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사조사 (호북성 황매)....노동하는 것도 수행의 연장이다
사조도신(580~651) 이때 중국초기선종의 역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한다.
천태종의 지의(538~597)가 <마하지관>에 의한 선법을 일으킨직후 에 해당한다 달마이래 선수행자들은 들과 숲에서 두타수행으로 개인적인 수행을 했던 반면 4조도신이후부터 집단수행을 하였다.
이러한 동산법문에 500명이 넘는 수행자가 운집해 있었으니, 최초로 선종의 대교단이 형성된셈이다.
노동과 수행을 겸하였다. 사조사는 수행가풍의 자리잡혀있었고 깔끔한 이미지다. 도신(道信)은 일곱 살에 출가하여 사미승(沙彌僧)이 되었고, 열네 살 때인 593년(隋 文帝 開皇 13년)부터는
서주(舒州, 지금의 安徽省 潛山) 환공산(皖 지금의 天柱山)에서 중국 선종(禪宗)의 제3대 조사(祖師)인 승찬(僧璨, ?~606)에게 불법(佛法)을 배웠다.
600년(開皇 20년) 무렵에 승찬(僧璨)은 도신(道信, 580~651)에게 의발(衣鉢)을 전한 뒤에 광둥성[廣東省]의 나부산(羅浮山)에 은거하였으며, 도신은 그 때부터 홀로 수행하였다
그는 수(隋, 581~618) 양제(煬帝, 재위 604~618)의 대업 연간(年間)에 조정(朝廷)의 허가를 얻어 정식으로 출가하여 길주(吉州, 지금의 江西省 吉安)의 절에 적(籍)을 두었다. 그 뒤 후난성[湖南省]의 헝산[衡山] 등을 거쳐 장시성[江西省] 루산[廬山]의 대림사(大林寺)에서 10년 가까이를 머물렀다.
대림사(大林寺)는 삼론종(三論宗)의 지개(智鍇가 창건(創建)한 절인데, 이 곳에서 도신(道信)은 삼론종(三論宗)과 천태종(天台宗)의 영향을 받아 그 내용을 일정 부분 받아들였다. 도신(道信)은 624년 기주蕲州-황매(지금의 湖北省 黄梅현의 쌍봉산(雙峰山)에 들어가 수행을 하며 불법(佛法)을 전했는데, 그를 따르는 사람이
500여명이 되었다. 이 곳에서 그는 ‘선농일치(禪農一致)’를 내세워 노동과 참선(參禪)을 병행했는데, 이는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도 말라
(一日不作 一日不食)’는
선종(禪宗)의 청규(淸規)가 시작되는 계기가 되었다. 도신(道信)의 명성이 높아지자 당(唐) 태종(太宗)이 네 차례나 불렀지만 그는 따르지 않았다.
도신은 홍인(弘忍, 602~675)에게 의발(衣鉢)을 전했으며, 고종(高宗, 649~683) 때인 651년(永徽 2년)에 입적(入寂)하였다.
그는 이후 당(唐) 대종(代宗)에게 대의선사(大醫禪師)라는 시호(諡號)를 받았으며, 탑호(塔號)는 자운(慈雲)이라 하였다.
한편 도신(道信)이 입적한 뒤에 홍인(弘忍)은 쌍봉산(雙峰山)에서 10km 정도 떨어진 빙무산(憑茂山)으로 법문(法門)을 옮겼는데, 사람들이 쌍봉산
은 서산(西山), 빙무산은 동산(東山)이라 불렀기에 도신(道信)에서 시작된 선종(禪宗)의 법문(法問)은 ‘동산법문(東山法門)’이라 불렸다.
동산법문(東山法門)은 선(禪) 사상과 선농일치(禪農一致)의 규범을 체계화하여 중국 선종(禪宗)에서 처음 나타난 교단(敎團)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도신(道信)의 선(禪) 사상은 이미 7세기에 그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은 신라(新羅)의 법랑(法朗, 632~?)에 의해 한반도로 전해졌으며,
그의 제자인 신행(愼行, 704~779)이 다시 당(唐)에 유학하여 북종선(北宗禪)을 배워온 뒤에 준범(遵範), 혜은(慧隱) 등으로 선맥(禪脈)이 이어져
9세기에 구산선문(九山禪門) 가운데 하나인 봉암사(鳳巖寺) 희양산문(曦陽山門)으로 나타났다.
도신이 쌍봉산에 사조사를 세운 유래는 자못 흥미롭다. 새로운 절터를 찾는 도신에게 쌍봉산의 상서로운 기운은 감탄을 금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며칠씩 금식하며 불경을 외우고
목어를 두드리니 이를 이상하게 여긴 한노인이 다가와 그 사연을물었다.
“스님, 왜 여기서 불경을 외우고 목어를 두드리십니까?” “가사 한 벌 놓을 만한 땅에 절을 짓고 싶습니다.” “가사 한 벌의 땅 정도쯤이야, 좋습니다. 내가 시주하겠습니다.”
도신이 던진 가사 한 벌이 덮은 땅은 놀랍게도 사방 십리에 미치었다. 마침내 사조 도신은 쌍봉산 자락에 사조사를 짓고 농토를 개간하여 농사를 짓고 불법을 전파하여 크게 선종의 문을 열었는데 한 때 사조사의 수행 대중이 5백 명에 이르렀다. 대사는 선과 노동은 하나라는
선농일여(禪農一如)사상을 주장하고 몸소 농사와 참선을 병행하는 농선쌍수(農禪雙修)를 실천하기 위하여 탁발에 의존하던 종래의 공양방식을 지양하고
사조사 주변의 농토를 개량하여 자급자족 하는 선풍을 확립하였다.
스님들의 건전한 정신과 신체를 단련시켰고 관의 도움이나 백성들의 시주 없이 대중살림이 가능해져 세금을 줄일 수있었다.
대사는 한 승려가 먹을 거리를 얻어 평생 굶주림을 면하려면 좌선을 근본으로 수행하되 15년은 노동을 병행하여야만 된다고 하였으며 이는 훗날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말라고
하신 백장선사의 가르침보다 백년이나 앞선 선지식의 지혜이다. 뿐만 아니라 수행에도 철저해서, 이후 60년간을 눕지 않고 장좌불와(長坐不臥)했다. 잦은 전란으로 인심이 황폐해진 수(隨)나라 말엽에 500여명의 수도자가 한 스승의 문하에서 수행생활을 했다는것은 예사로운 일이라 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도신은당시 폐불과 전란으로 그 명맥이 쇠약해진 선종 교단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은 인물이라 할수있다.
수(隨)의 대업(大業) 13년 때의 일이다. 길주성 을 도적들이 79일 간 포위했을 뿐 아니라, 성내의 우물마저 모두 말라버려서, 성 안 백성들이 모두 죽게 될 지경에 이르렀다.
이것을 본 도신은 길주성 안으로 들어가 백성들에게 ‘마하반야바라밀’을 독송시켰다. 이때 도적들이 성벽 위를 바라보니 신병(神兵)들이 서있는 것이 보이므로, 겁이 나서 슬금슬금 도망쳐 버렸다. 그 뿐 아니라 그때까지 말라있던 성안의 우물에서 다시 물이 솟아 넘쳤다고 한다. 이 일화를 통해서 우리는 도신의 법력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가늠할 수 있다.
도신의 선사상은 그가 찬술했다고 주장되는 〈입도안심요방편법문(入道安心要方便法門)〉을
통해서 잘알수 있다. 도신은 이 책에서 일체의 모든 인연을 멈추고 망상을 쉬게 하고 심신을 놓아버려서 항상 자기의 청정한 본심을 보는 ‘안심(安心)의 대도(大道)를 깨닫는 가르침’을강조하면서,
‘안심의 대도’를 깨닫는 5가지의 구체적인 방편문(좌선행)을 설파한다.
첫째, 마음이라는 주체(體)을 자각할 것.
둘째, 마음의 작용을 알 것.
셋째, 마음이 작용함에 한 순간도 정체하는 일이 없는 마음의 상태를 잡아서 외부의 경계와 함께 끝없이 활동하는마음을 깨닫도록 할 것.
넷째, 항상 자신이 공적하여 일체의 존재에 걸림이 없음을 관찰할 것.
다섯째, 한 가지를 지켜 움직이지 않을 것(守一不移).
위의 5가지 방편문의 정수는 수일불이(守一不移)이다.
도신은 말한다 “수일불이라는 것은 훤하고 깨끗한 눈으로 정신을 가다듬어 한 물건을 들여다보고 밤낮의 구별 없이, 힘닿는 데까지 노력하여 언제고 움직이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대 마음이 흩어질 듯할 때는 지체없이 다시 가다듬어서 마치 새의 발을 묶어놓고 날아가려 해도 도로 제자리로 잡아당겨지듯이 온종일 지켜보기를 그치지 않는다면, 모든 것은 사라지고 저절로 마음이 안정될 것이다.”
결국도신의 선사상은‘수일불이’한마디로 집약된다고할수 있다. 도신이 중국 선종사에서 가지고 있는 의미는 대단히 크다.
그 중에서도 ‘수일불이’의 구체적인 실천법이 좌선행이고, 이것이 뒤에는 화두로 바뀐다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좌선에 대한 구체적인 실천항목들을 제시함을 통해서, 불교 본래의 가치인 수행력을 회복하게 하였다는 점과, 이를 통해서 선종이 비로소 중국화 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는 두가지 점을 특별하게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대사는 훗날 간화선 수행법으로 발전한, 부처가 곧 마음이라는 즉 마음 밖에 달리 부처가 없다는 간심법문(看心法問)을 폈다.
간심법문에서는
마음의 본체를 알고,
마음의 작용을 안 다음,
마음이 항상 깨어 있도록 하며,
신체가 공적(空寂)함을 관찰하면서,
하나를 지켜 흔들림이 없게 한다면
마음의 실체를 볼 수 있다는 법문이다.
도신선사는 승려들의 병을 직접 해결하기위해 산에서 약초를 수집해 자신을 실헙대상으로 삼으면서
'초목집성(草木集成)' 이라는 책을 저술할정도 약방문에도 뛰어 났다.
한편으로 사조 도신은 의술에 능했다. 당 태종 이세민의 옴을 치료한 대사는 상을 내리기 위한 황제의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 “이번에도 도신이 응하지 않으면 목을 가져오라”는
명을 받은 흠차대신의 칼 앞에 목을 내밀며 입궐을 거절하여 흠차대신을 빈손으로 보냈다.
사조사는 호북성(湖北省) 황매현(黃梅縣) 쌍봉산 자락에 위치하고 있으며, 사조사의 옛 이름은 정각선사(正覺禪寺)다.
당 무덕 7년(624) 도신(道信.580-651) 조사가 창건했고, 나라에서 정각선사라는 편액을 하사했다.
창건 당시 사조사는 800칸에 1000명의 수좌들이 수행하던 대찰이었다. 1400년 세월 동안 흥망성쇠를 거듭하면서 조사전과 몇몇 석조물만 남았다. 근래 들어 천왕전, 대불전, 관음전, 지장전, 화엄전, 조당,
장경루, 종고루 등 30여개의 전각이 복원되었다. 조사전 안에는 각종 편액과 도신 스님의 상이 모셔져 있다.
왼편 길로 올라가면 비로탑이 있는데 산중턱에 세워진 이 단층 정방형의 전탑은 당대(唐)의 것으로 높이 11미터, 기단 11미터로 탑사방에 연호형 문이 나 있다.
탑내부는 도신선사의 4대제자들이 입상으로 모셔져 있으며 사조도신, 왼편이 신라법랑, 오른편 오조홍인 그가운데
신라출신 법랑스님(法朗632~)의 입상을 발견할 수 있었다.
법랑스님의 제자 신행(神行704~779)은 신라에서 중국으로 건너가 선을 배워 전파함으로서 구산선문 중 하나인 희양산문의 기원이 됬으며
한국선에 커다란 영향을 준것이다
탑사방에 연꽃 무늬를 드리운 이탑은 도신선사의 진신탑이라는데,
뒷편 언덕으로 조금더 올라가면 오조홍인대사에게 법을 내린 '전법동' 법당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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