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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생각을 하다
사유의 단서
마이너스 사고
집을 짓는 것은 벽돌을 더하는 플러스다. 활을 쏘는 것은 화살을 버리는 마이너스다. 우리는 목수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플러스 사고에 익숙하다. 사냥꾼의 관점으로 바라보는 마이너스 사고를 익혀야 한다.
활과 화살이 갖추어지면 완전하다. 완전성에 이르면 준비된 상태로 출발선에 선다. 거기서 무엇을 결정하든지 나는 에너지를 잃어먹는다. 내가 얻는 것은? 그것은 내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 환경이 결정한다.
플러스는 다다익선이라 어디까지 감당할지 알 수 없지만 마이너스는 0으로 확실히 종결된다. 내가 할 일을 다 해서 문제를 0으로 만들었는데도 결과가 나쁘면 주변환경 탓이지 내 잘못이 아니므로 신경쓰지 말자.
생각하려면 단서를 얻어야 한다. 완전성이 단서다. 비로소 사유할 수 있다. 세상을 마이너스로 보는 눈을 얻어야 한다. 나는 지금 준비된 상태로 정상에 서 있다. 정상에서 눈덩이를 굴린다. 아래로 가는 마이너스다.
자연의 어떤 변화는 모순의 해제다. 모순은 겹침이다. 세상은 연결되어 있다. 포개져 있고 압박받고 있다. 스트레스가 걸려 있다. 겹침이 풀리는 것이 변화다. 모든 문제는 궁극적으로 방해자를 제거하는 마이너스다.
사차원과 유체
덩어리를 칼로 자르면 절단면이 드러난다. 두 덩어리가 절단면을 공유한다. 자연의 의사결정은 공유의 해제다. 공유는 모순이고 변화는 모순의 해제다. 4차원>3차원>2차원>1차원>0차원 순으로 모순의 해제가 진행된다.
4차원이 완전하다. 우리는 완전성을 사유해야 한다. 총에 총알을 장착하고, 활에 화살을 매기고, 자궁에 아기가 들어선 것이 완전성이다. 그 총알을 발사하고, 그 화살을 쏘고, 그 아기를 낳는 마이너스로 사건은 일어난다.
입체는 면을 공유한다. 면을 칼로 자르면 두 면이 절단선을 공유한다. 면은 선을 공유한다. 선을 칼로 자르면 두 선이 절단점을 공유한다. 선은 점을 공유한다. 점은 자를 수 없다. 겹쳐지지 않았다. 언제나 공유가 풀린다.
반대로 겹쳐지면? 점을 겹치면 선, 선을 겹치면 면, 면을 겹치면 입체, 입체를 겹치면 4차원 유체다. 강체는 겹칠 수 없으므로 붕괴하지만 유체는 겹쳐진다. 에너지는 겹쳐진다. 그것은 모순이므로 자연은 겹침이 풀린다.
세상은 겹침이다. 겹친 상태가 완전하다. 완전한 상태에서 변화가 일어난다. 강체는 불완전해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모든 존재는 포개져서 내부에 압력이 걸려 있다. 서로를 붙잡고 있다. 무언가 공유하고 의존한다.
숨은 플러스 A
자연의 모든 것은 대칭이 있는데 겹침은 대칭이 없다. 유체는 맞은 편에 아무 것도 없다. 공유는 대칭이 없다. 그래서 인간이 애를 먹는다. 인간은 언제나 대칭을 지렛대로 삼아 상대의 공격에 맞대응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형제는 대칭이다. 형제가 공유하는 엄마는 대칭이 없다. 엄마 맞은 편에 작은 엄마가 있는 것은 아니다. 지구의 핵 맞은 편에 아무 것도 없다. 엄마를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어디에도 없다. 모든 존재에 비대칭이 하나씩 있다.
여당과 야당은 강체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국민은 유체다. 여야는 맞은 편에 상대방이 있지만 국민은 맞은 편에 아무 것도 없다. 강체를 다루는 방법으로 유체를 다루려고 하는 정당은 실패한다. 독재자의 방법은 실패한다.
유체는 내부에 하나가 더 있다. 그러므로 대칭되지 않는다. 마지막에 와서 화룡점정을 이루며 인간을 전율하게 한다. 그것은 내부에 숨어 있으므로 몰라도 사는데 지장이 없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나타나 다된 밥을 엎는다.
유체는 무언가 하나가 더 있어서 내부를 결속시킨다. 그것은 절대적이고 일방통행이며 막무가내다. 그것은 타협하지 않는다. 그것은 굽히지 않는다. 그것은 다루기 어렵지만 반대로 내가 먼저 판을 짜고 설계하면 완벽하다.
물이 흩어지지 않는 것은 그릇 때문이다. 물고기가 흩어지지 않는 것은 떡밥 때문이다. 사람이 흩어지지 않는 것은 사랑과 의리와 권력 때문이다. 문명이 흩어지지 않는 것은 진보의 관성 때문이다. 항상 붙잡는 것이 있다.
사유의 맹점
반대편 보기
지능은 반대편을 보는 능력이다. 앞을 보고 뒤를 아는게 지능이다. 인간은 반대편을 잘 보지 못한다. 정지한 것의 반대편은 잘 보는데 움직이는 것의 반대편은 보지 못한다. 인간의 사유에는 커다란 맹점이 있다.
어린이 영재를 테스트 하는 방법이 있다. 물체의 앞면을 보여주고 뒷면을 그리게 하면 의외로 사람들이 뒷면을 잘 그리지 못한다. 앞면이 볼록하면 뒷면은 오목하다. 그냥 반대로 그리면 되는데 그게 쉽지 않다.
좌우대칭은 잘 그린다. 똑같이 그리되 방향만 바꾸면 된다. 앞뒤 대칭은? 곤란하다. 이집트 부조는 얼굴을 옆으로 돌리고 있다. 코를 정면으로 그리지 못한다. 만화가도 정면을 그리는데 애먹는지 코가 사라진다.
앞뒤는 사실이지 대칭이 아니다. 포개지기 때문이다. 한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은 대칭이되 대칭이 아니다. 머리와 꼬리는 대칭이지만 대칭이 아니다. 머리는 꼬리를 흔들 수 있지만 꼬리는 머리를 흔들 수 없다.
세상은 대칭이다. 앞을 보면 뒤를 안다. 에너지는 비대칭이다. 에너지는 일제히 한 방향으로 움직이며 겹쳐진다. 그럴 때 역설이 작용한다. 항상 인간의 의도와 반대로 된다. 애를 먹는다. 인간은 비대칭에 약하다.
에너지는 비대칭의 숨은 플러스 A가 있다. 보이는 것 외에 하나가 더 있다. 시장의 이윤, 집단의 권력, 자연의 기세, 동료의 의리는 가만이 엎드려 있다가 움직임이 격발될 때 갑자기 튀어나와서 사람을 놀래킨다.
인간의 착시
인간은 대칭을 고리로 사유하는데 포개지는 것은 비대칭이다. 사람을 포개면 권력, 돈을 포개면 이윤, 자연을 포개면 기세가 발생한다. 이에 대칭되는 반 권력, 반 이윤, 반 기세가 없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사유하지 못한다.
빛과 어둠은 대칭이지만 대칭이 아니다. 빛은 광자가 있는데 어둠은 암자가 없다. 빛과 어둠은 포개져 있다. 머리와 꼬리가 겹쳐져 있다. 빛은 어둠을 조절할 수 있지만 어둠은 빛을 조절할 수 없다. 포개지는 것은 비대칭이다.
인간의 사유는 움직이고 움직이면 하나가 더 있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연결고리가 있다. 지식의 연결고리는 지혜다. 하나를 배우면 열을 안다. 부부의 연결고리는 사랑이다. 한 사람을 건드리면 두 사람이 반격한다.
새끼곰이 귀엽다고 쓰다듬는데 엄마곰이 뒤에서 노려보고 있다. 꽃을 보고 눈길을 주는데 향기를 더하니 전율한다. 모든 움직이는 것, 연결되는 것,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것, 겹쳐지고 포개지는 것은 하나가 더 있다.
강체에 없고 유체에 있다. 죽은 것에 없고 산 것에 있다. 고인 물에 없고 흐르는 물에 있다. 개체에 없고 집단에 있다. 오합지졸은 없고 베테랑은 있다. 유체는 놔두면 흩어진다. 유체가 흩어지지 않게 결속시켜주는 것이 있다.
이중의 역설
우리는 역설에 미끄러진다. 의도와 반대로 된다. 얻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다. 항상 그런 것은 아니고 역설은 움직이는 것에 나타난다. 포개지는 것에 나타난다. 유체에 나타나고 집단에 나타난다. 에너지를 태우면 나타난다.
그냥 자동차와 시동이 걸린 차는 다르다. 그냥 지나가는 두 사람과 커플로 맺어진 두 사람은 다르다. 그냥 국민과 결집된 국민은 다르다. 거기에 무언가 하나가 더 있다. 그것은 평소에 잠복해 있다가 어떤 임계에 도달했을 때 갑자기 성질을 낸다.
역설은 여유로울 때는 없고 긴장할 때 나타난다. 당황할 이유는 없다. 한 방향으로 몰아서 닫힌계를 걸고 압력을 조절하여 균형을 이루면 된다. 전략으로 맞서면 된다. 역설을 해결하는 이중의 역설이다. 장군에 멍군이 있지만 외통에는 당한다.
역설은 상대성이다. 상대성은 외부와 비교한다. 닫힌계에 가두어 상대성을 절대성으로 바꾸어야 한다. 계에 가둬지면 자기 자신과 비교하게 된다. 공간의 비교를 시간의 비교로 바꾸게 된다. 자신의 어제와 오늘을 비교하면 성장 방향이 보인다.
우리가 아는 세계는 3차원이다. 거기에 에너지를 더하면 사차원이다. 2D와 3D가 다르듯이 3차원과 4차원은 다른 거다. 닫힌계에 압력이 걸려 있고 내부가 연결되어 있다. 강체가 아니라 유체로 있다. 유체를 보는 감각을 키우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정지한 량과, 움직이는 운동과, 그것을 격발하는 힘과, 그 힘을 붙잡은 입자를 볼 수 있다. 부족하다. 거기서 하나를 더 봐야 한다. 그것은 자원들이 흩어지지 않게 가두는 그릇이다. 궁극적으로 그것은 척력을 인력으로 바꾸는 결맞음이다.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부는게 아니라 부는게 바람이다. 동動은 정靜보다 크다. 부는 그것에는 바람에 없는 하나가 더 있다. 기압이 있다. 대류가 있다. 방향성이 있다. 액션이 있다. 질서가 있다. 메커니즘이 있다.
나쁜 사람이 나쁜 짓을 하는게 아니라 나쁜 짓을 하는 사람이 나쁜 사람이다. 나쁜 짓을 하는 사람은 나쁜 사람에게 없는 하나가 더 있기 때문이다. 사건을 연결하는 관성력이 있다. 한 짓을 또 한다.
동動은 움직인다. 움직이는 것은 궤도가 있다. 법칙대로 간다. 한 번 움직이면 그것을 반복한다. 선한 의도로 악한 행위를 했다는 거짓말에 속으면 안 된다. 악의 궤도에 갇혔으므로 악행을 계속한다.
빛은 어둠에 없는 하나가 더 있다. 광자가 있다. 진보는 보수에 없는 하나가 더 있다. 사회성이 있다. 산 것은 죽은 것에 없는 하나가 더 있다. 생명성이 있다. 움직이는 것은 내부에 조절장치가 있다.
존재가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움직이는 것이 존재다. 움직이는 것은 힘이 있고, 궤도가 있고, 방향이 있고, 질서가 있고, 조절장치가 있다. 외력을 이기고 법칙을 따르므로 맞서려면 전략이 필요하다.
정지한 것은 다른 것과 비교하고 움직이는 것은 자기 자신과 비교한다. 자동차는 운전해봐야 알고, 자식은 키워봐야 알고, 악기는 연주해봐야 알고, 커플은 사귀어봐야 안다. 시간을 추적해야 한다.
존재는 그 자체로 액션이고 우주는 커다란 액션이다. 그것은 변화하고 성장하는 것이다. 개별적으로 나누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로 연결된 것이다. 액션 위주 사고방식을 훈련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이름이 없으므로 사유하기 어렵다. 언어로 표현하여 전달하기 어렵다. 깨달음이 필요한 이유다. 그것은 동사로 표현되므로 명사로 바꾸어야 한다. 메커니즘 개념이 이해를 돕지만 부족하다.
전략의 세계
인간이 전율하는 것은 움직이는 것을 밀고 당기며, 높고 낮으며, 길고 짧으며, 강하고 약한 압박의 밸런스를 느낄 때다. 뱃속 아기의 태동을 느낄 때 인간은 전율한다.
정지한 것은 형태가 있고 움직이는 것은 압박이 있다. 압박은 조절되어야 한다. 정지한 것은 작게 나누면 되고 움직이는 것은 반대로 합쳐서 전략으로 상대해야 한다.
액션을 아는 것이 아는 것이다.
유체를 아는 것이 아는 것이다.
압력을 아는 것이 아는 것이다.
균형을 아는 것이 아는 것이다.
전략을 아는 것이 아는 것이다.
강체는 외부에 형태가 있고 유체는 내부에 압박이 있다. 액션은 내부에 압박이 걸려 있다. 변화를 결정하는 자궁 내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다. 내부를 들여다봐야 안다.
정지한 것은 밖을 보고 움직이는 것은 안을 본다. 밖을 보면 상대성이 성립하고 안을 보면 절대성이 성립한다. 보이는 외모는 상대적이나 감추어진 내면의 성장은 절대적이다.
궁극적으로는 우주 안에 변화가 있을 뿐이다. 변화는 간섭에 의해 일어나고 간섭은 상수로 파악된다. 물리상수와 같은 상수를 알면 다 아는 것이며 그 이상은 과학자도 모른다.
자연의 필연
길 위의 길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이다. 함께 가야 하는 길이다. 우리는 길 위에 내던져진 존재다. 가는 곳 모르고 휩쓸려 가다가 문득 생각하게 된다.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지? 우리는 처음 어디서 출발했지?
길은 출발하고 연결하고 도착한다. 우리는 에너지의 두 가지 성질을 알고 있다. 열역학 제 1법칙이 길의 연결이면 제 2법칙은 집의 도착이다. 에너지의 최초 출발에 대해서는 모른다. 생각하지 않았다.
출발(에너지) - 1법칙 연결(변화) - 2법칙 도착(물질)
어원으로 보면 에너지energy는 '안en에서 일하는ergy 것'이다. 물질은 겉에서 일하고 에너지는 안에서 일한다. 안은 사건의 출발점 안이다. 에너지는 출발하기 전에 내부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었던가?
안에서 결정하고 밖으로 전달한다. 안에서 결정하는 것은 유체, 밖에서 전달하는 것은 강체다. 우리가 아는 세계는 3차원 강체의 세계다. 압력이 걸려 계를 이룬 4차원 유체의 세계에 대해서는 모른다.
유체의 결정 (내부 에너지) - 강체의 전달 (외부의 물질)
강체를 밀면 밀려간다. 유체를 밀면 반대로 달라붙는다. 자석실험으로 알 수 있다. 자기장은 유체다. 유체는 결이 있다. 4차원은 유체가 닫힌계에 갇혀 방향성을 얻어 결을 이룬 것으로 정의해야 한다.
제4의 차원
우리가 아는 것은 의사결정구조 밖에서 일어나는 3차원 강체의 전달이고, 모르는 것은 의사결정구조 안에서 일어나는 4차원 유체의 간섭이다. 의사결정은 계에 갇힌 유체의 간섭에 의해 일어난다.
에너지는 유체다. 유체는 움직여 충돌하고, 충돌하면 갇히고, 갇히면 간섭하고, 간섭하면 방향성을 획득하며 그것이 성질이다. 닫힌계에 갇힌 에너지가 간섭하는 상호작용이 물질의 성질을 만든다.
1. 자발성 - 물은 내부 원인에 의해 흐른다.
2. 의존성 - 엄마곰이 가면 새끼곰도 따라간다.
3. 조절성 - 둘의 접점에서 간섭을 조절한다.
유체의 성질은 자발성과 상호의존성과 조절가능성이다. 자연의 천태만상을 연출하는 각본이다. 물은 수압이 조절하고, 불은 산소가 조절하고, 공기는 기압이 조절하고, 생명은 번식이 조절한다.
생물의 진화는 생태적 지위를 찾아간다. 국가의 국경선은 지정학적 구조에 맞추어 그어진다. 인간 역시 신분이라는 생태적 지위를 찾아간다. 스스로 자신의 활동반경을 규정하고 규칙을 지키려 한다.
인간의 도구는 접점의 간격을 조절할 수 있다. 반드시 노즐이 있고, 촉이 있고, 날이 있다. 주는 날과 받는 면이 만나는 뾰족한 접점이 있다. 볼펜의 촉과 종이가 만나는 접점은 둘 다 매끄러워야 한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만남의 순간 긴장한다. 무의식의 압박에 의해 스트레스 받는다. 흥분한다. 인간은 자유의지를 의심받을 정도로 보이지 않게 집단의 압박을 받는다. 마음은 압박을 조절하는 장치다.
낳음의 과학
물리학은 어떤 일본인이 의역한 말이고 물리학은 원래 자연학이다. 그리스어에서 기원한 physics의 어원을 추적하여 영어로 옮기면 nature다. 자연은 스스로 그러함이니 자발성이다.
자발성과 보편성이야말로 모든 사유의 어머니가 된다. 보편성은 인간이 자연으로 다가가는 방법이고 자연이 인간에게로 다가오는 것은 자발성이다. 물리학은 자발성의 학문이어야 한다.
물리학의 어느 페이지에도 자발성에 대한 언급이 없다. 그나마 자발성을 상당히 반영하는 개념이 에너지다. 에너지는 그리스어로 안en에서 일한다ergon는 뜻이다. 밖이 아니라 안이다.
nature는 낳는다, 나타난다, 나온다는 뜻이다. 자연은 내부에서 저절로 나오는 것이다. 과일은 저절로 열리고, 물은 저절로 흐르고, 생물은 저절로 자란다. 자연은 왜 스스로 나타나는가?
이상하다. 누구나 느낄 것이다. 이 문명은 결함 있는 문명이다. 부품 하나를 잃었다. 과학의 근본은 물리다. 물리의 근본은 자발성이다. 그것이 존재의 엔진이다. 중요한 핵심이 빠져 있다.
보편성도 중요하다. 보편은 공유한다. 자연은 낳음이고, 낳음은 자궁이 있고, 자궁은 공유된다. 한 어미에게서 나온 여러 형제가 어미를 공유한다. 그렇다면 모든 것의 자궁은 무엇인가?
자발적 에너지
자연의 자발성을 반영하는 말은 에너지다. 에너지에 대해서는 열역학 1법칙과 2법칙이 알려져 있다. 그런데 왜 열역학인가? 열은 에너지의 전달방식 중에 하나다. 이상하다. 왜 에너지의 전달이 맨 앞에 오는가?
열역학 1법칙은 에너지의 이동을 말할 뿐 출처를 언급하지 않는다. 열역학 2법칙은 에너지의 이동방향을 말할 뿐 에너지의 자궁을 말하지 않는다. 에너지의 이동과 이동방향은 사건이 한참 진행된 다음의 일이다.
활을 쏘면 날아간다. 화살이 자연발생한 것은 아니다. 화살은 이동한 것이다. 화살의 이동방향은 과녁을 향한다. 과녁에 박힌 화살이 증가하면 무질서도 증가다. 이상하다. 왜 화살을 쏜 주체는 언급하지 않는가?
열역학 1법칙에 따르면 에너지는 전달될 뿐 생성되거나 사라질 수 없다. 그렇다면 그 전달의 주체는? 주는 사람이 있으면 받는 사람이 있다. 열역학 1법칙은 주고받음이다. 2법칙은 받는 사람의 사정을 설명한다.
에너지를 주는 주체는 누구인가? 이것들이 뭔가 핵심을 감추고 얼버무리고 있잖아. 왜 아무도 이 부분을 질문하지 않는가? 매우 어색하지 않은가? 누가 활을 쐈기 때문에 화살이 날아온 것이다. 누가 격발했는가?
에너지는 발생하거나 소멸되지 않지만 격발되고 전달되고 흩어진다. 열역학 1법칙은 에너지의 전달을 설명하고 2법칙은 흩어짐을 설명한다. 격발은? 자연의 자발성이 격발한 것이다. 왜 자발성을 설명하지 않는가?
밸런스의 발사
에너지는 발사된다. 에너지를 격발하는 주체는 밸런스다. 자연의 근본 성질이 자발성이라면, 자발성의 화살을 쏘는 주체는 유체로 이루어진 닫힌계 안에서 파동의 간섭에 의해 성립하는 밸런스의 복원력이다.
열역학 1법칙과 2법칙은 에너지가 발사된 이후를 논할 뿐 발사과정을 다루지 않는다. 존재의 격발과정을 논하지 않는다. 존재의 엔진을 언급하지 않는다. 형상이 있는 모든 존재는 그것을 낳는 낳는 자궁이 있다.
유체의 결속이 닫힌계 내부에 압력을 만든다. 압력이 간섭을 만들고 간섭이 밸런스를 만든다. 밸런스의 복원력이 에너지의 자발성을 만든다. 에너지의 자발성이 조절장치가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룰 수 있다.
둘이 하나를 공유하면 상호의존성이 성립한다. 상호의존이 성립하면 유체다. 유체는 내부에 압력이 걸린다. 압력이 걸리면 빈틈없이 들어찬다. 내부에 빈틈이 없으므로 거기서 일어나는 어떤 변화는 마이너스다.
상호의존성은 사회에서 권력으로, 시장에서는 이윤으로, 자연에서는 기세로 나타난다. 모든 변화는 공간의 거리를 좁혀서 시간의 속도를 높이는 한 방향으로만 일어나므로 문제를 풀어갈 실마리를 잡을 수 있다.
극한의 법칙은 열역학 1법칙과 2법칙이 놓친 부분을 채워 완전하게 만든다. 에너지의 입력에서 전달을 거쳐 출력까지 사건의 전모를 알게 한다. 그 사이에 무엇이 있나? 조절장치가 있다. 그것이 이기는 힘이다.
쓸 수 있는 에너지라거니 쓸 수 없는 에너지라거니 하는 표현은 직관적이지 않다. 활은 쏠 수 있고 화살은 쏠 수 없다. 밸런스는 쏠 수 있고 언밸런스는 쏠 수 없다. 에너지가 쏘는 활임을 알아야 열역학이 쉽다.
인간의 운명
상호의존성
인간은 왜 멍청한가? 나의 오래된 의문이다. 이제 알겠다. 그것은 집단을 의식한 권력적 기동이었다. 관종 짓 말이다. 댓글 하나로 게시판을 초토화 시킨다. 일만 개의 댓글이 붙으면 권력자의 쾌감을 느낀다. 호르몬이 나와준다. 오르가즘 느낀다. 흘분한다.
인간의 행동은 집단의 무의식에 지배된다. 개인의 마음이 보이지 않게 조종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내 생각이지만 내 생각이 아니다. 인간은 집단과의 결속을 요구하는 동물의 본능에 따라 무의식적으로 집단이 원하는 행동을 하도록 만들어졌다.
인간은 행동하기 앞서 흥분하고 집단은 그 흥분을 조절한다. 인간이 어떤 행동을 하는 이유는 흥분했기 때문이고 흥분하는 이유는 집단으로부터 암시를 받았기 때문이다. 동기나 목적은 없다. 그것은 그냥 말을 갖다 맞춘 것이다. 자유의지 대신 권력의지다.
종교, 주술, 터부, 포비아, 인지부조화, 괴력난신, 음모론, 사차원 등 소인배의 비합리적인 행동에서 보이는 공통점은 집단의 상호의존성을 높이는 기동이라는 점이다. 개인이 집단의 의사결정 중심으로 쳐들어가서 게임을 걸고 집단과 굳게 결속하려고 한다.
대중이 정치적 프레임 걸기, 계급배반 투표, 흑백논리, 이항대립적 사고, 마키아벨리즘의 오류에 빠지는 이유는? 집단과 결속하려는 것이다. 진실은 관심 없고 사람의 동원에 골몰한다. 일단 사람만 많이 모이면 내 할 일 다 했다. 소떼나 양떼와 다를 바 없다.
현대 개념미술은 반예술이 먹힌다. 예술을 부정하고 조롱하는 작품이 비싸게 팔린다. 마찬가지로 반사회적 행동이 오히려 사회적 상호작용을 높인다. 지구 평면설 같이 터무니 없는 주장을 내걸어야 한다. 말같잖은 소리를 해야 먹힌다. 일종의 퍼포먼스다.
인간은 집단을 타격하여 반응을 끌어낸다. 선한 영향력의 행사는 어렵고 쉬운 것을 하다 보면 결과적으로 나빠져 있다.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주도권을 뺏기고 스트레스를 받아서 암에 걸린다. 아무거나 막 하면 그게 만만한 약자를 때리는 비겁한 짓이다.
인간의 바보짓은 역설적으로 집단의 리스크를 감소시킨다. 유나바머로 알려진 시어도어 카진스키의 경고를 기억하자. 산업은 어린이 손에 총을 쥐어준 것과 같다. 똑똑한 한국인들이 인구절벽의 위기를 초래한 것이 대표적이다. 참으로 똑똑해지기는 어렵다.
인간의 무지
가장 강력한 이론은 엔트로피 증가 법칙이다. 확실히 상대의 항복을 받아낸다. 이유가 있다. 모든 속임수는 사건의 중간을 속인다. 입구와 출구는 속일 수 없다. 탄생과 죽음은 속일 수 없다. 속임수는 공간의 방향을 비튼다. 중간은 두 방향이므로 속는다. 입구와 출구는 한 방향이므로 속일 수 없다.
거짓말로 잡아떼는 사람은 '내가 언제?'라는 말로 반격한다. 경상도 사람이 그렇다. 언제는 시간이다. 왜 시간을 거론할까? 공간을 속일 수는 있지만 시간은 속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공간은 좌우 두 방향이므로 속일 수 있지만 시간은 언제나 과거에서 미래의 일방향으로 가므로 쉽게 속일 수 없다.
엔트로피는 공간을 해명한다. 시간의 엔트로피를 더하면 완벽하다. 그것이 극한의 법칙이다. 닫힌계 안에서 유체의 상호의존성에 의해 자발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은 이벤트가 거듭될수록 1회 의사결정이 전체에 미치는 영향력 크기가 감소한다. 유체의 압력이 힘을 발사하므로 압력이 감소한다.
엔트로피 증가는 열역학과 통계역학이라는 좁은 분야에 잡혀 있다. 그것이 보편원리라는 사실을 알면서 일반화 하지 못하고 있다. 사건의 전모를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코끼리 다리만 만져본 것이다. 엔트로피는 무질서도 증가다. 질서도 증가는? 엔트로피 증가는 결과 측 사정이고 원인 측 입장은?
엔트로피를 뒤집으면 상호의존성이다. 질서는 상호의존성이다. 질서가 있다는 것은 붙잡혀 있다는 말이다. 붙잡는 것은 유체다. 유체는 자발성이 있다. 조절장치가 있다. 붙잡은 것을 놓을 수 있다. 유체의 압력은 조절된다. 인류는 핵심을 놓치고 있다. 실상 인류는 엔트로피에 대해서 모르고 있다.
권력은 상호의존성에서 비롯된다. 인간의 행동은 상호의존성을 늘리는 방향의 기동이다. 인간은 상대를 보이지 않는 끈으로 묶으려 한다. 붙잡으려고 한다. 괴력난신, 음모론, 사이비, 시골텃세, 인지부조화 따위 비합리적인 행동은 상대방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것이다. 소인배의 권력의지다.
밸런스 복원
닫힌계 안에서 유체는 압력에 의해 붙잡혀 있다. 집단 속에서 인간은 무의식에 의해 붙잡혀 있다. 사이비, 주술, 터부, 포비아, 음모론 따위 소인배 행동은 사람의 마음을 보이지 않는 끈으로 묶어버린다. 그것이 일종의 심리공격임을 알아야 한다.
모세의 십계명과 같다. 무엇을 하자마라고 금제를 걸면 집단이 결속한다. 불교에 와서 비구의 250계, 비구니의 348계로 진화했다. 수염을 깎지 않는 야구감독 징크스나 MSG를 못 먹게 하는 음식포비아나 같다. 원시인의 터부가 진화한 것이다.
무엇을 하지마라는게 권력이다. 그게 사람을 바보 만드는 심리공격이다. 개인의 행동을 제한하여 상상력을 빼앗고, 자유를 빼앗고 노예로 만드는 폭력이다. 집단을 결속하는 데는 도움이 되나 만인이 만인에게 흉기를 휘두르고 있으니 비참하다.
엔트로피는 결과 측 사정이고 반대편 원인 측은? 닫힌계 내부에 유체의 압력이 걸리면 에너지의 자발성이 작동한다. 내부 원인에 의해 스스로 복원한다. 인간들의 주술과 터부와 사이비는 집단의 밸런스 복원력에 무임승차 하려는 얌체 행동이다.
어떻게든 인류 전체와 대립각을 세우기만 하면 50 퍼센트 공짜 먹는다. 주목을 끌면 사람이 꼬인다. 그 다음은 모르쇠다. 모인 군중은 헤어지기 섭섭하니 뭐라도 저지르고 본다. 거기서 에너지를 빼먹자는 것이다. 쪽수만 모으면 뭐가 되어도 된다.
이분법, 흑백논리, 이항대립, 프레임 걸기, 상대성의 논리로 어떻게든 사람을 자극하여 반응만 끌어내면 마이크를 잡을 수 있다. TV 출연의 기회가 있다. 유튜브를 찍어도 조회수가 나와준다. 만인이 만인을 자극하고 있으니 스트레스만 올라간다.
극한의 대조
엔트로피는 증가한다. 정확히 무엇이 증가하는가? 질이 감소하면 입자가 증가하고, 입자가 감소하면 힘이 증가하고, 힘이 감소하면 운동이 증가하고, 운동이 감소하면 량이 증가한다. 원인 측이 감소하는 만큼 결과 측이 증가한다. 유체의 간섭이 감소하고 강체의 독립성이 증가한다.
축과 대칭의 질서가 깨지면서 높은 단계의 밸런스가 해체되고 낮은 단계의 밸런스가 증가한 것이다. 줄기 하나가 부러지면 가지 두 개가 새로 발생한다. 상점 하나가 폐업하면 실업자 두 명이 늘어난다. 그것을 무질서도 증가라고 표현한다. 증가는 헷갈리는 말이고 실제로는 감소한다.
질은 압력이 감소한다.
입자는 대칭이 감소한다.
힘은 공간이 감소한다.
운동은 시간이 감소한다.
량은 값이 감소한다.
우리는 원인 측의 감소에 주목해야 한다. 엔진의 동력이 감소하면 바퀴의 이득과 리스크가 증가한다. 주는 사람의 권력이 감소하면 받는 사람의 이득이 증가하고 불안요소도 증가한다. 권력이라는 안전장치를 해제했기 때문이다. 왕권이 감소한 만큼 민중의 이익과 리스크가 증가한다.
엔트로피 증가는 사건의 결과 측, 출력 측, 받는 쪽 사정이다. 사건의 원인 측, 입력 측, 주는 쪽 사정을 인류는 탐구하지 않았다. 존재의 엔진을 탐구하지 않았다. 인류는 사람을 흥분시키고 집단을 격동시키는 근원을 살피지 않았다. 그것은 서로 공유하는 것이다. 상호의존성 증가다.
극한의 법칙을 사용하여 원인 측의 감소한 사정과 결과측의 증가한 사정을 즉시 대조할 수 있다. 극한의 법칙은 대조군을 두는 점이 큰수의 법칙과 다르다. 근원의 힘은 밸런스의 복원력이다. 인간은 밸런스를 발견할 때 흥분한다. 남녀는 서로의 어떤 균형점을 발견했을 때 흥분한다.
도박에 빠지는 이유는 거기서 밸런스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정치 중독자들은 거기서 밸런스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사랑에 빠지는 이유는 밸런스가 조절되는 현장을 느꼈기 때문이다. 내가 상대를 통제했을 때 흥분할 뿐만 아니라 상대의 명령에 통제되는 자신의 변화에 더 흥분한다.
모든 변화는 밸런스가 깨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질서가 맞다. 밸런스가 깨질 뿐 원위치로 되돌아가지 않는다. 질의 밸런스가 무너지면 입자의 밸런스로 복원되고, 입자의 밸런스가 무너지면 힘의 밸런스로 복원된다. 자발적 변화는 한 단계씩 낮아진다. 그러므로 우주는 마이너스다.
생각 빌드업
부는 메커니즘
바람이 부는게 아니라 '부는 그것'이 바람이다. 바람은 좌우 두 방향으로 불지만 '부는 메커니즘'은 고기압에서 저기압 한 방향으로 간다. '부는 그것'은 내부에서 결정하고 바람은 외부에서 전달한다. 메커니즘을 봐야 진짜다.
밖에서 일어나는 전달은 좌우 두 방향으로 가지만 안에서 일어나는 결정은 압력차를 따라 한 방향으로 간다. 언제나 밖으로 나갈 뿐 들어오지 않는다. 세상을 메커니즘으로 이해하는 눈을 떠야 한다. 메커니즘은 비대칭이다.
외부 전달은 좌우 두 방향으로 흩어지므로 결과를 장담할 수 없다. 내부 결정은 안에서 밖으로 가는 한 방향으로 가므로 확신할 수 있다. 외부의 전달은 바람이 부는대로 가지만 내부의 결정은 무조건 풍선의 주둥이로 나온다.
닫힌계에 가둬진 유체는 궤도를 타고 정해진 길로 간다. 바람이 부는 메커니즘은 유체다. 공식에 대입하여 풀면 된다. 바람은 공기 입자가 강체다. 수십 가지나 되는 외적 요인을 하나씩 검토해야 한다. 결과를 에측할 수 없다.
틀린 생각 - 외부, 강체, 전달자, 상대성, 플러스 (앞에서 유혹하는 것)
바른 인식 - 내부, 유체, 결정자, 절대성, 마이너스 (뒤에서 등을 떠미는 것)
사실이지 바람은 그 바람이 그 바람이다. 다만 우리가 어느 차원에서 개입하느냐다. 한 차원 위에서 보면 유체, 한 차원 낮춰서 보면 강체다. 가둬서 안을 보면 유체, 풀어서 밖을 보면 강체다. 4차원은 유체고 3차원은 강체다.
유체는 내부에 압력이 걸려 있으므로 언제나 미는 힘으로 나타난다. 물은 수압, 기름은 유압, 열은 열압, 에너지는 파동압, 생태계는 진화압, 시장은 금리압, 정치는 민심압이 있다. 마이너스 방향으로만 가므로 조절할 수 있다.
압력은 미는 힘이다. 보이지 않게 집단의 압력이 등을 떠밀어서 인간으로 하여금 행위하게 한다. 앞에서 유혹하는 플러스는 가짜다. 뒤에 청구서가 숨겨져 있다. 뒤에서 밀어대는 마이너스가 진짜다. 그 힘은 곧바로 작용한다.
무언가 준다는 플러스에 응하면 뒤로 요구조건이 따라붙는다. 무언가를 제거한다는 마이너스는 빽마진이 없다. 수술로 이물질을 제거하는 방법은 1초만에 효과가 있지만 뭔가를 더하면 내부의 밸런스를 다시 조정해야 한다.
만유척력
우주의 기본 힘은 척력이다. 힘 자체가 척력이다. 힘과 척력은 같은 말이다. 작용 반작용의 법칙에 따라 어떤 둘이 충돌하면 중심에서 멀어지는 것이 척력이다. 인력은 밸런스에 잡힌 것이다. 인력은 유체의 간섭에 따른 응집력이다. 그것은 2차적 힘이다.
인력은 당기는 힘인데 우주 안에 당기는 것은 없다. 당기려면 손을 뻗어 붙잡아야 하는데 붙잡는 과정이 이미 척력이다. 지구가 당기는 것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무거운 것이 지구 중심으로 떠밀린다. 키질을 하면 무거운 것이 이래로 가라앉는 것과 같다.
1. 작용에 대해 반작용한다.
2. 작용에 반작용하는 의사결정 중심이 있다.
3. 중심에서 주변으로 멀어지는 에너지의 방향성이 있다.
에너지는 내부에서 움직인다. 그것은 에너지의 고유한 성질이다. 관성의 법칙에 따라 에너지는 방해자를 만날때까지 계속 움직인다. 방해자가 등장하면 충돌하여 방향을 바꾼다. 유체가 충돌하면 에너지의 파동이 간섭되어 방향을 바꾸는 것이 힘이다.
1. 힘은 에너지의 방향전환이다.
2. 에너지는 닫힌계 안에서 스스로 방향을 바꾸는 자발성이 있다.
에너지는 닫힌계 안에서 내부 원인에 의해 스스로 방향을 결정하는 자발성이 있다. 닫힌계 내부를 적절히 조절하여 원하는 방향으로 에너지의 진행방향을 유도하면 이득이 있다. 뭐든 가둬서 조지고 코너에 몰아서 조지는 법이다. 가두면 통제가 된다.
힘의 기본방향
당구대가 삼각형이라면 공은 어디로 굴러갈까? 당구공의 진행 방향을 결정하는 쿠션은 외부요인이다. 공에 회전을 걸어주면 어떨까? 감아차기로 공의 진행방향을 사전에 결정하는 것은 내부요인이다.
닫힌계의 내부요인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자발성이다. 투수의 변화구는 타자의 방망이와 만나기 전에 내부에서 결정된다. 내부는 조절되나 외부는 어쩔 수 없다. 투수 손을 떠난 공은 운에 맡겨야 한다.
1. 에너지는 자발성이 있다.
2. 자발성은 계 내부에서 결정된다.
3. 내부에서는 미는 힘 밖에 없다.
투수는 공을 밀어낼 뿐 당기지 않는다. 공이 투수에게 되돌아오는 것은 외부의 타자가 결정한다. 척력은 내부에서 결정되고 인력은 외부의 방해자에 의해 결정된다. 척력은 알 수 있고 인력은 알 수 없다.
척력(원인) - 내부에서 결정하는 자발성이 있다.
인력(결과) - 외부 방해자에 의해 간섭된 2차 힘이다.
척력이 상대의 중심이 아니라 주변부를 밀면 오히려 접근한다. 결맞음과 결어긋남에 따라 미는 힘이 반작용되어 달라붙는다. 그것은 척력의 이차적인 효과다. 힘의 원천은 공간을 확보하려는 척력이다.
뱀 꼬리를 밟으면 뱀이 사람을 문다. 머리를 때려야 한다. 기둥의 하단을 발로 차면 사람쪽으로 쓰러진다. 벌목꾼은 나무가 사람을 덮치지 않게 조심해야 한다. 소인족이 거인족을 밀다가 깔리는 수 있다.
옥동자가 최홍만과 씨름을 하다가 밑에 깔렸다면 그것은 옥동자의 힘이 작용한 것이 아니라 구조가 작용한 것이다. 척력은 공간의 진동에 의한 우주의 성질이고 인력은 둘이 간섭한 밸런스의 작용이다.
우리가 물질이라 부르는 것은 진동하는 공간의 균형점이다. 양성자와 전자가 있다는 것은 진동의 중심점이 있다는 것이다. 진동은 하나가 둘을 차지하므로 공간이 모자란다. 공간을 확보하면 척력이다.
입자의 탄생
세 사람이 옆으로 나란히 서서 서로를 밀어댄다고 치자. 가운데 낀 사람이 불리하다. 혼자 두 사람을 상대해야 하기 때문이다. 가운데가 약하면 짜부러진다. 짜부러지면 달라붙는다. 척력이 인력으로 바뀐 것이 입자다.
세 사람의 가운데가 축이고 가장자리가 대칭이다. 축이 약하면 바퀴가 부러진다. 축이 코어다. 모든 변화는 코어의 이동이다. 물질은 깨져도 축이 먼저 깨지고 움직여도 축이 이동한다. 축은 기본적으로 리스크가 크다.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가운데 자리를 피한다. 벽을 등지는 가장자리가 안전하다. 입자는 중심부터 깨진다. 깨지지 않는 것은 가운데 코어가 보강된 것이다. 권력자는 가운데를 차지하고 더 많은 몫을 차지하여 보강한다.
사람들이 한사코 극우로 가고 극좌로 가는 이유는 가운데 자리의 리스크를 피하려는 것이다. 안철수가 모르고 극중놀이 하다가 깨졌음은 물론이다. 가운데 중도파는 좌우 양쪽으로 협공을 당해서 전멸할 위험이 있다.
진흙으로 공을 만들자. 가운데가 깨진다. 눈사람을 만들자. 역시 가운데가 깨진다. 진흙 작업은 막대기에 새끼줄을 감아 심을 보강해야 한다. 눈사람은 눈을 단단하게 뭉쳐 심을 만들어야 한다. 항상 가운데가 문제다.
계에 외력이 작용하면 힘은 가운데로 모인다. 가운데가 깨지지 않으면 보강된다. 가운데가 보강한 것만 살아남기 때문이다. 끝까지 가면 가운데가 낫다. 가운데가 보강된 다음에 가장자리를 이기는 것이 이기는 힘이다.
구조의 탄생
열역학 2법칙에서 말하는 '무질서도 증가'는 결과 측 사정이다. 무엇을 설명하든 사건의 원인 측 위주로 말해야 한다. 이건 초등학생도 아는 상식이다. 원인은 작용에 대한 반작용이 시작되는 중심부에 있다.
원인은 미는 힘이다. 밀면 흩어지는 것이 무질서도 증가다. 미는 힘이 방해받아 국소적으로 당기는 결과로 나타나곤 하지만 닫힌계 전체를 보면 언제나 미는 힘이 우세하다는 것이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이다.
무질서도 증가는 흩어지는 것이다. 그 전에는 모여 있었다. 모여있는 것이 닫힌계다. 하나의 사건에서는 내부적으로 다섯 번 국소적인 닫힌계가 만들어진다. 하나의 사건에서 5번 미는 힘이 방해받아 모인다.
우주는 원자의 집합이 아니라 의사결정 단위의 복제다. 질, 입자, 힘, 운동, 량이 단위다. 거기서 모이기와 흩어지기를 결정한다. 자연은 하나의 사건에서 5회에 걸쳐 내부적으로 흩어지고 모이기를 결정한다.
질은 닫힌계 전체의 모임이고 입자, 힘, 운동, 량은 국소적 모임이다. 투수는 전체의 힘을 끌어모아 어깨로 밀어낸다. 다시 어깨의 힘을 모아 팔로 밀어내고 다시 팔의 힘을 모아 손으로 보내고, 공으로 보낸다.
모이면 충돌하고 충돌하면 밀어낸다. 밀어내면 엔트로피 증가다. 밀려난 것들이 국소적으로 뭉치지만 최소한 의사결정비용 만큼은 이전보다 작게 모인다. 투수가 공으로 밀어보낸 힘은 손에 모인 힘보다 작다.
힘은 마이너스 방향으로 가므로 조절된다. 질이 깨지면 입자가 되지만 입자는 질보다 작다. 입자가 깨져서 힘이 되지만 힘은 입자보다 작다. 운동을 거쳐 량에 이르기까지 단위가 낮아지므로 하극상을 막는다.
척력과 인력
계 내부를 균일화 하는 유체의 복원력이 에너지다. 유체가 간섭하여 밸런스를 회복하는 성질이 자발성이다. 자발성은 방해자를 외부로 밀어낸다. 미는 힘은 척력이다. 척력은 마이너스다. 세상을 척력으로 보고, 유체로 보고, 마이너스로 보면 많은 것이 보인다.
1. 유체가 밸런스를 이루는 단위가 계다.
2. 유체는 밸런스를 회복하는 자발성이 있다.
3. 밸런스의 방해자를 밀어내는 힘이 척력이다.
4. 척력은 중심에서 주변으로 흩어지는 마이너스다.
5. 에너지는 질, 입자, 힘, 운동, 량으로 다섯 번 밀어낸다.
밀면 간섭된다. 미는 힘은 방해받아 당기는 결과로 된다. 질은 입자로 밀고, 입자는 힘으로 밀고, 힘은 운동으로 밀고, 운동은 량으로 민다. 반대편을 보면 당기는 힘이다. 질이 미는 힘이면 입자는 당기는 힘이다. 미는 힘으로 통일해서 말해야 헷갈리지 않는다.
원인 측(내부) - 유체, 미는 힘, 마이너스
결과 측(외부) - 강체, 당기는 힘, 플러스
우리는 유체보다 강체, 미는 힘보다 당기는 힘, 마이너스보다 플러스에 주목하지만 그것은 결과만 바라본 것이다. 원인측은 닫힌계 안에서 작동하므로 겉에서 보이지 않는다. 보이는 부분만 보면 오판하게 된다. 닫힌계 내부 밸런스의 복원력이 근원의 엔진이다.
존재의 엔진 - 작용 반작용에 따른 닫힌계 내부 밸런스의 복원력
질, 입자, 힘, 운동, 량은 이전 단계의 결과이면서 다음 단계의 원인이다. 미는 성질과 당기는 성질을 동시에 갖지만 미는 힘에 주목해야 실마리를 잡고 한 방향으로 계속 풀어갈 수 있다. 당기는 힘에 주목하면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순환의 오류에 빠지고 만다.
인력과 척력은 같다. 주는 사람은 척력이고 받는 사람은 인력이다. 조절장치는 척력에 있다. 용돈을 주는 사람이 액수를 조절한다. 이원론을 쓰면 중복 계산의 혼선을 피할 수 없다. 척력 일원론으로 통일해야 한다. 수입은 고정이고 나의 지출만 기록하면 된다.
극한의 법칙
자발성 원리
열역학의 중요성은 누구나 알지만 현실에서 열역학을 써먹을 일은 별로 없다. 열은 에너지다. 열역학은 에너지가 작용하는 모든 분야에 적용되는 우주의 보편원리다. 알고보면 물질이 에너지고 존재가 에너지다. 세상에 에너지 아닌게 없고 열역학 아닌게 없다.
열역학이 거창하게 시작하지만 불교의 선문답처럼 겉돌고 있다. 현실의 모든 분야에 열역학 법칙이 적용되지만 실제로는 현실과 잘 결합되지 않고 있다. 사실은 모르고 있다. 인류는 에너지가 뭔지 모르기 때문에 다른 분야에 응용하지 못해서 용도가 제한된다.
열역학 1법칙은 도깨비가 여우로 둔갑했다는 식의 개소리를 배척하는데 쓰인다. 열역학 2법칙은 무한동력 아저씨를 놀려먹는데 사용된다. 문제는 실패한다는 점이다. 그들도 열역학이론을 정면으로 부정하지는 않는다. 다만 하던 삽질을 멈추지 않을 뿐이다.
열역학 1법칙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사람은 없다. 마법이 활개치던 봉건시대와 달리 요즘은 심각한 개소리를 하는 사람이 드물다. 사실은 에너지 개념에 막힌 것이다. 에너지라는 강력한 개념이 등장하는 순간 모든 마법과 주문과 술법이 힘을 잃어버린 것이다.
열역학 2법칙은 왜 그렇게 안될까? 열역학 2법칙은 에너지의 방향성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방향은 쌍방향이다. 여기서 헷갈린다. 방향은 움직이고 움직이면 동사다. 동사로 설명하면 좋지 않고 명사로 틀어막아야 한다. 친절하게 설명하면 말꼬리 잡혀 안 된다.
열역학은 설명하지 않고 배척한다는 사실을 납득해야 먹힌다. 귀신이 어쩌고 하는 사람을 과학자가 상대해줄 리 없다. 거짓은 먼저 언어의 벽에 막힌다. 마법이 에너지 개념을 깨지 못한다. 무한동력 삽질을 막을 강력한 언어는 없는가? 그것이 이기는 힘이다.
무한동력 아저씨는 지는 힘에 매달린다. 이기지 못하므로 의미가 없다. 이기는 힘은 내부에 하나가 더 있다. 숨은 플러스 A를 제시하지 못하면 말꼬리를 잡을 수 없다. 4차원에는 3차원에 없는 것이 있다. 안에서 붙잡고 매개하는 것이다. 촉매가 있어야 진짜다.
1법칙 - 에너지는 사라지거나 생겨나지 않고 이동한다.
2법칙 - 에너지는 안에서 붙잡은 것을 바깥에 풀어놓는 형태로 힘을 발사한다.
열역학 2법칙에 쓸모 있는 에너지라는 괴상한 표현이 나온다는 것은 인류가 여전히 에너지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쓸모라는 말은 관측자인 인간의 입장이다. 과학자는 자연을 위주로 객관적인 표현을 사용해야 한다. 자발성이 적당하다.
열은 자발적으로 이동한다. 비는 스스로 내리고 바람은 스스로 불어온다. 그것은 내부에 무언가 하나가 더 있기 때문이다. 운동에너지는 한 방향이고 위치에너지는 두 방향의 교착이다. 위치에너지는 방향이 하나 더 있다. 애초에 에너지라는 개념이 문제였다.
에너지는 힘과 운동을 구분하지 않는다. 구조론은 에너지를 질, 입자, 힘, 운동, 량으로 분류한다. 구분하므로 속일 수 없다. 질은 유체의 압박이 걸려 4차원이고, 입자는 밸런스가 있고, 힘은 밸런스를 깬다. 운동은 힘을 막아세우고 량은 그것을 그릇에 담는다.
뜨거운 것과 차가운 것을 같은 공간에 두면 얼마 후 온도가 같아져 있다. 한 컵의 물과 반 컵의 물을 호스로 연결하면 사이펀의 원리에 의해 수위가 같아져 있다. 괘종시계 여러 개를 나란히 두면 공진현상에 의해 시계추가 같은 방향에 같은 속도로 움직인다.
파동의 간섭이 자발성을 낳는다. 자발성은 쓸모가 있다. 내가 가만 있어도 알아서 움직여주니 얼마나 좋은가? 단 자발성은 닫힌계에 가둬야 작동한다. 무한동력 아저씨의 모든 작업은 열린계에 해당되므로 망한다. 그런 사람은 상대할 필요가 없다. 배척한다.
에너지는 좋은 것이다. 에너지가 전면에 등장한 후 마법과 주술이 한 방에 아웃된 이유는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좋은 에너지 놔두고 안 좋은 마법에 매달릴 이유가 없잖아. 좋은 것은 효율성이고 효율성은 공유다. 에너지의 자발성은 유체의 공유에서 나온다.
에너지는 공유를 빼먹는 것이다. 둘이 맞들고 있다가 한 명이 손을 빼버리는 것이 에너지다. 스프링을 양쪽에서 누르고 있다가 한쪽 손을 빼버린다. 고무줄 새총이라도 마찬가지다. 에너지가 공유를 빼먹는다는 사실을 납득할 때 무한동력 삽질은 멈추어진다.
파동의 간섭
열은 스스로 이동하므로 쓸모가 있다. 물은 스스로 이동하여 수력발전소의 터빈을 돌린다. 수도꼭지만 틀어주면 물이 쏟아져 나온다. 한 번 나오지 않고 계속 나와준다. 닫힌계 내부에 압력이 걸려 있는 유체는 스스로 이동하는 자발성이 있다.
바이올린 두 개를 같은 공간에 두고 한쪽 바이올린의 G현을 켜면 다른 바이올린의 G현이 진동한다. TV든 라디오든 전파의 파동을 이용한다. 햇볕도 파동의 힘이다. 파동의 간섭이 에너지 자발성의 원천이다. 파동이 합쳐지므로 유익한 것이다.
열역학 2법칙은 에너지의 자발성이 계의 평형에 이를수록 감소한다는 말이다. 이는 계 내부의 평형이탈이 동력이며 밸런스를 복원하여 평형에 이르면 파동의 간섭이 소멸하여 이동을 멈춘다는 말이다. 파동의 간섭 성질이 에너지의 원천이다.
무질서도 증가는 사람을 헷갈리게 하는 조악한 레토릭이다. 무질서도 증가는 결과 측 사정이고 과학자는 사건의 원인 측을 중심으로 말해야 한다. 과학자들이 에너지의 성질을 몰라서 말을 헷갈리게 하고 있다. 인류는 여태 에너지를 모른다.
열역학 1법칙은 에너지가 발생하지 않고 이동한다는 것이다. 열역학 2법칙은 공간에서 일어나는 에너지의 자발적인 이동경로를 해명한다. 시간의 이동순서에 대해서는 모른다. 극한의 법칙이 필요한 이유다. 피드백은 시간을 따라서 작용한다.
세상이 이 모양 이 꼴인 이유는 얌체들 때문이다. 얌체는 시간적 순서를 흔든다. 새치기가 대표적이다. 뒤에 온 사람이 앞줄에 선다. 다 된 밥에 밥숟가락 들이민다. 뒤에 와서 남의 성과를 가로챈다. 그것을 통제하는게 먼저온 사람의 권력이다.
먼저 온 사람에게 권력이 있고 뒤에 온 사람에게 이득이 있으며 권력이 이득을 통제하는게 뒤에 온 사람에게 리스크가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득이 있는데 비용이 없을 리 없다. 문제는 청구서가 뒤늦게 배달되는 것이다. 그게 리스크다.
극한의 법칙은 현실에서 써먹을 데가 많다. 공간의 약점을 공략하면 상대의 집요한 맞대응에 의해 막히는게 보통이지만 시간의 순서를 이용하면 이미 시간이 지나버려서 상대가 대응할 수 없다. 엎어진 물이 된 것이다. 확실하게 이길 수 있다.
권력과 이득
닫힌계 안에서 1회의 의사결정이 전체 판도에 미치는 영향력은 갈수록 감소한다. 하나의 사건은 질, 입자, 힘, 운동, 량의 5회에 걸친 의사결정으로 이루어진다. 뒤로 갈수록 영향력이 감소한다는 것이 극한의 법칙이다.
결정자와 전달자가 있다. 앞서가는 쪽이 결정하고 뒤따르는 쪽이 전달한다. 질이 결정하면 입자가, 입자가 결정하면 힘이, 힘이 결정하면 운동이, 운동이 결정하면 량이 전달한다. 선등자에게 권력이 있고 후등자는 없다.
권력(결정) = 이득 + 리스크(전달)
앞에 가는 사람은 맞바람을 뚫어야 하므로 손해보지만 대신 뒤에 오는 사람을 엿먹일 수 있다. 그것이 권력이다. 뒤에 오는 사람은 초기 비용을 절감하여 이득을 얻지만 그 이득을 빼앗길 수 있다. 비용절감이 리스크다.
생산자가 소비자를 겸하면? 대기업이 하청업체를 겸하면? 권력자가 이득을 추구하여 선택권을 소비하면 선택지를 상실한다. 무언가를 선택하면 그것을 선택할 수 없게 된다. 결혼 상대를 선택하면 선택할 수 없게 된다.
배우자를 선택함과 동시에 리스크가 커진다. 혼인신고와 동시에 이혼할 확률이 높아진다. 이득은 무언가를 공유하는 것이다. 무언가를 공유하면 그게 리스크다. 이득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리스크가 있다. 비용이 든다.
권력을 지니되 권력의 사용을 최소화 해야 한다. 권력과 이득을 동시에 추구할 수 없다. 선택할 수 있는 위치에 가 있을 뿐 선택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끝까지 선택을 미루면 아무 이득이 없으므로 그것도 허무하다.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은 뒤따르는 자의 이득을 해명하고 내시균형은 그에 따른 리스크를 강조한다. 맨 먼저 와서 판을 깔고 기업을 유치하는 국가의 권력은 누가 해명하는가? 그것은 아무도 생각해보지 않았다.
닫힌계 안에서는 앞사람에게 권력이 있다. 먼저 온 사람이 터줏대감이다. 뒷사람에게는 이득이 있다. 먼저 온 사람이 길을 닦아놨기 때문에 공짜로 그 길을 이용할 수 있다. 대신 뒤에 온 귀농인은 텃세에 시달리게 된다.
권력 딜레마
활은 과녁을 지배하는 권력이 있다. 과녁은 가만 있어도 화살이 제 발로 날아오는 이득이 있다. 활은 닫힌계다. 외부의 도움이 없다. 과녁은 열린계다. 외부에서 화살이 찾아온다. 사건은 닫힌계 > 열린계로 간다. 안>밖이다.
먼저 결정하는 쪽은 닫힌계다. 무인도에 처음 상륙한 사람은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다. 이득이 없다. 대신 권력이 있다. 뒤에 오는 사람을 방해할 수 있다. 선점하고 텃세를 부리면서 방문자를 선별적으로 받을 수 있다.
뒤에 온 사람은 이익이 있지만 열린계라서 이익을 보호할 장치가 없다. 먼저 와서 자리 잡은 기득권에게 털리기 다반사다. 뒤에 온 사람이 이득의 일부를 먼저 온 사람에게 지불하면 윈윈인데 보통은 싸우다가 같이 죽는다.
어떤 둘을 연동시키면 효율성의 이득이 있지만 대신 리스크가 있다. 뭉쳐 있으면 유리하다. 흩어져 있는 적군을 각개격파 한다. 그러다가 폭탄 한 방에 몰살된다. 인류가 고민하는 문제가 다 이득과 리스크의 조정문제다.
죄수의 딜레마에서 경찰이 먼저 온 사람이다. 경찰에게 권력이 있다. 죄수는 이익을 꾀하지만 리스크가 있다. 구단은 먼저 온 사람이고 선수는 뒤에 온 사람이다. 구단은 선수의 먹튀에 주의하여 리스크를 회피해야 한다.
국가 > 은행>기업> 하청업체> 소비자 순으로 뒤에 온 사람이 리스크를 전담하는게 보통이다. 먼저 온 사람에게 권력이 있기 때문이다. 먼저 온 사람이 권력을 행사하여 뒤에 온 사람의 이득 일부를 빼앗는 것이 이윤이다.
선등자가 안전을 확보하면 후등자가 이득을 본다. 다만 후등자의 생명이 선등자의 확보에 달려 있다는 점은 리스크다. 우리는 선등자의 권력을 인정하면서도 후등자의 이득과 리스크도 인정하고 적절하게 조율해야 한다.
자본주의는 선등자의 권력만 강조한다. 선등자인 미국이 후등자인 중국의 이득을 참지 못하고 확보물을 자르면 같이 죽는다. 사회주의는 후등자의 이득만 강조하다가 리스크로 망한다. 중국의 운명이 미국의 손에 달렸다.
극한의 법칙
공간 - 작은 그릇에 큰 그릇을 담을 수 없으므로 크기 순서대로 담으면 점차 작아진다. (엔트로피 증가)
시간 - 뒤의 결정이 앞의 결정을 칠 수 없다. 권력 순서대로 진행하면 점차 작아진다. (극한의 법칙)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이나 극한의 법칙이나 본질에서는 같은 것을 말하고 있다. 다만 극한의 법칙은 대조군을 두고 조금 더 폭넓게 본다는 점이 다르다. 공간으로 전달되는 열이 아니라 시간으로 진행되는 사건을 해명하기 때문이다.
권력은 갈수록 감소한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사람이 마지막에 가담하려고 해서 시스템이 망한다. 남이 차려놓은 밥상에 숟가락만 들고 달려든다. 먼저 와서 밥상을 차린 사람에게 권력이 있어야 하며 뒤에 와도 이득이 있어야 한다.
무슨 일이든 주는 사람에게 권력이 있고 받는 사람에게 이득이 있다. 주는 자는 권력을 행사하여 자신이 손해보지 않는 결정을 해야 하고 받는 사람은 리스크에 신경 써야 한다. 눈앞의 이득만 쫓다가 뒤로 청구서 받기가 다반사다.
도박꾼은 마지막에 베팅하고 정치인은 마지막에 배신한다. 무한히 베팅할 수 있다면 무조건 나중에 베팅하는 사람이 이긴다. 상대가 얼마를 불렀는지 보고 곱하기 두 배를 부르면 된다. 시스템이 망한다. 아무도 게임을 하지 않는다.
거짓말하기 시합은 무조건 먼저 말하는 사람이 진다. 경매장에서는 마지막에 액수를 부르는 사람이 이긴다. 낙찰되면 물건을 챙겨서 이득을 얻지만 대신 높은 가격이라는 리스크를 부담한다. 먼저 부른 사람은 가격을 높여 엿먹인다.
닫힌계(권력) -> 열린계(이득+리스크)
리더는 닫힌계다. 도와주는 사람이 없다.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부하는 열린계다. 보스가 도와준다. 대신 보스를 위해 목숨을 바쳐야 하는 것은 리스크다. 현명한 사람은 이득보다 권력을 얻는다. 자신의 게임을 설계해야 한다.
과학의 방법
대동과 소이
같은 것을 아는 것이 아는 것이다. 다른 것은 그냥 보면 된다. 최소한 그것이 놓인 장소와 시간대는 다르기 때문이다. 같은 것은 기준을 정하고 패턴을 추출해야 보이므로 추론이 필요하다.
다른 것 반대편에 같은 것이 있다. 하나가 다르면 하나가 같다. 형제가 다르면 부모가 같고 가지가 다르면 뿌리가 같다. 보편성의 같음을 보려면 의식적으로 반대편을 보는 훈련을 해야 한다.
강물의 지류는 다르고 본류는 같다. 말단은 다르고 근원은 같다. 사유는 같음을 연결고리로 존재의 근원을 찾아가는 기법이다. 같음에 도달할 때까지 사유를 밀어붙이므로 결국 같아진다.
아인슈타인은 질량과 중력이 같음을 알았다. 어떻게 알았지? 우주 안에 다른 것은 없다. 같은 것은 당연하고 우리는 다른 것을 분별해야 한다. 왜 같은지 묻지 말고 왜 다른지를 물어야 한다.
아담과 이브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인류는 전부 한 가족이다. 같은 것은 뻔하므로 일단 같다고 선언하고 갈리는 지점만 찾으면 된다. 아인슈타인의 등가원리는 생각의 시작점이 달랐다.
보통은 다른 점을 먼저 발견하고 같은 점을 나중에 찾는다. 아인슈타인은 생각의 방향이 달랐다. 우주 안의 모든 것이 원래 같았는데 중간에 노이즈가 끼어들어 갈린 것이다. 같은게 먼저다.
우리는 다른 점을 알아내면 만족하고 사유를 멈춘다. 다른 점을 찾으려고 기를 쓴다. 피부색이 달라. 성별이 달라. 계급이 달라. 뭐든 하나만 달라도 일단 적으로 간주하고 자신을 방어한다.
과학자는 생각하는 방식이 다르다. 그들은 공격자다. 도구를 쥐고 자연에 쳐들어간다. 두들겨 패서 자연의 비밀을 밝혀낸다. 산더미 같은 다름 속에서 희귀한 패턴 하나를 찾으면 성공이다.
세상은 대동소이다. 대동의 관점을 얻어야 과학가 자격이 있다. 자식은 서로의 다름을 보고 어미는 자식의 같음을 본다. 어미의 관점을 얻어야 집단을 결속하는 숨은 플러스 A가 포착된다.
같음과 다름
공격은 같음을 보고 방어는 다름을 본다. 몽골군은 공격하므로 평원을 좋아하고 고려군은 방어하므로 산악을 좋아한다. 아인슈타인은 같은 점을 보려고 해서 그것을 봤고, 일반인은 다른 점을 보려고 해서 역시 원하는 것을 보는데 성공한다.
왜 같은가? 다르지 않으므로 같다. 원래 같다. 빅뱅시절부터 같았다. 의사결정 메커니즘이 같다. 다를 이유가 없다. 왜 다른가? 다르지 않다. 다른 것은 자연의 본래가 아니라 관측자가 보는 지점이다. 다른 것은 관측자의 개입에 따른 노이즈다.
아인슈타인은 같다고 전제하고 다른 점을 찾았다. 그것이 과학자의 사고다. 일단 다르다고 선언하고 다른 증거가 하나라도 포착되면 더 이상 생각하지 않는게 일반인의 사고다. 보호색으로 위장하는 동물 새끼처럼 그들은 다름을 필요로 한다.
새끼 멧돼지는 줄무늬가 있고 새끼 고라니는 반점이 있다. '난 멧돼지가 아냐. 달라.' '난 고라니가 아냐. 달라.' 각자 다름을 항변하고 있다. 같음은 연결고리다. 연결고리가 있으면 추적당한다. 멧돼지는 발자국이 같아서 사냥꾼에게 추적당한다.
새는 추적당하지 않으므로 다른 동물의 울음소리를 흉내내며 같다고 주장한다. 인간도 다양한 목소리로 흉내낸다. 동물은 아픔을 숨긴다. 신음소리를 내면 맹수에게 추적당하기 때문이다. 겁도 없이 소리를 지르며 우는 동물은 인간밖에 없다.
다르면 생각을 이어갈 연결고리가 없어서 자동으로 생각이 멈춘다. 보통은 생각을 그만둘 근거를 찾으려고 노력한다. 눈곱만한 다름만 발견되면 만족하여 즉시 생각을 멈춘다. 방향설정 문제다. 같음에서 사유하면 복제되므로 끊기지 않는다.
구조경제론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은 과학자의 언어가 아니다. 존 내시의 게임이론도 마찬가지다. 보이지 않는 손이니 게임이니 하는 말은 비유다. 과학자가 왜 비유로 말하나? 과학자가 시인의 언어로 말한다면 이상하다.
경제학의 여러 성질은 유체의 성질이다. 그것은 파동의 간섭이다. 우주 안의 모든 존재는 같다는 대전제를 깔아야 한다. 아인슈타인의 등가원리와 같다. 경제학과 물리학은 통한다. 의사결정구조가 같으면 같은 것이다.
1. 의사결정은 비용이 든다. 닫힌계 안에서 변화는 비용 조달이 가능한 형태로 제한된다.
2. 경제활동은 비용이 든다. 지속가능한 형태로 의사결정 범위가 제한되는 것이 보이지 않는 손과 내시균형이다.
3. 이익과 비용은 균형이다. 1회 결정이 미치는 영향은 점차 작아져서 균형에 도달하는 것이 극한의 법칙이다.
애덤 스미스는 개인의 이기심을 주장한다. 유치한 언술이다. 경제학에 심리학 용어 곤란하다. 무슨 과학자가 관심법 쓰나? 사주, 관상이냐? 효율성이 맞다. 이윤은 시장 참여자가 시장 자원을 공유하여 얻는 효율성이다.
이윤은 공유에서 나온다. 사람들이 무형의 시장자산을 인식하지 못해 이윤의 의미를 모른다. 가격은 약속이고 약속은 공유된다. 공유에서 힘이 나온다. 공유를 어기면 더 큰 일시적 이득이 있다. 대신 시장을 파괴한다.
공유 - 이익이 있지만 지속가능한 범위로 활동의 제한이 걸린다.
독점 - 공유의 이익을 가로챌 수 있지만 대신 모두가 같이 망한다.
보호무역은 시장 자산의 독점이며 공유의 거부다. 효율성을 부정하고 비효율을 따르므로 망한다. 자유무역은 시장자원의 공유를 늘려 이익을 증대시킨다. 그러나 누군가가 공유를 깨면 일시적으로는 더 큰 이익을 본다.
이익과 리스크는 비례한다. 독점을 추구하면 시장을 파괴하여 인류가 공멸한다. 이렇게 되면 전쟁이 일어난다. 이런 때는 정부가 나서야 한다. 애덤 스미스의 시장주의가 전쟁가능성을 높였기 때문에 내시균형이 나왔다.
시장이 자유를 추구할수록 이윤은 증대하지만 리스크도 증대한다. 세계화를 추구하면 이윤은 증대하지만 전쟁의 위험성도 증대한다. 우물 하나를 마을 전체가 공유하면 이익이 크다. 누가 그 우물에 똥을 누면 망한다.
극한의 시간
과학과 비과학은 수렴과 발산이다. 발산은 시스템을 파괴하므로 수렴되어야 한다. 엔트로피 증가는 밸런스 수렴이다. 우주의 근본 힘은 척력이다. 우주 안의 모든 변화는 균형에 도달하는 밸런스 수렴 형태로 일어난다. 밸런스 수렴을 시간적으로 이해하면 극한의 법칙이다.
활을 쏘면 활이 부러질 수 있고 총을 쏘면 총이 터질 수 있다. 점프하려면 발판이 견고해야 한다. 거인이 2층에서 점프했다가 마루바닥이 꺼지면 피곤하다. 힘을 쓰는 사람은 자신이 의지하는 발판을 깨지 않는다는 대전제를 필요로 한다. 이것이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이다.
우주 기본 힘은 척력이다. 인력은 엔트로피를 감소시킨다. 인력은 한 자리에 모으고 모이면 위태롭다. 모이면 총이 터지고, 활이 부러지고, 발판이 꺼지고, 초신성이 폭발한다. 척력의 반작용에 의한 국소적 엔트로피 감소는 있지만 우주의 전체의 엔트로피는 항상 증가한다.
우주 안의 모든 액션은 척력이므로 작용과 반작용에 따른 제한이 걸린다. 척력의 미는 힘은 받쳐주는 벽보다 클 수 없다. 화살의 힘은 활몸보다 클 수 없다. 산모는 자기보다 몸집이 큰 아기를 낳을 수 없다. 모든 힘은 밸런스의 복원력이다. 힘의 작용은 밸런스를 넘을 수 없다.
엔트로피는 공간의 사정이고 시간으로 보면 어떻게 될까? 뒤에 태어난 새끼가 먼저 낳아준 어미를 잡아먹을 수 없다는게 극한의 법칙이다. 이 법칙을 무시하면? 늦게 온 말단직원이 먼저 온 사장을 잡아먹는다. 극한의 법칙을 어기면 하극상을 일으켜 자본주의가 붕괴한다.
엔트로피 공간법칙 - 작은 그릇에 큰 그릇을 담을 수 없다. 탑의 층수가 높을수록 뾰족하다.
극한의 시간법칙 - 시간적으로 앞선 것에 권력이 있다. 뒤에 올수록 영향력은 작고 리스크는 크다.
거래를 하지 않고 배짱 부리는 사람이 이득 보는 구조는 엔트로피 감소다. 상품을 거래하지 않으면 썩어서 팔 수 없게 되어야 시장이 작동한다. 돈을 금고에 쟁여두고 거래하지 않아도 피곤하다. 정부는 물가를 올려서 금고에 현금을 비축하는 사람에게 패널티를 부여한다.
거래를 회피하는 방법으로 금과 부동산이 있다. 금값이 떨어지지 않으면 거래하지 않는 사람이 이득이다. 금값을 하락시켜 금을 팔고 주식을 사게 만들어야 한다. 부동산은 가치가 떨어지지 않아서 망한다. 일을 하지 않을수록 이득을 보는 구조가 만들어지면 인류는 망한다.
정치판에서 역 엔트로피를 목격할 수 있다. 마지막 순간에 부족한 2퍼센트 가지고 딜을 치는 사람 있다. 안철수, 김한길, 박지원, 김종필, 정몽준이다. 정치시장 붕괴로 이어진다. 뒤의 결정이 앞의 결정보다 약해야 한다. 그것이 권력이다. 그 반대가 되면 하극상에 배신이다.
시장은 선점한 사람이 이득보고, 제품은 특허 낸 사람이 이득보고, 작품은 창작한 사람이 이득보고, 전쟁은 선두에 선 사람이 이득보는 구조가 옳다. 정부는 금리와 환율과 재정으로 조절해야 한다. 일하는 사람이 이득보고 거래하는 사람이 이득보는 구조를 유도해야 한다.
애덤 스미스의 이기심은 주술적 언술이고 효율성이 맞다. 효율성은 공유에서 나온다. 공유는 리스크를 증대시킨다. 공유는 달걀을 한 바구니에 담는 짓이다. 공유하면 나중에 한 결정이 먼저 한 결정을 친다. 도박판에 많다. 많은 고객의 돈을 잡아먹은 머신에서 잭팟 터진다.
정의당 멸망공식은 쇼트트랙처럼 뒤에 따라가며 공기저항의 이득을 보다가 마지막 순간 발내밀기로 역전하겠다는 얌체행동이다. 아기가 엄마를 잡아먹는 하극상 정치다. 이준석은 윤석열을 낳고 먹혔다. 지속가능하지 않지만 무모한 도박을 하는 선수는 끝없이 나타난다.
유체와 강체
흑인도 백인도 황인도 다 같은 아담과 이브 자손이다. 한강이든 낙동강이든 섬진강이든 바다까지 가면 같다. 궁극적인 단계까지 추구하면 같다. 모든 물질이 같은 원자로 되어 있다는 아이디어는 2500년 전에 나왔다. 모든 사건이 같은 메커니즘으로 되어 있다는 생각은 왜 못하나?
일단 같다고 선언해야 한다. 다를 리가 없다.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은 내시균형과 같다. 애덤 스미스는 이득을 바라보고 존 내시는 리스크에 주목한 점이 다르지만 본질은 같다. 같은 화살인데 머리를 본 사람과 꼬리를 본 사람이 있다. 이득과 리스크의 균형을 추구해야 한다.
열과 질량은 같다. 열은 분자의 진동이고, 질량은 소립자의 진동이고, 암흑에너지는 공간의 진동이다. 진동은 움직이는 것이고 움직임은 방향이 있다. 방향의 결맞음이 물질의 성질을 만든다. 중력은 진동이 약한 쪽으로 떠밀리는 현상이다. 가장 진동이 약한 곳은 지구의 중심이다.
열역학 1법칙은 더하고 빼면 같다는 말이다. 2법칙은 먼저 빼고 나중에 더한다는 말이다. 먼저 주고 나중에 받는다. 먼저 받고 나중에 주면 먹튀다. 먼저 빼면 같다. 나란히 출발선상에 선다. 먼저 빼는 것은 유체이고 나중에 더하는 것은 강체다. 유체로 보면 같고 강체로 보면 다르다.
아인슈타인은 유체의 성질을 봤다. 유체는 내부에 압이 걸려 있고, 압력은 한 방향으로 전달되므로 중력과 질량은 같다. 유가 강을 이긴다. 이긴다는 말은 공간의 해석이고 시간에 적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유가 강에 앞선다. 유체가 결정하면 강체가 전달한다. 극한의 법칙이다.
열역학 1 교환법칙 - 유와 강은 교환된다.
열역학 2 공간법칙 - 유가 강을 이긴다.
극한의 법칙 - 유가 강에 앞선다.
공사구분 잘해야 한다. 공이 사를 이긴다. 공이 사에 앞선다. 공 2에서 사 1로 간다. 모든 의사결정은 공유를 잃는 마이너스다. 공유가 결정하면 사유는 전달한다. 한솥밥을 공유하는 한 식구지만 먹은 밥은 각자 자기 뱃속으로 들어가서 사유화 된다. 공유가 유체라면 사유는 강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