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군의 키
차은량
그날 비닐하우스에 세워두었던 참깨를 털어 차에 싣고 집으로 오면서 나는 벌써 신이 났다. 이번엔 내 손으로 마무리 하리라. 어머니처럼 능숙하게 키를 다뤄보리라. 키의 양 날개를 잡고 좌우로 흔들어 내용물을 정열한 후, 위아래로 나비질을 하여 타악 탁, 바람을 가르며 키를 내리치리라. 제 존재의 가벼움을 부정할 사이도 없이 쭉정이와 검불들은 바람을 타고 흩날리리라. 불순물을 털어낸 뽀얀 참깨를 자루에 담아 여름내 흘린 땀의 무게를 재어보리라.
애벌 털어낸 참깨를 자루에 담아놓고 자배기와 성근 체를 찾아다 체질을 끝냈을 때 절반의 성공이 주는 짜릿한 감동에 살짝 진저리가 쳐졌다. 키를 꺼내다 참깨를 한 됫박 퍼 담고 키질을 시작했다. 초가을 한낮의 불볕더위도 아랑곳없이 키의 양 날개가 바람을 일으키며 참깨와 쭉정이들이 분리됐다. 서당개 삼 년에 풍월을 읊는다더니 농가 며느리 이십 수년에 연습도 없이 키질이 되었다. 세월이 저 혼자 흐른 것은 아니었다. 바야흐로 어머니로부터 키질을 물려받을 때가 온 것이다.
막 신바람이 나기 시작했을 때 마실 가신 어머니가 돌아오셨다. 이리 내라, 하시는 어머니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내 손에 있던 키가 일체의 저항도 없이 어머니 손으로 건너갔다. 어머니의 노련한 키질에 참깨와 검불들은 기함을 하며 이편 저편으로 나뉘어졌다. 낙심천만이다. 참깨를 심고부터 베어 털기까지, 일만 죽도록 하고 올해도 참깨 농사 내가 지었다는 소리는 못 하게 생겼다.
며느리 들어오고 십 년 동안 어머니는 며느리에게 밭일을 시키지 않는 것을 긍지로 여기셨다. 나도 그런 어머니가 좋았다. 어머니의 긍지가 내게는 전혀 긍지가 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십 년이 지나면서였다. 농촌에선 집안일을 일로 치지 않는다. 작물을 심고 거둬들여 경제적인 소득을 올렸을 때 긍지와 함께 권력도 생기는 것이다. 땡볕 아래 밭일도 힘들지만 집안 살림을 해가며 들밥과 새참을 해 나르는 일도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그런 일의 공로로 긍지는 물론 쥐꼬리만 한 권력도 주어지지 않았다.
십 년이 지나자 아이들도 손에서 놓여나고 다소 한가해진 나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밭에 나가게 되었다. 끼니때가 되면 부리나케 달려와 식사준비를 해야 하는 허드레 일꾼이었다. 밭에선 어머니가 대장이다. 밭일을 진두지휘하시는 어머니는 대장군 같아 보였다. 가까이 살고있는 시이모님은 어머니의 충실한 부관이었다. 대장군보다 부관과의 거리가 더 멀게 느껴지는 것이 안타깝기는 했지만 부관은 내게 있어 말할 수 없이 고마운 존재였다. 부관은 대장군의 모진 시집살이를 당하기도 했지만 내 몫으로 주어졌을 온갖 허드렛일을 도맡아 주었으므로 나는 이래저래 두 분의 상관에게 충성을 다했다.
이제 연로하신 어머니와 이모님은 밭일에서 은퇴하시고 나는 드디어 본격적으로 밭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객토한 밭에 고추와 참깨, 땅콩을 심고 텃밭에는 푸성귀를 고루 심었다. 선무당이 심은 고추며 참깨며 땅콩들은 하나같이 빼어나게 예쁘고 튼실했다. 나는 드디어 대장군이 되어 내 손으로 심은 작물들을 내 손으로 거두어 쌈짓돈도 불리게 되었다.
밭일을 하다가 가뿐하게 자장면을 시켜먹기도 하고 밭에서 돌아와 딸아이가 차려주는 저녁상을 받기도 했다. 밭일을 한 날은 남편도 나를 달리 보았다. 더러 남편과 아이들에게 쌈짓돈을 털리는 일도 생기지만 그 또한 권력을 지닌 자의 권한이니 나쁘지 않다.
어제는 늦게 심은 참깨를 수확해 단으로 묶어 바깥마당에 세웠다. 멍석 위에는 백옥 같은 참깨가 수북했다. 쭉정이를 걷어낸 참깨를 자배기에 쏟아놓고 멍석을 접고 있는데 뒤에서 태산 같은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어느새 다가온 어머니가 키질을 하고 계셨다. 나는 전날 거둬두었던 고추나 널을 요량으로 집 안으로 들어갔다. 어이쿠 하는 소리와 함께 키질을 하시던 어머니가 비틀거리며 넘어진 것은 그때였다. 남편이 달려가 어머니를 일으켰고 나는 못 본 척 급하게 돌아섰다. 노쇠한 대장군에 대한 예의였다. 칼날 같은 통증이 가슴을 할퀴며 지나갔고 다리 힘도 없는 대장군께서는 멋쩍게 웃으며 다시 키질을 시작하셨다.
2009. 9 에세이스트 가을호
제 6회 충북여성문학상 수상작
첫댓글 저도 키질을 몇 번 해본 적이 있었는데 역시 마무리 단계에서 검불과 알곡을 분리하는 부분은
정교한 테크닉이 필요하며 가뿐하게 알곡만 자루에 담을 땐 대장군의 권위가 느껴지기도 하였습니다.^^.
끝내 대장군께 기술을 전수받지 못한 저는 지금도 키질을 못합니다. 참깨 들깨 수확해 아시 털어놓고는 선수를 부르지요. 앞집 사는 선수는 일찌감치 대장군에게 기술을 전수받은 이예요.
대단하십니다, 그 힘든 참깨 농사를~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