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 수 없는 나라
경포호숫가에
단발머리를 하고
발뒤꿈치를 땅에 대지 못하고
두 주먹을 불끈 쥔 소녀
어제 바람 불어 춥다고
그 누가 노란 털 망토와 목도리를 둘러주고
주저앉아 한숨을 놓고 갔습니다.
오늘은 한파가 몰려와 춥다고
그 누가 노랑나비 두 마리가 앉아있는
털모자를 소녀의 머리에 씌워주고
버선을 발등에 올려놓고는
끌어안고 울다가 눈물을 놓고 갔습니다.
두 주먹 불끈 쥐어도
땅에 발뒤꿈치를 댈 수 없어
가슴이 따뜻한 나라로 갈 수 없는
소녀의 숨죽인 애처로운 한숨과 눈물은
오늘도 호숫가에서 맴돌다가
바다가 되어 흐릅니다.
그리운 이에게
나의 노년은
어제는 이비인후과
오늘은 치과
나를 위한 배려는
물질과의 갈등을 넘어섭니다.
신선한 미역 내음 가득한 솔숲 사이로
같이 푸르른 하늘 아래 수평선
나의 그리움이여!
커피 향 또한 푸르니
홀로 선 해안이 더욱 친근합니다.
다만 이만큼을
크나큰 행운이며 복이라 칭하고
엎드려 감사합니다.
이제 다만, 세상을 느끼지 못하기 전에
연곡천에 띄워보낸 헤어짐의 부적
그 주인공과 푸른 커피 향 마주 할 수 있다면,
있다면........
꽃들은 알고 있다
2월
아직도 남은 잔설 사이로
매서운 강릉의 봄은 너무 빨리 왔다.
바다의 물결은 높이 하얗게 흩어져 날리고
배고픈 갈매기 떼들은 파도 위를 헤매고 있다.
바다를 지나서 방풍림에
거침없이 다다름 한 바람이
나무들의 꽃눈의 솜털을
벗기려고 하면 할수록
꽃눈은 솜털 옷을 꼭꼭 여민다.
강릉의 3월은 폭설과 에이는듯한 바람
꽃들은 알고 있다
아직은 너무 빠르다는걸
순응의 이치는
서두르는 것이 아닌 기다림이라는걸
마음에 모가 날 때면
마음에 모가 날 때면
방풍림 오솔길을 지나서 바다로 간다.
파도를 따라서
바닷물에 젖은 모래밭에 발자국을 찍으며 오르내리다가
결국에는 옷을 적시고는 그 순간 느끼는 통쾌함
잔잔한 파도가 밀려왔다가 지나간 자리는
언제나 모나지 않고 굽은 선
파도는 바보 화가
파도 따라와 머무는
파도에 닳은 껍질 조개를 주우며
아련히 파란 하늘 흰 구름 아래 더 파란
수평선을 멍하니 바라보면
마음에 있던 모서리들이 아우성을 치며 부르짖는다
“다르다”
“모든 것이 다만 다를 뿐이다!”
파도는 솔숲으로 나를 밀어낸다.
윤회[輪廻]
어제라는 날은 지나가고 또 다른 새날이 왔다.
이제는 낡은 애환의 옷을 벗어놓고
길 떠나간 이의 영정사진만 고요하다.
주변에 놓인 꽃들이 어처구니가 없다.
긴 시간 떨어지지 않은 숨이었지만 이제 영혼은
나래를 펴고 속세의 속박을 벗어난 자유로움 있겠지.
죽음 앞에서는
형제들이나 집안 간의 갈등도 아무런 말이 없다.
며칠째 내리는 비라서 더 서럽다.
서러운 건 불운했던 한 여자의 떠남을
축복해주는 마지막 선물이다.
육신을 버리고 길 떠난 이,
지난 세월 남은 미련 떠나기 싫어서
지금 장례식장 계단에 멍하니 앉아 있지는 않을까.
아니면
아직도 욕심에 찬 계산을 하며 죽은 자신을 위해서
누가 더 서럽게 울고 있는지 살펴보고 있는 건 아닐지.
아니면
그새 다음 생애를 다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이의
후손으로 잉태되어 안정된 숨을 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떠나간 이의 흔적은 가족들도 볼 수 없게 밀봉된 작은 항아리 하나,
모두가 황당한 그 잠깐의 시간, 지쳐있는 남은 자들은 침묵한다.
인연의 사유
좋은 인연은
잿빛 수평선을 바라보아도
든든하고
악연은
볕 좋은 곳에서도
즐겁지 않더라
해무
연인들은 폭죽을 터트리며 환호하고
친구들끼리 삼삼오오 모여 깊어가는 정담
온통 바닷가에 넘치는 웃음소리에
태양 같은 젊음의 열기가 나래를 펴고
파도에 넘실거리는 노을이 잠드는 시간
곰솔밭에 귀한 해무가 찾아오면
곰솔과 꺼지지 않는 불꽃 청춘이
퍼포먼스로 환영하는 축제
여름 바닷가
얇디얇은 명주 실타래로 고운 안개를 짜는
해무의 신비로움이 펼쳐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