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의병장 민여운 선양사업의 방향과 방안
박대길(전북민주주의연구소 소장)
Ⅰ. 머리말
Ⅱ. 민여운 의병장 관련 사료 및 유적지
Ⅲ. 선양사업의 방향과 방안
Ⅳ. 맺음말
Ⅰ. 머리말
오늘날 정읍은 하나의 행정 구역이지만, 지금으로부터 109년 전[1914년]에는 고부군․태인군․정읍군 조선시대는 지방 행정 단위는 부․군․현으로, 고부군, 태인현․정읍현으로 각각 독립된 행정 구역이었으나 1895년 행정 구역 개편 때 군으로 통일하였다.
으로 나뉘어 있었고, 각각 독립적이었다. 일본은 식민지 조선을 영구 통치하기 위해서 철저한 준비를 거쳐 행정 구역을 개편하였다. 그 결과 그 당시 규모가 가장 컸던 고부군과 오랜 전통과 문화를 이어 온 태인을 면(面) 단위로 격하시키고, 정읍을 행정의 중심으로 만들었다. 이것은 규모가 가장 컸던 무장과 역사와 전통이 깊은 흥덕을 면으로 격하하고, 고창을 중심으로 통폐합한 현재의 고창군과 같다.
일본의 이러한 행정 구역 개편이 노린 것 중의 하나는 동학농민혁명의 시작이면서 상징적 공간인 고부를 지우고, 동학농민혁명을 지방 단위의 민란으로 격하시켜 저항의 싹을 말살하려는 목적이었다. 그리고 지역 간 분열과 갈등, 나아가 다양성 안의 일치를 원천적으로 차단하여 식민지 조선을 영구히 분할 통치하려는 술책이었다.
그 결과의 하나로 오늘날 고부봉기가 동학농민혁명에서 제외되었다. 2004년 제정․공포한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 검인정한국사교과서, 『전라도 천년사』 등이 모두 고부봉기를 실패한 민란 또는 동학농민혁명의 전사(前史)나 배경으로 서술하였다.
2004년부터 시작한 동학농민혁명 국가기념일 제정에 매몰되어 고부봉기를 도외시한 결과이다. 동학농민혁명 관련 기록물이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고 경축하면서 동학농민혁명의 시작이 된 고부봉기에 앞서 결의한 ‘사발통문’이 포함된 것을 자랑하지만, 정작 「동학농민혁명 특별법」과 검인정한국사교과서, 『전라도 천년사』의 수정과 개정 등 바로잡기는 감정적 대응만 하고 있다. ‘동학농민혁명의 시작이며 중심지’, ‘동학농민혁명의 성지 정읍’을 자처하는 정읍시의 대응으로 기대에 미치지 못한 상황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와 관련하여 ‘임진왜란과 정읍’에 대한 접근도 별반 다르지 않다.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조선왕조실록』을 정읍의 내장산에서 지역민이 1년 1개월여 지켜냈다는 자부심과 자긍심은 대단하지만, 정작 임진왜란과 대한제국기 목숨을 걸고 나라를 지킨 의병,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에 헌신한 분들에 대해서는 ‘간 보기’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 같다.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의병장 민여운과 정윤근이다. 민여운 의병장에 관한 기억은 산외면에 머무는 것 같고. 정읍시가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유족에게 수당을 지급하고,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에 막대한 예산을 집행하는 것과 비교하면, 형평의 차이가 크다.
정윤근 의병장은 흔적조차 찾기 어렵다.
본 글은 임진왜란 의병장 민여운에 관한 선양사업의 방향과 방안을 알아보는 데 있다. 이를 위해서 기본 자료가 되는 민여운 의병장 관련 사료와 유적지를 먼저 살펴보고자 한다. 이 작업은 장치 선양사업의 방향과 방안을 마련하는 디딤돌이 될 것이다. 다음으로 선양사업의 방향과 방안을 살펴볼 것이다. 이 작업은 의례적일 수 있으나
Ⅱ. 민여운 의병장 관련 사료 및 유적지
1. 관련 사료
학술연구정보서비스[http://www.riss.kr/]에서 ‘閔汝雲ㆍ민여운’을 검색하면, 6건이 나오는데, 모두 단행본이다. 1990년 발간한 『호남지방 임진왜란 사료집』1 「官邊資料篇」[전라남도임란사료편찬위원회, 전라남도]와 2010년 발간한 (교감ㆍ역주) 『호남절의록』[김동수, 경일문화사]은 원사료이다. 1990년 『新編 井州井邑人物志』[최현식, 정읍문화원], 1985년 『井邑郡史』[정읍군문화공보실, 정읍군], 2006년 『우리나라 戰爭史』[백석주, 원민], 2013년 『임진왜란과 호남 사람들』 2[김세곤, 온세미로] 등이다. 이로써 민여운 의병장 개인에 관한 학술논문이나 학술지는 물론 단독 연구나 단행본이 없음을 알 수 있다.
현재 민여운의 관직도 확인이 어렵다. 다수의 기록은 전(前) 주부(主簿)로 소개하고 있는데, 주부는 종6품이다. 다른 관직 중 하나가 용담 현령 戊子[1588]到任庚寅[1590]罷歸
이다. 그런데 용담 현령은 정6품이 부임하는 자리로 주부보다 한 단계 높은 직급이다. 현령을 두 번 역임했다는 기록은 있으나 용담 현령 외 다른 현령은 확인이 어렵다.
한편 『학봉전집(鶴峯全集)』 『鶴峯逸稿』 제3권, 「北征日錄」 기묘년(1579, 선조 12) 9월. 학봉 김성일(金誠一, 1538~1593)이 1579년 9월 21부터 6개월간 함경도 순무어사의 임무를 함흥(咸興)과 길주(吉州) 지역을 순회하며 기록한 일기이다. 「北征錄」이라고도 한다.
에는 “김화(金化)의 원(倅) 민여운(閔汝雲)이 나와서 두 번째 운반하는 납의(衲衣)가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납의가 22일에 비로소 서울을 떠났다는 말을 듣고 본현(本縣)으로 돌아와서 나의 일행을 영접하였다.” 金化倅閔汝雲出待二運衲衣 閒衲水念二日始發京 還本縣迎接余行
라는 기록이 있다. 1579년의 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3년 전의 일이다. 그 당시 민여운이 동명이인(同名異人)이 아니라면, 김화 현감 『세종실록』 153권, 「지리지」 강원도, 회양도호부, 김화현. 金化 縣監一人 本高句麗 夫如郡 新羅改富平郡 高麗 顯宗戊午 改金化縣 爲東州任內 本朝因之 太宗十三年癸巳 例稱縣監 別號花山
을 역임하였음이 분명하다. 따라서 현령을 두 번 역임한 것이 아니라 현감과 현령을 각 1회씩 역임한 것이 된다. 이처럼 민여운에 관한 정리는 시작에 불과하다.
□ 민여운 의병장의 창의
민여운이 창의(倡義)하여 의병을 모집하고,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1592년 6월 12일 이전이었다. 일본군이 부산에 상륙한 후 불과 2개월 만에 창의한 것이다. 그 내용은 다음의 기록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진군(進軍)하여 태인에 당도하였다. 고을의 전 현령 민여운이 정윤근과 더불어 향병(鄕兵)을 모집해서 왔다.” 柳彭老, 『月坡集』 卷3 「壬辰倡義日記」 [1592년] 6월 12일 경자(庚子). 전라남도, 『향토문화연구자료』 제4집, 1986.)
유팽로는 전라도 곡성 사람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난 사실을 알게 된 후 곡성에서 창의하였다. 남원의 양대박과 함께 담양의 고경명 의진에 합세하였고, 태인을 거쳐 금산으로 나아갔는데, 위 내용은 유팽로가 민여운을 만난 그 당시의 기록이다. 이로써 민여운의 창의는 1592년 6월 12일 이전으로 최후를 마치는 1593년 6월 27일까지 1년여 동안 의병장으로 일본군에 맞서 싸웠음을 알 수 있다.
『난중잡록亂中雜錄』二, 「임진년 하」 [1592년] 10월 10일
태인의 전 주부(主簿) 민여운이 향병 2백여 명을 모집하여 ‘웅(熊)’ 자로써 장표(章標) 조선 시대, 오위(五衛)에 속한 장졸들의 소속 부대를 나타내는 표를 가리키는 말로 민여운 부대를 가리키는 표를 말한다.
를 삼고, 기계를 마련하고 양식을 마련하여 영남으로 향하였다. 泰仁前主簿閔汝雲 募聚鄕兵二百餘名 以熊字爲章標 治械備粮 向嶺南
『임계기사(壬癸記事)』
안의와 손홍록은 창의하여 의병을 모아 전쟁에 직접 참여하는 대신, 의곡도유사(義穀都有司) ‘의곡계운장(義穀繼運將)’이라는 기록도 있는데, 『임계기사』에 실린 내용을 우선으로 하였다.
로 병사와 의병이 사용할 의복과 식량을 임금이 있는 행재소와 각지의 의병장에게 보냈다. 『임계기사』에 수록한 「안의손홍록위의곡도유사시별록(安義孫弘祿爲義穀都有司時別錄)」를 보면, 전부사(前府使) 고경명과 최경회에게는 용감하고 건강한 노비 3명을 보내고, 전현령(前縣令) 민여운에게는 2명을 보냈다. 그리고 「태인민의병군량권유문(泰仁閔義兵軍糧勸諭文)」에는 격문이 수록되어 있다.
아울러 의병장 최경회의 전공(戰功)을 상신하는 내용 가운데 민여운의 가노(家奴) 추동(楸洞)의 행적(行蹟)과 전공(戰功)을 수록하는 등 민여운 의병에 대한 지원 사실을 구체적이고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安義孫弘祿爲義穀都有司時別錄
泰仁閔義兵軍糧勸諭文
□ 석현전투(石峴戰鬪)
『일성록』 정조 23년(기미) 8월 22일
「황간(黃澗)의 유학 송환인(宋煥仁) 등의 상언」
(전략) 또 이로의 일기에 ‘민여운(閔汝雲)과 최경회(崔慶會)는 호남의 의병장이고, 한명윤과 박이룡은 호서의 의병장이다. 함께 우지령(牛旨嶺) 아래 진을 치고 김산과 지례에 남아 주둔하고 있던 적을 막았는데, 호령이 엄숙하였고 군대의 위용이 매우 장엄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후략)
□ 지례전투(知禮戰鬪)
『송암일기(松庵日記)』
1592.12.23. 호남 의병장 민여운이 김면 총대장을 찾아와 “대구의 적이 대거 현풍으로 몰려왔다.”라 하고, 현풍인 곽율과 안음의 정유명도 와서 현풍 방어를 역설하였다.
12.24. 김면의 본진 병력이 2천명, 최경회와 민여운의 병력이 1천명으로 개령을 격파하려면 호남군은 거창 운현에서 지키고, 김면은 무주와 거창의 경계인 수두를 경유하여 개령으로 진군하고, 삼산군과 김면 본진의 복병은 개령의 동산정에 올라 화열을 일으키고, 선장 김함ㆍ정유금ㆍ김몽령의 군진과 좌우 돌격장 등의 군병은 한꺼번에 개령 적진에 돌격하여 방화 또는 사살하고, 외곽의 모든 군사는 사면을 포위하여 한 놈도 남김없이 섬멸하기로 작전을 짜고, 저녁에 맡은 세 곳으로 행군하였다. 김면 총대장은 이때 궁장(구성면 송중리)에 유숙하고 있었는데, 밤중에 한 위장의 심부름꾼이 와서 말하기를 “호서와 상주병이 약속한 곳에 오지 않아 거사가 불가능하니, 우선 호남병과 함께 개령의 적을 진 밖으로 유인함이 옳을 것”이라고 하였다.
12.25. 김면이 새벽에 상좌원(구성면)에 출진하니, 민여운․최경회 두 의병장이 와서 척후병의 보고라면서 왜군이 대거 김산으로부터 지례로 온다 하여 상좌원에서 이를 맞아 세 번의 전투를 하였다. 전날 호남병이 웅치를 치고 개령으로 올 작전이었으나 적군이 웅치를 뛰쳐나와 의병군을 먼저 포위함으로 서로 공방전이 벌어지고 쌍방간 10여 명의 전사자를 냈다. 또 이때 후원군 김충민 군진과 함양병 최운 남노(男奴) 억복이 말 탄 왜장을 사살했으며, 여대로와 권은성은 약속대로 상좌원에 출동하여 석현전에 참가하였다. [출처 : https://namu.wiki/w/김면] 『송암일기』에는 민여운 의병장이 최경회와 함께 세 차례의 전투를 치른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디지털김천문화대전」의 지례전투 참전자 명단에는 보이지 않는다. 또한 전투도 7월 29일 치른 것으로 나온다. 민여운 의병장의 지례전투 참전은 더 연구가 필요하다.
□ 진주성 1차 전투
『학봉전집(鶴峯全集)』 「학봉일고」 부록 제3권, 「학봉김문충공사료초존(鶴峯金文忠公史料鈔存)」 하
선조 26년 계사(1593) 1월 8일에 경상우도 순찰사 김성일이 장계하기를,
“지난해 12월에 진주성이 장차 함락되려고 할 때 신이 장악원 첨정(掌樂院僉正) 조종도(趙宗道)와 공조 정랑(工曹正郞) 박성(朴惺)을 나누어 보내어 호남의 좌도와 우도의 의병(義兵)에게 구원을 요청하였습니다. 그러자 임계영(任啓英)ㆍ최경회(崔慶會) 두 장수는 호남과 영남은 광대뼈와 잇몸이 서로 의지하는 것과 같은 형세가 있어서 존망(存亡)과 성패(成敗)가 매우 긴밀하다고 하면서 즉시 군사를 거느리고 서로 잇달아 달려와 응원하였습니다.
그리고 전 주부 민여운도 태인에서 왔습니다. 비록 진주의 전투에 미처 참여하지 못하였지만, 인하여 성주(星州)와 지례(知禮)의 경계에 머물러 있으면서 본도의 의병대장 김면(金沔)ㆍ정인홍(鄭仁弘) 등과 힘을 합하여 왜적을 토벌하였는데, 여러 번 접전하여 적병을 죽인 것이 매우 많았습니다. 이에 왜적의 기세가 자못 꺾여져서 숨어만 있고 나오지 못하고 있는바, 온도의 사람들이 바야흐로 중하게 의지하여 함께 앞뒤에서 협격(挾擊)하는 형세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중략)
본도가 만약 함몰된다면 호남이 다음에 병화를 입게 될 것이며, 호남이 지탱하지 못한다면 나라를 회복하는 터전이 아마도 여지가 없을 듯합니다. (후략)
『난중잡록(亂中雜錄二)』 : 위 내용과 같다.
□ 진주성 2차 전투
『선조수정실록』 27권, 선조 26년 6월 1일 갑신
“(전략) 이에 원수(元帥)가 관군과 의병에게 전령하여 나아가 진주를 지키게 하였다.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은 군사 3백을 거느리고 먼저 달려가 성에 들어갔고, 충청 병사는 군사 7백을 거느리고, 경상 병사 최경회는 군사 5백을, 의병 복수장(義兵復讎將) 고종후(高從厚)는 군사 4백을, 부장(副將) 장윤(張潤)은 군사 3백을, 의병장 이계련(李繼璉)은 군사 1백여 명을, 의병장 변사정(邊士貞)은 그 부장 이잠(李潜)을 보내어 군사 3백을 거느리게 하고, 의병장 민여운(閔汝雲)은 군사 2백을, 강희열(姜希悅)ㆍ고득뢰(高得賚)ㆍ강희보(姜希輔)ㆍ오유웅(吳宥熊) 등도 모두 군사를 거느리고 왔으며, 거제현령 김준민(金俊民) 및 김해 부사 이종인(李宗仁) 등은 먼저 성안에 있으면서 목사(牧使) 서예원(徐禮元)과 수비책을 의논하고 있었다. (후략)”
『선조실록』 40권, 선조 26년 7월 16일 무진
(전략) 이때 변보(邊報)가 매우 위급하니 창의사 김천일이 군사 3백 명을 거느리고서 6월 24일 진주로 달려 들어갔고, 충청 병사 황진(黃進)이 7백 명, 경상 우병사 최경회가 5백 명, 의병 복수장 고종후가 4백 명, 부장 장윤이 3백 명, 의병장 이계련이 1백여 명, 의병장 변사정의 부장이 3백 명, 의병장 민여운이 2백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이미 먼저 와서 본부 목사(本府牧使) 서예원과 김준민ㆍ이종인 등과 수성(守城)을 의논하고 있었다. (후략)
『연려실기술』 제16권 「선조조고사본말(宣祖朝故事本末)」
진주성의 함락과 명병(明兵)의 철환(撤還)
29일에 적이 진주를 함락시켰다. 창의사 김천일은 그 아들 상건(象乾)과 경상 우병사(慶尙右兵使) 최경회ㆍ충청 병사 황진 이상의 세 사람은 진양(晉陽)에 삼충사(三忠祠)를 세웠다.
전라도의 복수대장 고종후ㆍ우의병부장(右義兵副將) 고득뢰(高得賚)ㆍ좌의병부장(左義兵副將) 장윤(張潤)ㆍ의병부장(義兵副將) 이잠(李潛)ㆍ영광(靈光) 의병장 심우신(沈友信)ㆍ태인 의병장 민여운ㆍ해남(海南) 의병장 임희진(任希進)ㆍ도탄(陶灘) 복병장(伏兵將) 강희보(姜希甫)ㆍ의병장 이계련(李繼璉)ㆍ김해 부사 이종인(李宗仁)ㆍ사천현감 김준민(金俊民)ㆍ남포 현령(藍浦縣令) 송제(宋悌)ㆍ진주 목사 서예원(徐禮元)ㆍ의병장 강희열(姜熙說)ㆍ진해 현령 조경형(曹慶亨)ㆍ판관 최기필(崔琦弼)ㆍ좌랑 양산숙(梁山璹)ㆍ주부(主簿) 유복립(柳復立) 등과 함께 모두 전사하였다. 충청도의 수령(守令)으로 충청 병사를 따라 죽은 자로서 기록하지 못한 것이 많다.
『연려실기술』 제16권 「선조조고사본말(宣祖朝故事本末)」
호남(湖南) 의병
해남 사람 진사 임희진과 영광 사람 첨정(僉正) 심우신(沈友信)과 태인 사람 민여운이 각각 군사를 모집하여 영남으로 갔는데, 모두 진주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백사집(白沙集)』 이항복(李恒福, 1556~1618)의 『백사집(白沙集)』. 1629년 강릉에서 처음 간행된 이후 여러 차례 출간되었다.
別集 卷三 議
(전략) 진주가 급해진 때를 당하여 김천일은 의병장으로서 마침 도내(道內)에 있었던 바, 당시에는 상장(上將)이 명령을 전달하거나 지휘하는 일도 없었으므로, 24일에 홀로 3백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가장 먼저 진주성에 들어갔는데, 그런 다음에 황진ㆍ최경회ㆍ고종후ㆍ장윤ㆍ이계련ㆍ민여운 등이 풍문을 듣고 차례로 진주성을 들어가게 되었으니, 이것이 그 첫 번째 어려운 일입니다. (후략)
『재조번방지(再造藩邦志)』 『재조번방지』는 책 이름이 말하여 주듯이, 선조 25년 임진왜란으로 무너진 우리나라를 중국 명나라의 구원으로 재조 재건한 사실을 기록한 책이다. 따라서 이 책에서는 주로 임진왜란 7년간의 사실을 다루면서 그 이전 선조 10년(1577년)부터 이후 선조 40년까지의 대명(對明) 및 대일(對日)관계의 사실을 함께 다루었으니 이것은 그 연원과 결말을 함께 밝히려 함이었다.
三
6월 적이 (중략) 진격하여 진주성을 포위하고 함안(咸安)을 침범하며 전라도로 핍박하면서 장차 한강 이남을 회복하여 경계로 삼겠다고 떠벌렸다. 이는 평신수길이 저희 병사가 일찍이 김시민에게 참패한 적이 있으므로 이제 여러 적이 연합하여 힘을 합쳐서 진주성을 기어코 섬멸(殲滅)하려는 때문이었다. 창의사 김천일이 이 소문을 듣고 그 병사 4백 명을 거느리고 제일 먼저 성안으로 들어가니, 양산숙(梁山璹)이 따랐다. (김)천일이 성을 나가서 함께 죽지 말도록 권하니, (양)산숙은 “이미 일을 같이 하였으니, 군중에서 같이 죽겠습니다.”라고 하였다.
또한 (김)천일의 사인(士人)으로서 성을 나가 스스로 보전하고, 군대는 부장에게 맡길 것을 권하여도 (김)천일은 끝내 듣지 않고 오로지 촉석루(矗石樓) 방면을 지키고 있었다. 경상 병사 최경회ㆍ충청 병사 황진ㆍ의병복수장 고종후ㆍ좌도의병장 장윤ㆍ이계련ㆍ민여운과 김해 부사 이종인 등이 차례로 입성하였다.
최경회가 우도의 의병을 거느리니, 이른바 우의병이다. 호령이 엄숙하고 처사가 정밀하고 민첩하므로 백성들이 무척 의뢰하고 믿을 수 있다고 하였다. 선거이ㆍ홍계남 등은 적병은 많고 아군은 적으므로 내지(內地)로 물러가 지키는 것만 못하다 하여 군사를 이끌고 성을 나와 운봉(雲峯)으로 퇴진하니, 김천일이 말하기를,
“호남은 우리나라의 근본이요, 진주는 실로 호남의 방패이니, 진주를 지키지 못하면 이는 바로 호남을 없애는 것이다.”라 하고, 드디어 제장과 더불어 사수하기를 다짐하였으나, 부상이 더욱 심하고 무기가 텅 비어서 믿을 만한 것이 없었다.
『승정원일기』 철종 13년 4월 1일 계축
(전략) 贈左承旨閔汝雲贈吏參例兼 좌승지는 정삼품이고, 이조참판은 종이품이다.
忠節卓異加贈事 承傳 (후략)
「여흥민씨 대종회」[http://www.minssi.net)]
「가문을 빛낸 인물」 중의 한 분으로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자는 용종. 찬성 제인(입암공)의 손자로서 음보로 두 고을의 현령을 지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태인에서 정윤근과 함께 향병 200여 명을 모집하여 의병장이 되어 스스로 비의장(飛義將)이라 불렀다. 의병을 이끌고 팔량치를 넘어 함안 등지에서 적을 맞아 싸워 전과를 올렸다.
1593년 6월 제2차 진주성 싸움에서 휘하 의병 300여 명을 이끌고 참가하였다. 이 싸움에서 10여 군데나 창검을 맞고 왼손이 잘리고 오른손이 부러졌는데도 장사들을 독려하면서 성을 사수한 지 7일째 되던 날 성을 순시하다가 적의 화살에 맞아 전사하였다. 좌승지에 추증되고 선무원종공신에 책록되었다.
이 내용은 산외면 평사리 노은마을에 있는 ‘충의정’에 있는 약력과 비교된다.
민여운(閔汝雲, ?∼1593)
임진왜란 때 우리 고장에서 의병을 일으켜 싸우다 죽은 인물 자 종용(從龍) 본관 여흥(驪興) 용담현령을 지내고 은퇴해 있던 중 왜군의 침략으로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원정마을의 鄭允謹과 솝잡고 일어섰다.
향토의 의병 2백여명이 결집 그는 대장으로 추대받아 스스로 비의장(飛義將)이라 일컫고 출정하였다.
당시 적과 격전이 벌어진 경상도 땅으로 들어가서 여러번 싸워 전괄르 올렸다.
1593년 6월에는 진주성 사수의 대 결전장에 참여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되고 손이 끓어지기까지 했으나 끝내 진두지휘를 하다가 적의 총탄에 쓰러져 비장한 최후를 마쳤다.
나라에서 그의 공적을 평가하여 선무원종훈(宣武原從勳)을 내렸으며 후세에 이조참판의 증직이 내렸다. 묘소는 본 면의 용두마을 뒤편 산기슭에 있다.
그의 종 추동(秋同)이 용맹하고 활을 잘 쏘아 적을 많이 사살하고 그가 죽음에 함께 함께 전사하였으니 이 또한 특이한 사실이다.
계미년 입동지절에 도강인 김진돈 삼가 씀
충의정을 언제 지었는지 확인하지 못하였으나 민여운 의병장을 소개하는 글에 ‘계미년 입동지절’로 보아, 2003년 11월 8일에 작성한 것으로 보인다. 정읍시 산외면 평사리 노은마을에 있다.
산외를 빛낸 인물 여섯 분의 약력을 현판에 새겨 육각에 걸었다.
임진왜란 의병장 민여운, 동학농민혁명 지도자 金開南(1853∼1894), 독립운동가이며 3ㆍ1독립만세운동의 33인 중 1인 朴準承(1866∼1927), 독립운동가 金廷術(1869∼1952), 조선어학회 애국지사 林爀圭(1891∼1963), 독립운동[6ㆍ10만세운동]가 이동환(李東煥, 1901~1982) 등 여섯 분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민여운(閔汝雲)
개설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용종(龍從). 민구손(閔龜孫)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찬성(贊成) 민제인(閔齊仁)이다.
생애 및 활동 사항
음보(蔭補)로 두 고을의 현령을 지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태인(泰仁)에서 정윤근(鄭允謹)과 함께 향병(鄕兵) 200여 인을 모집하여 의병장이 되어 스스로 비의장(飛義將)이라 불렀다. 의병을 이끌고 팔량치(八良峙)를 넘어 함안 등지에서 적을 맞아 싸워 전과를 올렸다. 1593년 6월 제2차 진주성 싸움에서 휘하 의병 300여 인을 이끌고 참가하였다.
이 싸움에서 10여 군데나 창검을 맞고 왼손이 잘리고 오른손이 부러졌는데도 장사들을 독려하면서 성을 사수하기 7일째 되던 날 성을 순시하다가 적의 화살에 맞아 전사하였다. 좌승지에 추증되고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책록되었다.
[참고문헌]
• 『호남삼강록(湖南三綱錄)』
• 『호남절의록(湖南節義錄)』
원문 사료 [義兵將ㆍ泰仁 義兵將ㆍ飛義兵將] : 19건
『이재유고(頤齋遺藁)』
卽侍中文獻公玄英八世孫 吏曹典書繼安玄孫 進士汾孫也 旣生故家 夙禀美質 有才有學 兼長弓馬 萬曆壬辰 倭賊大至 則倡募義兵 以應高忠烈金文烈諸公 而推同縣寓居前縣令贈承旨閔汝雲爲大將 癸巳赴晉州 與高公從厚崔公慶會黃公進及金文烈協議死守
미국역(未國譯) 사료 : 19건
서명
권차
문체
기사
송천유집(松川遺集)
松川先生遺集卷之七
附錄下
忠臣贈通政大夫 承政院左承旨兼經筵參贊官 宣敎郞 守工曹佐郞蟠溪公行狀
完山李敏敍 謹撰
송천유집(松川遺集)
松川先生遺集卷之七
附錄下
神道碑銘 幷序 豐山洪良浩 謹撰
건재집(健齋集)
健齋先生文集附錄卷之三
年譜
年譜
건재집(健齋集)
健齋先生文集附錄卷之五
白沙記事
건재집(健齋集)
健齋先生文集附錄卷之五
晉州敍事 安牛山 邦俊撰
[飛義兵將閔汝雲]
백사집(白沙集)
白沙先生別集卷之三
議
因南方儒生䟽。高敬命依金千鎰例。褒崇議
은봉전서(隱峯全書)
隱峯全書卷三
書
書與延平李相公 貴 別紙 壬申十一月日
은봉전서(隱峯全書)
隱峯全書卷七
記事
晉州敍事
은봉전서(隱峯全書)
隱峯全書附錄上
年譜
[隱峯先生年譜] 飛義兵將閔汝雲
송자대전(宋子大全)
宋子大全卷二百二
諡狀
兵使贈左贊成黃公諡狀
이계집(耳溪集)
耳溪集卷二十六
神道碑
工曹佐郞梁公神道碑 幷序
이재유고(頤齋遺藁)
頤齋遺藁卷之十
書
代道儒呈考巖致祭承旨書 乙巳
연경재전집(硏經齋全集)
硏經齋全集卷之五十九
蘭室史科二
晉陽殉難諸臣傳
풍고집(楓皐集)
楓皐集卷之十五
傳
梁山璹傳
飛義兵將閔汝雲
운석유고(雲石遺稿)
雲石遺稿卷之十七
諡狀
贈吏曹判書梁公 山璹 謚狀
飛義兵將閔汝雲
면암집(勉菴集)
勉菴先生文集卷之二十三
跋
跋六友堂家狀
송암유고(松菴遺稿)
松菴先生遺稿卷之二
補遺
壬辰倡義時同苦錄
백수집(白水集)
白水先生文集卷之十五
行狀
寒溪孫公行狀
좌소산인집(左蘇山人集)
左蘓山人文集卷第八 達城徐有本混原
文
晉州殉難諸臣傳
2. 민여운 의병장 유적지
태인에서 태어났다는 기록과 서울에서 태어났다는 설이 있으나 구체적인 사료가 나오지 않아 태생지를 알 수 없다. 더욱이 문중에서 전하는 이야기조차 없는 실정이어서, 구체적인 장소를 찾는 것은 쉽지 않다. 이와 함께 성장지와 거주지 역시 알 수가 없다. 그나마 산외면 정량리의 정윤근 의병장과 함께 창의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그 인근에서 태어나거나 이주 후 거주하였을 가능성을 미루어 짐작할 뿐이다.
그래도 묘소와 재실 용두재가 현존하고 있어, 유적지로서 의미와 기능을 담당할 수 있다. 묘소는 ‘용두재(龍頭齋)’ 바로 뒷산에 있으며, 관리가 이루어져 양호한 상태이다. 본래 비문은 1925년에 건립하였고, 2000년 4월에 새로 건립하였다.
贈嘉善大夫吏曹參判義兵將驪興閔公汝雲之墓 贈貞夫人晉州鄭氏合
2000년 庚寅四月 日立
全北鄕土文化硏究會長 南原后人 楊萬鼎 謹撰
迎日后人 鄭雲炎 謹書
贈嘉善大夫吏曹參判驪興閔公汝雲之墓
贈貞夫人晉州鄭氏祔左
崇禎後五乙丑[1925년]
묘소 안내 표지석
위 붉은 선이 묘소, 아래 청색이 용두재
2015년에 발간한 『산외면지』에 실려 있는 ‘용두재’에 관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산외면지편찬위원회, 산가수려한 충의의 고장 - 『산외면지』, 2015, 297~299쪽.
용두재(龍頭齋)
정읍시 산외면 동곡리 산 197번지 용두산 다음과 네이버에서 검색하면, 산외면 동곡리 산 197-1 채계산(117.4m)으로 나온다.
아래에 齋室로 驪興閔氏의 齋閣이다. 정면 4칸 측면 3칸이며, 石田 黃煜이 ‘용두재(龍頭齋)’라고 쓴 현판이 걸려 있다. 지붕은 최근에 개조하였고, 기단은 석축 기단에 시멘트를 발랐다. 1997년 閔炳浩가 지은 「용두대기(龍頭齋記)」를 토대로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용두재 재실의 건립 연대는 1825년이다. 문간채는 노후되어 철거했으며, 본채 재실도 붕괴의 위험이 있어 1982년 개수하였다. 그러나 1992년경부터 누수와 훼손이 점차로 생겨나서 다시 전통 기와를 내리고 시멘트 기와로 대체, 개수하여 현재로서는 옛날의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여기에서 한학자 和石 金洙連 선생이 수년간 강학했다. 그는 70세 때인 1995년 산외면 용두리에 서당을 만들었고, 76세 때인 2002년 김제시 성덕면 대석리로 서당을 이전하였다.
용두재 뒷산은 여흥민씨의 묘역이라고 한다. 이곳에 임진왜란 당시의 공신 민여운 장군의 묘가 있다. 민여운의 戰功에 대한 보답으로 조정에서 賜牌地를 내렸다고 전한다. 용두재 입구에 현감 민관호 휼민선정비가 있다.
재실은 지명을 따라 龍頭齋라 하였고, 이를 건립하게 된 동기는 임진왜란 공신 민여운 의병장과 관계가 있다. 민여운 장군은 1592년 임진왜란에 泰仁縣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의병장이 되었다. 용두재는 바로 晉州城에서 倭將과 싸우다 순국하여 이곳에 安葬한 민여운 飛義將을 모시고 祭祀 지내기 위하여 만든 齋室이다.
민여운은 여흥민씨 시조 고려상의태어공 민칭도의 18대손이며, 조선조 중종 때 좌찬성 閔齊仁의 손자이다.
민여운 장군의 字는 龍從이요, 號는 松峯이며, 蔭仕로 용담현령을 지내고 임기가 만료된 시기였다. 때마침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는 고향 태인현에 내려와 慶州人 鄭允謹과 더불어 鄕兵 200명을 모집하여 여러 邑에 격문을 보내며 軍糧과 병기를 정비하였다. 이때 사람들에 의하여 대장으로 추대되자 登壇하여 피로써 동맹을 맺고 雄자로 軍票를 하여 飛義將이라 自號하고, 八良峙를 넘어 咸安 등지에서 무수히 적을 참살하였다.
癸巳 유월에 적장 가토 기요마사(加籐淸正)가 전년의 진주 참패를 보복고저 수십만으로 진주를 공격하려 함에 공은 三百 여인과 혈서로서 동맹하고 순국할 것을 맹세하며 倡義使 金千鎰, 復讎將 高從厚, 慶尙兵使 崔慶會, 忠淸兵使 黃進, 彪義莊 沈友信 등 제공들과 더불어 진주로 입성하여 항전 7일 동안에 10여 군데에 創傷을 입고, 양 솓가락이 다 절단되었으며, 그 아픔을 잊고 더욱 진 뒤에서 督戰하다가 6월 27일 巡域 중 적의 流矢에 맞아 순국하니, 副將인 鄭允謹은 공의 직을 이어 先山인 현재의 정읍시 산외면 정량리 차일산에 장례하여 지금에 이른다.
여흥민씨 선산 22町步의 임야는 나라에서 下賜하였다. 민여운의 아들이 시묘를 위해 지금의 산외면 菱岩에 정착하여 그 손이 이어져 후대에 이르렀다. 그의 玄孫 때 絶孫하여 큰댁의 孫인 鎭泰를 입양하여 오늘에 이른다. 이후 김[민]진태의 생가 동생인 김[민]鎭五가 산외면 정량리에 정착하여 그 손이 이어져 이 지방에서는 속칭 菱岩閔氏 혹은 정량리 민씨로 불리기도 한다. 묘비는 있으나 墓碣銘은 일제강점기에 산외면 주재서의 왜경이 훼손하여 글씨를 자세히 살피기 어렵고 흔적이 보일 정도이다.
민여운 의병장과 관련한 유일한 역사 현장으로 산외면 소재지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지만, 묘소 안내석[壬辰倭亂義兵將飛義將閔汝雲墓所(다리 건너 좌측 700m)]이 설치되었으나 눈에 잘 띄지 않고, 용두재에서 묘소까지 가는 데도 안내자 없이는 쉽지 않다.
민여운 의병장의 태생지이자 성장지 또는 거주지로 추정되는 산외지역의 유적지 현황이 이처럼 열악하다. 대신 의병 활동을 활발히 한 경상도 지역 유적은 분명하다. 민여운 의병장이 순국한 진주성은 온 국민이 다 아는 역사 현장이고, 석현전투지는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경상북도 김천시에서 주시하고 있다.
석현전투지[石峴戰鬪址]
정의
임진왜란 때 김천시[지례현(知禮縣)] 구성면 상좌원리 돌고개[석현]에서 벌어진 김천의 대표적 전투.
개설
이 석현전투로 인해 고개는 돌모리로 불리게 되었으며, 면 이름도 석현면으로 불리게 되었다. 석현[돌고개]은 조선 시대에는 김산군, 지례현의 접경을 이루었다. 조선 시대에는 지례현 하북면에 속한 상좌원리는 1914년 석현면에 편입되어 상좌원과 도동, 원앞을 통합하여 하원리가 되었다. 구미의 석현면 면청사가 유실되어 석현 과곡면과 합하여 지례현의 옛 이름인 구성면이라 하였다. 지금도 석현 산마루에 돌무덤이 묻혀 있다.
역사적 배경
경상도 지역을 장악한 왜장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는 개령현에 주둔하여 왜군 후방 사령부를 설치하여 경상도 일원의 치안을 담당하면서 군정을 실시하였다. 당시 개령의 주둔 왜병은 3만~4만 명으로 추산되었다. 이에 인근의 의병 군진이 호남의 일부 의병군과 합동 작전을 통해 왜군 후방 사령부를 토멸하려고 하였다.
김면(金沔) 의병 대장을 주축으로 한 2,000명의 병역은 상좌원에 포진하고, 의병장 최경회(崔慶會)와 의병장 민여운(閔汝雲) 예하 1,000여 명은 웅현[거창군]을 경유하여 개령으로 집결하고, 지례에 있는 의병과 경상도의 승병은 남쪽을 돌아 개령으로 진군토록 하였다. 호서의 의병군은 우치현[우두령]에서 왜의 내원군을 막는 한편, 상주의 의병군은 상주 통로를 막는 가운데 김면의 본진군이 개령 왜군 사령부 동쪽 산에 숨어 올라가 횃불로 신호하면 김함·정유회·김몽린의 군병과 좌우 돌격장의 병졸이 일시에 공격한다는 작전 계획을 세웠다.
11월 25일 날이 밝자 개령의 왜군이 먼저 거창을 향해 진군한다는 첩보를 접하고 이곳을 먼저 공격하기로 하고 돌고개, 즉 석현의 산 위에 매복하여 접근하는 왜군을 공격하여 석현전투가 벌어지게 되었다.
경과
석현의 산 위에 매복한 의병군은 미리 쌓아 두었던 돌을 산 아래 왜군에게 투척하고 활을 쏘았다. 이 전투는 쌍방 간 진격과 후퇴가 세 번이나 거듭될 정도로 격렬하게 벌어졌는데, 결국 왜군이 물러남으로써 끝이 났다. 석현의 전투에서 계원장 김충민과 함양의 정병 최운의 노비 억복이 말탄 왜장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아군의 경우도 군관 유사홍이 전사하고, 장암 의병장 권응성(權應聖)이 전사한 것으로 전해진다.
[참고문헌]
• 『김천시사』(김천시, 1999) [『송암일기(松庵日記』 - 김면), 『임진왜란 전란사』, 『감호문집(鑑湖文集』 - 여대로(呂大老) 위수(渭叟)ㆍ성우(聖遇)ㆍ감호(鑑湖)]
[네이버 지식백과] 석현전투 [石峴戰鬪] (디지철김천문화대전)
석현전투지에서 수습한 돌. 인근에 있는 감천(甘川)에서 가져와 전투에 사용한 것으로 추정한다.
석현전투 산기슭은 황악산에서 김천쪽으로 흐르는 감천(甘川)을 접하는데, 그때 이 강에서 돌을 백성들과 함께 산 능선으로 밤새 옮겨 놓았다고 한다.
1983년 금릉군에서 발간한 『내 고장 우리 향토』에 “이날 작전 계획에 따라 호남 출신 의병대장 최경회와 역시 호남에서 거병한 의병대장 첨정 민여운이 그 휘하 1천여 명을 거느리고 상좌원에 진을 쳤다, (중략) 적이 돌고개에 다다랐을 때, 산에 숨어있던 3천여 명의 군사가 일시에 활을 쏘고 밤새 산더미처럼 모아 두었던 돌을 던지면서 공격하였다.”라며, 김면의 본진군 2천 명과 호남 의병 1천 명이 석현전투를 치렀음을 기록하였다.
진주성 전투지
2차 진주성전투(晉州城戰鬪)는 1593년 6월 19일부터 29일까지 조선군(의병 포함) 3,400여 명, 일본군 93,800여 명이 진주성을 두고 공방을 벌인 처절한 전투였다. 그 결과 진주성이 함락당하고, 창의사 김천일과 경상우병사 최경회ㆍ충청 병사 황진ㆍ의병장 민여운 등이 전사하고, 진주성과 인근에 거주하던 6만여 명이 학살당하였다.
2차 진주성 전투 때 민ㆍ의병ㆍ관군이 장렬히 순절한 후 진주성내에 제단을 설치하고 매년 6월 29일에 제사를 지냈다. 처음에는 김천일ㆍ황진ㆍ최경회 등 세분을 모셨는데, 차츰 추가되어 현재 39위를 모시고 있다. 1607년(선조 40) 경상도 관찰사 정사호[鄭賜湖, 재임 기간 1607.4.∼1607.11.]가 사우(祠宇)를 창건하였다. 그러나 의병장 민여운과 정윤근의 신위는 없다.
정당(正堂)충무공 김시민, 문열공 김천일, 무민공 황진, 충의공 최경회, 효열공 고종후, 주부 유복립(이상 6위)동사(東祠)승지 양산숙, 참의 김상건, 병조판서 김준민, 병조참의 강희열, 병조참의 조경형, 병조참의 최기필, 주부 유함, 호조좌랑 이욱, 호조좌랑 강희복, 호조좌랑 장윤현, 병조참의 박승남, 병조좌랑 하계선, 호조좌랑 최언량, 무열공 주몽룡, 도총관 주대청(이상 15위)서사(西祠)참의 이잠, 참의 성영달, 병조참의 이종인, 참의 윤사복, 호조좌랑 이인민, 호조좌랑 손승선, 군자감정 정유경, 좌승지 김태백, 호조좌랑 양제, 호조좌랑 박안도, 병조참의 이의정, 도총관 행부장 김개, 사복 송건도, 예조정랑 정재보, 수문장 박세항, 병부판부 송제, 형조판서 김덕련, 칠만 민관군 신위(이상 18위)
Ⅲ. 선양사업의 방향과 방안
1. 방향
임진왜란을 직접 겪으며 현장에서 숱한 역할을 담당한 류성룡은 징비록(懲毖錄)』을 남겼다. 책의 이름을 징비록이라 한 이유은 “지난 일을 징계하여 앞날을 대비한다.”라는 것이었다. 즉 지난 일들에 대해서 철저히 분석하여 대비책을 마련하고, 앞날을 준비한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우리가 역사를 배우고, 민여운 의병장의 삶을 기억하고 선양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일반적으로 역사 인물을 중심으로 한 선양[기념]사업의 주체는 후손[문중]․연구자(단체)․지자체로 볼 수 있다. 후손의 자발적인 선양사업이 먼저일 수도 있고, 연구자의 제안을 받은 지자체가 추진할 수도 있으며, 제삼자의 제보나 제안받은 지자체장의 의지로 추진하기도 한다. 그런데 후손이 없는 경우, 연구자[단체]나 지자체 또는 국가 차원의 선양[기념]사업을 추진하기도 하는데, 해당 인물의 지명도(知名度)는 물론 국민적 관심과 인지도(認知度)가 높은 경우이다. 홍범도 장군의 경우, 고향이 평안도이고, 후손마저 끊겼고, 북한 정권이 보이지 않는 기피로 인해 유해 봉환이 더디게 진행되었다. 또한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 교정에 세운 흉상마저
후손이 있어도 사정이 여의치 못한 경우와 연구자[단체]의 관심과 연구성과가 있어도 지자체가 외면하면 지지부진하다. 따라서 후손과 연구자[단체] 그리고 지자체가 공동으로 추진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드문 경우이기는 하지만, 특정인[개인]의 노력으로 결실을 낳기도 한다.
임진왜란 당시 전라도에서 창의한 의병의 다수는 전라도보다 다른 지역에서 전쟁을 수행하였다. 이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경상우도의 의병은 (중략) 대부분 각자의 주둔 지역을 중심으로 자신들의 의병 부대를 이끌고 독립적으로 활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곽재우 의병은 그 독립적인 성격이 더 강하였다. (중략) 이들은 향토방위를 주된 목적으로 하여, 대부분 거주지를 중심으로 그 인근 지역에 활동하였다.
반면 호남 의병은 영남에 비해 부대의 규모가 컸고, (중략) 호남 의병은 주현 단위의 유력자를 중심으로 조직을 이룬 다음, 유력 의병장을 중심으로 재결집하여 대규모의 부대를 결성하는 양상을 보였다. (중략) 영남 의병이 지역 단위의 향토방위를 우선한 데 비해, 왜군의 직접 침입을 받지 않았던 호남 의병은 ‘근왕(勤王)’이 거병의 목적이었기 때문에, 의병 결집의 지역적 범위가 넓어졌고, 그 결과 의병 부대의 규모도 영남 의병보다 더 커지는 양상을 보였다.
또한 호남 의병은 전라도가 직접적인 전쟁터가 아니었기 때문에 전라도 이외의 지역에서 활동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호남 의병의 활동은 크게 근왕을 위해 서울·경기로 북상한 경우와 경상도로 진출해서 영남의 군대와 연합 작전을 펼친 경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전자에 해당하는 것이 고경명, 김천일의 의병 활동이고, 후자에 해당하는 것이 1, 2차 진주성 전투에 참여한 것이다. 국사편찬위원회, 『우리 역사 넷』 「의병(조선) 나라를 지키기 위해 칼을 들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정황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경상도 지역은 일본군의 서울 점령을 위한 공격로에 있었으므로 경상도 의병은 곧바로 일본군의 침략에 맞서는 것이 급선무였다는 점, 반면에 호남 의병은 창의와 조직을 꾸리는데 시간적ㆍ공간적 여유가 있었다는 점이다. 특히 임진왜란 초기에 웅치와 이치전투, 그리고 이순신의 수군이 일본군의 전라도 침공을 막아내면서 전라도 의병이 전라도에서 전투를 벌이는 경우는 경상도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었다. 따라서 석현전투를 비롯하여 진주성 1차 전투와 2차 전투에 민여운 의병장을 비롯하여 호남 의병이 참전한 정황을 이해할 수 있다.
우리가 민여운 의병장을 비롯하여 국난에서 순국한 분들과 참여자들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것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앞날을 대비하는 데 있다. 따라서 민여운 의병장 선양사업의 궁극적인 목적도 이와 다르지 않다. 다만 이를 수행하는 방향은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따라 성패가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후손의 역할[연구 토대가 될 사료 제공 및 안내], 연구자 역할[학술연구], 지자체 역할[예산 지원[보조]ㆍ교육ㆍ홍보 등] 등 3자의 역할 분담과 책임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룰 때 가능하다고 본다.
2. 방안
현재 정읍시는 동학농민혁명에 집중하고 있음을 인지하고, 이를 확장하여 정읍 민족운동[동학농민혁명ㆍ임진왜란과 대한제국기 의병ㆍ일제강점기 독립운동 등]으로 정립하는 「정읍 민족운동 기초조사 및 기본계획(안)[master plan]」을 수립하고, 이를 토대로 「종합계획을 수립하여 단계적으로 기념사업을 추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리고 정읍지역 의병 기념사업 현황 파악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즉 「정읍지역 의병 기초조사」 → 「기념사업 기본계획」 수립 → 기념사업 추진이다.
다만 민여운 의병장과 관련해서는
①안 민여운 의병장 단독 기념사업
②안 태인지역 임진왜란 의병[장]과 함께하는 기념사업 : 정윤근ㆍ안의ㆍ김후진ㆍ김제민 등
③안 석현전투 참여자 포함
④ 진주성 2차 전투 참전 의병[장] 기념사업[교류와 연대, 협의체. 전국 의병기념사업 등]
등으로 나누어 검토한 뒤 세부 계획을 수립하여 추진하는 방안을 병행할 필요가 있다.
분야별 선양사업으로
⚫ 학술 : 의병장 민여운 관련 문헌 조사 연구 발간 [개인 행장이나 문집 등 발굴]. 나아가 태인 의병[정윤근 김후진 김제민 등] 유적을 발굴하고, 강좌와 답사 등 역사교육 프로그램 개발과 운영의 자료를 제공한다. 민여운 의병장의 특징과 역사 문화 콘텐츠 활용 – 지역문화 정체성 함양, 지역 정체성 확립
⚫ 교육 : 문종 후손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을 시작으로 산외와 칠보, 그리고 정읍시민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 프로그램을 수립하여 추진. 의병[충절]을 주제로 한 역사교육프로그램을 개발하여 역사 시민 강좌를 개설하고, 관련 유적지 답사프로그램을 진행, 지역민의 지역 역사문화 정체성을 함양한다. 현재 문화재청에서 지원하는 생생문화재사업 등을 통해 더욱 효율적으로 운영할 수 있을 것이다.
⚫ 답사 : 역사 현장 답사는 감정을 가진 이들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과정인데, 그것은 몸과 마음으로 동시에 느낄 수 있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산외지역 의병을 중심으로 한 역사 문화 탐방로를 산행[등산]코스로 연결하여 개설 및 정비가 필요하고, 나아가 의병 창의에 관한 기록화, 및 옥외 오디오 가이드 등의 설치를 통해 자연스러운 역사 탐방로 기능을 부여할 수 있다.
⚫ 역사 문화 콘텐츠 개발 : 둘레길. 태인 칠보 역사 문화 탐방로[무성서원, 불우헌 정극인(상춘곡) 묘소, 고현동향약 동각, 유상대 터, 송정, 시산사, 태산선비문화사료관, 안의 손홍록 묘소 및 유적, 남천사 등]
⚫ 홍보 : 먼저 정읍시에서 추진하고 있는 ‘정읍 이달의 역사 인물’에 선정될 수 있도록 하고, 이를 계기로 홍보 자료를 제작하여 배부한다.
⚫ 유적지[태생지ㆍ묘역ㆍ전투지] 정비 및 조형물 설치
현재 민여운 의병장과 관련한 유적지는 여흥민씨 재실인 용두재와 묘소가 있다. 그러나 이 장소를 찾아가는 데 필요한 이정표는 물론 안내판마저 설치되지 않아 민여운 의병장에 관한 간단한 약력마저 볼 수 없다. 인근 평사리 노은마을에 건립한 ‘충의정’에 민여운 의병장에 관한 간단한 약력 소개가 있지만, 이곳은 유적지가 아니라 후대에 조성한 공동 시설물이다. 따라서 묘소와 용두재 정비가 우선되어야 할 것이다.
현실적으로 가능한 범위에서 묘소와 재실(용두재) 정비사업을 세우고, 전투지는 해당 지자체와 협의하여 추진할 수 있다. 기념비와 표지석 설치 등은 기초적인 기념사업의 하나이다. 조형물을 비롯한 상징적인 기념물을 건립하되, 궁극적으로는 개별보다 산외 칠보지역 의병, 또는 정읍지역 의병을 망라한 기념공원[가칭 정읍 민족운동기념공원 등]을 조성할 필요가 있다.
⚫ 정읍 의병 합동 추모제
전라북도에 의병과 독립운동 전문연구자가 부재한 상황이고, 전라남도 나주시에 건립 중인 「남도의병역사박물관」이 완공될 경우, 의병 독립운동에 관한 연구와 기념사업은 자칫 소외당할 가능성이 크다. 전라북도 차원의 전북 의병 합동 추모제와 기념사업의 추진이 바람직하지만, 먼저 정읍 의병 합동 추모제를 추진할 필요가 있다.
민여운 의병장과 관련하여 단일 추모제를 개최할 경우 “삽혈동맹(歃血同盟) 손가락을 잘라 피를 내어 모은 다음 함께 나누어 마시는 의식
을 하면서 스스로 비의장(飛衣將)이라 칭하고, 군기(軍旗)의 장표(章標)를 ‘웅(熊)’ 자로 삼았다.”라는 기록을 참조하여 이벤트를 제안한다. [시향일 : 매년 양력 11월 첫째 주 토요일]
이와 함께 2차 진주성 전투 순국선열 신위를 모신 창렬사에 민여운 의병장을 추가하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Ⅳ. 맺음말
임진왜란 당시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는 여러 전투가 벌어졌지만, 2차 진주성전투는 승패를 떠나 우리 민족의 애국애족정신과 국난극복을 그대로 보여준 대혈전이었다. 비록 관군과 의병, 백성의 결사항전(決死抗戰)도 진주성이 함락당하고 6만의 백성이 학살당한 비극이자 참사였지만, 그 역사 현장은 물론 그 정신은 오늘날에도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다. 그 현장에서 민여운과 정윤근 의병장이 순국하였다.
그러나 오늘날 너무나 아쉽고 안타까운 것은 민여운과 정윤근 의병장이 2차 진주성전투 순국 39위에 포함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2차 진주성전투에서 순국하거나 희생당한 이들을 기리는 창렬사(彰烈祠)에 아직도 배향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문중의 후손은 물론 우리 모두의 부끄러운 자화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만시지탄이지만 이제라도 민여운 정윤근 의병장을 비롯하여 함께 순국한 모든 이들이 배향되도록 후손의 도리를 다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 먼저 「임진왜란 민여운ㆍ정윤근 의병장 기념사업회」 창립을 제안한다.
[참고 자료]
정읍시 이달의 역사 인물[2021.04. ∼ 현재]
정읍시가 2021년 4월부터 ‘정읍 역사 정체성 찾는다.’라는 취지와 ‘인문·역사적 가치·시민 자긍심 고취’하겠다는 목적으로 추진하는 ‘이달의 역사 인물’에 민여운 의병장을 선정하여 홍보하는 방안 필요. 매달 정읍을 빛낸 역사 인물을 두 명씩 선정해 정읍의 인문·역사적 가치와 위상을 높이고, 시민들의 자긍심을 고취하겠다고 밝혔다. 선정된 역사 인물에 대해서는 포스터와 리플릿 등을 제작해 읍면동과 유관 기관, 각급 학교 등에 배부하고, 시 홈페이지 등을 활용해 홍보할 계획 [문화예술과 문화사업팀] 2021-04-14
2023년
∼ 휘하에
개항기
제1차 동학농민혁명 백산에서
5월 6일 전주성에 입성
전주화약
전라도 53개 군현에 집강소 설치하던 시기에
전봉준과 함께 집강소 설치를 감독
나주의 집강소를 담당해 행정을 감독
태인에서 7,000명의 농민군을 이끌고
1895년 3월 29일 … 사형판결을 받음
2022년
2022년
2021년
오봉 김제민 선생 기념사업회, 정기총회 및 학술발표회
임진왜란 당시 태인지역 의병장 및 관련 인물
정윤근[鄭允謹, 1530~1593]
• 조선 중기의 의병.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과 군량·병기를 모집하였고, 진주성에서 싸우다 전사하였다.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중흠(仲欽)이다. 1530년(중종 25) 태인 고현내(古縣內; 지금의 전라북도 정읍시 칠보면)에서 출생하였다.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현령 민여운(閔汝雲 ?~1593)과 함께 태인에서 의병과 군량·병기를 모집하였고, 의병장으로 추대된 민여운 의병대의 부장(副將)이 되었다.1593년 6월 진주성(晋州城)에 들어가 김천일(金千鎰 1537~1593), 최경회(崔慶會) 등과 함께 진주대첩을 치렀다. 민여운이 전사하자 대장 역할을 대신 맡아 분투하였으나 그 역시 전사하였다. 사후 군기시주부(軍器寺主簿)에 추증되었다.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두산백과 두피디아)]
안의[安義, 1529~1596]
• 조선 중기의 의사(義士).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군량과 포목 등을 거두어 의병 진영에 보내고, 전주에 있던 태조영정과 왕조실록을 내장산의 용굴로 옮겨 보호하였다.
본관은 탐진(耽津), 자는 의숙(宜叔), 호는 물재(勿齋)이다. 태인현 동촌면(현 정읍시 옹동면)에서 출생하였고, 일재 이항(李恒 1499~1576)의 문하에서 공부하며 학덕을 갖추었다.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의곡계운장(義穀繼運將)이 되어 군량 300석, 목화 1,000근, 종이 등을 모으고, 스스로 쌀과 포목을 내어 절반은 임금의 피난처인 의주 행재소에, 절반은 의병장 민여운(閔汝雲 ?~1593)의 진중에 보냈다.손홍록(孫弘祿)과 함께 전주 경기전(慶基殿)의 태조 영정과 사고(史庫)에 있던 왕조실록을 내장산의 용굴(龍窟)로 옮겨 지켰는데 안의는 이때의 기록을 수직일기(守直日記, 난중일기)로 남겼다. 후에 선교랑활인서 별제(宣敎郞活人署別提)에 제수되었다. 전라북도 정읍시 칠보면 시산리 844번지에 있는 남천사(藍川祠, 전라북도 문화재 자료 제154호)에 배향되었다.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두산백과 두피디아)]
김후진[金後進, 1540~1620]
• 조선 중기의 학자이다. 경학과 역학에 해박하였으며, 임진왜란 때는 군량을 모아 의병의 군진에 보냈고, 의주에 몽진한 선조의 행재소에 수백 섬의 곡식을 바쳤다.
본관은 강진(康津)이고, 자는 비승(丕承), 호는 원모당(遠慕堂)·사재(思齋) 또는 연담(蓮潭)이다. 전라도 태인(泰仁) 고현내(古縣內)에서 태어났다. 개국공신 회련(懷鍊)의 후손이며, 일재(一齋) 이항(李恒)의 문인(門人)이다.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 이귀(李貴)가 장성(長城)에서 의병을 모집하자 이에 참여, 군량을 모아 장성남문(長城南門)의 의청(義廳)에 보냈다. 이듬해에는 장정 100여 명을 거느리고 의주(義州)에 가서 몽진(蒙塵)한 선조를 배알한 다음, 수백 섬의 곡식을 모아 행재소(行在所)에 바쳤고, 의병 고경명(高敬命)과 민여운(閔汝雲)의 의병소(義兵所)에도 군량을 보냈다. 또 면(綿) 수천 근을 사다가 옷을 지어 명나라 군진(軍陣)에 보내니, 군자감직장(軍資監直長)에 가증(加贈)되었다.그는《가례(家禮)》《心經)》《근사록(近思錄)》등 성리서(性理書)를 탐구하였고, 부모의 거상(居喪) 중에는 각각 3년 동안 시묘(侍墓)하였다. 군기시정(軍器寺正)에 추증되었으며, 정읍시 칠보면(七寶面)의 남천사(南川祠)에 배향되었다.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두산백과 두피디아)]
백광언(白光彦, 호는 풍암(楓巖), 시호 충민(忠愍), 본관은 해미(海美). 태인(泰仁) 출신.
일찍이 무과에 급제하고, 당상관에 올랐으나 정여립(鄭汝立)의 권세가 높아지자 도내(道內)의 문무사류(文武士類)가 모두 이와 결탁하려 하였으나 백광언만 동조하지 아니하여 미움을 받아 1589년(선조 22) 북청판관(北靑判官)으로 체직(遞職)되었다.
1592년 모친상을 당하여 태인에 머무르고 있는 중 임진왜란을 만나 전라감사 겸 순찰사(全羅監司兼巡察使) 이광(李洸)의 조방장(助防將)이 되었다. 이때 이광이 전라도 병사 8,000명을 이끌고 공주까지 북상했다가 서울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퇴군하여 전주에 이르자 백광언은 “군부(君父)께서 서쪽으로 파천(播遷)하셨는데 공은 수하에 많은 병력을 거느리고 퇴군하여 싸우려 하지 않으니 이 무슨 연고이시오.”라고 꾸짖어 북상할 것을 약속받고 다시 2만 여 군사를 모아 전열을 재정비한 뒤 수원을 향하여 진격하였다.
용인성(龍仁城) 남쪽 10리에 이르러 우군선봉장이 된 백광언은 좌군선봉장 이지시(李之詩)와 함께 문소산(文小山)의 적진을 협공하였으나 패전하여 모두 전몰하고 말았다. 이 싸움에서 승리하면 여세를 몰아 서울을 수복할 것으로 기대하였던 행재소(行在所)에서는 패전 소식을 들은 뒤 평양을 떠나 의주로 향하였다. 1834년(순조 34) 병조판서에 추증되고, 모충사(慕忠祠)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민(忠愍)이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민여운 의병장 행적 정리 관련 문제들
1. 태인현(산외면) 입향 사유
• 선대는 태인과 연고가 없는 것으로 파악.
- 세거지는 대전, 출생지는 서울로 추정.
- 부친의 관직은 경직(京職)으로 알려진 예빈봉사(禮賓奉事), 묘소는 경기도 양주.
2. 태인지역 교제 인물
• 군량미 등을 지원한 안의는 일재 이향의 문인, 부장(副將) 정윤근은 정언충 문인.
- 일재는 남고서원 배향 인물 중 주벽(主壁), 김천일의 스승
- 무성서원 배향 정언충은 정극인의 문인으로 송세림과 동문
(정극인ㆍ송세림ㆍ정언충 모두 무성서원 배향)
- 남고서원과 무성서원 모두 민여운에 관한 언급이 없음.
* 참고문헌은 각주로 대신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