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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시 사야도의 초전법륜경
DHAMMACAKKAPPVATTANA SUTTA
THE GREAT DISCOURSE ON THE WHEEL OF DHAMMA
우꼬레 영어 번역 / 김한상 우리말 번역
행복한 숲
제5장
미얀마력 1324년(서력 1962년) 따딩윳(Thadingyut)의 새달에 설법
따딩윳의 8번째 하현(下弦)달일의 지난주 우리가「초전법륜경」의 제 4장을 설했을때
괴로움의 진리(苦諦)에 대한 해설을 다루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괴로움의 일어남의 진리(集諦)에 대한 해설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우리는 사성제(四聖諦)의 표제어를 다시 한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고제(苦諦 Dukkha-saccā) - 괴로움의 진리
2. 집제(集諦 Samudaya-saccā)- 괴로움의 일어남의 진리
3. 멸제(滅諦 Nirodha-saccā) - 괴로움의 소멸의 진리
4. 도제(道諦 Magga-saccā) -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도의 진리
법문의 제 4장에서 설명한대로, 통찰지를 통해 몸소 발견한 고제(苦諦)를 정의하신
세존께서는 다시 괴로움의 일어남의 진리(集諦)에 대한 정의를 내리기 시작하셨습니다.
1. 집제-괴로움의 원인에 대한 진리
Idam kho pana, Bhikkhave, dukkha-samudayo ariya saccām: Yayam taṇhā ponobhavika
nandiragasahagata tatra tatrabhinandini . . . seyathidam, kamataṇhā, bhavataṇhā, vibhavataṇhā.
“비구들이여, 집성제(集聖諦)란 무엇인가?
그것은 갈애(taṇhā)이니 다시 태어남을 가져오고 환희와 탐욕이 함께 하며 여기저기서 즐기고 만족을 찾는 것이다.
무엇이 갈애인가? 그것은 세가지가 있는데,
즉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慾愛 kāmā-taṇhā),
존재에 대한 갈애(有愛 bhava-taṇhā),
존재하지 않음에 대한 갈애(無有愛 vibhava-taṇhā)가 그것이다.
이들 세 가지 갈애1가 바로 괴로움의 일어남의 진리(集諦)이다.”
괴로움의 일어남의 진리(集諦)인 갈애는 이미 설명한대로 태어남의 괴로움부터 오취온(五取蘊)의 괴로움에 이르기까지 온갖 괴로움들에 책임이 있는 원인 작용입니다. 괴로움을 없애기 위해서는 괴로움의 원인을 아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이는 병을 치유할수 있도록 병의 원인을 찾아내서 진단을 내리는 것과도 같습니다. 세존께서는 몸소 이 괴로움의 일어남의 진리(集諦)를 관통하신 결과로 그 원인을 제거함으로써 괴로움을 완전히 소멸시키셨셨습니다. 집제(集諦)는 갈애에 다름 아닙니다. 이 갈애(渴愛), 즉 딴하(taṇhā)는 목이 마르거나 배고픈 것과 같습니다. 다시 말해서 갈애는 감각대상을 목말라하고 애타게 구하는 것입니다.
감각적 대상에 대한 갈애는 다시 태어남을 가져오게(ponobhavikā)2합니다.
중생이 갈애에 붙들려 있는 한 재생은 끊임없이 일어날것입니다.우리는 나중에 법문에서 어떻게 재생이 일어나는지를 논할것입니다 이 갈애는 감각대상을 즐거워하고 거기에 취착합니다. 마치 기름이나 염료액이 표면에 퍼진 상태로 있다가 배여 나오듯이 이 갈애는 즐거워 보이는 감각대상을 즐거워하고 집요하게 매달립니다. 이 갈애는 여기저기서 만족을 찾는 것입니다.쾌락을 찾는데 절대로 지루하거나 지겨워 하는 법이 없습니다. 겉으로 즐거워보이는 감각대상이 나타나는 곳은 즐거움을 줍니다.
인간세계에서 하층사회의 삶은 상류층의 사람들에게는 결코 매력적이거나 즐겁지 않을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어느곳에 처해있든 자신들의 삶을 여전히 즐기는 가난한 환경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의 마음에는 동물의 삶이란 즐겁지 못하고 혐오스럽고 끔찍스런 것입니다.
우리가 뱀이나 벌레의 몸뚱아리를 연상하는 것은 역겹습니다. 그렇지만 만약 재생이 축생계에 일어난다면 중생은 자신의 몸뚱아리를 아주 즐거워하고 그 삶을 기뻐합니다. 이것은 모든 존재, 모든 감각대상이 있는 곳은 어디에서도 만족을 찾는 갈애의 본성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존께서는 갈애를 모든 존재, 모든 감각대상 여기저기서 즐기는 것으로 말씀하신것입니다. 이는 짬뻬야(Campeyya)용왕과 우빨리(Upali)왕비의 이야기에서 잘 드러납니다.
2. 짬뻬야 용왕 이야기
보살은 전생의 어느 때 쌈빠(Sampa)강 부근의 한 가난한 집안에 태어났습니다. 짬뻬야(Campeyya)라는 용왕이 누리는 즐거운
삶을 부러워하게 된 보살은 보시(dāna)와 지계(sīla)의 선업을 쌓는데 매진하였습니다. 그 결과 죽은뒤 용의 세계에 자연적으로
화생(化生)하여 완전한 형체와 모양새를 갗춘 용으로 짬뻬야 용왕의 왕좌에 앉아있는 자신을 발견하였습니다.
용(nāga)은 뱀의 일종입니다. 사람에서 뱀으로 재생한다는 것은 정말로 무섭고도 혐오스러운 것입니다. 보살은 자신의 혐오스럽고 끔찍스런 새 모습을 보고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보시와 지계라는 선업의 과보로 나는 육욕천(六欲天)4 중 어느 한곳에 날수도 있었다. 하지만 내가 용왕의 즐거움을 바랬었기 때문에 이 파충류의 세계에 재생하였다. 오! 뱀으로 사는 것보다는 차라리 죽는게 나으리라.’보살은 심지어 자살할 궁리까지 했습니다.
그러는 사이 수마나(Sumana)라는 젊은 용녀(龍女)가 다른 젊은 용녀들에게 새 왕을 환대하라는 신호를 보냈습니다. 젊은 용녀들은 아름다운 천녀(devi)와 여신의 모습으로 위장하고 노래부르고 춤추며 갖가지 악기를 연주하기 시작했습니다. 노래, 춤, 음악으로 자신을 환대하는 아름다운 여신들을 보고 짬뻬야 용왕은 자신의 용궁이 마치 천신의 궁전인것처럼 생각되어 매우 기뻐했습니다. 그는 자기도 천신의 모습으로 변해서 용녀들과 함께 환락을 즐겼습니다.
하지만 그는 보살이었기 때문에, 현실감각을 쉽게 되찾아서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 바라밀, 즉 보시와 지계 같은 덕성을 더 닦고자 결의했습니다. 이 결심을 잘 실천하여 짬뻬야 용왕은 인간세계에 다시 태어나서 숲의 은둔처를 찾아가 계율을 잘 지켰습니다.
이 짬뻬야 용왕이야기에서 우리가 강조하는 바는 사람의 관점에서 볼 때 파충류의 몸은 끔찍하고 혐오스럽다는 것입니다. 처음 용의 생을 받았을때보살도 자기의 새로운 생을 끔찍하고 혐오스럽게 보았지만 매력적인 용녀들의 모습을 보고는 관점을 바꾸게 되어 마치 신들의 거처에 사는 것처럼 용왕의 삶을 즐기고 기뻐하였습니다.
보살이 처음에는 용의 삶을 혐오하다가 나중에 그것을 즐기게 된것은 바로 재생이 일어나는 여기저기서 즐기는 갈애 때문입니다. 보살이 인간계에서 가난뱅이였을때 용왕이 누리는 즐거운 삶을 바라며 세운 소원이 있었습니다. 이 소원, 또는 갈망도‘다시 태어남을 가져오게(ponobhavikā)’란 세존의 말씀에 따라 용의 세계로 나게 한 갈애였습니다.
3. 우빠리 왕비 이야기
우빨리(Upali)왕비는 빠딸리(Patali)를 수도로 둔 까시(Kasi)국 앗사까(Assaka)왕의 정실왕비였습니다. 그녀는 빼어나게 아름다운 미인이라고 했습니다. 고대의 왕들은 왕국에서 제일 매력적인 처녀들을 골라서 왕비로 삼았습니다. 그래서 왕비들은 매력과 아름다움으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우빨리 왕비는 뛰어난 아름다움과 매력 때문에 여러 왕비들가운데서도 단연 으뜸이었습니다.
앗사까왕은 왕비의 매혹적인 미모에 홀딱 반하여 완전히 그녀에게 마음을 뺏겼습니다.
왕에게 총애받고 여전히 아름다움과 매력의 절정기에 있을 동안 우빨리 왕비는 천신의 세계로 갔습니다.‘천신의 세계로 가다’라는 말은 왕족의 죽음을 나타내는 미얀마의 문화적인 관례어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천상으로 돌아가다’6라는 말도 불교승려의 죽음을 뜻하는 단순한 문화적인 관례어입니다. 죽은 사람은 과거 의도적 행위인 업(kamma)이 조건지운 대로 다른 존재로 다시 태어납니다.
보통 그렇듯이, 우빨리 왕비는 ‘왕비는 천신의 세계로 갔다’라는 문화적 용례어에 따른 말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낮은 쇠똥구리의 세계에 재생하였습니다. 총애하는 왕비가 죽자 앗사까왕은 맹렬히 타오르는 슬픔과 비탄에 사로잡혀 왕비의 시신을 기름으로 방부처리하고 유리관속에 넣어 자신의 침대밑에 두었습니다. 정신적 고통에 압도되어 왕은 음식을 들거나 자지도 않은채 침대에 누어서 사랑하는 왕비의 죽음을 슬퍼하며 울부짓었습니다.
왕실친척들과 현명한 대신들이 존재의 무상함과 조건지워짐의 본성을 일깨워줌으로써 왕을 위로하고 위안을 주려고 하였습니다만 모두 허사였습니다. 관속의 시신은 기름으로 방부처리되어 현대의 화학 방부제로 처리한 것처럼 잘 보존되어 갈것입니다. 그래서 왕비는 마치 관속에서 누워 잠을 자고 있는 것처럼 왕에게 보였습니다. 그러한 시신의 모습은 왕의 타오르는 슬픔과 비탄에 기름을 끼얹는 역활하여 7일간 왕을 초최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때 보살은 히말라야의 숲속에 사는 신통지(神通智 abhiññā)7를 지닌 선인(仙人)이었습니다. 보살이 신통지로 세상을 두루 둘러보다가 극도의 슬픔으로 몹시 괴로워하고 있는 앗사까왕을 보았습니다. 또한 왕을 불행으로부터 구해줄 사람은 자신외에는 아무도 없음을 알았습니다. 보살은 선정의 힘으로 앗사까왕의 왕궁정원으로 갔습니다.
자신을 만나러 온 젊은 바라문에게 보살은 앗사까왕에 대해 물었습니다. 젊은 바라문은 왕이 어떻게 정신적 고통에 압도되었는지를 설명하고 왕을 구원해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보살은“나는 왕을 모르지만 만약 왕이 와서 요청한다면 왕에게 왕비의 현생을 알려줄수 있습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젊은 바라문은 왕에게 가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대왕님, 하늘 눈(天眼)과 하늘 귀(天耳)를 가진 선인이 지금 왕궁정원에 와 있습니다. 선인은 돌아가신 왕비님의 현생을 보여줄수 있다고 하시는데 가서 그를 한번 만나 보시는게 좋겠습니다.”
이말을 듣자 왕은 즉시 마차를 타고 왕궁정원으로 떠났습니다. 도착한후 왕은 선인에게 정중한 예를 표하고 이렇게 말했습니다.“존자님, 존자님께서 우빨리 왕비의 현생을 안다고 하시는게 사실입니까?”선인이 그렇다고 하자 왕은 왕비가 지금 어디에 재생해 있는지를 알고 싶어 했습니다.“대왕님,우빨리 왕비는 자기의 아름다운 용모를 즐거워하였고 아름다운 용모에 대한 자만심이 강하였습니다. 그녀는 오직 자신을 예쁘게 꾸며서 더 고혹적이고 매력있게 되도록 하는데만 몰두하였고 보시와 지계 같은 공덕행을 짓는 것을 내내 잊었습니다. 그 결과 왕비는 낮은 생으로 떨어졌습니다. 왕비는 지금 바로 이 정원의 쇠똥구리로 재생하였습니다.”선인은 모든 이야기를 숨김없이 다 이야기 하였습니다.
부, 가문, 교육, 지위, 신체적 아름다움 따위의 특권을 누리는 행운을 타고난 사람들은 대인관계에서 오만함을 표출하기 쉽습니다. 스스로의 자만과 자존심에 둘러싸여 공덕행을 짓는데 소홀해집니다. 그들의 사람 됨됨이에서 겸손은 찾아볼수 없습니다. 세존께서는『중부(中部)』「소업분별경(小業分別經 Culakammavibhanga Sutta)」(M135)에서 그렇게 오만하고 이름높고 거만한 사람은 악처(apāya)에 재생하기 쉽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반면에 공경할만한 분들께 공경을 표하고 겸손함을 보이는 겸허한 사람은 고귀한 가문에 태어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이야기는 통치 국왕의 정실왕비로써 아주 높은 지위를 누렸으며 매우 아름다웠던 우빨리 왕비의 이야기입니다. 왕비는 자신의 빼어난 자질에 우쭐해서 마땅히 공경을 표해야 했던 분들을 경멸의 눈초리로 깔보았습니다. 그러한 불선한 태도와 행동으로 그녀는 암쇠똥구리로 재생했다고 생각됩니다. 사랑하는 왕비의 이러한 재생의 이야기를 들은 앗사까왕은 곧바로“나는 그말을 믿을수 없습니다.”라고 하며 이를 부인하였습니다.
그러자 선인은“그럼 제가 암쇠똥구리를 대왕님께 보여드리고 그녀로 하여금 말할수 있게 하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을 들은 왕은 대답했습니다.“좋습니다. 그렇게 하시고 그녀가 또한 말을 할수 있게 해주시기 바랍니다.”선인은 신통지(abhiññā)의 초능력으로 숫쇠똥구리와 암쇠똥구리가 왕앞에 모습을 드러내도록 결의하였습니다. 소똥더미에서 숫쇠똥구리가 왕앞으로 모습을 드러내자 선인은 말했습니다.“오, 대왕님. 뒤따라오는 암쇠똥구리가 대왕님의 정실왕비였던 우빨리 데위입니다. 대왕님을 저버리고 지금은 숫쇠똥구리가 어딜가든 그놈만 쫒아다니는군요. 대왕님, 바로 얼마전까지 대왕님의 정실왕비 우빨리였던 암쇠똥구리를 잘 보시기 바랍니다.”
왕은 선인의 말을 믿지 않고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나는 내 왕비 우빨리 같이 그런 지적인 존재가 이런 암쇠똥구리로 태어났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사실, 업과 그 과보의 법칙을 완전히 믿지 않고 연기법(paṭiccasamuppāda)에서 설명된대로 조건성, 즉 인과의 법칙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사람이란 존재가 한갖 쇠똥구리가 될만큼 그렇게 낮게 추락했다는 사실을 믿기란 어려울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널리 전파되어 있는 이 정법의 시대에도‘사람이 죽으면 그보다 더 낮은 존재로는 재생할수는 없다.’라는 견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교법을 아직 듣지 못하던 그 암흑시기에 그러한 환생의 이야기가 회의적으로 받아들여졌다는 것은 그리 놀랄만한 일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성자(ariya)의 지위를 아직 얻지 못한 한 인간세계나 천상계에서 악처(apāya)로 떨어질수 있습니다. 악업과 죽음직전 정신의 반응작용을 조건으로 악처로 재생할수 있습니다. 반면에 선업과 죽음의 문턱에서의 선한 정신적 태도를 조건으로 낮은 중생계에서 더 높은 인간과 천신의 세계로 재생할수도 있습니다.
죽기 바로 직전 자신의 주황색 가사에 취착을 일으켰던 띳사(Tissa) 비구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결과 바로 그 가사에 집을 짓고 사는 이로 재생하였습니다.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있을 때 죽은 개구리 이야기도 있습니다. 개구리는 죽어서 삼십삼천의 천신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사례들은 죽음의 순간 형태를 바꿔 나는 다양한 재생의 실증입니다.
하지만 앗사까왕은 그러한 법문을 듣지 못했기 때문에 왕비가 암쇠똥구리로 태어났다는 사실을 받아들일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왕은 믿으려 들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선인은 암쇠똥구리로 하여금 말을 하도록 만들겠다는 제안을 했습니다. 왕은 그 제안을 승낙했습니다. 그러자 선인은 신통력으로 결의를 하여 왕과 암쇠똥구리가 대화를 하고 왕과 시종들이 이해할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선인은 암쇠똥구리에게“너는 전생에 누구였느냐?”라고 물었습니다.
암쇠똥구리는“저는 앗사까왕의 정실왕비 우빨리였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암쇠똥구리야, 그럼 이제 너는 앗사까왕을 여전히 사랑하느냐? 아니면 이 숫쇠똥구리만을 사랑하느냐?”
이 물음에 암쇠똥구리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실제로 앗사까왕은 전생에저의 남편이었습니다. 그 당시 저는 앗사까왕과 함께 보고 듣고 냄새맡고 맛보고 감촉하는 다섯가지 감각적 쾌락을 즐기면서 이 정원을 거닐곤 했습니다.하지난 지금 저는 새로운 생을 살고 있고 앗사까왕과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본생경」주석서에 나온 암쇠똥구리의 대답은 이러합니다. “나는 현생에서 앗사까왕을 죽여서 그 목에서 흘러 나오는 피로 사랑하는 현 남편인 숫쇠똥구리의 발을 씻어주면 좋겠습니다.”이 주석서의 설명은 암쇠똥구리의 대답을 매우 모질고 매정하게 들리게 합니다. 하지만 자기가 사랑하는 남편인 숫쇠똥구리앞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가 남편을 기쁘게 해주려 했음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사별이 아니라 성격의 차이로 헤어진 전 남편과 전 아내간의 불화의 수많은 이목을 끄는 사례와 삶의 새 반려자에게 쏟는 애정의 사례를 일상에서 우리는 쉽게 찾아 볼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석서에 나오는 기술은 매우 타당한 것입니다.
빠알리 성전「본생경(本生經)」〈앗사까 자따까(Assaka-Jātaka)〉(Jā.207)는 암쇠똥구리의 답변을 다음과 같이 쓰고 있습니다.“존자님, 앗사까왕을 사랑했던 저는 그때 저를 총애했던 사랑하는 남편 앗사까왕과 함께 서로의 짝이 됨을 즐기며 자주 이 정원을 거닐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새로운 현생의 즐거움과 고통은 옛 삶의 즐거움과 고통을 희미하게 하고 감추었습니다. 저는 지금의 남편인 숫쇠똥구리를 앗사까왕을 사랑했던 것 이상으로 사랑합니다.”
‘~ 이상으로 사랑한다’라는 말에 대한 주석서의 설명은 흥미롭습니다. 주석서에 따르면‘~ 이상으로 사랑한다’는 말은 새로운 남편을 위한 사랑의 강도를 나타내는‘일백번이상으로, 일천번 이상으로 사랑한다’는 것을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앗사까왕은 암쇠똥구리의 그러한 모질고 매정한 말을 듣고는 크게 상심했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나는 왕비를 너무나도 사랑하고 아꼈기때문에 차마 그 시신을 버릴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내게 너무나도 혐오하고 불쾌하게 변했다.’
왕은 옛 왕비 우빨리에게 너무나도 넌덜머리가 나서 앉은 자리에서 이렇게 명령을 하였습니다.“가서 그 여자의 시신을 치워버려라.”그리고는 목욕하고 왕궁으로 돌아갔습니다. 왕은 다른 궁녀를 정실왕비로 삼고는 어질게 나라를 다스려 나갔습니다. 보살인 선인은 왕에게 좋은 조언을 해주고는 히말라야의 거처로 되돌아갔습니다.
이 이야기의 교훈은 우빨리왕비는 인간세계에 있을 때 인간의 삶과 왕비로서의 삶을 즐겼다는 것입니다. 그녀는 자신이 암쇠똥구리로 재생할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것입니다. 하지만 과거업에 따라 암쇠똥구리로 재생하게 되자 그녀는 곧바로 그 삶을 좋아하고 쇠똥구리의 몸을 즐기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쇠똥구리의 몸을 앗사까왕의 몸보다 일백배, 일천배이상으로 중시하고 사랑하였습니다.
그녀가 쇠똥구리 같은 낮은 존재에서 아주 마음 편했던 것은 다름 아닌 여기저기서 즐기는 갈애때문이었습니다. 바로 이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Tatra tatrā-abhinandini, 여기저기서 즐기는”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개로 재생하면 갈애로 인해 개의 삶을 즐깁니다. 돼지, 닭, 오리로 재생해도 그 각각의 삶을 항상 즐깁니다. 사회 상류층의 부유한 부모를 둔 자녀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나중에 몹시 가난한 삶으로 전락하여 재생하지만 거기서의 삶을 즐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들중 일부는 새로운 삶이 매우 즐길만 하기 때문에 가족의 품안으로 도로 되돌아오게 하려는 부모들의 노력에 반항을 하기까지 합니다. 그들이 어느 곳에서 몸을 받더라도 즐거워하고 나타난 모든 감각 대상을 즐기는 것이 또한 갈애입니다.
4. 어떻게 새로운 재생이 일어나는가
우리는 이제 이전에 미루어 놓았던 습관적으로 다시 태어남을 가져오는 뽀놉바위까(ponobhavikā)를 다루고자 합니다.
갈애는 즐거워하고 취착하는 성질을 지녔기 때문에 어느 곳에서 몸을 받더라도 즐거워하고(태어나게 된 모든 존재를 즐거워하고) 나타난 모든 감각대상을 즐깁니다. 갈애로 인해 자신의 삶이 즐겁고 행복한것으로 여기고 이 삶이 영원히 지속되고 변하지 않으며 즐거운 대상들이 지속되고 유지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생깁니다. 즐거운 대상들을 바라는 대로 유지되게 하려는 노력속에서 의도적 행위(saṅkhāra)가 작용하기 시작합니다. 이 선하거나 불선한 업, 또는 의도적 행위는 새로운 생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는 원인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죽어 가고 있을때 이런 저런 선하거나 불선한 업(kamma), 또는 그 업을 행할 당시 얻은 형상(色)· 소리(聲)· 냄새(香)· 맛(味)· 감촉(觸)· 생각(法)의 육처(六處)로 이루어진 업의 표상(kamma-nimitta)이나 앞에서 말한 업의 결과로 받게될 태어날곳의 표상(gati-nimitta)이 마노의 문(意門)에 나타날것입니다. 죽어가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업(kamma), 업의 표상(業相 kamma-nimitta), 태어날 곳의 표상(gati-nimitta)은 갈애때문에 집요하게 거머쥐여져서 죽어가는 이의 마음을 떠나지 못합니다. 마치 해질녘 산의 그림자가 지표면을 드리우고 감싸는 것처럼, 감각의 문에 나타나는 업(kamma)의 감각대상, 업의 표상(kamma-nimitta), 태어날곳의 표상(gati-nimitta)은 죽어가는 이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습니다. 이러한 감각대상은 임종에 다다른 속행(māranasanna-Jvana)8, 즉 업지음의 식(abhisaṅkhāra-vinñāṇa)로 집요하게 거머쥐어집니다.
『증지부(增支部)』〈삼집(三集)〉「존재경(Bhava-sutta)」(A3:76)의‘kammam khettan, vinñāṇam biJn, taṇhā sincho,
업은 들판9이고
식은 씨앗이고
갈애는 수분이다.’라는 말씀에 따르면 선하거나
불선한 업은 재생연결식(paṭisandhi-vinñāṇa)이 나타나서 성장할 장소 역할을 합니다.
업지음의 식(abhisaṅkhāra-vinñāṇa)는 재생연결식(paṭisandhi-vinñāṇa)이 성장할 씨앗노릇을 하며
매 삶의 모든 감각대상을 즐기는 갈애(taṇhā)는 그 씨앗을 성장하게 하는 습기나 물의 요소로 비유될수 있을 것입니다.
주석서에 따르면 여기서 재생의 조건을 만드는 업지음의 식( abhisaṅkhāra-vinñāṇa)는 의도적 업인 쩨따나(cetanā)와
결부된 식(識)이라고 합니다. 업지음의 식(abhisaṅkhāra-vinñāṇa)가 첫번째 의도적인 업과 함께 일어나는 것처럼
나중의 업의 활동들과도 결부되며 그러한 것으로써 나중에 나타나는 식(識)는 업지음의 식( abhisaṅkhāra-vinñāṇa)로 이름해야 할것입니다.
특히, 업(kamma),
업의 표상(kamma-nimitta),
태어날곳의표상(gati-nimitta)을 대상으로 삼는 임종에 다다른
속행(māranasanna-Jvana)10의 식은 업지음의 식( abhisaṅkhāra-vinñāṇa)라고 이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임종에 다다른 속행(māranasanna-Jvana)의 식에서 재생연결식(paṭisandhi-vinñāṇa)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씨앗이 물의 요소, 습기와 접촉할때에만 비로서 싹이 트게 되듯이
식(識)라는 씨앗은 그 가까이 있으면서 식(識)와 함께하거나
그것을 선도하는 갈애(taṇhā)의 지원과 부추킴을 받아
업(kamma),
업의 표상(kamma-nimitta),
태어날곳의 표상(gati-nimitta)를 대상으로 집요하게 거머쥐고
재생연결식(paṭisandhi-vinñāṇa)을 일으킵니다.
죽음의 순간이 사라지자 마자 정신과 물질의 오취온(五取蘊),
재생연결의 마음(paṭisandhi-citta)이
업(kamma),
업의 표상(kamma-nimitta),
태어날곳의 표상(gati-nimitta)을 대상으로 거머쥐고
거기에 의존하는 육체적 기반을 갖춘 새로운 존재로써 새로운 장소에 생겨납니다.
각각의 식(識)들과 함께 마음부수(心所 cetasika)들도 따라서 일어납니다.
재생연결식(paṭisandhi-vinñāṇa)뒤에는 자신의 업력(業力)11에 의해 규정된 대로 전생애동안 끊임없이 진행되는
생명 연속체인 바왕가의 마음(bhavaṅga-citta)12, 즉 존재 지속심(有分心)이 이어옵니다.
업과 갈애라는 두가지 요인에 의해서 새로운 생이 일어납니다. 하지만 갈애 없이 업만으로는 새로운 생이 일어나지 못합니다.
아라한의 경우 그의 과거 공덕행은 죽기 직전, 즉 완전한 열반(般涅槃)에 들기직전 선한과보를 맺을 것입니다.
시왈리(Sīvalī)존자13가 얻은 푸짐한 공양물과 바꿀라(Bākula)존자14가 누린 완벽한 건강이 선한 과보의 실례입니다.
하지만 아라한의 불선행은 항상 공양물을 부족하게 얻었던 로사까띳사(Losakatissa)장로15의 경우나
흉악범들에게 몰매 맞아죽은 목갈라나( Moggallāna)존자16의 비참한 운명처럼 나쁜 과보를 맺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라한은 갈애가 없기 때문에 이러한 업들은 새로운 재생을 일으킬 잠재력이 더 이상 없습니다.
임종이 다가올(māranasanna)때 갈애의 지원과 부추김이 없기 때문에 업지음의 식(abhisaṅkhāra-vinñāṇa)는
일어나지 못하여 재생이 없게 됩니다.17 이러한 이유로 다시 태어남을 가져오는(ponobhavika)원인은 오로지 갈애입니다.
그러므로 갈애는 태어남(再生)의 근본 원인을 이룹니다. 이러한 이유로 세존께서는 다시 태어남을 가져오는(ponobhavikā)원인으로 갈애를 지목하셨습니다. 이는 세존께서 내생의 삶을 가르치기 위해 첫번째 법문에서 사용하신 단어들입니다. 이러한 명백한 가르침에도 불구하고‘세존께서는 오직 금생만을 가르치셨지 내생에 대해서는 말씀이 없으셨다.’고 주장하는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람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단멸론(斷滅論 uccheda-vāda)18와 결부시키려하는지는 확신할순 없지만
아무튼 대단히 잘못된 시도라고 한마디 해야 겠습니다! 사실은 팔정도를 닦지 못하거나 닦더라도 완전하게 닦지 않아서
갈애가 지속되는 한 갈애는 새로운 생의 원인역활을 계속 해나갈것입니다.
팔정도를 완벽히 닦아서 아라한의 도과를 성취하게 되면 갈애는 완전히 소멸되어 더 이상의 재생이 없습니다.
그래서 성자들이 부처님이나 아라한으로써 얻은 깨달음을 반조하실때에는 다음과 생각이 일어납니다.
‘Ayam antima jāti, natthi dani ponabhavoti, 이것이 내 마지막 생이고 더 이상의 태어남(再生)은 없다.
’이러한 반조는 또한「초전법륜경」의 뒷 부분에도 있습니다. 그러한 반조는 갈애가 완전히 근절되지 않는다면
끊임없이 재생이 일어남을 피할수 없음을 명확하게 보여줍니다.
어떻게 이 갈애가 끊임없이 재생을 일으키는지는 몇가지 이야기를 통해서 밝혀질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밝혀주는 이야기가 무수히 많지만 우리는 빠알리 주석서에서 추려낸 세가지 이야기와 최근 시기의
네 다섯가지 이야기를 인용하는 것으로 충분할것입니다.
5. 범천계에서 밝게 빛나고 돼지 우리에서도 즐거워 한다
한 때 세존께서 라자가하(王舍城 RāJgaha)로 탁발을 나가셨습니다. 세존께서는 한 어린 암돼지를 보시고는
미소를 지으셨습니다.부처님의 치아앞으로 하얀 광명이 내비치는 것을 본 아난다(Ānandā)존자는 부처님께서
미소지으셨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아난다 존자는 이렇게 여쭈었습니다.“세존이시여, 무엇 때문에 미소를 지으십니까?”
세존께서는 어린 암퇘지를 가리키며 말씀하셨습니다.“저 어린 암돼지가 보이느냐?
저 암돼지는 까꾸산다 부처님(拘留孫佛)19의 교법이 행해지고 있을때 인간세계에서 한 젊은 여인이었다.
그녀는 죽어서 한 승원의 급식소 근처에 사는 암탉으로 재생했다.
그 후 그 작은 암탉은 독수리에게 희생되었다.
하지만 암탉은 바로 그 직전 명상주제를 쥔 비구 수행자가 읆조린 게송을 우연히 듣고
선한 마음을 일으켰다. 이러한 공덕의 과보로 그 작은 암탉은 왕가의 웁바리(Ubbarī)라는 왕녀로 재생하게 되었다.
웁바리 왕녀는 나중에 가정을 떠나 떠돌이 수행자<流行者>20가 되었다.
떠돌이 수행자들의 거처에 머물던 그녀는 어느날 우연히 변소의 구더기들을 응시하게 되었다.
그 벌레들은 벌레가 들끓는 시체의 혐오스러움에 대한 관찰이나 흰 대상에 대한 관찰이라는
명상의 대상이 되어주었고 그에 힘입어 초선(初禪)을 얻을수 있었다.그리고 그녀는 죽어서
초선천(初禪天)의 범천으로 재생하였다. 범천계에서 목숨이 다하고서 인간계의 부유한
사람의 딸이 되었다가 마지막에는 지금의 돼지로 태어났다.
나는 이 모든 사실들을 보았기 때문에 미소지은것이다.”
이 다양한 존재로 반복되는 재생의 이야기를 들은 아난다존자와 다른 비구들은 크게 놀랐고 종교적인 감동에 몸을 떨었습니다. 세존께서는 탁발을 잠시 멈추시고 길에 서신채 여섯개의 게송으로 된 법을 설하시기 시작했습니다. 첫번째 게송은 다음과 같습니다.
Yathapi mule anupaddove dalhe,
chinnopi rukho punareva rūhati
evaṃpi taṇhānusaye anuhate
nibbattati dukkhamidam punappunaṃ
그 뿌리가 손상되지 않고 굳건하면 잘린 나무라도 다시 자라나듯
갈애의 잠재성향이 뽑히지 않는 한 이 괴로움은 계속해서 생겨난다.
(Dhp.338)
이 게송이 전하는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웁바리왕녀였을 때 그녀는 세상을 버리고 떠돌이 수행자가 되었습니다.
명상을 닦아서 그녀는 억압에 의한 버림(vikkhambhana-pahāna)21을 통해 중간 단계의 번뇌22(pariyutthana-kilesa),
즉 마노의 문(意門)에 관능적 생각으로 표출되는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慾愛)만을 몰아내거나 없앨 수 있는
초선(初禪)을 얻었습니다. 억압에 의한 버림으로 선은 일정시기에 일정한 한도까지만 번뇌를 몰아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초선을 얻었을 때 그녀는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를 몰아낼 수 있었고 나중에 범천계로 갔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인간세계의 부유한 사람의 딸로 다시 태어났고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慾愛)는 성스러운
도로 근절되지 않았기 때문에 다시 일어났습니다. 물론 존재에 대한 갈애(有愛)는 그녀가 초선을 얻었을때에도
계속 남아있었습니다.그래서 잠재성향의 번뇌들이 완전히 근절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는 범천계에서 인간세계로
내려왔다가 돼지가 된것입니다.
갈애가 계속 남아있는 한 이러한 식으로 재생은 여러가지 존재로 끊임없이 일어납니다.23
범천계에서 돼지의 존재로 내려온 이 이야기와 관련하여 옛 사야도들은 이러한 금언을 남겼습니다. ‘범천계에서 그녀는 밝게 빛났고 돼지우리에서도 그녀는 즐거워했다. ’그러나 범천계에서 곧바로 돼지나 다른 동물로 태어나거나 아귀계, 지옥으로 직행할수는 없습니다. 이전에 얻었던 선에 가까이 해있는 근접 명상(upacāra-bhāvanā)의 힘으로 재생은 오직 사람이나 천신세계에서만 일어납니다. 앞서의 어린 암퇘지는 부유한 사람의 딸로써 사람의 삶도 거쳤습니다. 그녀가 부유한 사람의 딸로 살다가 나중에 돼지의 존재로 떨어진 것은 사람으로 있을 때 마땅히 존경했어야 할 분들에게 오만방자한 태도를 보임으로써 지은 악업때문이었음이 거의 분명합니다.
어린 암퇘지는 죽어 일반적으로 미얀마의 따톤(Thaton)지방으로 추정되는 수완나부미(金地國 Suvaṇṇabhūmi)24의 왕족으로 태어났습니다. 하지만 어떤 학자들은 불기 1500년경의 데와빨라(Devapala)왕에 의해 만들어진 청동비문을 근거로 수완나부미가 인도네시아의 수마뜨라섬이라고 추정합니다.
수완나부미의 왕녀에서 그녀는 인도 바라나시(Bārānasi)의 한 여자로 태어났습니다.그리고 나서 뭄바이(Mumbai) 남동쪽의 와나와시(Vanavāsi)의 한 여자로 태어났습니다. 거기서 죽어서 뭄바이 북서쪽의 숫빠라까(Suppāraka)라는 항구도시의 말상인 딸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그 다음엔 인도반도의 최남동부의 까위라(Kāvīra) 항구의 선주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이곳은 예전에 다밀라(Damila)라고 불렸던 타밀사람들이 거주하는 해안지방입니다. 그 삶을 다하고 그녀는 지금의 스리랑카 아누라다푸라(Anurādhapura)의 정부관리 집안에 태어났습니다. 그녀의 다음생은 아누라다푸라의 남쪽마을 복깐따(Bhokkanta)의 수마나(Sumana)라고 하는 한 부유한 사람의 딸이었습니다. 그녀는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수마나라고 불리웠습니다. 나중에 그녀의
아버지는 마을을 떠나 디가와삐(Dīghavāpi)지방의 마하무니(Mahāmuni)마을에 정착하였습니다.
하루는 둣따가미니(Duṭṭhagāmaṇi)왕의 장관인 라꾼다까 아띰바라(Lakundaka Atimbara)가 어떤 볼일이 있어 마하무니 마을을 우연히 방문하게 되었는데 묘령의 수마나 아가씨를 보고는 그만 한눈에 쏙 반해 버렸습니다. 장관은 그녀와 성대한 의식으로 결혼식을 치루고는 자기 마을 마하푼나로 그녀를 데려갔습니다.
따웅손(Taungsun)승원에 머물던 마하 아누룻다(Mahā-Anuruddha)존자가 탁발을 위해 그녀가 사는 마을을 우연히 찾아왔습니다. 존자가 수마나의 저택 문앞에서 시주음식을 기다리고 있는 동안 그녀를 보고는 비구도반들에게 이렇게 외쳤습니다.
“비구들이여,이 얼마나 놀랍고 경이로운 일이요! 세존당시의 그 어린 암퇘지가 이제 라꾼다까 아띰바라장관의 부인이
되어 있구료!”
이 감탄의 말을 들은 장관의 부인 수마나에게 태어남을 기억하는 지혜(jātissara-ñāṇa)25가 생겼습니다. 이 지혜로 그녀는 자신이 살아온 전생들을 기억해낼 수 있었습니다. 그 결과 그녀는 윤회의 바퀴에서 계속해서 태어난다는 생각에 대한 두려움으로 몸을
떨었습니다. 장관인 남편에게 허락을 받고 그녀는 비구니 승원으로 가서 비구니가 되었습니다. 수계식 후 그녀는 띳사 대사원(Tissa-Mahāvihāra)26에서「염처경」을 들었습니다.
그 경의 말씀대로 사념처 수행을 닦아서 도과의 첫번째 단계인 예류자(sotāpanna)가 되었습니다.
둣따가미니가 왕위에 올랐을 때 그녀는 고향마을 복깐따로 되돌아와서 깔라 대사원(Kalla-Mahāvihāra)에서
「독사경(毒蛇經 Āsīvisopama Sutta)」(S.197)27을 듣고는 네번째 과를 얻어 번뇌(漏 āsava)와 애욕에서
완전히 벗어난 아라한이 되었습니다.
수마나가 살아온 열두생을 사려깊고 유심하게 살펴본다면 종교적인 감동이 일어날것입니다. 까꾸산다 부처님때의 젊은 여인이 죽었을 때 그녀는 가족과 재산과 자기 몸뚱아리를 남겨둔채 떠났습니다. 유족과 친구들은 그녀의 죽음을 비통해하였을 것입니다.그리고 그녀는 암탉이 되었습니다. 사람이 암탉으로 재생한다는 게 얼마나 무시무시한 생각입니까 그 암탉도 또한 가족과 친구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암탉은 독수리에게 붙잡혀 부리로 맹렬하게 쪼여져서 목이 잘리우는 참혹한 죽음을 맞이 하였습니다. 하지만 명상에 대한 게송을 들은 공덕으로 그녀가 왕녀로 태어난 것은 참으로 위안스러운 일입니다. 암탉은 물론 법(Dhamma)을 알지는 못했지만 깨끗한 마음으로 게송을 경청하였기 때문에 어떠한 공덕을 얻었을 것이고 그로 인해 왕녀로 재생하게 되었습니다.
이렇듯 법문을 듣는 것은 참으로 유익하고 과보가 큰것입니다.
왕녀의 삶을 살고 난뒤에 선정을 성취하여 범천이 된것은 만족스러운 일입니다. 또 범천계에서 내려와 인간세계의 부유한 가정에 재생한 것도 만족스럽습니다. 하지만 가족과 친구, 재산을 마지못해 뒤로 남겨둔채 암퇘지로 재생했음을 알게 되면 너무나도 가슴이 매어집니다. 범천계에서 인간세계로 내려와서 다시 더 낮은 돼지의 축생계로 떨어진다는 생각은 참으로 무시무시한 것입니다. 성스러운 도를 확립하지 않은 한 어느 누구도 악처(apāya)에 떨어질 수 있기 때문에 이 사실은 놀라움과 종교적인 감동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할 것입니다. 세존께서는 비구들에게 종교적인 감격을 불러일으키고 최선의 노력을 다해 법(Dhamma)을 닦도록 권고하려는 의도로 암탉의 연속된 삶들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어린 암퇘지가 어떻게 죽었는지는 경전에 나와있지 않지만 오늘날처럼 사육자에 의해 도살되었을거라고 추정해볼 수 있습니다. 어린 암퇘지는 자신의 죽음을 비통해하는 가족과 친구들을 뒤로 남겨 놓았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녀가 나중에 수완나부미에서 아누라다푸라까지 줄곧 여섯생을 사람으로 태어난 것은 위안스러운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들 각 생에서 생애를 마감할때마다 슬픔, 비탄, 정신적 고통에서 오는 크나큰 괴로움이 그녀와 그녀의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있었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녀가 마지막에 비구니인 수마나 장로니가 된 것은 이 이야기에서 가장 고무적인 부분입니다.
그녀가 한 생에서 또 다른 생으로 연속해서 재생한 원인은 갈애, 즉 집제(集諦)때문이었습니다. 갈애를 아직 제거하지 못한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한 생에서 죽어 또 다른 생으로 재생하는 윤회를 거치게 됩니다. 그래서 갈애, 즉 집제(集諦)를 제거하기 위해 성스러운 도의 수행을 확립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수마나 장로니는 처음에「염처경」의 설법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사념처수행법에 따라 알아차림(sati)을 닦아서 흐름에 들어선 이, 예류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서「독사경」을 듣고서 수행에 더욱더 열심히 매진하여 아라한과를 얻은 여성 아라한이 되었습니다. 그녀에게서 갈애, 다른 말로 해서 일어남(集 samudaya)은 완전히 제거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녀는 더 이상의 재생이 없고 완전한 열반(般涅槃)에 든뒤에 평화를 누릴것입니다.
그리하여 수마나 장로니는 도반들에게 현생의 생명력인 수명의 상카라(āyu-saṅkhāra)28가 다하고 나면 완전한 열반(般涅槃)에 들것이라고 선언하였습니다.그러자 비구와 비구니 도반들은 그녀에게 전생이야기를 해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 “나는 까꾸산다 부처님 당시에 한 여인이었습니다. 거기서 죽어 암탉이 되었습니다. 독수리에게 목을 짤리우고 잡아먹혔습니다.그리고 인간계에서 왕녀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복깐따 마을의 마지막 생까지의 자신의 전생들을 계속해서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녀는 다음과 같은 말로 끝을 맺었습니다. “그렇게 나는 각각의 생에서 삶의 오르내림과 부침(浮沈)을 겪으면서 열두 생을 살아왔습니다. 이 마지막 생에서 나는 윤회에 염증을 느껴 비구니가 되었고 마침내 아라한과를 얻었습니다. 나는 여러분들과 같은 고결한 비구와 비구니 모두에게 알아차림(sati)으로 정진해서 계· 정· 혜를 완벽하게 확립할것을 간곡히 부탁합니다. ”그렇게 말하고는 우바새, 우바이, 비구, 비구니로 이루어진 사부대중29의 마음속에 종교적인 감격을 불러 일으키며 입멸(入滅)하였습니다. 이 어린 암퇘지 이야기는「법구경(Dhammapada)」주석서(DhA.iv.46)에 모두 나와있습니다.
6. 수마나 천인 이야기
비록 수행자가 집제(集諦)인 갈애를 없애기 위해 열심히 명상을 닦아서 도의 지혜(magga-ñāṇa)를 완벽하게 개발하기전까지도 갈애는 여전히 재생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수마나 천신의 이야기에서 잘 드러납니다.
부처님 당시에 한 젊은이가 부처님의 교법에 신심을 내어 출가하여 다섯 안거(Vassa)동안 은사스님(upajjhāya)을 모시고 지냈습니다. 그는 은사스님에 대한 크고 작은 모든 의무들을 수행하였고 비구를 위한 두가지 계목(戒目)을 철저히 배웠습니다. 그는 또한 크거나 사소한 계율을 파하는 것으로부터 자신을 청정하게 하는 과정을 통달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자신의 선택에 따라 명상주제를 받아서는 숲속의 외진곳으로 가서 부단히 명상수행에 매진하였습니다.
그는 명상을 아주 열심히 닦았습니다. 세존께서 휴식하고 잠을 자도 된다고 한 야밤에도 그는 수행을 계속하였습니다. 그렇게 밤낮으로 매진하고 영양가있는 음식을 충분히 섭취하지 못하여 쇠진해져 갑자기 칼에 베이는 듯한 고통에 업습당하여, 마비성 일격으로 척추신경이 끊어져서 즉사하였습니다. 그는 경행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비구의 의무를 수행하는 도중에 사망했다고 일컬어집니다.
주석서에 따르면 비구가 경행대를 오르락 내리락하며 경행하는 중이나 기대는 기둥에 기대서있거나 경행대 맨위에 머리위에 가사를 두겹으로 포개어 앉거나 누워있을 때 사망한다면 그는 ‘의무를 다하다가 죽었다’라고 칭해집니다. 만약 비구가 설법, 특히 윤회에서 벗어남을 주제로 설법을 하던중 사망한다면 또한 ‘의무를 다하다 죽었다.’고 칭해집니다.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비구의 이야기는 경행대를 오르락 내리락하며 경행에 전념하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가「염처경」의 가르침에 따라 몸의 자세들의 정신(nāma)와 물질(rūpa)를 관찰하는 동안에 사망했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비록 그가 명상을 닦는데 대단히 정진하였지만 아라한의 도를 얻는데 필요한 바라밀의 지원을 아직 구족하지 못했기 때문에 아라한 도를 얻지 못한채 세상을 뜨고 말았습니다.
아라한의 도를 얻지 못하면 갈애를 완전하게 제거할 수 없습니다. 이 비구는 예류자의 과위에도 아직 이르지 못했었음은 나중에 명확하게 밝혀질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다시 태어남을 가져오는(ponobhavikā) 갈애 때문에 삼십삼천(三十三天)에 재생하였습니다. 명상을 닦아서 얻은 공덕의 과보로 웅장한 하늘의 궁전이 그를 기다렸습니다. 마치 잠에서 방금 깨어난 것처럼 천신의 성장(盛裝)을 차려 입은 찬란한 천신으로 궁전 문앞에 나투었습니다.
바로 그 때 궁정의 주인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천 여명의 천녀들이 소리쳤습니다. “우리들 주인님이 오셨다 그분을 환영하도록 하자 ”천녀들은 그를 에워싸고 손에 악기를 들고서 그를 기쁘게 환영하였습니다. 하지만 정작 궁전의 주인인 천신은 새로운 세계에서 새로운 존재로 태어났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아직도 인간세계의 비구라는 생각속에 있었습니다. 천녀들을 보고는 자기 승원을 찾아온 여성방문객으로 생각하였습니다.그는 맨 왼쪽 어깨를 상의로 가리고 눈을 아래로 깔고 아주 근엄하고 조용한 자세를 취하며 앉아있었습니다.
새로온 천신이 전생에 비구였었음이 틀림없다고 곧바로 알아차린 천녀들은 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인님, 이곳은 천신의 세계입니다. 비구의 계목(戒目)을 지키실때가 아니고 천상의 즐거움을 누리실 때입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근엄한 침묵과 위엄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이 천신은 천신계의 천신이 되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우리가 환락을 배풀어 그를 환영하여 천신이 되었다는 사실을 똑똑이 알도록 해주자.” 천녀들은 이렇게 말하고는 악기를 연주하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천신은 여성 방문객들이 자신의 숲속 거처까지 와서 실없는 환락에 빠지고 있다고 생각하며 더욱 더 조용한 성품을 추스리고 위엄있는 엄숙함을 유지하였습니다.
그러자 천녀들은 몸크기의 거울을 갖다가 천신앞에 놓았습니다. 거울에 비춘 자기의 모습을 보고는 비구의 생을 마감하고 천상계에 재생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수마나 천신은 크게 당황하여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천상계에 재생하려고 명상을 닦은게 아니었다. 내 목표는 가장 유익한 아라한과를 얻는 것이었지만 지금의 나는 금메달 우승컵을 노리고 권투경기장에 들어섰지만 오직 무우 다발만을 받은 권투선수와도 같다.’ 극도로 마음이 어지러워진 그는 다음과 같이 생각했습니다.
‘천상의 즐거움 따위는 쉽게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정등각자께서 세상에 계시는 시기는 아주 드문 경우이다.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성스러운 도를 얻는 것이 어느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천상의 즐거움속에 딩굴게 되면 부처님을 만날 기회를 잃어버릴 위험이 있다. ’천신은 천궁에 들어가는 수고를 하지 않고 비구였을때 지켰던 절제의 계를 고스란히 지키며 서둘러 부처님께로 갔습니다. 천녀들도 또한 천신을 보지 못할까봐 그를 쫒아갔습니다. 부처님 앞에 이르자 천신은 다음과 같이 말씀드렸습니다.
“세존이시여, 수많은 천녀들이 노래와 합창에 빠져 있고 무수한 야차와 도깨비, 귀신들이 출몰하는 그 동산에 찾아오는 천신들로 하여금 바보스런 행동을 하도록 하기 때문에 어리석음의 정원(mohavana)으로 불리는 기쁨의( nandavana)동산을 어떻게 피하고 비껴갈 수 있는지요?”
천신이 여기서 천녀들을 야차와 도깨비로, 기쁨의 동산을 어리석음의 정원이라고 말한 이유는 그가 위빠사나 명상에 쏟은 강한 정진으로 감각적 쾌락에 대해 혐오하는 마음상태에 여전히 있었기 때문었습니다. ‘어떻게 비껴갈 수 있는지요?’ 라는 천신의 질문에 대한 주석서의 해석은 천신은 세존께 아라한과에 도달케 하는 위빠사나에 대한 지침을 청한 것이라고 합니다.
부처님은 천신과 관계된 모든 상황을 헤아려보고는 다음의 세가지 게송으로 팔정도를 가르치셨습니다.
1. Ujuko nāma so magga abhayā nāma sā disā
ratho akuJno nāma dhammacakkehi samyuto.
“피난하기를 갈망하는 천신아. 신속히 피난하기 위한 곧은 도는 바로 네가 비구였을 때 이미 닦았던 위빠사나의 팔정도이다.”
오직 ‘곧은 도는 바로 그 도이다.’ 라는 게송의 첫번째 구절에 대해 우리는 여기 지금 이자리에 있는 청중들을 위해 위와 같은 해설을 덧붙였습니다. 원래 그대로의 번역은 청중들이 매우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명상에 매진했던 승원에서 곧바로 나온것처럼 보이는 천신에게는 그 의미하는 바가 너무나 분명했습니다.
주석서의 해설은 다음과 같습니다. “아직 계가 확립되지 않은 사람에게 명상을 닦게 할 때 세존께서는 항상 이렇게 충고하셨다. ‘너의 계를 청정히 하고, 알아차림(sati)과 집중을 개발할것이며, 업(kamma)과 그 과보에 대한 견해를 바르게 하라. 그렇게 처음에 수행자가 이러한 기초적인 수행을 굳건히 확립하도록 지도하셨다.
이미 명상에 매진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아라한의 도와 아주 근접한 위빠사나만을 가리키셨다. 그 천신은 이미 명상을 닦았고 그의 계는 여전히 청정하였다. 그는 이미 성스러운 도를 선도하는 선구자가 되는 위빠사나 도를 닦았기 때문에 이제 닦아야할 것은
오직 성스러운 도 뿐이었다. 그래서 세존께서는 그에게 위빠사나를 지도하기 위해 세가지 게송을 가르치신 것이다.”
이 주석서 해설에서 그의 계는 비구의 생에서 천신의 생으로 넘어가고 난 뒤에도 여전히 청정하였다는 사실을 잘 알아야 합니다. 이는 살생, 도둑질, 성관계등과 같은 어떠한 계율도 범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여전히 그의 계를 청정히 유지해 나갔습니다. 그래서 계를 지키겠다는 공식적인 서약없이도 범하지 않아야할 악행을 삼간다면 그 계는 청정하게 유지될 수 있음을 이해해야 합니다. 이 게송들은 또한 위빠사나를 가르쳤다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앞서 설명한 대로 ‘천녀들로 가득한 천상계의 기쁨의 동산30에서 신속히 피난하는
가장 좋고 가장 곧은 도는 그가 비구였을 때 걸었던 위빠사나 도입니다.’
위험없는 피난처를 묻는 다음 질문에 대해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위험없는 피난처란
네가 비구로 있을 때 얻고자 했던 열반이다.” 이는 그가 열반을 얻을때까지 정진해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어떠한 탈것을 타고 가야 하는지에 대해 세존께서는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조용하게 피난하려면
신체적 정진과 정신적 정진이라는 두 바퀴가 달린 조용한 수레가 필요하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신체적인 모든 동작들을 알아차리는 것과 관련된 정신적 노력은 마음부수의 정진(cetasika-viriya)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가고, 서고, 앉는 몸 동작들을 알아차릴 때
각각의 자세들에서 몸을 지탱하는데 필요한 몸의 노력을 신체적 정진(kāyika-vīriya)이라고 합니다.
누위 있을 때의 명상은 신체적 정진이 아니라 마음의 정진만이 관련됩니다.
신체적 정진과 정신적 정진의 바퀴로 된 이륜차를 탈것을 권고받았기에 여기서는
걷고, 서고, 앉는 모든 동작들을 주위깊은 알아차림을 요구하는 위빠사나 명상을 뜻한다고 생각해야 할것입니다.
그래서 신체적 정진과 마음의 정진이라는 두 개의 바퀴로 된 위빠사나 도의 웅장한 수레를 타기위해서는
오르락 내리락 경행을 할 때 주의깊은 알아차림에 매진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gacchanto vā gacchāmiti pajānāti, 걸을 때 걷고 있음을 꿰뚤어 안다.’라는
「염처경」의 가르침대로 ‘걸음’‘일어남’ 앞으로 발을 가져다 놓음’‘발이 떨어짐’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렇게 정진하는 동안 집중이 강해지면서 수행자는 매번 알아차리면서 뻣뻣함과 움직임을 일으키는 물질(rūpa)과 그것을 알아차리는 정신(nāma)을 구별하게 됩니다. 그는 이렇게 알게 됩니다. ‘가고자 하는 의도가 있기때문에 가는 신체적 과정이 일어난다. 알려는 대상이 있기 때문에 앎이 있다.’ 수행이 더 진전되어 감에 따라 그러한 현상의 일어남은 잠시이며 가고자하는 의도, 가는 신체적 동작, 알아차리는 마음뒤에 오는 그 사라짐을 마치 자기 손바닥 안에 쥔것처럼 확연하게 알게 됩니다. 잠깐 일어났다가 곧바로 사라지는 것는 항상하지 않는 것이라고, 끊임없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은 참으로 무서운 괴로움이라고 명확하게 깨닫게 됩니다. 수행자는 또한 현상들이란 누구의 의지도 따르지 않고 자기 저절로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어느 누구의 통제를 받지 않는 무아(anatta)임을 명확하게 알게 됩니다. 그리고 나서 가끔 서거나 앉아있을때 주의깊은 알아차림을 이어나가야 합니다.
여기서 말한 조용한 수레는 고대의 말이 끄는 마차를 지칭합니다. 수레는 빈채로 있으면 소음이 없지만 많은 승객이나 무거운 짐을 싣게 되면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기 쉽습니다. 하지만 ‘도의 수레’는 어떠한 소리도 내지 않고 무한정으로 승객들을 실어나를 수 있습니다. 때로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는 동안 ‘위빠사나 도’ 의 마부가 몰아 최종 목적지인 열반으로 소음없이 데려다 주는 이도 도의 수레에 팔만 사천명에 달하는 승객들이 탑승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이 수레는 소음 없는 수레로 찬사를 받았습니다. 부처님께서 천신에게 주신 암시는 바로 이 교통수단으로 천녀들이 알지 못하게 조용히 피난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2. Hīri tassa apālambo, satyassa parivāranaṃ,
dhammahaṃ sārathiṃ byuhi, sammādiṭṭhi pure Jvaṃ.
악행을 저지르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무서워 하는 마음인 히리(hiri)는 수레가 움직일 때 승객들이 뒤로 나자빠지지 않게 하는 의자의 등받이 역할을 한다. 도(magga)의 수레바퀴는 양심(hiri)과 수치심(ottappa)이라는 훌륭한 등받이를 가지고 있다.
명상을 닦는 수행자는 주의깊은 알아차림(sati)에서 놓쳤을 몇몇 대상들과 관련해서 행여나 불선한 마음이 일어날까봐 역겨워하고 두려워 합니다. 이것은 마치 상쾌하고 깔끔한 목욕을 하고 나서 똥을 만지는 것에 느끼는 역겨움과도 같은 것입니다. 불선한 마음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려는 양심적인 걱정(불안)과 불선한 마음에 대한 역겨움을 히리(hiri), 즉 양심, 부끄러워하는 마음이라 합니다. 또한 불선한 과보를 가져오는 악행을 저질러 윤회에서 벗어나는 것을 방해하는 불선한 마음에 대한 두려움도 있습니다. 악행과 그 불선한 과보에 대한 두려움을 오따빠(ottappa), 즉 수치심이라고 합니다.
이 양심(hiri)과 수치심(ottappa)때문에 수행자는 공경의 자세로 어떠한 것도 놓침없이 모든 신체적 정신적인 현상을 알아차리는 일에 매진합니다. 이러한 식으로 도(magga)는 각 지나치는 순간마다 닦아져 나갑니다. 이는 수레의 등받이가 승객들이 뒤로 나자빠지는 것을 방지하고 자세를 유지하게 하는 방식과도 같습니다. 바로 이 때문에 세존께서는 양심(hiri)과 수치심(ottappa)를 위빠사나 도의 수레의 등받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세존께서는 어떻게 알아차림(sati)이 도의 수레를 보호하는 덮개와 차양과 같은지를 설명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방어하는 차양을 갖춘 수레는 날라오는 돌이나 막대기의 위험으로부터 보호될 수 있습니다. 정신적· 신체적인 모든 현상을 일어나는 대로 알아차리면 불선한 행동을 범하는 위험으로부터 수행자가 안전하게 보호됩니다. 그래서, 몸등의 관찰과 같은 사념처는 도의 수레를 보호하는 덮개라고 일컫는 것입니다.
세존께서는 계속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성스러운 도와 관련된
바른 견해(正見)를 수레를 모는 마부인 위빠사나의 바른 견해가 선도하는
성스러운 도에 대한 바른 견해라고 일컫는다.”
➀ 업이 자신이라는 바른 견해(kammasakata-sammādiṭṭhi)
➁ 선의 바른 견해(jhāna-sammādiṭṭhi)
➂ 위빠사나의 바른 견해(vipassanā-sammādiṭṭhi)
④ 도의 바른 견해(magga-sammā-diṭṭhi)
⑤ 과의 바른 견해(phala-sammādiṭṭhi) ⑥ 반조의 바른 견해(paccevekhaṇa- sammādiṭṭhi)의 여섯가지 바른 견해중
⑤ 과의 바른 견해(phala-sammādiṭṭhi)는 도의 결과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⑥ 반조의 바른 견해(paccevekhaṇa-sammādiṭṭhi)는 도와 과를 얻은뒤에 일어나는 반조하는 지혜입니다.그렇기 때문에
⑥ 을 개발할 특별한 노력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➀ 업이 자신이라는 바른 견해(kammasakata-sammā-diṭṭhi)는 명상수행을 시작하기 전에 확고히 다져야만 합니다.
➁ 선의 바른 견해(jhāna-sammādiṭṭhi)는 위빠사나의 기초인 심청정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성스러운 도와 관련된 바른 견해의 증장을 위해 개발되어야 하는 가장 가까운 지혜는
➂ 위빠사나의 바른 견해(vipassanā-sammā-diṭṭhi)입니다.
➂ 위빠사나의 바른 견해(vipassanā-sammā-diṭṭhi)가 완전히 개발되면 성스러운 도의 지혜 즉
④ 도의 바른 견해(magga-sammā-diṭṭhi)가 자연히 생깁니다.이는 마치 군경의 호위대에 의해
도로가 깔끔이 정리되고 나서 왕의 행렬이 오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➂ 위빠사나의 바른 견해(vipassanā-sammā-diṭṭhi)가 나아가고, 그 뒤에 성스러운 바른 견해(ariya -sammā-diṭṭhi)가
뒤따른다고 일컬어집니다. 위빠사나 명상에 매진하고 있는 동안 위빠사나의 지혜는 다른 도들을 닦기 위한 길로 이끕니다. 성스러운 도를 얻는 순간 도의 지혜는 다른 도들에 이릅니다.이러한 이유로 부처님은
➂ 위빠사나의 바른 견해(vipassanā-sammā-diṭṭhi)와 성스러운 도의 바른 견해(ariya-magga-sammā-diṭṭhi)를
수레의 마부라고 하셨습니다.
마지막 게송은 다음과 같습니다.
3. Yassa etādisanyānam, Itthiyā purisassa vā,
sa ve etena, yanena nibbānasseva santike.
‘이 팔정도의 수레를 가진 남자와 여자는 수레의 힘으로 열반에 도달할 수 있다.’
이 마지막 게송에 따르면 팔정도라는 도의 수레를 가진 사람은 성별과는 무관하게 열반에 도달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열반에 이르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위빠사나 도에 기반한 성스러운 도를 닦아야만 한다는 것은 너무나 명확합니다.
이 세간계에서 어떤 교통수단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것을 이용하여 원하는 목적지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교통수단을 지니지 못한채 그저 그 교통수단의 기계구조에 대한 지식만 가지고 있어서는 어느 곳에도 이르지 못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다양한 형태의 정신(nāma)과 물질(rūpa), 그리고 각기 다른 도(magga)들을 어떻게 줄줄히 열거하는지만 알아서는 절대 열반에 이를 수 없습니다. 정신과 물질이 실제로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여 위빠사나 도의 수레를 가지게 되고 팔정도의 수레를 타야만 열반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앞에서 설명한
세가지 게송을 다음과 같이 요약합니다.
1. 곧은 길이 도이고, 그 목적지는 위험이 없는 열반이다.
2. 신체적 정진과 정신적 정진의 두 바퀴를 갖추어, 도의 수레는 조용하다.
3. 양심(hiri)과 수치심(ottappa)은 등받이 역활을 하고 알아차림(sati)는 수레의 덮개와 차양을 이룬다.
4. 위빠사나의 지혜가 선도하는 도의 지혜는 수레를 끄는 마부이다.
5. 그러한 수레를 가진 사람은 남자거나 여자일 수 있다.
6. 수레에 편안하게 타고서 열반에 이른다.
부처님께서는 세가지 게송을 가르치고 나서 우리가 도제(道諦)의 장에서
다시 논하게 될 사성제(四聖諦)에 대한 법문을 하셨습니다.
수마나 천신은 법문을 듣는 동안 전생에 닦았던 명상수련을 떠올렸습니다. 비록 불퇴전의 노력으로 명상을 닦았음에도 불구하고 비구로써 높은 지혜를 얻지는 못하였지만 더러움(不淨)이 없는 몸을 지닌 천신으로 그는 첫번째 단계의 도과를 얻고 열반을 깨닫기 전까지 연이은 위빠사나의 지혜들을 단계적으로 곧바로 닦아서 흐름에 들어선 이 예류자가 되었습니다.
이 수마나 천신 이야기가 절실히 느끼게 하는 요점은 비록 비구가 위빠사나 명상을 열심히 닦았더라도 갈애를 제거할 수 있는 성스로운 도를 아직 얻지 못했다면 집제(集諦)인 갈애는 죽은뒤에 천신의 새로운 생으로 재생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또한 어떻게 성스러운 도를 닦을 수 있는지와 천신으로써 어떻게 높은 지혜를 쉽게 얻을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이 이야기에서 드러나는 또 한가지 사실은 한 개인이나 대상에 대한 취착이 남아있으면 존재에 대한 갈애(有愛 bhava-taṇhā)로 그 사람이나 대상의 가까이에 다시 태어난다는 점입니다. 대상에 대한 취착으로 어떻게 그 대상의 가까이에서 새로운 생으로 태어나는지는 자신의 가사에 강하게 집착하는 마음을 지닌채 죽은 결과 그 가사에 붙어사는 몸의 이로 재생한 띳사비구의 유명한 이야기로 잘 드러납니다.
우리는 이제 아내에 대한 취착으로 어떻게 뱀, 개, 소로 다시 태어났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7. 아내에 대한 집착으로 뱀, 개, 소로 다시 태어나다
스리랑카의 한 마을에 자기 형수와 불륜을 맺은 남자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 여자는 법적인 남편보다는 정부(情夫)에게 더 열정적으로 매달렸습니다.그래서 그녀는 정부에게 자기 형을 죽이라고 부추켰습니다. 그러자 남자는 이렇게 반대하였습니다. 닥쳐 그 따위 말 두번 다시 하지 마 하지만 여자가 세번씩이나 계속해서 그런 나쁜 제안을 반복하자 정부가 물었습니다. “어떻게 그 일을 착수할수 있지?” 여자는 대답했습니다.“도끼를 가지고 가서 큰 백화채나무 근처의 강가에서 그를 기다리세요. 내가 남편을 그리로 보낼께요.” 그러자 곧 남자는 그곳으로 가서 나뭇가지 사이에 몸을 숨긴채로 자기 형을 기다렸습니다.
남편이 숲에서 일을 마치고 돌아오자 아내는 애정을 보이는 척하면서 다정하게 남편의 머리를 빗어주며 말했습니다. “여보, 머리 좀 감으셔야 겠네요. 너무 더러워요. 큰 백화채 나무근처의 강가에 가서 머리를 감고 오시는게 어떻겠어요” 그러자 사내는 내 아내는 나에게 애정이 너무나 자상해라고 행복감에 젖어 강가의 멱감는 곳으로 갔습니다. 그가 머리를 감으려고 머리를 낮추고 있을 때 동생이 숨어있던 곳에서 나와 도끼로 잔인하게 목을 베었습니다.
죽은 사내는 아내에 대한 끌리는 애착으로 푸른 뱀으로 재생하였습니다. 아내에 여전히 애착하고 있었기 때문에 뱀은 집의 천정위에서 그녀의 몸위로 떨어지곤 했습니다. 뱀은 전남편이었음에 틀림없다고 확신하고는 남을 시켜서 죽여 없앴습니다. 뱀에서 죽은뒤에도 전 아내에 대한 애착은 여전히 강하게 남아있었었기 때문에 옛날 집의 개로 재생하였습니다. 개로 태어나서도 여진히 전 아내에 집착하고 있었기 때문에 여자가 어디를 가든, 심지어 숲에 갈때에도 따라갔습니다.사람들이 조롱하는 말을 하였습니다. 개를 데리고 사냥꾼여자가 외출하는군 대체 저 여자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여자는 정부에게 다시 말해 그 개를 죽이게 했습니다.
그의 애착은 여전히 강렬한 채 남아있었기 때문에 같은 집의 송아지로 재생하였습니다. 어린 송아지 또한 여자가 가는 곳은 어디든지 따라다녀서 또 다시 사람들의 비웃음과 조롱을 샀습니다 저 것좀 봐 소치기가 나왔다, 대체 저 여자의 소들이 가서 풀먹는 목초지가 어디일까 여자는 또 다시 남자를 시켜 어린 송아지를 죽였습니다. 하지만 전 아내에 대한 그의 집요한 애착 때문에 이번에는 그 여자의 태속으로 들어가서 다시 재생하였습니다.
다시 얻은 인간세계에서 그는 태어남을 기억하는 지혜(jātissara-ñāṇa)를 지닌채 태어났습니다. 이 지혜를 써서 그는 지나온 네 번의 생을 돌아보고는 네 번 생이 모두 전 아내의 사주로 죽음을 맞이했다는 것을 알게 되고 크게 괴로워했습니다. 내가 그런 원수의 태안에서 다시 몸을 받게 된 것은 이 얼마나 얄궂은 운명인가. 그는 이렇게 비탄했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원수인 엄마가 자신의 몸을 건드리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엄마가 안으려 할때마다 아이는 목청껏 울었습니다.그래서 할아버지가 아이를 키우는 임무를 맡았습니다.아이가 말할 수 있는 나이가 되자 할아버지는 물었습니다. 애야 너는 어째서 너의 어머니가 안으려 할때마다 우는거냐 그 여자는 내 엄마가 아니에요. 그 여자는 나의 네번의 생을 연속해서 죽인 원수에요. 아이는 이렇게 말하고 할아버지에게 자기의 전생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이러한 슬픈 이야기를 들은 늙은이는 아이를 껴안고 울면서 말했습니다. 그래, 내 불쌍한 손자야. 우리 여기를 떠나자구나. 여기서 머물러서는 아무 이득됨이 없겠다. 그들 둘은 승원으로 가서 수계를 하고는 명상수행을 닦아 아라한의 도과를 성취하여 아라한이 되었습니다.
이 일화가 주는 교훈은 취착으로 인하여 취착하는 바로 그 장소에 새로운 존재로 반복해서 태어난다는 점입니다. 이 이야기는 취착은 다시 태어남을 가져온다는 뽀놉바위까(ponobhavikā)의 가르침의 진리를 명확하게 입증하고 있습니다. 뱀, 개, 송아지로 태어나 각각 비명으로 죽은 다음 사람의 마지막 생에서 아라한과를 얻었을 때 갈애는 완전히 소멸되었습니다. 그에게는 더 이상의 재생은 없으며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났을 것입니다.
이 이야기가 주는 교훈을 마음에 새겨서 위빠사나 명상을 닦아서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매진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빠알리 경전과 주석서에서 이와 유사한 이야기들을 인용하자면 한도 끝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가까운 근현대에서 있었던 경험과 일화들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8. 법문을 설하는 사야도
미얀마력 1291년에서 1301년(서력 1929년~1939년) 우리는 몰라먀잉(Mowlamying)의 따웅와인 따잌카웅(Taungwine Taikkyaung)승원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 높은 명성을 지닌 법문을 설하는 사야도 한분이 계셨습니다. 변호사였던 시주자의 사망 일주일후 전통의 공양의식에서 사야도는 망자(亡者)를 위해 공덕을 회향하는 의식의 자리에서 다음과 같은 법문을 하셨습니다.
“나의 이 생은 일시적인 것이지만 죽는다는 사실은 참으로 변함없이 항상하는 것이다. 나는 필연적으로 죽을 수 밖에 없다. 나의 삶은 오직 죽음으로 끝난다. 삶자체는 무상한것이지만 죽는다는 사실은 확실히 불변하고 항상하는 것이다.”
이 죽음을 계속해서 생각함(死隨念 maraṇanussati)31은 사야도의 법문의 주제로 사용되었습니다. 우리는 그 의식이 진행되고 있을 당시 거기에 참석해 있었고 직접 그 사야도의 법문을 들었습니다. 이 일이 있은뒤 며칠내에 우리는 법문을 설하는 사야도가 사망하셨다는 슬픈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 때 우리는 불과 며칠전까지 사야도께서 죽음을 계속해서 생각하라는 법문을 하셨기 때문에 그분도 그렇게 하시며 임종을 맞이하셨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자객들의 손에 들린 비수에 찔려 비명에 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약 3년후에 메르귀(Mergui)에서 어떤 어린 소년이 부모를 데리고 몰라마잉으로 왔습니다. 소년은 자기를 몰메인까지 데려와 달라고 부모를 졸라왔습니다. 이전 사야도의 승원에 도착하자 소년은 부모에게 전생에 자기가 이 승원의 주지였다고 알려줬습니다. 소년은 승원의 모든 것을 말할 수 있었는데 그가 말한 것은 모두 사실로 판명되었습니다. 소년은 또 이웃 승원들의 지도급 승려들을 모두 기억하였고 과거생에 그들을 불렀었던 대로 그들을 호명하였습니다. 소년이 작고한 사야도의 가까운 제자였던 어떤 사내의 이름을 거명해달라는 요청을 받자 이렇게 말했습니다. “무서워, 무서워!” 도대체 뭐가 무섭다는 것인지 알려달라는 질문을 받자 소년은 그 사내가 어떻게 사야도를 찔러죽인 사람들과 관련이 있는지를, 그가 어떻게 그들로부터 도망쳤는지, 그리고 강기슭에 와서 배를 발견하고 그 배를 타고 도망쳐나왔는지를 자세히 이야기 하였습니다. 나중에 배가 메르귀 해안가에 있는 한 마을에 도착하자 그는 현재의 부모가 사는 집에 들어갔다고 말했습니다.
어떻게 자객들로부터 도망쳐나왔는지, 어떻게 강 기슭에서 배를 발견하고, 어떻게 그 배를 타고 현재의 부모가 사는 집에 왔는지 그가 본 광경들은 모두 죽음이 임박해오면서 그에게 나타난 태어날곳의 표상(gati-nimitta)들입니다. 이는 또한 취착이 새로운 생을 일으킨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주는 주목할만한 사건입니다.
9. 40짜트 때문에 물소로 태어나다
영국 식민지 시절 몬와(Monywa)지역의 한 마을에 고리대금업을 하는 남자가 살았습니다. 그 남자는 이미 자기가 빌려간 돈을 다 갚았다고 대답하는 한 농부에게 빌려간 돈을 갚을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고리대금업자는 계속해서 농부가 아직 빌려간 돈을 갚지 않았다고 우겼습니다. 마침내 그는 “당신이 이미 갚았다고 하는 40짯(Kyat)을 내가 두 번 내라고 정말 요구한다면 나는 당신집의 물소가 될것이요.” 라고 맹세했습니다. 이 맹세로 그는 빌려간 돈을 갚으라고 다시 압박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가난한 농부는 뻔히 알면서도 빌려간 돈을 두 번 결재해줄수 밖에 없었습니다.
얼마 안 있어 그 고리대금업자는 죽었고 빌려간 돈을 두 번이나 갚았던 농부의 집에 새끼 물소가 태어났습니다. 가난한 농부는 그 고리대금업자가 아마도 자기집에 물소로 재생하였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이전에 고리대금업자를 불렀던 똑 같은 방식으로 새끼 물소를 향해 “사야, 사야32, 이쪽으로 오세요.” 라고 소리쳐 불렀습니다. 새끼 물소는 부름에 응하여 농부에게로 왔습니다. 옛날 고리대금업자가 정말로 자기집에 물소로 태어났다는 것을 이제 믿게 된 농부는 이 사건을 동네방네 말하고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죽은 고리대금업자의 딸이 법원에 가서 자기 아버지의 명예를 훼손한다며 그 가난한 농부를 고소하였습니다.
이 소송을 접한 판사는 원고인, 피고인, 새끼 물소, 그리고 원고인과 피고인 양쪽의 목격자들을 부르러 보냈습니다. 법정에서 농부는 이전에 고리대금업자를 불렀던 똑 같은 방식으로 ‘사야, 사야, 이리로 오세요’ 라고 불렀습니다. 물소는 그의 부름에 응하여 그에게로 왔습니다. 고리대금업자의 딸도 이전에 자기 아버지를 “츠, 츠”33하고 불렀습니다. 법정에서 그녀가 ‘츠,츠’하고 부르자 물소가 그녀앞으로 왔습니다. 판사는 그 가난한 농부가 (명예훼손의 의도가 없이)정직한 말을 하고 있다고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사람이 물소로 재생할수도 있다는 것을 믿기란 어렵지 않습니다. 또한 거짓된 맹세를 하면 참담한 재앙으로 떨어질수도 있음을 잘 알아야 합니다.
10. 느가뇨의 쌀 한 줌
따웅드윈지(Taungdwingyi) 북서쪽 10마일에 4백여 가구가 들어선 짜웅요(Chaungyo)라는 마을이 있었습니다. 서로 친구사이인 느가 뇨(Nga Nyo)와 바 사잉(Ba Saing)이라는 마을의 두 젊은이들은 이 마을 저 마을을 돌아다니며 비틀(Betel)잎을 팔아 생계를 꾸려가고 있었습니다. 어느날 장사를 마치고 돌아온 바 사잉은 도중에 쌀이 떨어졌습니다. 저녁을 준비하기 위해 느가 뇨에게 쌀한줌을 꾸었습니다. 저녁을 해먹고는 달 밝은 밤에 둘이서 느긋하게 마을로 되돌아오는 도중 불쌍한 바 사잉은 독사에게 물려서 즉사하고 말았습니다. 그때는 두 친구들이 스무살정도되던 미얀마력 1270년과 1280년사이(서력 1908년~1918년) 어느 때였습니다.
아마도 그가 죽을 당시 쌀 한줌을 빛졌다는 생각에 얽매여 있었기 때문에 느가 뇨의 집에 어린 수탉으로 태어난 것 같습니다. 느가 뇨는 어린 수탉을 훈련시켜 싸움닭으로 만들고는 투계대회에 출전시켰습니다. 처음 세 시합에선 느가 뇨의 수탉이 이겼습니다. 하지만 네번째 싸움에서는 상대가 더 나이가 많고 힘이 셋기 때문에 불행하게도 지고 말았습니다. 느가 뇨는 수탉의 다리를 붙잡아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서 실망과 분노를 분출하였습니다. 반죽은 수탉을 집으로 데려와서는 물항아리근처에 집어 던졌습니다. 그때 느가 뇨의 암소가 다가 와서 (마치 동정을 표시하는 것처럼)그 수탉에 입을 맞추었습니다.
불쌍한 수탉은 나중에 죽어서 암소의 태에 들었습니다.송아지가 어지간히 크자 느가 뇨도 참석하는 향연에 쓰려고 느가 뇨의 친구들에 4 짯에 팔렸습니다. 송아지를 도살해서 항연을 위해 그 고기를 썰고 있을 때 따웅드윈지에서 한 서기(書記)와 그 아내가 현장에 우연히 오게 되었습니다. 그 송아지를 동정하면서 서기의 아내는 말했습니다. “이 녀석이 내 송아지였다면 나는 그렇게 잔인하게 다루지 않을 것이다. 설령 자연사했다하더라도 나는 그 고기를 먹을 심정이 들지 않을 것이고 그냥 땅에 묻어 줄 것이다.”
그로부터 얼마후 서기의 아내는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 아이는 일곱살이 되서 어느날 아버지가 아들아 무슨 말이든 꺼내보고 우리에게 이야기를 걸어보거라. 오늘은 봉급날이다. 너를 위해 좋은 옷 몇벌을 사다 주마 라고 하기전까지 아무말없이 지내왔습니다. 약속을 지키기 위해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 몇가지 이쁜 옷가지를 사가지고 저녁때 돌아왔습니다. 아버지는 말했습니다. 여기 있다. 아들아 이 이쁜 옷들은 너를 위한 것이다. 이제 우리에게 말을 한번 해보렴. 그러자 소년은 느가 뇨의 쌀 한줌이라고 입을 떼었습니다.
아버지가 말했습니다.“아들아, 말을 해보거라. 너를 위해서라면 쌀 한줌이 아니라 한 포대의 쌀이라도 그 빛을 값아주겠다.”그러자 소년은 말했습니다.“그렇다면 수레에 쌀포대를 실어줘요. 우리는 이제 내 빛을 해결하러 가요. ”쌀포대를 수레에 싣고 그들은 여정을 떠났습니다.아버지는 아들에게 물었습니다.“이제 어디로 가느냐?” 아이는 따웅드윈지의 북쪽으로 수레를 몰게 했습니다. 마침내 그들이 짜웅요마을에 도착하자 아들은“바로 여기에요, 바로 이 마을이에요.” 라고 말하고는 아버지에게 길을 안내하여
마을의 샛길들을 지나 느가 뇨의 집에 도착하였습니다. 여기가 정말 우 뇨(U Nyo)의 집이 맞는지 물어보자 우 뇨 본인이 집에서
나옴으로써 그 사실이 확인되었습니다. 느가 뇨가 수레에 접근하자 아기가 그에게 이렇게 인사하였습니다.
“이봐. 느 가뇨야! 아직 나를 기억하니?” 그 어른은 자기 아들뻘인 일개 꼬마애가 자기를 무례하게 “느가 뇨야!”라고 불러서
기분이 나빴습니다. 하지만 서기가 “우 뇨 양반, 기분 나빠하지 마세요. 이 아이는 약간 이상한 상태에 있답니다.”라고
해명을 하자 마음이 풀어졌습니다.
그들이 집안으로 들어가자 소년은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 느가 뇨! 날 기억하지 못하는 거냐? 한때 우리는 이 마을 저 마을로 비틀(betel)잎을 팔러 함께 다녔지. 그때 난 너에게 쌀한줌을 꾸었어.그리고 미처 빛을 갚기도 전에 독사에서 물려서 죽었지.
그리고 나서 나는 너의 집에 어린 수탉이 되었어. 너를 위해 세번의 경기를 이겨주고는 네번째 싸움에서는 상대가 나보다 휠씬 더 강했기 때문에 그만 지고 말았어. 그 싸움에서 지자 너는 분에 겨워 나를 두들겨패 죽게 했었어. 내가 반 죽자 너는 물 항아리근처로 날 집어 던졌고 한마리 암소가 와서 나에게 입맞춤을 하였어. 나는 그 암소의 태내에 들어가서 송아지로 태어났었지. 내가 어느정도 크자 너희들이 날 잡아서 먹었어. 바로 그때 지금 나의 아빠와 엄마인 서기부부가 그 근처에 와서 나를 동정해주었어.
소로 죽은 다음 나는 지금의 아빠와 엄마의 아들로 태어났어. 이제 나는 그때 꾼 쌀한줌을 갚으러 여기에 온거야.”
꼬마가 이야기한 것은 자기 옛 친구에게 가했던 그 모든 잔학행위에 대해 후회하며 흐느껴 우는 우 뇨에 의해 모두가 다 사실로
밝혀졌습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로 갈애가 근절되지 않으면 새로운 생으로 되풀이 되는 재생은 피할 수 없다는 점을 다시 강조하고자 합니다.
11. 아귀와 소의 끔찍한 삶
미얀마력 1300년(서력 1948년)경 만달레이(Mandalay)의 파야지(Payagyi)승원에 우 안 세인나(U An Seinna)라는 학승이 살았습니다. 그는 좋은 체격과 수려한 외모를 지니고 법(dhamma)에 대한 신심으로 충만한 비구였고 열과 성을 다해 삼장(三藏)을 배우는데 전념하는 성실한 학승이기도 했습니다. 하루는 자기 발우를 닦으면서 도반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도반들이여, 시주자의 공양음식으로 먹고 사는 동안 선한 행동에 유념할것을 간곡히 권합니다. 나는 세가지 생을 살아온 개인적인 경험을 가지고 있기에 주의깊은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의 도반들 가운데 한명이 호기심을 느끼고 그의 전생들에 대해 물어보았습니다.그러자 그는 이렇게 이야기 하였습니다. “나는 인간세계에서 죽어서 여자 도깨비가 되었습니다. 나는 그 생에서 거의 아무것도 먹을것이 없었고, 살만한 적당한 장소도 없이 쉴곳을 찾아 여기 저기 헤메고 다니면서 끔찍한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 여자 도깨비에서 다시 수레를 끄는 소가 되었습니다. 저는 다른 소떼와 함께 같은 우리안에 가두어졌는데 소들의 콧구멍에서 역겨운 냄새가 나는 콧물이 줄줄 흘러내렸습니다. 소들의 코에서 나는 냄새가 점점 참을수 없게 되어 저는 소들이 내 곁에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몰아냈고 주인은 내가 다른 소들을 괴롭히고 그들위에 군림한다고 생각하고는 날 때렸습니다. 그 생에서 죽은 다음에 나는 다시 사람의 삶을 얻었고 종교적인 감동으로 몸을 떨게 되어 지금 비구의 삶을 살게 된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또한 갈애가 지속되는 한 재생은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강조하고 있습니다. 또한 도깨비의 삶이란 얼마나 끔찍한가와 의사소통 능력이 결여되어 불리한 입장의 소가 사람의 오해를 사기 쉬워서 그 때문에 학대를 당할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이러한 이야기는 우리에게 두려움과 종교적인 감동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할것입니다.
12. 소와 개로 살다가 다시 사람의 생을 받다
미얀마력 1310년(서력 1948년)경 몬와(Monywa)지역의 마을승원에서 주지로 있던 사야도가 자기 부하를 홀대한 죄를 물어 반군지도자에 의해 사살당했습니다. 그 사야도는 이제 인간세계에서 다시 비구입니다. 우리는 그 사야도가 몇몇 경전시험까지 합격했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이 비구는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총에 맞아 죽은 뒤 나는 소가 되었고 개가 되었다가 지금은 다시 사람이 되었습니다.” 인간계의 비구라는 신분에서 소와 개의 축생계로 떨어진다는 것은 너무나 굴욕적인 일입니다. 갈애가 제거되지 않으면 존재의 사다리를 타고 더 낮게 내려갈수도 있습니다. 부처님 재세시에 몸의 이로 태어난 띳사 비구의 예가 있습니다.갈애가 제거되지 않고 남아있거나 삿된 견해(diṭṭhi)와 회의적 의심(vicikicchā)도 여전히 남아있는 사람은 재생을 받는다는 사실을 그렇게 깨닫게 되면 갈애의 완전한 제거나 그것이 안되면 적어도 삿된 견해(diṭṭhi)와 회의적 의심(vicikicchā)의 제거를 위해 힘써 노력하는 것이 전적으로 필요합니다.
13. 도마뱀으로 재생하는 것도 가능하다
미얀마력 1323년(서력 1961년)경 다이쿠(Daiku)부근의 파 아웅 위(Pha Aung We)마을에 이상한 소년이 나타나서 자신은 이전에 2마일 떨어진 으와 아잉(Ywa Waing)마을의 주지스님이었다고 했습니다. 그 소년은 좋은 기억력을 가진 총명한 아이였습니다. 자기가 살았다고 주장하는 그 승원으로 데리고가자 소년은 건물의 모든 물건들을 잘 아는 것 같았고 시주자의 이름을 기억해냄으로써 각 물건들을 확인할수 있었습니다. 소년이 말한 것은 모두 사실로 드러났습니다. 소년은 주지로 죽었을 때 승원의 도마뱀붙이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도마뱀붙이가 되어 승원에서 근처의 야자나무로 건너 뛰다가 죽었습니다. 도마뱀붙이는 나무를 헛디뎌서 땅에 떨어져 넓적다리가 부려졌습니다. 이 부상으로 도마뱀붙이는 죽었습니다. 죽을때 그는 그 승원 근방에 밭을 가지고 있던 파 아웅 위마을의 한 농부의 우마차에 올라타서 그 농부의 집으로 가서 살았습니다. 소년이 말했던 우마차에 올라탄 것은 죽음이 닥쳐옴에 따라 일어나는 태어날곳의 표상(gati-nimitta)이었습니다.
이 이야기 또한 갈애가 여전히 남아있으면 새로운 생이 일어난다는 것을 알게 해주며 이를 알게되어 생기는 두려움을 통해 성스러운 도(ariya- magga)를 닦아서 갈애를 없애야 합니다. 우리가 현대의 이러한 증거사례가 되는 이야기들을 끄집어 낸 이유는 내생 따위는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몇몇 사람들은 내생이 있는지 없는지 단정짓지 못하고 반신반의한채 혼돈에 빠져있습니다. 재생의 이야기들이 경전에 명확하게 나와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오랜 옛날에 쓰여진 것에 대해 회의적입니다. 업(kamma)과 그 과보(vipāka), 내생에 대한 믿음을 북돋고 그러한 확신이 흔들리지 않도록 하기위해 우리가 이들 이야기를 꺼낸것입니다. 우리가 제시할수 있는 비슷한 이야기들이 많지만 우리의 목적을 달성하게 할 만큼 충분하게 이야기 했습니다.
그래서 앞서 이야기한 대로 갈애때문에 재생이 일어나기 때문에 세존께서는 이렇게 가리치셨습니다. “이 배고픔, 목마름인 갈애는 다시 태어남을 가져오고 환희와 탐욕이 함께 하며 여기 저기서 즐기고 만족을 찾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또한 이 갈애에 대한 명확한 선언을 하셨습니다. 그럼 이 갈애란 무엇일까요? 첫번째는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慾愛 kāmā-taṇhā), 두 번째는 영원히 존재한다는 믿음에 집착하는 것(有愛 bhava-taṇhā), 세번째는 죽은 뒤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견해를 지니는 것(無有愛 vibhava-taṇhā)입니다. 이들 세가지 갈애가 바로 괴로움의 일어남의 진리인 집제(集諦)입니다.
14.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
이들 세가지 갈애중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慾愛 kāmā-taṇhā)는 자신이나 다른사람들의 즐거운 감각대상들을 갈구하는 갈애입니다. 아름다운 형상(色)을 볼 때 일어나는 갈애가 바로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慾愛)입니다.여기서 형상(色)은 겉모습, 색깔등과만 관계된게 아니라 형상(色)의 토대가 되는 남자나 여자의 전체형태나 몸, 입고 있는 옷이나 그나 그녀와 관련된 여타 대상들과도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즐거운 소리(聲)와 소리대상, 향기로운 냄새(香)와 그 향기의 근원, 감미로운 맛(味)과 그 맛을 주는 음식, 그러한 맛나는 음식을 준비하고 제공하는 남자와 여자, 황홀한 촉감(觸)과 그러한 촉감을 생기게 한 대상, 이러한 모든 것들이 즐거움의 대상을 이루며 그런 즐거움의 대상을 갈망하는 것을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慾愛)라고 합니다. 요약을 하면,
1. 즐거운 감각대상에 대한 욕망이나 갈망이 바로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慾愛 kāmā-taṇhā)입니다.
사람,천신,남자,여자로 태어나길 바라고 사람,천신,남자,여자로써 감각적 쾌락을 누리길 갈망하는 이 모든 갈애들이 또한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慾愛)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즐거운 생각이나 대상을 기뻐하는 것을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慾愛)라고 말합니다.
감각대상을 보고, 듣고, 냄새맏고, 맛보고, 감촉할때 즐겁다고 여기면 그 즉시 거기에서 좋아함이 일어납니다. 그렇게 즐겁다고 여기면 무명에 이르고 이 무명(avijiā)은 감각대상의 진정한 본성을 뒤덥어 그에 대해 그릇된 견해가 일어나게 합니다. 중생은 무명으로 인해 일시적인 것을 영원한것으로, 끊임없이 일어나고 사라지기 때문에 괴로움인 것을 즐거운것으로, 영혼이나 살아있는 실체가 아닌 단순한 물질적이고 정신적 현상을 영혼이나 살아있는 실체로, 역겹고 혐오스러운 자신이나 다른사람의 몸을 아름답고 즐길만한 것으로 여깁니다.
그렇게 즐겁지 못한 것을 즐거운 것으로 생각함으로써 좋아함이 일어납니다. 좋아함과 욕망은 그 갈애를 충족시키기위한 행동을 실행에 옮기는 갈애로 이릅니다. 그러한 의도적 행위들이 바로 새로운 생의 새로운 정신과 물질의 오취온(五取蘊)을 형성하는 원인이 되는 업(kamma)과 상카라(saṅkhāra)입니다. 그렇게 감각대상에 대한 좋아함이나 욕망이 일어나는 순간마다 새로운 존재(有)의 바퀴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갈애(taṇhā)에 영향을 받아 업지음의 식(abhisaṅkhāra-vinñāṇa), 즉 죽음 인식 속행(maraṇa-saññā-Jvana)이 죽음이 가까워 오면서 나타나는 세가지 표상인 업(kamma), 업의 표상(kamma-nimitta), 태어날 곳의 표상(jāti nimitta)에 집요하게 매달립니다. 죽음의 문앞에서 보이는 대상에 집요하게 매달리기 때문에 죽음의 마음이 사라지자 마자 재생연결(paṭisandhe)이 마지막 본 대상을 거머쥐고 일어나서 새로운 생을 생기게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갈애(taṇhā)는 다시 태어남을 가져오는 뽀놉바위까(ponobhavikā)라고 일컬어지는 것입니다.
15. 존재에 대한 갈애
주석서에 따르면 존재에 대한 갈애(有愛 bhava-taṇhā)는 상견(常見 sassata-diṭṭhi)과 결부된 갈애라고 합니다. 여기서 바와(bhava)34는 존재(有)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존재에 대한 갈애(有愛)는 존재가 항상하고 변함없다는 믿음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상견(常見)이란 영혼이나 살아있는 실체는 죽거나 해체되지 않는다는 삿된 견해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즉 거친 육신이 소멸되어도 살아있는 실체인 영혼은 소멸되지 않고 새로운 몸으로 들어가서 존속한다는 것입니다. 설령 세계가 무너지고 파괴되더라도 영혼은 영원히 존속하고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외의 다른 종교신앙들은 대부분 이러한 영원주의의 견해(常見)를 취하고 있습니다.
그들 중 일부는 죽은 다음에 유일신의 의지에 따라 천국에서 영원히 살거나 지옥에서 영원한 파멸의 고통을 당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중생은 업(kamma)에 따라 한 존재에서 다른 존재로 이주하여 영원히 존재한다는 견해를 취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사람들은 중생은 지정된 진로대로 한 삶에서 다른 삶으로 변이하면서 영원히 존재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요컨데, 영혼이나 살아있는 실체가 소멸되지 않고 새로운 존재로 옮겨간다고 보는 모든 믿음들은 다 영원주의에 대한 삿된 견해인 상견(常見)입니다. 예를 들면, 나무위에 앉아있던 새가 그 첫 번째 나무가 넘어지면 다른 나무로 날아가는 것입니다. 그 두번째 나무가 떨어지면 새는 세번째 나무로 날아갑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영혼이나 살아있는 실체가 그것이 의지하는 거친 몸이나 형체가 소멸할때 또 다른 거친 몸으로 이주해 가서 파괴되지 않고 그 자체로 영원히 존재합니다.
영원주의라는 삿된 견해와 결부된 갈애를 존재에 대한 갈애(有愛 bhava- taṇhā)라 합니다. 이 갈애로 인해 중생은 영혼이나 살아있는 실체가 영원하고 항구적이라는 견해를 매우 탐탁해합니다. 무시(無始)이래로 영원한 존재로 지속되어온 이‘자아’는 감각들을 느끼고 계속해서 느껴갈것입니다. 이렇게 믿음으로써 보고 듣고 감촉하고 아는 모든 대상들과 장래에 누리길 희망하는 대상들을 즐거워 합니다.
갈애로 인해 중생은 현재와 미래생에서 번영하는 행복한 삶을 누리고, 좋고 행복한 존재로 태어나길 바라며, 내생에서 부유한 사람이나 천신으로 즐거움을 누리길 원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계속해서 남자로 태어나길 바라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계속해서 여자로 태어나기를 바랍니다. 이 모든 바램이 바로 존재에 대한 갈애(有愛)입니다.
지금 누리고 있는 감각대상들에 대해, 또는 지금 자신의 존재에 대해, 또는 자신이 그렇게 존재하고자 하는 생에 대한 열망속에 매번 갈애가 일어납니다. 그리고 이 갈애(taṇhā)로 인하여, 조건을 만드는 작용력이나 잠재력이 새로운 생의 일어남을 위해 만들어집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다시 태어남을 가져오는 뿌놉바위까(ponobhavikā)를 가르치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요약합니다.
2. 존재가 영원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존재를 갈망하는 것을 존재에 대한 갈애(有愛 bhava-taṇhā)라고 합니다.
16. 비존재에 대한 갈애
위바와 딴하(vibhava-taṇhā)라는 용어에서 위바와(vibhava)는 존재하지 않음(無有), 비존재, 존재의 소멸을 뜻합니다. ‘살아있을 때만 존재하고 죽고 나면 아무것도 없다’는 견해와 결부된 갈애를 존재하지 않음에 대한 갈애(無有愛 vibhava-taṇhā)라고 합니다. 이것은 ‘죽고나면 아무것도 남지 않고 오직 완전한 소멸만이 있을뿐이다.’라는 단견(斷見 uccheda-diṭṭhi)과 결부된 갈애입니다.
이 단견(斷見)은 부처님 당시 육사외도(六師外道)35의 한 지도자 아지따(Ajita)가 설한 교설로써 다음과 같습니다. 사람은 네가지 근본 요소(四大)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죽을 때 몸을 이루는 땅의 요소(地大 pathavi-dhātu)는 몸밖의 생명없는 땅의 요소라는 덩어리안으로 들어갑니다. 이말이 의미는 살아있는 몸에 있을때 딱딱함이나 거침으로 나타나는 땅의 요소(地大)는 죽고나서 몸밖의 생명없는 땅의 요소(地大)와 융합되고 머지않아 그것은 다시 땅의 물질(pathavi-rūpa)로 변했다가 다시 나무와 식물따위의 땅의 요소(地大)로 변환된다는 뜻입니다.
살아있는 몸에 있던 물의 요소(水大 āpo-dhātu)는 생명없는 물의 덩어리로 흘러 들어갑니다.
다시 말하면 죽은사람의 습기나 유동성은 물의 덩어리의 습기나 유동성이 됩니다.
살아있는 몸에 있던 불의 요소(火大 tejo-dhātu)는 몸밖의 생명없는 불의 덩어리와 융합되고 살아있는
몸에 있던 바람의 요소(風大 āyo-dhātu)는 몸밖의 생명없는 바람 덩어리로 흘러 들어갑니다.
모든 인지기능들(눈, 귀, 코, 혀등의 감각기관들)은 우주로 이동합니다. 허무주의자들은 눈의 식(眼識), 귀의 식(耳識)따위의 개별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단견(斷見 uccheda-diṭṭhi)36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들은 눈, 귀 등의 물질적 형태들이 직접 보고 듣고 냄새맡고 맛보고 감촉하며 마노(意 mana), 또는 감각기능(根 Indriya)자체가 생각한다고 하는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자신들의 관점에 따라 그들은 우주와 융합되거나 우주속으로 사라지는 여섯가지 감각기능(六根)들로 식(識)의 소멸을 설명합니다.
바보이든 현명한 이든 죽을 때에는 모든게 다 사라집니다. 죽은 다음에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바보는 내생에서 자기가 저지른 악행에 상응하는 어떠한 고통도 받지 않습니다. 현명한 이도 내생에서 자신이 지은 선업의 과보를 누리지 않습니다. 죽은 다음에는 모든 것이 다 사라져버립니다.
이러한 것이 허무주의적 견해를 취하는 아지따의 가르침의 일부입니다. 이러한 사상은 악행을 피하거나 선행을 짓기를 내켜하지 않는 사람들이 쉽사리 받아들일수 있을것입니다. 만약 이러한 사상에 의해 가정되는 대로 정말로 죽은뒤에는 내생이 없고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을 때에도 죽음 이전에 삶이 있다고 자인하는 꼴이 됩니다. 그러면 죽음이전에 존재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의문이 생깁니다.
그들의 사유체계에 따른다면 살아있는 자아(atta)나 유정(satta)이라는 해답이 유일할것입니다.그래서 아지따가 비록 사람은 네가지 근본 요소(四大)로 이루어져 있다고 주장하였지만 그 자신에게도 자아(atta)나 유정(satta)37이 존재한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자아에 대한 이 집착으로 인해 이러한 견해를 지닌 사람들은 내생을 위해 선행을 하는데 시간을 허비하는 대신 지금 이 순간의 모든 기회들을 쾌락을 누리기 위해 써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죽은뒤에 아무것도 남지 않고 모든 것은 소멸한다고 하는 이러한 허무주의적 견해와 결부된 갈애를 존재하지 않음에 대한 갈애(無有愛 vibhava-taṇhā)라고 합니다. 요약을 하면,
3. 허무주의적 견해와 결부되어 일어나는 갈애가 존재하지 않음에 대한 갈애(無有愛 vibhava-taṇhā)이다.
이 존재하지 않음에 대한 갈애(無有愛)는 죽은뒤에 존재는 어떤 별다른 노력없이 그냥 소멸한다고 하는 생각과도 같습니다. 사람들이 공덕행을 짓기를 게을리하고 악행을 삼가지 않는 이유가 바로 이러한 견해를 지녔기 때문입니다. 그가 짓는 악행은 또한 헤아릴수 없습니다. 만일 죽은 뒤에 내생이 있다면 이들 악업은 당연히 즐기지 못할 불선한 과보를 맺을것입니다만 죽은뒤에 아무일도 생기지 않기만 한다면 새로운 생도 없기에 그들의 죄업들은 소멸될것입니다. 또한 그들은 그러한 죄업들에 대해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게 되어 그 죄업의 모든 과보들을 면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것은 이러한 허무주의적 사상의 큰 호소력입니다.
이와 동시에, 그들은 즐기기 위한 시간은 죽기전의 바로 현생이라고 생각하고서 쾌락의 대상들을 애타게 구하고자 합니다.그 때문에 그들은 즐겁게 여기는 것을 죽기 살기로 구합니다.이 열렬한 쾌락의 추구는 업과 상카라의 작용에 이르고 그러한 모든 행동은 새로운 생을 형성하는데 이바지합니다.
그리고 거기에 매번 즐거움이 있어서 현생의 쾌락을 즐기게 되며 이 갈애의 충격파는 식(識)의 흐름인 삶의 연속체, 즉 바왕가(bhavaṅga)에 전해집니다. 그 결과 죽음과 가장 가까운 속행의식(Jvana vinñāṇa), 또는 업지음의 식(abhisaṅkhāra-vinñāṇa)가 죽음의 표상들인 업(kamma), 업의 표상(kamma-nimitta), 태어날 곳의 표상(gati-nimitta)을 거머쥡니다. 이러한 대상들을 거머쥐고 있는 동안 죽음의 마음( cuti-citta)과 함께 죽음이 닥쳐올때, 재생연결식(paṭisandhi-vinñāṇa)이 세가지 표상중 어느 하나가 조건지운 새로운 생에 일어납니다. 그래서 단견(斷見)에 사로잡힌 사람은 즐거운 대상에 대한 갈애 때문에 좋아하던 좋아하지 않던간에 새로운 존재로 재생하게 됩니다. 그리고 생전에 악행외에는 지은게 없기 때문에 그가 받을 새로운 생은 낮고 비참한 세계인 악처(apāya)일 가망성이 매우 큽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존재하지 않음에 대한 갈애(無有愛 vibhava-taṇhā)도
다시 태어남을 가져온다(ponobhavikā)고 가르치셨습니다.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요약 합니다.
4. 괴로움의 진정한 원인은 이 세가지 갈애에 있다.
앞에서 언급한 세가지 갈애는 태어남(jāti)에서부터 오취온(五取蘊)까지의
괴로움의 원인이기 때문에 괴로움의 일어남의 진리인 집제(集諦)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갈애(taṇhā)들이 어디서 일어나서 어디서 자리잡는가에 대해 「대념처경」은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좋은 것이 있으면 거기서 이 갈애는 일어나서 거기서 자리잡는다.’
여기서 ‘갈애는 일어나서’란 말은 즐겁고 기분좋은 대상들 때문에 갈애가 실제로 일어남을 뜻합니다. 이는 가벼운 수준의 번뇌(pariyutthana- kilesa)로 알려져 있습니다. ‘자리잡는’다는 말은 기분좋은 것의 무상한 성질을 관찰하지 못하여 그에 대한 갈애가 잠재하게 되고 자리를 잡아 유리한 상황이 조성될 때 일어남을 뜻합니다. 관찰을 벗어난 감각대상에 잠재하는
이 갈애를 아람마나누사야(ārammaṇanusaya)라고 합니다. 위빠사나 명상은 이 번뇌를 제거해줍니다.
즐겁고 기분좋은 것은 것에서 일어나는 갈애는「대념처경」에 상세하게 나와 있으며 다음과 같이 요약됩니다.
1. 눈[慧眼], 귀(耳), 코(鼻),혀(舌), 몸(身), 마음(意)이라는 감각의 육문(六門)
2. 형상(色), 소리(聲), 냄새(香), 맛(味), 감촉(觸), 마음의 대상(法)이라는 육처(六處)
3. 눈의 식(眼識), 귀의 식(耳識), 코의 식(鼻識), 혀의 식(舌識), 몸의 식(身識), 마노의 식(意識)라는 여섯가지 식(六識)
4. 여섯가지 감각접촉(六觸)
5. 여섯가지 감각접촉(六觸)에서 생기는 여섯가지 느낌(六受)
이러한 즐겁고 기분좋은 것은 명상을 닦아서 관찰해야 합니다. 주의깊은 알아차림으로 이들을
무상· 고· 무아로 인식하지 못하면 갈애가 자라는 온상이 되버립니다.
이러한 두가지 갈애, 즉 보고, 들을때 있는 그대로 알아차림을 벗어난 즐거운 대상에 대한
잠재성향의 갈애(anusaya-taṇhā)와
기분좋은 것에서 일어나는 가벼운 수준의 갈애(pariyutthana-taṇhā)가
태어남과 같은 괴로움의 일어남의 성스러운 진리(集聖諦)를 구성합니다.
이 사실을 철저히 이해하고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제 괴로움의 일어남의 진리인 집제(集諦)를 충분히 설명했습니다. 여기에서 법문을 마치겠습니다.
이「초전법륜경」의 큰 법문을 공경하는 마음으로 경청한 공덕으로 여기 이 자리에 모인 선한 여러분들 모두가 끊임없는 관찰로써 집제(集諦)인 갈애를 일시적으로 없애거나 완전히 제거하게 되고, 여러분들이 선택한 도와 과의 힘으로 모든 괴로움의 끝인 열반을 속히 성취하기를 바랍니다.
사두! 사두! 사두!
■ 역주(譯註) :
1.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慾愛 kāmā-taṇhā)란 감각적 쾌락을 즐기고자 하는 탐욕이다.
존재에 대한 갈애(有愛 bhava-taṇhā)란 상견(常見 sassata-diṭṭhi)을 지니고 영원한 존재를 갈망하는 것이다.
존재하지 않음에 대한 갈애(無有愛 vibhava-taṇhā)란 죽은뒤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단견(斷見 uccheda-diṭṭhi)을 지니고
존재하지 않음을 갈망하는 것이다.
2. 뽀놉바위까(ponobhavikā)는 pono(다시)+bhavikā(존재하게 하는 것)로 분해되며 '다시 존재하게 하는 것', 또는‘재생을 하게 하는 것’으로 설명된다. 이 술어는 갈애(taṇha)가 있는 한 윤회는 다시 태어남(jāti)을 일으킨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쓰인다.
「청정도론」(Vis.XVI.61)과「대념처경」주석서에 따르면 이 뽀놉바위까(ponobbhavikā)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다시 태어남을 가져오는(ponobhavikā)이라는 단어는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다시 태어남을 만든다’는 뜻이‘뿌놉바와(punobbhava)’이고,
‘습관적으로 다시 태어남을 만드는 것’이‘뽀놉바위까(ponobbhavikā)’이다.”
3. 짬뻬야 용왕 이야기는「본생담」의〈짬뻬야 자따까(Campeyya Jātaka)〉(J.506)에 나온다.
4. 육욕천(六欲天)은 삼계(三界) 가운데 하나인 욕계(欲界)에서 가장 높은 세계이다. 욕계천상이라고 하는데 말그대로
욕탐을 즐기는 천상세상이다. 보통 보시와 지계를 닦아서 태어난다고 한다. 여기에는 사대왕천(四大王天),
삼십삼천(三十三 ), 야마천(夜摩天), 도솔천(兜率天), 화락천(化樂天),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의 여섯 하늘이 있다.
5. 우빨리 왕비 이야기는「본생경」〈앗사까 자따까(Assaka-Jātaka)〉(J.207)에 나온다.
6. 미얀마에서는 비구가 죽었을때 이렇게 천상, 구체적으로는 삼십삼천(三十三天)으로 되돌 아 간다고 관습적으로 말한다.
7. 여기서의 아빈냐(abhiññā)는 신통지(神通智)로서
① 신족통(神足通)
② 천이통(天耳通)
③ 타심통(他心通)
④ 숙명통(宿命通)
⑤ 천안통(天眼通)의 오신통(五神通)을 가리킨다.
여기에 위빠사나 수행으로 얻는 번뇌가 다한 경지인
⑥ 누진통(漏盡通)을 합치면 육신통(六神通)이 되는데
보살은 깨달음을 얻은 단계가 아니기 때문에
⑥ 누진통(漏盡通)을 제외한 것이다.
그리고 오신통(五神通)을 나투기 위해서는 반드시
사선(四禪)에 들어야 나툴수 있다.
그래서 사선을 신통의 토대가 되는 선(padaka-jhāna)이라고 한다.
8. 평화로운 임종을 맞기 위해서는 평소에 봉사하는 삶과 도덕적인 삶, 즉 보시와 지계의 삶을 살아야한다. 경전의 여러 곳에서
부처님께서는 보시, 지계, 천상에 태어남을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임종시에는 이생에 대한 애착을 모두 털어버려야할 것이다. 특히 상좌부 전통에 의하면 임종에 다다라 지은 업을 중시하는데 임종시에 부처님 가르침을 사유하거나 삼매를 닦거나
보시를 하는 것이 중요하다. 본인이 직접 이렇게 할 수 없을 때는 주위 사람들이 경을 읽어주거나 스님들을 초청해서 법문을
들려주거나 병자의 이름으로 보시를 하고 이를 당사자에게 일러주어서 기쁘고 행복한 마음으로 임종을 맞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다.「청정도론」과 같은 주석서들에 따르면 임종직전,
즉 죽음의 마음(cuti-citta)이 일어나기 직전에 일어나는 대상은
업(kamma),
업의 표상(kamma-nimitta),
태어날곳의 표상(gati-nimitta)중의 어느 하나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들을 구체적으로 보면,
① 업(kamma): 그 생에서 지은 선업이나 불선업이 나타나기도 한다.
② 업의 표상(kamma-nimitta): 혹은 다음 생을 결정할 선업이나 불선업을 상지하는 표상이나 도구들이 나타나기도 한다.
예를 들면 신심이 깊은 사람에게는 스님이나 절의 표상이 나타나기도 하고, 의사의 경우 환자의 모습이 나타나기도 하고
백정은 도살한 가축들의 신음소리를 듣거나 소 잡는 칼을 보기도 한다.
③ 태어날 곳의 표상(gati-nimitta): 혹은 죽어가는 사람이 다음 생에 태어날 곳의 표상이 나타나기도 한다. 예를 들면,
천상에 태어날 사람은 천궁을 보기도 하고, 축생에 태어날 사람은 숲이나 들판을 보기도 하며, 지옥에 태어날 사람은
지옥의 불을 보기도 한다.
임종직전에 자와나 과정(이생에서 지은 업의 과보가 나타나는 통로가 되는 과정)이 나타나는데 이때 이러한
업이나 업의 표상이나 태어날 곳의 표상 가운데 하나가 나타나며 이러한 것을 대상으로 하여서
다음생의 최초의 식(識)가 육도(六道) 가운데 하나에 생겨나서 그생의 식(識 마음)가 물흐르듯 상속(찰나생멸)하면서 지속된다.
중생은 갈애가 있는한 끊임없이 끝없이 윤회한다. 갈애가 완전히 소멸할 때 윤회도 끝이나며 윤회가 끝난 경지를
우리는 열반(nibbāna)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윤회하는 기간은 정해져 있지 않다. 윤회는 갈애가 소멸될 때 다하게 되며
이러한 갈애는 팔정도를 실천함으로 해서 완전히 소멸되는 것이다.
9. 『증지부(增支部)』주석서(AA.ii.335)는 이를“선업과 불선업이 자라는 장소(ṭhāna)라는 뜻에서
업은‘들판(khetta)’이다. (업과) 함께 생긴 업을 형성하는 식은 자란다는 뜻에서 ‘씨앗(biJ)’이다.
(씨앗을) 돌보고 자라게 하기 때문에 ‘갈애’는 물과 같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10. 속행(速行)으로 옮긴 자와나(Jvana)는 문자적인 뜻 그대로 '재빠름, 신속함'의 뜻을 가졌다. 인식과정에서 아주 중요하게 쓰이는 아비담마의 전문술어로 일단 대상이 무엇이라고 결정되고 나면 일어나는 일련의 인식과정을 모두 자와나(속행)라고 부르고 있다. 일반적인 인식과정에서 자와나는 모두 7번 같은 대상을 가지고 일어난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것은 결정된 대상에 마치 벼락치듯 재빠르게 그것을 이해하는 작용을 한다. 이 자와나의 단계야말로 의도적인 행위가 개입되는 곳으로서 선하고 불선한 마음이 일어나는 순간들이다. 물론 아라한의 경우 이 자와나는 선,불선이 아니고 단지 작용만하는 마음이다. 아라한은 모든 번뇌가 다하였기 때문에 더 이상 업을 짓지 않기 때문이다. 자와나는 인식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술어이고 개념이다. 아라한의 경우를 제외하고서 모든 존재들에게 속행은 선한 마음으로 일어나거나 불선한 마음으로 일어나기 때문이다. 즉 업을 초래하는 마음이요 업을 짓는 마음이라는 말이다. 인식과정과 인식을 벗어난 과정에서 일어나는 마음들 가운데서 이 자와나들 이외에는 선(善)과 불선(不善)의 개념이 개입되는 마음은 없다. 그러므로 수행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 자와나 과정에서 지혜롭게 주의 기울임함(如理作意 yoniso-manasikāra)의 마음부수를 극대화하여 이 마음이 불선(不善)이 되지 않고 선(善)이 되도록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11. 업력(業力)으로 옮긴 깜마웨가(kamma-vega)는 kamma(업)+vega(속력)의 합성어로 인간의 의도적 행위 즉 업은 가속도를 가진다는 뜻이다. 동일한 업은 한번 짓고 두번 짓고 하면 계속 그러한 업을 짓게 되는 가속도를 가지게 되어서 점점 그러한 업으로 방향이 결정되고 비슷한 상황에서는 그러한 업을 지속적으로 짓게 된다. 그래서 그러한 업은 힘을 가지게 된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이 kamma-vega를 업력(業力)으로, 서양에서는 Kammic energy로 옮겼다.
12. 바왕가(bhavaṅga)는 bhava(有 존재)+aṅga(分 요소, 부분)로 분석되며
한 존재의 영속성을 유지시키는 마음, 즉 존재지속심이다.
그래서 서양에서는 life-continuum으로 옮기고 있고
중국에서
유분(有分),
유분심(有分心),
유분식(有分識)으로 한역하였다.
우리의 인식과정에서는 드러나지 않는 미세하고 알시 어려운 마음이기에
굳이 서양 심리학의 용어를 빌리자면 잠재의식적 생명의 흐름이라 할 수 있다.
바왕가는 항상 강이나 흐름에 비유되며 바왕가의 흐름이란 뜻의
바왕가소따(bhavaṅga-sota),
또는 바왕가산따띠(bhavaṅga-santati)란 말이 주석서에 많이 나온다.
상좌부 아비담마에서 모든 마음은 대상없이 일어나지 않듯이
이 바왕가의 마음(bhavaṅga-citta)또한 임종직전 나타나는 업(kamma)이나
업의 표상(kamma-nimitta
) 또는 태어날 곳의 표상(jāti-nimitta)중의 하나를 그 대상으로 가진다.
13. 시왈리(Sīvalī)존자는 꼴리야(Koliya)왕의 딸인 숩빠와사(suppavāsā)의 아들이다. 그는 전생에 한 성을 7일동안 물샐틈없이 포위한 악업 때문에 어머니의 뱃속에서 7년 7일을 있었다. 나자마자 바로 말을 하였고 태어나는 날 바로 사리뿟따 존자가 데리고 가서 출가를 시켰는데 머리를 깎으면서 첫 번째 머리칼이 떨어질때 예류과를, 두 번째 머리칼이 떨어질때 일래과를, 세 번째 머리칼이 떨어질때 불환과를, 머리를 다 깍자 아라한이 되었다고 한다. 그는 신들의 공양을 많이 받는등 세존을 제외하고는 비구들 가운데 가장 많은 공양을 받았기 때문에 세존께서는 공양을 얻는 자(lābhi)가운데 으뜸이라고 하셨다. 시왈리 존자가 전생에 지은 공덕이야기가 「법구경」주석서(DhA.iv.192f)에 나온다. 옛날 위빳시 부처님 당시 시민들과 왕 사이에 누가 부처님과 승가에 가장 큰 보시를 할 수 있는지 경쟁을 벌인 적이 있었다. 시민들은 공양 올릴 물건들을 빠짐없이 갖추었지만 거기에 꿀이 빠진 것을 알고 그것을 구하러 여러 심부름꾼들에게 각기 충분한 돈을 주어 내보냈다. 심부름꾼 가운데 한 사람이 그 때 마침 방금 딴 벌집을 팔려고 시내로 들어오는 농부를 만나게 되었다. 심부름꾼은 그에게 벌집 한 개 값으로는 너무나 많은 자기 돈 모두를 주고라도 그 벌집을 사겠다고 제의하자 농부는 의아해 하면서 그 까닭을 물었다. 그 꿀은 시민들이 부처님께 올리는 공양물의 마지막 품목인 만큼 그만한 값이 있노라는 심부름꾼의 설명에 농부는 그 보시의 공덕을 자신이 얻을 수 있다면 돈을 받지 않고 거저 주겠다고 하였다. 시민들은 그만한 횡재를 쉽게 마다하는 농부의 신심에 감동되어 보시의 공덕을 그에게 돌리기로 기꺼이 동의했다. 이 때 올린 이 작은 공양 덕분에 그 농부는 그후 거듭거듭 천상에 태어났고 바라나시 국의 왕자로 태어나 왕위를 물려 받기도 했다. 마지막 생에 그는 시왈리 존자가 되어 부처님 제자로서 아라한과를 증득하였다. 그 후에도 그 벌집 보시는 계속해서 결실을 맺었다. 천신들은 부처님과 시왈리 존자를 포함한 오백 명의 스님들이 여러 날 인적 없는 지역을 지나는 동안 쉴 곳과 음식을 마련했던 것이다.
14. 바꿀라(Bākula) 존자는 꼬삼비(Kosambī)의 부유한 상인의 집에 태어났다. 그가 갓난 아이였을때 보모가 야무나 강에서 목욕을 시키다가 떨어뜨려 큰 고기가 삼켰다고 한다. 그 고기는 잡혀서 바나라시의 상인집에 팔려갔는데 아이는 다치지 않고 산채로 뱃속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상인의 아내는 자신의 아이로 삼고 키우겠다고 우겼고 왕은 두 가문에서 공동으로 그를 자식으로 삼으라고 판정을 하였다. 그래서 그는 두가문에 속하는 자(ba-kkula)라는 뜻인 바꿀라(Bākula)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80살에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출가하였으며 출가한지 8일째 되던 새벽에 아라한이 되었다고 한다. 세존께서는 그를 병없이 장수하는 자들가운데서 으뜸이라고 하셨다.(AA.ii.596)
15. 로사까띳사(Losakatissa)장로의 이야기는「본생경」(J.41)에 나온다. 그는 까사파 부처님(迦葉佛)때 비구였는데 한 신자의 후원을 받으며 승원에 살고 있었다. 어느날 아라한 비구가 찾아왔는데 그가 계속해서 머물면 자신에게 오는 공양과 보시를 빼앗길까 두려워 하여 그를 내쫒을 궁리를 한다. 하루는 신자가 둘을 공양에 초청했지만 그는 혼자만 갔다. 그리고 오지 않은 아라한 비구에게 전해달라고 건내준 시주음식을 전달하지 않고 중간에 길가에 내다 버렸다. 나중에 그의 의중을 안 아라한 비구는 스스로 그 승원을 떠났다. 그 뒤에 그는 죽어 유령(幽靈)이 되었다가 오래지 않아 지옥에 났다. 수많은 세월동안 지옥에서 고통을 받다가 그 업의 남은 힘에 의해 각각 5백생동안 야차(Yakkha)와 개로 태어나 항상 배고픔에 시달려야 했다. 마지막 생에 그는 꼬살라(Kosala)의 어부집안에 태어났다. 그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그 어부마을과 부모에게 불운이 계속해서 닥쳐왔다. 즉, 마을전체가 왕의 형벌을 여러번 받는등 멸망직전에 이르게 되자 그것이 로사까띳사로 인한 것임을 안 마을사람들은 그의 가족을 쫒아낸다.나중에는 배고픔을 참다못한 어머니도 그를 길거리에 내다버렸다. 하루는 사리뿟따(Sāriputta) 존자가 길가의 하수도에서 밥알을 주워 먹는 7살된 그를 우연히 보고 크게 불쌍히 여겨 승원으로 데리고 가서 말끔이 씻기고는 출가시켰다. 나중에 열심히 정진하여 아라한이 되었지만 그의 불운은 여전하여 탁발을 나가도 항상 목숨을 유지할수 있을만큼의 아주 적은 분량의 음식만을 받았다. 그가 입멸하는 날이 가까이 왔음을 안 사리풋따 존자는 이 날 만큼은 그를 충분히 공양들게 하려고 함께 사왓티(Sâvatthi)로 갔다. 하지만 아무도 로사까띳사에게 시주음식을 주지 않았고 사리풋타 존자가 그를 일단 승원으로 돌려보낸후 사람을 시켜 음식을 그에게 보냈지만 심부름꾼이 중간에 그것을 먹어버리고 말았다. 마침내 사리풋타 존자가 직접 발우에 음식을 담아가서 그 발우를 손으로 받치고 있는 동안 로사까 띳사로 하여금 공양을 충분히 다 마치도록 하였다. 이렇게 하여 그는 마지막 공양만은 충분히 들고는 바로 그날 저녁 완전한 열반(般涅槃)에 들었다.
16. 목갈라나(Moggalāna)존자의 이야기는「법구경」주석서(DhA.iii.65)와「본생경」(Jā.125)에 나온다. 부처님의 상수제자로 신통제일이었던 존자는 신통력으로 지옥과 천상계를 드나들면서 외도의 신자들은 지옥에서 고통받고 있고 부처님의 신자들은 천상에서 행복을 누리고 있다고 사람들에게 본바를 알려주었는데 이렇게 되자 사람들이 점점 외도를 멀리하고 부처님에게 모여들었다. 그러자 이에 원한을 품은 나형외도(裸形外道)들의 사주를 받은 흉악범들의 공격을 받았다. 첫 번째와 두 번째 공격은 신통력으로 자리를 피해 용케 화를 면할수 있었지만 세 번째 공격때는 스스로 반조해 보고는 과거의 숙업(宿業)때문임을 알고는 자리를 피하지 않아 그대로 흉악범들의 몰매를 맞고 그날로 입멸하게 되었다. 그 과거의 숙업이란 목갈라나 존자가 과거전생의 어느때 눈먼 부모를 산으로 데려가 도둑으로 위장하고 때려죽인 악업인데 이러한 업으로 그는 무수한 세월동안 무간지옥(無間地獄)에서 고통을 받았고 마지막 생에 아라한이 된 뒤에도 그 악업은 타다남은 불속의 불씨처럼 여전히 남아 있다가 존자의 최후 몸을 붙잡았던 것이다.「불종성경」(B.i.58)에 따르면 목갈라나 존자의 몸은 푸른 연꽃이나 비구름의 색깔을 띠었다고 한다. 이와 관련하여 스리랑카에는 이는 존자가 최근의 과거에 지옥에서 고통받은 것으로 인한 것이라는 구전이 전해지고 있다.
17. 아라한의 경우는 마지막의 임종시에 과거에서 지은 모든 업은 효력이 없는 업이 되어버린다. 만일 아라한이 임종했는데도 모든 업이 효력을 상실한 업이 되지 않으면 아라한도 또 태어나는 것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업에 관한한 아라한은 금생이 마지막 몸이 된다. 또 아라한은 죽고 나면 어떻게 되는가는 세간적인 언어로는 설명할 수 없는 무기(無記)이다.
18. 단멸론(斷滅論)의 uccheda-vāda는 ud(위로) + √chid(to cut)에서 파생된 명사로 ‘끊어짐, 멸절(滅絶)’을 뜻한다. 사람은 일단 죽으면 끝나는 것으로 다시 태어나는 법이 없으며, 선악이라든가 과보는 없다고 주장하는 그릇된 견해로 단견(斷見)이라고도 한다. 육사외도(六師外都) 중 아지따 케사캄발린(Ajita Kesakambalin)의 유물론이 대표적이다. 영역은 annihilationism.
19. 까꾸산다 부처님(拘留孫佛 Kakusanda Buddha)은 현겁(賢劫)에 출현한 과거칠불(過去七佛)가운데 한분이다.
과거칠불은
➀ 위빠시 부처님(毘婆尸佛 Vipassi Buddha)
➁ 시키 부처님(尸棄佛 Sikhi Buddha)
➂ 웻사부 부처님(毘舍浮佛 Vessabhu Buddha)
④ 까꾸산다 부처님(拘留孫佛 Kakusandha Buddha)
⑤ 코나가마나 부처님(拘那含牟尼佛 Konagamana Buddha)
⑥ 까사파 부처님(迦葉佛 Kasapa Buddha)
⑦ 고따마 부처님(瞿曇佛 Gotama Buddha)이다.
고따마 부처님 다음에 오실 미래의 부처님은
현재 도솔천에 계신 미륵 부처님(彌勒佛 Metteyya Buddha)이다.
20. 떠돌이 수행자(流行者)로 옮긴 paribbāJka는 pari(이리저리)+√vraj(방황하다)에서 파생된 명사이다. 부처님 제자를 제외하고 집을 떠나 수행하는 출가사문들을 통칭하는 말이다. 영어로는 wondering ascetic이라고 한다. 그래서 『중부』주석서(MA.ii.7)에서는“재가의 속박을 버리고 출가한 자”라고 설명하고 있다. 한편 사명외도(邪命外道 Ājīvika), 니간타(Nigantha), 나체 수행자의 무리 등은 paribbāJka라고 표현하지 않고 그들에 해당하는 이름들로 부르고 있으며 그 외에 별다른 특징이나 큰 집단을 이루지 않은 일반 출가자들을 이렇게 부르고 있다. 한편 경에서 비구들의 출가를 빱빳자(pabbajjā)라 표현하여 일반 유행자에 관계된 빠리바자까(paribbāJka)라는 이 용어와는 구분하여 사용하고 있다.
21. 억압에 의한 버림(vikkhambhana-pahāna)이란
삼매(samādhi)의 힘으로 번뇌(kilesa)를 일시적으로 몰아내거나 제압하는 것이다.
「청정도론」(Vis.XXII.108)에 따르면 이 버림(pahāna)에는 세가지가 있다.
즉 ➀ 억압에 의한 버림(vikkhambhana-pahāna)
➁ 반대되는 것으로 대체하여 버림(tadanga-pahāna)
➂ 근절에 의한 버림(samuccheda-pahāna)이 그것이다.
22. 번뇌(kilesa) 즉 불선법(akusala)은 그 정도와 강약에 따라 다음과 같은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 거친 단계의 번뇌(vītakkama-kilesa)
말과 행동으로 표출되는 매우 거친 번뇌로 계율(戒 sīla)을 지켜서 제거할 수 있다.
(2) 중간 단계의 번뇌 (pariyutthāna-kilesa)
마음에 일어나는 감각적 욕망, 성냄,적의 등과 같은 중간 번뇌로 삼매(定 samādhi)로 제거할 수 있다.
(3) 잠재 성향의 번뇌 (anusaya-kilesa)
내면에 잠복해 있는 매우 미세한 번뇌로 성스러운 도의 지혜인 통찰지(慧 paññā)를 계발함으로써 제거할 수 있다.
23. 여기서도 보듯 선(jhāna), 즉 삼매(samādhi)만으로는 깨달음에 이를수 없다는 것이 분명하다.
사마타 수행(samatha-bhāvanā)을 통해서 초선, 이선, 삼선, 사선
그리고 공무변처,식무변처,무소유처,비상비비상처의 본삼매(appanā-samādhi)를 증득할 수 있지만
이러한 본삼매의 경지가 곧 모든 번뇌가 소멸하는 궁극적 깨달음은 아니다.
깨달음의 경지, 구체적으로 말하면 도와 과의 경지는 사성제의 통찰, 팔정도(八正道)의 완성,
온(蘊),처(處),계(界)의 무상·고·무아, 12연기(十二緣起)의 역관등을 통해서 실현되는 것이다.
경에서는 10가지 족쇄 가운데 몇 가지 족쇄가 풀렸는가에 따라서 예류· 일래· 불환· 아라한의 경지를 배대해서 설명한다.
24. 수완나부미(金地國 Suvaṇṇabhumi)는 suvaṇṇa(황금)+bhūmi(땅)의 합성어로‘황금의 땅’이란 뜻이다.「본생경」등을 보면 일찍부터 인도대륙과 무역로가 개통되어 물적, 인적, 문화적 교류가 있었던것 같다. 학자들의 의견을 종합해보면 이 수완나부미는 대략 지금의 양곤, 따톤, 바간이 위치한 하부 미얀마에서 태국의 니콘파톰(Nakon Pathom)과 말레이반도 서해안을 아우르는 지역이라고 추정된다. 3차 결집후 인도의 아쇼카왕이 이 지역에 소나(Sona)와 웃따라(Uttara)장로를 보내 「범망경(梵網經)」(D1)을 설하여 처음으로 불교를 전파하기도 하였다. 황금의 땅(金地國)이란 의미때문에 수완나부미가 위치했던 미얀마를 영어로 Golden land라 부르기도 한다.
25. 전생을 기억하는 지혜(宿命智 pubbenivasaanussati-ñāṇa)는 여섯 가지 신통지(六神通)가운데 네 번째 지혜로써 사선(四禪)을 토대로 하여 일어난 지혜이기 때문에 원하기만 하면 수십만 생 이전 등도 기억할 수 있지만 이 태어남을 기억하는 지혜(jātissara-ñāṇa)는 이러한 사선(四禪)을 토대로 한 신통지가 아니기 때문에 제한적으로만 전생을 기억할 수 있는 지혜이다. 그러므로 사선(四禪)의 체험이 없이도 갑자기 생길 수도 있고 주석서에서는 추론(takka)에 의해서도 생길 수 있는 것으로 설명되고 있다. 이 태어남을 기억하는 지혜(jātissara-ñāṇa)는 경에는 나타나지 않으며 주석서와 복주서 문헌에 드물게 나타나고 있다.
26. 띳사 대사원(Tissa-Mahāvihāra)은 상좌부 불교의 근본도량이었으며 수많은 고승대덕을
배출한 상좌부 불교역사의 산실이었다. 지금도 스리랑카의 아누라다푸라(Anurāhapura)에 남아있다.
27. 「독사경(毒蛇經 Āsīvisopama Sutta)」은『상응부(相應部)』〈육처상응(六處相應)〉(S.197)에 나오는 경이다. 이 경은 우리 몸을 이루고 있는 지(地), 수(水), 화(火), 풍(風)의 사대(四大)를 네 마리 독사에 비유하고 그러한 네 마리 독사를 매일 씻기고 돌봐줘야 하며 자칫 잘못하면 독사에게 물려죽을수 있다는데서 큰 두려움을 느낀 사람이 도망쳐 나와 팔정도라는 땟목을 타고 강 반대편의 피안(彼岸), 즉 열반에 도달하는 과정을 설한 경이다.
28. 수명의 상카라(āyu-saṅkhāra)는 수명을 유지시키는 힘, 생명현상, 또는 살려는 의지를 뜻하고 아비담마에서는
생명기능(命根)으로 표현된다. 중국에서는 생존의욕(生存意欲)으로, 영역은 will to live, life principle등으로 번역된다.
29. 부처님의 제자에는 재가자와 출가자라는 두 종류가 있다. 재가의 남자신자는 우바새(優婆塞 upāsaka), 또는 청신남(淸信男)이라 하고, 여성신자를 우바이(優婆夷 upāsika), 또는 청신녀(淸信女)라고 한다. 재가자는 출가자를 받을어 생활에 필요한 물품등을 보시하고 그 지도를 받아 재가생활을 영위하면서 수행한다. 삼보에 귀의하고 오계를 받음으로써 재가신자가 된다. 그리고 출가한 남성 수행자를 비구(bikkhu)라고 부르며, 여성 수행자를 비구니(bikkhuni)라고 부른다. 비구란 ‘구걸하는 사람’이라는 의미이며, 신자의 시물에 의해 생활하면서 수행에만 전념하는 스님들을 가리킨다. 비구와 비구니가 될 때는 구족계(upasampadā)를 받는데 비구는 227계이고 비구니는 311계이다. (다만 상좌부 불교의 비구니는 오래전에 그 법맥이 단절되었기 때문에 오늘날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를 사부대중(四部大衆)이라 하며 불제자를 총칭하는 말이다.
30. 기쁨의 정원(nandavana)이라 옮긴 난다와나(nandavana)는 nanda(기쁨) + vana(정원)의 합성어로 신들의 왕 제석천이 사는 삽십삼천(Tāvatiṁsa)의 도시에 있는 정원이름이다. 환희원(歡喜園)이라고도 한다. 이곳에 제석천(Sakka)이 사는 에까뿐다리까 천궁(Ekapuṇḍarīkā-vimā)가 있다고 한다.
31. 죽음을 계속해서 생각함(死隨念 maraṇanussati)은
「청정도론」(VⅢ)에서 열가지 계속해서 생각함(十隨念)중의 하나로 나온다.
이 열가지 계속해서 생각함이란
① 부처님을 계속해서 생각함
② 법을 계속해서 생각함
③ 승가를 계속해서 생각함
④ 계를 계속해서 생각함
⑤ 보시를 계속해서 생각함
⑥ 천신을 계속해서 생각함
⑦ 죽음을 계속해서 생각함 』
⑧ 몸에 대한 알아차림
⑨ 들숨날숨에 대한 알아차림(出入息念)
⑩ 고요함을 계속해서 생각함이다.
「청정도론」에 따르면 이 죽음을 계속해서 생각함(死隨念)은
죽음의 위험이 언제나 우리를 넘보고 있음을 상기하거나,
그 죽음의 공포에 자신이 어떻게 대응하고 있는지 숙고하며,
혹은 남들의 죽음에 내가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되돌아보는 등의
공부를 통해 죽음을 맞아서도 당황하지 않고 공포에 떨지 않으며,
살아서 불사의 경지를 못 이루면, 죽어서 좋은 내생을 맞는다고 한다.
32. 사야(sayā)는 미얀마어로 남자 스승을 뜻하는 존칭어이다.
33. 이는 의성어로 지금도 미얀마에 가면 식당에서 음식을 주문하거나 웨이터를 부를 때 이렇게 혓바닥과 입술을 이용하여
‘칫칫’ 또는 ‘츠츠’소리를 내는 광경을 많이 볼수 있다. 이는 영국 식민시대의 잔재로서 하인을 부를 때 쓰던 나쁜 습관이다.
34. 존재(有)로 번역되는 바와(bhava)는 서양에서 becoming으로 옮기고 있듯이 그냥 존재가 아니고 갈애(taṇhā)와
취착(upādāna)을 통해서 끊임없이 되어가는 과정이다. 즉 존재는 어떤 고정된 불변체가 아니라 끊임없이 생멸하는
오온(五蘊)이 흐르는 진행과정 그 자체임을 뜻한다.
35. 육사외도(六師外道)는 BC 5~3 세기 인도 우파니샤드 철학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 사상 가운데 세력이 컸던 여섯 유파를
이르는 말이다. 이들은 힌두교의 기본 경전인「베다」와「우파니샤드」에 배치되는 점이 많았고, 당시 전통의 문화에 대한
일종의 반문화 운동을 전개했었던 새로운 사상가들이었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① 푸라나 깟싸빠(Pūrana Kassapa) - 도덕 부정론
노예의 아들로 태어난 푸라나는 인과 업보를 부정하는 주장을 폈다. 악한 일을 하거나 선행을 하던 간에 둘다 선·악의 과보를 받지 않는다고 했다. 이는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자유로웠던 당시의 사회상을 반영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② 막칼리 고살라(Makkhali Gosāla) - 숙명론
아지비까(Ājīvika)교파의 개조인 막칼리는 삶의 모든 것이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결정된 숙명에 따르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일체 생명체의 윤회나 해탈도 원인이 없으며, 다만 자연의 상황과 결정에 따른다고 하였다. 부처님 당시에 상당한 세력을 가졌으며 후대의 아쇼카 비문에도 독립종교로 기록되었으나, 후에 자이나교에 흡수되었다. 아지비카(Ājīvika)란 생계수단을 뜻하는 ājiva(命)에서 파생된 단어로 그들은 바르지 못한 생계수단으로 삶을 영위하고 있다고 이해했기 때문에 중국에서 사명외도(邪命外道)로 옮겼다. 이들은 나체수행자들이었다고 한다.
③ 아지따 케사캄발린(Ajita Kesakambalin) - 유물론
아지따는 일체가 지(地)·수(水)·화(火)·풍(風)의 네 원소와 활동하는 공간인 허공만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주장하였다. 오직 현세뿐이며 선악의 행위에 대한 과보도 없으며, 생명체가 죽으면 신체구성의 네 원소가 자연계로 환원한다고 보았다. 존재론적으로는 유물론이고, 인식론적으로는 감각론이며, 실천적으로는 쾌락주의인 아지따의 사상은 푸라나의 도덕부정론에 대한 철학적 기반을 제공하였다. 이러한 유물론의 전통은 그 후에도 인도에 존재했는데, 이것을 Lokāyata라 하며 불전에서 순세외도(順世外道)라고 하였다.
④ 파꾸다 까짜야나(Pakudha Kaccayāna) - 7요소설
파꾸다는 지·수·화·풍 네 요소 외에 고(苦)·낙(樂)·영혼을 더해 7요소를 인정했는데, 이 영혼도 물질적인 것이므로 그의 사상도 유물론적이다. 이 7요소를 독립적이고 불변하는 실체로 보았으며, 칼로 사람을 베어도 칼이 다만 7요소 사이를 통과한 것 뿐이어서 살인을 한 것이 아니라는 극단적인 주장을 펼치기도 하였다.
⑤ 산자야 벨라띠뿟따(SañJya Belaṭṭiputta) - 회의론
산자야는‘내세, 선악의 과보, 윤회’등의 형이상학적 문제에 대해 인간의 인식능력으로는 알 수 없다는 불가지론(不可知論)을 주장하였다. 당시 이러한 회의론은 폭넓게 확산되어 있었으며, 부처님 상수제자인 사리뿟따와 목갈라나도 처음에는 산자야의 제자였었다.
⑥ 니간타 나타뿟따(Nigantha Nātaputta) - 자이나교
자이나교의 개조인 니간타의 생애는 부처님과 유사하며 비슷한 시대에 밧지국의 베살리에서 왕족의 아들로 태어나 30세에 출가하여 사문이 되었다. 12년의 고행 끝에 완전지(完全智)를 성취하여 30년간 교화를 펼치다가 72세에 사망하였다. 모든 존재를 영혼(jīva)과 비영혼(ajīva)로 나누고, 비영혼을 다시 Dharma(운동의 조건), Adharma(정지의 조건), 허공, 물질로 나눈다. 업(karma)은 미세한 물질로서 외부에서부터 신체로 유입되어 영혼에 부착함으로써 윤회에 속박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윤회에서 벗어나려면 계율을 엄격히 지키고 고행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땅바닥의 벌레를 밟지 않도록 비를 들고 다니며, 공기 중의 미생물을 죽이지 않기 위해 마스크를 쓰고 다니기도 하였다. 또 무소유계를 지키기 위해 나체로 수행했기 때문에 나형외도(裸形外道)라 불리었다. 그 뒤에 자이나교는 힌두교, 불교와 더불어 인도의 3대 종교로 자리 잡았으며, 오늘날 인도에는 3백만 정도의 신도가 있다. 불살생계를 지키고자 농업을 버리고 상업을 해왔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부유한 편이다.
36. 허무주의(虛無主義 nihilism)는 기성의 정치적·종교적·도덕적 권위며 사회질서·이데올로기를 부정하는 사상적 입장이다. 엄밀한 의미로 어떠한 실재(實在)나 진리도 인정하지 않고 그에 대한 인식의 가능성과 가치까지도 부정하는 사상적 개념이므로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무(無)의 사상이다.
37. 유정(有情)으로 번역한 사뜨와(satta)는 중국역경사에서 구역에선 중생(衆生)으로, 신역에선 유정(有情)으로 옮겨졌다. 본서에서는 satta가 일반적 용도로 쓰일때는 중생으로, 감각과 지각력을 지닌 존재를 가리키는 개념일때는 유정으로 옮겼다. 그리고 존재(有)로 번역되는 바와(bhāva)와의 혼동을 피하기 위해서 satta는 문맥에 따라 중생과 유정의 두가지로만 옮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