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개요
1) 선악과(사람)는 좋음과 싫어함을 아는 나무(사람)이기 때문에 이에서 벗어나야 한다.
2) 마음 안에서만 선악의 개념이 존재할 뿐, 마음 너머에는 선악의 개념은 없다.
3) 성경의 핵심은 부패한 마음(카르디아)을 초월하여 그 너머에 있는 근본을 회복하는 것이다.
4) 이생의 자랑, 육신의 정욕, 안면의 정욕인 갈애(渴愛)의 열매가 겉 사람의 속성이다.
5) 광야 사십년의 과정이 없이는 뱀(겉 사람)과 하나님(속사람)의 양식을 구별할 수 없다.
6) 천상의 세계는 모두 허상으로서 끝이 있는 휘장은 반드시 찢어야 할 요소들이다.
7) 사망과 혼돈, 공허와 흑암에 갇혀있는 것은 겉 사람의 실체로서 반드시 빠져나와야 한다.
나. 본론
1) 선악과(사람)는 좋음과 싫어함을 아는 나무(사람)이기 때문에 이에서 벗어나야 한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율법)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창 2:17)”
(우메에츠 하타아트 토브 바라로토칼 밈메누 키 빼욤 아칼카 밈메누 모트 타무트)
“바른 번역은 그러나 좋음과 싫어함을 아는 나무로부터는 먹지 말라. 왜냐하면, 네가 그 나무로부터 먹는 날에는 욤 안에서 단절되어(하나님과 단절) 죽을 것이기 때문이라 하였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창 2:17)’로 번역한 것을 보면 ‘선악(좋아함, 싫어함)을 알게 하는 나무)’가 ‘우메에츠 히타아트 토브 바라 : 좋음, 그리고 싫어함의 지식나무’인데 여기에 ‘토브(좋다)’가 나온다.
2) 마음 안에서만 선악의 개념이 존재할 뿐, 마음 너머에는 선악의 개념은 없다.
창세기 1장은 마음(카르디아)을 넘어서 일어나고 있는 내용이다. 마음 너머에는 선악의 개념이 없다. 창세기 1장은 깨달음 안에서의 과정을 그리고 있다. 작은 깨달음으로부터 온전한 깨달음에 이르기까지 내용을 다 포함한다. 그러나 창세기 2:4 이하 내용은 마음(에레츠, 이다마)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내용으로 마음 안에서 ‘토브(좋다)’와 이에 반대되는 개념인 ‘라(싫어함)’가 등장하면 선악 개념으로 바뀌게 된다. 모두 뱀으로부터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선악을 지닌 종교인들이 성경을 번역하면 안 되는 그 이유다. ‘먹는 날에는’으로 번역한 ‘빼욤 아칼라’에서 ‘빼욤’은 ‘욤 안에서’다. 그러므로 욤이 두 종류가 나오는데 여기에 등장하는 욤은 사망의 욤이다. 지성소로부터 나오는 생명의 욤(빛)이 아니다.
3) 성경의 핵심은 부패한 마음(카르디아)을 초월하여 그 너머에 있는 근본을 회복하는 것이다.
창세기 1장부터 성경 전체의 핵심은 부패한 마음(카르디아)을 초월하여 그 너머에 있는 지성소 안으로 인도하는 내용이다. 생명의 빛을 가지고 있는 목자만이 그 길로 인도할 수 있는데 에고 에이미가 되기까지로 한정한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오셔서 어떠한 종교 행위를 못하게 하는 그 이유를 자세히 알아야 한다. 무엇을 원하기에, 무엇을 추구하기에 종교인들은 하지 말라고 하는 그 종교 행위를 그렇게 하고 있는가?
대부분은 천국에 가기 위해서이며, 거짓 욕망을 채우고자 세상 공간에 구름을 타고 오실 예수를 영접한다는 것이 다른 예수를 찾는 행위가 되고 만다. 마음을 부패하게 만드는 이 뱀을 통해서 일어나는 사건을 자세히 알아야 한다. 뱀의 자식들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이 파로이미아로 된 그 내용을 절대로 알 수 없다. 신약 성경은 구약 성경과 하나로 연결되어 있어서 요한복음 또한 알려면 반드시 창세기의 내용을 알아야 한다.
자신 안에서 창세기 2장에 나타난 뱀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자세히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의도, 의지, 각종 알음알이를 통해서 생각하고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겉 사람의 모든 심리 현상들은 뱀에 의해 왜곡된다. 이래서 예리하게 이 현상을 지켜보아야 한다. 이로 인하여 촉(觸)이 일어나면 왜곡된 수애취(手愛取)가 일어난다.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를 통하여, 그 촉(觸)을 통하여 마음 안으로 들어오는 것들이 왜곡되어 전도몽상(顚倒夢想 : 사람을 위해 돈을 만들었는데 돈에 너무 집착하다 보니 사람이 돈의 노예가 됨)이 일어난다. 아담과 하와를 통해 이를 잘 설명하고 있다. 이것이 뱀독에 취해 있는 결과로서 좋아함 싫어함이 일어나는 것이다. 좋은 것은 취하고 싫은 것은 밀어낸다는 말이다.
4) 이생의 자랑, 육신의 정욕, 안면의 정욕인 갈애(渴愛)의 열매가 겉 사람의 속성이다.
겉 사람의 ‘안이비설신의’의 결과 이생의 자랑, 육신의 정욕, 안면의 정욕인 갈애(渴愛)의 열매를 맺는다. 한글 성경은 선악과로 번역하고 있다. 그 결과 고난의 과정 안에 있는 인생은 그 갈애의 열매를 맺는다. 고난의 과정을 벗어나지 못함이다. 이것을 뱀이 살아가는 좋아함 싫어함을 알게 하는 나무를 그리고 있다. 이 나무는 카르디아(마음) 안에서만 자란다. 그러므로 그 마음(휘장)의 집을 허물어버리고 그 너머(몸 된 성전)로 반드시 이동해야 한다.
길들어진 마음을 초월하려면 얼굴에 땀을 흘려야 하는 힘든 과정을 지나게 된다. 예수께서 광야 안에서 사십일 밤(뉘크스), 낮(헤메라)을 통하여 겉 사람 안에 있는 이 뱀의 움직임을 자세히 보았다. 그 결과 이 뱀의 실체를 알게 되어 지성소 안에 계신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양식(아르토스)을 먹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비로소 금식이 끝난 것이다. 광야 사십 년을 가야 하는 이유는 각자 안에 사는 뱀의 실상을 더욱 자세히 알게 하기 위해서다. 애굽 땅(에레츠) 안에서는 뱀의 실상을 알기가 어렵다. 뱀독에 취해 있기 때문이다.
5) 광야 사십년의 과정이 없이는 뱀(겉 사람)과 하나님(속사람)의 양식을 구별할 수 없다.
광야 사십 년의 그 고행의 길이 없이는 뱀과 하나님의 양식을 구별할 수 없다. 종교인들은 뱀의 양식에 오히려 더 가까이 있다. 그렇게 뱀의 양식을 먹고 길들어져 왔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이 자신 안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해서 그러한 책도 관심이 많고 인기다. 그러나 들었다고 하는 그 하나님의 음성이 무슨 뜻인지 묻고 되묻고 싶다.
성경 말씀은 인생들에게 주어진 생명의 책이다. 그러나 이것을 아는 이들은 마음(휘장, 카르디아)을 찢고 나온 이들뿐이다. 자신 안에서 음성을 들었다는 것은 모두 대상으로서 대상은 모두 변하는 것이다. 겉 사람은 교활한 뱀과 하나님을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마음은 가장 뛰어난 요술사다. 그래서 뱀은 천상 세계도 만들어 내고 천상 세계에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한다. 천상의 세계 중에 지극히 휘황찬란한 세계들도 있다.
6) 천상의 세계는 모두 허상으로서 끝이 있는 휘장은 반드시 찢어야 할 요소들이다.
수많은 천상의 세계는 모두 허상으로서 그 끝이 있다. 모두 찢어야 할 휘장 안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천상 세계에 태어나고자 함이 아니다. 모두 초월함의 세계로서 근원이 있는 사람이다. 지성소 안(그리스도 안, 베레쉬트)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휘장(몸과 마음)의 세계 안을 잘 들여다보고 분석해야 한다. 이처럼 뱀은 참으로 교활하다.
그러므로 반드시 광야 안으로 들어와서 뱀의 양식이 무엇인지 구분해야 한다. 근본은 뱀이 사는 마음(카르디아) 너머에 있기 때문이다. 광야 안에서도 뱀은 계속해서 유혹한다. 그래서 수많은 백성이 불 뱀에 물려 죽게 된다. 이때 장대에 달린 놋 뱀을 보는 자는 살아난다. 히다로 된 말씀이다. 애굽(에레츠) 안에서 보고 듣고 맛보고 즐기던 것을 체험했던 이들은 모두 가나안 에레츠(땅) 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 안에서 사망 당했다. 몸과 마음을 초월하지 못한 것이다. 겉 사람의 마음(카르디아)을 벗어나지 못한 이들은 그 하나님의 음성을 구별할 수 없다.
7) 사망과 혼돈, 공허와 흑암에 갇혀있는 것은 겉 사람의 실체로서 반드시 빠져나와야 한다.
창세기 1장에 사망과 혼돈(토우)과 공허(보후)와 흑암(호쉐크)의 깊음(태홈) 속에 갇혀있는 겉 사람에게 지성소로부터 생명의 빛(욤)이 임하여 속사람으로 인도해 가는 것을 ‘좋다(토브)’로 기록하고 있다. 참 목자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지성소 안으로 들어가게 되면 아버지와 하나 된 에고 에이미가 이루어진다. 생명의 열매다. 그런데 오늘날까지 성경을 번역하는 종교인들이나 읽는 이들이 뱀의 의도를 따라서 번역하였고 또 그렇게 읽기 때문에 오역된 성경의 곳곳에 선악을 말하는 것으로 오해하여 그 글을 읽는 자들 또한 큰 오해를 하게 되는 것이다.
8) 하나님은 심판하시는 분이 아니라 오직 근본(표준)만을 말씀하실 뿐이다.
이는 성경 번역자들이 하나님의, 생명의 빛을 체험하지 못하고 뱀의 뜻을 따라 하나님의 뜻으로 오해하였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하나님은 심판하는 기능이 없다. 하나님은 근본이며 캐논(‘정경(正經)’ 또는 ‘표준, 척도’를 가리키는 말이다)의 법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은 자신이 선택한 결과다. 선악 지식나무에 사는 뱀의 꼬임에 빠져 그 열매를 맺은 결과다. 겉 사람은 순간순간 뱀이 사는 그 나무로부터 열매를 맺는다. 모두 자업자득이다. 성경이 뱀에 의해 완전히 왜곡된 선악 지식의 책이 된 그 수많은 원인 중 하나로서 창세기 3:22에 등장한다.
생명의 빛과 그 안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