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강공파 나산종중과 삼현사(三賢祀)
- 배우고 가르치고 이어받아야 할 선비정신 -
평생교육사 · 박사 김도영
직강공파 평택종중, 직강공파종회이사
1. 연안김씨 집성촌을 찾아서
늘 한번 가보고 싶던 곳이 담양 직강공파 나산종중의 집성촌이었다. 나와 같은 직강공파이기도 하지만 많은 인재를 배출했고 서원인 삼현사가 있던 곳이기 때문이었다. 기회는 우연히 찾아왔다. 마침 2024년 6월 1일 담양군에 소재한 전남도립대학교에서 개최된 (사)한국관광연구학회 주최 ‘로컬관광에 대한 새로운 시각 천년담양 문화관광도시’ 국제학술세미나에 토론자로 초청되었기 때문이다.
담양 10 정자 중에서 손꼽히는 정자가 전라남도 담양군 수북면 나산리에 아름다운 연꽃정원과 함께 서 있는 ‘관어정(觀魚亭)’이다. 관어정을 지나 마을에 들어서면 ‘연안김씨 처사 인개공 정착지지(延安金氏處士仁漑公定着之址)’라고 새겨진 표지석이 자리하고 있다. 이곳이 바로 연안김씨 직강공파 나산종중의 집성촌임을 알 수 있다.
마을은 넓은 평야에 자리하고 있으면서도 뒤쪽에 조그만 동산이 있어 아늑하고 포근하였다. 이 마을에 사시는 종곤(鍾棍) 이사님과 나산종중 종춘(鍾春) 종회장의 정겨운 영접과 자세한 안내로 마을과 유적을 두루 둘러보았다.
이곳은 입향조인 처사(處士) 인개(仁漑)공(직강공파 파조 승(昇)공의 5대손)이 임진왜란을 당하여 외가인 전라도 영광으로 피난하였다가 다시 옮겨 터잡아 사신 곳이며, 그 후손들이 대대로 세거하며 많은 인재를 배출하고 호남의 명문가로 자리 잡아 번창했던 곳이다.
그러나 집성촌이었던 마을도 산업사회의 여파로 한집 두집 떠나가 이제 몇 집 남지 않은 지금은 가정재(柯亭齋)가 종사의 중심이 되고 있으며, 청년회와 부녀회를 조직하여 종사와 가정재 관리 보존에 힘쓰고 있다고 한다.
가정재는 입향조 처사 인개공의 묘소가 있는 담양군 월산면 용흥리에 종친들의 헌성금으로 1996년에 건립한 재실이다. 이 재실에서 선조들의 큰 업적과 감사를 기리기 위하여 매년 가을 11월 둘째 일요일에 시제를 지내고 있다 <사진1>. ‘숭조(崇祖) 돈목(敦睦) 계후(啓後)’의 뜻깊고 숭고한 연안김씨 종훈(宗訓)을 몸소 실천하고 있음에 직강공파 후손의 한 사람으로 크게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이번 방문으로 나산종중은 조선조에서 많은 인재를 길러냈으며, 사립교육기관인 서원을 건립하는 등 교육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실천한 가문임을 확인하였다. 이에 나산종중의 교육적 자취를 더듬어 보고 아울러 교육의 중요성을 살펴보고자 한다.
2. 교육 존중의 가치관을 실현한 가문
1) 많은 인재를 길러내다.
나산리 입향조인 처사 인개(仁漑)공의 송덕시에 기록된 글에 기초하면 “직강공파조(直講公派祖) 승(昇)공의 5대손인 처사 인개(仁漑)공께서 이 마을에 정착하여 조선 인조 24년에 선종하셨으며, 천하의 영재들과 후손들을 가르쳤다.”고 기록되어 있다.
나산종중은 대대로 그 유지를 받들어 후손들의 교육에 힘써왔다. 그 결과 인개(仁漑)공의 혈손이 조선조에서 문과에 16명, 무과에 3명 등 모두 19명이 과거에 급제하였다<사진2>. 그중 문과 12명을 배출한 나산종중 재동문중은 대대로 서울 북촌(종로구 재동)에 세거하면서 많은 분 들이 사헌부대사헌(조선시대 종2품 벼슬로 오늘의 검찰총장에 해당하는 직책) 등 내외 관직에 나아가 조선 후기의 명문가를 이루었다.
그 후손들이 옛 영화를 잊지 않고 오늘을 슬기롭게 살아가면서 대한민국의 발전과 연안김씨 종훈 구현에 헌신하고 있으니, 수영(壽泳) 직강공파종회장이 그중의 한 사람이다.
‘교육 존중’의 가치관은 연안김씨와 함께 한국 문화의 기풍이며, 오늘날 대한민국의 급속한 발전을 이룬 원동력이었다고 사료한다. 우리 선조들은 교육을 중시하며, 후손들의 교육을 위해서는 어떠한 희생과 노력도 아끼지 않는 문화를 조성했다. 이에 국민 전체의 문맹률이 거의 영(제로)이며 단군 이래 가장 태평성대를 누리고 있고, 세계인들에게 한국 문화의 우수성과 그 역량을 떨쳐 보이고 있음은 ‘한강의 기적’이 아니라 ‘교육 신드롬’에 있다고 생각한다. IMF(국제통화기금)는 대한민국이 국민 1인당 소득(구매력 고려평가)이 $46,250으로, 처음으로 일본을 추월한 것으로 보고하고 있다. 이 시대에 ‘교육 존중’은 후손들이 자랑으로 본받고 이어 가야 할 가문의 소중한 큰 유증이며 문화유산이라고 판단한다.
실용주의자 존 듀이(John Dewey,1859~1952)는 ‘교육은 사회 발전과 개혁의 근본적인 방법’이라고 주장한다. ‘조선 왕조가 500년 존속한 것은 법치국가였으며, 유교 본연의 덕치(德治) 실현의 이념이 있었기 때문이다(윌리엄 로빈슨 쇼, 1989)’라고 논(論)한다. 조선 전기 경국대전부터 고종시대 대전통편까지의 법전 발달이 오늘의 한국의 급속한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다(이태진, 2024.07.06. 중앙일보)고 평가하고 있다.
한편, 19세기 말엽, 한국의 진취적인 애국자들은 외세에 대응하기 위해 국민의 개화를 외쳤으며, 서구 문명을 바탕으로 하는 근대화를 추진하였다. 민간이 제일 먼저 시작하였고, 미국 기독교 선교사들이 학교를 세웠으며, 국왕과 왕비의 후원도 받았다. 원산학사(1883년, 민간이 자발적으로 기금을 모아 설립한 최초의 중등학교), 배재학당(1885년, 미국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가 설립한 중등 교육기관,), 신흥무관학교(1911년,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 이시영 등이 설립한 독립군 양성학교, 1947년 신흥전문학원, 1960년, 경희대학교로 교명 변경), 이화학당(1886년, 감리교 선교사 스크랜튼이 설립한 한국 최초 여성 교육기관), 진명여학교(한국인 설립 최초 여학교), 경신학교(1886년, 언더우드 선교사가 설립한 고아원 형식의 학교, 연세대학교 전신)가 그것이다.
PISA(국제학업 성취도 평가,2022)와 OECD보고(2023)에 의하면, 우리나라는 OECD 국가중 수학 1~2위, 읽기 1~7위, 과학 2~5위로 높은 성취를 보이고 있다. 특히 읽기와 과학에서 여학생의 점수가 높았으며, 수학에서는 남학생의 점수가 높은 결과를 나타내고 있다. 25~34세 한국인의 교육 성취도는 OECD국가중 최고 수준이며, 여성이 더 높은 교육 수준(이는 현재 각국의 추세)을 보이고 있다. 또한 영국의 싱크탱크 연구소(Legatum Institute, 2024)는 세계 167개국의 비교 평가를 보고하고 있는바, 대한민국의 교육 수준은 세계 3위이고, 보건의료서비스 분야도 3위에 위치하고 있다고 분석한다. ‘압축성장’이라고 하며, 세계가 놀라는 대한민국의 발전은 자유 민주주의의 도입과 아울러 헌법에 명시된 ‘모든 국민은 균등하게 교육받을 권리가 있다‘는 교육 비전과 정책의 도입 없이는 불가능했다고 판단한다.
2) 사립교육기관인 서원(書院)을 세우다
삼현사(三賢祠)는 나산종중의 집성촌인 담양군 수북면 나산리에 있던 서원(書院)으로 연안김씨 6세 나복산인(蘿蔔山人) 김도(金濤, ?~1378)와 그 두 아들 문정공 김자지(金自知), 문익공 김여지(金汝知)의 학식과 절의를 추모하며 후학들을 교육하기 위하여 호남의 유림들이 1827년(순조 27년)에 세웠다. 그 위치는 나산종중의 자제들을 교육하던 사재(思齋)라는 서재가 있던 곳이니, 삼현사는 그 배향 인물과 장소로 미루어 보면 나산종중이 중심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후 186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서원은 훼철되고 빈터만 남게 되었는데 후손들이 1906년 빈터에 유허비(遺墟碑)를 세우고<사진3>, 1915년에는 선현들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담아 모현재(慕賢齋)라는 이름의 서재(書齋)를 다시 세웠다. 유허비는 자헌대부 의정부찬정 사준(思濬, 내자시윤공파 대자리종중, 의친왕비 김숙의 부)공이 비문을 썼으며, 모현재는 낡고 허물어져 2011년 6월 중건하여 후손들에게 옛 영화를 잊지 않고 오늘을 슬기로 살아가게 하는 교육의 장으로 삼고 있다<사진4>.
한국의 공식 교육의 역사는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년)에 설립된 태학(고구려의 최고 교육기관)으로부터 비롯되어 1,650년의 오랜 전통을 자랑한다(Kim-Renaud, 20011246~49). 신라에는 국학(682년), 고려에는 국자감(992년), 조선시대에는 성균관(1392년)이 국립대학교로 최고의 교육기관이었다. 국립 지역 사회 교육기관으로는 향교가 있었고, 사설 교육기관으로 서당이 있었다.
오늘날의 지방 사립대라고 볼 수 있는 서원(약 900여개)은 16세기 중반에서 19세기 하반까지 있던 제도로 서원은 성균관, 향교와 함께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교육기관 중 하나였다. 정치적 혼란으로 말미암아 명망 있는 지역 학자들과 중소 지주층들이 농업 경제력 향상에 기초하여 지방에 은거하면서 후학을 양성하게 된 것이 서원이다. 사림(士林)은 서당의 기능까지 통합하여 성장하였으며, 교육목표로 학문의 진정한 의미라고 할 수 있는 ‘인생과 우주의 본질을 추구하고 자신을 도덕적으로 완성 시키는 것’이었다.
서원은 사학이라는 특성상 대부분 문중에 의해 건립되었으므로, 그 문중에서 뛰어난 인물과 직간접적으로 관련되어 있었다. 지방의 인재들이 모이는 집학소(集學所)였으며, 도서관의 기능과 책의 출판 기능(장판고 또는 장판각)도 담당했다. 따라서 서원은 그 지역의 여론(소통)을 이끌어 갔으며, 효자나 열녀 등을 표창하고 윤리에 어긋나는 행동을 한 사람들을 성토하는 등 지역의 풍속을 순화하기 위해 다양한 활동을 하였다. 이 같은 순기능과 함께 17세기 이후에는 세금을 내지 않는 면책특권 등 국가 재정의 악화와 더불어 붕당의 온상, 인문학 교육 치중, 여성 교육의 배제 등의 한계점도 있었다.
3. 맺는말
‘천년담양 문화관광 도시’로 발전하고 있는 담양에서 처사 인개공께서 조선의 미래를 위해 꿈꾸며 실행하였던 숭고한 목적과 활동은 소민 교육을 통한 애국심, 후손에 대한 교화 활동, 능력 있는 엘리트 인재 양성, 자유를 누리는 역량을 지닌 시민 교육, 소통 문화 배양 장소 등이 가장 큰 동기였을 것으로 사료한다.
교육공학 전공· 평생교육사로서 성찰해 보면, 고학력이 물질적 보수가 있어서, 모두 교육열을 보인다는 증거는 없다. 고학력자가 실직자가 많은 경황이 일어나도 고학력은 계속 소망의 대상이 된 것은 교육 자체에 대한 가치관이 변함이 없다는 증거다(Adams, 1981). 가르침에 따라, 일생을 배우며 모든 국민을 후학으로 여기고 계급이나 성차별 없이 가르치는 일을 사명으로 알고 노력했다. 근본적으로 민주주의와 실용주의를 겸하여 나라의 발전을 돕고 자유를 누리는 국민을 배출하는 것이 지속되는 교육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 사회는 그 어느 때보다도 공정한 경쟁과 개방성, 합리성에 의한 다양한 분야(산업·경제·언론·정치·문화·체육·교육 등)의 지식을 갖춘 인재(엘리트)를 필요로 하고 있다. 한 단계 더 도약하고 발전해야 할 대한민국의 지속 가능한 번영을 위하여 전통적 마을공동체 질서가 필요하고, 좋은 스승들이 요구되는 시기이다. 이에 연안김씨와 직강공파 후손들은 처사 인개공의 숭고하고 위대한 교육의 열정과 높은 뜻을 깊이 생각하며, 선비정신에 대한 바른 성찰을 통하여 배움과 가르침을 새롭게 하고 높이 받들어야 할 것으로 사료한다.
2024.08.15.
직강공파 평택종중 도영(道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