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싶어 하나, 둘 사 모은 책이 책장을 모두 채우고, 자리가 부족해지는 사태가 발생하자 반성의 시간을 갖는다. '그리 욕심내지 않겠다 다짐했건만...'
책을 빌려보던 때의 도서관은 나에게 대학과 같은 곳이었고 책은 교수님 혹은 친구와 같은 존재였다. 그곳에만 가면 전 세계의 석학들과 유명 인사의 강의는 모두 들을 수 있었고, 때로는 막 사귄 친구의 속 깊은 이야기를 들을 수도 있었다. 그러다 보니 점점 그들과 더 깊은 대화를 나누고 싶어졌다.
책이 쌓여감에도 쉽게 처분할 수 없는 이유 중 또 하나는 책을 읽으며 눈에 들어오는 문장들을 어항 속의 헤엄치는 열대어를 뜰채로 건지듯 밑줄을 그어대는 습관 때문이다. 그런 문장들을 다시 풍선껌을 씹듯 입속에 넣고 씹어보고 굴려보고 숨을 넣어 불어보고 도로 내 속으로 쏘옥 넣는다. 그러고도 성에 차지 않으면 문장 옆에 샤프로 사각사각 떠오르는 생각들을 끄적거려 적는다. 그렇게 끄적거리다 보니 내 소유의 내가 읽은 책들은 누구에게도 함부로 보여줄 수 없는 일기장이 되어버렸다.
맙소사... 죽기 전에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생겼음을 깨닫는다. 두고두고 놀림감이 되지 않으려면 저 책들을 무슨 일이 있어도 다 불 싸지르고 죽어야 한다. 그러지 못한다면 혼령이 되어서라도 이 흔적들을 지우고 떠나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끄적거리는 것은 지금의 내가, 혹은 그때의 내가 아니면 생각할 수 없는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 덕에 나의 공간은 그 누구도 접근 불가한 구역이 되어버렸다. 나만의 요새. 나만의 동굴. 내가 잉태된 생애 초 자궁과 같은 곳. 이곳이 마음껏 끄적거린 자의 최초이자 최후의 결전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