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아직 추남에게는 보이지 않았지만 강운의 눈에는 똑똑히 보였다. 차마 보
고 싶지 않았지만 그런 바램과는 반대로 너무나 선명히 그 참혹한 모습이
눈앞에 똑똑히 보였다.
마을이 불타고 있다. 마을 사람들의 시체가 마을 곳곳에 널려 있었고 마
을 전체가 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온전한 시체를 찾아 볼 수 없을 정도
로 온몸이 처참하게 칼로 난자당한 체 널브러져 있는 시체들.. 태어나서
처음으로 보는 그런 참혹한 모습에 강운의 몸이 진저리를 쳤다.
마을이 얼마 안 남아서 어느 정도 안심을 하고 있던 추남은 등에 업혀
있던 강운이 갑자기 미약하게 떨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운아.. 조금 만 참아. 이제 이 고개만 넘으면 바로 마을이 나오니까
그 동안만 견디면 되는 거야. 알았지?"
추남은 더욱 속도를 내면서 고개를 넘어갔다. 가엾은 소년이 추워서
떨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강운은 추남을 말리고 싶었다. 그 끔찍한 모습을 보여주기 싫었다.
가지 말라고 제발 가지말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차마 입이 떨어 지지
않았고 고개를 거의 다 넘어갈 쯤에야 입을 열 수 있었다.
"혀.. 형! 잠시만.. 쉬었다가 가자. 잠시만.. 응? "
"운아 이제 이 고개만 넘어가면 바로 마을이 나온다니까. 조금 만 참아
알았지? "
실제로 마을이 얼마 안남아서였기도 했지만 추남도 어느 정도 느끼고 있
었다. 마을로 점점 가까이 갈수록 뭔가 불안한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뭐지 이 느낌은? 왜 이렇게 불안한 거야. 혹시 마을에 무슨 일이라도 생
긴 걸까? 아냐! 아냐! 그럴 리가 없어. 마을에 무슨 일이 생겼을 리가 없
잖아? '
고개를 좌우로 세차게 흔든 추남은 불끈 다리에 힘을 주고 아까 보다도
더 빠른 속도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이제 고개를 넘으면 마을이 보일 것이다. 그러면 모든 걱정과 불안이
해결될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던 추남의 눈에 서서히 마을의 모습이
들어왔다.
"허헉.. 마을이.. 마을이.... 어떻게.. 이럴 수가. "
고개를 넘자마자 보이는 마을의 모습에 추남은 그만 주저앉고 말았다.
멍한 표정으로 마을을 바라보고 있는 추남을 보면서 강운은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한참 동안 멍한 눈빛으로 마을을 바라보던 추남은 갑자기 불타는 마을을
향해서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며 뛰어갔다.
"어머니! 어머니! 어디 계세요? 괜찮으신거죠? 빨리 대답하란 말예요.
추남이가 돌아왔단 말이에요. 어디 계세요? 제발.. 제발.. "
"형아. 위험해! 잠깐만 기다려봐. 가지말라니까! 제기 안 되겠다. "
미친 듯이 울부짖으며 달려가고 있는 추남의 귀에 운의 목소리가 들릴 리
가 없었다.
추남이 말을 듣지 않고 곧 바로 뛰어가 버리자 강운은 할 수 없이 바람을
이용해서 불을 끄기 시작했다. 온 산을 불태울 듯하던 불길이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그렇게 강한 바람도 아니었지만 그 바람속에는 불을 소멸
시키고 싶어 하는 강운의 의지가 담겨 있었기 때문에 순식간에 사그라
들었던 것이다.
미친 듯이 마을로 뛰어가던 추남도 순식간에 불이 사그라 들자 잠시 멈칫
했지만 곧 바로 마을을 향해 뛰어갔다.
마을에 도착한 추남의 눈에 비치는 모습은 밖에서 보던 모습보다 더욱 참
혹했다. 밖에서는 불타는 마을의 모습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안에 들어와
보니 그 참상이란 그 동안 서로 의지하며 가까이 지내던 마을 사람들이
온몸이 칼로 난자당체 곳곳에 널브러져 있는 꿈에서도 보고 싶지 않은
끔찍한 모습이었다.
집으로 향하는 길가에는 아예 형체조차 제대로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심하게 몸이 잘리고 찢겨서 조각조각 난 살점들이 널려있어서 도저히
맨 정신으로는 그 곳을 지나가지 못할 지경이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호수도 얼마 되지 않는
이런 작은 산골 촌에 무슨 원한이 있는 사람이 있다고 이렇 듯
잔인무도한 짓을 저지를 수 있단 말인가... 서.. 설마.. 어머님도?
그.. 그럴 리가 없다. 절대 그럴 수는 없어.. '
붉게 충혈된 눈으로 추남은 미친듯이 집을 향해 뛰어갔다. 발끝에 차이는
기분 나쁘게 끈적끈적하고 찝찝한 내용물들도 상관하지 않고 곧 바로
집을 향해 뛰어 가면서 소리쳐 외쳤다.
"어머니! 추남이가 돌아왔습니다. 어머니! 어디 계세요? 예? 제발 대답좀
해주세요.. 어머니 제발.. 도대체 어디 계신 거예요..? "
집에 도착한 추남은 거칠 것이 없이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방안에는 그렇
게 애타게 찾던 어머님이 조용히 드러누워 계셨다.
추남의 눈에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다시는 못 볼 줄 알았던 어머님이 무
사히 살아계셨기 때문이다.
조심스레 어머니 곁으로 다가간 추남은 조용히 어머님을 불러보았다.
"어머니..이렇게 무사하셔서 정말 다행이에요. 이렇게 무사하셔서..
정말.. 저는 다시는 못 볼 줄 알고.. 어머니! 어머니! 저 왔다니까요.
눈 좀 떠 보세요. 왜 그러세요? 어머니?... 어머니... 왜 그렇게 꼼짝
앉고 누워만 계시는 거예요? 몸이 왜 이렇게 차가워요? 네? 어머니!..
어머니.. 흑흑.. 제발 말씀좀 해보세요.. 추남이가 돌아왔어요..
왜 그렇게.. 흑흑.. "
평소에도 추남의 어머니는 안색이 창백하긴 했지만 지금은 얼굴에
핏기가 전혀 보이질 않았다.
그렇게 아니길 바랐었건만 어머니는 벌써 싸늘한 주검으로 변해 누워 계
셨던 것이다. 추남은 이미 모든 걸 다 알고 있었지만 믿고 싶지 않았다.
아니, 인정할 수 없었다. 어머니의 어깨를 붙잡고 흔들며 제발 눈을 뜨라
고 악을 쓰던 추남은 더 이상 악을 쓸 힘도 남아있지 않았던지 바닥에 엎
드려 어머님을 부둥켜 앉고 대성통곡을 했다.
"으헉.. 헉.. 어머님.. 흑흑.. 제가 잘못 했습니다. 제가 정말 죽일 놈입니
다. 오늘 사냥하러 나가지만 않았어도 어머니를 이렇게 보내드리지는 않
았을 텐데... 어머니.. 어머니~ 으아아악~~~~~~~~~~~"
악에 바친 고함을 질러대면서 더욱 더 슬프게 대성통곡하는 추남을 뒤에
서 아무 말 없이 지켜보고 있던 강운도 같이 눈물을 흘렸다.
추남의 처지가 어쩌면 자신과 너무도 비슷했고 어렸을 적 어머니가 눈을
감으셨을 때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랬다.. 강운도 그때 분명 지금의 추남과 같이 어머니를 부둥켜안고
오열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능력으로 어떻게든 추남의 어머니를
살려 드리고 싶었지만 사부가 준 단환과 자신의 능력이라면 죽음의
문턱에서 한 발 내놓은 사람이라도 살려낼 자신이 있었지만 이미 추남의
어머니는 죽음의 문턱을 지나 너무도 많이 걸어간 상태였기 때문에 자신의
능력으로도 어떻게 해볼 방법이 없어 보였다.
지금은 강운이 추남을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냥 말
없이 뒤에서 조용히 지켜보고 있으면 그뿐이다. 시간이 많이 걸리겠지만
스스로 인정하고 극복하는 수밖에는 방법이 없을 것이다.
세상 모든 것을 잃어버린 슬픔에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에 있는 추남을
뒤로 하고 강운은 마을을 돌아다니며 마을사람들의 시신을 수습하고
그들을 살아있을 때의 모습으로 원상복구 시켰다.
비록 죽은 사람은 살려내지 못한다 하더라도 이런 끔찍한 모습으로
묻어버리면 죽어서도 원혼이 되어 떠돌것 같았기 때문에 살아 있었을
당시의 모습으로 복구시켜 그들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온 신경을 집중
해서 그들의 모습을 복구시키는데 성공했다.
불을 끌 때 그랬듯이 이들을 복구시키는 것도 그렇게 힘든 작업은 아니
었다. 강운 자신은 그들의 원래 모습을 모른다 하더라도 땅과 바람 등의
자연은 모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들을 본 모습으로 복구시키고자
하는 강운의 의지만 있으면 바로 복구가 되는 것이다.
처음에는 커다란 구덩이를 파서 한곳에 전부 다 묻어버릴까 생각했지만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아서 각각 따로 따로 묻어주기로 했다.
시신을 각각 따로 묻어 주기로 결정한 강운은 즉시 모든 시신을 하늘로
띄운 뒤에 천천히 그들의 시신을 아래로 내렸다.
시신이 서서히 내려오기 시작하자 각각의 크기에 맞게 깊이가 일정한
구덩이가 파였고 그곳으로 시신을 내려서 묻어 주었다.
시신을 묻어준 강운은 다시 추남의 집으로 돌아왔다. 좀 전까지만 해도
반쯤 미쳐버린것 같던 추남은 조금씩 정신을 차리고 있는 것 같았다.
"형... "
"아.. 운이 왔구나.. 내가 잠시 운이를 잊고 있었네.. 미안해. 갑자기 달려
가서 놀랐지? "
좀 전까지만 해도 흐리멍텅한 표정으로 초점이 풀린 상태로 멍하게 앉아
있던 추남은 어느새 정신을 차리고 이제는 운이를 걱정해 주기까지 했다.
"형.. 괜찮아요? "
"운아.. 그럼.. 괜찮지.. 괜찮고말고. "
정신은 돌아왔다고 쳐도 표정은 괜찮아 보이지 않았다. 아직도 슬픔이
가득한 눈에서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형.. 울고 싶을 때는 마음 껏 울어.. 참지 말고.."
"자식.. 울긴 누가 울어.. "
말을 채 끝맺지도 못하고 추남은 끝내 참았던 눈물을 참지 못하고 주르륵
흘리고 말았다.
강운은 말없이 조용히 다가가서 자신보다도 훨씬 더 큰 추남을 가만히
토닥거려주었다. 그 언젠가 운의 어머니가 운에게 했던 것처럼..
더 이상 복받치는 슬픔을 참지 못한 추남은 강운을 부여잡고 소리죽여
흐느껴 울었다.
강운이 깜빡 잠이 들었다가 깨어나 보니 추남이 없었다. 추남과 어머니의
시신도 같이 없어진 걸 알아차린 강운은 곧장 밖으로 나갔다.
밖으로 나와보니 추남은 마을사람들의 무덤 옆에 어머니를 조심스레 묻고
있었다. 강운은 말없이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정성을 다해 어머니를 묻고 돌아오는 추남을 보며 운은 가볍게 웃어보여
주었다. 그는 스스로 모든 걸 극복한 것이었다.
"운아.. 저기 마을사람들 무덤을 네가 다 만든 거니? "
"응. "
"운이 네가 나보다 훨씬 낫구나.. 혼자서 힘들었을 텐데.. 내가 조금만 정
신을 일찍 차렸어야 했는데.. 운이 너한테 미안하구나.. "
"아니야. 별로 힘들지는 않았어. 나 이래봬도 힘이 무척 세다고. "
"그래.. 아무튼 고맙구나. 내가 해야 될 일이었는데.. "
"고맙기는.. 근데 이제 앞으로 어떻게 할 거야? "
씁쓸한 웃음을 짓고 있던 추남은 한 동안 생각을 정리하는 듯 하더니 조
용히 대답했다.
"잡아야지.. 범인을 잡아서 반드시 복수해야지.. 반드시.. "
반드시라는 마지막말을 하면서 추남을 이를 부드득 갈았다.
조용히 추남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강운도 씁쓸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강운은 지금 바로 범인들이 누군지 알아낼 수 있었지만 그렇게 되면 추남
이 다칠 것 같아서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언젠가 사부가 말해 준적이 있었다. 강호라는 곳은 온통 원한과 복수가
가득한 세상이고 항상 서로 죽고 죽이기가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고..
강운은 추남이 그런 세상에 발을 들여놓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 추남은 강운과 함께 짐을 꾸려서 마을을 떠났다.
마을을 떠나면서 추남은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마을사람들과 어머니의
원수를 반드시 갚아줄 것이라고.
'내가 비록 지금은 범인이 누군지도 모르고 설사 안다고 해도 복수할 힘
도 없지만 언제고 힘을 길러서 반드시 복수할 것이다. 반드시.. '
다짐에 또 다짐을 하며 강운과 함께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기는
추남이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