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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카페를 방문하다 어느 날
지기님의 온라인강좌를 읽으며
아~ 나도 닮고 싶다.
내 카페에는 '온라인책읽기'메뉴를 만들자.
그래서 '나도 읽고 관심있는 이들도 읽게 하자'하곤
스승님의 책 '사이코드라마의 이론과 실제'을 올리기 시작했다.
매일 쓰겠다던 스스로의 약속은 지키지 못하고 있지만
나름 의미있는 작업이다.
새롭게 읽히는 글들이 가슴에 와 박힌다.
정신차리고 살아야되겠다
같이 공유하고 싶다.
1) 현실
현실이란 이상에 대한 실제(reality)와 가능성으로서의 현실(actuality)의 두 가지 의미를 지니지만 여기서는 넓은 의미로서 우리가 생활하고 행위하는 구체적인 현실을 일컫는다. 흔히 우리는 현실을 매우 잘 알고 있는 듯 "넌 현실을 너무 몰라." "현실은 그렇지 않은데 나라고 해서 뭐 뾰족한 수가 있겠어?" "그렇게 인간이 현실성이 없어서야." "현실은 결코 부정할 수 없는 거야."라고 말한다. 마치 현실이 우리 삶의 절대적 기준인 양 취급된다. 인간보다는 현실이 먼저다.
그러나 과연 우리는 얼마나 현실을 잘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것은 개인마다 차이가 있는 주관적 현실 내지는 현실관이 아닐까? 그것은 나라, 시대, 지역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며 한 개인에서도 나이와 상황에 따라 언제든지 달라질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내가 모르는 현실, 도저히 상상하기조차 힘든 현실도 수없이 존재한다. 내 앞의 현실만 현실이 아니다. 한마디로 나만의 현실은 존재하지 않으며 그 또한 시시각각 변화하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 대부분은 현실을 주어진 것, 고정된 것으로 받아들이고 내 앞의 삶만이 현실인 것처럼 믿고자 하는 경향을 보인다.
게다가 나 자신의 사고와 판단보다는 현실적 가치기준에 자신을 통째로 내맡긴다. 나의 선택이 아닌 현실이 내 삶의 이상이 된다. 그것은 인간이 아주 어렸을 때부터, 아니 태어나는 순간부터 훈육되고 주입된다. '사람답게, 올바르게 그리고 정상적으로·…·'가 주된 지침이다. 자유, 독립, 개성 등은 철저히 무시된다. 아이는 자신의 환경이 최상의 것인 양 흡수된다. 단 한 번의 회의조차 할 수 있는 기회마저 주어지지 않는다. 맹목적이고 순응적이다. 가정과 학교, 교회와 사회, 모든 이웃이 한 목소리다. 그것은 평생 동안 지속되는 삶의 일차적인 명령이다. 그 이유는 간단명료하다. 잘 먹고 잘 살며, 남보다 앞서려는 적자생존의 법칙이다. 그것이 가감 없는 현실의 본 모습이다.
뿐만 아니다. 그러한 기본적인 현실 이외에도 우리가 쉽게 상상하기 힘든 다양한 현실들이 존재한다. 감동적인 사랑과 우정이 있는가 하면 크고 작은 폭력과 끝없는 전쟁이 공존한다. 힘 있는 자들의 탐욕과 착취, 노예제, 기아와 질병, 자연 파괴, 핵실험, 독재, 광신 등이 존재하는 만큼이나 그에 비례한 수많은 피해자들, 헐벗고 고통 받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문제는 그에 그치지 않는다. 거짓과 위선이 이성과 정의의 이름으로 그러한 제반 현상들은 합리화하고 정당화시킨다. 현실의 그 많은 차이 나는 현상들이 한두 가지의 단순 논리(옳거나, 그르거나, 좋거나 나쁜)로 유형화된다. 그러고는 우리편 아니면 네편, 적, 악마 등으로 상대를 짓밟고 무시한다.
다음 현실을 보자. 무엇을 느끼는가? 차마 눈과 귀를 막고 싶은 현실이다.
● 미국, 유럽, 호주 등 백인 국가의 감옥 재소자 중 약 70%는 유색인종이랍니다. 예를 들어, 호주의 원주민은 전체 호주인
의 1~2%인 데 비해 재소자는 20~30%라는 거죠. 그리고 미국은 '초대형 교도소'를 세계 각국으로 수출하는 나라입니
다 (안젤라 데이비스, 강주현 역,2006).
● 베트남 전쟁 때 충성스런 미국인 한 명이 죽을 때마다 우리는 50명의 아시아인을 죽였습니다(커트 보네커트, 강주현 역,
2006).
● 평화를 지켜야 할 나라가 무기를 가장 많이 만들어 내는 나라입니다. 세계 무기의 절반을 미국이 만들고 영국, 프랑스,
러시아, 중국이 그 뒤를 잇습니다. 유엔 내의 안보리 국가들이지요(에두아르도 갈레아노, 강주현 역, 2006).
● 대부호 360명이 극빈자 25억 명의 전 재산을 합한 것만큼이나 부유하답니다. 매년 그들이 자신의 재산 중 1%만 세상에
환원해도 가난한 사람들의 식수와 학비를 해결할 수가 있습니다. 세계 인구의 0.05%에 불과한 500대 거대 콘체른들은
세계 국민총생산의 25%를 차지하고 세계 무역의 70%을 좌우하고 있습니다. 매년 1,000만명의 어린이들이 약값이 없어
병들어 죽어 가고 기아와 착취로 인해 매일 10만 명의 사람들이 죽어 가고 있는데도 말입니다(한스 바이스 외, 손주희
역, 2008).
● 인도네시아 노동자들은 하루 종일 고생해서 고작 2달러를 받고, 나이키사는 단돈 5달러를 들여 신발을 만들고 우리는
그것을 100~180달러에 사고 있는 거죠(한스 바이스 외, 손주희 역, 2008).
● 국제노동기구는 개발도상국에서만 5~14세 어린이 약 2억 5,000만 명(아시아 1억 5,300만 명, 아프리카 8,000만 명, 라
틴아메리카 1,700만 명)(한스 바이스 외, 손주희 역, 2008)이 강제로 노동에 투입되고 있다고 추산합니다.
● 지금도 세계적으로 노예와 강제 노역자들 다 합하면 적어도 2,700만 명으로 추산됩니다(http://www.antislavery. org).
심지어 1억 명까지도 추정됩니다. 서아프리카에서는 최근 몇 년 사이에 약 20만 명의 어린이들이 노예로 팔려갔습니다.
서유럽에서만 50만 명의 여성들이 인신매매의 희생양이 되어 매춘을 강요당하고 있습니다(한스 바이스 외, 손주희 역,
2008).
● 매일 아프리카에서는 5,000명의 사람들이 에이즈로 속절없이 죽어 가고 있습니다. 비싼 약값(독일의 경우 한 달 약값이
800유로) 때문이지요(한스 바이스 외, 손주희 역, 2008).
어떠한가? 현실로 다가오는가? 누구의 현실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나의 현실은 아니다. 맞는가? 그런데도 위정자들, 다국적 기업들, 부호들, 대기업 사람들은 틈만 나면 세계화, 지구가족, 글로벌화를 떠들어 댄다. 가해자일수록, 위선의 가면이 두꺼우면 두꺼울수록 그럴듯한 구호와 선전을 앞세운다. 어마어마한 돈을 들여 자신들은 옳은 일 한다고, 인류를 위한다고 광고한다. 그리고 우리는 아무것도 모른 체 그들을 믿고 따라간다. 마치 마취된 자동기계들마냥 열심히 그들의 제품을 사들이고 있다. 비싸니까, 최고이니까 하면서 말이다.
뿐만 아니다. 마찬가지로 귀담아 두고 싶지 않고 그냥 덮고 지나가고만 싶은 우리나라의 현실은 어떨까?
● 미국의 자발적인 식민지가 된 나라(박노자), 머리 까만 미국인들의 나라가 대한민국입니다(한홍구).
● 삼성이 지배하는 나라가 한국이고(심상정) 자본 파시즘이 지배하는 나라이죠(김규항).
● 노예를 기르고 약육강식을 강요하는 것이 이 땅의 교육이랍니다(박노자).
- 이상 지승호 인터뷰, 2007
● 한국의 부폐지수는 세계 40위를 넘고 환경지수는 아예 122~130위래요. 청계천은 연간 8억 7,000만 원의 전기세를 내
면서 운영(?)되고 있고요(물을 거꾸로 돌리는 데 드는 비용), 개발 당시 주변 지역 사업과 관련된 부정부폐로 전 서울시
장은 5년형을 받았답니다(홍성태)
● 아이들이 해마다 수십 명씩 성적 때문에 비관 자살을 합니다. 수만 명이 학교를 뛰쳐나오고 있는 것이 우리 교육의 현실
입니다(강수돌).
- 이상 지승호 인터뷰, 2008
● 통계청에 따르면 2005년도 기독교인 개종자 중 57%가 가톨릭으로 이동했고, 46.9%의 비종교인 중에서 2/3는 한때 기
독교인이었대요. 개신교 인구가 10년 사이에 14만 4,000명이 감소한 반면 천주교는 219만 5,000명, 불교는 40만 5,000
명, 원불교는 4만 3,000명이 늘어났대요(김선주, 2009).
● 성경의 가르침보다 현실적 가치를 우선시하는 위선적 신앙인들로 교회가 넘쳐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유니폼 크
리스천이라고 하는데 이명박 대통령이 유니폼 크리스천의 전형이죠(김선주, 2009).
● 2008년 10월의 바른교회 아카데미 조사에 의하면 가구당 건축헌금은 연평균 50만2,000원, 십일조는 350만 원이고, 200
6년도 개신교 전체의 운영자금은 연간 3조 1,760억 원(불교 4,610억, 천주교 3,300억원)이었습니다(김선주, 2009).
● 삼성의 경우, 2006년 신문매체 광고비만 1,600억 원으로 언론사들을 통제하였답니다(김병윤, 2009).
● '조중동으로 연결된 혼맥도'를 보면 우리나라의 웬만한 집안은 전부 혼인관계로 연결되었다는 점을 잘 알 수 있습니다.
곧바로 연결되거나 한 단계만 넘으면 전부 같은 집안이 되는 거죠. 정계(이명박, 이기택, 이회창, 전두환, 이한동, 이철
승, 양택식, 노태우, 노신영, 김복동, 이후락, 정일권, 김종필 등), 재계(효성, 조양조선, 한국제분, 롯데, 태평양, 우성, 하
진, 동부, 삼양사, 현대, 엘지, 삼성, 금호, 한화 등), 족벌 신문사(동아, 조선, 중앙, 매일경제 등) 모두 혈연관계를 갖고
이를 더욱 굳건히 해 나가고 있다는 것이죠(김병윤, 2009).
결코 우리의 삶에서 최선이라고 말할 수 없는 이런 현실은 천의 얼굴을 가진 괴물과 같고 부적절하기도 하며 나의 뜻, 의지, 꿈과는 무관하게 존재한다. 나의 의지가 개입하기에는너무나 크고 힘든 현실이기도 하다. 특히 외국의 경우 그렇다. 그리고 국내에서는 나와는 무관한 현실들을 나의 현실로 받아들이기에 무리가 있다. 먹고 살기도 바쁜 세상인데 남이 일(?)까지 신경 쓸 여유가 없다. 국가, 종교, 정치, 사회는 나와 직접적인 관계만 없다면 모른 체하고 살아갈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나의 현실이다. 내 눈 앞의 삶이다. 때로 우리는 우리 뜻에 걸맞게 현실을 개선하고자 노력하지만 결코 쉽지 않다. 설사 바꾼다 해도 곧 습관화되어 버리고 매너리즘에 빠져들게 된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현실의 힘을 인정할 수밖에. 온갖 관습과 규율, 대립과 편견, 감독과 통제가 있으며 지극히 당위적인 세계, 그래서 결국 현실의 제반 현상은 매우 당연하고 옳은 것이 되고 나의 삶의 중요한 가치기준이 된다. '남들도 다 그러는데'로부터 학벌, 외모, 성격, 인간관계며 관혼상제, 종교활동, 사회활동 등 삶의 범사에 걸쳐 일정한 규범과 당연히 따라야 할 규준이 정해진다. 나는 없다. 나는 숫자 놀이판에서 열심히 수를 세고 있는 일벌, 일개미다. 근면과 노동이 현실의 또 하나의 중요한 당위성이기 때문이다.
이제 잠시 2009년 6월의 우리 현실을 들여다보자. 6월 10일에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6.10 범 국민대회'가 열렸다. 6월 3일에 서울대에서 시작된 교수 시국선언 참여자가 전국적으로 93개 대학 4,500명을 헤아리게 되었다(한겨레 6월 12일자). 시국선언문의 핵심 내용은 현 정부가 집회와 시위의 자유, 표현의 자유 등 헌법적 가치를 훼손하고있으며 지난 20여 년 동안 일궈 놓은 민주주의를 일거에 퇴행시키고 있으니 중단하라는 것이었다. 그 도화선은 지난 5월 23일 토요일 아침에 봉화마을에서 벌어진 전직 대통령의 죽음이었다.
고마워요 미안해요 일어나요
-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영전에 바침
뛰어내렸어요, 당신은 무거운 권위주의 의자에서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으로
뛰어내렸어요, 당신은 끝도 없는 지역주의 고압선 철탑에서
버티다가 눈물이 되어 버티다가
뛰어내렸어요, 당신은 편 가르고 삿대질하는 냉전주의 창끝에서
깃발로 펄럭이다가 찟겨진, 그리하여 끝내 허공으로 남은 사람
고마워요, 노무현
아무런 호칭 없이 노무현이라고 불러도
우리가 바보라고 불러도 기꺼이 바보가 되어줘서 고마워요
아, 그러다가 거꾸로 달리는 미친 민주주의의 기관차에서
당신은 뛰어내렸어요. 뛰어내려 으깨진 붉은 꽃잎이 되었어요
꽃잎을 두 손으로 받아주지 못해서 미안해요
꽃잎을 두 팔뚝으로 받쳐주지 못해서 미안해요
꽃잎을 두 가슴으로 안아주지 못해서 미안해요
저 하이에나들이 밤낮으로 물어뜯은 게
한 장의 꽃잎이었다니요!
저 가증스런 낯짝의 거짓 앞에서 슬프다고 말하지 않을래요
저 뻔뻔한 주둥이의 위선 앞에서 억을하다고 땅을 치지 않을래요
저 무자비한 권자의 폭력의 주먹의 불의 앞에서 소리쳐 울지 않을래요
아아, 부디 편히 가시라는 말, 지금은 하지 않을래요
당신한테 고맙고 미안해서 이 나라 오월의 초록은 저리 푸르잖아요
아무도 당신을 미워하지 않잖아요
아무도 당신을 때리지 않잖아요
당신이 이겼어요, 당신이 마지막 승리자가 되었어요
살아남은 우리는 당신한테 졌어요, 애초부터 이길 수 없었어요
그러니 이제 일어나요, 당신
부서진 뼈를 붙이고 맞추어 당신이 일어나야
우리가 흐트러진 대열을 가다듬고 일어나요
끊어진 핏줄을 한 가닥씩 이어 당신이 일어나야
우리가 꾹꾹 눌러둔 분노를 붙잡고 일어나요
피멍든 살을 쓰다듬으며 당신이 일어나야
우리가 슬픔을 내던지고 두둥실 일어나요
당신이 일어나야 산하가 꿈틀거려요
당신이 일어나야 동해가 출렁거려요
당신이 일어나야 한반도가 일어나요
고마워요, 미안해요, 일어나요
아아, 노무현 당신!
- 시인 안도현
약 330년 전에 네덜란드 철학자 스피노자는 '우리는 자유로운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지극히 단순한 화두를 필생의 업으로 삼고 자신의 사상을 전개해 나갔다(로저 스크러튼, 조현진 역, 2002). 무엇이 우리를 자유롭게 해 주고 무엇이 우리의 자유를 가로막는가? 우리는 자유로운가? 민주주의란 도대체 무엇인가? 우리에게 국가란 무엇인가?
스피노자는 "국가의 목적은 실제로 자유다."라고 말하고 민주주의를 자유롭고 평등하다는 진리 혹은 그 가능성으로 정의하였다(안토니오 네그리, 이기웅 역, 2005). 우리나라는 민주공화국이다. 그런가? 민주주의라 말할 수 있는 건 오로지 투표권의 행사뿐이다. 그렇지 않은가? 사람 하나 잘못 선택함으로써 지난 20여 년의 민주주의가 퇴행할 수도 있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낄 수밖에 없는 것도 민주주의다. 10여 년간 조심스레 쌓아올린 남북화합이 일시에 무너져 내리고 여전히 네오콘의 강경 발언이 먹혀들고 있는 것도 이 땅의 민주주의 덕분이다.
이 대통령은 입만 열면 기업의 도우미가 되겠다고 하는데요, 왜 안면몰수하고 운하를 강행하는지 알아요? 처음부터 끝까지 정치 사업이에 요. 국내 5대 건설사 컨소시엄이 참여한다는데, 그들은 재작년 아파트 분양과 관련해서 담합협의에 연루된 기업들이에요. 대형 부정부패, 정경유착의 주범들이라고요. 그런데 그런 기업들이 찬성하면 추진한다는 게 말이나 되는 얘긴가요? 터무니없습니다‥…(홍성태, 2008).
신자유주의는 해방의 메시지, 세계화라는 복음신화를 만들고 전파한다. 자유, 해방, 규제 완화 등의 완곡어법을 사용하며 개혁, 경쟁력, 생산성, 유연화 등의 상투적인 언어유희를 통해 거대한 세계 신화로 탄생하였다. 한마디로 경제적 효율성만 따질 뿐 그 뒤에 숨겨진 사회비용은 철저히 모른 척한다. 예컨데, 해고 위협, 불안정 취업, 실업 공포와 같은 구조적 폭력이 정당화되고, 계약이론으로 교묘히 합리화된 새로운 유형의 지배양식을 통해 야만적 자본주의의 성공적이고 합법적인 착취가 이루어진다. 따라서 그러한 구조적 폭력은 장기간에 걸쳐 자살, 비행, 범죄, 마약중독, 알코올중독과 같은 크고 작은 일상적 폭력들로 그 대가를 치른다는 사실을 무시한다(피에르 부르디 외, 현택수 역, 2004).
여기서 잠시 현재 지구상에서 사라져야 할 것들 가운데 하나인 신자유주의를 여전히 신봉하는 우리나라의 상황을 들여다보겠다.
● 2007년 12월에 건설회사의 CEO이자 드러난 재산만도 600억 이사의 부자이며 전직 서울시장이 대통령이 된다. 그리
고 논문 표절, 학력 위조, 증여나 상속세 회피, 위장 전입과 땅투기, 자신이나 자식의 병역 기피, 쌀 직불금 소동 등 고
질적 부정 부패자들이 한 치의 부끄럼 없이 대거 청와대며 내각에 포진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들을 강. 부. 자(자식
들 군대 안 보낸 강남 사는 부자), 고. 소. 영(고려대, 소망교회, 영남지역 출신)이라고 불렀다.
● 잃어버린 10년이라는 말을 내건 747공약(연 7% 성장, 4년 내 국민소득 4만 달러, 10년내 세계 7개 경제대국으로 도
약). 연간 70만 개 일자리 창출이란 허황된 구호와 한반도 대운하 건설, 의료기관 및 공기업의 민영화 등 말로만의 실
용 정부는 2008년 4월 19일, 한미 쇠고기 협상을 굴욕적으로 체결한다.
● 2008년 5월 2일, 청계천 광장에 하나둘 촛불이 켜진다. 6월 10일에는 시청 앞 광장에 100만이 넘는 촛불이 타오른다.
한마디로 '광우병에 걸려 의료보험 민영화로 돈 없어 죽거든 대운하에 뿌려 주오.'가 주된 역설적 외침이었다.
● 마침내 공안정국이 시작된다. 공권력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시위가 통제되고 저지된다. 인터넷 논객 미네르바가 잡혀
가고 일제고사를 거부한 교사 17명이 해직당한다. 소위 언론 난민들(YTN의 노종면, KBS의 정연주, PD수첩의 이춘근,
김보슬, MBC의 신경민, 박혜진 등 수많은 기자, 언론인들)이 징계, 투옥, 정직된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투쟁하고 박
종태씨가 죽음을 맞이하며, 용산참사로 철거민 5명이 사망하고 생존자 27명이 구속되거나 불구속 기소된다. 많은 공
직자와 문화계 장들이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사임하거나 쫓겨난다. 2009년 4월 1일에는 인터넷 실명제가 발효된다.
● 골수 보수단체이며 대통령의 지원세력인 뉴라이트는 철저히 역사를 왜곡한다. 안중근, 김구 열사가 테러리스트로, 유
관순이 여자 깡패로 묘사된다. 근대화는 일본에 의해서, 민주주의는 미군정에 의해서 대한민국이 건설되었다는 교과서
가 나온다. 감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영어 몰입식, 교육, 전시 작전권 환수 연기 요청, 광우병 쇠고기 파동 등이
발생한다.
● 2008년 9월, 미국의 부동산 거품이 붕괴되면서 세계적 경제 위기와 더불어 실업대란이 찾아온다. 남북관계는 작심이
라도 한듯 최악의 상황으로 밀어붙이고 있다. 그리고 마침내 부정부패(?)의 이름하에 정·검·언이 합작하여 전직 대통령
을 죽음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다(소위 뇌물을 준 박연차 회장은 20년 이상의 개인적인 후원자라는 것을 과거에 모두
가 인정하였던 바였다.).
- 이상, 김병윤, 2009
그렇다. 문제는 합리성이다. 생산성이며 효율성이다. 모든 것이 자본이라는 불랙홀로 통하는, 돈 자체가 최종 목적지인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 말들은 가장 합법적으로 사용되는 최전방의 행동대원들이다. 인류 발전의 참된 원천은 곧 인간의 이성이라는 오래된 합리주의 사상은 아직도 건재하다. 합리적(rational)이란 이성적이라는 말과 같은 의미며(민중사관, 1967), 논리적이고 과학적이며 목적 여하를 불문하고 행위가 무리없이 계산되고 계획적이고 능률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한마디로 이성과 합리성 뒤에는 항상 '돈'이 숨겨져 있고 그 앞에는 언제나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인 어리석은 백성들, 반대자들만 있기 마련이다.
이성은 끊임없이 알고자 한다. 모든 것을 자신의 손아귀에 쥐고자 한다. 과학과 문명이 그 안에서 한없이 비대해져 간다. 쉴 새 없이 지식과 정보를 양산해 내고 다양화시켜 나아간다. 우리는 그것들을 손에 넣지 못하면 낙오자라도 되는 듯 혈안이 되어 그 뒤를 쫓는다. 자신의 삶과 그렇게 직접적인 관계도 없는 지식들임에도 아는 것이 힘이라고 믿고서 이유 없는, 충족되지 않는 허기감으로 마치 부를 축적하듯 지식을 축적해 나간다. 자신의 귀중한 삶의 시간을 소모하면서 제대로 활용하지도 체화하지도 못한 죽어 있는 지식, 논리를 위한 논리, 지식을 위한 지식으로 배불러 하는 세계, 그것이 바로 오늘날 이성과 합리성이 지배하는 현실의 한 단면이다. 그리고 우리는 아주 손쉽게, 너무나 당연한 일처럼 "그것은 비논리적이야, 비과학적이야, 비효과적이야, 비생산적이야, 비도덕적이고 비민주적이고 비사회적이야."라고 말한다. 인간이 인간을 척결하고 판단한다. 낙인을 찍고 찍히며 갈등하고 고통 받는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이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찾아보아야 할 때다. 우리는 자주 걸음을 멈추고 생각해야 한다. 깊이 사유해야 한다. 내가 알고 있는 현실, 믿고 있는 진실조차 회의할 수 있어야 한다. 맹목적 추종은 생존이 아닌 죽어 있는 삶이나 마찬가지다. 그것은 자기가 없는 삶이다. 세뇌된 삶이요, 무의미한 삶이다. 우리의 눈을 가려 왔던 오랜 교육의 힘으로부터, 또 무섭게 자기들 뜻대로 사람을 조종하고 마취시키는 거대 언론으로부터 한 발짝 뒤로 물러서는 지혜가 절실하다. 정치인들의 화려한 수사 뒤의 위선을 꿰뚫어 볼 수 있는 혜안이 필요하다. 생존하기 위해서, 왜소해지지 않기 위해서, 우리의 역량을 최고조로 높이기 위해서, 그리고 속아 살지 않고 세뇌당한 채로 살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깊이 생각해 봐야만 한다. 지금 이 순간,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현실을.
-최헌진(2010), 사이코드라마의 이론과 실제, 학지사, 29-37
첫댓글 "화려한 수사 뒤에 위선을 꿰뜷어볼 수 있는 혜안이 필요하다"는 말씀이네요. 어떻게하면 가능할까요? 그 또한 교육 아닐까 생각은 하는데...참 갈길이 멀게만 느껴지고, 자신이 처한 조건 하에서 한걸음씩 개선의 노력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정신 차리고 일해야겠습니다. 선생님의 '사다리'도 그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