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觀演評]
ㅡ 신명의 꽃 ㅡ
[사물놀이 하모니(調和)]
{두 쇠와 두 가죽의 만남}
일시/ 2023.11.2~4(토)
장소/ 국립극장 하늘극장
☆ 기념대공연
김덕수 예인인생 65주년
사물놀이 탄생 45주년
☆ 출연진
사물놀이 진쇠, 사당패 사물놀이, 한누리 연희단, 사물놀이 본, 사물놀이 이어 김덕수와 친구들
☆ 순서
1. 문굿과 비나리
2. 삼도 설장구 가락
3. 삼도 농악 가락
4. 판굿(사물놀이 한울림)
☆ 김덕수와 친구들(3~4일)
Prol. 찬기파랑가
1. 달빛 아래, 2. 마음따라
3. 신명 높이, Epil. 신명의 꽂
오늘 모처럼 한예종에서 함께 근무한 명인의 공연을 초청받아 히로시마 대학 윤교수와 함께 관람을 했다. 4일까지 공연이오니 많은 관람 바랍니다.
김덕수 예술감독으로 주) 예술 숲이 기획한 이 작품을 후계자들이 함께 공연한 무대는 훌륭한 공연이었고 앙상블의 조화로 모처럼 신명나는 공연을 보며 사물놀이 탄생 45주년 기념대공연을 동료ㆍ제자들이 함께 모여 김덕수 예인인생 65주년을 맞이하여 풍성하고 그 가락의 멋, 맛, 흥, 恨, 態(5氣), 신명나는 한 판의 공연을 감상했다.
오늘 공연은 사물놀이 창립공연을 1978년 공연을 할 때, 필자가 유럽에 있을 때이었기 때문에 못보았지만, 오늘에 있기까지 김덕수명인께서 큰 활약을 하며 후계자 양성을 하는데 공로자이다.
이번 작품 [신명의 꽃]은 김덕수 명인과 동료 및 제자들에 의해 기획된 공연으로서 사물놀이 공연이지만 근본은 풍물과 농악이 정립이 아니 되었을 때. 한예종 연희학과에서 김덕수교수는 교재 제작과 수업에 의해 강의로 정리되었다.
우리 것인데도 우리 것이 정리가 아니된 상태에서 일제강점기 개화기부터 1960년대까지 남·북한을 아우르는 명인들의 작품으로 오늘 국립극장 무대에서 사물놀이로 정립된 작품을 오랜만에 감명깊게 보았다.
예전 일제강점기에 보편적인 문화예술이라면, 관기 제도가 사라지자 새롭게 만들어진 권번에서 예기 또는 사범으로 지방마다 이름난 명무들이 활동했다. 이들은 해방 후 사설국악원으로 활동했고,
한국전쟁 후에는 춤과 무용이 구분이 아니되고 춤꾼 및 무용수들이 무대화 시킬 때, 농악과 풍물도 정립이 않된 상태에서 서양문화예술 위주로 정립이 되어가고 있을 때, 뮤지컬이 예그린악단에 의해 가무악극의 독립된 하나의 장르가 활성화 되었다.
서양문화예술이 대한민국에서 활성화ㆍ대중화가 되었을 때,
우리 것인 탈춤을 비롯하여 풍물과 農樂, 굿과 巫俗 등이 천시하고 구분이 아니되면서 여기가 대한민국입니까? 대한민국 헌법9조를 아십니까? 하고 질의응답하면서 문제시 했을 당시 안타까울 정도 제도적 모순점을 지적 하면서 후배ㆍ제자들을 위하여 어떻게 해야 직업으로서 제공해줄 수 있을까? 고민하고 연구ㆍ노력할 때가 있었다.
예전에 [컬럼]을 작성해본 것을 참고로 함께 올려 봅니다.
[컬럼]
ㅡ 풍물과 농악 ㅡ
[풍물과 농악에 대해 학술세미나]
요즘 축제기간입니다.
축제 행사기간 동안은 풍물(農樂)분야가 출연하게 된다.
필자가 85년 38선 死線을 넘어 평양대극장에서 공연할 때 全공연을 MR로 반주를 했고, 88올림픽 홍보선전 미국ㆍ일본 등 공연 때도 "뮤지컬 양반전"을 100명 출연했지만 MR로 반주를 했기에 풍물로 휘나레를 멋지게 장식해서 무대를 호화스럽게 막幕을 내렸다.
그런데 풍물이냐? 농악이냐? 풍물이 먼저냐? 農樂이 먼저냐? 또한 뮤지컬이 연희극이냐? 가무극이냐? 마당놀이냐? 모듬놀이냐? 굿과 巫俗, 탈춤과 假面劇, 조선연극사와 셰익스피어 등의 제목으로 현직에 있을 때, 위의 명칭에 대해 비교 차이점, 포럼(학슬세미나)의 주최를 제대로 확실하게 정리를 못하고 정년을 했다.
그동안 동ㆍ서양의 문화예술을 다양성있게 관계해 왔지만, 요즘은 코로나 시기에 줌Zoom 강의를 통해서 일반인들에게도 fb을 통해 여러분야를 다양하게 정리하면서 주지해왔다.
우리 것인데 우리 것의 중요성을 의미있게 강조하다보니 주위 전문가들이~ 지금까지 가만이 있다가 왠 소리냐?
그러나 필자는 강의와 처음 만나는 분들에게 상투적으로 2가지를 강조하면서 늘 질문을 했다.
대한민국 헌법 9조를 아십니까?
여기가 대한민국입니까?
물론 문화예술 분야이므로 다른 분야에서는 오해를 하지말라고 변명하면서 쓴소리를 해왔다. 때문에 [최창주의 쓴소리] 라고 서울문화투데이 신문사 대표께서 제목을 붙여 연재까지 해 주셨다. 감사하지요!
때문에 각 분야 지인들은 지금까지 잘 먹고 잘 살아 왔는데 ㅡ 왜? 갑자기 무슨 소리야?
그동안 공직생활을 하면서 후배, 제자들에게 못다한 과제들을 남겨두고 정년과 위원회 임기를 마쳐 버렸다.
더욱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중요보직을 맡으면서 블랙리스트를 해결한답시고 업무인 거액을 결재하면서 바쁘게 세월만 보낸 것에 대해도 할말이 없고 미안하고 아쉬웠다.
필자는 낮에는 직장근무! 밤에는 대기업체 및 인재개발원(연수원), 관변단체와 기관, 청소년단체(흥사단, ymca 등) 등, 아무리 바쁘더라도 전수교육하는 날은 전수교육에 출석했다.
오늘날 코로나시기가 아니였더라면 이렇게 시간적 여유가 있고 기록 정리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오늘 공연은 관객들인 일반인과 학생들로서 수강자들에게 실습으로 사물놀이의 두 쇠와 두 가죽의 만남인 공연을 보았으니까 이제 근본인
[풍물과 농악]에 대해 깊은 강의는 아니지만, 어떻게 해야 관객들에게 이해를 시켜볼까? 하는 컬럼을 수업시간처럼 정리해 본다.
다음은 풍물과 농악에 대해 논문과 컬럼 또는 다른 견해에 대해 이론적으로 기록해 보겠다.
1. 풍물
ㅡ 풍물은 학자의 논문을 인용하겠다.(정형호 교수의 논문 57p이지만 지면상 일부 요약본만 제시한다.)
풍물은 조선시대까지 궁중에서 주로 악기 및 음악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러다가 일제 강점기인 1920년대 초기에 와서 민족적 사회주의 노동운동가들이 "풍물" 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 당시 사용된 풍물은 일제에 대한 저항적 민족주의 운동의 의미를 담고 있다.
한편 1923년 "개벽"이란 잡지의 기사에도 사회주의 자와 관련이 있다. 이런 이유로 당시 풍물이란 용어는 이후 사용될 수 없었으며, 1920년대 중반부터 농악이란 용어가 일제의 교묘한 이중적 정책과 "브나르도 운동"(1870년대 러시아에서 청년 귀족과 학생들이 농민을 대상으로 사회 개혁을 이루고자 일으킨 계몽 운동 "민중 속으로" 라는 뜻으로, 우리나라에서도 1930년대에 크게 성행하였다.)과 맞물려 일반화 되었다. ㅡ 논문참고 (생략~)
필자가 재직한 한예종 연희학과에서도 전문학자들에 의해 [풍물전공]이라고 지정해주었으나 농악 전공이라고는 학자의 견해도 있었다.
당시 동경유학생들에 의해 農樂이라는 용어가 보편화 된 것이 아닌가? 수도권이 "웃다리"로 명명된 것이라면 "아랫다리" 라고 하지 않고 청양 대전을 기점으로 해서 좌도, 우도 농악이라고 명칭을 붙힌 것 같다.
2. 농악(農樂)
백과사전에서 농악을 fb의 글을 인용한다면 ~ 지면상 요약본만 제시한다.
농악(農樂)이라는 용어는 원각사의 협률사라는 단체에서 처음 사용했고 '농악'이라고 통칭하게 된 것은 8·15해방 이후 국악정리사업이 이루어지면서부터였다.
이 명칭은 일제의 '조선혼말살정책'에서 비롯된 것인데 일제는 조선총독부 주관으로 조선문화 특히 민속문화에 관한 조사사업을 통해 무속종교가 한국인의 삶을 지배하는 중요한 요소임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에 무속신앙은 가장 중요한 탄압대상이 되었고 그중에서도 공동체를 형성·유지하는 장치역할을 해온 마을굿을 철저히 제지했다.
그러나 1920~33년 산미증식계획을 실시하면서 농업장려운동의 하나로 두레굿만은 허용했다.
굿하는 단체들은 "농악"이라는 이름으로 공연신청을 해야만 허가를 받을 수 있었다. 이렇게 하여 민간생활의 다양한 형태에서 공동체를 형성했던 장치기구인 굿은 농업에 관련된 음악으로만 국한하게 된 것이다.
오늘날에는 꽹과리·징·장구·북의 4가지 타악기를 기본으로 하고 여기에 태평소·나발의 관악기와 그밖에 버꾸 등이 곁들어지는 농민음악을 '농악'이라 부르게 되었다. 각 국ㆍ시립에서도
평택농악·진주삼천포농악·강릉농악·이리농악·임실필봉농악·구례잔수농악 등으로 지정指定 되어있다.
3. 김승국의 fb에서 쉽게 이해하기 위해 김승국 이사장의 농악의 글을 예로 인용한다면 ~지면상 요약본만 제시한다. ~(생략)~
농악’이라는 용어는 일제 용어의 잔재일 뿐만 아니라 예술학적으로 잘못된 용어이다. 농악은 음악적인 요소뿐만 아니라 제의식과 놀이, 그리고 춤과 연극적인 요소가 함께 어우러진 종합예술적인 예술이기 때문에 음악에 무게 중심을 두고 있는 ‘농악’이라는 명칭은 잘못된 것이다.
그래서 본래의 용어인 ‘풍물’이라는 용어로 되돌려 놓아야 한다.
농악은 연주와 장단, 춤, 노래, 놀이, 재담 등 연극적 요소가 같은 마당에서 함께 어우러지는 신명의 총체적 예술이다. 우리의 거의 모든 전통연희와 제의식에 농악이 빠짐없이 함께 어우러진다. 문화재청 무형문화재 분류에 있어 ‘음악’으로 분류된 것을 다시 한 번 재고할 필요가 있다. 또한, 만시지탄의 느낌은 있지만, 이제라도 ‘농악’을 본래의 명칭인 ‘풍물’로 명칭을 바로 잡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참에 문화재 제도에 사용되고 있는 용어 중 일제의 잔재 등 문제가 있는 것들이 없는지 세밀한 검토와 시정이 따랐으면 한다.
4. 민속학자들의 소견?
1번 정형호교수의 논문에 풍물과 농악의 비교가 있는 반면, 다른 교수들의 의견의 예를 들어 본다.
풍물 중심의 학자[심]와 농악중심의 학자[정]들이 서로 주장을 하여 여론이 엇갈리고 의견충돌이 일어나면서 투표도 하려고 했다지만 ~ 한예종 연희학과는 절차와 규정을 밟아 [풍물전공]으로 선택, 정리가 되었다.
또한 [농락]이라고 하며 농사를 즐겁게 지는 것이라고 하면서 총괄적인 것이 농악(農樂)이다. 라고 주장한 [한자/농락]과 [한글/농악]이 비슷하다는 농락, 능악(能樂)은 양수겹장으로 양면성이 있다고 하면서 학술적 포괄적 주장도 나왔다.
또 대표적인 명칭은 풍물이지만 풍물은 운동권이라고 주장하면서 풍물은 남사당의 은어라고 했고, 논란이 많지만 똑같은 명칭이다. 두루 두루 큰 문제가 아니다. 두리뭉실 넘어가려는 학자도 있었다.
필자도 국립대교수라고 늘 현장에서 農者天下之大本이라고 힘든 농사를 중히 여기고 흥을 돋구어 주자고 농업을 근본으로 장려하는 글이라고 하면서~
위의 한자 시험을 볼 때마다 면접 때 꼭 칠판에 써보라고 확인 질의 했고 기원설을 주지했다.
따라서 학생들과 교수들 주위에서 심부름 강의만 하다보니 일반행정과 예술행정, 현장행정과 확인행정가랍시고 논문과 저서도 출판했지만 절차 및 규정 때문에 중재역할은 미흡했다.
학자들도 학문을 서로 인정하지 않고, 자기주장들만 하니 제자들이 자기 학교 교수들의 학문만 인정하는 교풍이 되었다. 그렇다면 민족의 정체성이 뭐냐?
알면 큰 일이고 모르면 그냥 지나간다. 또 그렇게 지내왔다.
☆ 맺는 말
이상 요약본만 예를 들었다.
풍물과 농악은 [일반적 명칭], [학술적 명칭], [운동권 명칭]이 있는데 유네스코에 등재되면서 풍물이란 용어가 불합하다고 인식된 것 같다. 동경유학생들의 후계학자 등
유네스코 등록할 때도 일반 민속학자의 민속위원들의 심의 역할이 있었기 때문에 유네스코에 [농악]으로 지정된 것이 아닌가?
전문가가 아닌 전문가들의 고집도 있고 근본적 당사자 및 보유자에게 애초 질문자가 누구냐?에 의해 밑바닥부터가 문제가 있기 때문에 필자는 [잔치와 축제]에 대해 기록 정리한 바가 있듯이 이제 코로나시기가 지났으니 영상의 기록화 작업도 필요한 것이다.
즉, 1985년도 9월 평앙대극장에서 2부 휘나레를 필자도 풍물(農樂)로 직접 출연하면서 막幕을 내렸다.
이때 프로그램 순서에 17번 민속무용 [풍물]이라고 프로그램에 올렸는데 인쇄소(?)에서 [농악]이라는 용어(명칭)로 인쇄되어 평양대극장에서 공연했다.
따라서 명칭에 있어 국가무형문화재 지정과 각 국ㆍ시립단체에서 풍물과 농악단체로 지정된 제도적ㆍ구조적 상황과 모순점에 대해 세심하게 구체적인 토론의 장을 만들어 보겠다고 제시했지만, 실천을 못하고 정년을 했다.
필자가 한예종 연희학과장으로 재직하면서 또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대행의 보직을 수행하면서도 이런 사항들을 제대로 정리를 못하고 퇴임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아울러 뮤지컬이 연희극, 가무극이냐? 마당놀이냐? 모듬놀이냐? 등등 필자가 현장에 있으면서 학술적으로 정리를 못했다. 다만 예술행위는 현장문화예술이지만 학문은 받쳐주는 것으로 족한 것인가?
이제 기회가 된다면 학자 및 현장 전문가들을 동시 초청하여 토론의 갈등(葛藤)을 푸는 포럼(세미나)을 개최하여 후배ㆍ제자들에게 정리ㆍ정립하는 기회의 시간을 이제라도 가져 보고 싶을 뿐이다.
제일의 富는 健康입니다.
飛松 최창주 평론가,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