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에서 서로상(相)과 생각상(想)은 전혀 다른 개념이다. 중국에서 잘못 번역해서 산냐(sañña)를 상(相)이라고도 하고, 상(想)이라고도 번역해서 혼선을 빚고 있다.
즉, 빠일리어 산냐(sañña)라는 단어가 상(相)과 상(想) 두 가지로 번역돼 이해하는데 혼선이 있다.
이러한 현상이 일어난 것은, 중국에서 당초 <금강경>을 한역함에 있어서 빠알리어 산냐(sañña)를 구마라습(鳩摩羅什)은 ‘상(相)’으로 번역했고, 현장(玄奘)은 ‘상(想)’으로 번역했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相’과 ‘想’이라는 두 글자가 모두 산냐의 번역에 사용되면서 혼선을 빚게 됐다. 그러나 같은 산냐(sañña)의 번역어이면서 ‘相’과 ‘想’을 구분해서 용처를 달리하므로 주의를 요한다.
* 상(相)으로 번역되는 경우
구마라습의 번역어 ‘상(相)’이란 말이 불교에서는 상당히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다. 불경에는 ‘상에 얽매이다’, ‘상에 집착하다’, ‘상을 여의다’, ‘상에 머물다’ 등의 용어에 쓰인다.
그리고 구마라습 한역의 <금강경>에서 집중적으로 등장한다. 그래서 “보살이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을 가지고 있으면 보살이 아니다[若菩薩 有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 卽非菩薩]”라고 했다. 이와 같이 보살(수행자)이 산냐를 가지고 있으면 보살이 아니라고 할 때, 이때의 산냐[相]의 개념은 제거 대상으로서의 부정적 측면이 강하다.
자신과의 이념이나사상이 같으면 기분이 좋고, 나쁘면 불쾌하고, 심하면 분노가 일어난다. 이 마음(마음부수)이 바로 산냐(sañña)이다. 이때는 상(相)이라는 글자로 표현한다. 이럴 때 산냐는 실체적 관념인 아상(我相, ātma saṃjñā)에 해당하며, 이러한 산냐는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돼 모두 척파해야 할 대상으로 강조되고 있다.
* <금강경> 해설의 최고 권위자인 육조 혜능(慧能)대사는 범부와 수행인을 구분해서, “사상(四相)이 있으면 중생이요, 사상이 없으면 부처”라고 했다. 이 말은 ‘마음이 미(迷)하면 중생이요, 마음에 미혹을 끊고 깨달으면 곧 부처’라고 하는 말과 같다. 즉, 수행이 안 된 중생은 사상(四相)을 실재한다고 믿으므로 이에 따라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한다. 그래서 <금강경> 전체가 온통 산냐[상(相)]의 척파를 부르짖고 있다. 사상(四相)이 있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으면 무아(無我)에 접근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 불교에 있어서 ‘성(性)’이란 불변의 본체를 말하는데 비해, ‘상(相)’이란 변화하고 차별로 나타난 현상계의 모습을 말한다. 심리적인 측면에서는 일종의 ‘고정관념(觀念)’이라 할 수 있는데, 불교에서는 이 고정관념이 갖가지 왜곡 갈등과 번뇌를 일으키는 원인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이 무의식 속의 고정관념을 내려놓는 순간 불성(佛性)을 바로 볼 수 있다고 해서 <금강경>에는 모든 상(相)이 상 아님을 알면 여래를 보리라고 했다[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헌데 이러한 고정관념이 수백 가지 수만 가지가 있지만, <금강경>에서는 우리 중생들을 윤회에 들게 해서 그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가장 근본적인 것으로 4상(四相)을 들어서 이것을 끊을 것을 강조한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고정관념이라는 색안경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우리가 살아온 오랜 경험과 지식을 통해 우리 내부에 상대적 ‘비교기준’이라는 것을 만들어 놓고 있다.
그리하여 업식(業識) 또는 무의식 속에 내재된 고정관념이라는 기준점과 비교해서 생각을 일으키게 되는데, 이런 생각은 매우 주관적이고 상대적이다. 기준에 따라 답이 전혀 달라지기 때문이다. 붓다는 이런 고정관념이 실체를 인식하는데 장애를 가져온다고 가르쳤다. 그리고 이것을 ‘상(相)’이라 했다.
무의식 속의 고정관념 중 가장 뿌리가 깊게 박혀 있는 것이 '나'와 ‘남’을 구별하는 고정관념[아상(我相)]이다. 따라서 이런 고정관념인 아상(我相)을 내려놓아야 불성(佛性)을 바로 인식할 수 있다고 했다.
기독교주의자, 불교주의자와 같이 자신이 어떤 ‘주의자’라면 이미 산냐에 물들어 있는 것이다. 산냐가 있으면 왜 나쁠까? 산냐가 분노의 뿌리이기 때문이다. 화를 내는 것만이 분노가 아니다. 스멀스멀 기어 올라오는 불쾌감이나 거부감에서 불같이 타오르는 화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분노(嗔心)이다.
진보주의자는 보수주의자를 만나면 쓸데없는 불쾌감을 일으키거나 심하면 강한 적의를 드러낸다. 이것도 산냐 때문이다.
[분노는 나쁜 마음이며, 낮은 세계에 태어나는 원인이 된다. 종교가 있든 없든, 선한 사람은 선행을 하고, 악한 사람은 악행을 한다. 하지만 선한 사람이 악행을 한다면 그것은 종교 때문이다.]는 미국의 물리학자 스티븐 와인버그(Steven Weinberg)의 말이다.
“사람은 종교적 확신을 가졌을 때 가장 철저하고 자발적으로 악행을 저지른다.” - 프랑스의 물리학자 블레즈 파스칼(Blaise Pascal)의 말이다.
이와 같이 상(相)은 고정관념, 이념 내지는 어떤 경계, 인간이 방편적으로 만들어낸 이상, 개념, 인식, 통각 혹은 나와 남을 구별 짓는 고약한 개념작용이라 할 수 있다.
* 상(想)으로 번역되는 경우
산냐(sañña)를 ‘상(想)’으로 표현하는 경우를 보자. 당초 현장(玄奘)이 <금강경>을 한역함에 있어서, 아상(我相)을 아상(我想)으로 번역하고, 중생상은 유정상(有情想), 수자상을 명자상(命子想), 이런 식으로 번역을 했다. 그러나 구마라습의 번역본이 일반화되면서 자연스럽게 <금강경>에서 ‘산냐(sañña)’의 번역 용어는 상(相)으로 통일됐다.
* 그러나 오온(五蘊)은 색(色)⋅수(受)⋅상(想)⋅행(行)⋅식(識)으로 번역됐다. 여기 세 번째에 해당하는 상(想)은 표상(表象)과 지각작용, 의식 속에 심상(心像)을 취하고 구성하는 연상작용(聯想作用)을 말하는데, 이것이 산냐로서 보통 ‘생각’을 말한다.
그리고 어떤 사람을 생각하면 싫은 감정이 솟구친다. 그 사람의 이름만 보면 그 사람의 이미지가 떠오르고 과거의 불쾌한 기억까지 되살아나 부정적인 생각이 지배한다. 반면 그 어떤 사람을 생각하면 그리워진다. 그 사람의 이름만 떠올리면 그 사람의 이미지와 함께 좋았던 기억이 떠오른다. 이와 같이 누구나 이름을 가지고 있다. 그 이름에 걸맞은 이미지가 있다. 그 이미지가 산냐(想)이다.
과거의 기억이나 인식에서부터 추출된 개념이나 관념, 이념이나 사상, 견해가 대개 여기에 포함된다. 마음 속에 어떤 것을 떠올려 어떤 개념을 형성하는 이름 짓는 작용을 의미한다. 이는 이미 축적돼 있는 정보와 연관 지어 느낌이나 감각의 인상을 머릿속에서 정리해 지각하고 이름 짓는 표상작용이다. 그런데 축적된 정보가 없으면 멋대로 개념을 정립한다.
이와 같이 상온(想蘊, sanna-skandha)은 우리가 어떤 대상을 인식해 받아들였을 때 그것을 이리저리 생각해서 언어적으로 표현해 낸다든지, 어떤 대상을 바라봤을 때, 좋은 것은 받아들이고, 싫은 것은 배척하는 것과 같이 마음속으로 머릿속으로 이리저리 상상해서 정리하는 것[견해]을 말한다.
예를 들어, 꽃이 있다면 눈(안근)이 그것(경계/경)을 보고 예쁘다고 느낀다면 수온(受蘊)이지만, 그 꽃을 보고 아 이 꽃이 장미꽃이라고 인식하거나 장미꽃에는 가시가 있다고 하는 어떤 이지미를 형성하는 마음작용이 상(想)이다. “장미꽃은 가시가 있어서 싫다.”라고 했을 때, ‘장미꽃은 가시가 있다’까지는 상(想)이고, ‘싫다’는 수(受)이다. 대개 이와 같이 여러 마음작용이 한꺼번에 일어난다.
그리고 눈, 귀, 코, 혀, 몸, 뜻(意)의 6근과 형색, 소리, 냄새, 맛, 감촉, 법(法)이라는 6경을 조건으로 해서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의식이라는 6식이 일어난다. 이렇게 근(根) 경(境), 식(識)이 함께 어우러지는 것을 삼사화합(三事和合)이라 하고, 삼사화합하는 것을 촉(觸)이라 한다.
그리고 접촉(觸)하면 촉식(觸識)이 일어난다. 예를 들면, 「눈, 형색, 안식」, 혹은 「코, 냄새, 비식」 내지 「뜻(意), 법(法), 의식」 등이 합쳐져서 촉식(觸識)이 일어난다. 여기서 촉은 단순히 접촉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삼사화합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촉(觸)을 조건으로, - 촉식에 의해 수(受)가 일어나는데, 바로 이때, 즉 촉(觸)을 조건으로, ― 즉 촉식에 의해 수(受)가 일어날 때 개입되는 과거의 경험들이 바로 상(想)이다. 다시 말하면, 과거의 경험들이 일어나서 수(受)에 개입하는 것이 상(想)이고, 이 상이 계속 활동하면 이것은 결국 행(行)의 한 가지가 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똑 같은 것을 봐도 각각 받아들이고 반응하는 것이 다른 것은 바로 상(想)이 개입해 수(受) 다음에 진행되는 경험상태가 다르기 때문이다.
이는 자신이 어떤 기억[상(想)]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육근(六根)이 육경(六境)을 조건으로 해서 일어나는 육식(六識) 다음에 일어나는 행이 달라진다. 예를 들어 니까야(Nikàya)를 많이 읽은 사람은 니까야에서 배운 대로 상(想)을 가지고 니까야에서 배운 대로 행하려고 노력하게 된다. 이상으로 볼 때, <금강경>의 산냐와 오온(마음부수)의 산냐는 다르다.
* 초기불교에서의 경우, 산냐(sañña)는 분별심, 고정관념 외에 삼가함, 다스림 등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되고, 삼가함, 다스림, 절제의 의미로도 쓰였다. 이와 같이 초기경전의 산냐는 계발하고 발전시켜야 하는 수행의 방법으로 제시되기도 해, 이런 점에서는 긍정적인 의미로 쓰였다.
그리고 위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오온에서의 산냐는 인식, 지각, 혹은 통각으로 번역할 수 있다. 이것은 마음의 모든 순간에 반드시 함께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인식으로서의 산냐는 결코 척파 될 수 없다” ― 각묵 스님.
즉, 오온에 속한 산냐는 척파 대상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상에서 볼 때, <금강경>에서 나타나는 산냐[相)] 오온에 나오는 산냐[想]와 그 의미가 다르다.
<금강경>에 나오는 산냐[相]는 고정관념, 관념, 개념, 이념 등으로 번역할 수 있다. 즉, 인간이 만들어낸 개념, 방편적이고 인습적이며 주관적인 개념작용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금강경>에서는 특히 수행자들이 가질 수 있는 최고로 큰 고정관념으로 아상(我相) ․ 인상(人相) ․ 중생상(衆生相) ․ 수자상(壽者相)을 들고 있는데, 이는 모두 존재론적인 고정관념들이다. 그래서 <금강경>에서는 보살의 발보리심, 즉 발심의 출발로서 이런 산냐를 극복할 것을 고구정녕(苦口丁寧)히 설하고 있다.
그리고 이 같은 견해는 <금강경>뿐만 아니라 불법(佛法)에 있어서 산냐의 척파가 수승한 가르침이라는 데에로 이어진다. 나아가서 산냐의 척파는 무아(無我)이고, 무아는 바로 연기법의 이해와 체득이며, 이것은 중도(中道)로써 실천된다.
이에 비해 오온(五蘊)의 산냐[想]는 표상⋅인식⋅지각⋅통각⋅상상⋅의미지, 이런 뜻이다.
초두에 제시한 두 주먹 그림이 있었다. 이 그림을 보고 무엇을 상념 했을까? 무엇을 떠올렸을까? 이 그림을 보고 남북대결을 떠올렸다면, ― 상념 했다면 바로 그것이 산냐(saññā)이다.
하지만 오온(五蘊)의 산냐[想]에는 불교에서 극히 기피하는 망상(妄想)도 포함되므로 주의를 요한다.
성불하십시오. 작성자 아미산(이덕호)
※이 글을 작성함에 많은 분들의 글을 참조하고 인용했음을 밝혀둡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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