지(賜牌地)를 받으 바 있으며 1906년에 이곳 학자들이 봉평면 평촌리에 선생의 영을 모신 봉산재를 짓고 해마다 제향을 받들고 있다. 그러나 성현의 유적지가 그 동안 보살핌이 없어 뜻있는 이들이 매양 민망히 여겨오더니 이 고장 상록회원들이 귀한 뜻을 모아 애쓴 보람이 있어 이번에 주민의 정성과 평창군의 도움으로 소중한 기록을 적어 후손에게 길이 전하고자 이 비석을 세운다 1988.9.20.
하찬수 씨는 율곡 선생의 잉태지는 판관대 있는 곳이 아니라 길 아랫쪽 메밀꽃밭 일대이라고 주장한다. 필자는 사진을 찍어 두었다. 일행이 답사하던 그 때 메밀꽃이 만발하여 있고 그 아래쪽으로 벼가 누렇게 익어 있다. 봉산서재는 평촌리에 있는데 이원수 공이 수운판관을 지낼 때 회임한 이유로 1896년 유학자 홍재홍이 고종에게 탄원하여 판관대를 중심으로 사방 10리를 서재위토로 하사받고 유생들이 성금을 모아 준공하였다.
사. 이효석 문학비(2)
1)
낙엽을 태우면서 나는 화단의 뒷바라지를
깊게 파고 다 타버린 낙엽의 재를 -
땅 속 깊이 파묻고 엄연한 생활의 자세로 돌아서지 않으면 안 된다.
이야기 속의 소년 같이 용감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 수필집: 낙엽을 태우면서 중에서 ---
2) 이효석
소설가. 호 :가산 可山 1907.2.23 강ㅇ원 평창 추생. 경성제국대학 졸 1928 조선지광 ‘도시와 유령’ 데뷔 1933 구인회 회원. 1934 평양대동공전 교수 대표작: 메밀꽃 필 무렵, 향수 외 다수
3) 충남 보령시 개화예술공원 2019.5.18.최임영과 함께
8. 여류작가 무잠武簪 백신애 문학비
가. 문학비문
‘작가 白信愛(1908-1939)의 고향’
永川은 일찍이 槿友 회원 등으로 국내외에서 항일독립운동을 펴며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첫 여성으로 <꺼래이>, <적빈>, <아름다운 노을> 등의 작품을 남긴 작가의 고향이다
나. 백신애 연보
다. 단편 <赤貧>(1934)
1930년대 기층사회에는 농토가 없어 농업노동자로도 살아갈 수 없는 시대였다. 일제는 1910년대에 토지조사사업을 하고 20년대는 산미증산정책을 펴는 등 농업정책을 강화하여 식량문제와 일본 내지의 농민문제를 해결코자 하였으나 1929년 세계대공황으로 인해 실패하게 된다. 일제는 1937년 식민지공업화정책을 펴기까지 한국농촌의 수탈화과정이 극심한 것이었는데 이 시기 한국인들은 먹는 문제에서도 자유롭지 못했다. <적빈>의 매촌댁늙은이는 못난 두 아들과 두 며느리를 먹이기 위해서 거지같은 생활을 한다는 내용이다..
여기서 매촌댁은 멀리 송우암의 후예란 말을 하고 있는데, 이것은 ‘백내유의 아버지 백봉석이 가난에 못이겨 어린 내유형제를 데리고 처가살이를 한 마을이 경산군 안심면 梅村마을이다.’라는 전기적 사실과 관련된다. 매촌댁은 백신애에게는 증조모가 된다. 영천서의 그의 택호가 매남댁이었고 은진 송씨 매촌댁이 경산 매촌에 살았다.
매촌댁은 백신애가 어렸을 때는 영천에서 살았고 성장 후에는 경산에서 살았다. 이 소설은 가난의 질곡을 숙명처럼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조선여성의 운명을 여성해방이라는 입장에서 예리하게 관찰한다. 소설 <꺼래이>와 <적빈>에 등장하는 여인은 어머니 또는 모녀의 관계로 있다. <적빈>의 어머니는 평생 남의 집 일을 하여 두 자식을 멱여 살려야했고 남에게 굽신거려야 입에 풀칠할 수 있는 거지의 삶이다. 어머니 매촌댁 남편은 일찍 죽고 맏아들 ‘도야지’는 축신과 같아서 자기 앞가림도 못하는 형편이다. 둘째 아들 매촌이는 남의 집 고용살이로 4 년 만에 60원을 저금 하였으나 마을의 알랑 놀음군과 놀음을 하여 돈을 몽땅 잃어버린다. 몇 백 냥이 모이면 그것으로 남의 논밭을 대지하여 농사를 지으려던 매촌이다. 돈을 잃은 후 매촌은 마을의 알랑 놀음군이 된다. 매촌 늙은이는 남의 집 일을 하여 벙어리 며느리와 큰 아들 작은 며느리까지 먹을 것을 대어준다. 그런데 벙어리 며느리에게서 손자를 보게되어 기쁨을 얻게 된다는 내용이다. 벙어리 며느리는 보리쌀도 먹지 못해 물을 먹고 아이를 해산한다. 매촌늙은이는 벙어리 며느리를 위해 양식을 구걸하러 동네로 다니며 구걸한다. <적빈>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매촌댁의 적빈이 과연 개인의 무능에서만 연유하는 문제인가 하는 것을 생각케 한다. 빈곤의 배후에는 일제식민지경제의 약탈을 문제삼는 것이어서 이는 일제에 대한 강한 저항과 비판의 목소리로 들리게 한다. 이 시대 하층민의 가난을 제국주의 침탈의 문제가 아니라 조선인 자신의 태만과 무능으로 치부하였던 조선총독부의 죄악상을 문제삼는 데 있다. 소설 <적빈>의 내용자체가 무능한 패배주의자와 식민지치하에서도 여유롭게 살아가는 유능한 농민을 대립시켜 놓은 것에서 그의 잠복된 계급의식을 발견한다. 결말 부분은 다음과 같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작은며느리마져 오늘밤에 해산을 하는 판이면.....”
하는 생각이 나자 그는 두 눈이 아물아물 어두워지며 금방 앞으로 꼬꾸라질것 같았다. 연방 흘어져 내리는 속옷을 한 손으로 움켜잡고 떨어진 속옷 사이로 코끼리의 껍질 같은 몸둥이를 벌름거리며 그대로 줄달음질을 치는 것이었다.
9. 남석 안수길 문학비
가. 모란공원의 문학비
동쪽 창문이 훤했다.
날이 새기 시작하는가 보다
꼬꼬 ---
닭이 벌써 여러 홰 울었다
소설 [北間島] 첫 머리에서
나. 송지영의 글(비음)
‘南石 安壽吉 先生은 1911年 咸南 西湖津에서 나시어 間島 中央下校와 日本 早稻田大學에서 修業,1935年 同甲인 金現淑 女史와 結婚 <朝鮮文壇> 誌에 短篇 當選을 始發로 文學에 專心하셨으며 間島日報 滿洲日報 등 言論界에 從事,解放을 맞아 歸國 京鄕新聞 文化部長을 歷任, 敎育界投身,龍山高校를 거쳐 서라벌 藝大 梨花女大 等에서 文藝創作을 가르치셨다.藝術院 會員,國際P.E.N 클럽 韓國本部理事 等을 지내셨고 아시아 自由文學賞 서울市 文化賞 三.逸文化賞 등을 받아셨으며 作品으로 [北間島] [第三人間型] [亡命詩人] [風車] [城川江] [浮橋] [생각하는 갈대] [第二의 靑春] [流星] [來日은 風雨] 등 많은 勞作을 남기셨다.
1911年 11月 3日에 나시어 1977年 4月 18日 不歸의 길 떠나시다.遺族으로 夫人 金現淑 女史와 아드님 柄燮 柄煥 柄燦 따님 순姬 荀嫄을 남기셨다
1979年 4月 18日 세우다 文友를 代表하여 宋志永 씀
다. 장시 <민족의 이름으로 방랑하기>
- 「북간도」 작가 안수길의 흔적
청풍납자로 살까/평생떠돌이로 산 시인도 있다는데/진실로 나를 구제할 이데아는있던가/고신척영孤身隻影, 그림자 앞세워/훠이훠이 발길따라/경기도 모란공원/옛 간도 땅으로/ 문학과 역사노트 배낭에 넣고/한 작가의 gms적 찾아 떠난다/너 떠난 자리 나 떠난 자리//
필자의 시집 「새벽강물로 얼굴 씻고」(2019)에서
10. 재만작가 김창걸 문학비
가. <암야>의 종결부분 - 비문
이 어두운 밤이 밝으면 빛나는 대낮이
되듯이 나와 고분이와의 앞길에도 이 어두운
밤이 지나가고 밝은 해발이 비쳐주기를
마음 속으로 빌면서 나는 어두운 이 밤길을 빨리하였다.
단편소설 <<암야>>(1939)에서
나. 작가 략력
다. 단편 <지새는 밤>(1939)(원명<암야>)
단편 <지새는 밤>(1939)은 김창걸의 대표작으로 이미 [싹트는 대지]에 발표되었던 작품이다. 주인공 ‘나’는 두 가지 문제로 고민하고 있는 청년이다.첫째, 가난 때문에 12살에 조선에서 간도로 온 것인데 간도온 지 10년에 가난을 벗지 못한다는 사실과 둘째는 돈 때문에 사랑하는 ‘고분이’를 놓치게 된 일이다. 고분이는 빚 150원 때문에 오십이 넘은 윤 주사나 남가에게 시집을 가야할 형편이다. 그러나 ‘나’는 고분이의 빚을 청산하고 데리고 올 힘이 없는 것이다. 고분이는 “야! 명손아, 넌 왜 돈이 없늬 ?하고 흐느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이러한 소설의 제재는 당시 간도사회에서 돈값으로 처녀나 남의 아내를 매혼 또는 탈취하던 악습이 있었는데 이로 인한 피해자는 주로 조선족이었다. 매혼으로 치부까지 한 최 영감이 있는가 하면 매혼으로 오히려 집을 망치게된 돌이의 경우가 있어 대비되기도 한다. 고분이의 아버지 김 유사도 최 영감의 돈 때문에 나이 많은 윤 영감에게 딸을 주기로 한다. 나와 고분이는 여러 경로를 통해 그 부당함을 호소하거나 억지를 부려보았으나 효과가 없다. 그들은 마지막 방법으로 마을을 떠나기로 약속한다. 이튿날 ‘나’와 고분이는 새벽닭이 울기를 기다려 노루고개 밑에서 만난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그들의 떠남의 앞에 기대와 성취가 같이 할 것인지는 알 수 없는 상황이다.
”이 어두운 밤이 밝으면 빛나는 대낮이 되듯이 나와 고분이와의 앞길에도 이 어두운 밤이 지나고 밝은 해발이 비쳐주기를 빌면서나는 어두운 이 밤길을 빨리하였다“
비문에는 이 종결부분이 새겨져 있다. ‘나’가 원하는 것은 좋은 양복을 입고 고운 부인을 얻으려는 것이 아니다.다만‘광목바지저고리나 다듬이하여 원칠하게 입고 도리매두루마기나 입고 그리고 고분이니는 하비단은 어림도 없으나 숙수분홍저고리에 수박색치마나 입고 ...그리고 올 단오에 씨름구경 가는 것’이다. 또는 ‘마도강에 돈바람만 분다더니 쪽지게바람에 어깨만 붕어나게 하는 것’은 간도 한인들이 간도가 살기 좋다는 선전에 기만당하여 이주해왔음을 보여주는 대목도 있다. ”왜 이 땅에 가난뱅이로 태어났는가?“라는 간도이주 젊은이들의 좌절의식과 이주 정착을 방해하는 간도사회의 악습을 고발함으로써 새로운 세계로의 지향을 꾀하려는 의식을 볼 수 있다.
김창걸의 소설은 간도이주민의 고난사를 다룬 소설, 이주민의 민족주의를 표방한 소설, 그리고 사회주의 성향의 작품군으로 대별할 수 있다.
김창걸은, 한국의 근 .현대문학의 주류가 일본유학파에 의해 형성되어 왔고 한국문학사 역시 그들 아류의 작품연구사에 다름 아님을 부인할 수 없는 차에, 한국에서 출생하고 6세 이후 줄곧 간도 일원의 만주 북방지역에 살면서 간도를 제2의 고향으로 지켜왔던 향토작가라는 점을 들 수 있다. 그는 식민지시대 민족의 아픈 역사를 겪었으며 민족의 해방과 공백기의 혼란상황 그리고 중국의 소수민족으로 맞은 사회주의 사회와 문화대혁명기 작가로서의 수난 등 줄곧 중국현대사의 굴곡을 지켜온 만주민족문학의 산 증인이다. 중국 현지 조선족 인사들은 김창걸과 김학철 등의 연변대학조문학과 설립으로 소수민족으로서의 민족교육열을 한층 높였다고 말한다. 그의 문학은 문학으로서 조명되어야 할 터이지만 식민지시대 김창걸의 외세 저항정신은 그것대로 조명되어야할 것이다. 국내에서는 1939년 10월에 이광수, 김동환 등이 조선문인협회를 결성하고 이것이 조선문인보국회로 변질되어 조선문학은 일본정신과 일치해야한다는 주장을 의식할 때 김창걸, 안수길, 현경준, 신형철의 활동은 그 중요성이 간절한 바 있다. 해방공간에서도 문단에서는 변변한 민족문학을 내놓지 못했다. 고난의 식민지시대를 어떻게 살았는가라는 자기반성이 작가의 양심을 배반할 수 없다는 문학인의 진지성 때문이다. 재만작가 김창걸,안수길,강경애,윤동주 등 이들의 인간과 문학을 통해서 식민지시대 민족문학을 다시 논의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김창걸은 민족이 해방된 뒤에도 간도 땅을 떠나지 않고 새로운 인민공화국을 맞아 민족적 뿌리를 지키려 하였다. 그는 간도 민족문학을 지키고 작가 김학철과 더불어 후학들을 위해 일생을 바친 작가로 인정된다. 식민지시대 문학을 논할 경우 항상 인간과 문학은 별개의 문제였다. 삶으로서의 인간과 신념으로서의 문학을 함께 이야기할 수 있는 작가가 다름 아닌 재만 작가 김창걸임을 밝혀둔다.
11. ‘갯마을’의 작가 오영수 문학비
가. 문학비
- 작가 吳永壽, 여기 잠들다 -
나. 연보(年 譜)
12. 요산 김정한(金廷漢) 문학비
가. 사람의 길 – 비문
사람답게 살아가라
비록 고통스러울지라도
불의에 타협한다든가
굴복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사람이 갈 길은 아니다.
나. 권오현의 글 - 비음
김정한 선생은 1908년 경남 동래에서 태어나 동래고보를 거쳐 와세다대학 제일고등학원에서 수학 중 1932년 양산 농민봉기 사건에 관여 피검되셨고 그후 굿꿋한 의지로 항일운동에 참여 수 차례 고난을 겪으시면서도 1936년 <사하촌>이라는 작품을 발표 잇달아 탁월한 작품활동을 하던 중 일제 말기 뜻한 바 있어 붓을 꺾고 지내시다가 끝내 민족에 대한 뜨거운 사랑을 버리지 못해 1966년 <모래톱 이야기>로 문단에 복귀 <수라도>, <인간단지>, <산지족> 등 작품을 계속 발표하면서 민족문학의 새 길을 전개, 그 공로로 부산시문화상, 한국문학상, 문화예술대상, 문화훈장 등을 받으신 분이다. 고희를 맞아 후학과 뜻있는 시민들은 선생의 뜻을 기려 이 비를 세운다. 건탑일 1978년10월 27일/건립자 요산 김정한 선생고희기념사업회 회장 권오현
13. 소영 박화성 문학관
가. 문학관 찾기
소설가 박화성의 문학관은 목포문화원과 같이 있다. 한일합방 후 목포부 청사로 사용하던 건물로 목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붉은 벽돌로 쌓은 이층 건물인데 벽돌 빛깔이 현재의 것과는 달리 진홍이다. 르네상스식 고풍의 건물로 1900년에 지은 것이다. 현 목포문화원이 있는 이곳은 식민지시대 일본 영사관이 있던 자리로 박화성의 문학관은 이층에 있다. 현재 ‘역사의 거리’로 지정하여 해마다 이 거리 일대에서 일제의 수탈현장을 재현하고 있다. 목포는 1897년 10월 부산,원산,인천에 이어 4 번째로 개항된 항구도시로, 일제가 항구도시의 특성을 이용하여 물류기지로 수탈하던 곳이다. 목포인들은 일제 때의 5대 도시의 명성을 뒤로한 채 정치,경제,역사,문화적으로 도시발달이 멈춰져 있다고 인식한다. 덕분에 일제시대에 세워진 건물들이 다수 그 원형을 보존하고 있다. 조선 자본의 수탈회사인 동양척식주식회사, 일본영사관, 만호진터, 동본원사, 일본인 거리, 호남은행 등이다. 박화성의 문학관은 옛 동척에서 5분 거리로 유달산 노적봉 바로 아래에 위치한다.
건물 입구에 박화성문학 표지가 있는데 ‘소설가 朴花城(1904.4.16- 1988.1.30) 문학의 산실’이다. 말하기를, 이곳은 ‘1925년에 등단한 선구적인 여류작가 素影 朴花城 여사께서 四半世紀(1937-1962) 동안 거처하며 [고개를 넘으면] 등 많은 명작을 쓰는 한편 우리 문학 재건기에 호남 일원의 문학도들을 격려지도한 문학의 보금자리‘라 한다.
이층에는 작가가 사용하던 유품, 편지, 창작집, 관련연구서, 문학업적 등 다양한 내용을 전시하고 있다. ‘박화성과 목포문학’,‘박화성의 작품세계’는 해방전과 해방후로 나누어 체계적인 이해를 돕는다. 설창수 시인의 경하, 송수 엽편, 당시 소설가 전숙희의 긴 조사가 주목을 끈다.
나. 해방전 작품세계 - 패배의식과 극복의지
박화성의 문학은 해방을 고비로 하여 제1기, 제2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제1기 문학은 1930년대의 활동을 말하는데 주로 민족의식이 뚜렷한 시기의 작품이다.
이 시기 박화성의 관심은 주로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 핍박받고 가난에 시달리는 노동자나 농민들의 참상에 집중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이들 노동자나 농민들 삶의 비참성을 리얼하게 그리는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비참한 상황을 이겨낼 수 있는 용기와 희망을 불어넣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작품은 강한 사회의식과 일제에 대한 저항의식을 보여주면서도 당시 성행했던 경향파 문학과는 본질을 달리한다. 그는 저항의지를 도전적으로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농민과 노동자들이 스스로 깨우치도록 하고 있다. [下水道 工事](1931), [洪水 前後](1934), [旱鬼](1935) 등이 그 예이다. 이처럼 상황에 패배하지 않고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그것을 극복해 이겨내려는 의지를 잃지 않는 건강성은 이 무렵 박화성 문학의 중요한 특징의 하나이다.
장편 [白花] 역시 그의 문학노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기념비적 작품이다. 이 작품은 한 개인의 불행을 민족사적 입장에서 이해하고 있는데 이것은 향후 전개될 박화성 문학의 한 모델이 되고 있다. 이같은 뚜렷한 작가의식으로 식민지상황이라는 특수한 여건에도 불구하고 작가적 위치가 더욱 확고해졌다고 할 수 있다.
다. 해방후 작품세계 - 의지의 미학
해방 후에도 박화성은 [婦德], [어머니와 아들], [증언], [평행선], [형과 아우] 등의 단편을 발표하지만, 장편소설시대라 할만큼 장편에서 다작을 이룬다.
1955년 새로운 해방의 시대를 짊어질 젊은 학도들의 내면세계를 조명하여 그들의 포부와 이상세계에 올바른 길을 제시하면서 신구세대간 이념의 대립이 아닌 전통정신으로 이어지는 동질적인 세계를 추구한 [고개를 넘으면]을 비롯하여 은혜와 원한을 초월할 수 있는 강인한 정신을 추구한 [사랑],숭고한 봉사정신으로 남녀간 애정과 우정을 극명하게 밝혀준 [벼랑에 피는 꽃], 완고하고 보수적인 시집에 들어가 어려움을 무릅쓰고 행복을 얻어낸 [내일의 태양], 독립정신에 투철한 희생정신을 묘사한 [타오르는 별], 4.19때 희생된 학도의 애인이 체험하는 강인한 생명력을 추구한 [태양은 날로 새롭다], 자유를 찾아 월남한 여성이 온갖 고난 속에서도 의지력 하나로 살아가는 [거리에는 바람이] 등의 장편들은 하나같이 강인한 의지력이 기본으로 깔려 있으며 낡은 윤리에 대한 비판과 새로운 윤리를 어떻게 정립해야할 것인가에 관심을 보였다. 박화성은 이런 문제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역사의식 혹은 사회의식을 결코 소홀하지 않았다. 그는 해방에서 6.25를 거쳐 4.19에 이르는 역사적 사건에 작중인물들을 구체적으로 관련시킴으로써 개인의 삶을 민족사의 맥락에서 이해하고 파악하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해방 이후 박화성 문학은 의지의 미학을 통해서 새로운 시대와 사회에 적응해나가는 새로운 모랄을 창출해내는 신윤리주의(新倫理主義)를 추구했다고 할 수 있다.
라. 박화성과 목포문학
1897년 개항한 목포는 박화성 선생이 태어날 무렵(1904년)엔 러시아,영국,일본 등 열강들의 거류지로 지정되어 사회 경제적으로 혼란스러운 상태였고, 일본 식민정책이 시작되면서 일본 상인들이 몰려와 식민지 경제를 이루어 신흥도시로서의 면모를 갖춰가고 있었다. 목포의 이와 같은 이상 활기 속에서 성장한 그는 그의 작품에서 목포를 사회구조적 모순을 드러내는 도시의 대명사로 자주 등장시켰다. 지방도시 목포에서 거주하면서 도시와 농어촌을 생활공간으로 하여 일제 식민정책으로 병든 현실과 잠든 의식을 일깨우고 고발, 민족적 수난의 증언을 함과 동시에 지방주의로서의 문학적 성과도 보여주었다.
박화성 선생은 김우진(金祐鎭) 선생과 함께 1920년대 목포문학의 선구자라 할 수 있다.
1947년 목포에서는 박화성 첫 단편집 [고향(故鄕)없는 사람들] 출판기념회가 열려 이를 계기로 용암동 박화성 선생의 서재 세한루(歲寒樓)는 이동주,조희관, 최일수 선생을 비롯한 많은 목포문인들의 보금자리가 되어 문학과 현실을 논하였으며 <밀물>이라는 同人誌가 발의되었으나 책으로 나오지는 못하였다. [호남평론], [예술문화], [갈매기] 등의 문학지를 통한 목포문인들의 활동은 1950년대 접어들면서 차범석,권일송 등의 우수한 작가를 배출,황금시대를 이루었으며 1958년에는 목포문인협회가 창립된다.1960년대는 최하림,최인훈,김 현 등의 등단으로 목포문학이 활기를 띄게되었다.
마. 6.25와 단편 <마지막 편지>
아들아 ! 내 아들아 !!
재영아 ! 내 아들아 !!
천만번도 더 불러온 이 이름인데 그
때마다 그 때마다 명치끝과 머리끝이
끊어질 듯이 쓰리고 아프던 이 이름인데
.......
위의 대목은 박화성 문학관의 진열장에 전시되어 있는 단편 <마지막 편지>의 친필부분이다. 진열장의 대목에 아무런 설명을 하지 않는다면, 한 어머니가 아들에게 주는 절절한 서한일 것이다. 박화성의 소설세계는 해방을 고비로 전기와 후기로 나누어보는 것이 일반적인 예임을 앞에서 보였다.
전기에서는 식민지치하 가난한 노동자와 농민들의 참상에 관심을 집중하였던 경향이다. 해방후의 박화성은 일제치하와 6.25,4.19 등을 체험하면서 역사와 개인의 삶을 대응시켜 역사적 변화가 개인의 삶을 어떻게 좌절시키고 몰락의 과정을 겪는가를 보여주면서 세계에 대한 인간의식의 부정적 변화와 긍적적인 변화의 상호관계를 윤리적 관점에서 보여주고 있다. 그 전형의 예로서 단편 <마지막 편지>와 <미로>를 들 수 있다. <마지막 편지>는 서간체형식을 동원하고 있다. 아들 재영에 대한 모정의 절절한 감정을 서간체를 통해 효과를 얻으려는 것이다. 삼대독자인 아들 재영은 어렵게 일본 유학을 시켰는데 학병에 끌려가 소식을 모르다가 기적적으로 살아서 돌아왔으나 다시 6.25가 터지자 의용군으로 끌려간 것이다. 그러나 친구들은 귀환했거나 혹은 최현처럼 의용군에서 빠진 사람도 있는데 재영은 전쟁이 끝난 지 34년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는다고 호소한다. 작가의 호소력이 너무 절실하여 자전소설로 인식되는 <마지막 편지>는 전쟁의 현장을 작품 속에 개입시키지는 않으나 전쟁의 여진을 문제삼고 있다. 그 전쟁이 명분 없는 전쟁이라고 인식할 경우 더욱 심각한 것이다. 한국사회가 안고 있는 역사적 파편이 주인공의 운명에까지 기능함으로써 비극은 일시적인 비극으로 끝날 수 없다 한 인간을 적敵)을 돕는 학도병으로 강제징집하거나 의용의 이름으로 반의용적인 폭거에 동원한다면 그 정당성을 어떻게 변명할 것인가 하는 역사의 횡포를 문제삼는다. 전쟁이 아무리 정당하더라도 한 고귀한 생명을 초극할 수 없다는 모정의 극치를 호소한다. 호소력은 독백에 의해 강조된다.
아들아! 내 아들아 ! 24세에는 적국의 학병으로 강출되어 죽었다가도 살아 왔으
니 30 세에는 동포 싸움에 의용군으로 끌려갔으니까 전쟁이 끝나면 그래도 생사쯤이야 알게 될 것이라고 이 해나 저 해나 피나게 기다리며 34년이라는 길고 긴 세월을 거듭해 왔다.
속담에 팔자 소관이라는 말이 있거니와 그렇게나 준수하게 생긴 귀골인 네가, 천품도 평온하고 선량한 네가, 대관절 어떻게나 험상궂고 기구망측한 팔자를 타고 났길래 보통 인간이 80평생에서도 당하지 않았을 남의 전쟁터 과녘물이 되었었을 까?
박화성문학은 이 경우 그의 타고난 여성적 호소력으로 역사와 개인의 비극을 통한하는 힘이 강하게 부각된다.
중요한 것은 역사적 의미이거나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한 개인의 생명성이라는 점이다. 아들 재영이가 일군에 충실히 협조했다거나 의용군으로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는 것은 허명에 불과하다. 존중되어야하는 것은 생명중시사상이다. ‘최악의 경우 외로운 혼령이라도 이 집에 깃들어 다오.재영아! 내 아들아! 하늘의 뜻이 허락되실 때,우리의 노력과 염원이 이루어질 때, 너와 나는 제2의 기적으로 다시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는 절절한 기다림이다. 이러한 과잉감정은 서사적 객관성을 넘는 수준이지만 우리 시대의 민족적 비극을 다시 반복하지 않아야한다는 메시지로 보아야할 것이다.
14. 초무(樵霧) 유승규(柳承畦)문학비
가. 소설 [貧農] 첫머리 - 비문
“제미 붝키 있어?”
술해 넣은 단지같이 이불로 꾸리고 앉아 아침 겸 점심으로 밀기울 찐 것을 쥐어먹던 곰쇠는 이렇게 아내를 불렀다,
“제미 붝키 움써”
소설 [貧農] 첫머리
나. 이동희의 글 - 소설가 초무 유승규
소설가 樵霧 이승규 선생은 1921년 1월 4일 충북 옥천군 군북면 추소리 유흥렬 선생과 성옥이 여사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관향은 文化, 본명은 在萬, 1956년 [자유문학]지에 이무영 선생 추천으로 문단에 등장, 농민제재 소설창작에 일관하여 중단편 <貧農> <두더지> <아주까리> <느티나무> 장편 <屈辱日誌> <愛鄕曲> <푸른별> 등 150여 편의 소설들을 발표하였다.
주로 가난한 농민의 한과 농민사회의 구조적 모순 일제 강점기 농민의 실상을 표출하여 전환기 농민문학을 활짝 꽃피우고 한국문학사를 빛내었다.
향리에서 필생의 장편소설 <떠꺼머리>를 탈고한 후 1993년 9월 16일 젖은 붓을 던지고 추소리 호반에 누웠다.
뒤따라온 미망인 김현옥 여사와 함께 슬하의 혜정 인식 남매는 성가하여 농업과 교직에 임하고 있다.
흙의 작가 유승규 선생은 ‘흙의 문학상’, ‘흙의 문예상’, 그리고 제1회 ‘한국농민문학상’,‘옥천문화대상’을 수상하였고 창작집 [農旗], [農地] 장편소설 [춤추는 山河], [흙은 살아 있다], [익어가는 포도송이] 등의 저서를 남겼다. 선생의 올곧은 문학정신을 기리고자 여기 향수의 터전에 기념비를 세운다
1999년 5월 15일/ 글 이동희 / 글씨 인영선/설계 홍도순/후원 한국농인문학회 외/
다. 옥천의 문인과 교동집
옥천 출신 시인.작가로는 정지용 시인, 유승규 작가 외에 시조시인으로 李殷邦(1940생, 196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다도해 近景> 당선), 金泳玉(1931생,1957년 조선일보 시 <表情> 당선), 郭于姬 (1937생,1982년 현대문학에 시 <木蓮>추천), 李美淑(1952생, 소설집[첩살이]로 등단) 등이 거론되고 있다.
시인 정지용, 소설가 유승휴를 배출시킨 옥천죽향초등학교에는 육영수의 휘호탑이 있다. <웃고 뛰놀자 그리고 하늘을 보며 생각하고 푸른 내일의 꿈을 키우자> 육영수 역시 옥천 죽향초등학교 출신이다. 육영수의 생가를 가보았다. ‘육영수 생가지’는 충북 기념물 재123호로 옥천군 옥천읍 교동리에 있다. 옥천읍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20여 분이면 교동에 이르게 된다. 생가지를 보고자 하였으나 관리자가 출타중이고 평소에도 문을 열어놓지 않는다고 한다. ‘육영수 여사가 1925년에 태어나 1950년 박정희 대통령과 결혼하기 전까지 살았던 집이다. 이 집은 흔히 ‘교동집(校洞宅)’이라고 불리어지던 옥천지역의 명가로서 1600년대부터 김정승,민정승,송정승 삼 정승이 살았던 집이라 전해진다. 집주위를 둘러보았다. 1918년 육 여사의 아버지 종관 씨가 매입한 집인데 현재는 관리자의 거처만 두 채 있고 나머지는 헐었다는 것이다. 평수는 알 수 없으나 종횡으로 각각 50미터는 되지 않을까 한다. 각종 고목이 지난 세월을 말하듯 늙어 있고 왼편으로는 큰 동산이 이어져 있다. 뒤로 헐어진 담 너머로 지킴이 개들이 두어 마리 나와 짖고 있다. 옛 권세가 남았다 한들 사람 없는 집에 정적밖에 무엇이 있을 것인가. 동네 사람들은 고목 밑 평상에서 한담을 나누고 있었으나 무엇에 지쳐있는 듯 살뜰한 반응이 없다. 버스시간을 모르고 무턱대고 기다렸는데 알고 보니 교동 앞에 서는 버스시간이 정해져 있는 것이다. 교동에 옥천향교가 있다. 건물배치는 전학후묘(前學後廟)로 강당인 명륜당과 학생들의 거처인 동재(東齋)와 서재(西齋)가 있다. 뒤편에는 문묘인 大成殿과 동무(東廡).서무(西廡)가 있어 공자를 비롯한 성현들을 모시고 춘추로 제향을 받들고 있다고 예의 향교처럼 소개하고 있다. 명륜당 원주에는 笙簧(생황)五典,筐篚(광비)六藝라 쓰여 있어 향교의 옛 교육내용을 전하고 있다.
15. 소설가 정종수 문학비」
가. 문학비
제3작품집
왜 자꾸 소설을 쓰지 않으면 안 되는가
그 해답은 아직 나도 모른다
그것을 깨달을 때 내 인생이 끝장 아닌가 싶기도 하다
하더라도 내가 숨을 쉬고 있는 한
소설쓰기와 싸울 수밖에 없을 것으로 안다
「수전시대」 후기 中에서
나. 鄭鐘秀 1931 - 1999
하동군 청암면 태생으로 범우 부산철도국 부산일보기자역임 1965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소설 당선 1980년 현대문학 등단 저서로는 ‘땡뛰기고향’ ‘까마귀들,’ 수전시대‘, ’흰봉투운동‘ ’삼각주‘ 등 수많은 소설과 수필집 발간 등 왕성한 집필활동을 펼치다. 1999년 지병으로 별세하였다.
다. 경남 하동군 하동읍 하동공원의 시의 언덕
건립 2008년 4월 19일 답사: 2019년 2월 24일
16. 소설의 배경 - 거제포로수용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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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광기의 흔적
2006년 1월 18일 도하신문 광고에는, 2010년에 한국이 세계경제대국 10위권에 들 것이라는 밝은 전망과는 진실로 관계없는 광기(?)의 격렬성 구호가 있다. 신문광고는 ‘좌익세상’이라는 구호 밑에 ‘건국사와 이념, 정통성과 정체성을 모르는 무지몽매한 정권이 반미.용공의 반역세력을 동원해서 대한민국을 점거했다’며 현 정부를 비판하는 섬뜩한 광고문을 말한다.
이 광고문을 일부 정치 세력들의 일상적인 외침정도로 간과할 것인가 아니면 좀더 심각한 의미로 받아들여야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앞서, 선진국 진입을 눈앞에 두고 있는 한국인으로서 아직도 이데올로기문제에 휩싸여 있는 현실을 어떻게 절망해야하는가를 묻게 한다. 한국의 중심지 종로, 시청 앞 네거리에서 아직도 주말마다 좌우익이 번갈아가면서 촛불과 몽둥이로 민주주의를 외치는 그 이면에는 한국현대사를 국토분단이라는 비극적 현장으로 몰고 갔던 반세기 전의 한국동란 6.25를 상기해야하는 현장임을 또한 부인하지 못한다.
그것은 이데올로기로 인해 받았던 깊은 상처가 치유되지 않은 채 경제대국에 대한 꿈과 민족통일이라는 낭만적 과제만 추구했던 결과였음을 증언하는 현장이다. 그것은 누구도 기억하고 싶지 않은 1950년대의 거제도 포로수용소를 상기할 경우 당시 왜 우리는 이데올로기의 포로가 되어 그 인간광기에 동조하고 있었는가를 묻게 한다. 그것은 하나의 악을 제거한다는 이름으로 또 다른 악을 재생산 하던 인간의 무지가 빚은 비극이다. 거제포로수용소는 일반인죄수들을 감금하여 그들의 지난 죄과를 묻고 반성케 하여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기를 기대하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공간이다. 포로수용소의 군인들은 각자의 총칼을 가지고 그들의 정의를 위해 목숨을 바치려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의 역할은 총보다 이데올로기에 의한 정신적인 내장이 얼마나 무서운 폭발력을 지니고 있는가를 증언한다. 반세기 전인 1950년대 초반의 전쟁포로들을 수용했던 거제포로수용소를 찾아야할 이유가 된다.
그러나 지금 거제포로수용소는 거제포로수용소유적으로 부르며 전국에서 가장 많은 관광객이 모이는 명소의 하나로 변해 있다. 이 역사적 아이러니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거제포로수용소는 지난 날 북한군의 영웅 ‘누혜’가 목매었던 철조망이 있던 곳인가 아니면 자유의 버섯이 피어 있는 요한의 집인가. 우리 역사에서 이데올로기의 이름으로 싸웠던 그 광기의 상흔은 다음과 같은 남아 있다.
‘아직 끝나지 않은 분단의 역사
우리는 알아야 한다
민족의 진실을‘
거제포로수용소는 대구에서 버스로 통영시까지 2시간 30분, 통영시에서 다시 40분 거리에 있다.
나. 거제포로수용소
경남 거제시 신현읍 고현리의 거제포로수용소. 지금은 거제포로수용소유적공원으로 되어 있다. 6.25이후 최초로 설치된 포로수용소는 1950년 7월 7일 대전형무소가 처음이지만 미군이 낙동강 전투에 참가한 이래 북진이 계속되면서 포로수용소 증설이 요구된 것이다. 1950년 9월 23일 하루 동안에 붙잡힌 포로 수만도 2만 6천여 명, 이 숫자 속에는 민간인도 포함되어 있다. 거제포로수용소는 1951년 초에 설립되어 반공포로들이 집단 탈출하던 1953년까지 존속한다. 수용인원은 18만 명. 1951년 중공군이 전투에 개입하자 전세가 다시 밀리면서 이들을 서둘러 거제도 고현리,상동리,신현리를 중심으로, 독봉산 밑의 수월리,거제 남쪽 저구리와 거제도에서 조금 떨어진 봉암도(蜂岩島), 용초도(龍草島) 등에 분산 수용한다. 거제도 주변과 섬에 수용된 인원 2만 명을 제하면 16만 명이 거제도 한 곳에 밀집 수용된 것이다. 이 밀집수용이 결과적으로 수용소 폭동사건을 일으키게 한 원인이 된다. 1951년 여름에 미군이 하복을 지급한 일이 있다. 하복은 노랑 또는 빨간색으로 보기에도 매우 조잡하여 일반 죄수복이라는 인상을 준 것이다. 이에 좌익에서는 조선인을 차별한다는 이유를 들어 하복수령을 거부하고 소장 도드 준장까지 납치하기에 이른다. 이미 좌익들은 지령에 따라 계급투쟁을 전개하고 기독교인,인텔리들, 투쟁대열에 소극적인 북한군들을 인민재판으로 살해하던 터였다. 1951년 9월 17일부터 3일간 좌익에서 자행한 희생자는 300여명, 희생자들은 땅속이나 똥통에 쳐넣어졌으며 하수구를 통해 바다로 버려지기도 했다. 이렇게 희생된 포로들이 이천 여명 그 중 민간들이 칠백 여명에 이른다. 장용학의 <요한시집>의 주인공 ‘누혜’가 자살한 것도 그들의 집단 린치를 당한 이후의 일이다. 좌익들은 ‘해방동맹’을 만들어 수용소 내의 세 확대를 노렸고 이에 반공포로들은 ‘대한반공청년단‘을 만들어 역시 조직적으로 대응한다. 문제의 발생은 미군들의 느슨한 관리에 있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지적이다. 즉, 미군들은 포로들 간의 대립과 투쟁을 민족내부의 문제라며 방관한 것이고 미군으로서는 전쟁포로를 수용할 뿐이라는 태도에서 확대된 것으로 진단한다.
이같은 거제도포로문제를 당시의 이승만 대통령은 그의 정치적 결단으로 해결하였으니 한국 정치사상의 한 쾌거로 평가된다. 당시 미군과 유엔군이 반대하는 반공포로석방을 이 대통령은 왜 전격적으로 실시했는가 하는 것은 음미할 역사적 결단이다. 작가 강용준은 이승만 대통령이 포로석방 결단을 내리게 된 이유로 세 가지를 들고 있다. 즉 포로의 태반은 전쟁포로가 아니라는 점과 휴전협정에서 북한이 포로의 수를 속이고 있다는 점 그리고 북의 포로들을 무조건 송환할 경우, 세계 제2차 대전 후 독일포로로 풀려났던 소련군들과 같은 경우를 고려한 때문이라 한다.
1953년 6월 6일 이승만 대통령은 당시의 헌병총사령관 원용덕 중장을 불러 육지에 건너와 있는 4만 명의 반공포로들에 대한 석방문제를 연구해보라고 지시한다. 당시 이 대통령은 휴전회담 당사국에 대한 불만은 물론 반공청년까지도 인도군(印度軍)의 심사에 맡겨서 교환한다는데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1953년 6월 17일 저녁에는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비는 점차 소나기로 변한 것이다. 사전에 경비병들이 철조망을 끊어놓고 대기한 상태에서 이튿날 새벽 1시를 기해 반공 포로들은 겹겹으로 쳐놓은 거제포로수용소의 철조망을 넘는다. 이데올로기의 철조망을 넘는 민족의 대탈출이다. 거제도 외 부산지구, 우익수용소인 마산, 논산, 대구, 영천, 부평 등지에서도 2만 7천여 명이 탈출한다. 탈출 못한 나머지는 중립지대 인도군 수용소로 옮겨 90일간의 설득을 거친 뒤 1954년 1월 20일 석방된다. 최인훈의 <광장>에 나오는 이명준이 제3국으로 가기 위해 인도배 타고르호를 타는 것은 후자의 경우이다. 이러한 문제에서 서사적 진실이 현장의 치열성과 어떻게 조우하며 간섭하는 가를 묻는 것은 상상력의 한계에 대한 도전이다. 당시를 체험했던 일부 사람들은 ‘남과 북의 위정자들이 거제포로수용소 문제를 악의적으로 왜곡했다’ 고 주장하는가 하면 50여 년이 지난 21세기 중반에 와서 생명평화 위령제가 열린다는 것이다. 당시의 가해자와 피해자가족이 화해하는 자리도 마련된다는 말도 있다. 이데올로기에 그렇게 밝지도 않은 사람들이 무슨 주의라는 깃발을 세우고 생명을 죽이고 극도의 잔인성에 취해 있었던 그 이념의 끝을 광기라고만 할 것인가.
당시의 상황을 알리는 P.W, P.W 라는 영문자가 당시의 발자국으로 남아 있다. 부서진 대동강 철교와 피난민들의 모습, 포로생활관, 수용소생활을 찍은 사진들, 조사실,화장실,여자포로수용관, 좌익의 병동COMP62OUND 그리고 아직도 남은 벽의 낙서들, 아직도 살아 있는 그 사랑의 메시지들, 미 군의관의 버려진 비석, 포로들을 감시하던 망루도 몇 개 있다. 지금 남아있는 캠프는 우익병동과 좌익병동 합쳐 스물여섯 개가 남아 있다. 지금 그 때 사람들은 자취도 없고 포로들을 좌와 우로 몰아넣었던 병동의 숫자만 또렷하다.
이 단계에서 보면 노암 촘스키Noam Chomsky의 말은 공허한 메아리로 들린다. 사회주의자들이 대부로 받들고 있는 칼. 마르크스는 사회주의 이론가가 아니라 자본주의 이론가였다는 말말이다. 촘스키는 “마르크스는 자본주의를 개념화하였고 시스템이라는 제도에 대해서 연구하였습니다. 그는 본질적으로 여기저기 몇 개의 문장을 말했을 뿐 사회주의에 대해서 말한 적이 없습니다. 그는 사회의 변화와 革命에 관한 이론이 없습니다.”
한국인의 정신적인 광기에서 이데올로기가 차지하는 비중이 이토록 심각한 원인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이다. 장용학의 <요한시집>과 최인훈의 <광장>에서 그 최소한의 인간광기를 주목할 수 있다.
다. 1951년 - 1953년의 거제포로수용소
경남 거제시 신현읍 고현리의 거제포로수용소. 지금은 거제포로수용소유적공원으로 되어 있다. 자료에 의하면 6.25이후 최초로 설치된 포로수용소는 7월 7일 대전형무소가 처음이라 한다. 그후 전세가 밀리면서 대구에 수용소가 생겼으나 미군이 낙동강 전투에 참가한 이래 전세가 역전되자 북진이 계속되는 가운데 포로수가 살인적으로 늘어났다는 것이다. 9월 23일 하루 동안에 붙잡힌 포로수만도 2만 6천여명이었다 한다. 이 숫자 속에는 민간인도 포함되었는데 일설에는, 포로수용소내 노인과 손자가 같이 수용된 경우도 있었다는 것이다.이는 미군들의 포로에 대한 포상제도에 원인이 있다는 것이다. 사상과는 무관한 민간인이 다수 희생된 경우가 많았던 것이 그 예일 것이다. 거제포로수용소는 1951년 초에 설립되어 반공포로들이 집단탈출하던 1953년까지 존속하였다. 집단으로 수용된 인원은 17만 명 또는 18만 명이라 한다. 1951년 중공군이 전투에 개입하자 전세가 다시 밀리면서 서둘러 거제도 고현리,상동리,신현리를 중심으로 하고 독봉산 밑의 수월리,거제 남쪽 저구리와 거제도에서 조금 떨어진 蜂岩島, 龍草島 등지의 수용인원을 합한 인원이 18만 명이라 한다. 거제도 신현리,고현리,상동리를 제외한 주변과 섬에 수용된 인원 2만명을 제하면 16만명이 거제섬 한 곳에 집중적으로 밀집 수용되었다는 것이 된다. 이 밀집수용이 결과적으로 1951년 여름의 하복배급에서 터진 좌익들의 난동사건과 수용소 소장이던 도드 준장 납치사건인 거제폭동사건을 일으킨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1951년 여름의 夏服사건이란, 수용소를 관리하는 미군측이 포로들의 하복을 바꾸면서 매우 조잡한 의복을 배급하였던 것이다. 동시에 하복의 색깔이 노랑색 또는 샛빨간색이어서 누가보아도 일반 죄수복이라는 판단이다. 좌익동에서는 하복을 거부하면서 저항했고 미군이 한국인을 차별하여 본다는 인상을 불식시킬 수 없었던 것이다. 특히 좌익들은 지령에 따라 기독교신자,인텔리들, 투쟁대열에 소극적인 자를 인민재판의 이름으로 살해하였던 것이다. 1951년 9월 17일부터 3일간 자행한 희생자가 300여명이 된다고 한다. 이들은 땅속이나 변소 똥통에 쳐넣어졌으며 바다로 버려졌다. 이렇게 전체적으로 희생된 사람이 2000여명 민간들이 700여명이 된다는 지적이다. 장용학의 <요한시집>의 주인공 ‘누혜’가 자살한 것도 집단 린치를 당한 이후의 일이다. 좌익들은 ‘해방동맹’을 만들어 수용소내에서 조직적으로 세확대를 노렸고 이에 반공포로들은 ‘대한반공청년단‘을 만들어 역시 조직적으로 대응한 것이다. 문제는 포로수용소가 미군이 관리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미군들은 포로들간의 대립과 투쟁을 민족내부의 문제라며 방관한 셈이며 미국으로서는 전쟁포로를 수용할 뿐이라는 방관적인 태도였다.
중요한 것은 당시의 이승만 대통령이 취했던 정치적 결단이었다.
미군 등 유엔군이 반대하는 반공포로석방을 이 대통령은 왜 전격적으로 실시했는가 하는데 있다.
첫째, 자료에 의하면 포로들 중 태반은 전쟁포로가 아니라 자유를 원하여 자진 포로가 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둘째, 휴전협정에서 북한은 포로의 수를 사실과 달리 속이고 있다는 것이다. 1951년 12월 휴전회담 본회의에서 교환된 문서에는 아군측이 보호하고 있는 포로는 13만 2천 4백 74명, 북측에서 보호하고 있는 숫자는 1만 1천 5백 51명으로 나타난 것이다. 1951년 최초회담에서 북측이 내놓은 최초자료에는 6만 5천명이었는데 1만 1천여 명으로 대폭 줄인 것이다. 북한이 국군포로들을 이른바 그들의 ‘해방군’으로 강제편입시킨 결과였다.
셋째, 북의 포로들을 무조건 송환할 경우,세계제2차대전 후 독일포로로 풀려났던 소련군들과 같이 본국에서 처형되거나 비참한 일생을 살아야한다는 것을 고려한 휴머니즘적 판단에서였다.
1953년 6월 6일 이승만 대통령은 당시의 헌병총사령관 元容德 중장을 불러 육지에 건너와 있는 4만 명의 반공포로들에 대한 석방문제를 연구해보라고 지시하게 된다. 당시 이 대통령은 휴전회담 당사국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고 있던 터였는데 반공청년까지도 인도군의 심사에 맡겨서 교환한다는데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1953년 6월 17일 저녁에는 비가 내리기 시작하였고 점차 소나기로 변했던 것이다. 미리 경비병이 철조망을 끊고 길을 만들어 놓는 등으로 대기하다가 이튿날 새벽 1시를 기해 반공 포로들은 겹겹으로 쳐놓은 거제포로수용소의 철조망을 넘었던 것이다. 민족의 대탈출이었다. 거제포로수용소 석방조치는 이승만의 대결단에 의한 조치였으며 민족의 의미가 이데올로기를 압도하는 순간이었다. 거제도 외 부산지구, 우익수용소인 마산, 논산, 대구, 영천, 부평 등지에서도 2만 7천여 명이 탈출하였다는 것이다. 탈출 못한 나머지는 중립지대 인도군 수용소로 옮겨 90일간의 설득을 거친 뒤 1954년 1월 20일 석방되었다 한다. 최인훈의 <광장>에 나오는 이명준이 중립국으로 가는 인도배 타고르호를 타고 가는 것은 후자의 경우에 속한다. 당시를 체험했던 일부 사람들은 ‘남과 북의 위정자들이 거제포로수용소 문제를 악의적으로 왜곡했다’ 고 주장을 하고 있는 거제포로수용소는 지금 유적공원으로 남아 있다. 50여 년이 지난 지금에 생명평화 위령제가 열린다는 소식도 있다. 당시의 가해자와 피해자가족이 화해하는 자리도 마련된다는 말도 있다. 이데올로기에 그렇게 밝지도 않은 사람들이 동료들을 죽이면서까지 사상에 미쳤던 것은 무엇때문이었던가. 당시의 상황을 알리려는 P.W, P.W, P.W...란 영문자가 남아 있다. 부서진 대동강 철교와 피난민들의 모습, 포로생활관, 수용소생활을 찍은 사진들, 조사실,화장실,여자포로소용관, 좌익의 병동COMP62OUND 그리고 아직도 남은 벽의 낙서들, 아직도 남아 있는 그 사랑의 메시지들, 미 군의관의 버려진 비석, 감시대가 남아 있다. 지금 남아있는캠프는62,81등몇개없지만우익수용병동으로는71,73,74,81,82,83,84,91,93,94,96棟이고, 72,75,76,77,78,85,92,95,62,63,66,602,1,2,3 棟은 좌익캠프였다.
17. 박경리의 원주 옛집
원주 옛집은 박경리 작가가 『토지』를 1980-1998년 간 4,5부를 집필,완간했던 곳으로 18여 년의 성상에 걸친 문학작업과 틈틈이 경작을 겸했던 필경의 삶터이다. 대지는 757평, 2층 양옥이다. 마침 주변에는 시를 전화전을 전시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 이상훈 시인의 ‘문둥이’를 읽는다.
문둥이
호득 호득 눈물을 깨문다/ 스치는 바람에/ 호득호득 눈물 개문다/ 진달래 물들어 핀 등성이에/ 등성등성/ 더벅머리 누더기 몇 장들/ 뚝 뚝 / 떨어지는 핏고름에 묻은 진달래/ 붉은 핏빛으로/ 진한 고름으로 번져나간다// 걸음 걸음/ 터져 나갈 것처럼/ 썩은 육신 종기들은 / 문둥이 눈물 고름/ 진달래는 지천으로 피어 있다/ 먹구르 깃든 하늘 발치/ 까마귀 몇은 / 희머건 눈으로 날아다니고/ 얼마 안 남은 촛불처럼/ 가물가물한 숨결로/ 지천으로 핀 진달래를호득호득 깨물어 본다
박경리의 원주집을 찾은 날 10여 편의 시 가운데 왠지 이 시가 분위기에 어울렸다. 박경리의 치열한 삶과 그의 작품이 어떤 처절한 문둥이 같은 울음이었음을 공허한 하늘을 보고 깨달은 것이다.
18. 김유정 문학관
김유정 문학관을 찾은 건 2013년 11월 25일 겨울이다. 문학관을 둘러보고 말로만 들었던 춘천떡갈비를 맛보고 주변의 분위기가 편안함을 느꼈다. 김유정 (1908-1937) 문학관에서 남은 기억은 친구 필승(안회남)에게 보낸 ‘필승전’ 편지 한 통이다.
“필승아,내가 돈 백원을 만들어 볼 작정이다. 동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네가 조력해주기 바란다. 대중화된 탐정소설을 50일 안에 번역하여 ...돈,돈, 돈, 슬픈일이다. ...닭 30 마리, 살모사 10여 마리, 구렁이.... ”
김유정은 폐결핵으로 1937년 3월 29일 사망했다. 실레마을에서 금병의숙錦屛義塾을 열어 문명퇴치운동을 했던 그는 죽기 11일 전 안회남에게 보낸 편지다. 생명이 경각에 달린 작가가 살기 위해 돈을 필요로 했고 그 돈으로 뱀이라도 먹고 살아야했던 마지막 말은 거의 절규였다. 김유정은 명창 박록주와 박용철 시인의 여동생 박봉자로부터도 실연을 당하고 그 누구로부터도 생명을 구하진 못했지만 스물 아홉 나이로 요절할 때까지 ‘산골나그네’, ‘동백꽃’ 등 26편의 소설을 남긴 작가다.
19. 김동리 문학비
가.비문
나. 보령시 개화예술공원 비문
1913.11.23.: 경북경주시 리 186번지에서 부친 김임수와 모친 허임순 사이 5 남매 중 3남으로 출생, 어릴적 이름은 昌鳳, 본명은 昌貴 자는 始鍾
1926, 대구계성학교 2년 수료 1928: 서울경신학교 3학년편입, 1929: 중앙일보에 시 ‘고독’ 및 수필 등을발표,1934: 조선일보신춘문예에 시 ‘白鷺’입선, 1935: 중앙일보신춘문예에 단편소설 ‘花郞의후예’당선, 시‘「廢都의 시인’‘생식’ 등을 발표,다솔사와 해인사를 오가며 작품에 몰두 1936: 동」아일보 신푼문예에 단편소설‘산화’당선,단편 ‘바위’‘무녀도’, ‘술’, ‘산제’, ‘팥죽’ 외 수편발표 1953 : 환도 후 서라벌예대교수로 피임 1954 : 예술원회원피선,한국유네스코위원피촉, 단편 ‘살벌한 황혼’,‘마리아의잉태’등 발표 1967: 단편‘까치소리]로 3.1문화상수상 단편’石 老人‘발표 1970: 한국문협이사장 1973:중앙대명예문박사 1978: 장편소설 ’을화‘ 1990.7.30. 뇌졸증투병 1995.6.17.23시23분 영면(충남 보령시 성주면 )
다. 경주시 형산강변 문학비
고향을 사랑하신 문학인, 동리東里 선생
선생의 글, 「나의 유년시절」에 “나는 1913년 11월 24일 경주시 성건리 186 번자에서 아버지 김임수와 어머니 허임순 사이에서 오 남매 가운데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고 적혀 있다. 선생은 고향 경주 慶州 를 누구보다 사랑했던 분으로 작품 대부분이 경주나 신라新羅를 배경으로 하였다. 등단 작품인 「화랑의 후예」에 “아, 이런 내 조상이 대체 신라적 화랑이구려”에서에서 보듯 경주의 연원을 탐색하는 작품들이 상당수이다. 기파랑을 포함한 16 편의 신라역사소설집 속 작품이라든가 무녀도 황토기, 바위, 등 선생의 경주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은 대단하셨다. 선생의 문학적 주제는 신과 인간과 민족이라 할 수 있다. 특정한 사상이나 종교에 얽매이지 않고, 민속신앙과 풍류도까지 아우르며 다루지 않은 영역이 없다. 모든 학문과 문학 분야에 달통하신 중에도 소설에 진력하셨으며 한국소설의 세계화에 큰 업적을 이루셨다. 화랑의 후예답고 경주인다운, 나아가 가장 한국적인 작가임이 분명하다. 선생의 고향인 이 땅은 한국 역사문화의 본원지이며, 통일대업을 이뤄낸 성지인 동시에 한국문학의 종가이다. 오늘 선생의 유년 시절 애환이 서린 이 곳에 선생을 흠모하고 추앙하는 후학들과 시민들의 염원과 정성으로 이 비를 세우나니, 한국문학의 금자탑으로 길이 빛나기를 축원한다. 2019년 7월 일 동리 선생 문학기념비 건립추진위원회
김동리선생문학기념비제막, 2019,9,28토 오후 2시,강변공원, 울진 백암온천 엘지연수원에서 2박 후 경주 동리 생가를 둘러, 고우들과 함께 제막식 직전에 답사한다. 필자는 11월 4일 재차 답사하여 사진을 찍는다. 백로가 군데군데 앉아 있는 형산강변 서천둔치를 산책하고 걸어서 걍주역까지 온다. 정통 호두과자 한 봉지 사서 우물거리며 오후 4:54분 기차를 타니 해가 뉘엇뉘엇하다.
20. 소설가 유현종劉賢鐘 문학비
가. 들불
여삼이 정신을 차린 것은 우금치의 학살이 끝나고 왜병들이 지나간 뒤였다.
허벅지의 피는 말라 있었고 옷은 찢어져 걸레처럼 되어 있었다. 밤이 지나가고 먼동이 터오고 있었다. 그는 쑤시는 다리의 아픔을 참으며 잠시 두리번 거렸다.
그리고 오던 길을 돌아다 보았다. 아직도 들녘에는 연기가 솟고 있었다. 꺼젓는가 싶으면 다시 솟고 이 곳에서 솟는가 싶으면 다른 곳에서 풀석 일었다. 언젠가 본 들불이었다. 아니 여삼의 눈에는 익산 왕궁을 지날 때 십만 동학대군의 앞장을 서서 행군할 때 타오르던 그 민중의 들불이 보이고 있었다.
“왜 혼자만 남았지? 김계남 장군을 따라가지 못하고!”
그는 불현 듯 용기를 내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劉賢鐘(유현종) 작
나. 유현종
소설가. 1939년 생 전북 전주, 대표작, 단편집, “그토록 오랜 생각”, “장화사” 외 다수
다. 충남 보령시 성주면 개화예술공원
21. 소설가 구인환 시비
가. 사루비아 연가
단풍은 붉은 가슴을/ 청자빛 하늘에 내놓고
시들은 달맞이꽃이 / 하이얀 아카시아꽃을 탐하면서
사루비아 타는 불길/ 용광로를 닮아가는데
느티나무 집 가랑잎 낙엽을 밟으며/ 오후의 채색화를 가슴에 안는다
나. 구인환
1929. 9.10 충남 장항 출생
문학박사,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한국소설가협회 대표위원,
<동물주변>(문예 1960), <판자집 그늘>(현대문학, 1961)등단, 월탄문학상, 한국문학상, 예술문화대상,국민훈장 동백장 등 다수.
다. 충남 보령시 개화예술공원 2019.5.18(토) 최임영과 동행 답사
제 三 부, 수필,평론,희곡
1, 수 필
가. 김진섭(金晉燮),문학비
1) 간략한 비문
<이 곳 木浦는 1920년대부터 한국문학을 가꾸며 수필집 [생활인의 철학] 등을 남긴 廳川 金晉燮 선생의 고향>
2) 약력
김진섭(金晉燮),호는 청천(聽川),1903년 8월 24일 목포 출생, 양정고보 졸업, 일본 법정대 독문학과 졸업, 극예술연구회 조직(1931)하여 신극운동, 성균관대,서울대 교수,
교재 [독일어교본], 수필집 [인생예찬], [생활인의 철학], [교양인의 문학], [청천수필평론선집 등, 그 외 많은 번역작품 다수. 1950년 7월 말경 청운동 자택에서 납북되어 생사를 모름.
나. 한흑구(韓黑鷗) 문학비
1) 한흑구 문학비
보리 너는 항상 순박하고 억세고 참을성 많은 농부들과
함께 이 땅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작품 <보리>에서 -
2) 손춘익의 글 - 비음
黑毆韓世光 선생은 한국문단의 원로로서 남달리 이 고장을 사랑하셨으니 저 푸른 영일만은 항상 선생이 즐겨 거니시던 곳이었으며 수필문학의 고전으로도 남게 될 많은 주옥편들이 모두 이 고장에서 쓰여졌읍니다 이에 선생이 가신 지 세 해만에 한국문인협회 포항지부에서는 여러 유지후학들의 뜻을 모아 여기 조그만 돌을 세워 삼가 선생의 큰 뜻을 기리는 바입니다
3) 약력
한흑구(1909 - 1979), 평양출생, 본명은 세광(世光), 전영택과 함께 평양에서 [대평양],[백광] 등의 잡지를 창간 주재하였음, 광복 후 경북 수필 동인회원으로 활동, 수필집 [동해 산문],[인생 산문] 등이 있음.
4) 불이문
2005년 3월 10일 일기예보에는, 비나 눈이 올 것이라는 말이 있었다.그런데도 종일 하늘이 맑았던 것은 현대과학의 한계성을 보여주는 조소감이다. 날이 맑다하면 비가 오고 비가 온다하면 날이 맑은 일기예보는 여자의 마음과 같다. 일기예보를 여자 어나운서가 하는 이유인가. 나로서 포항을 찾은 것은 오랜만의 일이다. 영일군 송라면 보경사와 보경사경 내에 있는 수필가 한흑구의 문학비를 답사하려는 계획에서다. 팔달교 너머 강북에서 동부정류소까지 40분 거기서 포항까지 1 시간, 포항에서 보경사까지 1 시간 15분 등 왕복 6시간을 소요하여 보경사 경내에 있는 한흑구의 문학비를 찾은 것이다.
지난 날 충남 부여군 만수산 무량사 천불전에서 운포 정병철의 힘찬 글씨를 보았는데 보경사 입구에서 ‘壬午盛度 雲浦 丁炳哲이 쓴 ‘不二門’ 밑을 지나니 만수산 무량사 기억이 새롭게 난다. 보경사 가는 길은 천년 고목들이 자유로이 누워 도열하는데 내연산(內延山)의 범연한 자태가 눈앞을 막는다. <동해산문>의 작가 한흑구의 문학비가 왜 보경사 경내에 있는지는 알 수 없다.
다. 김용직의 글
1) 경북 안동시와룡면 오천리, 동판에 새긴 글
2) ‘해와 달, 별자리를 겨냥하자’
- 君子里 상징수 느티나무에 부쳐
이 자리에 선 사람들아 고개를 들자.그리고 바라 보라. 이 나무는 나무이면서 역사이며 정신이다. 그 아기 무덤에 이 나무는 光金 반 천년 世居의 땅인 의내에서 태어나 우리 고장에 滄桑의 變이 있자 창황한 이삿짐 갈피에 담겨 여기에 식수되었다.
본래 이 나무의 족속인 느티나무는 우리 조상들이 敬天崇祖의 상징으로 삼아 오신 것. 오랜 세월 우리 할아버님과 할머님들은 이 남와 더불어 조상을 받들고 아들 딸 기르며 山川草木, 天地萬物을 가꾸고 섬기는 날들을 살아 오셨다.
우리는 그런 옛 분들의 핏줄이며 줄기요 가지며 잎새일 따름이다. 오늘을 사는 우리는 새삼 이 나무 앞에서 옛 일을 되새기며 새날을 열려는 뜻을 세워야 한다. 여기 선 이 느티나무처럼 튼튼하게 뿌리를 大地에 뻗고 끊임없이 하늘을 우러러 해와 달, 별자리를 겨냥하는 기상과 슬기를 익히고 다져 나가자.
1998년 10월 1일. 글 金容稷 광산 김씨 숭원회 건립
2. 문학평론
가. 눌인 김환태 문학비
1) 김환태 문학비 찾기
무주군 나제통문을 찾다가 길을 잘못 들어 무주 스키장을 간 적이 있다. 세상을 바쁘게 사는 사람도 있지마는 여유와 한가롭게 사는 사람도 많이 있다. 무주스키장이 그 하나다. 특히 젊은 사람들이 평일인데도 북적거린다. 구리빛 얼굴도 있고 흰얼굴도 보인다. 주변은 유흥장처럼 북적거린다. 설산은 흰 등줄기를 내밀면서 유혹하는데 차를 돌려 나오는 우리에게는 아쉬운 감이 없지 않다. 길은 정반대쪽으로 가야되는 것. 안내표지는 그때사 나오는 것이다. 왜 삼거리 갈림길에 안내표지를 세우지 않고 보이지 않는 위치에 세웠던가. 모든 공적인 처사가 절박한 책임감에서 하지 않고 안이한 생각으로 하고 만다는 불만이었다. 길을 찾다보면 그 나라의 문화적 저변이 눈에 보인다. 고급차를 타고 다니면서 창밖으로 침을 뱉는 사람이 아직도 많다는 지적이다. 길을 물으면 거꾸로 가리켜주는 인심도 많이 보는 것이다. 현재 덕유산 국립공원인 나제통문은 삼국시대 신라와 백제의 경계선인 데 경계선에 작은 문을 내놓아 통로로 한 것은 국경의 이미지를 남기려한 것일까. 어두울 무렵 도착하여 주위의 절경을 즐길 기회를 놓치긴 했으나 얼른 보아 절경이다. 나무가 우거지고 냇물이 내려간다. 식당아주머니도 이곳이 절경이라고 설명한다. 덕유산 휴게소 광장에 김환태의 문학비를 확인한 시간은 날이 저물어서였다. 비문에는 한국에서 문학하는 원로들은 모두 이름을 올린 듯 망라돼 있다.
2) 눌인(訥人) 김환태 문학기념비(김동리)
批評文學의 傳統과 脈絡속에 살아있는 金煥泰 象徵의 花園에 노는 나비이고자 원했던 訥人 金煥泰는 1909年 1月 29日 金鍾元 公의 長男으로 이 고장에서 태어나 全州高普와 普成高普를 거쳐 日本 九州帝大 英文科를 卒業하던 1934年에 朝鮮日報를 通해 25세에의 覇氣에 넘친 評論家로서 登壇했다.
그는 本格批評文學의 旗手로서 이른바 傾向文學이 盛行하던 文壇의 時流에 正面으로 맞서 純粹文學을 지향하는 文壇風土의 造成과 그 理論體系의 定立에 크게 寄與했다. 특히 그가 쌓아올린 理論的 바탕은 祖國光復後에도 거센 似而非文學의 激流를 막아 내며 民族文學을 守護發展케한 이념적 基盤의 하나가 되었다. 또한 그 소중한 文學的 遺産은 오늘날에도 韓國批評史의 傳統과 脈絡 속에 면면히 살아 있다. 하나 苦難으로 점철된 그의 짧은 生涯의 終章은 너무나 참담했다. 日帝의 民族文化抹殺의 暴壓이 극심했던 1940年 以後 그는 붓을 꺾고 다시는 글을 쓰지 않았으며 隱遁과 鬪病의 나날을 보낸 끝에 1944年 5月 26日외로이 세상을 떠나 이 고장에 묻혔다.
萬人이 크게 외칠 때 홀로 沈黙하기도 힘든 일이거니와 萬人이 沈黙할 때 앞장서 所信을 외치기도 어려운 時代에 先見의 叡智와 불굴의 勇氣로써 民族文學의 地層을 두텁게한 그의 文學的 功績을 기리기 위하여 그가 항상 그리던 鄕里의 가장 아름다운 이 곳 德裕山 國立公園 기슭에 뜻을 함께 하는 全國文人들이 追慕의 情을 담아 문학사상사가 건립사업을 주관하여 이 기념비를 세운다.
그런데, 눌인 김환태의 문학비 옆에 순국의병장 강무경,의병 양방해 부부의 사적비가 있어 눈에 띄인다. 줄거리는 생략하거니와 강무경 의병장 부부는 강진, 장흥, 남평, 능주, 영암, 나주, 해남, 보성 등 지에서 의병 활동을 하였다.
“꼼에서조차 그리던 나라의 광복을 보지 못하고 철천지 원수의 총칼에 흙으로 돌아가게 되었으니, 오호 애재라 ! 내 혼백과 육신의 혈흔이라도 이승의 청강석이 되어 못다 한 천추의 한을 풀리라”라고 마지막 남긴 말이다. 이같은 순국의병의 절절한 비문을 외면하고 문학비만 보고 올 것인가. 날은 이미 컴컴하여 글자가 보이지 않는다. 라이터 불을 켜 갖다 대어 한자씩 더듬은 것이다. 이날 저녁 나제통문을 통해 보이는 절경을 놓치고 어두운 하늘을 통해 보이는 뚫린 공간만 응시하며 식당에서 늦은 저녁을 먹고 돌아온 것이다.
나. 김 현 문학비
1) 황지우의 시
큰 거북이 한 마리
이 진득진득한 진흙발이
놀다 갔구나
몸뚱어리는 덧 없어도
육체성은 내구적이라는 걸
알려주는 그대 육체문자
바다로 간 큰 거북이여
불사 보다는 생이 낫지 않은가
비로소 바다로 간 거북이
2) 비음 : 한글 세대의 평론가
한글로 교육받고 사유한 첫 세대로서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일구고 4.19의 체험으로 자유의 진정한 뜻을 찾아낸 그는 문학평론가,불문학자,서울대 교수로서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그는 살아 움직이는 상상력 자유로운 사유 섬세한 글쓰기로 우리의 문학과 지성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고 고통스런 현실속에서 행복에의 꿈을 좇는 참된 삶의 길을 보여 주었다. 이에 그가 평생 정신의 고향으로 삼아온 이 고장에 삼가 비를 세워 그를 기린다.
3) 김 현(金炫)의 약력
본명은 光南(1942-1990),전남 진도 출생으로 목포에서 성장 서울대 불문과 졸업
1962년 [자유문학] 평론 ‘나르시스의 詩論’ 발표로 등단
1980년 현대문학상 평론부문상 수상
‘문학과 유토피아’,‘분석과 해석’등 다수의 평론집을 집필하였으며 최초의 한글세대비평가이자 불문작자로서 우리의 문학과 지성에 희망을 열어주고 글의 참다운 맛을 알게해 주었다.‘
목포문화원 전시실 중간 쉼터에서 안쪽을 바라보면 거기에 김 현 문학비가 서 있다. 안내 표지판이 있고 오른쪽에 문학비가 있다. 목포문화원에는 김현문학비,수필가 김진섭의 작은 문학비가 서있는데 김진섭의 문학비는 비신이 작아서 사람들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안내자도 그의 비가 있는 줄 모르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김진섭의 문학비 바로 뒤에 하필 이동식 화장실을 설치해두었는지 문학비가 화장실 크기에 묻혀 버려진 느낌을 주는 것이다.
시인 황지우는 김 현의 죽음을 바다로 간 거북에 비유했다. 거북은 장수의 동물로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지만 그것보다 고대에서 문자를 기록하거나 국가의 운명을 점치던 영물이다. 그것보다 느림의 걸음으로 관조하는 느림의 사유란 자유로운 상상력을 동반하는 것이다. 그러한 거북은 그 끈적한 내구적 발자국을 남긴 채 바다로 간 것이다. 김 현은 4.19세대에 속한다. 4.19란 한국사회에 최초로 민주주의와 자유를 찾기 위한 젊은이들의 희생으로 얻어진 역사적인 산물이다. 그러한 거북이 바다로 간 것에 비유한 것이다. 4.19의 고통과 투쟁은 거북이등처럼 균열되었고 현실적인 비극을 온몸으로 저항했던 상처의 자국으로 남은 것이다. 김 현의 문학은 우리의 문학과 지성사에 새로운 희망을 안겨준 운명같은 글쓰기를 보여준 인물이다. 그의 평론은 분석과 해석이었던 것도 문학과 유토피아로 남아 있는 것도 바다로 간 거북에 비유할 수 있지 않을까, 김 현의 문학비가 유독 구석지고 음달진 곳에 세워져 있어 대낮인데도 모기가 극성으로 공격해오는 것이다. 목포앞 바다를 바라보며 서 있는 ‘목포개항 100년 비‘를 중심으로 개발이 한창 진행중이지만 필자가 찾은 수필가 김진섭의 문학비는 초라한 것이었고 김 현의 문학비는 구석진 곳에 서 있었다.
4) 중요 작품과 저서
다. 평론가 이어령 문학비
1)
너는 새벽이며 반쯤 피어난 꽃이며
가지를 박차고 날개짓을 하는 새이라,
활시위를 떠나 과녁을 향해 날아 오르는 화살이며
얼음에서 풀려난 물방울 소리이다.
그러기에 누구도 너를 묶어 둘 수는 없을 것이다.
- 눈을 뜨면 그때는 대낮이리라 - 중에서
2) 이어령
언론인 ,평론가. 1934년 충남 아산시, <한국일보>에 ‘우상의 파괴’를 발표하여 등단. 중앙일보,한국일보,경향신문 등에서 논설위원,, 충남 보령시 성주면 개화예술공원
라. 평론가 조병무 시비
1) 편지
눈동자/ 하나의 / 보람을 / 잊지 않기 위해
또 / 하나의 / 눈동자와 / 닮아져 간다
- 시집 「떠나가는 사람」
2) 조병무
1937.12.28 일본 오오사카 출생 동국대 국문과 졸업, 문학평론가 1965 현대문학에 ‘날개의 두 표상’, ‘자의식의 문학’ 추천 등단, 시집, 꿈 사설 외 다수
3) 충남 보령시 개화예술공원
3. 희 곡
가. 김우진金祐鎭 문학비
극작가 김우진金祐鎭 文學의 산실
(1897.9.19.- 1926.8.4.)
이 곳은 新文學 초기에 극문학과 연극을 개척 소개한 수산 김우진 선생이 청소년기(1908-1926)에 유달산 기슭을 무대삼은 희곡 「李永女 」등을 썼던 자리임.
나. 김우진과 윤심덕
김우진은 호남대지주의 아들로 이미 결혼하여 아들까지 있었다. 그는 동경에서 와세다대학을 나와 희곡을 공부하는 문학도였는데 일본에서 성악을 공부하고 있던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소프라노 윤심덕과 사랑을 맹세한 엘리트였다. 윤심덕은 서울 출신의 미모에다 미혼의 몸이었다. 윤심덕은 성악가로서 성량이 풍부하고 일본에서 정통으로 성악을 공부했으나 성악만으로는 정상적인 품위를 유지하기 어려워지자 불나방 같은 남성들이 몰려들었고 백만장자의 아들과의 염문설이 신문에 보도되자 김우진으로부터 절연장이 날아들었다. 이에 윤심덕은 1년여 만주 등지로 유랑한 한 후 토꾜로 건너갔고 김우진도 목포의 집을 나와 토꾜로 가게된다.
윤심덕은 오사카에서 24곡의 노래를 취입하게되는데, 이바나노비치 곡 ‘도나우강의 잔물결’에 자신이 가사를 붙인 ‘死의 찬미’도 그 중의 하나였다. 두 사람은 토꾜에서 만나 서로의 사랑이 이루어질 수 없음을 알고 1926년 8월 4일 시모노세키를 출발 조선으로 가는 부관연락선을 타고 가다 배가 대마도 앞바다를 지날 무렵 윤심덕과 김우진이 함께 현해탄에서 투신정사한 것이다. ‘사의 찬미’에다 가사를 붙여 노래했던 윤심덕은 이미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라면 죽음으로써 영원을 얻을 수밖에 없었음을 보여준 행동이었다.
다. 김우진의 문학비를 찾아서
목포문화원에서 안내자에게 물어 김우진의 생가를 찾기로 하였다. 북교동 천주교회 내에 있는 한국근대극의 선구자 김우진의 삶의 터를 찾은 것은 햇빛이 쨍쨍쬐는 한낮이었다. 그의 생가가 현재 수녀원 건물 옆에 있었다고 전하고 있으나 흔적은 없는 상태다. 현재는 그 수녀원도 헐고 다른 건물을 지어버린 것이어서 거의 자취를 볼 수 없다.북교동 천주교회는 앞마당이 넓고 푸른 쉼터에는 습작시인 듯 시를 쓰고 지운 흔적이 남아 있다. 천주교회에 문의한 결과 ‘처음에 김우진의 생가터가 있었으나 오랜기간 방치되어있었고 시 당국에 보존여부를 물었으나 시에서 관리할 수 없다고 하여 헐어버렸다고 한다. 아울러 지금까지 김우진 문학에 관심을 가지고 찾아오는 사람도 없었으며 문학비를 세운 것 이외는 관심을 보인 사람도 없었다고 하며 무엇하는 사람이냐’고 되묻는다. 교회관계자는 교회의 옛 사진첩을 꺼내놓고 확인을 했으나 정확히 옛터임을 알 수 있는 부분은 없고 다만 옛 수녀원 건물 우측으로 내밀고 있는 추녀끝을 가리키며 생가의 건물이었다고 말한다. 실오라기 하나를 잡고 옛 사람의 의상을 복원하려는 것과 같은 심정이다.
4. 예술비
가. 남농 허건 기념관
1) 전넘 목포시 용해동
남농기념관은 한국 남종파의 거장이자 운림산방 3대 주인 남농 허건(1908-1987) 선생이 1985년 5월 선대의 유물보존과한국 남화의 전통을 계승발전 시키기 위하여 건립한 미술관이다.남농 허건 선생은 조선조말 남화의 대가인 소치 허련(1808-1893)의 친손자이며 역시 유명 화가인 미산 허형(1862-1938)로 넷째 아들로 진도에서 태어났다. 선생은 평생을 목포에서 보내면서 한국화단의 중심에 서서 많은 미술 활동을 하였으며 수많은 쩨자를 길러 후진 양성에 진력하였다.
1981년에는 평생 수집한 수석, 자기, 목물과 운림 산방 3대의 작품을 목포시 향토문화관에 기증하여 향토문화 발전에 큰 힘이 되었으며 1987년에는 진도 운림ᄉᆞᆫ방을 사재로 복원하여 진도군에 기부체납함으로서 우리 예술계에서 문화유산을 사회에 환원하는 등 본보기가 되었다.
대한민국 문화예술상,문화훈장 등 수많은 상을 받았으며 1983년에는 대한민국 예술원원로회원으로 추대되었다. 이 곳 미술관에는 소치 허련, 미산 허형, 남농 허건, 임인 허림 등 3 대의 작품을 중심으로 조선조의 유명 화가를 비롯하여 현대의 중견 중진 작가의 자품들이 전시되고 있으며 문하생의 작품 등 총 300여점이 전시되고 있다.
2). 허형만의 ’노송찬‘ 老松讚
독야청청 뿌리 깊은 노송이여
운림에 씨앗터서 한그루 솔이 되니
가녀린 이파리는 칼날보다 절개 곧고
휘어지는 가지마다 풍운을 감싸돌며
황토에 뻗은 뿌리 세상을 헤아린다
새벽이면 이슬받아 지란을 키우시고
한밤이면 파도서리로 선경에 드시니
묵향 붓끝마다 청아한 바람소리
그윽한 향그러움
한그루 노송이여 운림을 감싸덮은
천년 노송이여 독야청청 뿌리 깊은
노송이여
1987년11월일 허형만짓고 서희안쓰다
나. 화가 고유섭(高裕燮) 비
1) 화가의 시비
경북 경주군 감포읍 대본리 대본 초등학교 앞에 이견대가 있고 그 이견대 앞해변으로 내려가는 입구에 화가 又玄 高裕燮의 ‘나의 잊히지 못하는 바다’ 비가 있다. 1974년 10월 우현 선생 30주기 기념사업으로 한국미술사학회가 세운 것이다. 황수영, 진홍섭, 최순우, 정영호, 박춘영, 임광상, 피엘, 파올로, 코멜, 최한국, 황윤극, 장형식, 고재현, 이택호 그리고 글씨는 김응현이 쓰다.
2) - 大王岩 -
大王의 憂國 聖靈은/燒身後 龍王되사/저 바위 저 길목에/숨어들어 계셨다가/
海天을 덮고 나는 /敵魁를 調伏하시고// 憂國至誠이 重코 깊으심에/ 佛堂에도 들으시다/고대에도 오르시다/後孫은 思慕하야/龍堂이요 利見臺라 하더라// 英靈이 幻視하사/晝二夜一竿竹勢로/浮往浮來 傳해 주신 /萬波息笛 어이하고/지금에 感恩 孤塔만이 /남의 애를 끊나니/大鐘川 覆鐘海를/烏鵲아 뉘지마라/蒼天이 無心커늘/네 루어 微物이라도/뜻 있어운다하더라//
齊山 최세화 쓰고 후학 황수영 건립 (우현 고유섭 1940년 8월작)
3) 이견대인利見大人의 ‘利見臺’
문무대왕 유언비도 같은 자리에 있다. 삼국사기 권 제 7 문무왕 21년조원문과 해석한 글이 앞뒤로 새겨져 있다.
利見臺는 사적 제 159호로 대본초등학교 앞에 위치한다. 이 이견대는 삼국통일을 이룬 문무대왕의 수중릉인 대왕암을 곧바로 바라볼 수 있어 죽어서도 나라를 지키겠다고 한 문무대왕의 호국정신이 깃든 곳이다. 感恩寺를 완성한 신무왕이 이 곳에서 바다의 큰 용이 된 문무대왕과 하늘의 신이 된 김유신이 마음을 합해 용을 시켜 보낸 검은 옥대와 대나무를 얻게 되었다. 그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月城의 天尊庫에 보관하고 적병이 쳐들어 오거나 병이 들거나 가뭄 등 나라에 좋지 못한 일이 있을 때 이를 불어 모든 어려움을 가라앉게 한 萬波息笛의 전설이 바로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이 이견대라는 것은 주역 가운데 <飛龍在天 利見大人>이란 글귀에서 취한 것으로 즉 신문왕이 바다에 나타난 용을 통하여 크게 이익을 얻었다는 뜻으로 해석되고 있다. 현재의 건물은 1970년도 발굴조사를 통해 신라시대의 건물터가 있었음이 확인되어 신라시대 건물양식을 추정하여 1978년 복원한 것으로 마루에 오르면 곧바로 대왕암이 눈 안으로 들어온다‘고 하였다.
이견정에 오르면 동해 눈앞으로 대왕암이 가장 잘 보이는 위치에 있다. 이견정 벽에 이견대기가 있고 龜巖 李 楨 선생 利見臺韻 二首가 있다. 경주의 서예가 한영구가 썼다.
大王巖下波千丈利見臺頭月一痕莫向海門吹玉笛萬山紅樹歟消魂 齊山 최세화가 쓴 신라 東海口란 석비는 감포읍 대본 삼리 그 곳이 신라의 역사 현장으로 중요한 성역임을 밝히고 있다. 즉,문무대왕이 왜병을 진압코자 창건한 감은사와 승하후 호국룡이 되기를 유언하여 뼈를 묻은 해중릉 대왕암과 아들 신문왕이 사모하여 해안에 쌓은 이견대 등 세 유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왕과 김유신 장군이 함께 전하여주었다는 만파식적 설화의 현장이요 그후 효성왕이 이곳에 散骨하니 경덕왕은 김대성으로 하여금 전세 부모의 복을 빌어 토함산에 지금의 석굴암인 석불사를 세워 굽어 보게한 바로 그 땅이요 바다라는 것이다.
다. 제주도 이중섭 공원
1) 표석
서귀포시는 이중섭(1916-1956) 선생이 한 때 작품활동을 하였던 곳으로 그 역사성을 기념하여 여기에 표석을 세운다.
소의 말
높고 뚜렷하고 / 참된 숨결
나려나려 이제 여기에/ 고웁게 나려
두북두북 쌓이고/ 철철 넘치소서
삶은 외롭고/ 서글프고 그리운 것
아릅답도다 여기에/ 맑고 두 눈 열고
가슴 환히/ 헤친다
대향 이중섭 짓고 창남 현수언 쓰다
2) 이중섭 공원
1951년 이중섭이 서귀포에 피난왔을 당시의 모습과 그 이웃들의 삶의 흔적 등 묻혀져가는 시대적 상황을 복원하여, <섶섬이 보이는 풍경> 속의 이중섭 예술혼과 절박한 시대를 살았던 이웃들의 삶의 흔적을 시대적 언어로 표현함.
㉮ 올레:길거리에서 재주 전통가옥의 마당으로 들어가는 골목길 ㉯ 우영팟 : 텃밭 ㉰ 머귀낭 : 머귀나무,줄기에 가시가 많은 나무로서 제주도에서는 어머니의 장례 때 방장대로 사용한다. ㉱ 양애(양하) : 8-10월에 지면에 낮게 꽃을 피우는 식물,꽃눈은 제사,추석,등에 나물로 해서 먹는다. ㉲ 댕우지(당유자) : 재래 감귤의 일종, 감기 몸살의 미니가나요법으로 껍질을 끓여 마신다. ㉳ 신사과(신서란) : 뉴질랜드가 원산일제강점기 때 공추하여 마대와 밧줄의 원료로 사용하던 식물㉴ 포낭(팽나무) : 오래된 제주마을의 정자목 ㉵ 뽕낭(뽕나무) : 일제 때 공출품목의 하나로 1960년대 까지 누에농사를 짓던 흔적 ㉶ 목구실낭(멀구슬나무) : 초가주변에 흔히 나는 낙엽수, 간식이 없었던 시절에는 어린아이들이 열매를 따먹기도 했다.
제주도 이중섭 미술관 옆에는 이중섭이 제주도에 살 때 쪽방을 내주어 살게 한 당시 89세 김순복 할머니를 만날 수 있었다. 방이래야 2평 남짓한 골방인데 거기서 네 식구가 살았었다. 그러나 각박한 인심에 방을 내주어 살게 한 노인의 인심은 훈훈한 것이었다.2009년 11월 답사
라. 서예가 석재 서병오
석재 서병오(徐丙五 ) 선생 예술비
공의 휘는 병오요 호는 석재니 1862년 임술 9월9일에 달성인 서상민의 아들로 이 곳 대구에서 태어났다. 공은 초일한 자품에다 부유한 환경에서 생장하며 천분을 발휘하여 詩書畵 文琴朞醫學에 두루 통하니 八能居士라고도 하였다. 어려서 진당서버을 익히고 자라며 허방산 조심재와 이석o에게 한문과 의학을 닦고 다시 석파에게 난을 배우며 한성명사와 교우하였다. (중략)공은 가도 그 빛난 자취는 이 고장의 자랑으로 길이 빛날 것이다.
1983년 6월22일, 문학박사 심재완 비문 짓고,후학 송석희 제자 쓰며 후학 도리석 비문 쓰고 조각가 정은기 비 제작하다(달성공원)
마. 서예가 동강 조수호
1) 제주도 북제주군 한경면 저지리의 제주도 현대미술관 인접
제주도 예술인 마을
‘서예가 동강東岡 조수호趙守鎬 예술비’
2) 동강 조수호 선생
선생은 경북 선산 출신이다. 서울대 미대에서 서양화를 전공하다가 소전 손재형 교수의 지도로 1949년 제1회 국전에 서예 <漁父詞>로 특선을 한다. 선생은 추사와 소전을 잇는 한국의 대표적 서예가로 추앙된다. 선생은 필자의 경북대사대부고의 은사시다. 미술을 가르쳤지만 나중에 서울교대로 가셔서 서예가로 활동하셨고 일찍이 중국 역대의 서체를 고루 익힌 대가로 알려져 있다. 듣건대 선생은 甲骨과 石鼓文을 섭렵하고 조상,마애,묘지,목간,석문명을 연구하고 당,송,원,명,청 제명가의 법첩은 물론 진,한,위,진의 서체를 연구 行,草에 침잠했다고 전한다. 학생시절 선생님이 서예의 대가인 것을 전부는 알지 못했다. 미술반에서 활동하던 나에게 졸업 후 미대로 가라고 권유하셨던 걸 기억하고 있다. 당시엔 그림을 그리며 산다는 것이 마음에 와닿지 않았지만 어쨌든 만년에 이르기까지 그림을 놓지 않은 근성은 초등학교의 한욱동 선생 중학교 때의 강우문 선생 그리고 고등학교 때의 조수호 선생의 덕분이다. 대구에서 서예전을 할 때 수 번을 찾은 적이 있지만 머리 인사만 했다. 제주도 현대미술관에서 김흥수 화가의 누드화 특별전을 보고 예술인 마을을 다니다가 선생님의 예술비를 발견했다. 비가 오고 글자가 선명하지 않아 사진을 찍어왔는데 읽기가 어렵다. 비오는 날인가 강아지 한 마리가 집을 지키고 있었으나 인기척이 없고. 일행에 따라 떠나면서 내내 뒤를 돌아본 적이 있다. 이제 고인이 된 선생님이시다. 생각하면 어떤 스승을 만나는가 어떤 친구와 대화를 나누는가에 따라 인생의 희비가 교차되는 경우를 경험한다.
3) 인연의 옆구리
- 서예가, 東江 조수호 선생
그 겨울 한라산 오르던 기억의 옆구리에서
눈 덮힌 곶자왈 숲은 사나운 솔개였습니다
거센 바람에 쫓긴 며칠 햇볕 속을 파고들다
저지예술인 마을의 동강 선생 탐묵헌 찾은 건
반세기 전 마음의 푯대 하나가 서 있었던 까닭입니다
바. 서예가 남헌 이상배
1) 위치 : 중국 광시성 구아린(桂林) 詩歌園, ‘국제화평우호비림’ 2004년
2) 최치원의 ‘秋夜雨中’
秋風唯苦吟 世路少知音 窓外三更雨 燈前萬里心
3) 서예가 이상배
南軒 이상배 선생은 경북 선산 출신으로 영남대 국어국문과를 나와 교직에 있었다. 남석 이성조,, 시암 배길기, 효남 박병규, 청남 오제봉 선생을 사사했다. 3 회의 개인전, 대구서가회회장을 지냈고 현재 경북대 부근에서 남헌서예원을 운영하고 있으며 팔순문집으로 ‘彌山 옛집에 매화꽃 피면’(2016)을 출간했다. 필자와는 오랜 지기로 비문의 대상이 모두 고인인 데 비해 몇 안 되는 생존 인물이다. 성격이 활달하고 사교적이어서 에피소드가 많은 서예가다.
아. 서예가 이무호
1) 충남 보령시 개화예술공원
2)“ 長樂無極” 즐거움이 오래도록 끝이 없다
3) 草堂 李武鎬 書, 錄 漢瓦當句 庚寅年 秋
5. 가요비
가. ‘목포의 눈물’ 노래비
1)목포시 유달산 노적봉 고개
목포시 유달산 해발 60미터 높이에 있는 露積峰 고개를 올라 한숨을 쉬고 노적봉 맞은 편을 보면 거기 ‘목포의 눈물’ 노래비가 산기슭에 자리잡고 있다. ‘목포의 눈물’은 원래 ‘목포의 노래’라 하였다. 조선일보사가 1934년 오우케이레코드사와 함께 전국 6대도시를 대상으로 노래가사를 모집했다. 전국에서 3천여 명이 응모했는데 당시 무명시인이던 文一石이 쟁쟁한 시인들을 제치고 1등으로 당선된 가사다. 一石이 一席으로 당선되었으니 이름덕이었던가. 문일석의 가사에 작곡가 孫牧人이 곡을 붙이고 18세의 무명가수 李蘭影이 노래를 부른 것으로 대히트한 노래가 ‘목포의 눈물’이다. 한때 북한에서도 계몽기의 가사로 불렀다 한다. 가사는 다음과 같다.
2) <목포의 눈물>
사공의뱃노래가물거리며
삼학도파도깊이스며드는데
부두에새악씨아롱젖은옷자락
이별의눈물인가목포의서름
삼백년원한품은노적봉밑에
임자취완연하다애닲은정조
유달산바람은영산강을아느니
임그려우는마음목포의 눈물
깊은밤 조각달은흘러가는데
어찌다옛상처가새로워진다
못오는임이면이마음도보낼것을
항구의맺은절개목포의사랑
노래의 가사는 주로 이별의 애달픔과 한을 정조로 하고 있으나 한과 애달픔의 근저에는 민족의 역사적 애환이 깔려 있었던 것이다. 국가 잃은 민족의 서름과 식민지치하의 고달픈 삶을 남녀의 이별의 정서로 매개하고 있는 것이다. 목포의 사랑,목포의 눈물, 목포의 서름이 정서적 기둥인 ‘목포의 눈물’은 목포가 안고 있는 역사적,지리적인 수난과 식민지시대의 실의와 허탈에서 목포의 눈물은 민족의 눈물이 되었던 것이며 동시에 온 국민의 시대적인 절망에 대한 탈출구 역할을 햇던 것이다.
‘살아 있는 보석은 눈물입니다. 남쪽하늘아래 꿈과 사랑의 열매를 여기심습니다.이난영의 노래가 문일석가사 손목인작곡으로 여기 청호의 넋처럼 빛나고 있습니다’
3) <목포의 눈물> 가사 변천사
(가) 노래비에 새겨진 가사는 1969년 제막 당시 불리워졌던 가사
(나) 1935년 취입 당시 가사
사공의 뱃노래 감을 거리며
삼학도 파도 깁히 숨어드는
부두의 새악씨아롱저진 옷자락
리별의 눈물이냐 목포의 서름
삼백련 원안풍(三栢淵願安風)은 로적봉 밋헤
님 자최 완연하다 애닯흔 정조
유달산 바람도 영산강을 안으니
님 그려 우는 마음 목포의 노래
깁흔밤 각달은 흘러가는데
엇지타 녯상처가새로워진가
못오는 님이면 이 마음도 보낼 것을
항구의 맺는 절개 목포의 사랑
(다) 현재(2001년) 불리고 있는 가사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며 삼학도 파도 깊이 스며드는데
부두의 새아씨 아롱젖은 옷자락 이별의 눈물이냐 목포의 설움
삼백년 원한 품은 노적봉 밑에 님 자취 완연하다 애달픈정조
유달산 바람도 영산강을 안으니 님 그려 우는 마음 목포의 눈물
깊은 밤 조각달은 흘러가는데 어찌타 옛 상처가 새로워진다
못오는 님이면 이 마음도 보낼 것을 항구에 맺은 절개 목포의 사랑
‘목포의 눈물 노래가사 변천사’를 대비해 보면 ‘서름’이 ‘설움’으로,‘님’이 ‘임’으로,‘애달픈’이 ‘애닲은’으로 ‘어찌타’가 ‘어찌다’ 등으로 현대 한글맞춤법을 찾아간 것이지만, 가장 눈에 띄는 것은, 1935년 취입당시 제2연의 ’삼백련 원안풍(三栢淵 願安風)은 로적봉 밋헤‘를 ’삼백년 원한 품은 노적봉 밑에‘로 고친 것을 들 수 있다. ’삼백년 원한‘이란 임진왜란으로부터 일제식민지까지 이어지는 역사적 한을 말하고 싶었던 것인데 그 동안 숨겨온 내용이었다. 목포에 삼백연이라는 큰 못이 실재할 가능성은 있으나 ’願安風‘이란 말은 아무래도 ’(삼백년) 원한 품은‘을 한자로 가차한 것 같다.
항구도시는 여느 육지도시보다 정서적으로 다른 데가 있다. 목포는 항구다라는 엄연한 사실이 왜 그리 가슴에 와 닿는 것인지 이별을 전제로 한 목포항구는 만남의 공간이기보다 떠남의 공간임을 확인하는 것이다. 그것은 육지 사람들은 관료적이며 보수적인 성향인데 반해 항구사람들은 바다처럼 마음이 넓고 열려있다고 할 수 있다. 이야기 잘하고 잘 웃고 술도 잘하고 잘 떠드는 기분을 어찌하랴. 거친 억양이 있다면 그것은 거친 파도의 탓이 아닐까. 유달산 계단을 오르다말고 내려다본 목포 앞 바다에는 몇 채의 배가 한가롭게 떠나가고 있는 것이다. 한가로운 풍경이다. 바다를 잊고 살았던 나에게 응어리진 것이 있다면 죄다 쏟아놓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호남에 시인묵객이 많은 이유를 모르는 바 아니지만 막상 목포항을 내려다보는 순간 욕심이 생기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시를 쓰려면 목포로 갈 것이다 라는 욕심말이다.
나. 조용필 노래비
1) 위치 : 부산 해운대 해변, 1998년 2월 1일 (일) 오후
2) - 돌아와요 부산항에 -
작사.작곡 황선우/
노래 조용필
➀
꽃피는 동백섬에 봄이 왔건만
형제 떠난 부산항에 갈매기만 슬피우네
오륙도 돌아가는 연락선마다
목메어 불러봐도 대답없는 내형제여
돌아와요 부산항에 그리운 내 형제여
➁
가고파 목이 메어 부르던 이 거리는
그리워서 헤메이던 긴긴날의 꿈이었지
언제나 말이 없는 저 물결들도
부딛쳐 슬퍼하며 가는 길을 막았었지
돌아왔다 부산항에 그리운 내 형제여
건립, 부산을 가꾸는 모임/ 1994.5.7./조각 김성정
3) 1998년 3월 18일(수) 조선일보에는 <조용필 30년 음악인생>이란 제목이 있었는데 그 첫머리에서 “한국 대중음악사에서 <조용필>이란 이름 석자는 한 시대를 상징하는 보통명사다. 평론가들은 조용필을 ‘주류 대중음악계에서 유일한 영웅’이라 부른다.”라는 말을 한 것을 기억하고 있다.
조용필의 대중음악은 1970년대와 1980년대라는 어렵고 길었던 산업화 시대와 민주화 시대의 민중들에게 노래로써 위안을 주었던 대중가요 가수다. 이 글을 쓰고 있는 2004년에도 그의 노래를 들을 수 있지만 그의 노래는 아무래도 7,80년대에 기억되는 노래가 중심을 이루는 것 같다. 특히 전속악단 송골매와 조용필의 합주는 사람들을 매우 신나게 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는데 그의 노래비가 부산 해운대 해변 모래사장에 서 있는 것을 보고 황혼을 받아 2월의 해변은 더욱 을시년스러운데 노래비를 지나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대중 가수이지만 정서적으로 당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가슴에 알게 모르게 침투되어 잇는 것을 어쩌지 못하는 것이다. 필자 역시 이미자,조용필의 노래를 들으며 한국이란 나라에서 살았고 또 늙어가는 중이라는 사실을 생각할 때 시인이 쓴 시만 우리의 정서에 창처를 주는 것이 아니라 대중의 노래도 일정부분 대중을 상처주는 일에 가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가왕 또는 작은 거인이란 닉네임을 가지고 무대에 올라 대중의 마음을 휘어잡는 그의 매력은 탁한 음성에서 넘쳐나는 에너지와 트로트와 발라드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그의 노래 실력에 있었던게 아닌가 하는 것이다. 어려운 시대 7,80년대를 몇몇 대중가수의 힘으로 과도기 한 시대를 견뎌왔다고 하면 지나친 편향일까. 어쨌든 봉건시대의 주류는 물러가고 대중시대의 주류가 새로운 세력으로 사회를 지배하는 사실을 목도하면서 ‘딴따라’족으로 비하했던 세력들이 대중의 영웅이요 시대의 영웅으로 떠오르는 현실을 보는 것은 나쁘지만은 않다는 것이다. 오늘날 사회에서 전문직이란 칭호를 받고 자본주의 사회의 주류를 이루는 계층을 보는 것도 흥미 있는 사실이다. 전문직이란 의사, 연예인, 교수, 스포츠맨, IT 기술자, 과학자, 증권맨 등을 가리킨다고 볼 때 그들은 조선사회에서 그렇게 대접을 받지 못했던 계층이었다. 말하자면 봉건시대 양반계층은 아니었던 것이다. 민주사회에서 경제의 핵심은 시장경제인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시장경제는 시장내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문화일반에서 이루어지는 시장경제는 그 폭이 훨씬 넓은 것이다. 그 규모는 글로벌적인 경계를 갖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의 한국시장을 세계적으 확대하고 있는 분야는 단연 대중문화를 중심으로 하고 있다. 일본과 중국의 문화가 한국에 들어오고 한국문화가 이웃 일본과 중국 또는 태국, 필립핀, 미국 등에서 히트를 하고 있다. 소위 문화의 ‘韓流’란 말이 생겨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대중가수 조용필이 한국에서보다 일본에서 더 인기가 있는 것은 무엇인가. 아시아적 문화권이 갖는 동양인의 정서적 공통성을 발견한 때문이다. 그간 아시아인들은 실로 정치적 경제적 외교적인 이유로 정서적 공통성을 찾지 못하다가 문화는 높은 데서 낮은 데로 흘러간다는 문화적 본질과 속성이 비문화적인 제재의 껍질을 깨뜨리게된 것이고 이것이 문화교류를 해야한다는 대세로 이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문화교류는 고급의 학술적인 것과 고급의 예술적인 교류도 중요하지만 대중적인 문화교류 즉, 국민간의 문화교류가 본격화됨으로써 명실상부한 교류의 진정성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대중가수 조용필은 문화사절이란 면에서 큰 몫을 감당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적지 않은 수입을 가져왔으리란 점은 불문가지의 일이다. 그는 21 세기의 한국의 문화인으로 오래 기억할 인물인 것이다.
다. 백년설 노래비
1)
식민지시대부터 나라 잃은 설움을 노래하여 국민들의 민족적 애환을 노래하였던 백년설의 <나그네 설음>노래비가 경북 셩주군 성주읍 城밖 숲(500년 넘은 집버들 59 그루가 보호수림임)에 세워져 있다.
2) - 나그네 설음 -
오늘도 걷는다마는 / 정처없는 이 발길
지나온 자죽마다/ 눈물 괴었다
선창가 고동소리/ 옛님이 그리워도
나그네 흐를길은/ 한이 없으라
작사 고려성/작곡 이재호
3) 취지문
향토출신 百年雪(본명,李甲龍,일명 昌珉)은 195년 1월 15일 성주군 성주읍 예산리 414번지에서 출생하여 1980년 10월 6일 향년 65세로 세상을 더날 때가지 노래로 이생을 마친 가수로서 대표곡 “나그네 설음”은 일제시대 그가 작사자 高麗星과 함께 일경으로부터 우리 민족 抹殺을 위한 심한 취조를 받고 나온 후 광화문 뒷골목 목로주점에서 술잔으로 울분을 달래며 담배갑 뒷면에 적은 것을 노래로 불러 나라 잃은 우리 민족의 한과 서러움을 달래고 민족의식을 lfRodnj 주었으며 오늘에가지 맣은 국민 사이에 널리 애창되고 있으며 대중가요사를 빛내준 그의 고귀한 정신을 바르게 계승하고 훌륭한 업적을 후세에 기리 전하고자 군민의 뜻을 모아 이 노래비를 건립한다
1992년 5월 26일 백년설노래비건립추진위원회
라. 현 인의 <비 내리는 고모령顧母嶺> 노래비
1) 대구 동구 고모령 입구(파크호텔 뒤편)
2) <비 내리는 고모령>
어머님의 손을 잡고 돌아설때면
부엉새도 울었다오 나도울었소
가라잎이 휘날리는 산마루턱을
넘어오던 그날밤이 그리웁고나
맨드라미 피고지고 몇해이런가
물방앗간 뒷전에서 맺은사랑아
어이해서 못잊는냐 망향초신세
비내리는 고모령을 언제넘는냐
3) 비음
해방직 후 수 많은 사람들이 심금을 울려주었던 玄 仁 씨의 노래 비내리는 고모령은 그 진원지가 대구 직할시 수성구 고모동으로 고증이 되었다. 수성구 의회에서는 의회 개원 기념 사업으로 이 애절한 사연을 담은 노래 가사를 碑 에 새겨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어머니를 향한 영원한 思母曲으로 널리 애창되기를 바라며 이곳 顧母嶺 입구에 구민의 정성을 모아 노래비를 세우다
1991년 10월 17일/ 휘필자 이동규
4) 김문호 기자 不忘碑
사진기자 김문호(1963.10 - 1991.9.27)는 경상북도 안동 태생이다. 안동고와 서울 세종대를 나온 그는 한국일보 사진기자였다. 비문에는 “고모령 노래비 취재에 열중하다 뒤에서 달려오는 열차를 피하지 못하고 순직하니 아깝고 또 아깝다. 29세 젊음을 뜨겁게 마감한 김문호 기자여 ! 그대의 영원한 기자혼을 이 돌 위에 새긴다.”고 애도했다.(1992.9.27 김문호 기자 일주기에)
6.25 당시 현 인의 <비 내리는 고모령>을 듣고 전란기의 애절했던 마음을 달래는 이 많았던 노래였는데 그 노래비를 취재하려던 신문기자가 다시 불귀의 몸이 되었으니 이래저래 고모령은 뒷사람에게 애절함과 한을 남긴 곳이었다.
마. 최희준의 <하숙생> 노래비
1). 2005년 4월 ,천안시 천안삼거리공원
2) 천안노래비 <하숙생>
인생은 나그네 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 가
구름이 흘러가 듯 떠돌다 가는 길에
정일랑 두지 말자 미련일랑 두지 말자
인생은 나그네 길
구름이 흘러가듯 정처없이 흘러서 간다
인생은 벌거숭이
빈손으로 왓다가 빈손으로 가는 가
강물이 흘러가듯 여울져 가는 길에
정일랑 두지 말자 미련일랑 두지 말자
인생은 벌거숭이
강물이 흘러가듯 소리없이 흘러서 간다
김석야 작사 / 김호길 작곡 / 최희준 노래
3) 천안삼거리는 <하숙생>의 배경
온 국민의 가슴을 적시며 애창되었던 대중가요 “하숙생‘이 입장출신 방송작가 金石野 선생에 의해 천안삼거리를 배경으로 작사되었음이 밝혀지면서 뜻을 함께하는 여러 시민들이 천안인의 마음의 고향인 이곳 삼거리공원에 오래도록 의미를 되새기고자 이 비를 세운다
바. 조영남 노래비
1) 화개장터 노래비
전라도와 경상도 가로지르는 / 섬진강 줄기따라 화개장터엔
아렛마을 하동사람 윗마을 구례사람/ 닷새마다 어우러져 장을 펼치네
있어야 할 건 다 있구요/ 어뵤을 건 없답니다 화개장터
광양에선 삐걱삐걱 나룻배 타고 /산청에선 부릉부릉 버스를 타고
사투리 잡담에다 입씨름 흥정이 오순도순 왁자지껄 장을 펼치네
구경 한 번 와보세요 오시면 모두모두 이웃사촌/
고운 정 미운 정 주고 받는 경상도와 전라도의 화개장터
2) 조선시대인 18세기로부터 번성하였던 화개장터는 김동리 소설 ‘역마’의 배경이다. 지금은 시골장터로 변하여 예 전성기를 찾지 못하고 있다.
사. 김광석 거리
1) ‘사랑했지만’
어제는 하루 종일 비가 내렸어 /자욱하게 내려앉은 먼지 사이로
귓가에 은은하게 울려퍼지는 /그대 음성 빗속으로 사라져버려
때론 눈물도 흐르겠지 그리움으로 /때론 가슴도 저리겠지 외로움으로
사랑했지만 그대를 사랑했지만 /그저 이렇게 멀리서 바라볼 뿐 /다가 갈 수 없어
지친 그대 곁에 머물고 싶지만 /떠날 수밖에 /그대를 사랑했지만
2) 대구 중구 김광석 거리 2019.2.17.
아. 구자룡의 제주도 노래비
1) 제주도
종려나무 가로수길 따라 걷다가
불어오는 바닷바람 흠뼉 취하면
나도 몰래 발걸음은 해변을 가네
왠지 모를 서러움이 고개를 들면
밤바다엔 고깃배들이 음---
등불을 켰네
밤부두를 서성이는 젊은 연인들
그 뜨거운 가스ᅟᅳᆷ들이 타오를 때면
어둠 덮인 도시에는 불빛이 가득
노래하는 마음들엔 기쁨이 넘쳐
홀로 섰던 내 마음에도 음---
노래 흐르네
구자룡 작사, 구자형 작곡, 한영애 노래
2) 참새를 태운 잠수함
25시 작가 게오르규는 2차 대전 때 독일군 잠수함 근무를 한다. 당시 산소 측정계기를 대신하던 토끼가 죽자 약질 게오르규가 그 역할을 대신하는 명예(?)를 감수한다. 이후 게오르규는 잠수함의 흰 토끼에 비유하여 현대의 위기를 생과 사랑의 아픔을 노래하는 시인의 숙명을 인식하다.이에 공까스펠 창작 음악운동 모임 참새를 태운 잠수함을 만들어 명동 가토릭여학생관 등에서 강인원, 남궁옥분, 전인권, 한동헌 등 100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1975년부터 1978년까지 한국최초의 본격 현대의 민속음악 운동을 앞장서 이끌며 공동체와 시대를 위해 헌신한다.
그 무렵, 홀로 제주도에 여행을 온 구자룡은 제주도라는 시를 써서 그의 동생에게 엽서로 띄워 작곡됐고 10년 후 한영애가 노래했다. 자신들의 소박한 이야기를 스스로 노래하는 촛불 같은 공연을 꿈꾸며 바다를 사랑한 외로운 사람 그리고 살아있는 잠수함 구자룡은 함장(1951.6.29.-2011.3.20.)을 기리기 위해 양기철 등 뜻 있는 제주문화인들과 한림읍 월령리 박용수 이장 및 마을 사람들의 따스한 마음이 하나로 어울려 이토ㅗ록 아름다운 새 중의 참(眞) 새 제주도 노래비를 세우니 이제 지나는 모든 이들마다 이 노래와 함게 행복한 사랑의 항해가 기쁨으로 가득하길 소망한다. 2014.1. 시인 구자룡
코로나를 피하여 제주도 갔던 2020,4.6 답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