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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9장
제 9 장 선택
(대 지)
一. 이스라엘을 위한 애통(1-5)
二. 이스라엘은 육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ALE음과 선택으로 됨(6-13)
三.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14-18)
四. 하나님의 예정에 항거치 못함(19-23)
五. 택자만 구원 얻음(24-33)
(본문강해)
一. 이스라엘을 위한 애통(1-5)
. 9:1-2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바울이 앞장에서 하나님이 구원운동의 절대적 승리를 언급하셨다. 그런데 본 장에서는 이스라엘의 불신을 언급하고자 하기 때문에 본 장의 내용이 앞장의 내용과 모순된 것처럼 여겨질 우려가 있다. 그러므로 9장에서 언급하는 내용이 거짓이 아니고 참말이라는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거짓말이 아니라고 한 것이다. 언제나 진실하게 사실 그대로 말하는 것이 가치가 있고 다른 사람도 인정하게 된다. 우리는 모든 사실을 가감이 없이 그대로 말해야 한다. 과장을 한다든지 사실보다 조금 어긋나게 말하는 것은 진실하지 못한 것이며 하나님께서도 기뻐하지 않다. 그 당시에는 거짓말을 하면 다른 사람들이 모르고 속지만 얼마 후에는 사실대로 드러나게 된다. 그리하여 그 사람이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신용하지 않다.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 어떤 사람들은 이 구절을 들어서 바울이 자기민족을 위해 애통하였으니 민족주의자요 애국자라고 한다. 또 예수님도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눈물 흘린 것을 보아 이스라엘 민족을 위한 애국자라고 한다. 예레미야가 이스라엘을 위해서 눈물 흘린 것도 그가 자기 민족을 위한 민족운동을 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잘못된 것이다. 예수님의 구원 운동은 민족적 차별이 없고 국경을 초월한다. 하나님은 어떤 민족은 더 사랑하고 어떤 민족은 조금 사랑하거나 국가에 따라 차등을 두어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다 같이 사랑하고 공의대로 심판한다(마5:45). 또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한다고 했다(딤전2:4).
고린도후서 7:10에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 했다. 근심은 두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요 다른 하나는 세상근심이다.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모든 염려를 주께 맡기고 근심하지 말아야 한다(벧전 5:7).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영적 문제, 신앙 문제, 교회 문제, 구원 문제에 대하여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뜻대로 바로 할 수 있을까 하고 근심하는 것이다. 이러한 근심은 회개함에 이르는 열매와 구원에 이르게 하는 열매를 맺게 한다. 바울의 근심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다.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 즉 형제, 골육, 친척이 하나님을 거역하고 그리스도께 돌아오지 않기 때문에 애통하며 근심한 것이다. 예수님과 예레미야도 이러한 근심이었다. 이것은 민족주의나 애국심에 근거한 근심이 아니다. 그리스도 안에는 민족이나 국자의 구별이 없고 그리스도의 구원 운동은 민족이나 국가를 초월하기 때문이다. 바울이 민족주의자였다면 왜 이방의 사도가 되었겠는가? 바울이 말하기를 참 이스라엘은 영적인 것이요 육적인 것이나 혈통적인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6-13, 2:28-29, 갈 3:7). 그러면 바울이 본 장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근심과 고통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 해답은 4-5에 언급하였는데 즉 이스라엘에는 언약과 율법이 있고 예배와 약속이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것은 오늘날 참된 교역자가 교회를 위하는 근심이나 애통과 같은 것이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위하여 흘리신 눈물도 택한 백성의 구원을 위한 눈물이었다. 구약의 이스라엘은 신정 국가로서 교회라고 했다(행 7:38). 선지자들의 눈물은 신정 국가인 그 교회를 위한 눈물이었다. 신약 시대에는 자기 민족도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면 이방인이요 이방인도 그리스도를 믿으면 형제가 된다.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증거하노니 양심은 선악을 판단하여 악을 금하고 선으로 인도하는 마음의 기관이다. 인간이 타락한 후에는 영혼이 죽었고 양심도 어두워졌으므로 양심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 수 없다. 그러나 중생한 영에게 사용되는 양심은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고 진리를 받은 것만큼 하나님의 뜻을 찾아갈 수 있다. 그러므로 성도의 양심이 증거하는 것은 진실한 것이다.
. 9:3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바울은 자기 형제, 골육, 친척 즉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고 했다. 이것은 바울이 하나님의 택한 백성 즉 교회를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는데서 나온 말이다. 바울은 이스라엘이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져 저주받게 된 것을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끊어져 저주받게 된 것처럼 생각한 것이다. 이것은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한 증거이다. 우리가 교회를 진정으로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는 신앙을 가져야 되겠다. 교회의 어려운 문제는 자기가 당한 문제인 줄 알고 교회 일을 자기 일로 알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는 가운데 들어가야 참된 신앙이다. 예수님께서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했고 교회를 위하여 친히 피 흘려주셨다. 바울이 예수님의 신앙과 심정을 본 받은 것이다. 우리 성도는 자기 집 짓는 것보다 예배당 짓는 것을 더중히 여겨야 하며, 교회에 대한 정성이 자기 집에 대한 정성보다 커야 된다. 또 교회가 부패하고 속화되면 자기가 그렇게 된 것처럼 안타까워하여야 한다. 교회 문제와 구원 운동에 대해서 무관심한 자는 그 마음이 믿음에서 떠난 것이고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는 증거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를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고 교회가 타락되어 하나님과 그 말씀을 떠나는 것을 근심하며 안타까워하는 믿음을 가져야 되겠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김으로 하나님께서 노하셔서 진멸코자 하실 때에 그들의 죄를 사해 주시기를 간구하면서 사해 주지 않으려면 주의 기록한 책에서 자기의 이름을 지워 달라고 기도를 드렸다(출 32:32). 이름을 지워 달라고 한 것은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이 범죄하여 하나님에게서 끊어지게 된 것을 자기가 끊어진 것과 같이 생각한 데서 나온 기도이다. 모세는 이스라엘을 자기 생명같이 사랑했다. 생명책에 한번 기록된 이름은 다시 지울 수 없다. 창세 전에 한번 기록해 놓은 것은 영원히 지워지지 않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범죄하면 지워버린다고 하신 뜻은 무엇인가? 성도의 믿음 지킨 행위가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는데 믿음을 잘 지키던 성도가 범죄하면 그 믿음 지킨 공력이 도말된다는 뜻이다.
. 9:4-5 저희는 이스라엘 사람이라 저희에게는 양자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조상들도 저희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저희에게서 나셨으니 저는 만물 위에 계셔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
본 절들은 바울이 골육, 친척 즉 이스라엘을 위하여 근심하며 고통한 이유를 보여줍니다. 바울의 고통은 민족주의나 애국심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양자인 까닭이요 하나님의 영광과 메시야에 대한 언약(약속)과 율법과 하나님께 대한 예배가 그들에게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와 같은 이스라엘의 특징들은 오늘날 교회에만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은 오늘날 교회에 해당된다. 또 다음 6-7에 이스라엘에서 난 자가 다 이스라엘이 아니고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 자녀가 아니라고 한 것을 보아도 육적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영적 이스라엘 즉 교회를 가리키는 것이다. 오늘날에는 자기 민족이라도 불신자는 이방인이요 이방인이라도 신자는 한 형제요 그리스도의 한 나라 백성이다(벧전 2:10).
二. 이스라엘은 육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믿음과 선택으로 됨(6-13)
. 9:6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바울이 이스라엘을 위해서 고통하고 근심한 것은 육적 이스라엘을 위함이 아니라는 것을 여기서 다시 증거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되는 것은 약속(말씀)을 믿음으로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이스라엘 백성이 믿지 않기 때문에 바울이 근심하고 고통하였으나 그들 때문에 하나님의 구원 언약이 폐하여 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 중에도 수의 다과(多寡)를 무론하고 선택자가 있고 믿을 자가 있기 때문이다.
. 9:7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칭하리라 하셨으니
이스라엘 백성이 아브라함의 자손이지만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해서 다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아브라함의 씨 즉 아브라함의 후사요 참 이스라엘 백성이다.
아브라함의 씨라는 뜻은 장차 아브라함의 자손 중에서 나실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가 참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참 이스라엘 백성이다(갈3:7, 16, 29).
. 9:8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육신의 자녀는 아브라함이 육신을 따라 낳은 아들 이스마엘을 가리키는데 이 아들은 참 이스라엘이 아니다.
약속의 자녀 아브라함이 약속을 따라 낳은 이삭을 가리킨다. 이 이삭으로 말미암아 난 자라야 참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약속으로 말미암은 자가 참 이스라엘이요 영적 이스라엘이다. 이와 같이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말씀에 서 있는 교회가 참 교회이고 진리의 말씀에서 떠난 교회는 참 교회가 아니다. 참 교회의 삼대 징표(三大徵表)는, ①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전하고, ② 성례를 거행하고, ③ 권징(勸懲)을 부지런히 행하는 것(부패를 제거시키고 성결을 보장함)이다. 이상 세 가지가 있어야 참 교회이다. 참 교회는 반드시 말씀이 살아 역사하고 그로 말미암는 영적 생명의 역사가 있어야 한다. 이것이 없으면 죽은 교회이다.
야고보서 2:17에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했다.
. 9:9 약속의 말씀은 이것이라 명년 이때에 내가 이르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라
이 구절은 창세기 18:10절의 인용이며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고 하신 약속이다. 이삭은 이렇게 약속으로 낳은 아들이다.
. 9:10 이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잉태 하였는데
본 장에서 13절까지는 야곱과 에서에 대한 사실을 들어서 하나님의 선택원리를 설명한다.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리브가는 이삭의 아내인데 그가 이삭으로 말미암아 쌍동이를 잉태한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 9:11-12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리브가가 쌍동이를 잉태하였는데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않고 복중에서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할 수 없을 때에 리브가에게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고 하신 것을 보면 모든 것은 사람의 행위로 인하여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선택으로 말미암아 되는 것이 분명하다는 의미이다. 후에 그 쌍동이가 출생하니 큰 자는 형 에서요, 작은 자는 동생 야곱이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대로 장자의 명분과 축복은 동생 야곱이 받았다. 야곱은 하나님께서 택했기 때문에 약속의 자녀가 되었고, 에서는 택하지 않았기 때문에 약속의 자녀가 되지 못했다.
. 9:13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셨다 하심과 같으니라
이 구절의 말씀은 말라기 1:2-3의 인용인데 하나님이 야곱을 택했기 때문에 사랑하여 신령한 축복을 많이 해 주셨고 에서는 불택자이므로 신령한 축복에서 떠나게 되었다는 뜻이다. 이 사실로 보아도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선택으로 말미암아 되는 것이고 행위로 인하여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행위로 보면 야곱이 에서보다 나은 것이 없다. 야곱은 자기 아버지와 형을 속이고 또 자기 장인의 양을 빼앗으려고 여러 가지 수단과 방법을 다 썼다. 그러나 에서는 자기 부모를 공경하려고 애를 많이 쓴 사람이다. 끝까지 부모를 모셨고 가나안 사람인 아내가 부모 공경을 잘하지 못하므로 부모 공경 잘하기 위해서 이스마엘 여자를 아내로 맞아 들었다. 이것을 보면 부모를 공경하는데 얼마나 힘을 많이 썼는지 알 수 있다. 또 자기 동생 야곱의 잘못을 용서해 준 것을 보아도 너그러운 사람이었다. 그러나 장자의 축복은 에서가 받지 못하고 야곱이 받았다. 이것이 곧 사람의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하나님의 선택과 은혜로 된 증거이다. 그런즉 자랑할 데가 없고 오직 하나님께 감사할 것뿐이다.
三.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14-18)
. 9:14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그럴 수 없느니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바울이 상술한 바 아무 조건과 이유 없이 하나님께서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했다고 하면 하나님께서 불의하지 않느냐 하는 반론이 나올 것을 예상하여 거기에 대한 답변을 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럴 수 없느니라 바울이 그럴 수 없다고 했다. 즉 하나님께 불의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 다음절부터 구약 성경을 들어서 증명하고 있다.
. 9:15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행위나 상태를 보아서 긍휼이나 은혜를 베푸시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과 자유의지로서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신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하신 말씀과도 같다는 뜻으로 출애굽기 33:19절을 인용한 것이다.
긍휼은 타인의 고통에 대한 인휼(仁恤)의 정을 베푸는 것으로 외부적인 면이다.
불쌍히 여김 내적인 동정심의 역사이다.
. 9:16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하나님의 긍휼과 불쌍히 여김을 받는 것은 사람의 청원이나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하나님의 주권과 선택으로 말미암아 된다는 것을 다시 증거한다.
원함은 인간의 요구, 소원, 청원을 가리키고 달음박질은 인간의 노력과 행위를 가리킨다.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긍휼과 은혜를 베푸는 것은 하나님 혼자서 단독적인 역사로 행하시는 일이라는 뜻이다.
. 9:17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로라 하셨으니
앞의 두절(15-16절)에서는 택자에 대해 증거했으나 본 절에서는 불택자를 내신 일에 대해서 구약에서 바로의 실례를 들어 설명한다.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이것은 출애굽기 9:16절의 인용인데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팍케 하며 하나님이 하시는 이스라엘의 구원운동을 방해하게 하셨다. 그 때에 하나님이 능력으로 바로에게 열 가지 재앙을 내려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내셨다. 또 다시 하나님이 바로를 강퍅케 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홍해까지 추격하게 하였고 하나님은 크신 능력으로 홍해를 갈라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고 바로의 군대는 홍해에서 전멸시킴으로 온 세상에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냈고 하나님의 이름이 온 땅에 퍼지게 했다. 하나님은 당신의 능력을 나타내고 영광을 드러내기 위하여 강퍅한 바로도 필요했던 것이다.
"강퍅케 함"은 완고하게 하셨다는 뜻이다. 잠언 16:4에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씌움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고 하셨다.
. 9:18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모든 것이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과 하나님의 자유의지에 의해서 되어진다는 것이다. 인간의 행위나 의사와는 관계없이 하나님이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하나님이 영광을 위한 계획과 당신을 계시하시는 목적이 있다.
四. 하나님의 예정에 항거치 못함(19-23)
. 9:19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뇨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뇨 하리니
앞에서 말한 바 하나님께서 원하는 대로 바로와 같은 사람을 강퍅케 한다고 하면 하나님이 어찌 바로를 허물(책망)하시고 진노하시는가? 하나님이 강퍅케 하시는 것을 누가 막을 수 있겠는가? 하고 당연히 반론이 나오게 될 것이다. 바울은 먼저 이 반론을 말하고 거기에 대하여 다음에서부터 답변을 하려는 것이다.
. 9:20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이 사람아 윗절들에서 말한 택자와 불택자를 하나님이 내신 일에 대하여 하나님이 불공평하다고 말하는 사람들, 또는 하나님께서 바로를 강퍅케 해 놓으시고 왜 바로를 책망하시고 심판하시는가? 하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이러한 사람들에 대해서 답변을 해 주려고 한다.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인생은 피조물이고 하나님은 조물주인데 피조물은 조물주가 하는 일의 뜻을 다 알지도 못하고 차이가 너무 심하므로 감히 항거(抗拒)할 권리도 없고 실력도 없다는 의미이다.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왜 나를 이렇게 만들었느냐고 말할 정도가 못된다는 것이다. 피조물이 어떻게 창조자의 계획과 목적을 다 이해할 수 있으며 그 지혜를 다 헤아려 알 수 있겠는가? 피조물은 창조자가 하시는 대로 되는 것뿐이고, 아무 것도 말할 정도나 처지가 못된다.
. 9:21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를 가지고 필요에 따라 조금 떼어서 귀한 식기(食器)를 만들고, 또 조금 때어서 변기(便器)를 만들 권리가 있다. 그렇다고 변기(便器)가 토기장이에게 "왜 나를 천히 쓸 그릇으로 만들었는가? 하고 그의 불공평함을 말할 수 있겠는가? 사람은 자기의 필요에 따라 귀히 쓰는 그릇과 천히 쓰는 그릇을 만든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도 당신의 필요에 따라 택한 백성도 내고 불택자도 낸 것이다. 이 일에 대하여 피조물은 항거(抗拒)할 수 없는 것이다. 항거하는 것은 사람을 하나님의 자리에 올려놓고 동등으로 생각하는 데서 나온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을 비교할 때 너무 차이가 심하기 때문에 왜 이렇게 만들었는가 불공평하다는 말을 전혀 할 수가 없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자기 아들 생일날 물고기나 닭을 잡아 반찬을 해서 생일 잔치를 해주었을 때 자기 아들은 생일이라고 즐거워하는 반면 닭과 물고기는 희생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을 무자비하다든가 불공평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닭은 잡아먹으려고 길렀고 물고기도 잡아먹을 수 있는 것으로 전혀 잘못이 없고 따질만한 것도 되지 못한다. 그 이유는 사람과 물고기는 차이가 너무 심하기 때문이다. 혹 자기 생일날 남의 아이를 잡아먹었다고 하면 그것은 문제가 되고 무자비하다고 할 것이고 불공평하다고 할 것이다. 사람이 걸어가다가 개미 한 마리를 밟아 죽였다거나 파리를 잡아 죽였다고 해서 그 사람을 무자비하다거나 불공평하다고 할 수 없다. 그 이유는 차원이 다르기 때문이다. 사람과 하나님 사이도 창조자와 피조물의 차이인데 그 차이가 얼마나 크다는 것을 깨달으면 이 문제가 해결될 것이다. 욥은 하나님 앞에 인생은 벌레와 같고 구더기와 같다고 했다(욥 25:5-6).
. 9:22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본 절은 불택자의 필요성에 대하여 언급한다. 불택자는 하나님이 그렇게 낸 것이 아니고 그들 스스로가 불순종하고 멸망으로 들어가는 것을 하나님이 유기했다(버려 두었다)고 하는 학설이 있다. 이 학설은 하나님께 죄책을 안 돌리려는 데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이 학설도 답변하지 못할 점이 많다.
① 창세 전에 하나님이 왜 전인류를 다 택하지 않고 일부만 택했는가?
②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으려고 할 때나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팔려고 할 때 하나님이 왜 막지 않았는가?
③ 가룟유다가 예수 팔 것을 구약에 왜 예언했는가? 하나님이 그것을 미리 알고 불택자로 정했다고 하면 택자도 예지예정이 되지 않는가? 예지예정은 하나님이 사람을 따라 온 것이요 하나님의 주권을 무시하는 것이 된다.
④ 어린아이가 강이나 불이나 죽을 곳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부모가 막지 않고 있다가 그 아이가 거기 들어가 죽었다면 부모에게 책임이 없겠는가? 막지 않은 것도 책임이 있다.
⑤ 바로 왕을 강퍅케 한 분은 하나님이라고 하지 않았는가(17-18). 그러므로 불택자도 하나님이 냈다고 해야 옳다. 그러나 죄에 대한 책임은 하나님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절대 선이시므로 털끝만큼도 어두움이 없기 때문이다(요일 1:5).
진노의 그릇 불택자는 불의에 대해 하나님이 진노하시는 것을 나타내시고자 진노의 그릇으로 내신 것이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인 동시에 공의와 진노의 하나님이신다. 하나님이 불택자를 내시고 강퍅케 하여 이용하시고(바로와 같이, 가룟유다와 같이) 노아 시대와 같이 큰 능력으로 심판하여 지옥에 보냄으로 세세토록 하나님의 진노를 나타내는데 이용하는 것이다. 이것이 토기장이가 사람의 필요를 따라 천히 쓰는 그릇 즉 난로나 용광로의 도구들을 만들어 사용하는 것과 같다. 또 사람이 어떤 나무로는 책상과 같은 가재도구를 만들고 다른 것은 장작으로 불을 때는 데 사용하기도 한다. 그렇게 했다고 해서 사람에게 힐문하거나 불의하다고 운운할 수 없다. 왜냐하면 나무와 인간은 너무나 차이가 심하기 때문이다.
오래 참으시므로 관용하시고 불택자가 악을 행할 때에 당장에 멸망시키지 않고 심판 날까지 참고 기다리신다는 뜻이다. 마태복음 11:29-30에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고 했다. 베드로전서 3:20에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고 했다.
. 9:23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하리요
본 절은 택한 백성에 대한 설명이다. 택한 백성은 하나님의 긍휼의 그릇으로서 하나님의 사랑의 풍성함을 나타내고 또 당신이 영광을 받기 위한 그릇이다. 하나님께서 택자와 불택자를 냈다. 택자는 곡식이고 불택자는 가라지라 했고(마 13:24-30), 택자는 양이고 불택자는 염소라 했다(마25:31-46). 택자와 불택자는 그 종류가 다르다. 염소가 양이 될 수 없고 가라지가 곡식이 될 수 없다. 하나님께서 야곱은 택자이기 때문에 사랑하시고 에서는 불택자이므로 미워하셨다(13절). 택한 백성에게는 많은 긍휼을 베풀어 독생자를 주어서 구원하여 천국 영광의 자리로 데려감으로 세세토록 하나님의 사랑과 영광을 나타내는 그릇으로 정하신 것이다. 하나님이 택자를 예정해 놓으신 이유는 무엇인가?
①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세세토록 그 사람을 줄 대상자가 필요했고,
② 세세토록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낼 자가 필요했고,
③ 하나님의 풍성한 영광을 나타낼 자가 필요했고,
④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자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목적을 위하여 창세 전에 택한 백성을 예정하신 것이다(엡1:4).
무슨 말하리요 하나님께서 택자와 불택자가 필요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원한 목적 아래 당신을 위하여 내신 일에 대하여 피조물된 인간으로서는 아무 말할 권리가 없다는 뜻이다.
五. 택자만 구원 얻음(24-33)
. 9:24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 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
이 그릇은 우리니 택자는 "믿는 우리"라는 것이다. 유대인이건 이방인이건 부르심을 입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세세토록 하나님의 사랑을 주며 그 사랑을 나타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할 복 받은 그릇이라는 뜻이다.
. 9:25-26 호세아 글에도 이르기를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치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곳에서 저희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름을 얻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이것은 호세아 2:23절과 1:10절의 인용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타락하여 하나님을 멀리 떠났다가 다시 돌아와서 하나님을 찾을 것을 가리키는데 바울은 이 원리대로 하나님을 모르던 이방인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믿음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을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은 혈통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선택으로 된다는 것을 증거한다.
. 9:27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뭇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
이 구절은 이사야 10:22절의 인용인데 육적(표면적) 유대인이 아무리 많아도 다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고 남은 자 즉 택함을 받은 자만 구원을 얻을 것을 증거한 것이다. 마태복음 7:21-23에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고 했다.
. 9:28 주께서 땅 위에서 그 말씀을 이루사 필하시고 끝내시리라 하셨느니라
이것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땅 위에서 완전히 이루시고 끝내신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일점일획도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루신다고 했다(마 5:18).
. 9:29 또한 이사야가 미리 말한바 만일 만군의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 두시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과 같이 되고 고모라와 같았으리로다 함과 같으니라
이것은 이사야 1:9의 인용이며 만군의 여호와께서 유대민족을 죄로 인하여 벌하실 때에 조금 남겨 놓았기 때문에 소돔과 고모라 같이 아주 전멸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도 택한 백성이 있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씨를 남겨두었다는 말은 택한 백성을 남겨 두었다는 뜻이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자손이 다 구원받을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택함 받은 자가 참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구원을 받는다고 앞에서 말하였으므로 택자가 이방인 중에도 있고 유대인 중에도 있다는 것을 증명한 것이다.
. 9:30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의를 좇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이방인들은 모세의 율법을 몰랐으니 율법을 지켜서 의를 얻으려고 하지 않았던 자들이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은 것이다.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자랑할 것이 없다는 뜻이다. 그 이유는 모세의 율법을 지켜 행함으로 의를 얻으려던 이스라엘 백성은 의를 못 얻었고 도리어 이방인이 의를 얻었기 때문이다.
. 9:31 의의 법을 좇아간 이스라엘은 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이스라엘은 의에 이르기 위하여 의에 이르는 법인 모세의 법을 열심히 좇아갔으나 종래 그것을 성취하지 못하셨다는 것이다.
의의 법은 모세의 율법이다.
법에 이르지 못하셨다는 것은 의의 법에 도달하지 못하셨다는 뜻이다.
. 9:32 어찌 그러하뇨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
어찌 그러하뇨 의의 법을 쫓아간 이스라엘이 의를 얻지 못한 이유가 무엇이뇨 하는 말이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이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행위에 의지하여 자력으로 의를 얻으려 했기 때문이다.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 돌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데 이스라엘이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으므로 그리스도에게 심판 받을 것을 가리킨다. 그리스도를 거역하고 반대하는 자들은 그리스도께 부딪혀 깨어지고 망한다. 그것은 계란으로 돌을 치면 계란이 깨어지는 것과 같다.
. 9:33 기록된바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본 절은 이사야 28:16절, 8:14절의 의역적(意譯的) 인용으로 그리스도가 믿지 않는 자에게는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어 그 돌에 부딪히는 자는 깨어지고 거치는 자는 넘어진다는 것과 그들이 그리스도를 반대하고 대적하다가 망하게 될 것을 가리킨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는 그리스도가 보배로운 산 돌이 되어(벧전2:4-5), 생명이 되고, 보배가 되고 만세반석이 되어 견고한 보호처가 된다. 그러므로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한다. 다시 말하면 실패하지 않고 영원히 부끄러움 없이 영광 중에서 살게 된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신뢰하며 믿음을 지키는 자는 만세반석 안에 숨어 있으므로 원수 마귀가 손 못 대고(요일 5:18),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됨으로(롬 8:28), 무슨 일을 당하든지 구원을 이루어 언제나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고 영광에서 영광으로 전진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