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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습金時習 전傳/이이李珥
김시습의 자는 열경이니 강릉江陵 사람이다.
신라 알지왕閼智王의 후손으로 왕자 김주원金周元이라는 이가
강릉의 고을을 받았으므로 인하여 적관籍貫으로 하였다.
그 후에 김연金淵이라는 이와 김태현金台鉉이라는 이가 있어 다 고려의 시중侍中이 되었고 김태현의 후손으로
김구주金九桂라고 하는 이가 안주목사安州牧使가 되어 김겸간 金謙侃을 낳았는데 오위부장五衛部將에
그치었으며 김겸간이 김일성金日省을 낳아서 음직蔭職으로 충순위忠順衛에 보직되었다.
►部將 조선시대 오위五衛나 포도청 등에 속해 있던 무관직
오위의 부장은 정원이 25인으로 여절勵節·병절교위秉節校尉 등으로 별칭 되었다.
조선 전기의 오위는 1위가 5부로 편제되었는데 5위는 25부가 되므로
이 부의 지휘, 감독의 책임을 지는 부장의 수도 부의 수와 마찬가지로 25인이었던 것이다.
오위의 군사조직이 위-부-통統-여旅-대隊-오伍-졸卒로 이루어진 것을 감안하면
부장은 부의 장으로서 통을 영솔하는 오위 군사조직상의 핵심을 이루었다.
이들 부장은 각기 자기의 소속부의 병종을 이끌고 입직·행순·시위 등의 책임을 졌으며
전투훈련 등에도 각 부의 병종을 지휘, 감독하였다.
그러나 후기에 오위의 기능이 유명무실하게 됨으로써
부장은 금군청禁軍廳인 내삼청內三廳에 소속되어 위장衛)과 함께 입직과 행순을 담당하였다.
또한 그 격도 떨어져 25인 가운데 7품 이하의 참외관參外官이 14인,
부조父祖의 공에 의해 임관된 남행참외南行參外 1인을 임명하였다.
특히 참외관으로서 8품의 녹을 받는 자는 임기 600일이 차야 6품관으로 승진시켰으며
참외관 임명자 중 한 자리는 도목정都目政 때마다 금군 가운데서 취재시取才試에
추천된 자를 후보자로 임명하였다.
뒤에는 더욱 격이 떨어졌는데 참외관 11인과 남행참외 1인은 종9품으로
임기 720일이 만료되어야 6품으로 승진시켰다.
그리고 이들 부장 가운데 2인은 오위 위장소를 주관하던 조사위장曹司衛將에 속해
기병騎兵의 분배거행分排擧行을 했는데 이를 분군부장分軍部將이라 하였다.
또한 가장 으뜸 되는 행수부장行首部長과 남행부장 등 2인은 입직·순경에 참여하지 않았다.
대신 의장고儀仗庫로 보내어 이를 전관專管 거행하도록 했는데 이를 의장고낭청儀仗庫郎廳이라 하였다.
특히 남행부장은 의장도식儀仗圖式으로 시험을 본 뒤 근무성적에 반영하였다.
이러한 부장제도는 <속대전>에 법제화된 이후 좌·우 포도청에도 각각 부장 4인,
무료부장無料部將 26인, 가설부장加設部將 12인 등이 있었다.
이들은 도성문 밖의 금군을 지휘하고 기찰譏察하는 책임을 졌다.
이 밖에도 서울의 8개 도성문, 목멱산木覓山의 봉수 및 오간수문五間水門 등을
지키는 금군 등도 일반적으로 부장이라고 하였다.
►충순위忠順衛
조선시대 중앙군으로서 오위五衛의 충무위忠武衛에 소속되었던 병종兵種.
1445년(세종 27) 3품 이상 고위 관리들의 자손을 위해 처음 설치되었다.
이는 그들에 대한 우대로서 600인을 시취試取해 윤번輪番 입직시키고
일정한 복무를 마치면 다른 관직에 거관去官되어 관료로서의 진출로를 열어 주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때의 충순위는 1459년(세조 5) 혁파되었다.
그 뒤 양반 자제가 일반 양인과 함께 정병正兵에 소속되어 잡역에 동원되는 사례의 부당성이 논의되었다.
그 결과 1469년(예종 1) 여정위勵精衛가 설치되었는데 東班 6품 이상,
西班 4품 이상, 문무과출신·생원·진사·유음자손有蔭子孫 등이 소속되었다.
여정위는 곧 충순위로 개칭되어 <경국대전>에 오르게 되었다.
<경국대전>의 규정에 의하면 異姓의 왕족·왕비족 가운데 遠親을 비롯해 實職으로서
顯官을 거친 사람 등이 충순위에 입속되었다.
정원은 없고 7교대에 의해 2개월씩 근무하였고 체아遞兒는 없고
근무일수를 채우면 종5품 영직影職에 거관하도록 되어 있다.
정병은 대체로 일반 양인 계층이 군역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 입속하는 병종이었다.
이에 비해 충순위 고위 신분층에 있는 자로 충의위忠義衛나
충찬위忠贊衛에 소속될 자격이 없는 자가 이에 속해 군역 의무를 수행했다는 것이 주목되는 점이다.
충순위에 속하도록 되어 있는 동반 6품, 서반 4품 이상의 현질顯秩에 있던 자,
문무과 출신, 생원·진사 출신자 이외에 양반 계층의 말단에 속하는 자도 정병에 입속되는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충순위에는 급보給保의 혜택이 없어 정병에 소속되는 것을 더 좋아하는 사례도 있었다.
이를 감안하면 정병이 일반 양인의 상층부와 양반층의 말단이 소속되어 군역 의무를 수행한 것에 대해
충순위는 양반 계층이 군역 의무를 수행했음을 알 수 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김일성이 선사仙搓 장씨張氏에게 장가들어 선덕宣德 10년(1435년 세종17년)에 김시습金時習을 서울에서 낳으니 나면서부터 특이한 체질을 가진 그는 세상에 나온 지 여덟 달에 스스로 능히 글자를 알므로 최치운崔致雲이 보고 기이하게 여겨 이름을 ‘시습時習'이라고 지었다.
말은 더디면서 정신은 놀라워서 글에 임하여 입으로 읽지는 못하여도 뜻인즉 다 알았고 3살에 능히 시를 짓고
5살에 <중용中庸>ㆍ<大學>을 통달했으므로 사람들이 神童이라고 불렀으며 이름난 재상 허조許稠 같은
이들이 많이 찾았다.
장헌대왕莊憲大王(세종)께서 들으시고
승정원承政院에 불러들여 시로 시험하니 과연 민첩하고 잘 하는지라 下敎하여 말하기를
“내가 친히 보고 싶지만 시속 사람들이 듣고서 놀랄까 염려되니
마땅히 그 집에 권하여 재지를 감추어 가르치고 기르게 하라.
그 학문이 성취되기를 기다려 장차 크게 쓰겠다.”
하고 비단을 주어 집으로 돌아가게 하니 이에 명성이 온 나라에 떨쳤고
칭稱하기를 ‘五歲’라 하고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였다.
김시습이 이미 임금의 장려하심을 받았으므로 더욱 큰 학문에 힘쓰더니 경태연간景泰年間(1453-1455)에
영릉英陵(세종)과 현릉顯陵(문종)이 서로 잇달아 훙薨하시고 노산魯山(단종)이 3년 만에 왕위王位을
양위하시니 그때에 김 시습은 나이 21세로 바야흐로 三角山 중에서 글을 읽고 있었다.
이때에 서울에서 오는 자가 있어서 김 시습이 즉시 문을 닫고 나오지 아니하기 사흘이나 하더니
이에 크게 울고 그 서적을 다 불사르며 발광하여 뒷간에 빠졌다가 도망가서 치문緇門(佛家)에
종적을 의탁하였는데 그 僧名은 설잠雪岑이나 그 호는 여러 번 변경하여
청한자淸塞子·
동봉東峯·
벽산청은碧山淸隱ㆍ
췌세옹贅世翁·
매월당梅月堂이라 하였다.
그 사람됨이 모양이 못나고 키는 작으나 호기롭고 준수하며 영특하고 뛰어났었다.
간략하고 탄솔하여 위엄 있는 거동은 없으나 굳세고 곧아 사람의 과실을 용납하지 못하며 시대를 슬퍼하고 세속을 분하게 여기었다.
기氣가 서려 불평이 많아서 스스로의 생각에도 세상을 따라 높낮임을 하지 못할 줄 알고
몸을 버리어 세상 밖에 놀아서 국내의 산천에는 발길이 거의 편답하였는데 좋은 곳에서는 살기도 하였다.
옛 도읍 땅[故都]을 올라 보고서는 반드시 머뭇거리며 슬피 노래하기를 여러 날이 되어도 마지아니하였다.
총명하고 깨닫는 것이 남보다 뛰어나서 그 四書·六經은 어릴 때에 스승에게 배웠다 하더라도 諸子百家 같은 것은 가르치고 배우는 것을 기다리지 아니하고서도 섭렵涉獵하지 아니함이 없어 한 번 기억하면 끝내 잊지 아니한 까닭에 平日에는 한 번도 글을 읽지 아니하고 또한 책상자[書笈]를 가지고 다니지도 아니하나 고금의 서적을 관통하여 빠침이 없으므로 사람이 들어 묻는 것이 있으면 응구첨대應口輒對하여 의심이 없었지만 기상이 활달하고 비분강개한 가슴속을 스스로 풀어 헤치지는 못하였다.
무릇 世間의 風月·雲雨·山林·泉石·宮室ㆍ衣服ㆍ花果·鳥獸와 人事의 是非·得實, 富貴·貧賤, 사생死生ㆍ疾病, 喜怒ㆍ哀樂과 심지어는 性命·理氣ㆍ음양陰陽ㆍ유현幽顯, 有形·無形에 이르기까지 지적하여 말할 수 있는 것은 한결같이 문장에 붙여 놓았으므로 그 文辭가 물이 용솟음치듯 바람이 일 듯하고 산이 감추어지듯 바다가 잠기는 듯하며 神이 부르고 鬼가 화답하는 듯 간간히 보이고 층층이 나와 사람으로 하여금 시작과 끝을 알지 못하게 하였다.
성률聲律과 격조格調에 있어서는 심히 생각하지 않았으나 그 기경奇警한 것은 생각과 운치가 높고 멀어서 보통 사람의 생각보다 멀리 뛰어나니 조전彫篆하는 자가 가히 발돋음하고 바라볼 수 있는 것이 아니며 道와 理에는 비록 보아 찾고 붙들어 두어서 함양한 공은 적지만 재주와 지혜가 탁월하므로 이해하는 바가 있어 횡적으로 말하고 종적으로 지껄여도 많이 儒敎의 큰 뜻을 잃지 아니하였다.
►조전彫篆 조충전각彫蟲篆刻의 준말. 벌레를 새기고 전자를 새김과 같이
문장을 짓는 데 너무 글귀만을 수식하는 일.
禪·道 두 敎에 이르러서도 역시 大意를 보아서 그 병 되는 근원을 깊이 연구하였다.
禪語를 좋아하여 현미玄微한 것을 밝혀냄에 영탈穎脫하여 막히고 걸리는 것이 없었으며 비록 늙은 중, 이름난 중으로 그 학문에 깊은 자라 하더라도 감히 그 말에 대항하지 못하였으니 그 천품이 뛰어난 것을 그것으로도 증명할 수 있었다.
►영탈穎脫 송곳 끝. 주머니 속에 든 송곳 끝이 빠져 나왔다는 뜻으로 才智가
뛰어나고 훌륭하여 두드러진 것을 일컫는 말.
<史記 平原君傳>에 “사수득처낭중내영탈이출使遂得處囊中乃穎脫而出 비특미견이이非特未見而已”라 하였다.
스스로 생각하기를
“명성은 일찍부터 컸지만 하루아침에 세상을 도피하였고
마음은 유교이면서 행적은 불교이라서 시대에 괴상하게 보일 것이다.” 하여
이에 고의로 미친 짓을 함으로써 사실을 엄폐하려 하였다.
선비 중에 와 배우려는 자가 있으면 나무나 돌로 치려하였고
혹은 활을 당겨 쏘려 하여 그 성의를 시험했던 까닭에 문하에 있는 자가 드물었고
또 山田 개간하기를 좋아하여 비록 비단 옷 입는 집의 아이라도 반드시
김매고 거두는 데 역사시켜 매우 괴롭게 하였으므로 끝내 학업을 전해 받은 자가 더욱 적었다.
산에 가면 나무를 벗겨 희게 하고 시를 쓰고서는 외고 읊기를 한참 하다가 곧 통곡하고는 깎아 버렸고
혹은 종이에 썼어도 또한 사람에게 보이지 아니하고 많이는 물이나 불에 던져 버렸으며
혹은 나무로 조각해서 농사군의 갈고 김매는 형상을 만들어 책상 옆에 벌여놓고 종일 익히 보다가
역시 통곡하고 태워 버렸다.
때로는 심은 곡식이 매우 성해서 이삭 진 것이 볼만한데도 술에 취해서
낫을 휘둘러 잠깐 동안에 다 쓰러뜨려 땅에 버리고 인해서 목을 놓아 통곡하였다.
행동거지가 측량할 수 없어서 시속 사람들의 크게 비웃는 바 되었다.
산에 살면서 오는 손을 보고서 서울 소식을 물어
“사람들이 욕하고 나무라는 자가 있다.”고 들으면 반드시 얼굴에 기뻐하는 빛이 있었고
만일 “거짓 미쳐서 속에는 딴마음이 있어 그런다.”고 하는 말을 들으면 눈썹을 찡그리고 기뻐하지 아니하였다.
제목除目(官吏任免의 보고서)에 높은 벼슬한 자가 혹시 人望 아닌 자임을 보면 반드시 통곡하며 말하기를
“이 백성이 무는 죄가 있어서 이 사람에게 이런 임무를 맡겼는가?”고 하였다.
그때에 이름난 대관인 김수온金守溫이나 서거정徐居正 같은 이는 國士라고 칭찬하였다.
서거정徐居正이 바야흐로 조회에 들어가는데 “사람은 물러가라.”고 하는 때에
김시습이 누더기를 입고 새끼로 띠를 매고
패랭이[蔽陽子 천한 사람이 쓰는 흰 대[白竹]으로 만든 것인데 세상에서 패랭이라 한다]를 쓰고
시가에서 만나 앞의 인도하는 자를 헤치고 들어가며 머리를 쳐들고 “강중剛中(서거정의 자)은 평안한가?”
하니 서거정이 웃으며 대답하고 초헌貂軒을 세워 한참 말하므로 온 저자 사람들이 모두 놀란 눈으로
서로 쳐다보았다.
조사朝士로서 업신여김을 당한 자가 있어 견디지 못하여 서거정을 보고서 말하되
“그 죄를 다스리자.”고 하니
서거정이 머리를 흔들며
“말라. 말라! 미친 사람과 무엇을 따진다는 거요?
이제 이 사람을 형벌한다면 백년 뒤까지 그대의 이름에 누累가 될 것일세.”라고 하였다.
김 수온이 지성균관사知成均館事가 되어
‘孟子가 양혜왕梁惠王을 보았다.’는 글귀로 太學의 여러 선비를 논시論試하였는데
上舍生 하나가 김시습을 삼각산으로 찾아가 보고 말하기를
“괴애乖崖맹자가 양혜왕을 보았다는 것이 어찌 논문 제목[論題]에 합당합니까?” 하니
(수온의 別號))는 심한 것을 좋아합니다.
김시습이 웃으며 “그 늙은이가 아니면 그런 제목을 내지 않을 것이다.” 하고,
곧 붓을 들어 한 편篇을 써서 주며 “生員이 자작한 것처럼 하여 그 늙은이를 속여 보라.”하였다.
상사생이 그 말과 같이 하였더니 김수온이 끝까지 읽지도 아니하고 갑자기 묻기를
“열경이 京山의 어느 절에 있는가?” 하니 상사생이 숨기지 못하였다.
그 알아주는 것이 그와 같았다.
그 論의 대략은 '양혜왕은 참람하게 왕이라 한 자이어서
맹자가 보지 않아야 마땅하였다고 한 것이나 지금은 없어져서 수록收錄하지 못한다.
김수온이 죽은 뒤 사람들 중에 “앉아 죽었다.”고 말한 자가 있으므로 김 시습이 말하기를
“괴애乘崖는 욕심이 많은 자인데 어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가령 그런 일이 있다 하여도 앉아 죽는 것은 예절이 아니다.
나는 단지 曾子가 댓자리[역책易簀]를 바꾸었다는 것과 子路가 갓끈을 매었다는 것을 들었을 뿐
그 외의 다른 것은 알지 못한다.” 하였으니 대개 김수온이 불교를 좋아한 까닭으로 그렇게 말했다.
►역책易簀 댓자리를 말함. 증자曾子가 임종 때에 깔고 있던 댓자리가 당시 노魯나라의 집권자인 계손씨孫氏가 보내 준 것으로 大夫가 쓰는 자리이어서 자기 신분에 지나치다 하여 바꾸게 하여 죽었다는 고사.
►자로子路가 전투에서 중상重傷을 입고 죽게 되어서 갓을 다시 바로 쓰고 죽었다는 고사.
<좌전左傳> 애공哀公 15년에 “자로왈子路曰 군자사君子死 관불면冠不免 결영이사結纓而死”라 하였다.
성화成化 17년(1481년 성종12년) 김시습의 나이 47세 때에
홀연히 머리를 기르고 글을 지어서 조부와 아버지에게 제사지냈는데 그 제문의 대략은
“순舜임금이 五敎를 베푸셨는데
부모 있다는 것이 앞에 있고, 죄 되는 것 3천 가지를 나열하셨는데 불효가 큰 것이었습니다.
대체로 하늘과 땅 안에 살면서 누가 양육하신 은혜를 저버리겠습니까?
어리석고 못난 小子가 본집, 작은 집을 이어 받들어야 할 것이온데
이단異端에 침혹沈惑되었다가 말로末路에 겨우 뉘우쳐 이에 예전禮典을 상고하고
성경聖經을 찾아보아 조상에 따르는 큰 의식을 강정講定했습니다.
청빈淸貧한 생활을 참작해서 간략하면서도 깨끗한 것을 힘썼고 많이 차리는 것을
정성으로 바꾸었습니다. 한漢 무제武帝는 70살에야 전승상田丞相의 말을 깨달았고
원덕공元德公은 1백살에야 허노재許魯齋의 풍도風度에 화했다 하옵니다.”고 하였다.
►오교五敎
계백성불친契百姓不親 오품불손五品不遜
설契아! 백성들이 서로 화친하지 않으며 五品을 따르지 않는다.
여작사도汝作司徒 경부오교敬敷五敎 재관在寬
그대를 사도로 삼으니 五敎를 삼가서 펴되 너그러이 하라/ <서경書經 순전舜典>
►허노재許魯齋 원元나라 때의 거유巨儒 허형許衡(1209-1281). 자는 중평仲平,
호는 노재魯齋. 주자학자朱子學者로서 오징吳澄과 함께 원대元代 2大家로 꼽힌다.
안씨安氏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내로 삼았는데 많은 사람들이 벼슬하라고 권하였으나
김 시습은 끝내 뜻을 굽히지 아니하고 방랑하는 것이 예전과 같았다.
달밤을 만나면 이소경離騷經을 기뻐 외었고 다 외면 반드시 통곡하였다.
혹은 송사하는 재판정에 들어가 잘못된 것을 가지고 옳은 것이라고
주장하여 궤변으로 반드시 이기고는 일이 결정되면 크게 웃고 찢어 버리곤 하였다.
흔히 시정의 까부는 애들과 놀다가 거리 위에 취해 쓰러지는데
하루는 영의정 정창손鄭昌孫이 거리를 지나가는 것을 보고는 크게 불러 말하기를
“네놈은 그만 쉬어라.” 하였는데 정 창손은 듣지 못한 것같이 하였다.
사람들이 그런 것으로 위태하게 여겨 알던 자도 절교하였는데
오직 宗室의 수천부정秀川副正 정은貞恩과 남효온南孝溫·
안응세安應世·홍유손洪裕孫 등 몇 사람이 끝내 변하지 아니하였다.
남효온이 김시습에게 묻기를 “나의 보는 바가 어떠하오?” 하니
김시습이 대답하기를 "“창에 구멍을 뚫고 하늘을 엿보는 것이오." 하였다.
[보는 바가 작다고 하는 말]
“동봉東峯의 보는 바는 어떠하오?” 하니
“나는 너른 마당에서 하늘을 쳐다보는 것이지.”라고 하였다.
[보는 것은 높으면서 행하는 것은 따르지 못한다]
얼마 안 되어 아내가 죽으니 다시 산으로 돌아가
두타형상[頭陀形 중이 머리를 잘라 눈썹에 내려오는 것을 頭陀라 함]을 하였다.
강릉江陵과 양양襄陽 지경에 노는 것을 좋아하여 많이는 설악산·한계산寒溪山ㆍ청평산淸平山 등지에 있었는데
유자한柳自漢이 양양襄陽의 수령이 되어 예절로 대접하고 “가업家業을 회복하고 세상에 행세하라.”고 권했더니
김시습이 편지로 사례했는데 말하기를
“장차 긴 꼬챙이를 만들어 그것으로 복령伏塔과 삽주[朮]를 캐어다가 일만 나무에 서리가 엉키면
중유仲由의 온포縕袍(수삼 옷)를 수선하고 千山에 눈이 쌓이면 왕공王恭의 학창의鶴氅衣를 정돈하겠읍니다.
낙오落伍되어 세상에 사는 것과 마음대로 오락가락하며 일생을 보내는 것과 어느 것이 나을는지?
천년 뒤에 나의 본뜻을 알아주기 바랄 뿐입니다.”라고 하였다.
►중유仲由 자로子路의 성명姓名.
자왈子曰 공자가 말했다.
의폐온포衣敝縕袍 헤어진 솜옷을 입고서도
여의호학자립與衣狐貉者立 여우나 담비 가죽옷을 입은 사람과 같이 서 있어도
이불치자而不恥者 기유야여其由也與 부끄러워하지 않을 사람은 아마 由일 것이다/<論語 자한편子罕篇>
►왕공王恭 동진東晉 때의 사람. 그는 풍채가 잘나기로 유명하다.
상피학창구嘗被鶴氅裘 섭설이행涉雪而行 (그가 겨울에) 鶴氅裘를 입고 눈을 밟고 간 적이 있는데
맹창규견왈孟昶窺見曰 맹창孟昶이 보고 말하였다.
차진신선중인야此眞神仙中人也 “이는 참으로 神仙界의 사람이다.”/<진서晉書 왕공전王恭傳>
홍치弘治 6년(1493 성종24년)에 홍산鴻山 무량사無量寺에서 병들어 누웠다가 끝마치니 나이 59세였다.
유언으로 화장하지 말라 하여 임시로 절 옆에 묻었다가 3년 후에 장사지내려고 그 빈소殯所를 여니 얼굴빛이 산 것 같아서 중들이 놀라 탄식하여 모두 “부처이요.” 하고 끝내 그 敎의 다비茶毘(중들은 화장하는 것을 다비라 한다)의 예식대로 하여 그 뼈를 모아 부도浮圖(작은 탑 이름)를 만들었다.
살았을 때에 손수 늙고 젊은 두 화상을 그리고 또 스스로 찬贊을 지어서 절에 두었는데 찬의 난亂에 말하기를
“너의 형상이 지극히 작고 너의 말은 크게 지각없으니 마땅히 언덕과 구렁에 두어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저술한 詩文은 흩어져 없어지고 열에 하나도 있지 아니한데 이자李耔·박 상朴祥·윤춘년尹春年 등이 先後하여 모아서 인쇄해 세상에 행하게 되었다.
臣이 삼가 생각한즉 사람은 하늘과 땅의 충만한 것을 받아서 몸으로 하였으나 청탁淸濁과 후박厚薄이 고르지 못하므로 생지生知와 학지學知의 구별이 있다 하겠는데 그것은 의리義理를 말하는 것이고 김시습 같은 이는 文에 있어 천부天賦로 얻었은즉 文字에도 또한 生知가 있는 것입니다.
거짓 미쳐서 세상을 피하였으니 속마음은 가상하나 반드시 名敎를 버리고 방탕해서
스스로 방자하게 군것은 무엇입니까?
비록 빛을 감추고 그림자를 감추었다 하더라도 후세에 김시습이 있었던 것을 알지
못하게 하려 하였으니 또한 어찌 민망하지 않겠습니까?
생각해 보면 그 사람의 재주가 그릇 밖에 넘쳐서 능히 스스로 잡지 못했으니
그 氣받은 것이 경청輕淸한 것에는 풍성하고 후중厚重한데에는 인색하였던 것이 아닌지요?
비록 그러하나 절의節義를 표방標膀하고 윤기倫紀를 붙들었으니 그 뜻을 궁구해 보면 가히 日月과 빛을 다툴 것이며 그 풍성風聲을 들으면 나약한 사람이라도 또한 立志가 있겠은즉 비록 百代의 스승이라 하여도 또한 근사할 것입니다.
아깝습니다.
김 시습의 영특하고 예민한 자질資質로 학문과 실천하는 공부를 닦고 같았으면
그 성취된 바가 어찌 측량할 수 있었겠습니까?
아아! 위태한 말씀과 준엄한 언론으로 꺼리는 것을 범하고 숨기는 것을 저촉하면서
公을 꾸짖고 경卿을 욕하여 조금도 돌아보고 덮어 두는 것이 없었건만 당시에도
그 잘못을 擧論하는 자 있음을 듣지 못했으니 우리 先王의 성하신 덕과 큰 신하들의
큰 도량은 그 季世(末世)의 선비[士]로 말을 공손히 하게 하는 자와 비하여 얻고 잃는 것이 어떠하올지!
아아! 장하시었읍니다.
만력萬曆 10년 7월 15일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판서겸吏曹判書兼
홍문관弘文館 대제학大提學 예문관藝文館 대제학大提學 지경연知經筵
성균관사成均館事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 오위도총부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官
신臣 이이李珥 교지敎旨를 받들어 올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