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을의 어떤 하루
먼발치서 다가오는 어스름 그즈음 만나는 것은 태어남과 사라짐을 되풀이하는 핏빛 노을 중심에서 헝클어진 머리칼같이 퍼지는 빛의 빛살. 허공에서 허우적대는 당황은 없이 주홍색 빛이 받쳐주고 있는 힘으로 높이를 유지하고 있는 아직은 잔잔한 하늘. 어두워지는 기다림을 기다리는 동안 잠시 엷은 그늘을 되찾은 잔가지 끝에서 가늘게 떨고 있는 바람은 그 짧은 일몰이 안겨주는 고요의 긴 시간을 안다.
다시 흐르는 시간이 되기 위하여 하루는 이처럼 사라질 수 있다. 시간은 사람의 땅 위에서만 흐르는 건 아니다. 구만리장천 어둠으로 들어가는 제자리걸음 같은 사라짐의 시작. 어둠의 극한은 깊은 우물처럼 암울하겠지만 노을이 사라진 뒤 빛의 부재에서도 저 하늘 멀리 어디 하나쯤 별은 가장 순결한 빛으로 반짝여 줄지도 모르지.
사라짐의 운명을 견디어 내려는 전율의 절정으로 먼 산마루 위로 붉게 물든 목숨을 서리서리 펼쳐놓은 노을. 마침내 마저 그리움을 두고 돌아서는 뒷모습처럼 투명한 옷자락 같은 햇살 한 줌마저 윤곽을 잃고 어스름한 바람에 나부낀다.
그늘진 슬픔을 가지고 있지 않더라도 빛과 어두움의 경계에 서서 노을을 바라보는 것은 쓸쓸한 일이다.
후회 없는 하루가 회한 없는 인생이 환멸 없는 세상이 어디 있을까.
한때는 힘차고 너른 날갯짓이었건만 하늘과 지상의 틈 사이를 날다가 재를 넘어가 사라진 한 마리 새처럼 거리에 바람이 불던 어떤 하루의 생애가 오늘의 마지막이 되리라고는.
천지에 홀로 외롭지 않은 이 어디 있으랴마는 젖는 눈으로 지켜본 노을빛에 채 다 못 준 간절한 그리움이 흐르고 어둠의 문을 열고 들어가던 노을의 마지막 풍경에 미세하게 묻어나던 마른 장작 타는 냄새. 시름처럼 잊히질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