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 중 청나라군에게 끌려간 누이를 찾아 나선 신궁 남이(박해일 분). 수많은 역경을 딛고 누이를 구해 조선 국경 근처로 온 그는 아무리 몸이 만신창이가 돼도 자신을 뒤쫓는 청나라 장군 쥬신타(류승룡 분)와 운명처럼 마주선다. 엎치락뒤치락 하는 끝에 쥬신타와 남이의 한가운데 누이가 서고 쥬신타는 육중한 화살 육량시(六兩矢)를 누이에게 겨눈다. 남이도 날카로운 쇠꼬챙이가 달린 화살 세전(細箭)을 드르륵 당기기 시작한다. 남이의 화살이 핑 하는 소리와 함께 시위에서 튕겨진다. 누이의 죽음도 불사한다는 말? 그런데 화살은 옆으로 휙 원을 그리며 휘더니 누이를 피해 쥬신타의 몸으로 향한다. 지난 8월 개봉돼 구름 관중을 불러 모은 영화 '최종 병기 활'의 내용이다.
|
|
|
▲ 국궁은 활과 내가 하나되는 집중과 몰아의 미학이다. 문수궁도장에서 김재은씨가 시위를 당기고 있다. |
#청동기시대이후 보편화 '슉'하는 소리와 함께 저 멀리 사라져버린 화살. 온 정신을 집중하지 않으면, 지금 목표물의 심장부를 관통하고 있는 그것을 볼 수가 없다. 시립문수궁도장(공원정)에 온 지 이틀째. 국궁의 매력을 몸소 느끼기 위해 왔다지만 감을 잡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활시위를 있는 힘껏 당기더라도 활대를 잡은 손과 함께 부들부들 떨리기가 일쑤. 활대를 쥔 엄지손가락 너머로 목표물을 조준한다고 하지만 여전히 가늠하는 방법을 모르겠다. 하루 이틀 만에 기술을 습득한다는 건 그야말로 당치도 않은 소리. 마음조차 평온하게 가라앉히지를 못했다.
국궁은 고도의 집중이 필요하다. 양궁과 달리 조준경 등의 별도 부착 장비가 없는지라 활과 시위가 아무리 내 몸의 일부가 되었다 하더라도 내 온 정신을 나에게 집중하지 못한다면 여지없이 목표물을 벗어난다. 그래서 '집중과 몰아(沒我)의 미학'이라고 말하는지 모르겠다. 내 존재를 잊는 경지에 이르기까지, 역설적으로 나에게 집중한다. 활은 마음으로 당겨야 한다는 말의 의미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거 같다. 활은 세계 공통의 수렵 도구이자 전쟁용 무기였다. 선사시대부터 사용한, 인간이 만들어낸 '걸작'이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청동기시대에 접어들면서 보편화됐다고 한다. 청동기시대 유적지에서 화살촉이 많이 출토되는 것이 그 증거. 중국은 우리를 두고 동이족(東夷族)이라 칭했는데 이는 '큰 활을 쓰는 민족'이라는 의미였다. 말에 올라탄 채 저기 도망가는 동물을 향해 시위를 당기는 고구려인의 모습을 담아낸 수렵도를 떠올리는 것도 괜찮은 방법. 그만큼 우리나라 활의 역사는 오래됐다.
쥬신타의 몸에 꽂히며 '최종병기'로서 역할을 한 영화와 달리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활은 무기로서 그 신뢰성에 금이 가버린다. 조총을 들고 쳐들어온 왜군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조 임금은 전쟁이 끝나자 활쏘기를 권장했다고 한다. 백성들의 나라를 지키는 마음과 체력을 키우기 위해 경복궁 안에 사정(射亭, 활을 쏘는 정자)을 만들어 개방을 했다고. 이후 전국 각지에 민간 사정이 세워지며 활쏘기 문화가 확산됐다고 한다. 그렇게 몇 세기라는 오랜 시간 동안 부침을 거듭해왔다. 그리고 지금 현재 국궁은, 생활체육의 하나로 주목받고 있다. #울산에도 시립문수궁도장 등 6곳 운영 주위를 둘러보니 10명 남짓한 중장년층의 사람들이 각자 무리를 지으며 활을 쏘고 있다. 사대(射臺, 활을 쏘는 자리)에 들어선 궁사들. 그리고 순서대로 한명씩 활을 쏜다. 이번에는 김재은(54) 씨 차례. 숨을 머금은 김 씨가 시위를 힘껏 당긴다. 저 멀리 과녁을 응시하는 눈빛이 매섭다. 몇 초가 지났을까. "슉" 하는 소리와 함께 목표물을 향해 날아가고 있는 활. 이윽고 화살이 과녁을 때렸다는 걸 알리는 신호음이 울린다. 김 씨가 웃음을 지어 보인다.
그의 오른쪽 볼을 보니 500원짜리 동전보다 큰 붉은색 자국이 있는데 하루아침에 생긴 자국이 아니다. 오랜 시간에 걸쳐 활시위가 얼굴을 스쳐지나간, 아니 할퀴고 지나간 것이 분명하다. "제가 궁도에 입문한 게 1996년도입니다. 저기 태화강변에 원악정이라고 있었는데, 강변을 지나다가 여러 어르신들이 흰 옷을 입고 활을 쏘는 모습을 본 거죠. 활을 쏘는 그 모습이 참 좋아보였습니다. 나도 한번 배워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김 씨는 그 길로 활쏘기를 하기 위해 어르신들을 찾아뵈었다. 그런데 이게 웬걸. 저 멀리 존재하는 그 무언가가 아니었다고 한다. "나중에 알았지만 울산에 여러 개의 궁도장이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전국적으로도 상당히 많을 뿐만 아니라 가입도 쉽고 매주 대회가 개최될 정도로 활성화되어 있는 상태였습니다." 그때부터 꾸준히 활쏘기를 해왔다는 그는 지금도 일주일에 4~5번씩 시간이 날 때마다 활을 쏘고 있다. "시위를 당기고 있는 상태에서 머릿속에 잡념이 들어온다면 절대 목표물에 관중할 수 없습니다. 오로지 과녁에만 집중을 하는 거죠. 가금씩 나 자신도 모르게 손에서 시위를 놓는데 그만큼 목표물에만 집중하는 것입니다. 관중이 되면 그 순간 느껴지는 희열과 쾌감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또 다른 궁사 임만택(65) 씨는 2년 전쯤 정년퇴임을 앞두고 지인에게서 국궁을 소개받았다. 1주일에 5번 정도 이곳에 온다는 그는 60세 이상인 사람들이 해볼 만한 운동이라고 추천한다. "궁도를 하기 위해서는 우선 바른 자세가 되어야 합니다. 또 활을 쏠 때는 하지에 힘을 주고 괄약근을 조이기 때문에 노인들이 허술하기 쉬운 그런 부분에 상당히 좋은 점이 많습니다. 다른 어떤 운동보다 격하지 않으면서 자기 페이스에 맞춰서 할 수 있으니 노년기에 접어든 사람들한테는 적당한 운동인 것이지요."
집에만 있는 게 아니라 사람들을 만나기 때문에 인간관계의 폭도 넓어진다고. "여기에 나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중장노년층입니다. 서로 대화하기가 편하고 관심사 또한 비슷하기 때문에 원활하게 소통합니다. 함께 식사하면서 술도 한잔 할 수 있고 그렇게 친목을 다지는 것이지요." #엄지손가락을 놓을까 갈등의 연속 사대에 들어서며 다시 한번 숨을 고른다. 어깨 넓이만큼 다리를 벌린 후 정(丁) 모양도 팔(八) 모양도 아닌 자세를 취함과 동시에 오른쪽 다리를 뒤로 내디딘다. 느끼기에 부담되지 않을 정도로 숨을 들이쉬면서 시위를 힘껏 당긴다. 몸은 흐트러지지 않았는가. 양 팔은 일직선으로 올곧게 펴졌는가. 몸통과 시위의 간격은 적당한가. 사대에 들어서기 전 배웠던 내용을 상기하며 끊임없이 자세를 점검한다. 오른쪽 얼굴면으로 느껴지는 시위와 화살. 이제 오른손 엄지손가락을 시위에서 떼면 된다. 뗄까 말까 갈등의 연속. 손에서 뗀 시위가 내 얼굴을 치기라도 한다면….
'슉!'하는 소리와 함께 목표했던 방향과는 다른 방향으로 날아가는 화살. 뿐만 아니라 오른쪽 턱부분이 얼얼한 것이 나도 모르게 고개를 뒤로 젖혔나보다. 시위를 당기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나 자신을 잊는 것이 우선이라는 생각이 든다. 역설적으로, 내 온 정신을 나에게 집중하지 못했기에 흐트러지지 않았나 싶다.
[국궁 어떻게 배울 수 있나?] 대한궁도협회 산하 국궁장은 전국 380여 곳, 회원 수는 3만 명을 넘어서고 있다. 울산에는 현재 6개의 국궁장이 있다. 이곳 시립문수궁도장(공원정)을 비롯, 고헌정·무룡정·백양정·원학정·청학정이 그것. 공원정(100여명)을 제외하고 평균 40~60여명의 회원이 있다고 한다. 20만원 정도의 입회비를 내고 회원으로 가입한 후 2만원의 월회비를 낸다면 그 누구나 국궁을 배울 수 있다. 하루 체험을 해볼 수도 있다. 이곳 공원정은 2,000원만 지불하면 모든 게 해결이 된다. 국궁을 배워보기로 마음을 먹었다면 장비를 마련해야 한다. 그 비용도 여타 스포츠와 비교해 비싸지 않은 편. 초보자가 사용하는 개량궁은 20만원쯤이면 장만할 수 있다. 화살은 한개 7,000원씩 10~15개 정도를 구매하면 된다. 이밖에 궁대(활을 싸두는 천), 깍지(손가락 보호대) 등도 필요하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장비를 갖췄다고 당장 활을 쏠 수 있는 건 아니다. 최소 2, 3주에서 길게는 두달 정도 자세와 호흡법을 익혀야 한다. 활시위를 당길 수 있을 만큼의 팔 근력을 키우는 것도 필수. 각 활터에는 교장이나 사범이 있어 처음 국궁에 입문하는 초보자들의 교육을 맡는다. 국궁에도 '단'이 있다. 초단부터 9단까지 있으며 5단 이상을 '명궁'이라고 부른다. 매년 세 차례 입·승단 심사가 이뤄진다. 하지만 화살을 잘 쏜다고 해서 누구나 '명궁'의 칭호를 가질 수 있는 건 아니다. 초단을 딴 지 5년 이상이 돼야 하고, 연령기준도 있어 40세 이상이 되어야 한다. 더구나 명궁의 칭호를 얻기 위해서는 개량궁이 아닌 각궁을 사용해야 한다. 각궁은 우리나라 전통 방식으로 만들어진 활. 탄성을 높이기 위해 대나무, 물소뼈, 소힘줄, 뽕나무, 참나무, 벚나무 등 6가지 동ㆍ식물성 재료를 민어부레풀로 접착해 만든다. 명주ㆍ무명실 대신 화학섬유로 만들어진 활줄을 거는 것만 빼면 1천년 전 활과 다름없는 것. 대신 각궁은 주인의 정성이 더해져야 제대로 된 궁합을 이룰 수 있다. 처음 만들어질 때부터 완벽한 활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맞게 깎고 다듬어야 완성되기 때문이다. 가격은 55만원 이상. 또 각궁에는 '죽시'라는 화살을 써야 하는데 대나무를 재료로 수작업으로 만들기 때문에 화살 하나의 가격이 2만 5,000원~3만원 선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