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평창군 평창문화원
강원도 지역의 지명유래
이성계와 사주팔자가 같은 벌 임금, 평창 봉두구니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봉산리 봉두군(蜂頭君)은 이성계와 얽힌 지명이다.
태조 이성계가 임금이 되어 생각해 보니, 자신과 같은 사주를 타고난 사람은 무엇을 할까 궁금했다.
그래서 알아보니 평창에 같은 사주팔자를 타고난 사람이 있었다.
그는 벌을 친다고 했다. 벌통 300개면 그 안의 벌수가 백성수보다 더 많을 듯도 싶었다.
태조는 사주팔자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그 사람에게 '벌들의 임금'이라는 뜻의 봉두군을 내려주었고,
나중에 그 사람이 살던 마을 이름이 되었다.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봉산리 봉두군(蜂頭君)에 얽힌 지명유래이다.
진부에서 정선방면으로 가다가 보면 신기리가 나온다. 신기리에서 얼마를 더 가면 산중의 산중인 봉산리가 나온다.
이 봉산리는 일명 봉두고니, 봉두구니, 또는 봉두군이라 부른다.
이 봉두군은 조선조 태조 이성계 대왕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한다.
곧, 봉두군(蜂頭君)은 한자로 벌 봉(蜂)자 머리 두(頭)자 임금 군(君)자를 쓴다.
그러니까 벌의 우두머리 임금인, 벌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설화에는 이로부터 지명이 생겼다고 한다.
『평창군지』에 전하는 이야기를 따라가 본다.
벌 임금이 된 사람
대한민국의 산골을 강원도라 치면 강원도의 산골은 정선이나 평창이 해당될 테고,
또 평창의 산골이라면 정선군과 인접해 있는 진부면의 봉두군을 치게 되리라.
첩첩산중에 쌓여 있는 봉두군은 무척 산골이다.
우리나라 지명의 유래가 여러 가지 있지만 그중에 벼슬살이가 난 것으로 정해진 경우가 있다.
즉 판관이 났기 때문에 판관터라고 부르는 게 바로 그것이다.
진부면에 있는 봉두군도 바로 그 마을에 봉두군이 났기 때문에 얻어진 지명이다.
봉두군의 유래를 살펴보면 대강 다음과 같다.
오랫동안 원나라의 지배 밑에 시달리며 국정이 혼란스러워 백성들이 고통에 빠져있는 고려를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던 태조 이성계는 나라를 새로 세워서 조선이라 했다.
그리고 국초의 혼란을 바로 잡고 나라의 기틀을 튼튼히 닦은 후 바쁜 나랏일의 틈을 타서 잠깐 명상에 잠겼다.
“내가 세상에 태어나서 많은 고생과 노력 끝에 이처럼 나라를 얻어 새 왕국을 세웠는데
이게 모두 내가 타고난 사주에 의한 팔자소관일 게다.
과연 그렇다. 그것은 내가 어렸을 때부터 사주쟁이나 관상쟁이들은 나를 보고 왕위에 오를 팔자이며
제왕의 상이라고 하는 것을 보아도 과연 내가 왕 위에 오른 것은 타고난 운명일 게다.”라고 생각했다.
태조대왕은 그렇다면 이 넓은 세상에 자신과 한날한시에 난 사람이 있을 지도 모른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쳤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대체 어디서 무엇을 할까? 만일 이 나라에 나와 똑같은 사주를 갖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나처럼 임금이 되지 못할 게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니 어쩌면 사주라는 것도 허무맹랑한 게 아니겠는가 싶어져서,
그렇다면 그런 사람을 한번 찾아보자고 결심하게 된다.
태조대왕은 그날로 전국에 명을 내리는 한편 각 곳에 방을 붙여 자기와 생년월일시가 같은 사람을 널리 찾기에 이르렀다.
그러던 중 하루는 그런 사람을 찾았다는 강원감사의 직보를 받고 “그렇다면 그 사람을 서울로 직송하라.”고 하였다.
얼마 후 대왕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앉아 있는 농부의 모습은 너무나 초라하였다.
“그대가 아무 해 아무 달 아무 일 아무 시에 출생한 게 분명한고?” 물으니
그는 “예, 황공무지하오이나 틀림없음을 아룁니다.” 했다. “그러면 그대의 생업은 무엇인고?” 물으니
“예, 제게는 300여 통의 꿀벌이 있사옵니다. 벌을 치는 게 제 생업임을 아룁니다.”라고 했다.
태조대왕은 농부의 이 말을 듣고 그제야 수긍이 갔다.
300여 통이면 그 벌의 머릿수가 이 나라 백성의 숫자보다도 더 많을 법하다고 느꼈다.
자신보다 이 초라한 농부가 더 많은 백성을 거느리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왕은 즉석에서 이 초라한 농부에게 봉두군(蜂頭君)의 칭호를 내리고 적지 않은 상을 주어서 환향하게 하였다.
그 후로 이 농부는 군(君)의 봉함을 받았으므로 이 고장에서는 행세하는 사람이 되었고,
그가 사는 마을의 지명도 봉두군이라 부르게 되었다.
지금은 양봉가들이 그보다 더 많은 숫자의 벌들을 치기도 하지만 600년 전 토봉을 그렇게 많이 쳤음은 실로 드문 일이었다.
봉두군 마을엔 예나 다름없이 벌들의 먹이인 들꽃이 만발해 있다.
첫댓글 토종꿀을 300통씩이나 관리했으면 그당시로선 규모가 컷군요. 백성이나 꿀벌을 돌보는 것이나 같은 맥락의 사주라니 놀랍습니다. 사주는 신기하네요
토종벌 300여통이면 완전 대군입니다
꿀벌들의 왕으로써 사주팔자에 나와 있었든 사람이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