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형이상학Metaphysics의 Meta-는 초인Superman의 Super-와 비슷하다. 그것은 다음의 것이며, 그 너머의 것이며, 한편으로는 그 이전의 것이기도 하다. 부모는 자식 너머의 것이며, 자식 이전의 것이다. 근거는 사실 이전의 것이며, 사실을 뛰어넘는 것이며, 사실 너머의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항대립적 사고에 익숙해 있다. 이것이 아니면 저것이라는 식이다. 저것은 이것의 반대편에 있다. 틀렸다. 정상은 산봉우리 너머에 있다. 뿌리는 줄기 다음에 있다. 진실은 더 깊은 곳, 더 높은 곳에 있다. 구조는 반대편에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한 방향으로 계속 가야만 한다.
인간이 본 것 너머에 아는게 있고, 아는 것 너머에 존재가 있고, 존재 너머에 진리가 있고, 진리 너머에 신이 있다. 그것을 그것이게 하는 그것이 있다. 안의 안의 안의 안에 있고 너머 너머 너머 너머에 있다. 거기서 모두 만난다. 대립적 사고에서 초월적 사고로 갈아타지 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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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거짓을 말하는 이유는 진실을 말할 기술이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지식에 처음 의문을 품은 사람은 소크라테스다. 그는 지식이 지식이 아님을 알았다. 지식의 지식에 의해 지식은 완성된다. 그것은 존재다. 자연의 존재에 처음 의문을 품은 사람은 플라톤이다. 그는 존재가 존재가 아님을 알았다. 존재의 존재에 의해 존재는 완성된다. 그것은 진리다. 신과 진리와 존재와 지식과 인간을 한 줄에 꿰어 하나의 사건으로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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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아는 진리 개념은 플라톤의 이데아 개념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는 그림자 반대편에 빛이 있듯이 거짓의 반대편에 진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동양의 진리 개념은 도道다. 도는 연결되어 있다. 플라톤의 이데아론은 그러한 연결을 부정한다. 하나를 선택하고 하나를 버리는 이분법적 사고다.
플라톤.. 우리가 보는 세상은 허상이고 다른 곳에 이데아 세상이 있다.
구조론.. 단순한 것이 변화하며 복잡해진다. 처음 단순한 것이 진리다.
진보와 보수는, 선과 악은, 화살의 머리와 꼬리처럼 연결되어 있어서 거기서 하나를 가지고 하나를 버릴 수 없다. 뿌리를 자르면 뿌리가 돋아나고, 싹을 자르면 싹이 돋아난다. 보수를 잘라내면 보수가 돋아나고, 진보를 잘라내면 진보가 돋아난다. 우리는 전진하는 방향을 판단할 수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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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를 봤다면 내가 본 것이다. 어제 본 사과와 오늘 본 사과가 같은 사과라는 것이 지식이고, 어제 본 사과와 오늘 본 사과가 같은 사과나무에서 갈라져 나왔다는 것이 존재다.
인간이 보는 것을 보는 것이 지식이고, 지식의 지식이 존재고, 존재의 존재가 진리고, 진리의 진리가 신이다. 메타인간, 메타관측, 메타지식, 메타존재, 메타진리로 신에 이른다.
진리는 고착된 것을 가리키는 두 단어를 변화를 반영하는 한 단어로 통합한다. 진보와 보수 대신에 하나의 문명성을 깨닫고, 선과 악 대신에 하나의 사회성을 깨달아야 한다.
변화의 시작점에서 진리는 단순하고, 변화의 전환점에서 존재는 복잡하고, 변화의 도착점에서 지식은 다양하다. 진리는 우주 모두가 공유하는 하나의 의사결정 메커니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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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한 진실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은 멍청하다. 아는게 없을 뿐 아니라 안다는게 뭔지도 모른다. 대화할 수조차 없다. 언어를 모르기 때문이다. 더욱 생각할줄도 모른다. 생각이 감각에 의해 방해받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마음이 조종되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마음을 알고, 생각을 알고, 언어를 알면 배울 준비가 갖추어진 것이다. 지식의 빌드업 과정은 험난하다. 백지를 준비해 오지 않은 사람에게는 그리기를 가르칠 수 없다.
힘
인류가 모르는 것이 힘이다. 인간이 원하는 것도 힘이다. 우주와 인간의 모든 것을 한 마디로 규정하면 그것은 힘이다. 좋은 것도 힘이고 나쁜 것도 힘이다. 시작하는 것도 힘이고 끝내는 것도 힘이다.
힘은 하나다. 모든 것은 짝이 있는데 힘은 짝이 없다. 진보도 힘을 원하고 보수도 힘을 원한다. 멀리 내다보고 힘을 모으는 사람과 당장 힘을 빼먹으려는 사람의 차이는 있지만 힘을 바라는 것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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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구조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다. 구조가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설명explanation이 밖ex으로 펼친다plan는 뜻이라면 반대로 안에 감추어진 것이 구조다. 무엇을 알든 그것은 구조를 아는 것이며 무엇을 설명하든 그것은 구조에 대한 설명이다.
구조는 내부다. 외부의 관계를 내부에 가두면 그것이 구조다. 관계는 외부에 노출되어 환경의 간섭을 받으므로 우연에 지배되지만 구조는 내부에 갇혀 간섭받지 않으므로 법칙의 지배를 받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조를 파악하여 진리에 다가갈 수 있다.
구조의 의미는 자발성에 있다. 우리가 목격하는 자연의 변화는 운동이고 운동을 결정하는 힘은 외부에서 작용한다. 구조의 자발성은 외부작용이 없이 내부요인에 의해 스스로 움직이는 힘이다. 자발성은 계 내부에 갇혀 조절되므로 인간을 이롭게 한다.
자발성은 이기는 힘이다. 집단의 권력, 자연의 기세, 시장의 이윤이 된다. 반권력, 반기세, 반이윤은 없으므로 의사결정이 가능하다. 밸런스와 지렛대가 공간의 거리를 좁히고 시간의 속도를 높이는 각운동량 보존으로 힘을 집중시켜 방향전환 할 수 있다.
힘은 몰아주는 성질이 있다. 에너지보존 법칙에 의해 더하고 빼면 남는게 없지만 우리는 힘을 특정한 때와 장소에 집중시켜 이득을 얻을 수 있다. 단 힘을 사용하려면 자원들을 모두 연결시켜야 한다. 정상에서 출발하여 한 방향으로 계속 연결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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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힘은 무엇인가?
힘은 내부다. 구조는 힘을 내부에 가두고 가둬지면 나란하다. 힘은 방향전환 가능성을 나란함에 저장하고 풀어낸다.
2. 어떻게 힘을 조절하는가?
힘은 밸런스다. 밸런스를 이루어 힘을 저장하고 밸런스를 깨뜨려 힘을 사용한다. 힘의 생산과 소비는 방향이 다르다.
3. 어디서 힘을 구할 것인가?
힘은 연결한다. 힘은 몰아주므로 첫 단추를 잘못 꿰면 모두 잘못된다. 다른 선택지가 없다. 힘이 믿음이 되는 이유다.
존재
우리가 아는 존재는 3이다. 존재는 외부 작용에 반작용하여 자신을 유지한다. 1은 쓰러진다. 2는 옆을 밀면 쓰러진다. 3이 균형을 잡고 버틴다. 살펴보면 주변의 모든 사물이 안과 밖과 중간의 3으로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식물은 잎과 줄기와 뿌리가 3이다. 동물은 머리와 몸통과 팔다리가 3이다. 팔다리는 외부의 힘에 대응하고 몸통은 안에서 에너지를 생산하고 머리는 조절한다. 존재는 안과 밖과 중간의 3 또는 공격과 방어와 조절의 3이다.
그러나 이는 피상적 관찰이다. 3은 지구의 중력이 붙잡아주기 때문이고 에너지로 보면 5다. 3은 인간의 관측이고 진짜는 내부 관성력의 조립이다. 인간에게 관측되는 외적 형태에 내부 에너지의 입출력을 더해야 완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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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는 관성질량이다. 관성은 현상의 변경에 저항한다. 존재는 외부 작용에 맞서 자신의 현재 상태를 지키는 관성질량을 자체적으로 조립할 수 있는 내부구조를 갖추어야 한다. 내부가 존재다. 존재한다면 내부가 있어야 하며 방향전환이 가능해야 한다.
3은 양팔저울이다. 저울로 계량하려면 추와 물체가 필요하다. 자연의 어떤 존재는 양팔저울 3에 지렛대의 힘점과 작용점을 더한 5로 성립된다. 5는 관성을 이루는 방향전환 숫자다. 3이 밸런스라면 5는 밸런스의 밸런스다. 형태가 아닌 에너지의 밸런스다.
우리는 중력에 의지해 쉽게 밸런스를 이루므로 3으로 착각하지만 우주공간에서는 만만치 않다. 인간은 관측이 에너지의 입출력을 대신하므로 돼지셈을 한다. 존재는 외부에 맞서 3의 균형을 도출하면서 동시에 내부에서 3의 균형을 만들어 5를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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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살이 촉과, 깃과, 대의 3으로 보인다면 이는 피상적 관찰이고 화살에 실린 힘을 반영하면 화살을 시위에 끼우는 오늬와 활몸의 압력을 견디는 재질의 특성까지 5가 보인다. 모든 존재는 외적균형과 내적균형을 합쳐서 5다.
강변의 돌멩이가 둥근 이유는 외부의 힘에 깎여서다. 돌멩이는 내적으로도 잘 깨지지 않는 균형잡힌 형태다. 사람의 발바닥이 납작한 것이 지구의 평평함에 맞추는 외적균형이라면 손발이 좌우가 대칭인 것은 내적균형이다.
하나의 존재는 하나의 의사결정이다. 의사결정은 곧 균형이다. 나란함이 깨지면서 또다른 나란함을 만들어낸다. 존재는 사슬과 같다. 하나의 존재는 하나의 연결고리다. 사슬은 외부를 연결하면서 동시에 내부를 연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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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내부를 보지 못한다. 더욱 내부의 내부를 보지 못한다. 형태의 내부를 알아도 에너지 내부를 모른다. 내부는 균형이다. 내부가 있다는 것은 균형이 있다는 것이다. 외력에 맞서는 형태의 균형 뿐 아니라 자신을 지탱하는 에너지의 균형이 있다.
존재한다는 것은 반응한다는 것이다. 외부에서 가해지는 힘의 방향을 내부에서 바꾸는 메커니즘이 갖추어져 있다면 우리는 거기에 무엇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즉 존재는 내부다. 우리가 아는 존재는 외부다. 형태는 인간의 관측이 만든 허상이다.
플라톤은 그림자 반대편에서 이데아의 세계를 봐야 한다고 말했다. 겉이 아니라 속을 봐야 한다. 겉보기 형태가 아니라 내부 에너지를 보고 의사결정 메커니즘을 봐야 한다. 우주에 오직 나란함에 의한 균형과 어긋남에 의한 방향전환이 있을 뿐이다.
구조
세상은 구조다. 구조는 만남이다. 만남은 내부를 만든다. 구조는 내부에 있는데 인간은 외부를 본다. 깨달음은 내부를 보는 눈이다. 에너지는 내부를 가리키는데 원자론은 내부를 부정한다. 외부를 보는 사고에서 내부를 보는 사고로 갈아타지 않으면 안 된다.
문명은 만남이고 야만은 배척이다. 진보는 만나려 하고 보수는 배척하려 한다. 인간은 만나고 짐승은 배척한다. 근대는 만남이고 봉건은 배척이다. 문명과 야만, 진보와 보수, 근대와 봉건, 인간과 짐승은 공존할 수도 없고, 대화할 수도 없고, 떨어질 수도 없다.
알맹이는 껍질을 부정하므로 알맹이가 되고, 껍질은 알맹이를 붙잡고 놓치지 않으므로 껍질이 된다. 진보는 보수 덕에 살지만 보수를 부정해야 살고, 보수는 진보를 빼먹지만 진보를 죽이지 말아야 한다. 진보만 있으면 말라죽고, 보수만 있으면 쭉정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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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에 대한 태도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협력하여 권력을 생성하는 것이고 하나는 배반하여 이득을 빼먹는 것이다. 협력하면 권력이 발생하지만 그 권력은 당장 내것이 아니다. 배반하면 권력이 내것이 되지만 권력 자체가 깨진다.
부부가 협력하면 부모의 권력이 생기지만 내맘대로 할 수는 없다. 배반하면 내맘대로 할 수 있지만 이혼당한다. 이것이 존재의 본질적인 딜레마다. 먼저 협력하여 권력을 만들고 이득과 바꿀 때는 적절히 조절하여 선을 지켜야 한다.
진보는 권력을 만드는 기술이고 보수는 그 권력을 빼먹는 기술이다. 진보는 권력을 만들지만 보수에게 뺏긴다. 보수는 권력을 빼앗지만 권력 자체가 소멸한다. 역사이래 끝없이 되풀이 된, 앞으로도 반복될 권력과 이념의 방정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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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이 만나 협력하면 내부가 만들어진다. 내부가 권력이다. 인간은 권력이 작동하는 집단의 중심부로 들어가려고 한다. 집단의 의사결정 중심을 장악하려고 다투다가 집단이 깨진다.
문명, 진보, 근대는 협력하여 권력을 만들고 야만, 보수, 봉건은 배반하여 상대를 이겨먹으려고 한다. 협력과 배반, 생산자와 소비자의 모순과 균형과 방향성은 존재의 본질적인 모습이다.
진보와 보수가 섞일 수 없는 것은 모순이다. 둘 중에 어느 한 쪽이 일방적으로 이길 수 없는 것이 균형이다. 약간의 시차를 두고 진보가 앞장을 서고 보수가 뒤를 따르는 것이 방향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