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이야기 - 익선동 창덕궁 앞 열하나 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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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jy9713
2023.09.13. 15:58조회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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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이야기
익선동
창덕궁 앞 열하나 동네
익선동은 서울 종로구에 속한 마을로 조선시대 한성부 중비 정선방(貞善坊)에 속했으며, 이 지역에 있었던 전계대원군의 사저 누동궁 익랑이 특이하게 생겨 '익랑골'이라 불리데서 유래한다. 일제강점기 누동궁 토지를 도시개발업자 정세권이 한옥단지로 만든 것이 지금에 이른다. 익선동은 창덕궁을 중심으로 11개 법정동과 함께 도시재생 활성화 지역으로 선정돼, 현재는 '창덕궁 앞 열하나동네'에 속한다. 법정동은 종로 1,2,3,4가동이다.
선동을 포함한 창덕궁 앞 열하나 동네는 조선말부터 일제강점기를 거쳐 현대까지 약 100년의 사연을 차분히 이어왔다. 도시한옥으로 명소가 된 익선동부터 한복, 국악, 떡 등 궁중 문화가 담긴 여러 마을의 이야기까지 좁은 공간에 품어낸 '뉴트로' 골목을 따라가 보자.
1. 100년이 만든 뉴트로 골목 익선동
[골목이야기]100년이 만든 '뉴트로'골목 익선동
고층빌딩 숲 속, 섬 같이 자리한 한옥마을 익선동이 최근 '뉴트로(신복고주의)' 열풍과 함께 서울의 대표적 '핫플레이스'로 주목받고 있다. 현대 도시와는 다른 풍경으로 젊은 층의 마음을 사로잡은 이 마을은 어떻게 자리 잡을 수 있었을까. 그 사연의 시작은 1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익선동은 원래 철종이 태어나고, 그 후손들이 살던 누동궁이 자리한 지역이었다. 그러다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 청계천 이남에 주로 거주하던 일본인이 종로 진출을 본격화하자, 당시 도시개발업자였던 '건축왕' 정세권이 이 일대 토지를 사들여 대규모 한옥단지를 만들며 마을로 변모한다. '일본인들이 종로에 발붙이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한 정세권이 당시 생활에 맞는 도시한옥 단지를 건설하고, 저렴한 가격으로 판매해 종로를 지키고자 했기 때문이다.
좁은 필지를 최대한 활용하고, 근대 생활방식에 맞게 만든 도시한옥 형태는 조선인들이 살기에 안성맞춤이었고, 그렇게 자리 잡은 익선동 한옥단지는 일제 강점기 내내 이어졌다.
더 많은 한옥을 넣기 위해 좁은 골목으로 만든 까닭에 익선동은 이웃 간의 왕래가 활발했고, 덕분에 이 골목에 들어온 이들은 웬만해선 수십 년씩 마을에 살았다. 서울의 도시화가 진행되고, 특히 종로일대에 고층빌딩이 들어서는 동안 한옥마을 익선동은 별다른 변화 없이 한 세기 가까이 자리를 지켰다.
2005년 익선동 한옥골목 ⓒ서울연구데이터서비스 제공
그러나 그 세월은 익선동에도 어쩔 수 없는 불편함을 안겨줬다. 낡고 오래된 도시한옥은 현대 생활과는 맞지 않았고, 살기 힘들어진 주민들은 결국 재개발을 추진했다. 주민들은 복합상업시설로의 개발을 원했고, 그 요구가 받아들여져 마침내 익선동은 2004년 도시환경정비구역으로 지정됐다.
하지만 한옥 골목이라는 특성은 재개발에도 제한을 주었다. 익선동 한옥이 간직한 역사성을 외면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도시정비가 지지부진하자 익선동 주민들은 10년 만인 2014년 스스로 재개발을 포기했다. 생활하기 어려워지자 몇몇의 사람들은 익선동을 떠나기도 했고, 더러는 빈집으로 방치하기도 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재개발 철회가 익선동엔 오히려 기회가 되었다. 서울의 급격한 변화로 도심엔 군집(群集)을 이룬 한옥마을은 익선동이 거의 유일했고, 골목과 한옥을 경험하지 않은 젊은 세대들은 이곳에 매력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 때 재개발을 추진했던 주민들은 도시재생으로 눈을 돌렸고, 한옥엔 카페, 술집 등 상업시설이 들어오며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게다가 최근 불어온 '뉴트로 열풍'은 근대 한옥, 좁은 골목과 어우러지며 익선동을 새로운 핫플레이스로 떠오르게 했다.
'뉴트로' 한옥골목 익선동 ⓒ김민우PD
최근의 유행으로 급격한 상업화와 한옥 훼손에 대한 우려가 없는 것은 아니다. 주민들과 익선동 도시재생을 함께 진행한 김선아 한국건축가협회 도시재생위원장은 "지금 익선동은 조금 더 상업적으로 매력을 끌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데 최대한 맞춰진 상태"라며 "1930년대 지어진 한옥에 다양한 시간이 덧입혀진 공간으로 남을 수 있었을 텐데 (그러지 못해) 아쉽다"며 우려를 표하기도 한다.
하지만 익선동이 쌓아온 100년이라는 시간은 아쉬움 속에서도 전통이 끊어지지는 않을 거라는 기대를 품게 한다. 주민들과 도시재생 관계자는 물론, 입점상인들까지 익선동의 역사를 잘 알기 때문.
실제 익선동은 지난 2015년 한옥보존지구로 지정돼 건축물 높이를 제한했고, 체인점의 입점까지 제한해 그 풍경을 살리게 했다. 또 지구단위 계획에 따라 보행중심의 골목 역시 바꿀 수 없게 돼있다. 이와 관련 재개발과 도시재생 모두 추진한 천명수 성도 컨설팅 대표는 "기와 지붕과 대들보, 서까래 등 한옥의 기본 틀은 지키는 것으로 유도하고 있다"며 익선동 보존 가능성을 강조했다.
2019년 익선동 전경 ⓒ김민우PD
재개발 실패가 '뉴트로 골목'으로 다시 살아나다
물론,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익선동 역시 젠트리피케이션을 겪으며 또다른 위기를 맞을지 모른다. 하지만 천 대표와 김 위원장의 생각에서 보듯, 사람들이 100년을 이어온 익선동의 한옥과 골목을 좀 더 오래 보고 싶어한다는 것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익선동 역사과정
1914년 '익동'과 '정선방'에서 유래한 익선동으로 행정구역 변경
1920년 '건축왕' 정세권 건양사 설립
1920년대 누동궁 일대 매입 도시한옥 단지 조성
1930년 익선동 한옥단지 건설
1997년 재개발 추진 구역 논의
2004년 서울시 익선도시환경정비구역 지정안 발표
2014년 익선동 재개발추진위원회 자진해산
2015년 한옥보존지구로 지정
2018년 한옥보존형지구단위계획 확정
2. 궁중문화로 이어온 열하나 동네
[골목이야기]창덕궁 문화가 피어난 열하나 동네
'뉴트로' 중심지 익선동이 일제강점기 한옥단지의 사연을 지켜왔듯, 그 주변 마을 역시 지난 100년의 시간을 품고 있다.
행정동 종로 1,2,3,4가동에는 경운동, 권농동, 낙원동 등 28개 법정동이 있는데, 익선동을 포함한 '창덕궁 앞 열하나 동네'는 골목 곳곳에 조선의 궁중 문화를 전통으로 이어왔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들 열하나 동네는 조선왕조가 막을 내리면서 활성화된 공간이다. 일제강점기 일본인을 피해 만든 익선동이 조선인들을 지켰듯, 근처 골목 역시 조선 궁중에서 나온 다양한 사람들을 종로 일대에 붙들어놓았다. 창덕궁에서 나온 궁인들은 한복을 만들거나 떡을 만들어 팔았고, 국악인들은 이 주변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그렇게사라진 왕조의 전통이 주변 마을에 차분히 자리를 잡은 것이다.
열하나 동네에 자리 잡은 이들은 광복 후에도 마을을 떠나지 않고 전통을 계속 이어나갔다. 국악인들은 무형문화제가 되었고, 대를 이어온 가게들은 한국 전통문화의 기원으로 인식되기도 했다. 산업화를 거치며 종로 주변에도 빌딩이 올라가고, 도시화가 진행되는 동안 창덕궁 앞 열하나 동네는 조용히 지난 시간을 이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창덕궁 앞 열하나 동네 전경 ⓒ서울연구데이터서비스
하지만 어쩌면 당연하게도 마을은 변화를 맞았다. 창덕궁 주변도 길이 넓어지고, 높은 건물들이 들어서며 골목 풍경을 조금씩 바뀌게 되었다. 반세기 넘게 마을을 지켜오던 이들 중 몇몇은 다른 골목으로 떠나기도 했다.
그 즈음 도시재생이란 이름이 마을에 스며들었다. 재개발이 취소되며 활기를 잃었던 익선동에 젊은이들이 들어오면서 지난 시간의 가치를 인식하기 시작한 것. 대를 이어온 떡집은 하나의 전통 공간이 되어 세상에 알려졌고, 오래된 한옥은 그 자체로 하나의 관광 상품이 되어 사람들을 골목으로 이끌었다.
그렇게 골목은 지난 시간을 간직한 중요한 공간으로 떠올랐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낙원상가 주변부터 종묘 앞 서순라길까지의 골목들에도 여러가지 전통과 사연이 스며들어 있음을 깨달았다.
익선동의 경험은 결국 주변 열하나 마을에 빠르게 전파되었다. 도시재생을 이끌어온 이들은 마을을 엮어 하나의 전통문화 공간으로 만들기 시작했고, '창덕궁 열하나동네'라는 이름으로 하나의 공간으로 탄생시켰다. 각자의 일에 몰두했던 국악인, 한복 디자이너, 한식집 등은 서로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고, 그덕에 낡고 좁게만 느껴졌던 골목은 사연을 품은 역사공간으로 인식될 수 있었다.
그리고 열하나 동네는 익선동의 경험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골목은 남았지만, 빠른 상업화로 놓친 사람들의 사연까지 발굴하기 시작한 것이다. 국악인들의 옛 이야기, 옛 한옥의 추억, 대를 이은 상패 가게의 가족이야기까지... 지난 100년의 사연을 기록해 나갔다.
보이는 역사(골목 공연)-사랑을 구하는 김유정, 거절하는 박녹주 장면 매거진ⓒ '창덕궁 앞 열하나 동네'
2017년 돈화문앞 버스킹 모습 ⓒ매거진 '창덕궁 앞 열하나 동네'
전통을 열하나의 이야기로 품은 골목,
하나의 역사공간으로 자리하다
그렇게 마을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안고, 전통을 품으며 서울에 둘도 없는 궁중 문화 중심지로서의 입지를 다져나가고 있다.
오래됐기에 그만큼 다양한 재미를 간직한 마을, 창덕궁 열하나 동네. 많은 이들이 지금까지 그 시간들을 지켜온 것처럼 앞으로도 마을은 이 사람들 덕에 고즈넉한 매력을 이어갈 것이다.
자료제공
국립중앙박물관
서울역사박물관 서울역사아카이브
서울특별시 항공사진 서비스
서울연구원데이터서비스
서울사진아카이브
매거진 '창덕궁 앞 열하나 동네'
공유마당
촬영협조
익선동 한옥마을
게스트하우스 '남현당'
숙녀미용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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