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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8시집
꿈, 그 행간에서
2002. 12. 20. 청송시원
* 자전적 에세이/ 「시와 인생은 함수관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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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의 말
耳順의 언어
여덟 번 째 나의 고뇌를 털어낸다.
인생은 60부터가 아니라 나의 시는 이제부터 시작된다. 그동안 다양한 실험을 통해서 한 편의 시가 나의 삶과 인생에 있어서 그 찬란한 증언이 될 수 있을 것인가를 깊이 내면으로 삭여 왔다.
그러한 존재의 확인이나 성철과 더불어 현실과의 화해는 더욱 나의 시 쓰기를 곤혹스럽게 만들지 않았나 생각된다.
그러나 나는 절망하지 않고 육성으로 시를 쓸 것이다. 그것이 나의 영혼과의 교성(交聲)임을 믿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시작해야겠다. 좀더 성숙한 언어와 가치관의 투영을 위해서 땀 흘려야겠다. 빗진 나의 인생에게 승화된 최후의 생명이 환희로 남을 것을 약속하리라.
2002년 겨울에
청송시원에서
어떤 화자
꽃 비
어디선가
본 듯도 한
젖은 눈썹
빛바랜
비밀 한 자락 어리인
바람결로
조심스레 사랑을 풀어
언젠가 들어본 듯도 한
광기의 역설
허허로운 잔디 위
그대 미소로
지금사 흐르는
가냘픈 향내
아아,
비로소 눈뜨는
비로소 수줍은.
촛 불
새벽 가까이
호올로
어인 일이기에 온몸을
여리게 떨다가
나의 눈물인양
뚝뚝 떨어질 때
그토록 잠들지 못한 영혼
그 눈물만큼 젖어 있었네
어쩌다가
붉게 사그라지는 한 줌
사랑의 언어
더욱 혼미해진 별빛
다시 사루고
아직도 걷어내지 못한 어둠 속
그대 숨소리는 멈춰 있을까
휘윰한 새벽닭 훼치는 소리
촛농으로 굳어버린, 어느덧.
눈물샘
협곡(峽谷)
아득히
하도 많은 한(恨)
물길로 길게 흘러
아직도 마르지 못한 흔적
맹목으로 훌쩍 찾아간 낯선 발길
숨 가쁘게 취해버린 전율이여
그득 넘쳐나던 그곳엔
흙 패인 빗물 자국만 있었네
어느날, 희끗한 머리칼 사이
순응(順應) 깊게 스며스며
작은 이슬로 투영된 시간의 깊이
오늘도 내일도 그리고 또
푸른 눈빛으로
하얀 웃음으로
이제 모두가 허물어지려는 듯
언제나 고여 있는 누호(淚湖) 부근
둥둥 상처 조각들 진지하게 떠가고 있네.
밤 비
누군가
어둠 속을 걸어오고 있다
주룩주룩
불면의 먼 탁류에 휩쓸린
온몸 차거운 명목(暝目)
한 줄기 신음으로
창문 두드리며
나를 부르고 있다.
마지막 속삭임
애절스런
눈빛
그렇다, 뒤척이는 무지개
어느새 바람인 듯
발걸음 소리
오련하다
다시 사랑은 그렇게
주루룩 ─
멀. 어. 지. 고.
있었다.
장마 끝
들판 논틀길에서
그 끝
햇살
하도 따가와
그름 한 점 쉴 곳이 없다.
겨울나무
잠시
눈물은 있을 것 같아도
나에게 절망은 없다
차라리
영원한 잠에 들어
쌓이는 눈덩이 가슴으로 안은 채
애절한 그리움 하나씩만
아프게 지울 일이다
기다림도 함께 지울 일이다
지난날은 묻지 않기로 한다
퇴색된 사랑과 꿈
이제서야 영혼을 만나고 있는데.
저문 강가에서 혹은 감상적
저문 강가에서
그대가 감상에 젖어 있을 때
강물은 미지의 세상을 꿈꾸고 있었다
강물의 꿈은 진실로 투명하지만
그대가 질겅질겅 삼켰다 뱉아내는
눈물 섞인 언어는 보이지 않았다
강물 가득 그 푸른 꿈
강 가득 다시 번지는 노을 빛 사이 머무는
그곳은 어디일까
언제쯤일까
강가에서 그대가 지극히 감상적일 때
강물은 이미 날 저문 침묵으로 저만치 흘러
어느새 영혼만 손짓하고 있는데―.
봄볕 창가에
늦잠 든
머리맡에 찾아와
진한 사랑꿈
흔들어 깨우고
배시시 눈 흘긴 채
앞산을 돌아 넘는다.
그대 떠나버린 흔적
더듬어
엉킨 실타래 풀리지 않는
혼매(昏昧)로 다시
멀어지는 화사함
산그늘 돌아 지워진다.
별이 진 자리엔 눈물만 있었다
별똥별이
떨
어
진
다
이내 허황한 공간
적요(寂寥) 그 너머
순간을 느끼지 못한 그 빛살
그냥 눈을 감는다
누군가 성큼
사랑의 아픔도 지우려 하지만
별빛으로 새겨진 문신
어쩐지 투명하다
어두울수록 궁핍해지는 눈물
뚝
뚝
떨어지고 있었다.
어떤 화자(話者)
그는 먼저
육신을 태우고
이미 깨진 환상을 삼켰다
그는 언제나
밤의 향연으로
영혼과 육신의 합일을 정의했다
영적인 예감이 사랑을 잉태하고
육적인 욕구는 사랑을 승화하는
그의 발성법은 온화하다
어느날 그는 떠나고
사랑해, 들릴 듯 말 듯
남아있는 메아리 가슴 시리다.
파 도
너는
온밤을
잔잔한 음악이었다가
영혼을 넘나드는 메아리였다가
문득
그 사랑의 아픈 기억
밀어 올리는
잔인한 바람이었다가
그토록
너의 부드러운 몸짓에
흠뻑 젖어버린 물새들 나래짓
일몰쯤
하얗게 분노하는 나의 분신이었다가
너는 온밤을
사랑하는 사람의 흐느낌이었다가
아름답게 부서진 울음이었다가
언제나 아아,
분노였다가
노래였다가.
모심첩운(母心疊韻) • 1
지금은 무척 안온하단다
미동도 할 수 없는 내 육신은
비록 어둠 속에 갇혀 있다만
멀었던 여정을 끝내고
이젠 뒷산 나만의 작은 공간에서
따수운 햇살과 함께 편히 쉬고 있단다
하마 이승에서의 일쯤은 잊을만도 하다만
어쩐지 바람 불고 비 내리는 날이면
이미 푸석푸석해진 내 등골을 긁는
한스런 한 생애가 섬광처럼
밤벌레 서러운 울음으로 떠도는데
어쩔 수 없구나, 한 줌 흙으로 깊숙히
얽어맸던 그 사슬을 묻어두었다
저 동녘, 막 솟는 태양에 취해
진하거나 혹은 여리게 영육(靈肉) 짓무른 한살이
이곳에서는 아무 소용없는 하소연이지만
그러나 나의 살점, 너희 세 핏줄
이토록 알싸한 비명 같은 음률들이
언제나 내 영혼 곁에서 아아로와
더러는 너희 꿈결에서나 만나고 있단다.
모심첩운(母心疊韻) • 2
이승에는 지금 비가 쏟아지느냐
내 흙 이불자락 적신 빗소리가
이곳 명계(瞑界)까지 들려온다
네 아버지가 떠난 그 길을 따라와
무상(無常)의 깊은 늪에 젖어 있지만
지금은 마지막 유골 한 점이
시간을 정지시킨 채
문 밖까지 오련한 신음을 눈치 챈다
아아, 내 살점 그 생명의 신비가
지지리 복도 받지 못한 채 살다가
다시 네 아비처럼, 이 어미같이
영면을 위해 황토 속으로 돌아오느냐
건너 중간댁 큰 조카도, 장밭 큰댁 작은 조카도
이번엔 너마저 한 세대가 이곳을 찾아
짧은 육십 평생은 그저 운명이려니
산새들 울음이 멎고
네 가솔(家率)들 통곡은 지축을 흔들지만
어쩌랴, 돌릴 수 없는 천명(天命)
가끔 저승의 경계에서 만날 수 있었던
이름들 그들의 모진 아픔 모두 지우고
이젠 나와 함께 무지개 속을 날자꾸나
이승에 쏟아지던 비는 아직도 멎지 않았느냐.
모심첩운(母心疊韻) • 3
오늘은 날개를 달고 현해탄을 건너
일본 히로시마 어디쯤(당시 원자탄 투하로 폐허가
된 땅에 새로 계획된 도시라서 지금은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었다)
네 아버지 팔뚝 태엽에 빨려 들어가
부러진 어느 하역 부둣가를 찾다가
너희들을 잉태케 한 단란한 그 집을 찾다가
부랴부랴 경상도 고향 산골로 돌아온 날
(달래, 냉이, 쑥부쟁이, 쇠비름, 명아주, 고들빼기,
돈나물……)
이곳에선 연명할 수 있었다
윤사월 보릿고개 시절을 기억하겠지
(청보리죽, 송기죽, 쑥버무리……)
가난은 진한 주홍색 눈물이었다
허리 꼬부라지도록 땅을 팠지만
너희들이 바라는 장도(壯圖)는 읽어주지 못했다
우짜겠노, 유산으로 남긴 가난죄
이 영혼은 영원히 씻을 수가 없는데
지국천왕이시여,
(……허락만 하신다면)
오늘도 남아있는 저들 곁으로 날아가
살아가는 모습을 살피고 싶습니다
무언가 부족함이 저들을 괴롭힌다면
아니 이태껏 그 눈물이 마르지 않았다면
나는 그것을 내 죄로 하여 씻어주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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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그 행간에서
사물과 관념
─ 그 행간에서 • 1
시야에 화사한 풍경들은
이미 그의 관념권에 진입하면
언제나 외로운 표정으로 변한다
왜 그럴까
운명지어진 한 시인의
그 무한한 사유의 공간은
너를 그냥 두지 않는 습성 때문일게다
별들이 벌써 눈물 흘리고
흘린 눈물 하나씩 받으면서
이 밤은 깊어가고
이슥해진 어둠만큼
싸늘해지는 행간에서
어쩔 수 없이 혼자임을 눈치 챈다
이젠 모두가 시야에서 사라지고 없지만
창틈으로 새어드는 바람 소리
옛 사랑의 음절로 스며드는데
웬 일일까
이 세상 사물들이 그의 오관에 닿으면
영원한 상상력으로 변해 버리는 것은
시인의 아아, 그 오랜 습성
그것 때문만은 아닐게다.
나무 두 그루
─그 행간에서 • 2
강남성모병원 영안실
서둘러 문상을 하고
선걸음으로
장충동 자유센터 웨딩홀에 닿았다
─ 상주는 입관 중이라 없었고
혼주는 이미 예식이 시작되어 만나지 못했다
떠남과 새 출발을 담배 한 개비에 태워 보내면서
돌아 나온 길 건너 언덕받이에
나무 두 그루 나란히 서있다
때이른 초승달이 걸려있고
그 나무 사이에 내가 서있다
─ 한 그루는 청청한데
한 그루는 어쩐 일인지 잎새가 말라 있었다.
불꽃놀이
─그 행간에서 • 3
내 등불은 내가 켜지 못한다
쉰여덟 번의 어둠이 작은 나를 휘감았지만
청들지 않은 그 언어는 아직도
환하게 불 밝힌 나의 길을 찾지 못했다
이것이 어눌스럽게 풍기는 나의 은유다
심심산천에 늑대 울음 들으면서
세월로 흐려졌던 내 눈빛
마냥 불놀이 꽃불을 추스러던 눈물의 체험
사랑의 환희 한 다발은 언제나
저멀리 비껴 서서 손짓만 해대는 그 이미지
아아, 무서리 내린 농도(農道)를 따라
삶이 깔리고 아픔이 녹아내리지만
동구 밖 고목 끝가지에 걸린 그믐달
간간히 내 무거운 어깨를 불꽃으로 흔든다
내가 켤 수 없는 등불의 그윽한 상징이다.
삼한사온(三寒四溫)
─그 행간에서 • 4
여기 나목이라 이름 지어진
막연한 돌배나무 한 그루 떨고 있다
영하 몇 십도가 일 년 동안 계속되면
살아가는 맛이 얼어버릴 수도 있겠다
차라리 시베리아 벌판이나 알라스카 빙벽
어디쯤에서 태양을 모른 채 태어나
이미 영혼과 함께 얼어버린 꾸
그 꿈은 언제나 얼어 있어야
제멋을 수정(水晶)으로 빛낼 수 있겠다
한 삼년은 춥더라도
이어 한 사년 동안은 모든 일이 풀리지 않겠나
참으로 막막한 시간과 공간에는
무언(無言)의 비가(悲歌)로 폭설이 내리고
돌배나무도 인간도 이젠 지쳐 있다
그러나 참고 견디는 것만이 미학일 수 없는 아아
춥거나 따습거나 아무렴
살맛과 살멋이 사라진 지하 동굴에서
말(言)들만 얼음덩이로 하얗게 쓰러져 있다
거기 노숙(露宿)이란 신조어 하나
오늘도 밤새워 떨고 있다.
21세기 풍속도
─그 행간에서 • 5
자고 깨면
하나, 둘 그들의 얼굴을 볼 수가 없다
그들은 어디로 갔을까
간밤 회오리바람에 휩쓸려
창밖으로 내던져졌을까
그들이 흔들리며 앉았던 자리에서 문득
들려오는 비명 소리
그 소리에 섞여 떠도는
그들의 아내와 아들과 딸과
그려내던 영혼의 먼 꿈 그 언어는 무섭다
오래전부터 아무도 웃을 일 없기에
그들의 사무실엔 꽃병을 없앴다
꽃병과 함께 내쳐진 그들이
마지막으로 힐끔 쳐다본 건물에는
때묻은 ‘희망찬 21세기’의 깃발이 너덜거린다
아임에픈지 구조조정인지
새 세기의 변덕스런 용어에 쫓긴 채
지금도 서울역 지하도에는
그들과 똑 같은 언어로 우는 눈물
그 상처의 풍속도가 파도로 새겨지고 있다
─ 그 해는 사계절 내내 유난히도 추웠다.
꿈
─그 행간에서 • 6
그는 밤이 아니어도
푸른 꿈만 꾸고 있다
더러는 잔잔한 선율에 어우러지다가
바람의 손짓으로
온몸 전율에 휩싸이는 날엔
보일 듯한 청운(靑雲)의 꿈을 앗기고
천길 벼랑 암벽 아슬히
무섭게 낙하하는 순간
푸른 하늘은 보이지 않았다
물
─그 행간에서 • 7
나의 새벽, 꿈의 파편이
수초 사이에서 조심스럽게 응시하던 눈빛
부서진 물보라 아무리 흘러봐도
모래 한 알 적시시 못하고
스스로 증발해 버린 오오,
나의 수로(水路)여
이미 말라 있는 수로에서
마른 갈대잎으로 숨죽여
스스로 자맥질하는 시늉만 하고 있었나니.
설산(雪山)
─그 행간에서 • 8
무릎까지 빠지는 설산을 오르며
지금 막 깊은 잠에서 깨어난 듯
작은 풀꽃들 몸 푸는 소리를 듣습니다
눈 쌓인 이맘때만 되면 어인일인지
이 산을 넘어야 비로소
이승에서 존재할 수 있는 한 생명이
나를 기다리는 또렷한 신음이 함께 들립니다
그해 겨울, 어느 외진 산골
숫눈길 위에 내 발자국을
어설프게 찍으면서 찾아간 병자(病者)들의 천국
그 천국에서 길어올린 약수 한 두레박
그러나 무릎 아래가 얼어버린 진한 언어도
아버지의 부활을 약속하지 못했습니다
32년만에 폭설로 뒤덮힌 앞산에서
이 지상 모든 불효가
무언의 순백으로 감춰진 채
푸드득 산꿩 한 마리
요요(遙遙)한 그날의 음성으로 눈을 털고 있습니다.
황강(黃江)가는 길
─그 행간에서 • 9
니 참 이거 몇 년만이고. 글케도 짬을 못내나. 그라
다가 고향도 잊으쁘겠다. 이봐라. 웃대 조상부텀 아
부지 오매 여기다가 말카 묻어놓고 그래 일년에 한번
도 못찾아 온다 그 말이가. 이눔의 시상이고 인심이
고 얼음맨코로 차갑다카지만 그래가지고서야 원. 쯧
쯧……
지 고마 할말이 없심더. 묵고 살기가 바쁘다 보니
사람 구실도 몬합니다. 용서하이소 고마. 인자부터는
뭐라캐도 고마 글케는 안살깁니더. 두고 보아소. 자,
인자 고마……
황강은 눈물로 흐로고 있었다
그 눈물 속에 얼비친 가난의 땟자욱
오늘도 내 가슴으로 뭉클
소용돌이 치고 있었다
황강 찾아가는 길, 그러나
악견산에 걸린 해는 언제나
슬퍼 보인 적이 없었다.
詩
─그 행간에서 • 10
새벽 네 시쯤
촛불을 켠다
밤사이
내 어둠 공간을 떠돌던
형체 없는 그 무엇이
맑은 향기로 안긴다
그 무거운 진선미의 발현이었을까
아니다. 사랑의 순수였나
어쩌면 그냥
살아가면서 체험한 여운일게다
푸른 별들이 반짝이다 지쳐
흘린 눈물의 선율이
잠든 창문을 두드리고
아침에 피어날 작은 꽃망울의 속삭임
쉽게 소진될 수 없는 내 영혼을 깨운다
새벽 네 시쯤
화사한 사물들 설자리를 찾고
일그러진 관념들 제 모습으로 놓일 때
마냥 촛불은 활활 타 오른다
그렇다. 꿈의 여백에 덧칠하는
환한 미소가 더욱 절실하지만
내가 찾는 무지개, 새벽에 선연하다.
낙엽
─ 그 행간에서 • 11
잠시
지난 여름 무성하던 내 모습을 접었다
찬바람 한 올에
아사사 떨리는 몸 움츠린다
누가 여기에
눈물 노랗게 쌓아 두었을까
자폐증을 앓는 이들이
줄지어 한숨만 쉬고 있다
아마도 흐느낌을 안으로만 삭이는
깊은 명상이 시작 되었나보다
노란 눈물 황황히 사그라질 때
내 이제사 가을 타는 이유를 알겠다.
화분
─ 그 행간에서 • 12
나만의 우주가 있다
비록 올올(兀兀)하지만
영혼을 일구는 큰 터전이 있다
작은 원(圓)으로 갇혔어도
창틈 햇살 한 줌으로
생명을 지키고
꿈을 키우는
보람이 있다
이 세상 영욕은 버렸다
물 한 모금으로 애환을 삭이는
길든 순명은 아름답다
스스로 꽃피우고
향내를 전하는
화사한 웃음으로 살아간다
오늘도
나의 우주에는 희망이 영근다.
가을 나무들
─ 그 행간에서 • 13
잠시 잠든 것일까
예비된 긴 잠 속에서
누가 묻지도 않는
봄꿈을 잠시 꾸고 있다
벌써 차거운 수맥(水脈)이 흐르고
전신이 싸늘해진다
거기에 걸린 초승달빛마저
얼어얼어 있었다
사랑하는 가을 사람아
저 하늘에 채색된
무지개빛 순응을 아는가
불현듯 너의 가슴도 차가워진다
여름 청노루집
─ 그 행간에서 • 14
2000년 여름
안면도 바다에 와서
50 중년의 무디어진
시각으로 파도를 보고
파도 따라 춤추는 바다새를 본다
수평선께로 침몰하는 석양빛
그 바다새는
이미 낡은 감성으로 내게 다가오지만
갯내음 섞인 바람이 불고
바람 따라 더욱 영롱해지는 긴 여운
문득 내 영혼과 동행으로
청노루집 ⃰ 뒤뜰에 아늑히 고이면
청노루집 넘쳐나는 사랑을 여미고
어느덧 시의 향기 가득하다
그러나 이 여름날 그대여
어쩔거나 그대 곁에서
마냥 설레기만 하는 그리움 한 타래
여리게 저민 별빛 달빛 무지개빛일지라도
내 가슴 한켠 채우지 못한 채
보이지 않는 자하산 ⃰을 찾아
다시 떠나는 발걸음 허전하다.
⃰ 청노루집 : 충남 안면도에 있는 심상해변시인학교 당호(堂號)
⃰ 자하산 : 박목월 시에 나오는 자하산
무서움
─ 그 행간에서 • 15
참 편리함을 살고 있다 싶어서
인터넷에 접속하고
오늘도 무한 공간을 훨훨 날아 본다
어디를 유영(遊泳)할 수 있다는 것은
유쾌한 사유(思惟)를 확대 시킨다
그러나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청탁된 원고는 이메일로 보내야 하고
주고 받는 다정한 목소리도
기계 속에서만 정겹다
참 편리한 삶을 살기 위하여
21세기는 시작되었는가
이미 무섭게 변해버린 이 시대
우리들이 서로 간직한 따수운 정은
어쩌면 제 모습을 찾을 수 없어
불안하다. 더욱 높이 날수록
강물로, 숲으로 짙게 깔리는
무서움을 보고 있다
어느새 사람들은 보이지 않고
한 무리 기계들의 웃음소리만 들렸다.
월면도(月面圖)
─ 그 행간에서 • 16
문득 옥상에 올라가서 달을 본다
오랜만에 서울의 달을 보고 있다
어인 일일까
많이 일그러진 모습이다
저문 날
내 시골길에서 홀로 만났던
예전의 반가움이 아니다
세월이 그대 따라
구름 속으로 흘러흘러
여기까지 밀려온 상채기 진 그림자
밤이면
겹겹 어둠 걷어내는 위용도
한낱 지워진 발자국일러니
다시 달빛을 줍는다
불현 듯
비켜선 월흔(月痕) 근방에서
깊게 패인 내 주름살을 닮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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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교외선을 타고
교외선을 타고
토요일 오후
비가 내리면
어인 일인지
교외선 열차를 타고
시간의 강을 건너고 싶다
차창 밖 낮게 뿌려지는 밀어들
하나씩 둘씩
굵은 빗줄기로 꿈꾸는데
동행하지 못한 영혼의 눈물인양
젖은 들꽃으로 호올로
숨죽인 채
나를 기다리고 있을거다
그래, 간이역 목노 어디쯤에서
떠나간 그대를 불러내어
빗물 고인 술잔 가득
진한 사랑을 풀어
흔들흔들 함께 젖고 싶다.
비 내리는 토요일 오후
어인 일인지
종착역 부근으로 서성이는
허기진 바람이고 싶다.
무창포의 일몰
그대 향기가 둥글게 내 가슴 속 사랑으로 녹으면 어
쩐지 빨갛게 타 내리는 눈물을 보겠네. 어디론가 완
벽하게 떠나려는 마지만 연회장의 환희였네. 저물녘
파도에 섞이는 그대 신음은 이내 빛 한 줄기의 가느
다란 기다림을 밀어 올리며 어둠을 분사(噴射)하는
그 시각 내 영혼은 그 가운데 빠져 있었네. 저 멀리
집어등 하나씩 켜지고 사라진 햇살을 소주잔에 희석
시키면 다시 옛 사랑 이야기는 붉게 녹아 있네.
자자, 그대를 위하여
그래, 사랑을 위하여
아하, 철판위의 조갯살 하나 밤파도에 뛰어 드네. 꺼
지지 않는 불꽃으로 밀려가네. 별빛이 되네. 그날 이
후 해는 뜨겁게 조개 속에 숨어 있었네. 언제나 지울
수 없는 사랑으로 남았네. 아아 언제나 고이 간직한
그대 사랑. 나의 기다림.
강문에서
잿빛 갈매기 한 마리
우연히
순한 모국어 울음으로 나를 회유(懷柔)한다
─모래 위를 걷는다
파도가 잔잔하다
불현듯 빨려 들고 싶다
바람이 분다
내 영혼을 내려 놓는다
바다가 조용하다
이제부터 너를 사랑하리라
하는 맞닿은 아린 소망이
적당한 높이로 하얗게 밀려오면
점점 낮게 다가오는 그대 목소리
참으로 우연히
떠나버린 너를 만나러 갔다가
간절한 갈매기의 화음
한 소끔만 담아 왔을 뿐이다.
꽃지 바다에서
칠월 숨 막히는 뙤약볕 아래
저만치 할미바위가 손짓을 보낸다
할아비바위에게 사랑을 확인하는 것일까
문득 햇살 따갑게 파도와 섞이면
그 사랑 온몸으로 안아
작은 노래 끼륵끼륵 갈매기에게 전하노니
수평선 끝자락에서 밀려오는 그리움
모래알로 반짝 녹아내릴 때
다시 밀려가는 아픈 사랑아
서해안 일몰 다 지워지도록
눈물만 넓게 한 아름 넘실거리다
어쩐 일이냐, 아직도
잃어버린 사랑의 언어
하얀 포말로 둥실 떠가는 데
망망대해 어디쯤에서
이미 부서져 버린 영혼 조각조각
칠월 모래펄에 찾아 나선 사랑아
저만치 할미바위의 손짓은 멈추지 않는다.
⃰꽃지해수욕장에는 할미바위와 할아비비위가 마주 서 있다.
신쥬꾸역에서
신쥬꾸(新宿)의 이른 새벽
지하철역 지하보도에서 만난
노숙자 한 무리에게는
몇 권의 책과
깊은 명상이 필요했습니다
세이부(西武)역에서 게이오(京王)역을 돌아
아침 커피 한 잔 마시기 위해
지하로 건너가면
희미한 알전등 아래서
─ 나는 누구인가, 아니 나는 무엇인가
해답도 없는 의문을 던지고 있었습니다
서울역 지하도에도 노숙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얇은 명상보다는
아니 가족들의 따수운 품안보다는
당장 한 끼의
뜨거운 눈물이 필요했습니다
아아, 이 시대의 우울한 지성인들
─ 내가 왜?
신쥬꾸역과 서울역에서
전혀 교신 되지 않는
21세기의 육하원칙만
현해탄을 풀풀 건너고 있었습니다
왕수영 시인과 함께
김송배(金松培)가
김포(金浦)공항에 내렸을 때는
이미 어둠이 질(길)바닥에
흥건히 젖은 채
일본 도쿄도 주후시 후지메죠
(日本東京都調布市富士見町) 4-25-7
왕수영(王秀英).
큰 누님 같은 그의 표정이 함께
서울에서 나와 함께 서 있었습니다
“한강과 다마가와의 교류(漢江と 多摩川の 交流)”
조후시여성문화회관에서
김송배의 시를 일어로 읽어준 고토모상
모리따상, 마쓰다상, 오오모또상……
한일간의 시낭송 교류도 의미가 있지만
고미산(高尾山) 등반길의 향내가
지금까지 묻어 왔습니다
왕수영 시인은 한강에 와 있고
나는 다마가와에 둥둥 떠 있었습니다.
선인장의 말 • 1
날마다 거친 육신을 까맣게 태우면서
마냥 질펀히 주저앉아 있습니다
천년의 신비 속
구리빛 모래 바람 뒤집어 쓴 채
분노의 가시들을 촘촘히 내밀어 보지만
희미해진 눈동자는
겨우 숨쉬고 있음의 표시였습니다
나를 닮은 모지랑이 친구 서넛 데불고
열사(熱砂)에 익숙해진 한 줄기 신음으로
밤마다 별빛 먼 그리움만 삭이고 있습니다
언듯언듯 들릴 듯한 인디안 말발굽 소리
이젠 그 기다림마저
시간의 굴레 밖으로 사라지고
오늘도 아아,
광막한 모하비 사막 ⃰에서
황량하게 다가오는 신기루의 바람결
꿈엔 듯 콜로라도 강 푸른 물이 넘칩니다
그냥 운명이려니
가끔 사막을 횡단하는 고속도로의 인적을 따라
굳어버린 손 흔들어 보지만
어느덧 까맣게 타죽은 내 육신 한 조각이
독수리의 날카로운 가시거리에서
풀풀 흩날리고 있었습니다.
⃰모하비 사막 : LA에서 라스베가스로 가는 도중에 있는 넓은 사막
선인장의 말 • 2
내게도 호사스런 꿈이 있었던가
서울 어느 집 창문 밖
어디서 이주해 왔는지 알 수 없지만
둥근 화분 내 땅 하나 지키면서
푸른 하늘만 응시하고 있습니다
모질게 떠나온 일
눈물로 살아온 일
이젠 모두 그리움으로 가시 돋쳐
스스로 영혼을 달래보지만
낯선 친구들 틈에서
삭이지 못한 한스런 울분이
온몸을 싸아싸아 감돌기만 합니다
내게도 뿌리는 있었던가
만신창이의 먼 세월을
꿈도 눈물도
박토 그 황막한 고향에 묻어둔 채
이제사 푸사시 몸을 풀고 있습니다.
선인장의 말 • 3
투박한 손바닥
열사에 긴 동맥
타버린 모래에 피를 뿌리고
분노일까, 사랑일까
온몸 가시로만 치켜세운 채
다시 불면의 밤을 맞이합니다
내 주위엔
별빛이 흘린 마른 눈물로 가득하여
사막 한가운데 버려진
나 또한 한 자락 유성에 휩쓸려
떠나간 바람을 불러 보지만
그 일몰은 아름답지 않습니다
고향에 눌러 있거나
이국에 떠나 있거나
어디서나 모래바람에 묻혀
다가갈 수 없는 사랑
사랑을 예감할 수 없는
폐허의 꿈만 따갑게 삼키고 있습니다.
하우하필(夏雨下筆) • 1
비가 내릴 듯 말 듯
그대는 찌푸린 하늘 한 번 쳐다보고
이내 침묵으로 흙 가까이 낮게 엎드린다
오늘도 열매가 여물 듯 말 듯
한 웅큼 햇살이 그대 가슴을 햝아야
의미 있는 이별을 준비하겠지만
어찌된 일이냐 그대여
속살까지 적시는 우기(雨期)의 언어는 무섭다
마른 하늘이 울고
다시 숨 가쁘게 훔쳐내는 그대의 눈물
알토란 둥근 잎으로 그냥 가려보는
치유될 수 없는 우리들 아픔이지만
비가 내릴 듯, 열매가 여물 듯
저리도 울어쌌는 매미들
그대가 낮게 엎드린 이쯤에서
사랑이 되지 못한 젖은 화음으로
오늘 일기예보 또한 예사롭지 않다.
하우하필(夏雨下筆) • 2
비는 나리고
그대가 연민스런 마지막 한 잎
꽃이파리로 떨고 있을 때
나도 가녀린 한 잎 꽃잎으로
그대 곁에 조용히 눕겠다
온몸 함께 젖어
가눌 수 없는 영혼으로 잠들 때
우리 우짜겠노
그대의 운명이 또한
나의 분신임을 알아차린 지금
땅 속 깊이 내리지 못한 뿌리
체온으로 서로 엉켜
맑게 개일 그들을 위해 두 손을 모을꺼나
비는 나리고 그대여
젖은 음성이 세차게
나의 창문을 흔드는 지금
그 긴장된 시간은 아름답다.
대화록 발췌
“아버지 이럴 땐 @#$%^&*(‐……”
도무지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다
“아니, 이렇게 한다니까요 @#$%^&*(‐……”
참 어렵다, 못해 무식하다
그러나 나는 어쩔 수 없다
“얘, 아들아, 보릿고개 시절 공책이 없어
비료푸대 종이에다 글씨를 쓰고……”
아들도 우리 말을 알아 듣지 못한다
“석유 호롱불빛 아래 희미한 글씨를 읽던……
역시 고개만 갸웃뚱이다
그러나 어찌할거나, 이 또한 어쩔 수가 없다
”야, 우리 아버지 신세대다. 인터넷을 다 하시고……“
꿈이었다. 언제인가
나의 꿈은 이룰 수 있겠지만
아들 시야에 질펀히 깔린 사이버 세상
가슴 깊숙이 채워진 신세대의 세상
”보세요. 얼마나 편리해요…“
”글쎄, 그게 아무래도 @#$%^&*(‐ ⃰ ⃰ ‘”
-------
4
시간에 대하여
시간에 대하여 • 21
12월, 달랑 한 장 남은 마지막 몸짓
그 옆으로
근하신년, 수줍어 아직 내밀지 않는 얼굴이
나란히 벽에 걸린 채
불투명한 꿈으로 분장한 숫자들의 아우성을 듣는다
한 해가 가고
또 한 해를 맞는 설레임
검게 혹은 붉게
두려웠던 족적(足跡) 삭이면서
미지의 숨결을 예감하는 내 생리 속
깊게 묻어둔 시간의 파편들
다시 누군가 공포의 바람으로 다급하게
1999년의 햇살을 둥글게 끌어 올리면서
허공, 저 구름의 역사를 흔들고
휩쓸린 듯 송구영신(送舊迎新)의 언어를 조율하는
그 빈자리마다 산그늘로 얼비치는 2000년
아무도 세기말 사람들의 안부는 묻지 않는다
오직 떨리는 시간의 끝자락 쯤
남아있을 소음 같은 후렴구(後斂句)
이미 계산된 숫자들의 축제는 심오(深奧)한데
모두들 그 속에 빨려들어 허우적이고 있음에야.
시간에 대하여 • 22
-1999년을 보내며
─ 이제는 묻어 두어야 한다
천 년 바람을 삼킨 민둥산이
시간의 길목에 버티고 서서
다시 솟아야 할 무지개를 기다리고 있다
태초에 빛과 어둠이
피멍든 세월이나 헤아리면서
영원히 잠들 수 없는 대지 위
혼돈의 나무 한 그루 잘 가꾸었지만
시간 밖으로 나를 부르는 소리
벌써 1900년대 무녀들의 행진은 끝났느냐
한 백년을 살지 못하는 미물들 심장에는
위기의 안개로 비수가 꽂히는데
아, 여기는 풍랑을 동반한 무서운 억수
저기는 지독한 가뭄으로 목이 타서 굶어 죽고
어디서는 지진이 나고
또 한켠에서는 화산의 분화구가 불을 뿜어
그렇게 지구는 서서히 망가지는 폐허
어찌할거나, 민둥산 자락에는 새소리 대신
이제 사람들의 신음만 떠돈다
─ 이제 다시 시작해야 한다.
시간에 대하여 • 23
- 서기 2000년
새 즈믄 해를 흘러가야 할 시간의 깊이를 우리는 여
전히 가늠하고 있습니다
연인들이 밟고 지나간 호숫가 낙엽의 아쉬움을 그냥
접어둔 채 스스로 말라버린 늪 속의 광란을 여전히
꿈꾸고 있습니다
그 자폐증, 인간의 처절한 공모(共謀)는 이미 바람에
익숙해져 있지만 시인은 여전히 사랑을 절규하고 있
습니다
21세기=테크노피아의 세기, 여전히 인간이 격리되
어 날마다 저승에서 송신되는 E-mail, 모르스 부호
는 무섭게 헝클어져버린 침묵입니다
아직 유서는 작성할 때가아닙니다. 여전히 서기
2000년의 예감은 광기 사라진 어는 허공에서 사랑
의 손짓으로 무겁게 깔리는 칠흑(漆黑) 어둠을 지우
는 일 뿐일 것입니다.
시간에 대하여 • 24
눈이 펄펄 쏟아진다
이 겨울에 눈 내리는 일쯤은 뭐
새삼스러울 것도 아닌 세월 속
하얀 대지는 내가 걸어가는 곳으로
불투명한 길이 되고
괜스레 가슴만 뛰던 공간에서
을씨년스런 나무들
영혼의 구슬 같은 눈물 가득
온몸으로 해체되는 음향이
오늘은 어쩐지 낯설지 않다
내일 아침 출근길은 얼어 있겠지
미끄러운 눈길에 멈칫멈칫
얼어있는 나무들마저
내게서 자꾸 멀리 떠나려는 순간
다시 눈발은 굵어지고
한 켜씩 쌓이는 그 기다림
그러나
눈은 스스로 비를 만들지 않는다.
시간에 대하여 • 25
서기 2000년, 달력을 바꿔서 건다
중독된 일상이 순서를 기다리고
담론만 무성하던 푸른 꿈들이
벽쪽에 모여 나를 기다린다
하루씩 지워가야 하는 무거운 숨소리
365일, 그렇게 내 안에 갇혀
예감의 문을 열고 닫는다
뒤돌아 볼 시간은 까마득한데
서둘러 떠나야 하는 발걸음
벽에 걸린 나의 그림자는 잠들지 않는다
달력에는 무성(無聲)의 산조(散調)만 가득하다.
시간에 대하여 • 26
지금 시간의 중심에 나는 서 있다
살아있는 것들 모두가
지름길로만 다달을 수 없는
무엇인가 저마다 완성의 언덕을 향하고 있다
이쯤에서
회색빛 도시이거나
청산유곡(靑山幽谷)이거나
모두들 세월의 깊이를 측정하고 있지만
내가 쓰고 버린 시간의 껍데기는
켜켜이 쌓인 채
창조의 상상력을 꿈꾼다
그러나 엷게 드리워진 막 저 너머
보일 듯 막바지의 계단은 아직 멀고
더러 지쳐버린 그 시간의 불협화음
그 중심에서 지금 나는 번거롭다.
시간에 대하여 • 27
연희동 뒷산, 궁동공원 산책로를 한 바퀴 걷는 동안
어제 피었던 산철쭉이 꽃잎을 떨구고 있다
산책로 길섶에 문득 뿌려진
시간의 바람결이 출렁거리고
바람결 틈사이로 스며든
아침 햇살이 이슬을 핥아내고 있다
꽃대공이에 머문 한 점 사랑의 징표가
지워지고, 지워진 자리에 다시 도지는
사랑하는 시간이여, 아 이럴 수가
버려진 꽃잎 우에 겹쳐지는 운명
언제부터인가
공원 산책로 초입에 암시된 계절의 향훈
그들은 이미 예비된 눈물 한 웅큼씩
오늘 아침에도 표정 없이 흩뿌리고 있다.
시간에 대하여 • 28
늦가을 비는 차라리
서러운 산짐승들의 포효였다
뜨락 단풍나무 감나무
온몸으로 제살 도려내는
몸살로 글썽이더니
피부로 스미는 한기(寒氣)를 애써 감추면서
차라리 긴 명상에 잠기려는가
지난 여름
영욕의 시간을 털어내고
도 다른 전설을 구상하는 늦은 계절에
천천히 그리고 매몰차게
나를 깨우는 창밖의 연가
비 젖어 수척해진 저 몰골
고향 산짐승들 포효 끝난 지금쯤
아디선가 아린 선율로
늦가을에 다시 들을 듯도 하다만.
시간에 대하여 • 29
이순(耳順)이다. 그 공간에서 잠시
머뭇거린다. 암묵으로 나포된 시간
뿌려진 신음들을 어렵게 친견(親見)하고
그 끝자락에 서있다
이순쯤에서도 버리지 못하는 언어
바로 그 언덕에서 점치는 무채색의 여백들
그 여백으로 다시 뿌리는
무수한 고독
시간과 공간의 합치점을
천성으로 다시 찾는 오늘도.
시간에 대하여 • 30
말없이 가을이 가고 있다
명멸(明滅)하던 한생의 한 부분이
바람에 잘려진 채
낙엽으로 묻히고 있다
흐느낌인지, 울음인지
모두들 바람에 서걱이고
누군가 그 순간만이라도 붙잡기 위해
계절이 지나간 골목을
허걱허걱 뛰어가고 있다
‘일단 멈춤’ 팻말은 노랗게
지금 휴식중이다
밟히는 낙엽 사이로
어느새 늘어난 주름살이 초췌하다.
시간에 대하여 • 31
무덤을 짓는다
시간을 마감한 야윈 육신이
영원의 안식을 위한 공간에
깊이 묻힌다
숨 멎으면서
이승의 꿈을 지우고
이제는
내밀한 고독의 언어만 필요하다
분리된 영혼
시간이 멈추면
모두들
나만의 공간을 찾아간다.
어떤 우화 • 1
참마로 니가 이러칼끼까. 응이?
내사마 니 꼴뵈기 싫응깨내 콱 죽어뿔란다
인적 끊어진 야반에
홀로 탄식하는 호롱불
자식 하나 잘못 둔 죄 많아
어쩌다가 에미의 가슴팍은 송곳이 된다
참으로 인륜이 쓰레기처럼
뒹구는 오늘의 햇살은 그래도
내일 밤 다시 뜨는 별을 기다리고
연기로 떠도는 희미한 우화만 남았다
오매요. 인생은 그런대로 살아봉께로 단방에 포기할
꺼는 욱울해서 미치겄다 안카요. 하모
헤헤헤, 에라이 이 디러운 문딩이 자슥아…….
어떤 우화 • 2
우째 이런 일이……
무신 넘의 일이건 하나도 채김질 놈이 있어야재
아요, 인자 우리는 우찌 하면 좋소, 응이?
우리 집 안마당 담장 밑에
복사꽃이 만발할 때마다
청보리밭 고랑은 사랑이 움튼다
열일곱 순이가 밤늦은 휘파람 소리에
살금살금 웃동네 머시기 총각을 만나고
얼마 되지 않아 배가 불렀다 안카나
석류알 잘 익어
그대 사랑을 유혹하지만
내 곁엔 이미 떠나버린 바람 한 줄기
온 몸을 전율케 하고 있었다
아요, 이 일을 우짜면 좋소?
그런께내 옛날부텀 가시나 단속 잘 하라 안카더나
퇴퇴! 디러운 연넘들, 귀신은 무얼 묵고 사노……
어떤 우화 • 3
니캉 내캉 고마 밤새 내빼뿔래?
아무도 없는대 가갖고 고마 살마 안되겄나 그쟈
니 없이는 쐬 깨물고 맹세하지만 몬산데이
하루도 그녀가 곁에 없으면
상사병이 도졌던 어느 해 봄
청솔밭 소로길에서 뜨겁게 나누던 사랑
일렁 바람곁에 깜부기로 멍들고 있었다
잘 영근 앵두볼 가시나나
물오른 버들개지 머슴아나
동네방네 떠들긴 왜 떠드나
무지개처럼 영롱한 그대 눈빛
아아, 끝내 지워지고 말 것인가
엉캉 거시기하는 눈이 무섭은깨내
우리는 한시도 다리 뻗고 몬 살끼라
알았재? 니 얼굴 칼컬이 하고, 응이? 알았재?
첫닭 울거든, 응이? 당산나무 밑으로, 응이? 쎄기쎄
기, 알았재?
어떤 우화 • 4
아이고 내 팔짜야, 이기 무신놈의 업입니꺼
온마실에 손님(마마)이 좌악 번져갖고
간난쟁이들 한번에 싹 씰어버릿재
시상에, 시상에 무신 팔짜가 이리 쎄노
참꽃 여리게 웃음 잃은 고갯길
애장터 돌무더기 수북수북하다
삼신할미께 빌어 얻은 아들
돌림병에 잃어 아아,
전생에 무슨 죄 있어
한(恨)으로 서리는가
밤이면 울엄매 찾는 애기 목소리
꿈결인 듯 실성한 옷고름 풀어
어둠 속 땅을 친다, 가슴을 친다
사는 일이려니, 천지신명의 게시려니
그렇게 가고 또 그렇게 남아 있었다
그 날 이후 우리는 그 마을을 버렸다
시방은 생각키도 싫구마, 흔적도 없던데 뭐
예전맨치로 참꽃은 피었두마
하루 점두룩 퍼대앉아서 눈물만 찔금거렸재 뭐.
어떤 우화 • 5
함양 산청 물레방아 물을 안고 도는데
우리 집에 서방님은 나를 안고 도온다
─이 쐬가 만 발이나 빠질 년.
떠내기 소리장이 김 건달이
푼돈 몇 량 주고
아랫담 거시기 마누라를 꼬셨거든.
용캐도 눈치챈 거시기
할 종일 씨팔씨팔
주막에서 막걸리만 퍼 마셨거든.
농사는 지어봐야 외상 비료값도 못 갚는데
계집까지 저 지랄이니 에이 씨팔
한 됫박만 더 줘 술, 아니면 비상을 주든지.
산천초목에 불 질러 놓고
진주야 남강에 물 질러 간다
─이 화냥년아, 이 우라질 년, 니 돌았나?
어떤 우화 • 6
니 절골(寺谷) 박사(?) 알재? 밥때 되마 봇다리 지
고 마실로 내려와 밥 주이소, 이집 저집 안 얻어 먹
더나. 그 사람요, 진짜 박사데이. 왜냐카모 비가 온
다, 바람이 분다 말카 다 알아 맞힌다카이. 그라고
어느 해 여름에는 말이다 정지나무(亭子木)에 각중
에 불이 붙었재. 그걸 보고 박사가 말이다 이 동네
망한다 망한다 안카나. 참말로 기가 차더래이.
니 같으모 우째 생각컨노? 왠걸 그 박사 말이 딱
들어맞았삣다아이가. 불 지를 아는 안 있나. 그 집에
이따마한 큰 구렁이가 들어와 갔고 걸마 주구매 저거
아부지 고마 기절했빗다카더라. 결국에는 주구매가
미쳐뿌릿다이.
마 그때부텀 아래 웃동네가 시름시름 무어가 잘 안
되는기라. 웃기재?
─그날 이후, 그 박사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가지고 온 동민이 칼컬이 목욕재계하고 치성을
드렸재. 돼지 잡고 술 걸러서 거뜩 차려놓고 절하면
서 빌었재. 정성이 있어야 한다캐서 무르팍 끓고 손
발이 말카 닳도록 싹싹 빌었지 뭐. 천신 지신 산신
곡신 목신 수신 측신 조왕신…… 귀신 안 모신 데가
없데이, 참말로 시껍했다아이가.
─그래서 지금은 아무 일도 없는 것인가.
어떤 우화 • 7
웃담에 당산 할배 있재. 하루는 읍내 장에 가갔고
술을 고마 잡신 마신기라. 해는 넘어가고 우짜노. 혼
자서 콧노래꺼정 불러감시로 도깨비고개를 넘었다아
이가.
아이고 무서버라. 고만 예뿐 처녀가 어른거리면서
자꾸 지를 따라 오라 안카나. 술이 확 깼지 뭐. 당산
할배 그래뵈도 예전에 힘께나 썼응깨내 아라차차 배
지기 한 방으로 메 꽁쳤지 뭐. 그래 놓고 허리띠를
풀어서 동구나무에 꽁꽁 묶어 두었재.
허허, 무신 이런 일도 다 있노 시상에…… 이튿날
아침에 찾아가 봉깨로 이거는 사람이 아니고 도리깨
더라 안카나 도리깨. 암매도 헛것을 본 모양이재.
─전설로 남은 고개에는 산짐승 울음도 멎었다
생각하모 호랭이 담배 피던 시절 이야기지 뭐. 지
끔은 우리 맨코로 떠날 사람 떠나고 집집마다 전기
번쩍하재. 테레비 왕왕거리재. 전화 따르릉. 머시기
집에는 자가용도, 콤퓨타도 있다카더라. 그라고 인자
는 농사일도 말카 기계로 한다 안카나. 참 좋은 시상
이다. 안 그렇나 그쟈.
-----
5.
이순의 언덕에
길 • 1
길이 길게 누워 있다
저기 보이는 이순(耳順)의 언덕에
시간의 그늘이 함께 잠들어 있다
─ 아직도
길 위에서 길을 찾고
길손들 틈에서 사랑을 찾는가
길은 좀처럼 말이 없다
흔적 희미한 기억 앞세운 채
하얀 먼지 속
긴 명상에서 꿈길만 떠돈다
아하, 길은 누워 말이 없어도
지나간 사람들의 사랑을 기억하는데
눈물로 한생을 감춰왔던
질펀한 그 길을 노래하고 있다
─지금사 길이 조금 보이기 시작한다.
길 • 2
여기서 잠깐 쉬어가야겠다
잡초더미 가려진 이정표 곁에서
흔들린 기억들을 가늠하고
서로 다른 대화를 나누면서
이곳 지나간 사람들을 헤아린다
부질없는 일이로다
서로 다른 모습들이
안개에 갇히고
풍우에 발 묶이면서도
더러는 저 구름에서 무지개를 꿈꾸었다
지워진 발자국엔 벌써
산그늘 내리지만
꽃향내에 취해
옆걸음으로 걸어간 영육(靈肉)이
오늘에사 피로한 것인가
언제나
다른 사람들은 나보다
한 걸음 먼저 가고 있는데
쉬어가야 할 시간이 잦아진다
─길은 여기서도 끝나지 않았다.
길 • 3
금줄을 쳤다. 왼새끼줄에 고추를 달고
부정탄 발길을 모두 막았다
어둠의 길, 혼돈의 터널을 빠져나와
처음 보는 창공의 눈부심으로
웃음인지 울음인지 분간할 수 없는 아우성
그 시각부터 아아
존재의 전류는 흐르고 있었다
금줄을 걷어내는 날
이미 점지된 큰 붓으로
눈물로 얼룩져 가늠되지 않는
담채화 한 폭을 그려가고 있었다
초롱한 눈빛은 언제나
무지개를 염원하지만
암갈색 예감의 꽃들이 한 웅큼씩
손에 잡히는 것은 어인 일일까
다시 금줄을 치고
정갈한 생명의 불꽃을 피우고 싶었다.
길 • 4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바람이 없는 날도 떼밀리듯
널브러진 황야를 헤메고 있었다
그 길은 혹시 나의 길이 아닐지도 몰라
조심스런 발걸음으로
선현들의 발자국을 따라가기도 하지만
나 혼자 개척해야 할 길이 너무 많았다
문득 비바람이 치는 날
가시덤불 앞에서 섬
무서움이 앞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내 안에 고인 눈물의 늪
모두 증발할 때까지
결코 평탄할 수 없는 그 길을
혼자 가는, 가는 걸음은 너무 비틀거린다
어딘가 닿아야 할
막다른 오솔길 끝자락엔
오늘도 늑대 울음소리만 들리는데.
길 • 5
나의 지도는 아직 수정되지 않았다
시오리 산길을 돌아
먼지 뽀얀 신작로가 선명했다
가끔 아버지가 천수답 논두렁에서
의미 있는 손을 흔들지만
나의 지도는 언제나
냇물을 벗어나 바다에 이르고 있었다
어느날 낯선 구름을 찾아
무작정 서울행 심야 삼등열차를 탔다
아른거리는 어머니의 얼굴에 포개지는
고행의 그림자
서울역 앞 넓은 유령의 길만큼
흐리게 흐리게 번져 나갔다
어쩌랴, 파도뿐인 영혼의 지도
시오리 산길 듬성듬성 얼비치는
초가집 굴뚝의 연기가
폐휴지로 구겨진 그 지도를 뒤덮고
등고선 아래 골짜기마다
흐느낌의 메아리는 지워지지 않았다
─수정을 기다리는 꿈길의 도로표지판은
아직도 퇴색된 채 누워 있었다.
길 • 6
맨발로 내달리는 꿈을 꾸고 있다
나팔꽃 넝쿨이 비죽이
싸리 울타리를 넘보는 고샅길을
꿈속에서 자주 치달아
산을 넘거나 강을 건넌다
나의 행로는 몽환(夢幻)이었을까
어쩌다가 비치는 먼 빛살 한 줌 붙잡아
영혼의 진한 꿈 사래질하지만
허둥지둥 시간만 축내는
무망(無望)의 발자국을 지운다
더 넓은 곳 어디에선가
그 꿈의 파편들이
시공을 짓밟고 묻혀버린 뒷모습은
저 논두렁에 버려진 허수아비
이제 사그라진 나만의 넋두리로
길게 숨죽인 채 누워 있다.
길 • 7
폭우가 쏟아졌다
가옥과 전답(田畓),
우리 동네 사람들까지 휩쓸었다
새파랗게 질린 나는
먼 산길을 돌아
바삐 집으로 갔지만
건너야 할 다리가 떠내려가고 없었다
어찌하랴
황량한 들녘에서는
허망이 황톳물과 섞이고
통곡 소리 간간히 들리는 폭우 속
무너진 강둑에 피울음 말리며
나의 향해는 다시 시작되었다.
길 • 8
길섶
풀이파리가 신비스런 눈짓으로
시를 보여 주었다
이슬방울 아침 햇살 눈부심으로
무지개빛 영롱한
한 소절의 서곡(序曲)을 들려주었다
이것이 나의 길일까
꿈속에서 만났던 어느 시인이
황망(惶忙)히 지나간 자리
알록달록 매달린 내 온몸의 열꽃
그 길 위에 피워야 할 것인가
안개 자욱한 오솔길
그 길섶에는 무형(無形)의 꽃들이
지금도 한 올 꿈을 웅얼이고 있었다.
길 • 9
헐근거리던 서울허수아비가
어느날
마포 전차 종점에서
종로쪽으로 가는 순간
고향의 가녀린 휘파람 소리
나를 따라오고 있었다
흐이흐이 그 서러움
궤도에 뿌려둔 채
2월 50전짜리 전차는 계속 달리지만
중간중간 정류장에는
내가 내릴 곳이 없었다
갈기갈기 맨살 아픔으로
허수아비의 허물을 벗겨
퉤 퉤
서울 하늘에 걸어두고 아아
밤 늦도록 기다려도
돌아갈 전차는 영원히 오지 않았다.
길 • 10
여보세요------
………통화중이다
낙하(落下)지점에서 기다릴
내 영혼은 아직도 통화중이다
통화될 수 없는 내일의 향기
지울 수 없는 눈물의 흔적
여보세요------
절망이 유선(有線)으로 길게 타내리고 있다.
길 • 11
기다림이 길어질수록
E-mail을 확인하지만
받은 편지함에는 언제나 비어 있다
마우스를 잡은 손에 갑자기
부지해온 생명에의 경련을
느끼는 나는 무엇인가
떨리는 선택과 실행을 반복하면서
밤 늦도록 기다려 보지만
수신된 환한 메시지는 보이지 않는다
다시 클릭을 하고
미지의 공간을 이리저리 헤멘다
들어가는 곳마다 어둡고
절망의 울타리가 나의 눈시울을 적신다
아무데서도 찾을 수 없는 아, 싸늘한 세상
그토록 기다림은 쉽게 오지 않았다
시스템 종료, 어둠이 전신을 휘감았다.
길 • 12
1.
해발 몇 미터의 재(領)를 넘는다
서산에 해는 저물고
오솔길 스르륵
스르륵 스치는 풀잎에도
갑자기 섬뜩해진다
저 재를 넘지 않으면 죽음뿐이다.
2.
그러나 무지개의 행방은 알 수 없었다
흥건한 땀방울 훔치며
다시 돌아갈 수 없는 발걸음
한숨 끝자락에서
만상(萬象)이 송연(悚然)하다.
3.
어둠 속 산짐승 울음이 들린다
밤새도록
이 세상 영혼과 교성(交聲)을 기원하고
별들을 희롱하고 싶었다.
4.
참으로 오랜만에
한 줄기 등불빛을 만났다
그곳을 향하여 뛰었다
재를 넘어 찾은 무지개는 아니었지만
별들을 불러
나만의 노래를 부를 수 있었다.
5.
그러나, 영원으로 당도해야 할
그곳은 아직도 멀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