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 늪에 빠지다
김재희
짙은 안개로 시야가 좁다. 몇 걸음 앞서가는 사람의 뒷모습조차 아련해 보인다. 사면이 꽉 막힌 하얀 집 같다. 꼭 꿈속에서 뭔가를 찾으려고 헤매는 것 같은 몽롱한 분위기에 겁도 났다. 하얀 물귀신이 내 등을 덮칠 것 같고 옆구리로 산신령의 지팡이가 푹 들어 올 것만 같다. 그래서 앞사람을 놓치지 않으려는 내 발걸음이 잔망스럽게 저벅거린다. 그 소리마저 오싹한 느낌이 든다.
시간이 가고 고도가 높아질수록 바람이 불 때마다 안개에 젖은 나뭇잎에서 후드득 떨어지는 물방울이 몸을 적신다. 그렇게 떨어지는 물방울에도 온몸이 다 젖어버렸다. 우비도 별 의미가 없었다. 아래에서 보았을 때 산 중턱에 온통 하얀 구름이 걸쳐 있더니 몇 시간째 그 구름 속을 걷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참 야릇하기도 하고 묘하기도 하다. 처음엔 그저 꽉 막힌 듯한 분위기가 답답하고 두렵더니 어느새 익숙해졌다. 늘 그런 곳에서 살았던 것처럼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는 분위기에 휩쓸렸다. 눈에 보이는 것이 없으니 생각조차 단순해져 버려 아무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저 발밑으로 스쳐 지나가는 흙길에 눈을 두었을 뿐 앞뒤를 돌아다보아 지지 않는다,
점점 마음이 맑아져 갔다. 보이는 것 없이 하얀 안개만 보이니 세상의 온갖 잡생각들이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듯하다. 아니 구름이 그것들을 감추어 버린 것 같다. 어쩌면 새롭게 태어나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세상에 서 있는지도 모르겠다.
바로 코앞에 있는 나무 몇 구루 외에는 아득한 저편의 세상에 대해서 전혀 생각도 기억도 없을 터이니 지금부터는 내 나름대로 살고 싶은 삶을 구성해 봐도 되지 않을까. 팔 뻗어 휘저어 보면 뭔가 잡힐 것 같은 저 아늑한 세계에 가만히 손 넣어 꼭 잡고 싶은 것만 잡아서 내 앞으로 끄집어내고 싶다.
내 생애 끄집어내고 싶은 일들이 몇 개나 되는지 손가락을 헤어 본다. 몇 손가락 꼽고는 이것도 세어야 하나 싶은 대목에서 꼽아지지 않는다. 꼽지도 못하고 펴지도 못한 상태로 멍하니 저 깊은 안개 속만 바라본다. 딱히 기억할 일도, 추억될 만한 일도 없는 것이 길게도 손가락 끝에서 맴돈다. 이대로 저 안개 속에 영원히 묻어버릴까. 왈칵 목젖이 싸해 온다. 아직 의무를 다하지 못하는 떨켜의 미련이 못내 아쉽다. 새잎 자리 만들 여유를 주지 않는 이 미련은 언제까지일까.
문득 지인이 보내준 찔레꽃 그림이 생각난다. 뽀얀 꽃잎이 어두운 바탕에서 유난이 빛을 발했다. 꽃잎 안에 모인 햇볕이 그리도 환했던가. 찔레꽃잎은 햇볕을 소홀히 흘려버리지 않고 소중하게 품에 안아 제 빛으로 승화시켰다. 마음껏 보듬은 빛으로 발그레한 꽃술을 만들어 올려 품어나가게 했다. 그리도 오지게 햇볕을 품고 있는 찔레꽃이 왜 그리 부럽던지.
내게 오는 숱한 빛들을 무의미하게 흩날려 버린 것에 대한 회한이 깊다. 어쩌면 저 안개는 내가 놓쳐버린 빛의 잔영일지도 모른다. 세상을 보지 않으려 눈 감아 버렸던 날들의 잔영. 내 어찌 저 안개 탓을 할 것인가. 가만히 숨 다독이고 눈을 내려 뜰 수밖에 없다.
이제 내 시야에 들어오는 발끝만 보고 걸어야 한다. 이것마저 소홀히 했다가는 헛발을 디딜지도 모를 일이다. 잘 보이지 않는 길에서 길을 잃지 않는 일이란 발끝의 감각에 달렸다. 어쩌면 내 의지와는 다른 발걸음이 될 수도 있다. 아주 작은 한 걸음의 각도가 시간이 지나면 전혀 다른 쪽을 향해 갈 수도 있을 테니까.
안개의 늪에 빠져서 나침반의 안테나를 곧추세우고 있다. 방향을 찾는 동안은 중심 잡는 지남철 바늘 끝이 부르르 떤다. 떨림이 없으면 지남철이 아니라고 했던가. 어느 정점에 정착해버린다면 더 이상은 생동감이 없어질 것이다. 그러고 보면 완전하지 못한 삶에 대한 떨림이 있기에 아직 살아있음을 확인한다.
날머리에 도착해 뒤돌아본 산자락은 아직도 안개 속이다. 환한 곳에서 보는 안개는 그저 안개일 뿐이다. 그래도 삶에 대한 애착 하나 건져내온 듯하다.
첫댓글 '안개는 놓친 빛의 잔영 '이라는 말씀에 공감합니다.
공감하신다는 말씀에 왠지 마음이 울컥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