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럼비아사의 문예부장 시절 48곡의 유행가를 작곡했다. 히트곡 "처녀총각"·"마의태자"·"홍도야 우지마라" 등의 작곡가이다. 콜럼비아사의 문예부장. 일본 도요(東洋)음악학교 졸업하였다
일본 유학파의 엘리트로 피아니스트이자 일본 연예계에서도 활약한 그는 한동안 일본에서 소녀가극단(少女歌劇團)이라는 공연단체를 위하여 관현악 편곡을 했고, 1930년경부터는 우리나라와 일본을 왕래하면서 음반제작을 위한 반주음악의 작곡과 편곡을 하였다.
1934년 봄에 작곡해 채규엽(蔡奎燁)이 음반에 취입한 "서울노래"는 일제경찰에 의해 불온가요라고 금곡처분을 받았다. 1939년 연극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의 주제가 "홍도야 울지말아"는 사람들 속에 널리 가창 보급되면서 슬픔과 눈물의 바다를 만든 노래로 유명하다. 1936년 4월호 『음악평론』에서 박태준·이면상·김세형과 함께 작곡가의 한 사람으로 소개되었다.
1936년 강홍식(姜弘植)이 노래한 "먼동이 터온다"와 "처녀총각"은 그의 히트 작품이었다. 1939년 신파극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의 주제가와 "홍도야 울지마라"를 남일연(南一燕)과 김영춘(金英椿)이 노래를 불러 크게 성공을 거두었다. 1930년대 초 방송음악단(放送音樂團)에서 피아노 연주를 하다가 작곡가로 활약한 그는 한때 콜럼비아사의 문예부장을 역임했다. 귀국해 강홍식과 같은 극단에도 활동하면서 신민요 "처녀총각"을 작곡해 인기를 끌었으며, "마의태자"(麻衣太子)를 비롯해 1939년의 대 히트곡 "홍도야 우지 마라"를 작곡하였다.
1940년 6월 19~20일 조선예흥사(朝鮮藝興社) 주최 「조선음악전」 때, 심상건·강장원·정광수 등과 함께 출연했고, 그는 콜럼비아음반에 유행가 48곡을 작곡하였다. 새봄을 맞이한 농촌처녀의 소박한 마음을 밝고 약동적인 안땅장단에 앉아 작곡한 그의 "처녀총각"은 남녀노소 없이 널리 애창됐다. 이 노래는 1950년대 가사와 곡을 일부 수정해 "봄타령"으로 불렸으며, 1970년대부터 "새봄을 노래하네"라는 제목으로 애창되고 있다. 민족적 정서가 풍부하고 경쾌한 가락의 신민요 "청춘타령"도 해방 후에 시대의 미감에 맞게 "금수강산 우리 조국"으로 개작되어 불리고 있다.
그의 대표적인 유행가 작품으로 "처녀총각"·"먼동이 터온다"·"홍도야 우지 마라" 등이 있다. 강홍식·김계선·김옥선 등과 함께 취입한 "금강산이 조흘시고"·"마즈막 편지"·"어머니의 힘"·"처녀총각," 그가 작곡·작편곡 또는 편곡한 "가슴에 타는 불꽃"을 포함한 100여 곡의 유행가는 일본 콜럼비아음반에 전한다. 그가 작곡한 유행가 "사막의 밤 눈물"은 폴리돌관현악단 반주로 취입됐다. 1936·1938년 그가 작곡한 "금강산타령"·"청춘타령" 방송을 위해 경성방송국(京城放送局)에 출연하였다.
1947년 동경으로 건너가 아사히나노보루(朝比奈昇)라는 예명으로 송죽관현악단(松竹管絃樂團)의 지휘자로 활약하였다. "처녀총각"·"청춘타령"과 같은 밝고 명랑한 정서를 가진 신민요의 작곡가로 유명한 김준영은 콜럼비아사의 전속작곡가로 있으면서 많은 대중가요를 발표하였다.
오케, 태평 레코드서도 작곡한 적 있다
필명 김기방
채규엽 서울 노래 생소한 안일파 작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