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주는 자와 받는 자의 연결이다. 주는 자가 마이너스라면 받는 자는 플러스다. 다르마의 길은 마이너스다. 세상을 마이너스로 보는 눈을 얻어야 한다. 뭐든 나빠진다는 것이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이다. 어차피 나빠지는 것을 덜 나빠지게 하는 것이 인간이 할 수 있는 의사결정이다.
사건이 일어나면 그것은 대개 나쁜 소식이다. 나쁜 일을 건드리면 더 나빠진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더 나빠지지 않게 차단선을 치는 것이다. 사건의 증폭을 막는 것이다. 리스크를 방지해야 한다. 2차 사고와 2차 가해를 막아야 한다. 가해자와 피해자는 더 이상 만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플러스 사고는 일종의 어리광 행동이다. 아기가 울면 할머니가 달래준다. 플러스가 된 것이다. 관종이 어그로를 끌면 관심을 받는다. 더 좋아졌다. 조직의 하부구조에 속하기 때문이다. 꾓병을 부리면 간호를 받는다. 시골과 같은 작은사회에서 가능하지만 일회성일 뿐 지속가능하지 않다.
유책주의와 파탄주의가 있다. 이혼법정에서 일어나는 일이지만 문제는 유책주의 사고방식이 다른 분야에도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는 점이다. 총부리를 대고 대치하고 있는 남북관계에서 누가 잘못했는지 따지는 것은 의미가 없다. 적군에게 잘못했다는 것은 잘했다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피아구분을 해야 한다. 공사구분을 해야 한다. 유책주의는 아군끼리 먹히는 것이고 사적으로 먹히는 것이다. 해커가 서버를 해킹했다고 치자. 유책주의로 보면 해커가 잘못했다. 파탄주의로 보면 해커가 사이트 약점을 알려줬으니 오히려 댓가를 줘야 한다. 관점에 따라서 결론이 달라진다.
우리사회의 많은 갈등이 유책주의 사고 때문에 일어난다. 유책주의는 숨은 전제가 있다. 가해자가 사죄하고 피해자가 용서하고 관객은 박수치고 다 함께 감동의 도가니에 빠져야 한다는 사상이다. 그런데 일이 더 커진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어떤 식으로든 연결되면 이차가해가 일어난다.
가해자는 극도로 스트레스를 받고 있기 때문에 좋은 표정을 지을 수 없다. 가해자가 훌륭한 사죄를 했다면 스트레스를 받지 않았다는 증거다. 사이코패스인 것이다. 잘못을 저지른 개는 꼬리를 치고 웃으며 주인을 달래려고 한다. 가해자는 무의식적으로 웃으면서 피해자를 달래려고 한다.
가해자가 웃으면서 피해자에게 접근하는 행위 그 자체가 이미 이차가해다. 어떤 사죄가 진정성 있는 사죄일까? 그런 것은 없다. 울면서 사죄한다면 가식적인 연기이고 웃으면서 사죄하면 조롱이다. 가해자와의 접촉 그 자체가 피해자에게 악몽이다. 사죄와 용서는 초딩들이나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