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도전
봄비가 내린다.
새 공기가 대지를 적셔 땅 색이 달라졌다. 성급하지만 혹시 해서 겨우내 정원을 덮고 있던 낙엽 이불을 살짝 들춰봤다. 어머, 어머! 이게 웬일... 실오라기 같은 새싹이 오글오글 김을 피우며 어서 걷어달라고 손짓을 한다. ‘가만 있어. 숨 좀 쉬자. 너도 나도 숨 고르기를 해야지.’
난 반갑고 어이없어하며 75리터짜리 종량제 규격 봉투 두 개를 사다가 입을 벌리고 젖은 낙엽을 걷어 담았다. 꼭꼭 눌러 한 개가 금방 넘친다. 흙 색깔이 촉촉하게 살아나면서 마당에 봄기운이 감돈다. 눈여겨보니 목단꽃 몽우리가 새색시 젖가슴처럼 봉긋하게 붉은 살을 살짝 보이고 있다. 와아! 봄이 오긴 왔구나! 우주의 질서에 새삼 감동하며 겸손해진다.
그래선지 나는 봄소식을 제일 먼저 알리는 잡초에게 정이 간다. 봄이 되면 어김없이 찾아와 인간에게 위로와 힘을 주는 잡초들, 모락모락 김을 피우며 모습을 드러내는 그 강인함, 추웠다 따뜻했다를 반복하는 변덕스런 봄 날씨를 아랑곳하지 않고 연둣빛으로 세상을 장식하는 그 은근함에 반해 보고 또 본다. 씨를 뿌리지 않고 뿌리를 심지 않아도 각양각색의 모양을 하고 찾아주는 그들이 반갑기만 하다.
그동안 나는 많은 것을 외면하고 살았다. 수십 년 동안 눈코 뜰 새 없이 살았던 나, 잡초와 얘기할 시간도 없었고 사랑스러움에 반해 들여다볼 새도 없었다. 일의 장막에 가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퇴직하고 집에 있게 되면서 그제서야 많은 것이 보였다. 보는 것마다 보이는 것마다 낯설고 생소했지만 새로운 세계와 만나게 되니 호기심이 생겨 마치 사춘기 소녀처럼 여기저기 두리번거리며 다가갔다. 처음에는 딱히 무엇을 하겠다는 생각을 못 했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자 내 안에서 꿈틀거리는 새로운 것을 향한 도전, 배우고 싶다는 욕망, 나만을 위한 시간 배당이 신이 났다.
쉬운 방법으로 문화원과 복지관을 찾아 ’은퇴 노인‘이라는 명찰을 달고 나타나니 말을 걸어주는 친구도 있고 외로움을 호소하며 친해지기를 원하는 동지들도 있다. 그런 것들이 나를 자극하기에 충분한 요소가 됐다.
처음 만난 그룹이 새벽 체조반이다. 2014년 산책하다가 만났지만 아직도 그분들이 내 지인으로 나를 챙겨주고 나 또한 그분들을 섬긴다. 뿐만 아니라 집에서 가까운 곳에서 배운 민화는 나의 좋은 동반자가 되어 숨가뿐 내 호흡을 다스린다.
얼마 전 동료 후배들이 우리 집에 놀러 왔다가 내 그림을 보고 ’화가네요!’하고 너스레를 떨며 나처럼 노후를 보내고 싶다고 부러워하는 것으로 보아 잘못 사는 건 아닌가 보다. 일을 뺏긴 외로운 노인으로 의기소침해서 고개 숙인 줄 알았는데 팔딱거리며 사는 것을 보니 마음이 놓이나보다.
다행히 내게는 딸이 있어 행여 내가 맥 빠질까 봐 그림 견본도 보내주고 서툰 솜씨로 그려도 “엄마, 너무 잘 그렸어!” 하고 엄지를 들어주는 바람에 천방지축 붓을 놀리게 된다. 전문가의 눈으로 보아 많이 부족할텐데 엄마 기분 좋으라고 마구마구 칭찬해 주는 딸의 마음을 알고 있어 항상 고맙다. 나무람보다는 칭찬이 내 도전정신을 부추기는 불씨다.
나이를 먹으면 소일거리가 있어야 한다는 설이 있다. 내가 아는 96세 어느 작가분은 글 쓰다가 지치면 손자들이 사다 준 퍼즐 맞추기를 한다고 하셨고 한글 서예가 이미경 선생님은 아들이 내주는 영시 외우기를 즐겁게 실천하다가 2022년 104세로 행복하게 하늘나라에 가셨다.
프로처럼 능숙하지 않아도 평소에 해보고 싶었던 것, 평생 해보지 못한 것, 해 보니 즐거운 것을 찾아 도전해 보자. 그래야 오래 해도 싫증 나지 않고 즐겁게 지속할 수 있다.
봄비 내리는 오늘, 우비 입고 나가 호밋자루 들고 흙냄새 맡으니 두뇌 회전이 빨라지고 생기가 도는 것이 느껴진다. 이렇게 사소한 것에 흥미를 가지면 두뇌 엔진이 잘 돌아가나보다.
어서 식목일이 왔으면 좋겠다. 꽃시장에 가서 1년초 꼬마 화분 종류별로 사다가 여기저기 심을 생각이다. 가슴이 뛴다.
(2022.2.26)
첫댓글 선생님의 글을 보며 완연한 봄을 느껴요. 생동감 넘치고 원동력 있게 사시는 모습이 그려지네요. 본받고 싶은 선생님의 생활 모습에 힘찬 응원의 박수 보냅니다.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