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래전에 네 아버지하고 여기 온 적이 있었다고 이순일이 말했다. 버스를 타고, 그때는 제대로 포장되어 있지 않아서, 차창 밖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흙먼지가 이는 길을 몇시간이고 왔다고, 지금처럼 여기로 편하게 오는 길도 없어서 능선을 타고 이리저리 돌아서 마침내 묘에 다다랐는데, 절할 때 보니 네 아버지가 저만큼 떨어져서 뒷짐을 진 채 굳이 돌아서 있더라, 그래 어처구니가 없어서, 거기서 뭘 하느냐고 이리 와서 절 올리라고 말했더니 처가 쪽 산소엔 벌초도 하지 않는 법이라고 잡소리를 하기에 너무 당혹스럽고 열받아 그걸 말이라고 하느냐고, 얼른 절 올리라고 역정을 냈는데 그걸 듣고도 뒷짐 지고 서 있더라며 그뒤로 야속하고 징그러워 같이 오자고 하지 않았다고, 네 아버지와 동행한 것은 그것 딱 한번으로 그쳤다고 이순일은 말했다. - 파묘, 27쪽 -
# 참으로 징글맞은 고정관념이다.
- 무슨 차이가 있는지 한영진 자신도 실은 잘 알 수가 없었는데, 대체 비결이 뭐냐는 질문을 받으면 한영진은 내가 엄마 마음을 잘 아는 딸이었다고 대답했다. 장녀거든 내가. 없는 집 기둥이라서, 엄마랑 각별했다. - 하고 싶은 말, 49쪽 -
# 각별함 속에 담긴 희노애락이 서글프다. 나도 장녀거든.
- 내가 불쾌감을 느낄 정도로 불신한 건 그 외국인이나 그의 말이 아니라 나였어..... 네가 그 정도로 매력있을 리가 없잖아. 그게 김원상의 생각인 것 같았고 한영진 자신의 생각이기도 한 것 같았다. 더러운 거짓말. - 하고 싶은 말, 53쪽 -
- 한세진은 언니가 그렇게 해도 별말을 하지 않았다. 남은 걸 신었고, 자기 걸 건드리지 말라고 나중에 화를 내지도 않았다. 그래도 무언가를 느끼기는 했을 것이다. 어떤 감정을. 한영진은 최근에 그걸 생각할 때가 있었고 그러면 얼굴이 빨개지곤 했다. 어린 동생에게 잘못을 했다고 느꼈다. 손써볼 수 없는 먼 과거에 그 동생을 두고 온 것 같았다. 이제 어른이 된 한세진에게 사과한다고 해도 그 시절 그 아이에겐 닿을 수가 없을 것 같았고. - 하고 싶은 말, 63쪽 -
# 어린 내가 더 어린 동생들을 돌봤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린 나는 모르는 게 많았다. 내게 왜 그런 역할을 맡겼을까, 삶은.
- 모든 게 끔찍했는데 그중에 아기가, 품에 안은 아기가 가장 끔찍했다. 그 맹목성, 연약함, 끈질김 같은 것들이. 내 삶을 독차지하려고 나타나 당장 다 내놓으라고 요구하는 타인. - 하고 싶은 말, 73쪽 -
# 모성은 당연하지 않다.
- 그런데 엄마, 한만수에게는 왜 그렇게 하지 않아. - 하고 싶은 말, 81쪽 -
- 왜 나를 당신의 밥상 앞에 붙들어두었는가. - 하고 싶은 말, 83쪽 -
- 아이들은 어릴 때만큼 자주 다투지는 않았지만 훨씬 신랄하고 내밀한 것을 두고 다투었다. 그게 무엇이든 이순일은 가책을 느꼈다. 그게 무엇이든, 자기 손으로 건넨 것이 그 아이들의 손으로 넘어가 쪼개졌고 그 파편을 쥐고 있느라 아이들이 피를 흘리는 거라고 이순일은 생각했다. - 무명, 109쪽 -
- 얕은 그릇에 담긴 채 양달에 놓인 물처럼 시간이 증발해버렸다. - 무명, 119쪽 -
- 노먼은 그 말을 한 사람들을 용서할 수가 없어서 그들이 사용하는 말 자체를 용서하지 않기로 한 거야. 안나를 고립시키고 무시하고 경멸한 그들과, 그들의 언어를. 하지만 나는 그것이 아주 강한 동조였다고 생각해. 안나를 양갈보라고 부른 그 사람들과 말이야. 그는 안나의 언어를, 자기 모어를 경멸 속에 내버려둔 거야. - 다가오는 것들, 177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