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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이름 문의 02) 717-3200 배우리 회장
150104 KBS1 통일로 가는 길 타박타박 북녘 기행 압록강1
압록강의 옛이름과 그 지류들
국토교통부 국가지명위원
한국땅이름학회 명예회장 배우리
urim.c hang@gmail.com
1. ...우리 국토의 북녘 끝자락이고 중국과의 사이에 있는 강, 압록강을 가 보기로 하겠습니다. ‘압록강 칠백 리’라는 노래도 있던데, 압록강은 그만큼 긴 강이죠? 우리나라에서 제일 긴 강...
양강도 삼지연군의 백두산 남쪽 경사면에서 발원하여 중국과의 국경을 이루면서 평안북도 신도군 신도읍에서 서해로 유입되는 강.
북한에서 가장 긴 강으로서 그 길이는 803.0km에 달한다. 유역 면적은 무려 64,739.8㎢에 달하는데 그 가운데서 북한에 속하는 유역면적은 32,557.7㎢이다.
압록강은 양강도, 자강도, 평안북도의 18개 시,군과 중국의 단동을 비롯한 여러 도시들을 지나 흐른다.
2. 그만큼 큰 강이니 지류들도 엄청나게 많겠죠? 어떤 지류들이 있나요?
허천강·장진강·부전강·자성강·독로강·충만강·삼교천을 비롯하여 100㎞를 넘는 여러 하천들과 수많은 지류로 형성되어 있다.
양강도의 9백여 리 구간에서는 소백수, 이명수, 포태천, 가림천, 오시천, 허천강, 삼수천, 장진강, 후주천, 후창강, 연포천,
자강도의 6백여 리 구간에서는 중강천, 호내강, 호례천, 자성강, 삼풍천, 장자강, 위원강, 초산천, 충만강,
평안북도의 5백여 리 구간에서는 동천, 남천, 송계천, 영주천, 남창천, 구곡천, 부평천, 방산천, 당목천, 수진천, 금광천, 오목천, 삼교천 등과 중국의 포석하, 애하 등
지류들이 합류되어 서해로 유입된다.
3. 지난번 우리가 함흥 이야기를 했을 때 그 북쪽에 부전강, 장진강이 있다고 하셨던가요? 이 지류들도 큰가요?
·허천강
김형권군 두무골령에서 발원하여 혜산시 강구동에서 압록강에 유입되는 강. 길이는 226km,
긴 나뭇잎모양의 하계를 이루면서 운총강, 큰물골, 진동천, 능귀강, 풍산천을 비롯하여 90여 개의 지류를 모아 가지고 개마고원을 깎아 내리면서 북쪽으로 흐른다.
상류는 고원지대를 흐르면서 물살이 빠르지 않으나 하류는 협곡을 따라 흐르면서 물살이 빠르다. 상류에는 황수원저수지, 내중저수지, 사초평저수지, 풍서호 등이 있어 큰 물량이 조절된다.
강물은 주로 수력발전용수, 공업용수로 이용되며 뗏길로도 이용된다.
·부전강
북서쪽 부전군의 삼호골에서 발원하여 네 개의 지류를 모아 북서쪽으로 흐르다가 양강도 김정숙군의 신흥노동자구와 자강도 낭림군의 유벌리에서 장진강에 합류되어 압록강을 따라 서해로 흘러드는 강.
압록강의 제2지류이다. 부전고원을 흐르는 강이라 하여 부전강이라 하였다. 강에 부전호가 생기면서 강물은 부전령을 넘어 부전강발전소에서 전기를 일구고 성천강에 합류되어 함흥벌을 지나 동해로 유입된다.
`장진강
장진군의 남동쪽에서 북쪽으로 압록강에 유입되는 강. 지난날 하가루(긴나루)로 불러오던 것을 한자로 옮겨 장진강이라 하였다.
4. 그 밖에 어떤 지류들이 또 알려져 있을까요?
`가림천
보천군 북부에 있는 북포태산(2,288m) 남쪽 경사면에서 발원하여 곤장덕을 굽이돌아 가산리에서 압록강에 유입되는 강. 이조시대 보천사에 있던 가림마을을 끼고 흐르는 강이므로 가림천이라고 하였다 한다.
‘가림’이란 산림의 경치가 아름답다는 뜻이다. 지금도 가림동을 고분마을(고운마을)이라고도 한다. 압록강의 제1지류이다. 길이 59.8km, 유역면적 801.5㎢, 유역평균너비는 13.4km로서 가림천은 나뭇잎모양의 하계를 이룬다.
주요 지류는 신흥천, 대진천, 대평천, 보서천, 호산천, 상룡천 등이다. 가림천은 물매가 급하고 강골짜기가 좁고 깊다. 하천유량은 8월에 가장 많고 2월에 가장 적다. 가림천유역은 북한에서 무더기비량이 적은 지역에 속하고 울창한 산림과 평탄한 대지로 되어 있어 여름철큰물이 심하지 않다. 기림천에는 산천어, 열목어 등 찬물을 좋아하는 물고기들이 있다.
가림천은 뗏길과 수력발전에 이용된다. 보천군 동쪽 내곡리 강가에는 온천이 있다.
`구곡천
삭주군 동부 사류곡산(848m)에서 발원하여 수풍노동자구에서 압록강에 유입되는 하천. 아홉 개 소의 큰 굴곡부를 에돌아 흐른다는 뜻에서 구곡천으로 불린다. 압록강의 제1지류로서 길이는 48km, 유역면적은 260㎢, 유역평균너비는 5.4km.
구곡천은 산지하천의 특성을 띠며 유역일대의 식물피복 상태가 좋아 수원함양조건이 양호하다. 구곡천은 관개용수에 이용된다. 광성천에는 뱀장어가 많이 서식하고 있다.
`사이강-새강
의주군 의주읍의 서쪽 청마랑과 서호리 금동도 사이로 흐르는 개울. 압록강의 지류로서 의주읍과 서호리 사이로 흐르고 있다. 사이강이라고도 한다.
`소백수
백두산의 남동쪽에 있는 소백산을 감돌아 흐르는 하천. 소백산 서쪽 골짜기에서 발원하여 삼포지구에서 압록강에 흘러든다. 길이는 15.1km, 유역면적은 49.2㎢이다.
`오목천
의주군 연무리 서남쪽에서 발원하여 홍남리, 신의주시 연하동에서 압록강에 흘러드는 하천. 개울이 오목하게 생겼다.
5. 압록강은 엄청나게 큰 강인데요, 왜 압록강이란 이름이 나온 건가요?
압록강은 옛날부터 불러오던 이름 ‘아리나리’를 달리 적은 것으로 해석된다. ‘압록’의 소리옮김인 ‘아리’는 ‘앞’을 나타내는 ‘앏’의 옛말 형태이다. ‘강’은 옛말로 ‘나리’이므로 결국 ‘아리나리’는 ‘앞강’이라는 뜻으로 된다.
‘압록강’을 ‘마자수’라고도 하였는데 이것은 ‘마시나리’에 대한 소리와 뜻을 한자로 옮긴 것이다. ‘마시’라는 말은 ‘앞’ 또는 ‘맞은편’을 뜻하던 ‘맞’의 옛 형태이다.
때문에 ‘마자수’는 ‘맞은편에 있는 강’으로 해석할 수 있다. 결국 ‘압록강’은 고구려 수도의 ‘앞강’ 또는 ‘맞은편에 있는 강’을 의미한다. 이밖에 물오리와 푸른 갈대가 많다 하여 압록강이라 했다는 설도 있다.
<대동수경>에서는 “녹수가 통군정 아래에 이르면 갈라져서 세 갈래로 된다. 그 남쪽 갈래는 구룡연이 되는데 이곳이 곧 압록수이다. 혜산에서 바다까지의 강을 통틀어 압록이라고 하지만 구룡연이 그 이름을 독차지하고 있는 것은 가득한 물의 푸른 빛이 오리머리와 같기 때문에 그렇게 부르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다른 문헌에서는 “마자수를 일명 압록수라고 하는데 농북, 말갈, 백산에서 발원하여 모양이 오리머리와 같다 하여 압록수라고 한다”고 하였다. 이를 통하여 보면 강물이 오리대가리처럼 파랗기 때문에 압록강이라 이름지은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중국에서는 황하(黃河), 양자강(揚子江)과 더불어 천하의 삼대수(三大水)라고 일컬었다. 중국인들은 압록강을 ‘얄루장’이라 부르고, 영어로는 ‘얄루(Yalu)’라 표기한다.
6. 늘 압록강이라고만 불러 왔나요? 강이 큰 만큼 다른 이름들도 있을 것 같은데...
지난날 압록강을 녹수, 청하, 용만, 요수, 백산수, 안민강, 압강, 압륙강, 애강이라고도 하였다.
백산수는 백산(백두산)에 시원을 둔 강이라는 데서 유래된 지명이고, 안민강은 백성들이 편히 살게 하여주는 강이라는 뜻에서 유래된 지명이다. 압강은 물오리가 많이 모여드는 강이란 뜻에서 유래된 지명이며, 애강은 구름이 낀 듯이 보이는 강이란 뜻에서 유래된 지명이고, 요수는 빗물이 모여 이루어진 강이라는 데서 유래된 지명이고, 녹수는 파란 물이 흐른다는 뜻에서 유래된 지명이다. <대동수경>에서는 “녹수 이것은 압록강인데 이 책 수경에서 이름을 녹수라고 정하였다”고 기재되어 있다.
150111 KBS1 통일로 가는 길 타박타박 북녘 기행 압록강2
압록강 근처의 역사와 삼수갑산
국토교통부 국가지명위원
한국땅이름학회 명예회장 배우리
urim.c hang@gmail.com
1. 오늘은 압록강 일대의 역사와 문화 유적 등을 알아보겠습니다. 압록강 일대에는 언제부터 사람들이 살았을까요?
압록강 유역의 선사시대 유물·유적들은 강 본류보다는 지류에 산재해 있다. 그러나 아직 구석기시대의 유적이 발견된 적은 없으며, 신석기시대의 주거지와 토기·석기·골각기 등의 유물이 중류의 중강군 토성리, 하류의 의주군 미송리, 용천군 용연리·신암리·쌍학리 등지에서 발견되었다.
이로 보아 오랜 옛날인 선사시대부터 사람들이 살았을 것으로 보인다.
청동기시대의 유적으로는 중강군 토성리, 시중군 심귀리·노남리, 강계시 공귀동, 벽동군 송련리, 의주군 의송리, 용천군 신암리 등에서 거주지가 발굴되었으며, 이들 유적에서는 청동기를 비롯하여 토기와 반월도(半月刀)·돌도끼·방추차(紡錘車)·석검·돌화살촉 등 유물이 출토되었다. 그리고 강계시의 풍룡동과 공귀동에서는 청동기시대의 석관묘가 발견되었다. 다만 우리나라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유물이라 할 수 있는 비파형동검(琵琶形銅劍)과 세형동검(細形銅劍)은 아직 출토된 예가 없다.
초기 철기시대의 유적으로 시중군 노남리에서 야철지(冶鐵址)와 주거지, 심귀리에서는 분묘가 발견되었으며, 이들 유적에서는 철기·토기를 비롯하여 명도전(明刀錢)·오수전 (五銖錢) 등 화폐가 출토되었다. 이 밖에 중강군 토성리, 자성군 서해리, 위원군 용연동 등에서도 초기 철기시대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2. 삼국기대에는 압록강 유역이 고구려 영토였겠죠? 고구려 유물이나 유적이 많이 남아 있나요?
‘
삼국시대에 압록강은 고구려의 영역에 속하였다. 특히 4세기 이전에는 고구려의 수도가 이곳에 있어서 고분을 비롯하여 많은 유물과 유적들이 강 주위에 분포해 있다.
유적은 강 남쪽보다는 강 북쪽 만주 지역에 더 많은 편이다.
강 남쪽 연변의 강계군 일대에서 고구려 초기 집 자리가 발견되었는데, 당시 구들의 형태가 확인되었다. 만포시, 중강군 일대에는 4세기 이전 고구려의 적석총(積石塚)들이 밀집되어 있다.
강 북쪽 만주 지방엔 고구려 수도 위치인 환인-집안 일대에 고구려 초 유적들이 널리 분포되어 있다.
고구려의 첫 도읍지로 알려져 있는 졸본(卒本)은 환인 지방의 오녀산(五女山) 부근으로 비정된다. 오녀산성은 넓적한 돌로 쌓았으며 북쪽은 가파른 벼랑에 의지하여 성벽을 이루고 있다.
환인 지방에는 총 750기의 고분들이 남북으로 길이 1㎞의 군(群)을 형성하고 있는데 대부분이 적석총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서기 3년(유리왕 22)에 고구려가 수도를 국내(國內)로 옮기고 위나암성(尉那巖城)을 쌓았다고 하였는데, 이 국내성의 위치가 오늘날 만주의 길림성(吉林省) 지안현에 해당한다. 이 일대에는 국내 성지를 비롯하여 많은 고구려 고분이 남아 있다. <집안현지(集安縣志)>에 의하면, 1905년(광무 9) 당시까지만 해도 옹성을 갖춘 문이 동벽 남쪽에 1개, 서쪽에 2개가 있었으며, 남벽 동쪽과 북벽에는 문을 막은 흔적이 1개씩 있었다고 한다.
성밖에는 해자(垓字 : 성 밖으로 둘러 판 못)의 흔적이 부분적으로 남아 있다. 지안현의 통구(通溝)에는 고구려의 고분들이 특히 많이 밀집되어 있다. 광개토왕의 능으로 알려져 있는 장군총(將軍塚)도 그 가운데 하나이며, 또한 모두루총(牟頭婁塚)·각저총(角抵塚)·무용총(舞踊塚)·사신묘(四神墓)·산련화총(散蓮花塚)·구갑총(龜甲塚)·미인총(美人塚) 등 벽화고분도 다수 발굴되었다.
국내성지 북쪽에는 환도산(丸都山)이 있는데, 고구려의 환도성이 있던 곳이다.
이 고분들은 모두 고구려의 것으로 석분이 대부분.
지안 일대는 고구려 건국 이후로 줄곧 고구려의 중심지였으나, 고구려 멸망 후에는 강 유역이 대부분 발해의 영토가 되었고, 하류의 일부는 당나라에 속하였다. 특히 중류의 임강(臨江)에는 발해의 5경(五京) 가운데 하나인 서경압록부(西京鴨綠府)가 설치되어 지방 제도의 중심이 되었다.
3. 발해가 망한 뒤에는 압록강 유역이 고려의 영역이었겠죠?
발해가 멸망한 뒤에는 중류 지역에서 발해 유민들에 의해 정안국(定安國)이 세워졌으나, 하류에서는 여진족이 산거하였다. 그 뒤 거란이 점차 강성해지면서 986년(고려, 성종 5)에 정안국을 멸망시키고 강 하류의 여진족을 경략하여, 991년(성종 10)에 내원성(來遠城)을 쌓음으로써 중·하류 지역이 모두 거란의 영역이 되었다.
993년(성종 12)에는 거란이 고려를 침입해 왔으나, 고려는 서희(徐熙)의 외교에 힘입어 강동 6주(江東六州)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로써 고려의 북쪽 경계가 처음으로 압록강에까지 미치게 되었다. 이듬해에는 의주(義州)에 압록강도진(鴨綠江渡鎭)이 설치되고 구당사(勾當使)가 파견되었다. 그러나 강 유역의 대부분은 여전히 거란이 차지하였고, 고려가 차지한 곳은 의주 등 최하류 지역이었다. 그 뒤 거란의 침입이 계속될 때마다 의주 일대에는 많은 방어진(防禦鎭)들이 설치되었다.
현종 때에는 강감찬이 이곳에 백마산성(白馬山城)을 쌓고 이곳을 기점으로 천리장성을 축조하였다.
고려 후기에도 강 유역의 영속 관계에는 큰 변동이 없었다. 다만 중·상류지역이 북중국에서의 왕조 교체에 따라 거란·여진·몽고에 차례로 속하였다. 1270년(원종 11)에는 몽고가 서경(西京 : 지금의 平壤)에 동녕부(東寧府)를 설치하고 자비령(慈悲嶺) 이북을 직접 다스리면서 의주 일대도 역시 이에 속하였으나, 1290년(충렬왕 16)에 동녕부를 만주의 개원(開原)으로 옮김으로써 다시 고려의 영토가 되었다.
1369년(공민왕 18)에는 의주·강계·이성(泥城 : 지금의 昌城) 등에 만호부(萬戶府)를 설치하여 중류 지역에까지 진출하였으며, 다음해에는 강을 넘어 개원의 동녕부를 공략하였다.
1388년(우왕 14)에는 이성계가 요동정벌을 중단하고 의주 대안의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새 왕조를 세웠다.
4. 압록강은 조선시대에 와서야 확실히 우리 영토로서의 자리매김을 했겠죠?
조선 초기부터 적극적인 북진정책이 추진되어 태종 때 갑산(甲山)·여연(閭延)·이산(理山) 등지의 야인(野人 : 女眞族)을 물리치고 압록강 이남 지역을 확보하였다. 그러나 이 지역에 야인들의 침략이 계속되어 세종 때에 다시 이들을 토벌하고 여연·자성(慈城)·무창(茂昌)·우예(虞芮)의 4군(郡)을 설치하여 압록강을 경계로 국경선을 확정하였다.
이후 압록강은 관방진지(關防陣地)로서 강 연안에 성(城)·진(鎭)·보(堡)·봉수대(烽燧臺)와 누각(樓閣) 등이 곳곳에 세워졌다. 먼저 최상류의 허천강 유역에 있는 갑산에는 인차외진(仁遮外鎭)이 설치되었는데, 이곳은 대안의 만주 장백현(長白縣)과 국경상에서 야기되는 여러 문제들을 조절, 관할하는 동시에 국경 수비의 요새지로서 조선 말기까지 유지되었다.
예로부터 의주는 중국과의 교역의 중심지로서 매우 중요시되었으며, 1593년(선조 26)에는 유성룡(柳成龍)의 건의에 따라 의주 대안의 중강(中江)에 개시(開市)하고 명나라와 무역을 행하였다.
이때의 중강 개시는 임진왜란 중의 기황(飢荒) 때문에 요동의 미곡을 들여오기 위해서였다. 1601년(선조 34)에 한때 중단되었으나 다음 해에 재개되었으며, 1609년(광해군 1)에 다시 중단되었다가 청나라의 건국과 함께 1646년(인조 24)에 재개되어 대청 무역이 행해지게 되었다.
한말에 이르러서는 상류의 원시림이 서구 열강들에게 침탈되어, 1896년 아관파천 직후에 러시아가 삼림채벌권을 차지하였다. 일제 강점기에도 강 유역의 원시림을 마구 벌채하여 뗏목을 만들어 수송함으로써 삼림이 황폐해졌다.
5. ‘삼수갑산’이라는 말을 많이 듣는데, 이 삼수갑산이 압록강 근처 어디쯤엔기 있지 않나요?
‘갑산’은 함경남도 북동쪽 개마고원의 중심부에 있는 지역이다. 바다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특유의 풍토병이 있을 정도로 사람이 살기 불편한 곳이다.
‘甲山(갑산)’이라고 쓰는 것만 보아도 큰 산이 겹겹이 쌓여 있는 오지임을 알 수 있다. 지명에 큰 산이 있어 산세가 험한 지역임이 암시되어 있는 것이다. ‘갑산’은 산세가 험하여 접근하기도 어려울뿐더러
삼수는 삼잔수라고도 했던 곳. 양강도의 중부 압록강 연안에 있던 고을로 갑산과 이웃하고 있는 지역이다. ‘압록강, 허천강, 장진강 등 세 개의 물(강)을 낀 고을이다. 전엔, 속빈, 휼품이라고도 하였다.
삼수와 갑사는 추워서 살기가 불편한 지역이다. 이렇게 보면 ‘삼수’와 ‘갑산’은 험한 오지라는 점, 매우 추운 지역이라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예전부터 중죄인(重罪人)을 귀양 보내는 적소(謫所, 귀양지)로 손꼽혔다. 이 지역으로 한 번 귀양을 가면 다시 살아 돌아오기 어려웠다.
6. ‘삼수갑산이라는 곳을 가더라도 내 할 일은 해야겠다’식으로 말하는 사람들을 보게 되는데, 이 말 속에는 그 지역이 그만큼 살 만한 곳이 아니라는 얘기가 포함된 거겠죠?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진 사자성어. 삼수와 갑산은 모두 함경남도에 위치한 산골 마을로 예로부터 죄인들이 귀양 가던 곳이었다. 그래서 삼수갑산이라고 하면 한번 가면 나오기 힘든 오지를 가리킨다.
“삼수갑산을 가더라도 먹을 건 먹어야겠다.”
먹다가 매우 고통스러운 일을 당하더라도 먹어야겠다는 말.
‘산수갑산’이라고 알고 계신 분이 많지만 정확한 표현은 삼수갑산.
‘삼수갑산’은 ‘강’이나 ‘산’ 이름이 아니고, 단지 지명(地名)일 뿐이다. 곧 ‘삼수’는 ‘三水(삼수)’라는 지역 이름이고, ‘갑산’은 ‘甲山(갑산)’이라는 지역 이름이다. ‘삼수’는 함경남도 북서쪽 압록강 지류에 접하고 있는 지역이다. 지명이 ‘三水(삼수)’인 것을 보면, 세 개의 큰 물줄기가 합류하는 곳임을 알 수 있다. 겨울철 평균 온도가 섭씨 영하 16~18도라고 하니 그 추위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삼수’는 추운 지역으로뿐만 아니라 접근하기가 용이하지 않은 험한 오지(奧地)로도 유명하다.
‘삼수갑산’은 ‘가다’와 어울려 주로 “삼수갑산을 가더라도 어찌어찌하겠다” “삼수갑산을 가는 한이 있더라도 어찌어찌하겠다”식으로 쓰인다. “삼수갑산을 가더라도~”나 “삼수갑산을 가는 한이 있더라도~”라는 표현은 무릅쓰거나 각오해야 할 최악의 상황을 강조하여 결연한 의지를 밝힐 때 쓰는 말로 아주 굳어진 느낌이다. 이러한 표현에서 ‘삼수갑산’은 ‘몹시 어려운 지경’이나 ‘최악의 상황’이라는 비유적 의미를 띤다.
이렇게 보면, ‘삼수갑산’은 ‘험하고 추운 산골’, ‘유배지’라는 의미 외에 ‘어려운 지경이나 상황’이라는 또 다른 비유적 의미를 얻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예로 ‘풍비박산(風飛雹散)’에 대한 ‘풍지박산’, ‘복불복(福不福)’에 대한 ‘복걸복’이나 ‘복질복’ 등을 더 들 수 있다. ‘바람이 날고 우박이 흩뿌리는 것’이니 ‘풍지박산’이 아니라 ‘풍비박산’이고, ‘복’ 아니면 ‘복이 아닌 것’이니 ‘복걸복’이나 ‘복질복’이 아니라 ‘복불복’인 것이다. 잘못된 발음은 의미까지 바꾸어 놓을 수 있으므로, 정확하게 발음하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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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징
강바닥의 물매는 대체로 상류에서 61‰의 급경사를 이루며 드러난 바위들과 물살이 빠른 곳들이 많다.
압록강은 의주 부근에서 구리도, 어적도 등 충적섬들에 의하여 세 갈래로 갈라졌다가 신의주시에 이르러 다시 한줄기로 되어 흐른다.
압록강어귀 일대에는 위화도, 유초도, 황금평, 비단섬과 같은 섬들이 있다. 바닷물이 미치는 구간은 강어귀로부터 약 63km이다. 썰물 때에 강어귀에서는 넓은 간석지가 드러난다.
압록강의 결빙기는 지역에 따라 다른데 대체로 상류로 올라갈수록 결빙기가 훨씬 길어진다. 수풍호와 운봉호가 건설된 이후부터는 결빙기가 훨씬 줄어들었으며 기후도 일정하게 조절되었다.
압록강은 물양이 많고 깎아지른 듯한 골짜기들과 물살이 빠른 지역들을 많이 가지고 있으므로 북한에서 수력자원을 가장 많이 가진 강으로 되어 있다.
압록강 중류에는 대규모의 운봉발전소와 위원발전소, 수풍발전소가 있다. 압록강은 관개수로 널리 이용되고 있다. 압록강하류지역에는 북한에서 손꼽히는 대규모관개체계인 압록강관개가 마련되어 있다.
이밖에 압록강은 뱃길과 뗏길로, 양어기지로, 공업용수와 음료수로 이용되고 있다.
·자원
압록강 유역일대는 북한 산림자원의 보물고를 이루고 있다. 상류지역에는 잎갈나무, 분비나무, 가문비나무, 황철나무, 자작나무, 사스래나무, 피나무를 비롯한 여러 가지 나무들이 울창한 ‘나무바다’를 이루고 있다.
여기에는 북한에서 손꼽히는 임산기지들이 많이 배치되어 있다. 중류와 하류연안에도 임산자원이 풍부하다. 2천리장강 압록강은 자연경치가 아름다울 뿐 아니라 귀중한 자원으로 가득찬 기슭을 적시며 흐른다.
연안에는 금, 니켈, 동, 석탄,유화철, 고령토를 비롯한 귀중한 지하자원들이 풍부하게 묻혀 있다. 압록강과 그 지류들에는 잉어, 붕어, 누치, 빙어, 열목어, 뱀장어, 가뭄치, 숭어, 농어, 야레, 돌붕어 등 80여 종의 어류들이 서식하고 있다.
<압록강>
·길이
양강도 삼지연군의 백두산 남쪽 경사면에서 발원하여 중국과의 국경을 이루면서 평안북도 신도군 신도읍에서 서해로 유입되는 강.
북한에서 가장 긴 강으로서 그 길이는 803.0km에 달한다. 유역면적은 무려 64,739.8㎢에 달하는데 그 가운데서 북한에 속하는 유역면적은 32,557.7㎢이다. 압록강은 양강도, 자강도, 평안북도의 18개 시, 군과 중국의 단동을 비롯한 여러 도시들을 지나 흐른다.
·지류
양강도의 900여 리 구간에서는 소백수, 이명수, 포태천, 가림천, 오시천, 허천강, 삼수천, 장진강, 후주천, 후창강, 연포천, 자강도의 600여 이 구간에서는 중강천, 호내강, 호례천, 자성강, 삼풍천, 장자강, 위원강, 초산천, 충만강, 평안북도의 500여 리 구간에서는 동천, 남천, 송계천, 영주천, 남창천, 구곡천, 부평천, 방산천, 당목천, 수진천, 금광천, 오목천, 삼교천 등과 중국의 포석하, 애하 등 지류들이 합류되어 서해로 유입된다.
`가림천
보천군 북부에 있는 북포태산(2,288m) 남쪽 경사면에서 발원하여 곤장덕을 굽이돌아 가산리에서 압록강에 유입되는 강. 이조시대 보천사에 있던 가림리를 끼고 흐르는 강이므로 가림천이라고 하였다 한다. ‘가림’이란 산림의 경치가 아름답다는 뜻이다. 지금도 가림동을 고분마을(고운마을)이라고도 한다. 압록강의 제1지류이다. 길이 59.8km, 유역면적 801.5㎢, 유역평균너비는 13.4km로서 가림천은 나뭇잎모양의 하계를 이룬다.
주요 지류는 신흥천, 대진천, 대평천, 보서천, 호산천, 상룡천 등이다. 가림천은 물매가 급하고 강골짜기가 좁고 깊다. 하천유량은 8월에 가장 많고 2월에 가장 적다. 가림천유역은 북한에서 무더기비량이 적은 지역에 속하고 울창한 산림과 평탄한 대지로 되어 있어 여름철큰물이 심하지 않다. 기림천에는 산천어, 열목어 등 찬물을 좋아하는 물고기들이 있다.
가림천은 뗏길과 수력발전에 이용된다. 보천군 동쪽 내곡리 강가에는 온천이 있다.
`가림천
보천군 북포태산에서 발원하여 가산리를 지나 압록강으로 유입되는 강. 압록강의 제1지류이다. 가림마을을 흘러 지난다 하여 가림천이라 하였다.
`구곡천
삭주군 동부 사류곡산(848m)에서 발원하여 수풍노동자구에서 압록강에 유입되는 하천. 아홉 개 소의 큰 굴곡부를 에돌아 흐른다는 뜻에서 구곡천으로 불린다. 압록강의 제1지류로서 길이는 48km, 유역면적은 260㎢, 유역평균너비는 5.4km, 유역의 완전도는 0.11, 하천망밀도는 0.46㎞/㎢, 유역의 평균해발은 217m, 물매는 7.2‰, 유량은 6.27㎥/s, 유역의 평균강수량은 1,150mm이다.
구곡천은 산지하천의 특성을 띠며 유역일대의 식물피복 상태가 좋아 수원함양조건이 양호하다. 유출높이는 780mm, 유출률은 24.1ℓ/(s·㎢)이다. 구곡천은 관개용수에 이용된다. 광성천에는 뱀장어가 많이 서식하고 있다.
`부전강
북서쪽 부전군의 삼호골에서 발원하여 네 개의 지류를 모아 북서쪽으로 흐르다가 양강도 김정숙군의 신흥노동자구와 자강도 낭림군의 유벌리에서 장진강에 합류되어 압록강을 따라 서해로 흘러드는 강.
압록강의 제2지류이다. 부전고원을 흐르는 강이라 하여 부전강이라 하였다. 강에 부전호가 생기면서 강물은 부전령을 넘어 부전강발전소에서 전기를 일구고 성천강에 합류되어 함흥벌을 지나 동해로 유입된다.
`사이강-새강
의주군 의주읍의 서쪽 청마랑과 서호리 금동도 사이로 흐르는 개울. 압록강의 지류로서 의주읍과 서호리 사이로 흐르고 있다. 사이강이라고도 한다.
`소백수
백두산의 남동쪽에 있는 소백산을 감돌아 흐르는 하천. 소백산 서쪽 골짜기에서 발원하여 삼포지구에서 압록강에 흘러든다. 길이는 15.1km, 유역면적은 49.2㎢이다.
`오목천
의주군 연무리 서남쪽에서 발원하여 홍남리, 신의주시 연하동에서 압록강에 흘러드는 하천. 개울이 오목하게 생겼다.
`장진강
장진군의 남동쪽에서 북쪽으로 압록강에 유입되는 강. 지난날 하가루(긴나루)로 불러오던 것을 한자로 옮겨 장진강이라 하였다.
·지명
압록강은 옛날부터 불러오던 이름 ‘아리나리’를 달리 적은 것으로 해석된다. ‘압록’의 소리옮김인 ‘아리’는 ‘앞’을 나타내는 ‘앏’의 옛말 형태이다. ‘강’은 옛말로 ‘나리’이므로 결국 ‘아리나리’는 ‘앞강’이라는 뜻으로 된다.
‘압록강’을 ‘마자수’라고도 하였는데 이것은 ‘마시나리’에 대한 소리와 뜻을 한자로 옮긴 것이다. ‘마시’라는 말은 ‘앞’ 또는 ‘맞은편’을 뜻하던 ‘맞’의 옛 형태이다.
때문에 ‘마자수’는 ‘맞은편에 있는 강’으로 해석할 수 있다. 결국 ‘압록강’은 고구려 수도의 ‘앞강’ 또는 ‘맞은편에 있는 강’을 의미한다. 이밖에 물오리와 푸른 갈대가 많다 하여 압록강이라 했다는 설도 있다.
<대동수경>에서는 “녹수가 통군정 아래에 이르면 갈라져서 세 갈래로 된다. 그 남쪽 갈래는 구룡연이 되는데 이곳이 곧 압록수이다. 혜산에서 바다까지의 강을 통틀어 압록이라고 하지만 구룡연이 그 이름을 독차지하고 있는 것은 가득한 물의 푸른 빛이 오리머리와 같기 때문에 그렇게 부르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다른 문헌에서는 “마자수를 일명 압록수라고 하는데 농북, 말갈, 백산에서 발원하여 모양이 오리머리와 같다 하여 압록수라고 한다”고 하였다. 이를 통하여 보면 강물이 오리대가리처럼 파랗기 때문에 압록강이라 이름지은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지난날 압록강을 녹수, 청하, 용만, 요수, 백산수, 안민강, 압강, 압륙강, 애강이라고도 하였다. 압록강유역은 북위(N) 40~43°, 동경(E) 124~128°사이의 넓은 지역을 차지하고 있다.
백산수는 백산(백두산)에 시원을 둔 강이라는 데서 유래된 지명이고, 안민강은 백성들이 편히 살게 하여주는 강이라는 뜻에서 유래된 지명이다. 압강은 물오리가 많이 모여드는 강이란 뜻에서 유래된 지명이며, 애강은 구름이 낀 듯이 보이는 강이란 뜻에서 유래된 지명이고, 요수는 빗물이 모여 이루어진 강이라는 데서 유래된 지명이고, 녹수는 파란 물이 흐른다는 뜻에서 유래된 지명이다. <대동수경>에서는 “녹수 이것은 압록강인데 이 책 수경에서 이름을 녹수라고 정하였다”고 기재되어 있다.
·특징
강바닥의 물매는 대체로 상류에서 61‰의 급경사를 이루며 드러난 바위들과 물살이 빠른 곳들이 많다.
압록강은 의주 부근에서 구리도, 어적도 등 충적섬들에 의하여 세 갈래로 갈라졌다가 신의주시에 이르러 다시 한줄기로 되어 흐른다.
압록강어귀 일대에는 위화도, 유초도, 황금평, 비단섬과 같은 섬들이 있다. 바닷물이 미치는 구간은 강어귀로부터 약 63km이다. 썰물 때에 강어귀에서는 넓은 간석지가 드러난다.
압록강의 결빙기는 지역에 따라 다른데 대체로 상류로 올라갈수록 결빙기가 훨씬 길어진다. 수풍호와 운봉호가 건설된 이후부터는 결빙기가 훨씬 줄어들었으며 기후도 일정하게 조절되었다.
압록강은 물양이 많고 깎아지른 듯한 골짜기들과 물살이 빠른 지역들을 많이 가지고 있으므로 북한에서 수력자원을 가장 많이 가진 강으로 되어 있다.
압록강 중류에는 대규모의 운봉발전소와 위원발전소, 수풍발전소가 있다. 압록강은 관개수로 널리 이용되고 있다. 압록강하류지역에는 북한에서 손꼽히는 대규모관개체계인 압록강관개가 마련되어 있다.
이밖에 압록강은 뱃길과 뗏길로, 양어기지로, 공업용수와 음료수로 이용되고 있다.
·자원
압록강 유역일대는 북한 산림자원의 보물고를 이루고 있다. 상류지역에는 잎갈나무, 분비나무, 가문비나무, 황철나무, 자작나무, 사스래나무, 피나무를 비롯한 여러 가지 나무들이 울창한 ‘나무바다’를 이루고 있다.
여기에는 북한에서 손꼽히는 임산기지들이 많이 배치되어 있다. 중류와 하류연안에도 임산자원이 풍부하다. 2천리장강 압록강은 자연경치가 아름다울 뿐 아니라 귀중한 자원으로 가득찬 기슭을 적시며 흐른다.
연안에는 금, 니켈, 동, 석탄,유화철, 고령토를 비롯한 귀중한 지하자원들이 풍부하게 묻혀 있다. 압록강과 그 지류들에는 잉어, 붕어, 누치, 빙어, 열목어, 뱀장어, 가뭄치, 숭어, 농어, 야레, 돌붕어 등 80여 종의 어류들이 서식하고 있다.
<고을>
·삼수갑산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진 사자성어. 삼수와 갑산은 모두 함경남도에 위치한 산골 마을로 예로부터 죄인들이 귀양 가던 곳이었다. 그래서 삼수갑산이라고 하면 한번 가면 나오기 힘든 오지를 가리킨다.
“삼수갑산을 가더라도 먹을 건 먹어야겠다.”
먹다가 매우 고통스러운 일을 당하더라도 먹어야겠다는 말.
‘산수갑산’이라고 알고 계신 분이 많지만 정확한 표현은 삼수갑산.
‘삼수갑산’은 ‘강’이나 ‘산’ 이름이 아니고, 단지 지명(地名)일 뿐이다. 곧 ‘삼수’는 ‘三水(삼수)’라는 지역 이름이고, ‘갑산’은 ‘甲山(갑산)’이라는 지역 이름이다. ‘삼수’는 함경남도 북서쪽 압록강 지류에 접하고 있는 지역이다. 지명이 ‘三水(삼수)’인 것을 보면, 세 개의 큰 물줄기가 합류하는 곳임을 알 수 있다. 겨울철 평균 온도가 섭씨 영하 16~18도라고 하니 그 추위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삼수’는 추운 지역으로뿐만 아니라 접근하기가 용이하지 않은 험한 오지(奧地)로도 유명하다.
‘갑산’은 함경남도 북동쪽 개마고원의 중심부에 있는 지역이다. 바다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특유의 풍토병이 있을 정도로 사람이 살기 불편한 곳이다. ‘甲山(갑산)’이라고 쓰는 것만 보아도 큰 산이 겹겹이 쌓여 있는 오지임을 알 수 있다. 지명에 큰 산이 있어 산세가 험한 지역임이 암시되어 있는 것이다. ‘갑산’은 산세가 험하여 접근하기도 어려울뿐더러 ‘삼수’처럼 추워서 살기가 불편한 지역이다. 이렇게 보면 ‘삼수’와 ‘갑산’은 험한 오지라는 점, 매우 추운 지역이라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예전부터 중죄인(重罪人)을 귀양 보내는 적소(謫所, 귀양지)로 손꼽혔다. 이 지역으로 한 번 귀양을 가면 다시 살아 돌아오기 어려웠다.
‘삼수갑산’은 ‘가다’와 어울려 주로 “삼수갑산을 가더라도 어찌어찌하겠다” “삼수갑산을 가는 한이 있더라도 어찌어찌하겠다”식으로 쓰인다. “삼수갑산을 가더라도~”나 “삼수갑산을 가는 한이 있더라도~”라는 표현은 무릅쓰거나 각오해야 할 최악의 상황을 강조하여 결연한 의지를 밝힐 때 쓰는 말로 아주 굳어진 느낌이다. 이러한 표현에서 ‘삼수갑산’은 ‘몹시 어려운 지경’이나 ‘최악의 상황’이라는 비유적 의미를 띤다.
이렇게 보면, ‘삼수갑산’은 ‘험하고 추운 산골’, ‘유배지’라는 의미 외에 ‘어려운 지경이나 상황’이라는 또 다른 비유적 의미를 얻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예로 ‘풍비박산(風飛雹散)’에 대한 ‘풍지박산’, ‘복불복(福不福)’에 대한 ‘복걸복’이나 ‘복질복’ 등을 더 들 수 있다. ‘바람이 날고 우박이 흩뿌리는 것’이니 ‘풍지박산’이 아니라 ‘풍비박산’이고, ‘복’ 아니면 ‘복이 아닌 것’이니 ‘복걸복’이나 ‘복질복’이 아니라 ‘복불복’인 것이다. 잘못된 발음은 의미까지 바꾸어 놓을 수 있으므로, 정확하게 발음하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숙빈
삼잔수. 양강도의 중부 압록강 연안에 있던 고을. 압록강, 허천강, 장진강 등 세 개의 물(강)을 낀 고을인데 지금의 삼수군 지역을 말한다. 속빈, 휼품이라고도 하였다.
<고개>
갑골령
자강도 만포시 남상리와 위원군 향양리 사이에 있는 영. 해발 443m. 영의 남쪽과 북쪽 경사면의 물매는 20° 안팎으로서 비교적 급하다. 남쪽 경사면에서 시작되는 북평천은 장자강에 흘러들고 북쪽 경사면에서 시작되는 하성골천은 압록강에 흘러든다.
일대에는 시생대 낭림층군의 편마암이 분포되어 있다. 갈골령은 자강도 안의 압록강 연안지방과 내륙지역을 연결하는 교통요지로 되어 있다. 갈골령으로는 만포~위원 간 도로가 통과한다.
·된통고개-할딱고개
의주군 홍남리 남산에서 피현통로를 따라 남쪽에 있는 고개. 병자호란 때 전장고개에서 패배한 청나라군들이 이 고개를 헐떡거리며 넘어 압록강쪽으로 철퇴하였다 한다. 된통고개라고도 한다.
·성곡령
삭주군 금부리와 창성군 약수리와의 경계에 있는 영. 해발 425m. 성곡령은 본래 압록강과 두만강 연안의 시, 군들을 연결하는 주요 도로로 이용되었으나 지금 삭주~창성 간 도로가 금부리~용암리~약수리 사이로 옮겨지면서 삭주군 금부리와 창성군 약수리를 연결하는 지방적인 교통로로 되어 있다.
천길령
삭주군 수풍노동자구의 서북쪽 압록강에서 천길 높이에 있는 영. 영 옆에 압록강의 천길 같이 높은 절벽이 있었는데, 현재 수풍호에 침몰되었다.
파수령
혜산시 강구동 소재지의 서쪽에 있는 영. 조선시대(1398년)에 갑주(갑산)에 성을 쌓고 북부지방의 방비를 위해 군사를 주둔시키고 압록강 연안에 파수체계와 봉수연락체계를 세웠을 때 이 영에 파수를 세웠다 한다.
·판막령
삭주군 판막리의 동쪽에 있는 영. 해발 329m. 지난날 영 밑에 길손들이 유숙하곤 하던 판막집이 있었다. 영의 동쪽 경사면에서는 구곡천의 지류가, 서쪽 경사면에서는 불정천 지류가 흘러내리고 있다. 판막령으로는 청수, 삭주를 비롯한 압록강 연안의 여러 지역을 연결하는 도로가 통과하고 있다.
<고적-유적>
·구룡당九龍
의주군 의주읍의 북쪽 구룡소 옆에 있던 당집터. 옛날 구룡소에 있는 아홉 마리의 용이 오랜 세월 압록강 물을 다스려 이 고장의 농사가 잘 되게 하였다 한다. 이로부터 이 고장의 사람들은 소 옆에 사당을 짓고 아홉 마리의 용에게 해마다 제사를 지냈다 한다.
·용천 쌍학리유적
용천군 쌍학리에 있는 유적. 신석기시대 후기 유적이다. 압록강 출해구에서 동쪽으로 약 7km 상거한 곳에 위치해 있다. 이 유적에서는 민무늬토기와 빗살무늬토기 등 유물들이 다량 출토되어 북한 서북지역 신석기문 실상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중강군 토성리유적
김형직군 1읍 6구 9리의 하나. 군의 북서쪽, 압록강 연안에 위치해 있는 리. 북쪽은 부전리, 서쪽은 자강도 중강군 오수리, 남쪽은 노탄노동자구, 동쪽은 죽전리촵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중국 임강현 7도구와 마주하고 있다.
<관광>
·용운산(龍雲山)
삼각산. 의주군 의주읍의 북쪽 압록강 주변에 있는 산. 해발 80m. 세 봉우리가 뿔처럼 솟아 있다. 용운산이라라고도 한다. 서쪽 마루에는 고려 초인 1117년에 세운 통군정이 있는데, 1478년, 1653년, 1750년에 걸쳐 여러 차례 개축하면서 그 규모도 확장되었고 화려하게 단장되었다. ‘개건상량문’에는 “통군정은 군사의 통솔지휘처로서 국방상 중요한 위치에 건설되어야 하며 그 위용이 당당하고 백성들을 국토방위에 참여시킬 뿐 아니라 군사훈련장으로도 되어야 할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통군정에 오르면 금강산의 해돋이, 매산의 저녁노을, 압록강의 봄 물결, 서해의 소낙비, 백마산의 설경, 풍년든 황금전야 등 경치를 관망할 수 있어 예로부터 관서팔경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통군정으로 오르는 입구에는 용만관이 있었는데, 현재 관터만 남아 있다. 통군정에 오르는 길목에는 1494년에 건립한 가장 오랜 건물 중의 하나인 취승당이 있었는데, 임진왜란 때 선조가 머물러 있었다 한다. 경치가 수려하고 사위가 아늑하여 놀이터로 이용되고 있다. 압록강 변에 임해 있는 산중턱에는 천연기념물 제95호인 의주재비둘기번식지가 있다.
·초주팔경
초산군 영역에 있던 옛 경승. 초주팔경의 내용은 “영호정의 달맞이/오리정에서의 손님바래우기/산성의 저녘노을/북산의 새벽나팔소리/서당의 저녁종소리/압록강의 흰 돛배/사인바위에서의 봄놀이/농민정에서의 피서”이다.
·연하약수기후요양지
만포시 연하리에 있는 기후요양지. 연하약수기후요양지에서 기본 예방치료수단으로 되는 것은 이 지대 기후요소들과 연하약수이며 압록강반에 자리잡은 세검정의 아름다운 절경이다. 만포의 압록강가에 자리잡은 세검정이 290여 m나 되는 절벽 위에 자리잡고 있어 그 주변 경치가 아름답기 그지없다.
이 기후지대는 오랜 옛날부터 이곳 주민들에 의하여 소중히 이용되어 왔다. 최근년간 조선의학과학원의 과학자들에 의하여 조사분석사업이 전면적으로 진행되었다. 주요 기후요법요소를 보면 연평균기온은 6.7℃이다. 계절별로 보면 1월 평균기온은 -13.3℃이며 최저기온은 -16.6℃이다. 4월 평균기온은 8.5℃이며 7월 평균기온은 23.3℃이다. 최고기온은 29.1℃이며 10월 평균기온은 8.5℃이고 한해 온도교차는 48.7로서 비교적 큰 편이다.
봄이 시작되는 온도를 0℃로 볼 때 연간 0℃로 되는 첫 날짜(0℃도래일)는 3월 16일이고 그 지속일수는 243일이며 여름이 시작되는 온도를 15℃로 보면 15℃로 되는 첫 날짜(15℃도래일)는 5월 12일이고 그 지속일수는 131일이다. 이는 기후요법을 충분히 할 수 있는 좋은 조건이 된다.
연평균공기상대습도는 73%이고 가장 적은 달은 4월로서 60%에 이르며 가장 많은 달은 8월로서 82%이다. 연간강수량은 915mm이고 가장 적은 달은 1월로서 11mm이며 가장 많은 달은 8월로서 245mm이다. 한해 맑은 날수는 66일이고 흐린 날수는 102일이며 안개날수는 20일이고 연평균일조시간은 2,222시간이며 연평균일조율은 50%이다. 이상 기후요소들은 연하약수기후요양지에서 기후예방과 치료를 위한 기본 수단이 된다.
연하약수기후요양지에서 풍치요법의 기본 요소로 되는 것은 주변의 산간-산림풍경과 산악미를 결합한 압록강반의 계곡풍경이다. 특히 사계절 달라지는 압록강반의 계곡풍경은 좋은 풍치요법수단이 된다. 적응증으로 되는 것은 기능성심장쇠약, 허혈성심장질병 특히 심장동맥순환부전(경증), 경한 동맥경화증, 본태고혈압(1~2기), 심장신경증, 기관지천식, 2차성빈혈, 위황병, 비만증, 당뇨병(경증) 등이다. 이와 함께 연하약수의 넓은 적응증과 기후요법, 풍치요법를 잘 복합하면 더 좋은 치료예방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의주원앙새살이터
평안북도 의주군 대화리에 있는 천연기념물. 1982년 12월 국가자연보호연맹에 의해 천연기념물 제406호로 지정되어 보호관리 되고 있다.
대화리에서 압록강 기슭을 따라 올라가면 가마리비탈이라는 경사면이 있고 그 앞으로 강이 흐르는데, 이 구역의 강물은 유량이 많으면서도 굽이가 졌기 때문에 물살이 그리 급하지 않고 완만하여 원앙새들이 모여 헤엄치기에 유리하다.
가마리비탈 앞에는 압록강줄기가 갈라져 내려오면서 수구도라는 섬이 형성되어 있다. 이 섬에는 원앙새가 무리를 지어 번식하고 있다. 가마리비탈에는 절벽으로 된 바위들이 분포되어 있으며 억새, 칡덩굴이 한데 엉켜 자라고 소나무, 참나무, 포플러나무를 비롯하여 여러 가지 나무도 무성하여 경치가 매우 아름답다. 원앙새들은 의주원앙새서식지에서 3월 초순부터 10월 초순까지 산다.
·압록강유원지
신의주시 압강동의 서북쪽 압록강 기슭에 있는 유원지. 압록강각 등 음식점과 각종 놀이터가 있어 근로자들의 휴식처로 이용되고 있다.
<김일성 활동 관련>
·구시물동전적지
보천군 보천읍 소재지의 북쪽 압록강 기슭에 있는 혁명사적지. 보천읍에서 서북쪽으로 약 8km 상거한 압록강의 상류쪽에 위치해 있다. 김일성 주석이 1937년 6월 조선인민혁명군의 원정대를 인솔하여 넘나들던 뗏목다리가 있었다. 혁명전적지표지비가 세워져 있다.
·도하지점
삼지연군 흥계수노동자구의 동북쪽에 있는 사적지. 김일성 주석이 1939년 대홍단지구전투를 승리로 결속하고 이곳을 통하여 압록강을 건넜다 하여 도하지점이라 하였다.
·월탄혁명사적지
김형직군 월탄리에 있는 사적지. 압록강의 지류인 후창강 기슭에 위치해 있다. 김일성 주석이 1923년 3월 ‘배움의 천리길’과 1925년 2월 ‘광복의 천리길’을 걸을 때 하루밤을 머문 사적지와 북한 반일민족해방운동의 탁월한 지도자인 김형직선생이 1920년 초에 방문한 사적지가 있다. 여기에는 김일성 주석의 혁명사적비가 세워 져 있다.
·통일포전
용천군 진흥노동자구의 서남쪽 압록강 기슭에 있는 논. 조국통일을 염원하는 절절한 마음을 담아 개간한 논이라 하여 통일포전이라 이름 지었다.
·포평혁명사적관
김형직군 김형직읍에 있는 사적관. 압록강 기슭에 위치해 있는데, 1964년 4월 15일에 개관하였으며, 1971년에 400㎡의 건물을 새로 지었다가, 1976년 9월 9일에 다시 3,200㎡의 2층건물로 확충하였다. 총서관과 12개의 진열실로 이루어졌는데, 주로 김일성 주석과 김형직 선생, 강반석 여사, 김형권 선생, 김철주 선생, 리보익 여사의 혁명업적을 보여주는 사적자료를 진열전시하고 있다.
·압록강 관개 체계
천마군, 피현군, 의주군, 용천군, 염주군, 동림군, 철산군, 선천군, 곽산군, 운전군, 정주시 등 지역에 설치되어 있는 관개망. 평안북도의 수만 정보에 달하는 논밭에 물을 대주는 대규모의 관개체계이다.
이 체계는 김일성 주석의 구상과 발기에 의하여 건설된 대기념비적 창조물의 하나이다. 북한 서북방지대에 위치하고 있는 이 체계는 압록강과 대령강 사이에 펼쳐진 넓은 지역을 포괄하고 있다.
지난날 서북방지대는 넓은 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물이 없어 농사를 제대로 짓지 못하던 고장이었다. 북한을 강점하였던 일본은 서북방지대에서 더 많은 쌀을 빼앗아갈 목적으로 보잘것없는 수리시설을 만들어 놓았으나 패망하면서 수리시설을 파괴하고 달아났다.
1963년부터 제1계단공사,, 제2계단공사를 완공했는데, 그 후 김정일 위원장에 의하여 2,000리 수로공사의 하나인 태천발전소~운전, 정주, 곽산수로공사가 짧은 기간에 완공됨으로써 압록강관개체계는 대순환식 관개체계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 수로공사가 완공됨으로써 박천군, 정주시, 곽산군 일대의 농경지를 충분히 적실 수 있게 되었으며 새로 개간되는 간석지논에 물을 더욱 넉넉히 공급할 수 있는 확고한 전망이 열리게 되었다. 따라서 그 어떤 조건에서도 물 걱정을 모르고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되었다.
<나루-다리>
·구포구(舊浦口)
삭주군 수풍노동자구의 중부 압록강 기슭에 있던 나루터. 압록강으로 다니던 배들이 닿았다.
·신의주항
신의주시 압록강 하류에 는 항구. 압록강 하류연안의 주요 강항구이다. 1958년부터 현대적인 여객선을 정박하고 뱃길을 더 개척함으로써 수천 톤급의 배들이 마음대로 다닐 수 있게 되었다.
현재 항에는 여러 가지 항만기중기, 벨트컨베이어, 구내운반차 등 운수수단과 화물보관창고들과 야적장이 충분히 갖추어져 있다. 신의주~하단~상단 간, 신의주~유초도~황금평~비단섬 간과 신의주~용암포 간 여객선이 다닌다.
`팔월구일줄다리
신의주시 유초리의 동쪽 압록강에 있는 다리. 유초리와 신의주를 육로로 연결하는 줄다리이다. 1989년 8월 말에 준공되었다. 길이는 2,210m이다.
<마을>
·오호물동 五湖
삼지연군 이명수노동자구 삼포에 있던 물동. 이명수임산사업소에서 삼포마을로 가는 갈림길에서 남쪽으로 약 10리 되는 압록강 기슭에 있는 오호물동의 강건너편은 장백현 24도구 구시등판이며 압록강을 따라 40리 가량 내려가면 이명수가 압록강에 흘러드는 지점인 합수가 있다. 혁명사적지인 곰의골밀영이 있다.
·구시물동
보천군 보천읍 소재지의 북쪽 압록강 기슭에 있는 물동. 보천읍에서 서북쪽으로 약 8km 상거한 압록강의 상류쪽에 위치해 있다. 소구유 비슷하게 생긴 구시골 어귀에 위치해 있는 물동이라 하여 구시물동이라 하였다. 김일성 주석이 1937년 6월 조선인민혁명군 원정대를 거느리고 이 물동에 뗏목다리를 놓고 압록강을 넘나들었다. 물동가에 혁명전적지표지비가 있다.
·압강마을 안돌이
삭주군 청수노동자구 서쪽 압록강 기슭에 있는 마을. 본래 삭주군 청수면에 소속된 리였는데, 1952년에 리가 폐지되면서 마을이름으로 이용되고 있다. 압록강이 굽이도는 기슭의 안쪽에 위치해 있다 하여 안돌이라고도 한다.
·진마을(鎭~)[진성마을]
삭주군 옥강리 동쪽에 있는 소재지마을. 1500년에 진을 설치했던 곳이므로 진마을이라 한다. 현재 압록강 기슭의 1,000여 m 구간에 보존유적 제762호로 등록된 진성자리가 있다. 지난날 이 마을을 진성마을이라고도 불렀다.
·진마을(鎭~)[진성마을]
삭주군 옥강리 동쪽에 있는 소재지마을. 1500년에 진을 설치했던 곳이므로 진마을이라 한다. 현재 압록강 기슭의 1,000여 m 구간에 보존유적 제762호로 등록된 진성자리가 있다. 지난날 이 마을을 진성마을이라고도 불렀다.
·창포마을
신의주시 낙원일동의 서남쪽에 있던 마을. 압록강물길과 잇닿은 포구에 있었는데, 지난날 백성들로부터 수탈한 전세미와 공물을 보관하던 창고가 있었다 한다.
<호수-못>
·수풍호
북부지역인 삭주군, 창성군, 벽동군과 자강도 우시군, 초산군 영역에 있는 호수. 압록강 하류부를 막아 건설하였다. 수풍호는 수풍발전소 댐과 함께 생긴 북한에서 가장 큰 인공호수로서 면적은 298.16㎢, 둘레는 1,074.7km, 길이는 138.3km, 너비는 2.2km이다. 수풍호에는 남창천, 영주천, 남천, 동천, 구곡천, 충만강, 조산천 등 수많은 하천들이 흘러든다. 수풍호의 댐은 6·25전쟁시기 폭격에 의하여 혹심하게 파괴되었으나 전후 짧은 기간에 개건 확장되어 수풍호의 수심은 매우 깊어졌다. 수면은 7~9월에 제일 높으며 3~5월에 낮아진다.
수풍호는 그 규모가 크고 수량도 많으므로 주변의 기후와 압록강 수온에 일정한 영향을 주고 있다. 겨울에 주변의 기온은 수풍호가 건설되기 전보다 평균 1~2° 더 높아졌으며 댐 아래쪽 압록강 가운데서는 물이 얼지 않고 흐른다. 수십만 kW의 발전능력을 가진 수풍발전소의 수원을 이루고 있는 수풍호는 북한 전력공업발전에서 주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수풍호는 압록강의 큰물조절지로서도 의의가 크다. 수풍호는 담수양어장으로도 이용되는데, 여기에는 기념어(백련), 잉어 등 어류가 매우 많다. 수풍호는 하천운수에도 이용된다. 수풍에서부터 벽동, 동주리, 창성, 초산까지 화물수송과 여객수송이 진행된다.
·수풍호(水豊湖)--산과 내. 평안북도 북부지역인 삭주군, 창성군, 벽동군과 자강도 우시군, 초산군 영역에 있는 호수. 압록강 하류부를 막아 건설하였다. 수풍호는 수풍발전소 언제와 함께 생긴 북한에서 가장 큰 인공호수로서 면적은 298.16㎢, 둘레는 1,074.7km, 길이는 138.3km,
·두릉소
김정숙군 김정숙읍의 북쪽 압록강에 있는 소. 압록강물이 빙빙 돈다 하여 두릉소라 하였다.
·운봉호(雲峯湖)
자성군과 중강군, 중국과의 경계에 있는 호수. 압록강의 중류를 막아서 건설한 발전용 호수이다. 1966년에 완공되었다. 면적은 104.88㎢, 둘레의 길이는 359.0km, 길이는 77.5km, 너비는 1.4km이다.
북한에서 큰 호수의 하나이다. 운봉호로는 압록강과 그 지류들인 자성강, 중강천, 건하천, 연풍천, 삼풍천을 비롯한 많은 하천들이 흘러든다.
·윤봉호수
주변의 경사면은 비교적 급하다. 이 지역의 연평균강수량은 912.9mm이다. 집수구역은 주로 해발 800m 이상 되는 산지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여기에는 참나무를 기본으로 하는 활엽수림과 잎갈나무숲이 울창하여 수원함양조건이 좋다.
윤봉호수는 전력생산 뿐 아니라 압록강의 큰물과 수풍호의 물을 조절하는 역할도 한다. 또한 수상운수, 담수양어, 임업에 큰 의의를 가진다.
호수 일대에는 압록강의 상류로부터 내려보내는 수십만 ㎥의 통나무를 처리하는 운봉원목양육사업소가 있다. 자강도 자성군의 운봉과 중강군의 토성, 장성 사이로 여객선과 화물선이 정기적으로 다닌다.
호수에는 잉어, 쏘가리, 메기를 비롯한 많은 물고기가 있다. 호숫가의 자성에는 담수양어사업소가 있다. 호수가에는 자연풍치가 아름다운 곳이 많아 휴양지로서의 이용전망도 크다.
·이화아래저수지(梨花~貯水池)
이화리 서부 간석지논벌 남쪽에 있는 저수지. 이화개를 막아 축조하였다. 면적은 0.21㎢, 둘레는 1.8km이다. 저수지의 수원은 강수와 압록강관개체계의 물인데, 저수지는 관개용수 및 양어장으로 이용되고 있으며, 저수지에는 잉어, 붕어, 뱀장어를 비롯한 여러 종류의 어류들이 서식하고 있다
·하박소(河拍沼)-학박소(鶴泊沼)
혜산시 강구동 압록강 기슭에 있는 소. 압록강물이 절벽에 부딪치면서 이 소의 물이 빙빙 돈다는 데서 비롯된 지명이다. 지난날 학이 많이 내려와 앉았다 하여 학박소라고도 한다.
<물동>
`삼포일호물동-
삼지연군 이명수노동자구 삼포에 있던 물동. ‘히가시’라는 일본사람이 경영하는 목재소에서 산림자원을 뗏길로 운반하기 위하여 압록강 상류에 8개의 물동을 만들었는데 그 중에서 제1호 물동으로 명명되어 있었다.
`일호물동
삼지연군 흥계수노동자구 동쪽 압록강 기슭에 있는 물동. 뗏터로부터 첫 번째 위치에 있는 물동이라 하여 일호물동이라 하였다.
`칠호물동
삼지연군 백두산밀영노동자구 소재지의 서남쪽에 있는 물동. 압록강 상류에서 일곱 번째로 되는 물동이라 하여 칠호물동이라 하였다.
<방어-봉수>
·마사리봉수
만포시 남상리에 있는 봉수터. 압록강 기슭의 산정에 위치해 있다. 조선시대 고산진에 소속되어 있으면서 국경에 위치한 것으로 하여 정황을 제일 먼저 전달하는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별오동봉수(別午洞烽燧)
만포시 별오동에 있는 봉수터. 동의 북쪽 압록강 연안에 있는 연두봉 꼭대기에 위′?있다. 주변에 있는 여러 봉수들과 하나의 신호체계를 이루고 있는데, 지난날 나라의 북방방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현재 그 터만 남아 있다....
·송봉봉수
김정숙군 강하리에 있는 옛 봉수터. 리의 동쪽 압록강 연안의 봉우리에 위치해 있다. 1443년 갑산, 삼수에서 평안도지경까지 봉수를 설치할 때 세운 봉수로서 돌로 축대를 쌓고 그 위에 봉수대를 설치하였다.
·수진천 水鎭--평안북도 의주군 덕현노동자구의 동남쪽에서 발원하여 대화리, 수진리에서 압록강에 흘러드는 하천. 지난날 국경의 군사요충지였던 수구진으로 흐른다 하여 수진천이라 하였다.
·연대봉봉수
삭주군 청성노동자구에 있는 봉수터. 압록강 연안의 산봉우리에 위치해 있다. 길이 60m, 너비 36m의 타원형으로 돌축대를 쌓고 그 위에 봉수대를 설치하였다.
·연대봉봉수(煙臺峯烽燧)
의주군 대화리에 있는 봉수터. 압록강 연안의 연대봉에 위치해 있다. 옛날 수구진에 소속된 봉수로서 동쪽으로 금동, 전동, 서쪽으로 통군정봉수와 연결되었다. 직경 8m, 높이 7.7m로 축대를 쌓고 그 위에 봉수대를 설치하였다.
·연두봉봉수(煙頭峯烽燧)
우시군 금성리에 있는 봉수터. 압록강 대안인 연대산마루에 위치해 있다. 조선 초기에 세운 봉수로서 정황이 생기면 호하봉수에 신호를 전달하였다고 한다. 한 변의 길이가 5m 되는 방형축대 위에 화덕을 쌓았다. 서쪽으로 7m 상거한 곳에 봉수막터가 있다....
·연풍봉수
자성군 연풍리에 있는 봉수터. 압록강 좌안에 위치해 있다. 국경연안에 위치한 봉수로서 길이 7m, 너비 4m의 장방형 축대를 쌓고 봉수대를 설치하였다. 중강군 장흥봉수와 연결되었다.
·운봉봉수
자성군 운봉노동자구에 있는 봉수터. 압록강 좌안에 위치해 있다. 북쪽은 자성읍의 조아봉수와 연결되였고 남쪽은 만포에 연결되었다. 장방형의 축대를 쌓고 봉수대를 설치하였다.
·의주연대봉수
의주군 의주읍에 있는 봉수터. 압록강 연안 연대봉에 있는 봉수터. 옛날에 구룡연봉수라고 하였는데 동북으로 석계와 연결되고 서쪽으로는 통군정봉수와 연결되어 있다. 직경 2m의 화덕이 2m 간격으로 일직선으로 쌓아져 있다.
·조아봉수
자성군 자성읍에 있는 봉수터. 압록강 좌안에 위치해 있다. 조선 초기에 설치되어 서해동봉수, 운봉봉수와 연결되었는데 봉수대는 직경 6m의 축대 위에 설치되었다.
·차가평봉수(車家坪烽燧)
만포시 세검동에 있는 봉수터. 강녘마을의 압록강 기슭에 있는 봉우리에 위치해 있다. 재신봉수와 연결된 봉수로서 큰 바위에 의지하여 봉수대를 세웠다. 조선시대 만포진에 소속되어 있으면서 총용봉수와 여둔령봉수에 연결되어 있었다.
·성하동봉수
성간군 성간읍에 있는 봉수터. 압록강 좌안 2km 지점에 위치해 있다. 자성군의 설치와 함께 설치되어 연풍리봉수, 서해리봉수에 연결되었다. 봉수대는 한 변의 길이가 7m이고 높이는 12m 되는 방형축대를 쌓고 설치하였다.
·차가평봉수(車家坪烽燧)
만포시 세검동에 있는 봉수터. 강녘마을의 압록강 기슭에 있는 봉우리에 위치해 있다. 재신봉수와 연결된 봉수로서 큰 바위에 의지하여 봉수대를 세웠다. 조선시대 만포진에 소속되어 있으면서 총용봉수와 여둔령봉수에 연결되어 있었다..
·아이성
우시군 금성리에 있는 옛 성터. 조선시대에 북방방위를 위하여 축성하였다. 충만강 하류와 압록강이 합수되는 곳의 절벽을 이용하여 이루어졌는데, 총길이는 4,272m이다. 그 중의 외성은 3,200m, 내성은 1,072m이다. 성벽은 돌과 흙을 섞어서 쌓았다. 밑너비는 4m이며 성문은 네 개가 있었다. 성벽에는 기와를 얹었다.
·유방동 劉防
김정숙군 송전리의 서쪽에 있는 마을. 지난날 외적들의 침입을 막기 위한 경비초소가 있었다 한다. 옛날 이 고장에 뛰어난 재주를 가진 유씨 성을 가진 장수가 이 마을 등성이에다 경비막을 짓고 외적들의 동향을 살폈다.
그러던 어느 날 압록강 대안에 도사리고 있던 외적들이 침입해 오자 재주를 피워 갑자기 압록강물이 몇 배나 불어나게 하였다. 강 복판에 들어섰던 외적들은 강물이 불어나는 통에 몽땅 물귀신이 되고 말았다. 이때부터 이 고장을 유방동이라고 하였다 한다.
·청마랑(淸馬廊)
의주군 의주읍 통군정 서남쪽에 있는 등성이. 압록강녘으로 행랑처럼 뻗어 있다. 의주는 옛날부터 국경관문도시로서 중국과의 왕래가 빈번하였는데, 청나라 상인들이 말파리를 끌고 이곳에 와서 국내 상인들과 무역거래를 하는 동안 말을 자주 매어 놓았던 곳이라 한다. 청마랑에는 누정형식...
·청성진(淸城鎭)[광평보]
..성노동자구의 북쪽 청성천 기슭에 있는 마을. 지난날 청성군의 청성읍 소재지였다. 고려 초부터 국방경비의 요충지대로서 1482년에 보를 수축하고 청성이라고 이름 지었다. 압록강 푸른 물결 위에 비낀 성이라고 하여 그렇게 불렀다. 지금도 지난날에 수축했던 옛 성터가 있다. 광평보라고?한다.
<벌-벌방>
·고산벌
만포시 고산리 압록강 기슭에 있는 벌. 면적 약 10㎢. 서부는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중국과 마주하며 북, 남, 동부는 낮은 구릉성산지들로 둘러싸여 있다. 고산벌은 압록강에 의하여 이루어진 단구로써 압록강 왼쪽 기슭에 반원형으로 전개되어 있다.
기반암은 고생대 사암, 점판암 등으로 되어 있으며, 그 위에 충적토가 쌓여 있다. 고산벌은 건하벌 및 중강벌과 함께 자강도의 삼대벌을 이룬다. 고산벌은 관개체계가 마련되어 주로 벼를 재배하고 있다.
무명평
신도군 비단섬노동자구의 서쪽 압록강 하구에 있던 충적섬. 압록강 어귀의 무명평, 영문강 등 충적섬과 신도, 마안도, 양도, 장도, 말도 등의 뭍섬을 제방으로 연결하여 하나의 큰 인공섬인 비단섬을 이루고 있다.
·의주벌
의주군 압록강 하류연안에 전개되어 있는 벌.
·중강벌
중강군 압록강 연안에 전개되어 있는 벌. 이 벌은 압록강의 퇴적작용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자강도에서 3대벌의 하나. 압록강 연안을 제외한 변두리는 해발 600m 안팎의 산과 구릉으로 둘러 막혀 있는데, 그 안쪽지역을 중강분지라고도 한다. 서쪽과 북쪽으로는 압록강이, 남쪽으로는 그 지류인 중강천이 흐른다.
`황금폄
신도군 북쪽 압록강 하구에 있는 섬. 비단섬 북쪽에 위치해 있다. 갈대와 잡초만 무성한 곳이라 하여 황초령이라고 하였다. 북부는 작은 강을 사이에 두고 중국 단동시와 접해 있다. 면적은 10.5㎢, 둘레는 20km, 해발은 5m이다. 황금평은 압록강과 바다의 퇴적작용에 의하여 형성된 섬으로 대부분 지역이 평야로 형성되어 있으며 토양은 충적토이다. 섬의 변두리에 16km의 제방을 쌓음으로써 황무지가 옥답으로 바꼈으며 이름난 농업지대로 변모되었다.
·신도군 황금평리
신도군 1읍 2구 1리의 하나. 군의 북동쪽에 위치해 있는 리. 압록강 어귀 40여 리의 둘레를 가진 섬으로 되어 있다. 황금평리의 동쪽과 남쪽에는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용천군이, 남서쪽에는 비단섬이 있으며 북쪽에는 압록강의 작은 물줄기를 사이에 두고 중국 단동시와 접해 있다. 1982년에 용천군 신서리를 황금평리로 개칭하였고, 1988년에 신도군 황금평리로 개편되었다.
이 지역은 압록강과 바다의 퇴적작용에 의하여 이루어진 충적섬으로서 면적은 1,203정보이고 해발은 5m이다. 산이 없고 강을 낀 조건으로 하여 안개가 자주 끼고 바람이 비교적 강하게 불며 겨울이 일찍 오고 봄이 뭍보다 10일 정도 늦어진다. 토착동물은 거의 없으며 철따라 날아드는 기러기, 물오리와 같은 조류들이 있을 뿐이다. 이 지역에서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1900년대 초이다.
광복 전 이곳은 외진 섬으로서 사람이 살지 못하는 고장으로 알려졌으며 주민들은 주로 피를 재배해왔다. 광복 후 홍수와 밀물의 피해를 막기 위한 제방이 쌓아지고 정연한 관개체계가 세워져 이 지역은 안전한 농업지대로, 특히 이름난 벼생산지로 변모되었다. 농경지는 리 전체면적의 77% 되는데, 그 중 논이 95%를 차지한다. 주요 농산물은 벼, 옥수수, 콩, 과일 등이 있으며 변두리에는 갈이 재배된다. 주요 업체로는 황금평양어장, 황금평협동농장 등이 있다. 교통은 남동부와 남부에 있는 부두를 이용하여 도내 여러 지역과 이어지는 수상통로가 개설되어 있는데, 뱃길로 군 소재지인 신도읍까지는 18km, 용암포까지는 4km이다.
<산-봉우리-바위>
·삼각산(三角山)[용운산]
의주군 의주읍의 북쪽 압록강 주변에 있는 산. 해발 80m. 세 봉우리가 뿔처럼 솟아 있다. 용운산이라라고도 한다. 서쪽 마루에는 고려 초인 1117년에 세운 통군정이 있는데, 1478년, 1653년, 1750년에 걸쳐 여러 차례 개축하면서 그 규모도 확장되었고 화려하게 단장...
`귀땜골
김정숙군 김정숙읍의 북쪽 압록강 연안에 있는 골짜기. 귀땜(귓바퀴)처럼 생겼다.
`골 무디골[묻은골]
벽동군 송사리의 북쪽 압록강가에 있는 골짜기. 옛날 의협심이 강한 옥련이라는 여승이 백성들을 못살게 구는 포악한 벼슬아치를 처단해 버렸는데, 정부는 그를 죄인으로 몰아 이 골짜기에서 참살하여 묻었다 한다. 묻은골이라고도 한다.
·오백냥바위
삭주군 청수노동자구의 북쪽 압록강에 있는 바위. 압록강의 흐름이 이 지대에 와서는 심하게 굽이지고 바위들이 물속에서 머리를 내밀고 있다.
지난날 어느 때인가 장사꾼들이 콩을 실은 배를 몰고 이곳을 지나게 되었는데, 마을사람들이 뱃길을 안내해 줄 테니 몇 냥만 달라고 하였지만 장사꾼들은 삯전이 아깝다고 저희들끼리 배를 몰고 가다가 이 바위에 부딪쳐 배가 산산조각이 났다 한다. 결국 한두 냥을 아끼다가 오백냥을 밑지게 되었다 하여 그때로부터 이 바위를 오백냥바위라 불렀다 한다.
<섬>
`어적도
의주군 어적리 압록강에 있는 섬. 소재지마을이 위치해 있다. 용운리 구리도와 나란히 압록강에 있는데, 길게 늘어져 있고 붉게 보이는 섬이라 하여 비롯된 지명이다. 쑥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위화도--평안북도 신의주시 북쪽의 압록강에 있는 섬. 압록강의 충적작용으로 그 하류에 형성된 섬인데, 행정구역상 상단리 전체와 하단리의 대부분 지역을 차지하고 있다.
·구리도(九里島)
의주군 용운리 압록강에 있는 섬. 의주읍의 북쪽 압록강에 있는 큰 섬으로서 중국과 인접해 있다.
·대관마도官馬--평안북도 의주군 용운리의 동북쪽 압록강에 있는 섬. 조선 말에 관청에서 말을 많이 사육하였다 한다. 버드나무가 많아 버들섬이라고도 한다.
`막사도
의주군 의주읍의 서북쪽 압록강에 있는 섬. 압록강 하류에 형성된 삼각주의 하나로 모래가 아득하게 깔려 있다.
`살섬-소도리도.
의주군 용운리의 서남쪽 압록강에 있는 작은 섬. 현재 구리도와 연결되어 있다. 어살을 치고 고기를 잡았다 하여 살섬이라고도 한다.
`소도리
의주군 대화리 수구도 건너편에 있는 압록강의 작은 섬. 현재 도리섬이라고도 한다. 섬 주변에 버들이 많이 자라고 있어 버들섬이라고도 한다.
`승아도-승애도
의주군 어적리의 서쪽 압록강에 있는 큰 섬. 어적도의 서쪽과 인접해 있는데, 지난날 쑥이 무성하게 자랐다. 승아도라고도 한다.
`북류초도
신의주시의 서남쪽 압록강에 있는 섬. 압록강의 충적작용에 의해 형성된 충적섬이다. 행정구역상 동류초도, 유초도와 함께 유초리에 속해 있다.
`비단군도
북서부 압록강 어귀에 이루어진 무리섬. 신도군에 속하는 열도로서 일명 신도열도라고도 한다. 제3기 말~제4기 초 서해지역이 침강하면서 형성되었다. 압록강 어귀의 비단섬과 싸리섬, 사자섬, 초개섬, 쑥섬 등 11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압로강어귀에서 가장 큰 섬은 비단섬이며 두 번째로 큰 섬은 싸리섬이다. 비단군도는 현재 화학섬유원료기지로 전환된 비단군도의 근해에서는 숭어, 농어를 비롯한 어족과 갓굴, 바지락, 개량조개 등 조개류가 많이 서식하고 있다.
`동류초도
신의주시의 서남쪽 압록강에 있는 섬. 압록강의 충적작용에 의해 형성된 충적섬이다. 행정구역상 북류초도, 유초도와 함께 유초리에 속해 있다.
`유초도
신의주시의 서남쪽 압록강에 있는 섬. 압록강의 충적작용에 의해 형성된 충적섬이다. 행정구역상 북류초도, 동류초도와 함께 유초리에 속해 있다.
압록강과 서해의 영향을 직접 받아 시내의 다른 지역보다 일최고기온이 1℃ 낮고 밤최저기온은 1~2℃ 높다. 섬에는 산림이 없고 버드나무와 풀들이 자라고 있다.
유초도는 철새들의 주요 통로의 하나로 되고 있다. 봄이면 북쪽 번식지로 가는 조류들이, 가을에는 남쪽 월동터로 가는 조류들이 유초도에 머물렀다가 가는데, 가을에 이동하는 새 마릿수는 대단히 많다.
유초도의 무진장한 모래와 자갈 등은 건축재로 많이 이용된다.
`신도열도 薪島
비단군도. 평안북도 북서부 압록강 어귀에 이루어진 무리섬. 신도군에 속하는 열도로서 일명 신도열도라고도 한다. 제3기 말~제4기 초 서해지역이 침강하면서 형성되었다. 압록강 어귀의 비단섬과 싸리섬, 사자섬, 초개섬, 쑥섬 등 11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압로강어귀에서 가장 큰 섬은 비단섬이며 두 번째로 큰 섬은 싸리섬이다. 비단군도는 현재 화학섬유원료기지로 전환된 비단군도의 근해에서는 숭어, 농어를 비롯한 어족과 갓굴, 바지락, 개량조개 등 조개류가 많이 서식하고 있다.
·마안도(馬鞍島)
신도군 신도읍의 서쪽 모래동마을 건너편에 있는 섬. 말안장처럼 생겼다는 데서 비롯된 지명이다. 면적은 0.29㎢, 둘레는 2.3km, 해발은 75m이다. 북한 영토의 제일 서쪽에 해당된다. 압록강 어귀의 무명평, 영문강 등 충적섬과 신도, 마안도, 양도, 장도, 말도 등의 뭍섬을 제방으로 연결하여 하나의 큰 인공섬인 비단섬을 이루고 있다. 섬의 정상에는 등대가 있고, 동북쪽의 넓은 간석지는 갈대밭으로 바뀌었다.
`좌초도
신도군 황금평리의 동남쪽 압록강 하구에 있는 섬.
`초개섬 草介
신도군 신도읍의 서쪽에 있는 섬. 압록강 어귀의 무명평, 영문강 등 충적섬과 신도, 마안도, 양도, 장도, 말도 등의 뭍섬을 제방으로 연결하여 하나의 큰 인공섬인 비단섬을 이루고 있다.
`사평도
삭주군 사평노동자구 압록강에 있던 모래섬.
<성-성터>
·가을파진성
김정숙군 강하리에 있는 옛 성터. 압록강 연안을 따라 축성되었다. 동서길이는 113m, 남북길이는 78m 되는 방형성으로서 돌로 쌓았다. 밑너비 2.7m, 현존높이 3.5m이다. 1500년에 처음 쌓았는데 지금은 터가 남아 있다....
`금창옹성
김형직군 금창리 동북쪽에 있는 옛 성터. 둘레 150m의 원형성으로서 돌로 쌓았다. 밑너비 3m, 현존높이 2m이다. 15세기 압록강 연안에 행성을 쌓을때 함께 축성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나난옹성羅暖甕城
김정숙군 풍양리 남쪽에 있는 옛 성터. 1500년대에 압록강, 장진강 기슭의 방어를 강화할 목적으로 축성하였는데, 가을파진성과 나난보성을 연결하는 전초방어선이었다. 남북길이 28m, 동서길이 23m 되는 방형성으로서 돌로 쌓았다. 동쪽과 서쪽에 문이 있다. 밑너비는 3.5m, 현존높이는 3m이다. 나난보성을 축성하기 전에 쌓은 성으로서 <여지승람>에는 고적으로 취급되어 있다.
`두지동옹성
김형직군 두지리 동쪽에 있는 옛 성터. 동서 164m, 남북 103m의 장방형성으로서 돌로 쌓았다. 밑너비 2.5m, 현존높이 1.6m이다. 15세기 압록강 연안에 행성을 쌓을때 함께 축성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갈전옹성
김형직군 부전리 서북쪽에 있는 옛 성터. 둘레 250m로서 돌로 쌓았다. 15세기 압록강행성을 쌓을 때 함께 축성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죽전옹성
김형직군 죽전리의 압록강 연안에 있는 옛 성터. 둘레 400m의 원형성으로서 돌로 쌓았다. 성문은 하나이다. 밑너비 4m, 현존높이 1.2m이다. 15세기 압록강행성을 쌓을 때 함께 축성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압록강 행성
김형직군 무창리의 압록강 연안에 있는 옛 성터. 15세기에 황보인이 황해북도 인산으로부터 무창까지 천리어간에 행성을 쌓고 그 후 무창에서 혜산까지 500리 구간에 행성을 쌓았는데, 이 성은 그때 축성되었다.
`고려장성(高麗長城)
의주군 금광리의 서남쪽에서 동쪽으로 쭉 뻗어 있는 옛 성터. 고려시대(11세기)에 유소 장군이 거란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압록강 하구에서 의주, 삭주를 거쳐 멀리 동해안 정평에 이르기까지 축조하였던 천리장성의 일부분이다.
`만포읍성(滿浦邑城)
만포시 세검동에 있는 옛 성터. 압록강 기슭에 위치해 있다. 둘레 1.15km의 부채형으로 되었는데 돌로 쌓았다. 1416년에 만포진이 설치되면서 쌓은 성으로서 동, 남, 북에 문이 있고 이밖에 세검정, 망미정, 객사등이 있었다....
`법동성 法洞
자성군 법동리의 산중턱에 있는 옛 성터. 자성읍성이라고도 한다. 1450년에 압록강 기슭의 기암절벽과 험한 산세를 이용하여 축성한 석성이다. 이 성곽은 외적을 방어하는 북방의 주요 보루였다고 한다. 외성과 내성으로 되어 있는데, 총길이는 약 2km이다. 내성에는 세 개의 문이 있었다고 한다.
`산양회보성(山羊會堡城)
초산군 연무리에 있는 옛 성터. 높이 1.5m에 둘레 약 500m 되는 방형성으로서 돌로 쌓았다. 동문과 남문이 있었다. 이곳은 압록강을 건너 초산을 침략하던 외적을 막는 요지이다. 1485년에 보를 설치하고 성을 쌓았으며 1883년에 폐지하였다.
`연풍진성
초산군 연풍리 소재지에 있는 옛 성터. 16세기에 설치되었다. 압록강 국경지대에 설치된 칠진중의 하나이다. 높이는 1.5m이고 둘레는 약 500m의 석성으로서 밑부분은 큰돌로 쌓고 위로 올라가면서 작은 돌로 쌓았다.
`성하동봉수(城河洞烽燧)
성간군 성간읍에 있는 봉수터. 압록강 좌안 2km 지점에 위치해 있다. 자성군의 설치와 함께 설치되어 연풍리봉수, 서해리봉수에 연결되었다. 봉수대는 한 변의 길이가 7m이고 높이는 12m 되는 방형축대를 쌓고 설치하였다....
`인차외보성(仁遮外堡城)
삼수군 포성노동자구의 압록강 연안 언덕위에 있는 옛 성터. 남북길이 135m, 동서길이 82m 되는 방형성으로서 돌로 쌓았다. 밑너비는 3.6m이고, 높이는 3m 정도이다. 1489년에 처음 쌓았는데 남문과 서문이 있었다....
`인차외보성(仁遮外堡城)
삼수군 포성노동자구의 압록강 연안 언덕위에 있는 옛 성터. 남북길이 135m, 동서길이 82m 되는 방형성으로서 돌로 쌓았다. 밑너비는 3.6m이고, 높이는 3m 정도이다. 1489년에 처음 쌓았는데 남문과 서문이 있었다....
`장성리행성
중강군 장성리에 있는 옛 성터. 압록강 기슭을 따라 반원형으로 축조되었다. 외성과 내성으로 되었는데, 외성의 길이는 14km이다. 외성으로부터 1.5km 상거한 곳에 내성이 있는데, 내성은 앞면 220m, 측면 180m의 방형을 이루고 있다. 서남, 북쪽에 문터가 있다. 성벽은 돌로 쌓았는데 밑너비는 3.5m, 현존높이는 1.5m 정도이다.
`고려장성(高麗長城)
의주군 금광리의 서남쪽에서 동쪽으로 쭉 뻗어 있는 옛 성터. 고려시대(11세기)에 유소 장군이 거란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압록강 하구에서 의주, 삭주를 거쳐 멀리 동해안 정평에 이르기까지 축조하였던 천리장성의 일부분이다.
`옥강진성(玉江鎭城)
삭주군 옥강리에 있는 옛 성터. 압록강 기슭에 있는 창성~의주 간 도로 옆에 위치해 있다. 현재 도로 옆 산기슭에서 1,000m 정도의 성벽이 남아 있다. <용만지>에 의하면 1500년에 쌓았는데 둘레 744척이라고 한다....
`옥강진성(玉江鎭城)
삭주군 옥강리에 있는 옛 성터. 압록강 기슭에 있는 창성~의주 간 도로 옆에 위치해 있다. 현재 도로 옆 산기슭에서 1,000m 정도의 성벽이 남아 있다. <용만지>에 의하면 1500년에 쌓았는데 둘레 744척이라고 한다....
<지명-지형>
`우채
강계부에 설치했던 옛 행정구역. 옛날 압록강으로 침입해오는 외적을 막기 위해 설치한 방위시설의 오른쪽에 있던 고장이라 하여 우채라고 하였다. 1839년에 강계부 여연면, 장성면, 우예면으로 분리 개편되면서 폐지되었다.
`화의 용만현
고구려시기 평안북도 의주군의 옛 이름. 물굽이를 낀 고을이라는 데서 비롯된 지명이다. <훈몽자회>에서 ‘용’을 ‘미리’로 기록되었다. ‘미리/미루’는 ‘물’을 나타낸 옛말이고, ‘만’은 ‘굽이’를 의미하는 말이므로 압록강의 물굽이를 낀 고을의 지리적 특성을 나타냈다. 한편 평화롭고 의로운 고장이라는 뜻에서 ‘화의(和義)’라고도 하였다.
`말바위여울목
혜산시 강안동 소재지의 서쪽 압록강에 있는 여울목. 말안장과 비슷한 바위를 끼고 있다.
`노을방석
의주군 의주읍 통군정 뒤에 있는 등성이. 압록강변의 벼랑 위에 위치해 있다. 등성이에 올라 멀리 저녁노을을 바라보는 풍경이 가관이었다 한다.
`노토탄 老兎
삭주군 청수노동자구의 중부 압록강에 있는 여울. 옛날 이 여울을 건너 안돌이섬에 올랐던 늙은 토끼가 돌아갈 맥이 없어 정든 제고장을 건너다보며 울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백마모루
의주군 홍남리의 서쪽에 있는 산코숭이. 모란봉줄기가 서쪽으로 뻗어 가다가 압록강 턱에 이르러 툭 떨어져 있는데, 압록강의 침식작용으로 움푹 들어가 코숭이를 형성하였다. 전설에 의하면 산성에서 뛰어 놀던 백마가 의주골로 들어가다가 압록강의 맑고 푸른 물에 발목을 잡혀 물도 마시고 풀도 뜯으면서 놀다가 돌아가는 길에 역시 이곳을 지나게 되었는데 갑자기 천둥소리가 나자 사지가 굳어져 더는 움직이지 못하고 이 모루에 묻히고 말았다 하여 백마모루라 하였다 한다.
`붉은낭마을
신도군 신도읍의 서남쪽 압록강가에 있는 마을. 강기슭 쪽으로 오랜 세월 밀물에 패어 비탈이 지면서 붉은색의 낭떠러지가 생겼다.
`천군바위
삼지연군 백두산밀영노동자구의 서쪽에 있는 바위군. 압록강변에 위치해 있다. 천군만마가 진을 치고 있는 듯한 기상을 이루고 있어 비롯된 지명이다.
`강정(江亭)
정주군 홍남리의 서북쪽 압록강지류의 유역에 있는 등성이. 물목이 좁고 학란봉을 등진 경치 좋은 강역지대이므로 정각을 짓고 낚시질도 하였다 하여 강정이라 하였다. 근로자들의 휴식처로 이용되고 있다.
·다음 자료
백두산 천지 부근에서 발원하여 우리나라와 중국의 동북 지방(東北地方 : 滿洲)과의 국경을 이루는 국제 하천으로, 혜산·중강진·만포·신의주 등을 거쳐 용암포의 초하류(稍下流)에서 황해로 흘러든다. 압록강은 허천강·장진강·부전강·자성강·독로강·충만강·삼교천을 비롯하여 100㎞를 넘는 여러 하천들과 수많은 지류로 형성되어 있다.
이 강은 직선거리로는 400㎞정도이나 상류 쪽에서 심한 곡류를 이루므로 실제 강 길이는 직선거리의 2배에 가깝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긴 강으로, 강의 길이는 803.3㎞이고, 유역 면적은 3만 1,226㎢이며, 가항 거리는 698㎞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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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칭 유래]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압록강의 물빛이 오리머리빛과 같이 푸른 색깔을 하고 있다고 하여 압록(鴨綠)이라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그러나 <사기(史記)> 「조선전(朝鮮傳)」이나 <한서(漢書)> 「지리지」에는 패수(浿水)·염난수(鹽難水)·마자수(馬訾水) 또는 청수(靑水) 등의 이름으로도 나온다. 부여에서는 엄리대수(奄利大水), 고구려에서는 청하(靑河)라고도 불리었다. 중국에서는 황하(黃河), 양자강(揚子江)과 더불어 천하의 삼대수(三大水)라고 일컬었다.
그 외 아리나례강(阿利那禮江)이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아마도 아리가 ‘태양’의 신령성(神靈性)을 나타내는 우리 고어에서 유래된 말일 것으로 보인다. 중국인들은 압록강을 ‘얄루장’이라 부르고, 영어로는 ‘얄루(Yalu)’라 표기한다.
[자연환경]
1. 지질·지형
압록강은 중생대의 구조운동에 의해 형성된 압록강단렬대를 따라 흐르고 있다. 압록강 유역의 지질은 대략 네 지역으로 나눌 수 있다. 상류 연안에 해당하는 함경남도의 신갈파진(新乫坡鎭) 부근까지의 지역은 중생대의 대동계층의 기반 위에 결정편암, 반려암이 포함된 화성암이 노출되어 있다. 그리고 신생대에 백두산에서 대규모로 분출된 현무암이 그 위를 덮어 오늘날의 개마고원을 형성하였다.
개마고원에는 송화강(松花江)의 상류에 해당하는 장진강(長津江)·허천강(虛川江)을 비롯한 여러 갈래의 강줄기가 북쪽으로 흐르고 있었다.
장진·허천 두 강이 북류하다가 압록강으로 흘러, 부근의 유로는 모두 압록강 본류의 유향과 반대 쪽인 북동 방향이다. 또한 압록강의 경사도를 보면 이 두 강이 압록강과 합류하는 점은 장진강 쪽이 낮다. 그러나 곧 허천강의 하상보다 높아져서 거의 평행한 경사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압록강의 본류가 허천강구 부근에서 갑자기 하상이 높아져 경사가 급변하는 것으로 보아, 허천·장진 두 강에 비하여 압록강이 후기에 형성되어 아직 하각침식(下刻浸蝕)이 진전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즉 제3기 후기에 장진강·허천강은 동북동으로 흘러내리다가 동북의 영고탑(寧古塔)이 있는 분지로 흐르고, 다시 목단강(牧丹江)을 피하여 우쑤리강[烏蘇里江]의 서지목릉강(西支穆稜江)으로 흘러들었다고 여겨진다. 그 뒤 압록강은 두부침식(頭部侵蝕)을 발달시키고, 강의 길이를 증가시킴에 따라 허천강과 장진강을 탈취함으로써 오늘날처럼 이들 강이 압록강으로 방향을 바꾸어 유입하게 되었다고 보인다.
신갈파진에서 만포에 이르는 압록강의 중류 연안 지역은 중강진을 정점으로 하여 압록강이 심한 굴곡을 하는 자성·후창 두 군의 북부지역으로 안산암·반려암·결정 편마암 등이 섞여 있는 복잡한 지층을 이루고 있다. 이곳에는 압록강 유역의 간헐적인 융기에 의하여 중위평탄면(中位平坦面)이 발달하였는데, 이 중에서 오수덕(烏首德) 고개는 대륙의 광활한 경관을 자랑하고 있다.
하류 지역에는 고생대 캄브리아기에서 오르도비스기에 걸쳐 분출한 화강 편마암이 넓게 분포하고 있다. 압록강 가까이에는 강남산맥이 뻗어 있는데, 이 산맥을 횡단하여 북서북 방향으로 단층선(斷層線)이 발달하고 있다. 이에 따라 생긴 저지로 태천·벽동에서 운산으로, 초산에서 희천에 이르는 단층선은 교통로로 이용되고 있다. 압록강의 하류는 퇴적층을 이루고 있으며, 특히 하구에는 넓은 범람원과 삼각주가 발달되어 있고, 넓은 충적평야가 펼쳐져 있다.
압록강은 백두산의 최고봉인 병사봉(兵使峰)의 남동 약 8㎞부근에서 발원하여 작은 계류를 형성하면서 흐르다가 보천보(普天堡) 부근에서 높은 하안단구를 이루고, 가림천(佳林川)·오시천(五是川) 등을 합하여 혜산을 지나면서 서쪽으로 유로를 바꾼다. 서쪽으로 흐르면서 수력발전으로 유명한 허천강·장진강을 비롯하여 평안북도에서 후주천(厚州川)을 합한 다음 중강진에 이른다.
상류 지역은 강폭이 비교적 좁고 유속이 빠르나, 중강진 부근에서 남서쪽으로 유로를 바꾸면서부터는 강물의 흐름이 갑자기 느려지고, 급한 여울도 많이 나타난다. 중강진에서 하류쪽으로 흘러내리면서 자성강(慈城江), 독로강(禿魯江), 위원강(渭原江), 충만강(忠滿江), 삼교천(三橋川) 등과 중국 쪽에서 훈강(渾江)을 합하여 황해로 흘러든다.
압록강은 강남산맥과 중국의 장백산맥(長白山脈) 사이를 흘러서 유역에는 급한 침식애(侵蝕崖)가 발달되었고, 대규모의 감입곡류(嵌入曲流)가 많은 강으로 유명하다. 특히 신의주에서 200㎞ 가량 상류에 해당하는 위원군 서태면의 강 건너에 있는 관통구릉(貫通丘陵 : 곡류가 절단될 때 보호사면 쪽에 남은 구릉)인 관문납자(關門拉子)와 그 상류에 있는 협착산각(狹窄山脚)인 라오후차오[老虎哨] 등이 대표적인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함경남도의 신갈파진과 혜산과의 사이에는 모식적인 감입곡류에 의한 관통구릉이 여러 개 남아 있다. 이렇듯 향사곡에서 급한 침식곡을 이루며 흐르므로 연안에는 평지가 발달하지 못하여 경지 면적이 극히 좁다. 그러나 공격사면(攻擊斜面)에는 높은 절벽이 솟아 있어서 하안에 도로마저 통하지 못하는 곳이 많다. 그러나 곡류를 하는 안쪽인 보호 사면(保護斜面) 쪽에는 군데군데 범람원이 전개되어 취락이 형성되어 있으며 고구려의 왕도가 건설되기도 하였다. 의주 이하의 하류 연안에는 비교적 넓은 의주평야가 펼쳐져서 예로부터 이 지역의 곡창 지대가 되었다. 하구에는 삼각주가 발달하였는데, 그 중에는 위화도(威化島)와 같은 범람원을 비롯하여 신우평(信隅坪)·영문강(迎門崗) 등의 하중도들이 있다.
2. 기후
압록강 유역은 우리나라의 북단을 차지하고 있으며, 바다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지역을 포함해 우리나라에서 기온의 차가 가장 큰 곳이다. 특히 중강진이 있는 중류 연안 지역은 북쪽으로 크게 굴곡하여 만주 지방으로 돌출하고 있어서 대륙의 영향을 크게 받아 심한 대륙성기후의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
중강진의 연평균기온은 3.8℃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낮은 지역이다. 7월 평균기온은 22.7℃이고, 1월 평균기온은 -20.8℃로서 기온의 연교차가 43.5℃나 되는 극심한 대륙성기후를 나타내고 있다. 1933년 1월 12일에는 -43.6℃까지 내려가 우리나라의 한극(寒極)이라고 불리고 있다. 이곳의 초빙일(初氷日)은 9월 28일, 종빙일(終氷日)은 5월 10일이어서 대체로 압록강 연안의 결빙기간(結氷期間)은 5개월이 넘을 정도이다.
유역의 강수량은 우리나라에서 제일 적은 편인데, 연평균 강수량은 500~600㎜밖에 되지 않는다. 압록강 유역은 우리나라에서 증발량이 제일 적고 습한지대로 되어 있다. 한 해 동안 하루 최대 증발량은 강계에서 10.0㎜, 중강에서 10.7㎜, 만포에서 11.6㎜이다. 압록강이 어는 시기는 지역에 따라 서로 다른데, 대체로 상류로 올라갈수록 얼음이 어는 기간이 훨씬 길어진다. 수풍호가 건설된 이후부터는 하류에서 결빙 기간이 훨씬 줄어들었다.
이와 같이 개마고원 일대는 대동강 하구지역, 낙동강 연안의 대구분지 등과 더불어 우리나라의 3대 소우 지역을 이룬다.
(3) 생태
압록강 유역 일대는 우리나라 산림자원의 보고를 이루고 있다. 압록강 유역의 기온은 겨울철에 -20∼-30℃ 정도로 내려가나 대륙성기후의 영향으로 여름철에는 비교적 고온이 되어 냉대림이 무성하다. 이 지역에는 전나무·분비나무·이깔나무·잣나무·낙엽송·향나무 등의 침엽수를 비롯하여 떡갈나무·피나무·박달나무·가래나무·자작나무·백양나무 등의 활엽수가 밀림을 이루고 있다.
예로부터 강 연안은 우리나라 특산인 산삼의 명산지였으며, 산삼은 중국·일본 등에 대한 중요한 무역품이었다. 압록강 연안 지역을 포함한 북한지방은 시베리아 동물구에 속하여 동물 분포는 대체로 중국의 동북 지방과 비슷한 점이 많다. 강 유역에 분포하고 있는 야수류(野獸類) 중 대표적인 것으로 멧돼지·노루·큰곰·표범·승냥이·이리·여우·수달·메토끼 등이 있다. 또한 혜산군 보천보 부근에는 천연기념물 제57호로 지정된 목도리담비잘이 서식하고 있다. 야수류나 금수류에는 특수한 것이 없고 전국 각지의 분포가 거의 같다.
압록강은 양어장 공업용수와 음료수 그리고 운수로로 널리 이용되고 있다. 압록강의 본류와 지류에는 잉어, 붕어, 초어, 누치, 빙어, 열묵어, 뱀장어, 가물치, 숭어, 농어, 웅어, 은어, 야레 등 107종의 물고기들이 서식한다. 강의 어패류 중에서 특이한 것은 가물치와 청사리 등이다. 특히 가물치는 보약재로 중국으로 수출되었고, 청사리는 냉수성 담수어로서 강 중류로 흘러드는 후창강(厚昌江)에서만 볼 수 있다.
〔역사와 문화유적〕
압록강 유역의 선사시대 유물·유적들은 강 본류보다는 지류에 산재해 있다. 그러나 아직 구석기시대의 유적이 발견된 적은 없으며, 신석기시대의 주거지와 토기·석기·골각기 등의 유물이 중류의 중강군 토성리, 하류의 의주군 미송리, 용천군 용연리·신암리·쌍학리 등지에서 발견되었다.
청동기시대의 유적으로는 중강군 토성리, 시중군 심귀리·노남리, 강계시 공귀동, 벽동군 송련리, 의주군 의송리, 용천군 신암리 등에서 거주지가 발굴되었으며, 이들 유적에서는 청동기를 비롯하여 토기와 반월도(半月刀)·돌도끼·방추차(紡錘車)·석검·돌화살촉 등 유물이 출토되었다. 그리고 강계시의 풍룡동과 공귀동에서는 청동기시대의 석관묘가 발견되었다. 다만 우리나라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유물이라 할 수 있는 비파형동검(琵琶形銅劍)과 세형동검(細形銅劍)은 아직 출토된 예가 없다.
초기 철기시대의 유적으로 시중군 노남리에서 야철지(冶鐵址)와 주거지, 심귀리에서는 분묘가 발견되었으며, 이들 유적에서는 철기·토기를 비롯하여 명도전(明刀錢)·오수전 (五銖錢) 등 화폐가 출토되었다. 이 밖에 중강군 토성리, 자성군 서해리, 위원군 용연동 등에서도 초기 철기시대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삼국시대에 압록강은 고구려의 영역에 속하였으며, 특히 4세기 이전에는 고구려의 수도가 이곳에 위치하였으므로 고분을 비롯하여 많은 유물과 유적들이 강 주위에 분포해 있다. 강을 중심으로 남북을 구분하면, 강 남쪽보다는 강 북쪽의 만주 지역에 더 많은 편이다. 먼저 강 남쪽 연변의 강계군 시중면을 중심으로 한 외귀면·곡하면 일대에서 고구려 초기의 집 자리가 발견되었는데, 여기서는 당시 구들의 형태가 확인되었다. 그리고 시중군·만포시·자성군·중강군·후창군·위원군·초산군 등에는 4세기 이전 고구려의 적석총(積石塚)들이 밀집되어 있는데, 많은 곳은 180여 기(基), 적은 곳은 4, 5기 정도가 있다. 강 북쪽의 만주 지방에는 고구려의 수도가 위치하였던 환인(桓仁) 지방과 집안(集安) 일대에 고구려 초기의 유적들이 널리 분포되어 있다.
고구려의 첫 도읍지로 알려져 있는 졸본(卒本)은 환인 지방의 오녀산(五女山) 부근으로 비정된다. 오녀산에는 남북 길이 약 1㎞, 동서 너비 약 300m 크기의 고구려 산성이 남아 있다. 이 산성은 넓적한 돌로 쌓았으며 북쪽은 가파른 벼랑에 의지하여 성벽을 이루고 있는데, 축성법이나 사각추의 성돌 및 자연 지세의 이용 상태, 성안의 유물들을 통하여 고구려 유적임이 확인된다. 그리고 오녀산 부근에는 산의 경사지나 산기슭에 고구려 고분들이 밀집되어 있다.
환인 지방에는 총 750기의 고분들이 남북으로 길이 1㎞의 군(群)을 형성하고 있는데 대부분이 적석총이고, 그 밖에 수혈식석곽묘(竪穴式石槨墓)와 석실봉토분(石室封土墳) 34기가 있다. 이 가운데 적석총은 3세기 이전의 것으로, 수혈식 석곽묘는 3세기 중엽 이후의 것으로 각각 추정되며, 4세기 이후의 고분은 이 지역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서기 3년(유리왕 22)에 고구려가 수도를 국내(國內)로 옮기고 위나암성(尉那巖城)을 쌓았다고 하였는데, 이 국내성의 위치가 오늘날 만주의 길림성(吉林省) 지안현에 해당한다. 따라서 지안 일대에는 국내 성지를 비롯하여 많은 고구려 고분이 남아 있다. 국내성은 총면적 42만㎡의 방추형 석전(石殿)으로 높이가 5∼6m, 성벽 밑 부분 너비는 9∼10m, 성안의 벽 높이는 3∼5m 정도이다.
<집안현지(集安縣志)>에 의하면, 1905년(광무 9) 당시까지만 해도 옹성을 갖춘 문이 동벽 남쪽에 1개, 서쪽에 2개가 있었으며, 남벽 동쪽과 북벽에는 문을 막은 흔적이 1개씩 있었다고 한다. 성의 네 귀퉁이에는 누각의 흔적이 보이고, 일정한 거리마다 치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현존하는 치는 동벽 3개, 서벽 1개, 남벽 2개, 북벽 2개 등 모두 7개이다.
성밖에는 해자(垓字 : 성 밖으로 둘러 판 못)의 흔적이 부분적으로 남아 있다. 지안현의 통구(通溝)에는 고구려의 고분들이 특히 많이 밀집되어 있다. 광개토왕의 능으로 알려져 있는 장군총(將軍塚)도 그 가운데 하나이며, 또한 모두루총(牟頭婁塚)·각저총(角抵塚)·무용총(舞踊塚)·사신묘(四神墓)·산련화총(散蓮花塚)·구갑총(龜甲塚)·미인총(美人塚) 등 벽화고분도 다수 발굴되었다.
국내성지로부터 북쪽으로 2.5㎞ 떨어진 지점에는 해발 678m의 환도산(丸都山)이 있는데, 여기가 고구려의 환도성이 있던 곳이다. 성벽은 화강암으로 쌓았고, 전체 길이는 동벽 1,716m, 서벽 2,440m, 남벽 1,786m, 북벽 1,009m이다. 성문 자리는 동벽과 북벽에 각 2개, 남벽에 1개가 있고, 성 안에는 3개의 건축 유지와 연못 1개, 고분 37기가 있다.
이 고분들은 모두 고구려의 것으로 토분이 1기이고 그 밖에는 모두 석분으로, 적석묘(積石墓)·방단적석묘(方壇積石墓)·방단계단적석묘(方壇階段積石墓) 등의 유형이 있다.
지안 일대는 고구려 건국 이후로 줄곧 고구려의 중심지가 되었으나, 고구려가 멸망한 뒤에는 강 유역이 대부분 발해의 영토가 되었으며, 하류의 일부는 당나라에 속하였다. 특히 중류의 임강(臨江)에는 발해의 5경(五京) 가운데 하나인 서경압록부(西京鴨綠府)가 설치되어 지방 제도의 중심이 되었다.
발해가 멸망한 뒤에는 중류 지역에서 발해 유민들에 의해 정안국(定安國)이 세워졌으나, 하류에서는 여진족이 산거하였다. 그 뒤 거란이 점차 강성해지면서 986년(고려, 성종 5)에 정안국을 멸망시키고 강 하류의 여진족을 경략하여, 991년(성종 10)에 내원성(來遠城)을 쌓음으로써 중·하류 지역이 모두 거란의 영역이 되었다.
993년(성종 12)에는 거란이 고려를 침입해 왔으나, 고려는 서희(徐熙)의 외교에 힘입어 강동 6주(江東六州)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로써 고려의 북쪽 경계가 처음으로 압록강에까지 미치게 되었다. 이듬해에는 의주(義州)에 압록강도진(鴨綠江渡鎭)이 설치되고 구당사(勾當使)가 파견되었다. 그러나 강 유역의 대부분은 여전히 거란이 차지하였고, 고려가 차지한 곳은 의주 등 최하류 지역이었다. 그 뒤 거란의 침입이 계속될 때마다 의주 일대에는 많은 방어진(防禦鎭)들이 설치되었는데, 흥화진(興化鎭)을 비롯하여 위원진(威遠鎭)·정융진(定戎鎭)·영덕진(寧德鎭)·정주진(靜州鎭)·영삭진(寧朔鎭) 등이 그것이다. 또한 현종 때에는 강감찬(姜邯贊)이 이곳에 백마산성(白馬山城)을 쌓았음은 물론 이곳을 기점으로 1033년(고려, 덕종 2)부터 1044년(정종 10)까지 천리장성을 축조하였다.
고려 후기에도 강 유역의 영속 관계에는 큰 변동이 없었다. 다만 중·상류지역이 북중국에서의 왕조 교체에 따라 거란·여진·몽고에 차례로 속하였다. 1270년(원종 11)에는 몽고가 서경(西京 : 지금의 平壤)에 동녕부(東寧府)를 설치하고 자비령(慈悲嶺) 이북을 직접 다스리면서 의주 일대도 역시 이에 속하였으나, 1290년(충렬왕 16)에 동녕부를 만주의 개원(開原)으로 옮김으로써 다시 고려의 영토가 되었다.
1369년(공민왕 18)에는 의주·강계·이성(泥城 : 지금의 昌城) 등에 만호부(萬戶府)를 설치하여 중류 지역에까지 진출하였으며, 다음해에는 강을 넘어 개원의 동녕부를 공략하였다. 1388년(우왕 14)에는 이성계가 요동정벌을 중단하고 의주 대안의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새 왕조를 세웠다.
조선 초기부터 적극적인 북진정책이 추진되어 태종 때 갑산(甲山)·여연(閭延)·이산(理山) 등지의 야인(野人 : 女眞族)을 물리치고 압록강 이남 지역을 확보하였다. 그러나 이 지역에 대한 야인들의 침략이 계속되었으므로 세종 때에 다시 이들을 토벌하고 여연·자성(慈城)·무창(茂昌)·우예(虞芮)의 4군(郡)을 설치하여 압록강을 경계로 국경선을 확정하였다.
이후 압록강은 관방진지(關防陣地)로서 강 연안에 성(城)·진(鎭)·보(堡)·봉수대(烽燧臺)와 누각(樓閣) 등이 곳곳에 세워졌다. 먼저 최상류의 허천강 유역에 있는 갑산에는 인차외진(仁遮外鎭)이 설치되었는데, 이곳은 대안의 만주 장백현(長白縣)과 국경상에서 야기되는 여러 문제들을 조절, 관할하는 동시에 국경 수비의 요새지로서 조선 말기까지 유지되었다.
또한 후창강과 압록강이 합류하는 지점에는 1674년(현종 15)에 처음으로 첨사(僉使)를 두고 후주성(厚州城)을 쌓았는데, 지금도 성지가 남아 있다. 자성에는 여연면과 장토면(長土面)에 세종 때 4군이 설치되었던 여연성지와 우예성지가 있다. 이 성의 구축은 당시 동가강(佟佳江;渾江) 유역의 야인들이 여연부의 서남쪽을 침범할 것에 대비하여 축조된 것이다. 압록강의 지류인 독로강 유역에 자리잡고 있는 강계읍성도 1436년(세종 18)에 세워진 것으로, 1739년(영조 15)에 한 차례 개축되었다.
성 안에는 인풍루(仁風樓)와 망미정(望美亭)이 있다. 강계와 압록강변을 잇는 만포진에는 병마첨절제사영(兵馬僉節制使營)과 군창(軍倉) 그리고 행성(行城) 등이 있으며, 만포읍 동쪽의 압록강 기슭 절벽 위에는 세검정(洗劍亭)이라는 정자가 있다. 세검정은 인조 때에 박남여(朴南與)가 압록강을 건너 침입해오는 청군을 물리치고 칼을 씻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만포읍의 포상동(浦上洞)에 있는 고산진(高山鎭)은 세조 때에 남이(南怡)가 여진족을 무찌른 곳이다.
압록강의 지류인 위원강 유역에는 위원고성(渭原古城)이 있는데, 이 성은 1443년(세종 25)에 위원군을 설치하면서 여진족을 방비하기 위하여 쌓은 것이다. 위원강 상류에는 자연 암벽과 산등성이에 의지하여 쌓은 옛 성이 있는데, 이는 1743년(영조 19)에 압록강의 홍수와 외침에 대비하여 위원읍을 이곳에 옮기면서 쌓은 것이다. 성 안에는 위원읍이축성비(渭原邑移築城碑)가 있어 변방을 지켜낸 사실들을 기록하고 있다.
좀 더 하류 쪽의 자산과 삭주에는 자모산성(慈母山城)과 대삭주산성(大朔州山城)이 있으며, 성 안에는 군영지(軍營址)와 군창이 남아 있다. 이 가운데 삭주의 군창은 인근의 박천·가산·태천 등지에서 관조세(官租稅)를 거두어들이던 곳이다. 삭주성에는 2개의 행성과 구령보(九寧堡)가 딸려 있으며, 주변의 진(鎭)으로는 천마진(天摩鎭)과 구령진이 있다. 구령진은 의주 청수진(靑水鎭)과 강외 노상탄(老上灘)의 통로 및 강외 황발리(荒發里) 아래 전량동(田兩洞)의 통로를 방어하는 요지이다.
벽동에는 읍성이 있고 주위에 3개의 행성과 목책(木柵)·보·봉수지(烽燧址) 등이 있다. 압록강의 최하류인 의주에는 돌로 쌓은 읍성이 있고 사면에 모두 문이 있으며, 문마다 옹성이 갖추어져 있다. 또한, 의주읍의 객관(客館) 북쪽에는 통군정(統軍亭)이 있어 사방을 관찰하게 되어 있으며, 통군정 봉수대는 주변 20여 개의 봉수대와 연결되어 있다.
읍성 남쪽의 압록강변에는 의순관(義順館)이 있는데, 중국의 사신을 맞이하던 곳으로 본래 망화루(望華樓)라 하던 것을 세조 때에 ‘누’를 없애고 ‘관’이라 하였다. 의주에도 역시 군창이 있어 평안도 내의 철산·곽산·정주·선천·용천 등지에서 관조세를 거두어들였다. 또한, 의주 북쪽의 구룡연(九龍淵) 위에는 압록강사(鴨綠江祠)가 있다. 압록강이 장단(長湍)의 덕진(德津), 그리고 평양강(平壤江)과 함께 서쪽 지방의 큰 강이므로 사전(祠典)의 중사(中祠)에 실리고, 이곳에서 매년 봄과 가을마다 향축(香祝)을 내려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한편 예로부터 의주는 중국과의 교역의 중심지로서 매우 중요시되었으며, 1593년(선조 26)에는 유성룡(柳成龍)의 건의에 따라 의주 대안의 중강(中江)에 개시(開市)하고 명나라와 무역을 행하였다.
이 때의 중강 개시는 임진왜란 중의 기황(飢荒) 때문에 요동의 미곡을 들여오기 위해서였다. 1601년(선조 34)에 한때 중단되었으나 다음 해에 재개되었으며, 1609년(광해군 1)에 다시 중단되었다가 청나라의 건국과 함께 1646년(인조 24)에 재개되어 대청 무역이 행해지게 되었다.
한말에 이르러서는 상류의 원시림이 서구 열강들에게 침탈되어, 1896년 아관파천 직후에 러시아가 삼림채벌권을 차지하였다. 일제 강점기에도 강 유역의 원시림을 마구 벌채하여 뗏목을 만들어 수송함으로써 삼림이 황폐해졌다. 1911년에는 신의주와 중국의 안둥[安東]을 잇는 길이 944m의 철교가 준공되었는데, 철로 좌우에는 너비 2.6m의 인도가 있으며, 선박의 통행을 위하여 가동식(可動式)으로 설계되었다. 그러나 1934년부터 교량 보존을 위하여 개폐 장치를 사용하지 않고 있다. 1937년부터는 삭주군 수풍리에 동양 최대 규모의 댐과 수력발전소가 착공되어 1944년에 완성되었다. 이 밖에 강 연변에는 일제 강점기 때의 우리나라 독립군의 항쟁지가 곳곳에 있다.
〔문학·예술에 나타난 모습〕
압록강은 신화시대로부터 그 물이 상징하는 의미와 함께 중요한 사유의 대상이 되었다. <삼국유사> 「고구려조」에는 자칭 천제(天帝)의 아들인 해모수(解慕漱)가 물의 신 하백(河伯)의 딸 유화(柳花)를 꾀어내어 압록강가에서 사통한다는 기록이 있다. 해모수와 유화는 고구려 건국 시조인 주몽(朱蒙)의 부성(父性)과 모성(母性)에 해당된다. 이때의 압록강은 고대 신화 세계에서의 물이 상징하는 바의 생산과 풍요, 그리고 모태(母胎)로의 회귀라는 원초적인 의미를 지닌다.
고구려 건국 신화와 관련되어 압록강이 신화적 상징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문헌 기록으로는 <삼국유사> 외에도 <삼국사기>·<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제왕운기(帝王韻紀)>·<신증동국여지승람>·<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등이 있으며, 중국의 역사 기록물에도 그 면모가 남아 있다. 특히 이규보(李奎報)의 <동국이상국집>의 동명왕편(東明王篇)에는 “성 북쪽에 청하가 있으니, 하백의 세 딸이 아름다웠다. 압록강 물결 헤치고 나와, 웅심 물가에서 놀았다.”라는 구절이 있다. 이와 같이 신화적 사유의 대상이던 압록강은 후대로 내려올수록 시적 정서를 표출하는 배경이나 대상으로서 술회된다.
압록강은 특히 한시로 많이 읊어졌는데, 이제현(李齊賢)의 「조정으로 돌아가는 이한림을 보내며[送李翰林還朝]」, 권근(權近)의 「압록강을 건너다[渡鴨綠]」·「압록강에 배를 띄우고서[鴨綠江泛舟]」·「압록강을 지나면서[過鴨綠江]」, 강희맹(姜希孟)의 「압록강을 지나면서[過鴨綠江]」, 성중엄(成重淹)의 「성 마루에 올라 압록강을 바라본다[登城頭望鴨綠江]」 등이 있다.
먼저 이제현의 「송이한림환조」에는 “압록강 푸른 버들은 이별을 아끼지만 금원에 핀 꽃들은 좋은 놀이를 기다리리 술잔 들며 언제 다시 회포를 논해볼까 백발인 내 신세를 산수간에 부치려네[鴨江柳暗牽離思 鼇禁花開待勝遊 樽酒論懷更何日 白頭身事付蒼洲]”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 시에서 압록강은 이별의 배경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이 시는 조정으로 돌아가는 벗을 배웅하면서 읊은 시이므로, 강 건너로 보낼 때의 애절한 이별의 정서보다는 강가에 피어 있는 꽃들과 버들의 신선함에 대비되는 자신의 늙음에 대한 울적한 정서가 지배적이다. 이때의 압록강은 일반적으로 강이 환기하는 이미지인 ‘늘 푸르름’, ‘흘러감’, ‘뱃놀이의 풍치’ 등의 범주에 속해 있다. 이런 관점에서 압록강을 다루고 있는 다른 시들로는 권근의 한시 「압록강범주」와 강희맹의 「과압록강」, 성중엄의 「등성두망압록강」 등이 있다.
「과압록강」의 “학 나는 들 저문 산은 푸르러 눈썹 같고 압록강 가을 물은 쪽빛보다 더 진하네[鶴野晩山靑似黛 鴨江秋水碧於藍].”라는 구절은 자연 환경으로서의 강이 환기하는 서정에 넘치면서도 쓸쓸한 분위기를 그려내고 있다.
한편, 문학 작품 속에서 압록강이 환기하는 가장 주된 이미지는 역시 변방 혹은 국경으로서의 의미이다. 먼저 한시로는 권근의 「도압록」을 들 수 있다. 중국으로 사신 가는 신하가 압록강에 이르러, 또 강을 건너면서 느끼는 회포를 읊은 작품이다. 작품 첫머리에서 “쓸쓸하다 변방 고을 나무나무 고목인데 한 가닥 긴 강물 요양성 건너로세[塞邑蕭條樹老蒼 長江一帶隔遼陽].”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외진 변방의 쓸쓸함과 국경 근처의 분위기를 묘사한 다음, 그 국경을 건너기 위하여 배를 탄 상황 묘사를 “파도에 맡기어라 작은 배 흔들리고 반가워라 하늘의 해 외딴 곳을 비추누나[任見波濤掀小艇 欣瞻天日照遐荒].”라고 하여 매우 사실적이고 실감나게 읊고 있다.
시조로는 <병와가곡집(甁窩歌曲集)>과 <진본청구영언(珍本靑丘永言)>에 실려 있는 홍서봉(洪瑞鳳)과 장현(張炫)의 작품을 들 수 있다. 병자호란으로 효종이 인질 수난을 당할 때에 그를 따라 수행한 홍서봉과 이들을 배웅한 장현의 처절하고도 아픈 이별의 정한이 강 풍경과 함께 애절하게 노래하였다.
홍서봉의 작품을 보면 “이별하든 날에 피눈물이 난지만지, 압록강 내린 물이 프른 빗치 전혀업네. 배 우희 허여셴 사공이 쳐음본다 하더라.”라고 하였다. 여기서는 ‘이별’과 ‘피눈물’, 그리고 ‘프른 빗치 젼혀업는’ 강물의 애잔함을 ‘허여셴 사공’의 ‘쳐음 본’ 눈을 통하여 간절한 정서로 노래하였다.
장현도 “압록강 해진 날에 에엿분 우리님이, 연운만리를 어듸라고 가시는고 봄풀이 푸르거든 즉시 도라오소셔.”라고 읊었다. 이는 보내는 안타까운 심정을 ‘해진 날’의 쓸쓸한 분위기와 멀고 먼 중국 땅에의 인질 수난이 하루 빨리 돌이켜지길 기원하는 마음을 묶어, ‘봄풀’이 돋는 이듬해엔 ‘즉시 도라올’ 것을 애절하게 노래하였다. 이 작품들을 통해 본 압록강은 어버이 나라를 떠나는 마지막 길목이라는 상징적 의미의 배경 아래, 그 이별의 모질고 고통에 찬 순간을 장식하는 곳이었음을 보여준다.
이후 압록강은 시대의 변화와 함께 중국과 교류가 빈번해지면서 문학작품 속에서도 보다 구체적인 모습으로 드러났다. 박지원(朴趾源)의 <열하일기(熱河日記)>를 보면, 그 첫 편이 「도강록(渡江錄)」이다. 이 작품은 압록강을 건너 요양 땅에 이르기까지의 15일 동안의 행적을 기록한 기행수필이다. 박지원은 여기에서 압록강의 명칭과 유래를 비롯하여 그 발원지와 장마 뒤에 강의 모습을 박진감 넘치는 표현으로 묘사하였고, 강 주위의 풍치와 자신의 느낌을 세밀한 필치로 구사하였다.
실제로 국가 사이의 행정적·정신적 구분의 의미를 지녔던 압록강을 건너는 데 따르는 심리적 기대감과 건너는 과정에서의 강물 묘사 등이 매우 탁월한 비유와 감각적 표현으로 세밀하게 그렸다. 여기에서의 압록강은 대륙과의 경계를 의미하여 우리 민족과 이민족을 지리적으로 구별해줄 뿐만 아니라, 정신적 지주로서의 상징적 의미도 갖는다. 당대 실학적 사상 배경 속에서 태동된 주체적 사고의 일면을 상기시키기도 한다.
일제 강점기에 들어서면서 압록강은 눈물의 강이 되었다. 정든 고향과 사랑하는 부모를 떠나 만주로 북간도로 쫓겨가면서 마지막 관문이 된 압록강은 여러 문학작품들의 소재가 된 것이다. 김형원(金炯元)의 「압록강반에서」(1933년)를 보면 “개화 후 이 강 건너 드난 이 몇만 명가. 그들이 뿌린 눈물 네 품에 고였으니. 오리강 너 혼자서 속사정 알지 않니. 내 사랑 내 사랑 오리강 내 사랑.”이라고 하여 압록강에 어린 우리 민중의 한을 표현하였다. 유도순(劉道順)의 「압록강 뱃사공」(1935년)에는 뱃사공을 시적 화자로 한 배따라기 형식으로 압록강의 물결을 ‘슬픔’과 등식화하였다. 또한 압록강 연변의 산정마다 깎아 붙인 화전민들의 삶을 그린 시도 있다. 이찬(李燦)의 「북방도(北方圖)」(1940년)에는 화전민촌의 한 ‘시악시’의 풀 길 없는 하소연을 압록강에 띄워 보내는 구절이 있다.
광복 후, 중국땅 신경(新京)에 거주하던 피난민이 광복 직후 귀향하는 기차 속에서 겪은 이야기를 소설화한 것이 김만선(金萬善)의 「압록강」(1946년)이다. “제길헐, 기왕 자살을 하려거든 압록강 추렁추렁하고 깊숙한 물 속에나 빠질 게지(중략) 기껏 여기까지 와서 모래밭으로 떨어져 만주 떼거지 같은 까마귀떼의 밥이 된담!” 등의 독백에서 조국으로 빨리 돌아가고 싶은 안타까운 심정과 함께 압록강이 조국과 등가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표현했다.
한편 1946년 독일에서는 이미륵(李彌勒)의 소설 「압록강은 흐른다」가 독일어로 출판되어 일약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황해도의 양반 가문 출신인 작가가 일제의 탄압을 피하여 압록강을 건너고 대륙을 가로질러 독일에서 정착하기까지의 과정을 민족적 정서를 바탕으로 그린 소설이다. 이 소설은 1인칭으로 된 자전적 소설이다.
이 소설은 ‘인종이나 민족의 차별이 없이 인생 그 자체의 최고의 가치는 정직함과 선량함이라는 것’이라고 평가되거나 “그는 이방인인데도 우리와 외계와의 이해관계에 있어서는 자기 것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것을 깊이 파고들어가 실천해 나가는 데에 있다.”하는 등 개인적 경험이 예술적 차원에서 형상화되고 있다는 점에서 많은 격찬을 받았다. 이 작품에서의 압록강은 우리의 정신적 고향이며 지주로서, 근원의 강, 그 가슴속에 항상 흐르고 있는 어버이 나라에 대한 향수와 정신적 발원지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이와 같이 압록강은 문학작품 속에서 신화적 의미를 지닌 상징적 배경으로, 국경이 자아내는 외지고 쓸쓸한 정조와 함께 순수한 자연 경관으로, 국경을 건너야 하는 이들의 쓰라린 이별과 시대적 수난의 배경으로, 마음의 고향을 의미하는 뿌리의 상징으로 나타나고 있다. 요컨대, 압록강은 우리의 시조가 탄생한 신화적 공간이면서 동시에 시대적 상황의 변화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민족의 심성에 비추어진 민족의 강이라고 할 수 있다.
[현황]
1. 수자원
압록강은 우리나라에서 포장수력자원이 가장 큰 강이다. 1920년대 이후 강의 지류와 본류 여러 곳에 대규모의 수력발전소가 건설되었다. 1929년에 부전강발전소가 건설되었는데, 제1발전소는 유효낙차가 707m, 발전시설용량은 14만 4000㎾로 당시 규모에 있어서 동양 제일을 자랑하였다. 제2발전소는 4만 6000㎾, 제3·제4발전소가 각각 2만㎾, 1만 3000㎾로서 총 발전시설은 22만㎾에 달하였다. 이곳에서 발전된 전력은 흥남의 질소비료공장에 송전되고, 일부는 성진·청진 등에도 송전되었다. 이 발전소는 함경산맥의 지형을 이용한 유역변경식(流域變更式) 발전으로 유명하다. 함경산맥은 개마고원의 남쪽 경계를 이루면서 동해안에 접근해 있어서 동해 사면은 급경사를 이루고 압록강 사면은 느린 경사를 이루고 있다. 그리하여 부전강에 댐을 쌓고, 여기에 고인 물을 함경산맥 밑으로 뚫은 도수로를 통해 동해 사면으로 떨어뜨려 그곳 사면에서 발전하는 방법을 택하였다. 부전강의 서쪽을 흐르는 장진강에도 같은 유역변경식발전소인 장진강발전소가 있다.
장진강 상류인 장진군 상남면 갈전리에 주위가 120㎞나 되는 제1장진호를 이룬 댐을 구축하고, 24㎞의 터널로 함경산맥의 황초령(黃草嶺) 허리를 뚫은 다음 동해 사면을 흐르는 흑림강(黑林江)으로 낙하시켜 발전을 한다. 장진강 제1발전소는 유효낙차가 407m이며, 발전시설용량은 14만 4000㎾나 되고, 제2발전소는 10만㎾이며, 제3·제4발전소로 이어져서 총 발전시설용량은 33만 4000㎾에 이른다. 장진강발전소는 1931년에 준공되었는데 이곳의 전력은 부전강발전소의 전력과 함께 흥남을 비롯한 관북 지방의 전력 수요에 응하는 한편, 광복 전에는 멀리 평양·서울에까지 송전을 하였다. 개마고원을 장진강과 함께 북류하다가 압록강으로 흘러드는 허천강에도 비슷한 수력발전소가 있다.
1941년에 허천강 상류에 해당하는 웅이강(熊耳江)과 황수원강(黃水院江)의 여러 곳에 댐을 축조하여 이 물을 부전령산맥을 뚫고, 그 물을 홍원 부근에서 단천 남대천(端川南大川)으로 낙하시켜 발전을 한다. 홍원에 있는 허천강 제1발전소는 발전시설용량이 14만 5000㎾이고, 제2발전소는 6만 9000㎾, 제3·제4발전소는 각각 5만 8000㎾, 6만 6000㎾로서 총 발전시설용량은 35만 4000㎾이다.
압록강의 중류 지역인 삭주군 수풍면에는 1937년부터 광복 직전인 1944년 사이에 당시 세계적인 수력발전소로 알려졌던 수풍발전소가 축조되었다. 이 댐은 유효낙차가 100m밖에 안 되는 저낙차발전소(低落差發電所)이기는 하나 이 댐으로 만들어진 수풍호(水豊湖)는 그 면적이 345㎢나 되는 거대한 것이어서 유량이 풍부하므로 발전량이 64만㎾나 되어, 중국과 반반씩 전력을 나누었다. 이 전력은 신의주·평양 등에 송전하는 한편으로 청수·수풍을 중심으로 하는 화학공업을 발달시켰고, 카바이트·알루미늄공업 등을 발달시켰다. 정주에서 수풍 사이에 부설된 평북선은 수풍발전소를 건설하기 위한 각종 자재를 수송하기 위하여 부설된 철도인데, 오늘날에는 지역 발전을 위하여 이용되고 있다. 광복 전에 착공하였다가 광복 후에 북한에서 완공한 발전소로 운봉(雲峰)발전소와 독로강발전소가 있다. 운봉발전소는 만포에서 상류 쪽인 자성군 삼풍면 운봉동에 건설된, 압록강 본류에 건설하기로 예정된 일곱 개의 수력발전소 중에서 수풍에 이어 두번째로 건설된 발전소이다. 운봉발전소는 1949년에 준공되었는데, 출력은 50만㎾ 예정이었으나 25만㎾ 시설의 발전소로 건설되었다.
독로강발전소는 장진군 북면 이상리에 댐을 막아 만들어진 장진강 제3저수지의 물을 낭림산맥의 아득령(牙得嶺)을 터널로 뚫어 평안북도의 독로강으로 낙하시켜서 발전을 하는 유역변경식발전소이다. 1938년에 착공하여 1947년에 준공 예정이었으나, 공정 70% 과정에서 광복을 맞이하였다. 제1발전소는 강계군 공북면 문암동, 제2발전소는 공북면 승방동에, 제3발전소는 강계읍의 북문 밖에 있다. 이들은 총 25만㎾를 발전하고 있다.
2. 관광자원
압록강이나 그 연안에는 대륙적인 광활하고 웅대한 경관이 전개되어서 우리나라 특유의 섬세하고 우아한 자연 경관과 대조를 이루는 곳이 많다. 압록강의 수원을 이루는 백두산은 관광 시설이 갖추어지면 원지(圓池)·신무성(神武城)·천지(天池) 등을 관광지로 개발할 수 있으며, 온천도 많이 개발할 수 있다. 개마고원에는 부전호·장진호 등이 있어 광복 전 조선 8경의 필두로 선정되었으며, 부전호반은 우리나라의 몇 안 되는 휴양지였다.
평안북도에는 후창군의 금강굴(金剛窟)·나죽석벽(羅竹石壁), 자성군의 갈전협(葛田峽)·오수덕고개 등이 있다. 강계군의 세검정(洗劍亭)·인풍루(仁風樓), 위원군의 봉천대(奉天臺)·숭정산(崇楨山), 초산군의 신막굴 등이 유명하다. 또 벽동군에는 구봉산(九峰山)·탄금정(彈琴亭), 삭주군에는 수풍호·삭주온천·명당산(明堂山), 의주군에는 통군정·의주성(義州城)·추월암(秋月庵) 등이 있다. 신의주에는 민족의 애수를 대표하는 압록강 철교가 있고, 부근에 천리장성과 위화도 등의 유적이 있다.
3. 임업자원 및 기타
압록강 유역은 원시림이 우거져 있어 우리나라 최대의 임업지역이다. 중류와 상류 유역에서 벌채된 원목은 수풍댐이나 만포선·혜산선 같은 삼림철도가 건설되기 전에는 혜산이나 신갈파진에서 집산되어 뗏목으로 하구의 신의주까지 운반되었다. 그러나 현재는 혜산선을 이용하여 길주·성진 등으로 운반되고 만포선을 통하여 평양 등지로 운반된다. 과거 광복 전에는 서울까지 수송되기도 하였다. 이곳의 원목들은 질이 좋아 주로 전주·침목·갱목·건축용재·토목용재로 이용되며, 신의주·길주·만포 등에서는 제재·제지·펄프공업이 발달하였다.
압록강 유역의 임산자원은 풍부해서 일본이 러일전쟁을 일으킬 때 압록강의 목재를 벌채하여 얻은 수익금으로 그 비용를 충당할 정도이다. 압록강에서는 예로부터 자가사리, 뱀장어, 돌잉어, 참붕어, 메기, 논갱이, 버들치, 새미, 가물치 등이 많이 잡혔다. 독로강, 충만강, 후창강 등의 상류에서는 열목어(熱目魚), 종개 등이 잡히고, 얕은 여울과 모래톱에서는 펄조개가 많이 잡힌다. 압록강 연안에서는 강가에 무성한 활엽수의 잎을 사료로 하여 산누에를 치는 농가가 많았으나 광복 직전에 거의 없어졌다. 압록강 유역에는 금·은·납·아연·흑연·운모 등의 지하자원이 풍부하여 광복 전에 일본인들에 의해서 개발되었다.
한편 중국과 국경을 이루어 강을 건너 중국과 연결된 철도가 있다. 경의선의 종점인 신의주에서 중국의 안둥을 연결하는 압록강철교가 있는데, 이 철교는 광복 전에는 남만주철도, 시베리아철도에 이어져서 육로로 세계일주를 하는 간선철도를 이루었다. 다음으로 평북선은 정주와 수풍댐 사이에 통한 철도로, 강을 건너 중국의 철도와 연결된다. 만포선은 서포(西浦)에서 희천·강계를 거쳐 만포에 이르고, 압록강철교를 거쳐 중국의 지안에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