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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실상주 테마여행 / 5차 산행후기
1. 일 시 : 2010. 06. 13(일) / 7시 출발
2. 장 소 : 용봉산(충남 홍성) / 해미읍성(충남 서산)
3. 참여인원 : 26명
4. 이동코스 : 남상주-청원당진고속도로-수덕사IC-홍성-용봉산-서산 해미읍성-서산 덕가집 -청원당진고속도로-남상주(8시30분도착)
5. 테마여행 일정
◇등산소요시간 : 용봉초등학교- 용봉산-노적봉-악휘봉산-용봉사-주차장 / 3 시간소요
◇문화탐방 : 해미읍성
◇별미탐방 : 덕가집
회원중에 서산에 잘 아는 후배가 있어 오늘 별미집을 소개받아 가리비조개, 붕장어, 벤뎅이 구이로 서산의 별미를 겸한 하산주를 맛나게 먹고 서해의 푸른 바다를 보면서 오늘 테마여행의 대미를 장식하였습니다.
6. 테마여행 후기
오늘 테마여행에 참여는 하지 못했지만 지난 답사때를 생각하면서 여행후기를 기록으로 남길까 합니다. 다소 생동감 넘치는 기록이 아닐지라도 잘 읽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오늘 테마여행은 7시에 무양청사에서 k2상주 대리점 사장님의 주선으로 k2리무진을 타고 신나는 테마여행을 할수 있었습니다. 28인승 리무진 버스, 안락 그 자체 였답니다. 한번 타본사람은 28인승을 고집하는 이유를 알것입니다. 조금 늦은 출발이였지만 오늘도 무탈한 하루가 되기를 간절히 기원하면서 홍성으로 출발하였습니다. 홍성 용봉초등학교에 도착하니 비가 내려서 일회용 비옷으로 갈아입고 산행의 들머리에서 단체사진으로 산행의 시작을 한 장의 사진으로 남겼습니다.
오늘 우리가 산행해야할 산행 코스입니다. 충남 예산군 덕산면과 홍성군 홍북면 경계를 이루는 용봉산(龍鳳山·381m)은 정상이 홍북면에 속한다. 그래서 ‘홍성 용봉산’으로 많이 불린다. 덕산면 방면으로는 용봉산 북릉 상에 수암산(秀岩山·259.4m)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용봉산은 정상 북쪽 악귀봉에서 북동쪽으로 이어지는 군계(郡界)를 경계로 그남쪽에는 홍성군에서 관리하는 자연휴양림으로 조성되어 있다. 휴양림 내에는 기암괴석들로 이뤄진 투석봉, 병풍바위, 노적봉 등이 수석처럼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습니다.
높이 381m로 큰 산은 아니며 험하지는 않으나 산 전체가 기묘한 바위와 봉우리로 이루어져 충남의 금강산이라 불릴만큼 아름답습니다.
용봉초등학교에서 출발하면 첫번째 만나는 사찰에 있는 미륵불입니다.
홍성 상하리 미륵불은 멋 훗날 이 땅에 출현하여 중생을 제도하는 미래의 부처이다. 이 미륵불은 용봉산 서쪽 기슭에 있는 절벽 밑에 우뚝 솟은 자연암석을 활용하여 조성한 입상이다. 머리는 청수리 부분이 평평하며, 귀는 직선으로 턱밑가지 내려왔다. 가늘고 긴 눈, 넓적하고 낮은 코, 입은 비교적 작으나 얕게 평면적으로 돋을 새김한 은은한 미소는 자비로움이 잘표현 되어 있다. 신체는 얼굴에 비해 더욱 평면적이어서 가슴부분에 두손을 아래 위로 나란히 대고 있는데 오른손을 가슴에 대고 왼손은 약간 떨구었는데 마치 제주도 하루방을 닮았다. 이외에 광배나 신광, 대좌등의 다른부분은 생략되었다. 고려중기에 형성된 충청도 지방의 불상 양식이 잘 표현되있다, 비숫한 양식의 불상으로는 논산의 은진미륵이나 부여 대조사 석불과 같은 계통에 속합니다
홍성은 예로부터 충효의 고장이라고 합니다. 역사적으로 위대한 인물들이 많이 출생한곳으로 최영장군 / 한용운 선생님 / 사육신 성산문 /백야 김좌진 장군의 고향이랍니다. 그리고 9백의총의 무덤이 있는 곳이랍니다.
용봉산 능선을 오르다 보면 홍성의 넓은 들녘을 볼수 있는데 오늘은 구름이 있어 완벽한 홍성의 들녘을 볼수 없어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용봉산은 홍성군에서 등산로를 아주 잘 정비하여 산행을 하는데 별어려움이 없이 산행을 할수 있어 온가족이 등산하기에 아주 좋은곳입니다. 그리고 용봉산 아래에 정비중인 충남 도청이전 신도시를 바라볼수 있습니다.
고문님이 홍성쪽 산아래의 조망에 취해있습니다
낙조대입니다. 뒤쪽의 바위는 금강산의 일만이천봉을 연상하게 하고 설악산의 용화장성을 축소한것처럼 아름답습니다. 작은 산이지만 산이 품어야 할 모든 것을 간직한 아름다운 산입니다. 오늘 최연소 산객입니다. 테마여행을 통해 우리의 문화를 직접체험할수 있는 기회가 될것입니다. 사람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여행을 많이 하는것입니다. 앞으로 계속 참석하여 부모와 좋은 추억 만들기를 기원해 봅니다.
모자지간의 모습이 보기가 너무나 좋습니다. 언제나 이런모습을 볼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용봉산 정상부분 우뚝솟은 바위면에 새긴 거대한 마애불 입상불로 앞으로 약간 숙인 바위면에 감실을 내어 불상이 걸어 나오개 했다. 거대불로 엄숙하고 권위있게 보인다. 용봉사 마애불입상처럼 머리 부분은 깊게 새겨 볼륨이 있으며 아래는 얕게 돌을 새김했다. 수인은 홍성지역 마애불, 불상의 표준양식과 같으며 편년으로 미루어 다른 불상의 모델이 되었을 것이다. 머리 위쪽으로 바위 위에 보개처럼 돌 하나를 얹었다. 고려 때 불상으로 전해온답니다
용봉산 중턱에 위치한 용봉사는 1988년에 전통사찰 67호로 지정된 곳이다. 대한불교조계종 제7교구 본사인 수덕사의 말사로 절의 연혁이 전해지지 않아 자세한 역사는 알 수 없으나 전하는 유물로 보아 백제 말에 창건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답니다.
유물로는 보물 제355호 마에석불, 보물 1262호 용봉사 영산회괘불탱, 유형문화재 118호 용봉사아애불, 문화재자료 162호 용봉사지석조(마애, 석구, 석조), 문화재자료 168호 용봉사부도가 전해지고 있답니다
대웅전 못미쳐 근자에 조성한 부도옆에 조선시대 원구형 부도 한기가 있다. 신경리 마애불 초입에 위치했으나 1910년 풍양조끼 선조묘를 쓰기 위해 이건했다고 전해온다. 육각대좌, 원구형의 탑신, 육각의 옥개석으로 마무리 되어 있습니다
해미읍성
고려 말부터 국정이 혼란한 틈을 타서 왜구가 해안지방에 침입하여 막대한 피해를 입히는 바, 이를 효과적으로 제압하기 위하여 조선 태종17년(1417)부터 세종3년(1421) 사이에 당시 덕산(德山)에 있던 충청병마도절제사영(忠淸兵馬都節制使營)을 이 곳에 옮기고자 축성(築城)되었으며, 효종3년(1652)에 병마절도사영(兵馬節度使營)이 청주로 옮겨가기 전까지 230여 년간 군사권을 행사하던 성으로 있다가 병마절도사영이 청주로 이설되고 해미현의 관아가 이 성으로 옮겨졌으며,1914년까지 겸영장(兼營將)이 배치되는 호서좌영으로서 내포지방의 군사권을 행사하던 곳이었다.
해발 130m인 북동쪽의 낮은 구릉에 넓은 평지를 포용하여 축조된 성으로서, 성벽의 아랫부분은 큰 석재를 사용하고 위로 오를수록 크기가 작은 석재를 사용하여 쌓았다. 성벽의 높이는 4.9m로서 안쪽은 흙으로 내탁되었으며 성벽 상부 폭은 2.1m 정도이다. 성문은 동·서·남·북 4곳에 있는데 네모지게 잘 다듬은 무사석(武砂石)으로 쌓았으며, 주 출입구인 남문은 아치모양의 홍예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읍성에는 동헌을 비롯하여 아사(衙舍) 및 작청(作廳) 등의 건물들이 빼곡히 있었으며, 천주교 박해와 관련된 유적도 일부 남아 있다. 1974년에 동문·서문이 복원되었고, 1981년 성내 일부를 발굴한 결과 현재의 동헌 서쪽에서 객사와, 현재의 아문 서쪽 30m 지점에서 옛 아문지가 확인되었고, 관아외곽석장기지(官衙外廓石牆基址)가 발견되었다. 성의 둘레에는 적이 쉽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탱자나무를 돌려 심어서 탱자성이라는 별칭이 있었다.
총 길이 - 1,800m
성벽높이 - 5m
총 넓이 - 대략 5만 9천평
성벽 밖에 2m 깊이의 해자를 팠음.
관아문 - 해미읍성의 호서좌영 관아 정문으로서 정면3칸, 측면 2칸의 2층 문루형식의 건물로 아래층 3칸에 달아 그 문으로 통행하고 상층은 누각을 만든 전형적인 관아문 형식
객사 - 관찰사 등 귀빈이 오면 숙박하던 곳이다.
동헌 - 지방 관아. 해미읍을 관할하던 관아이다.
책실 - 책과 문서를 보관하며 현감의 자제가 거처하던 곳
청허정 - 읍성 내 정자. 휴게실 용도였다.
◇특 징
한국의 성은 거의 대부분이 산에 쌓은 산성이거나 강을 끼고 건축되었다. 또는 강을 낀 산에 건설된 성도 많다. 북한산성, 남한산성, 삼년산성 등이 산에 쌓은 산성이라면, 진주성, 공주성, 사비성은 강을 낀 산에 건설되었다. 그러나 이 해미읍성은 평지에 타원형으로 지은 것이 특징이다(대략 달걀 모양과 비슷하다). 한반도에서는 이런 형태인 성이 드물다.
◇연 혁
1417년(태종 17년) - 축성 시작.
1421년(세종 3년) - 축성 완료. 이후 230여 년간 종 2품의 병마절도사가 주둔하였다.
1651년(효종 2년) - 병마절도사가 청주로 이전하면서 해미현 관아가 옮겨와 해미읍성이 되고 문무를 겸한 겸영장이 배치되며 호서좌영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일제 강점기였던 1914년에 군현제가 폐지되고 해미현이 서산군에 통합되면서 읍성은 폐지되었다. 폐지 이후에는 성 안에 면사무소, 초등학교 등 기관과 민가가 들어섰다.
1963년 1월 21일 사적 116호로 지정됨
1970년대부터 복원공사가 시작되었으며 성내 건물을 철거하고 동헌, 객사, 내아 등을 복원하였다.
해미읍성의 회화나무 / 시도기념물 제172호
사적 제116호인 해미읍성 내 위치하는 회화나무는 지역주민들에 의해 호야나무로 불리고 있는데, 이 나무는 1866년 병인박해와 관련이 있다.
당시 해미읍성은 호서좌영으로서 겸영장이 토포사를 겸하여 국사범을 처단 할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어 내포지방의 천주교 신도들을 압송하여 처형하였는데. 이 나무에 철사줄로 매달고 고문, 천주교 박해 당시 관아가 있던 해미읍성으로 충청도 각 지역에서 수많은 신자들이 잡혀와 고문받고 죽음을 당했으며, 특히 1866년 박해때에는 1천여명이 이 곳에서 처형됐다고 한다.
감옥입구에 있는 300년 된 나무가 회화나무인데, 이 나무의 가지에 신자들이 머리채를 묶어 매달아 고문하였었고, 그 흔적으로 철사줄이 박혀있다.
◇서문 건너편 자리갯 돌 성지
옛날 미신에 따라 부정한 것은 서문으로 내어다 버렸다. 천주교 신자들도 서문밖에 끌어내어 처형하였다. 신자들은 이 서문을 통하여 끌려 나가면서 배교의 표시로 성물을 모욕하도록 강요당하였다. 잡아들일 때 빼앗았던 십자가와 묵주 등을 이 문의 난간에다 넣어놓고, 지나가며 밟게하여 천주학을 버리고 목숨을 살려보라 하였다. 그러나 그님들은 성물에 머리 숙여 절을 하고, 문턱을 넘어 가서 목숨을 기꺼이 내놓았다. 이 문의 누각에는 지성루(枳城樓)라 쓰여 있는데, 본래 탱자나무(枳)로 둘러쳐진 해미 진영이었기 때문이지만 이 서문이란 그 님들이 가시밭 이 세상을 떠나가던 마지막 문이었다. 이 문을 나가면 그 님들을 밀어넣고 돌로 찧던 하수구가 입을 벌리고 있다. 하수구를 가로 질러 놓여 있던 돌다리는 그야말로 사람 도마였고, 여기저기 시체가 쌓여 썩고 피가 땅에 젖어 남아 흐르는 곳이 서문 밖이었으니 여기서 죽은 목숨을 몇 천이나 되었는지 헤어릴 수 없어 그저 '시산혈하(屍山血河)를 이루던 곳이었다'라는 말만 남아 있다. 1790년 부터 1880년까지 약 2천명의 천주교 신자들이 이곳에서 처형당했다. 이곳에서의 사형방법은 돌위에 매어치는 방법, 참수 및 교수, 겨울에 얼려죽이는 것이었다.
[퍼온사진]
옮기기 전의 2008년 자리갯 돌, 2009년 1월에 해미 성지로 옮겨갔다.
서문밖 사형장 개울 위에 있던 돌다리이다. 길이 420cm, 너비 150cm, 두께 30cm이다. 몇명의 병사가 신자의 몸을 들어 올려서 내려뜨리면 머리가 깨져서 죽어갔다.
[퍼온사진]
사무차장님이 국장님에게 태형을 가하고 있습니다. 평소에 차장님에게 못한일이 많은가 봅니다.
서산의 별미인 가리비조개구이와 붕장어, 벤뎅이 구이로 하산주겸 별미를 배불리 먹었답니다. 사실 3만원의 회비를 가지고 테마여행을 하면 항상 적자인 것 같습니다. 그래도 상주에서 문화의 전도사가 된다는 생각으로 꼭참석하시어 즐거운 하루가 되시길 소원해 봅니다
6월달 테마여행은 이렇게 홍성의 용봉산과 서산의 해미읍성을 경유하는 여행을 무탈하게 마칠수 있었습니다. 항상 참여해 주시는 회원여러분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이젠 문화가 돈이 되고 길이 돈이 되는 세상입니다.
회원여러분 수고하셨습니다. 다음달에도 많이 참석하시어 즐거운 하루가 되기를 소원해 봅니다, 다음달 테마여행은 인근 산행후 여름의 보양 음식으로 친목을 다질까 합니다. 주변에 우리 모임에 관심이 있는 분은 같이 오셔서 즐거운 하루가 되시길 바라겠습니다
첫댓글 길손님의 노고에 감사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