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계 리투아니아 작가 루타 서페티스의 '회색 세상에서'을 읽었다.
리투아니아는 몇 해 전 러시아와 발트 3국을 여행했을 때 가보았던 곳이라 괜히 친숙한 느낌이 드는 나라이다. 빌뉴스 대학의 벽화와 천장화, 우주피스 예술인 마을의 소박한 아름다움이 아직도 인상 깊게 남아 있다.
발트 3국(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을 여행했을 당시 세 나라의 국민들이 손에 손을 잡고 인간띠를 만들어 평화적인 독립을 이루어낸 멋진 나라, 우리나라처럼 약소국의 설움을 간직한 나라라는 가벼운 지식만 가지고 찾았었다.
그 속에 감춰진 굴곡지고 처절했던 역사는 들여다보지 않았다.
이 소설은 역사적 사실에 바탕을 둔 한 소녀의 참혹한 생존기이다.
리투아니아에서 살고 있는 15살 소녀 리나는 1941년 6월 14일, 엄마, 동생 요나스와 함께 KGB의 전신이었던 NKVD에 끌려 가 기나긴 이동을 시작한다.
동네 사람들과 트럭에 실려 끌려 간 후, 다시 발트 3국과 핀란드에서 끌려 온 사람들에 섞여 기차 화물칸에 던져진다.
사람이라기보다 짐승처럼, 아니 짐승보다 못한 처지가 되어...
잠자기도 어려운 비좁은 공간에 빽빽히 들어찬 사람들, 배설의 본능조차 화물칸에 뚫린 구멍 하나로 해결해야 하고 그로 인해 토해내는 갖은 악취와 오물들, 멀건 죽으로 버텨내야하는 끼니, 바글거리는 머릿니, 치료받을 수 없는 이런 저런 질병들, 언제 가족과 헤어지게 될 지 모른다는 불안감과 두려움, 사소한 꼬투리를 잡혀 죽어가는 사람들...
세계 2차대전이 일어났던 시기.
그닥 깊이 생각하지 못하고 독일군과 일본놈들은 악으로 치부하고 연합군은 올바른 정의를 실현하는 이들로 단순하게 규정하곤 했다.
하지만 전쟁에 옳고 그름을 따지거나 선과 악 이분법으로 양분하는 건 너무나 순진무구한 생각이다.
어느 편을 떠나 전쟁이 발발하는 순간 인간들에게 존엄성은 사라지고 벌레보다 못한 처참한 삶이 끼어든다.
살아남기 위해 비굴해질 수 밖에 없고, 가족과 작은 끈 하나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 가진 모든 것들을 포기해야 한다.
전쟁 자체가 일어나서는 안될 절대악이다.
리나는 이미 끌려가 감옥에 갇혀있는 아빠에게 소식을 전하기 위해 손수건이나 조그만 나무조각에 그림을 그리거나 서로만 알 수 있는 메세지를 적어 보낸다.
전해지리란 보장은 없지만 희망을 놓지 않기 위한 안깐힘이었다.
42일간의 지저분하고 덜컹거리는 화물칸의 이동이 끝나고 시베리아 알타이 강제 노동 수용소에서의 생활이 시작된다.
수용소의 삶은 살아남기 위한 아비규환의 현장이다. 죽을 뻔한 동생 요나스, 리나와 요나스를위한 엄마의 끊임없는 희생과 투쟁, NKVD의 만행.
리나는 그 모습을 빠짐없이 그림을 그려 기록한다. 그나마 기차에서 만난 안드리우스는 리나의 든든한 친구가 되어 주고 리투아니아인들의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들로 잠깐의 온기를 주고 받는다.
반혁명 활동죄로 25년 형을 선고하는 서류에 스스로 서명하라는 NKVD의 강압에 저항하다 250여일을 보냈던 알타이 수용소에서 다시 끌려가는 리나 기족들.
북극에 있는 트로피모프스크로 옮겨지고, 극한의 추위와 한파로 결국 엄마를 잃고 만다.
읽는 내내 조마조마했다.
발트 3국의 독립은 1990년경인데 그들의 참혹한 삶이 그때까지 계속되는 건 아닌지...
너무 다행스럽게도 트로피모프스크의 처참한 참상이 조사관에 의해 발각되고 리나는고향 카우나스로 가서 삶을 이어가게 된다.
전쟁이 만들어 내는 괴물들.
소설 속 괴물들은 넘쳐났다.
그 속에서 발견한 실낱같은 희망.
기어이 인간이길 포기하지 않는 이들.
그런 힘이 인간띠를 만들어 평화적인 독립을 이루어 낸 힘이 되었으리라.
선거철, 예전처럼 자주는 아니지만 북한의 도발 이야기가 심심찮게 흘러 나온다.
너무 쉽게 정치적 이득을 목적으로 위기감을 조성하는 이들.
전쟁이란 악이 가지고 올 섬뜩함을 모르지 않을 터인데...
한심함을 넘어 안쓰럽다.
인간성을 유린하고 휴머니즘을 상실하게 만드는 상황에서도 끝까지 버텨내며 희망의 끈을 이어가는 사람들의 이야기 '회색빛 세상에서'는 많은 생각을 던져준 소설이었다.
첫댓글 여행만 좋아하는 게 아니고 독서도 즐기시네요. 부러워요.
돋보기를 써야하는 안타까움이...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