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고려를 빛낸 최영 장군! 이성계 등 회군한 세력에 의해 형장으로 끌려나왔으나 태연하게 참형을 맞이 하였다.
1388년 12월 유배지인 합포(合浦)로 옮겨진 후 최영은 형장으로 끌려나왔으나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고 태연하기만 했다.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내 나이 일흔셋이다. 내 죽는 것은 원통하지 않으나 소국으로서 대국과 맞설 수 있는 절호의 기호를 놓쳤으니 그것이 천추의 한이로다.”
이날 최영에게 참형을 가하기 전에 이러한 내용의 글이 읽혀졌다.
죄인 최영은 들을지어다. 그대가 국가에 끼친 공적은 지극히 크지만 판단을 그르쳐 국운을 위태롭게 하였다⋅⋅⋅⋅⋅⋅.사대(事大:약자가 강자를 섬김)의 예의에 어두워 명나라 천자에 죄를 짓고 나라를 망칠 뻔하였다. 전공(前功)이 명나라에 대한 반역을 덮을 수 없기에 부득이 참형에 처하노라.
최영은 하늘을 향하여 “하하하⋅⋅⋅⋅⋅⋅!”한바탕 실의의 웃음을 웃고
탄식하였다. “내 일찍이 부친의 가르침을 받아 황금을 보기를 돌같이 하였고 오로지 칠십 평생을 위국충절로 살아왔다⋅⋅⋅⋅⋅. 만약 내게 추호라도 사심이 있었다면 내 무덤에 풀이 날 것이다. 그러나 우국충정으로 살았다면 무덤에 풀이 나지 않으리다. 천지신명이 아실 것이다.”
목이 잘리기 직전까지 최영은 눈을 똑바로 뜨고 노려보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가서 배은망덕한 이성계에게 일러라. 언제까지 사대주의에 사로잡혀 소국(小國)에만 머물 것이냐, 결국 그 자는 나라를 훔치리라!”
고려인의 귀감이 되었고, 백전불굴의 신념과 용기를 지녔던 우국충정의 화신이었던 최영은 말을 마치자 곧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가 국가에 세운 공적은 매우 크다. 공민왕 3년에 중국의 산동에서 장사성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이다. 원나라에서 원병을 요청해 오자 최영은 대호군(大護軍)이 되어 유탁(柳濯) 등과 함께 출전하여 선봉장으로서 정병(精兵) 2천 명을 이끌고 반란군을 거의 전멸시켰다. 이것을 계기로 그의 용맹은 중국 대륙까지 널리 떨치게 되었던 것이다. 아울어 2차에 걸친 홍건적들의 칩입 한 때에도 선봉장으로서 그들을 대패시켰고, 공민왕 7년 왜구들이 대대적으로 칩입했을 때에도 그들의 배 4백여 척을 쳐부수는 등 전라도로 내려가 육군과 해군을 총지휘하였다. 적들은 최영 장군의 명성만 듣고도 두려워서 달아나기 시작했고 그들을 맹렬히 추격하여 압록강에 이르러 일대 접전을 벌인결과 4만여 명의 홍건적들은 최영이 이끄는 고려 군사들에게 거의 전멸하여 살아서 달아난 자들의 수는 3백 명에 불과하였다. 1311년 1월에 홍건적은 다시 10만의 대병으로 침범하였을 때 최영은 총사령관이 되어 이성계, 이방실 등의 장수를 대동하고 출전하여 그들을 완전히 격퇴하였다. 이때 이성계가 특히 큰 공을 세웠는데, 그때부터 이성계를 신임하였고 이성계도 최영을 스승이나 부모처럼 존경하고 따르게 되었다.
1363년 공민왕 12년(황희가 태어나던 해), 김용(金鏞) 일당은 원나라의 조종을 받고 많은 군사를 이끌고 기습적으로 침입하여 살육을 자행하였다.“공민왕을 죽여라!”“저쪽 침실에 공민왕이 있다.”반역자들이 사나운 기세로 몰려올 때였다. 내시 안도치는 기지를 발휘하여“전하, 상황이 위급하오니 어서 신과 옷을 바꿔 입도록 하시오소서.”라며 옷을 서로 바꿔 입었다. “오, 그대는 다시 없는 충신이로다.” 그들은 안도치가 공민왕인 줄 알고 침전에 난입하여 창칼로 마구 질러 죽였다. 그들은 공민왕을 죽인 것으로 알고 “우린 거사에 성공하였다!”반란군의 괴수 김용이 좋아서 함성을 지를 때였다. “이 천하에 무엄한 놈들! 나 최영이 여기 있다!” 최영은 한 떼의 무리를이끌고 들이닥친 것이다. 반란군들은 월등히 많은 숫자만 믿고 맞서 싸우고자 했으나 모조리 비참하게 죽어갔다. 이것을‘흥왕사(興王寺)의 변’이라고 한다. 당시 공민왕은 홍건적의 난으로 인해 궁궐이 불타는 바람에 임시로 흥왕사로 처소를 정하고 지낼 때였다. 최영은 김용을 잡아 처형하였다. 최영은 그러한 공로로 벼슬이 더욱 올랐다. 그러나 신돈이 왕사로서 권력을 휘두를 때 그를 비판하다가 한 때 신돈의 모함을 받고 좌천되기도 하였다. 이후 우왕 4년(1378)에 왜구들이 엄청난 떼를 지어 승천부(昇天府)까지 침입하여 온갖 만행을 저질렀다. 그때 최영은 예순의 노령임에도 자청하여 이성계, 양백연(楊伯淵) 등과 함께 선봉장으로 나섰다. 백발을 휘날리며 왜구들을 섬멸시킨 공로로 안사공신(安社功臣) 칭호를 받기로 하였다.
공민왕이 암살될 당시에도 그는 예순을 몇 해 넘긴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공주 부근에서 왜구들과 마주친 최영은 가장 앞장서서 돌격하던 중 입술에 화살이 날아와 박혔다. 그러나 태연히 활을 쏜 자를 쓰러뜨린 후에야 입술에 박힌 화살을 뽑았다. 그는 단신으로 화살과 창검이 빗발치는 적진으로 쳐들어가 적의 목을 추풍낙엽처럼 무수히 떨어뜨렸다. 고려 군사들은 사기가 충천하여 왜구들을 전멸시키고 대승하였다.
개선장군이 되어 돌아온 그를 왕이 시중으로 승진시키고자 했으나 사양하였다. 재상이 된 후에도 청렴 강직한 그는 당시의 세도가였던 이인임이 어떤 청탁을 하자 크게 꾸짓고 물리쳤다. 또한 신정군(新定君)이던 마경수(馬坰秀)의 비리 사실을 적발한 후 그를 엄히 다스려 죽음에 이르게 했다. 우왕의 유모인 장 여인이 교만 방자하여 정사에 관여, 폐단을 일으키자 우왕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참살시켰다. 최영은 공과 사에 있어서 너무나 엄격하였고 청렴 강직하였다. 이와 같은 그의 성품은 임금에게도 서슴없이 직언으로 이어졌다. 탐관오리들은 그를 가장 두려워했다. 그의 공적이 얼마나 컸는지, 그의 성품이 어떠한지 임금이 하사한 철권(鐵卷:공이 큰 신하에게 주는 훈장)에 적힌 내용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지금 장수들 중에서 역전의 횟수와 공로가 많기로는 오로지 경 한 사람뿐이다. 또한 재상으로서 공로가 많으며 충의를 다하고 위로 왕을 보필하고, 아래로는 백성들을 보살핌이 더할 나위 없으니 재상 중에서도 참된 재상이로다. 전토와 노비로 상을 주는 것이 마땅하나 경의 청백함이 천성적으로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니 다만 철권을 내려 옥(玉)으로 축(軸)을 삼아 특례를 표창하노라.
최영은 재상을 지낸 최유청(崔惟淸)의 5대손으로, 담략이 출중하고 싸우기만 하면 이기는 장군이었다. 그가 16세 때 그의 아버지가 유언했던 말을 쫓아서 평생을‘황금을 보기를 돌같이’하고 위국충절의 화신으로서 순절하였다. 최영의 죽음은 고려를 떠받치는 대들보가 무너지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최영이 처형을 받았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저잣거리는 거의가 문을 닫았고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였다. 그 무렵 황희는 아내의 죽음, 설낭자의 죽음, 스승처럼 부모처럼 존경하던 최영의 죽음 등 계속이어지는 죽음은 황희로 하여금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걷잡을 수 없는 허탈감에 빠져들게 하였다. 특히 최영의 청렴 결백했던 생활 태도에서 받은 인상은 평생을 두고 깊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 상복 차림으로 최영의 장례식에 참석했던 황희는 그곳에서 맹사성을 만난다. 맹사성은 최영의 손녀딸에게 장가를 들었고, 황희도 얼마 전에 죽은 아내 최씨가 바로 최영의 조카뻘이다. 그들은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누었다.
맹사성: 방촌(황희의 호), 이제 고려는 망하려나 보오.
황 희: 그러게 말이오, 고불(古佛:맹사성의 호)은 장차 어쩔 작정이오?
맹사성: 아직 판단이 서지 않소, 우선은 최영 장군의 높으신 뜻을 기리고 본받자는 생각뿐이오.
황 희: 나도 동감이오, 우리는 앞으로 무엇을 하든지 그분의 고귀한 뜻을 본받아야 하오.
맹사성: 그야 당연한 말이지요. 그들은 의기 투합하여 함께 손을 굳게 잡았다. 훗날 이 둘은 나란히 청백리로 뽑히고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결정적인 동기가 된다
황희는 첫 아내 최씨를 잃은 지 3년 후 다시 집안 어른들의 권유로 두 번째 아내인 양(楊)씨를 맞이하게 되었다.
다음에 (8)에서 계속 이어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