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말나리꽃
한현숙
hannana153@naver.com
여섯 살 딸아이의 한글 공부 작전에 들어갔다. 온 가족이 제 이름쓰기를 지도하느라 진땀을 빼든 말든 딸아이는 내 알 바 아니라는 듯 요령만 피운다. 어렸을 때는 맘껏 놀아야 한다는 나의 교육관이 한몫했던가. 그렇다고 이 정도로 공부에 관심이 없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놀이에 마음 빼앗긴 아이를 억지로 붙들어다 책상 앞에 앉혀놓았다. 몇 글자 따라 쓰던 아이는 무조건 못한다며 책상위에 있던 필기도구를 쓸어내 버렸다. 처음에는 슬금슬금 눈치라도 살피더니 나중에는 레고상자를 올려놓고 조립하느라 여념이 없다. 서너 살에 이미 한글을 터득한 제 오빠들만 생각하고 내가 너무 안일했나 싶기도 하다.
며칠 전 어린이집 선생님을 만나 상담을 한일이 있었다. 보통의 아이들은 제 이름은 기본이고, 쉬운 단어정도는 술술 쓸 줄 안단다. 그러나 우리아이는 레고나 다른 만들기 시간에는 활기차다가 한글 공부시간만 되면 풀이 죽어 딴 짓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가정에서 제 이름쓰기부터 지도해 주기를 부탁하셨다. 속상하고 창피한 마음에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눈물이 쏙 빠지도록 아이를 다그쳤다. 그런 후 숨도 돌릴 틈도 주지 않고 한글공부를 시작한 것이다.
엄마들의 모임에서 생태학습 야외수업이 있다고 하여 아이와 함께 나들이를 했다. 숲 사이로 부는 바람이 아카시 향을 실어왔다. 한글 모르는 아이 때문에 답답하던 마음이 조금은 풀어지는 듯했다. 루페를 통해 소나무의 외피안쪽을 보았다. 거미줄이 신비한 미로처럼 엉겨있었다. 무심히 지나쳤던 나무와 나뭇잎의 특징, 그리고, 은은하게 풍기는 다채로운 꽃향기, 각양각색의 열매도 살펴보았다.
나무는 햇빛과 비와 바람을 항상 예측할 수 없단다. 그렇기에 언제 어떤 색으로 꽃을 피워야할지, 씨앗을 어떻게 퍼뜨리고, 뿌리를 어느 방향으로 얼마나 깊이 내려야 할지를 스스로 결정을 한단다. 그만큼 나무는 빛의 길이를 잘 알고 살아가는 생물이라 한다.
수많은 꽃들이 각기 다른 모양과 크기의 꽃들을 피우며 제각기 다른 색깔을 만들어 낸다. 똑같은 철쭉이라도 진분홍, 연분홍, 하얀색, 심지어는 노란색도 있지만 서로의 다름을 탓하거나 시기하여 모방하지는 않는다. 상황에 따라 각기 다른 호르몬을 배출해 꽃과 잎을 피우거나 열매 맺거나, 가지를 키우며, 잎을 떨구고, 성장을 멈추기도 한다. 나무관찰을 마친 아이가 이번에는 꽃동산을 발견하고 그리로 달려갔다. 책상머리에서 풀죽었던 아이의 모습이 아니었다. 대견하고 미안한 마음을 희석시킬 양으로 뒤따라갔다. 꽃밭을 한껏 누비며 뛰어다니는 아이의 모습이 한 쌍의 노랑나비와 어우러져 하나의 풍경이 되었다.
진달래는 꽃을 먼저 피운 후 나중에 잎을 내고, 백일홍은 잎이 먼저 나오고 꽃이 늦게 핀다. 철쭉은 잎과 꽃이 동시에 피기도 한다.
수업을 마무리하며 참으로 많은 생각이 들었다. 개나리, 진달래, 벚꽃은 연초록 새싹 돋는 봄에 피어야 예쁘다. 라일락, 수국, 장미꽃은 신록이 우거진 여름에 피어야 시선이 간다. 수수와 벼이삭은 가을에 익어야 풍성하고 하얀 눈꽃은 겨울에 피어야 아름답다.
아이는 레고로 자동차를 만들어 엄마를 태워주었다. 크레인을 만들어 엄마의 무거운 짐을 들어주기도 했다. 어느 날은 청소기를 만들어 집안 청소를 도와주고 엄마 어깨 아프다며 안마기로 두드려 주기도 했다. 비록 조립장난감들이지만 살림과 육아에 지친 엄마를 웃게 해주고 위로해 주는 청량제였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한글공부를 지도할 때마다 다그치고 윽박지르는 것이 아이를 위하는 어미의 최선인 줄 알았다. 아이의 강점보다는 내가 가진 잣대를 들이대며 자꾸 못하는 면만 들추어냈다. 아이는 레고를 들고 와서 자신의 색깔을 보여주었지만 그만 눈먼 엄마는 쓸데없는 짓으로만 여겼다.
봄부터 초여름까지 수많은 꽃들이 피고 진 숲에서 유월 하늘을 향해 꽃망울을 터트리는 붉은색 나리꽃이 있었다. 모양이 독특해 가까이 다가서 보니 하늘 말나리다. 보통의 나리꽃은 옆이나 아래를 보고 꽃이 핀다. 그러나 하늘말나리는 하늘을 보고 꽃을 피워낸다. 세상의 모든 식물들이 똑같은 시기에 꽃을 피운다면 세상은 얼마나 재미없을까. 세상의 모든 꽃들이 하늘만 보고 잎이나 꽃을 피운다면 이 또한 얼마나 밋밋할까. 우리아이 스스로 꽃을 피우고 잎을 낼 때까지 지지자로서의 마음가짐을 굳게 지켜야겠다.
하늘 말나리라는 이름을 얻은 꽃이 꼭 우리 아이를 닮아서 더 정이 간다. 신록이 우거진 유월의 산에서 붉은 꽃망울을 터트리는 하늘말나리가 나의 마음을 뒤흔든다.
2015. 6.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