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기 싫은 꿈이 깼다.
앓던 이가 빠져 개운할 것만 같았는데 빠지지 않고 계속 아프게 할 것만 같은 사랑니가 내 잇몸도 짓누르고 마음도 짓누른다.
'...이번 꿈도 행복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
'긴 꿈을 그리워하는 것까지 막지는 못하겠지만'
'…'
'못지않은 행복한 꿈이 될 수 있도록 할게요’
'…'
'...이번엔 나를 믿어줄 수 있겠습니까'
당신을 믿지 않겠다 할 걸.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네- 기다릴게요'
당신을 기다린다 하지말 걸
'다섯 냥만 빌려주세요'
그때 당신에게 다섯 냥을 빌려 반지를 사지 말 걸
'...은하씨. 언제쯤 나는 부인에게 가락지를 받을 수 있습니까'
'전 가락지가 아니어도 직접 말할 수 있어요'
'…그래도-…'
'사랑해요'
‘…’
‘전하의 바쁜 일이 조금 나아지면요. 그때 드릴게요. 지금은 나랏일에 집중하세요’
사랑한다 말하지 말걸.
생생하게 맴도는 대화들만 붙잡고 후회한다. 당신을 너무 믿어버린 탓에 이제는 더 이상 행복할 수가 없고, 당신을 기다린다고 장담했던 나의 말 때문에 여전히 당신은 나를 찾아 헤매다 길을 잃을까 걱정하고, 그때 당신에게 빌린 다섯 냥을 돈으로도 반지로도 돌려줄 수가 없게 되어서 허망하고.
사랑한다고 했던 탓에 당신을 사랑했던 기억을 지울 수가 없다.
은하는 여전히 꿈 속 그 사람을 사랑해서 울고만 있다.
은하는 여전히 지환을 기억한다. 꿈이 깼는데도.
-
눈이 부실 만큼 백색이었던 궁 안은 하루가 갈수록 그림이 그려진다.
빨간 꽃이 그려져 수놓인 더 이상 흰색이라고는 볼 수 없는 궁 안에서 지환만이 여전히 색을 잃은 채로 서있다.
'…전하 아주 만약에 제가 긴 꿈을 다시 꾸게 되면'
'…'
'...저를 찾느라 애를 쓰지도…'
'…'
'저를 생각하느라 시간을 쓰지도 마세요'
'…'
'...저에게 마음을 쓰지 마세요'
은하를 찾느라 애를 쓰지도, 은하를 생각하느라 시간을 쓰지도, 은하에게 마음을 쓰지도 않는다. 그저 은하를 그리워하느라 무너지고만 있는 지환이다.
무너지고 무너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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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내내 베개가 마를 날 없이 울기만 하던 은하는 집을 나선다.
‘저..잠깐 유튜브 쉴게요’
만류하는 대표를 등지고 마카롱 스튜디오를 벗어났다.
유튜브 채널에 공지가 올라왔다.
“은하와 친구들 채널은 잠시 쉬어갑니다. 곧 다시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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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길로 은하는 미호를 찾아갔다. 미호의 미용실 문이 딸랑- 하고 열리면 오전 예약을 다 끝내고 청소를 하던 미호가 퉁퉁 부은 얼굴의 은하를 보자마자 달려와 걱정어린 소리들을 늘어놓는다.
‘..너- 유튜브는 어떻게 된거야..! 얼굴은 또 왜 이래-…! 울었어..?!’
‘…미호야-..’
한참이나 은하는 길고 길었던 꿈 이야기를 미호에게 했다. 이곳에서나 저곳에서나 미호는 여전히 은하의 실없는 소리를 듣는 데에 거부감이 없다.
‘..나 진짜 너까지 없으면 어떡하나 했는데-..너라도 있어서 다행이다’
‘..내가 왜 없어-… 너 당분간 우리 집에 있어야겠다. 혼자 두면 안 되겠어’
은하가 미호네서 지내는 동안 은하의 우는 소리에 미호는 몇 번이고 깼고
여전히 은하는 꿈을 꾸면서 ‘전하’ 와 ’지환씨’만을 찾다가 마지막엔 항상 ‘미안해요’ 하더니더 서럽게만 울었다. 그러다 지쳐 잠에서 깨고나면 여전히 미호의 방이라는 사실에 쉽사리 다시 잠에 들지 못하곤 했다.
‘..은하야- 넌 뭐가 그렇게 미안하냐-..’
‘..그냥 다..’
‘..그 꿈에 나도 있었다고 했지’
‘..응’
‘그럼..그 전하..라는 사람도 여기에 있지 않겠어?’
‘…’
‘..너가 할 일을 다하고 꿈이 깬 거면’
‘…’
‘기약은 없지만.. 그 사람도 자기 할 일을 다하면 그때 꿈에서 깨겠지’
‘…할 일..’
‘나도 거기서는 이제 모실 은하 아가씨가 없으니까 여기에 있는 걸지도 모르는 거고’
미호도 비현실적인 그 꿈을 자꾸만 간절하게 원하는 은하를 위해 그곳이 정말 있었으면 하고 바랐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은하를 위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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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군 유치원 3번째 간판을 올리는 날. 백성들도 궁인들도 모두가 기뻐하는 그날 지환은 기뻐하지 못했다.
'이제 또 바쁘시겠네요- 저 혼자 심심하겠어요'
'..미안합니다'
'장난이에요'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네- 기다릴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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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씨. 언제쯤 나는 부인에게 가락지를 받을 수 있습니까'
'전 가락지가 아니어도 직접 말할 수 있어요'
'…그래도-…'
'사랑해요'
‘…’
‘전하의 바쁜 일이 조금 나아지면요. 그때 드릴게요. 지금은 나랏일에 집중하세요’
그때의 대화가 떠올라서.
간판이 올라가는 모습이 아닌 정처 없는 하늘을 바라보며 혼자 되뇌었다.
‘..거사가 끝났습니다. 은하씨..너무 오래 걸려.. 미안합니다’
기다려주지 않고 어딘가 가버린 은하가 조금 밉기도 했다. 답지 않게 투기를 부려보아도 미루고 미루다 끝끝내 가락지를 끼워주지 않은 은하가 조금 더 밉기도 했다.
그러다가도 바쁜 일이 끝나면 눈사람을 만들자며 웃던 은하의 모습도, 가락지가 아니어도 직접 말할 수 있다며 망설이지도 않고 사랑한다던 그 여인의 모습이 자꾸만 짙어져서 여전히 미워하는 것에 실패하고 애써 나오는 입김에 잔상도 함께 날려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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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의 속삭이듯 잠꼬대를 듣고는 인색하던 잠이 자꾸만 지환의 눈을 감겼다.
그렇게 지환이 감은 눈을 떴을 땐 은하가 언제 있었냐는 듯 은하만 없던 것처럼 그렇게 또 다른 하루가 시작했다.
지환은 그날부터 은하의 흔적만을 찾았다.
은하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이 없었고 은하의 써 왔던 동화들의 서체는 전부 저의 서체로 바뀌어있었다. 그렇게 은하만 없었다.
지환은 은하의 방을 찾았다. 쓰던 사람이 있었냐는 듯 온기도 없이 언젠가 맞이할 혼인자를 위해 들여놓은 목제 가구만이 지환을 반긴다.
‘…’
다 닫기지 못하고 반 틈 정도 열려있는 서랍을 열어본다.
끝끝내 은하가 끼워주지 않았던 옥가락지와 은하의 편지가 있다.
지환은 그날 지환의 기억에만 있는 은하의 방에서 나오질 못했다. 지환의 눈물에 붓 글씨는 점점 번진다. 그리고 들리지 않을 답을 한다.
….아이들의 울음도 멈췄고 덕분에 모든 이들이 웃고 있으니 어쩌면 제가 할 일이 끝났을지도 모르겠어요……
‘…마지막에는 기어코 나를 울리시는 것까지가 은하씨의 할 일이었나 봅니다’
그래도 지환은 안도했다. 다 바뀌어있던 동화들의 서체가 아니라 여전히 지환의 서체를 흉내 낸 듯한 아이 같은 서체가 그대로 묻어있는 은하의 편지에.
‘..꿈이 아니었나 봅니다. 이렇게 아픈 걸 보니’
그리고 지환은 그대로 은하의 방에서 전하지도 못할 답장을 썼다. 그다음 날 저잣거리 가게를 가서 은하가 남긴 똑같은 가락지와 은하에게 선물했던 똑같은 비녀를 샀다.
지환을 기억 못하는 가게 주인이 지환을 한 번 더 아프게 했지만
‘토끼 같은 부인에게 선물하려 합니다’ 라고 일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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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곳에서나 사계절이 흐른다.
서로에게 진했던 겨울이 돌아올 때마다 은하는 생각한다.
‘전하는-..아직도 이렇게 할 일이 많으신가-…’
그리고 여전히 그리워한다.
하지만 더 이상 울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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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곳에서나 사계절이 돌아온다.
서로에게 남았던 겨울이 올 때마다 지환은 생각한다.
‘..여전히 좋은 꿈을 꾸고 있습니까’
그리고 여전히 그리워한다.
하지만 더 이상 울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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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환은 은하가 남긴 몇 안 되는 흔적을 보면서 울기도 하고 그리워도 하고 먹색 붓으로 은하를 그려보기도 한다.
펼쳐 보는 수첩에는 지환이 적어놨던 '앞머리꼬불, 초록색가디건, 연청바지' 글씨들이 매일 지워져 있다.
은하를 기억하려는 지환을 애써 부정하려는 것처럼.
그럼 지환은 주문을 거는 것처럼 그 세 가지를 다시 써 내린다. 그 세 가지만 있다면 은하를 언제든 찾을 수 있을 것처럼.
애절하고 간절한 주문은 입김에 담아 날려 보냈던 그리움과 함께 하늘에 닿았을까?
옥국에는 봄이 왔다.
수첩을 펼쳐보면 주문을 걸듯 적어 내린 세 가지가 지워져 있을 때보다 그대로 남아있을 때가 많아졌다.
그리고 지환은 잠이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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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 바람이 가시고 겉옷이 가벼워진다.
햇빛이 내린다.
은하는 가장 아끼게 된 초록색 가디건을 입는다. 여전히 앞머리는 꼬불하다. 그리고 버릇처럼 연청바지를 입는다.
돌고 도는 계절에서 이런 날씨가 올 때쯤이면 은하는 이 복장을 고집한다.
그때처럼 그 꿈을 다시 꿔볼 수 있을까 싶은 실없는 바람에.
그리움은 돌고 돌아서 계절처럼 도착하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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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씨 돈이 되는 장난감을 좀 찍어봐- 아니 은하씨는 계약 연장이 간절하지 않은가 봐?!’
여전히 돈밖에 모르는 마카롱 대표다.
은하는 ‘고은하 계약종료’ 글씨 위에 별표까지 쳐 놓은 캘린더를 바라본다. 그걸 보아하니 이래나 저래나 계약 연장 안 해줄 거면서 마지막까지 단물이나 쪽쪽 빨아먹으려나 보다.
‘자꾸 이러 거 찍으라고 강요하실 거면 대표님이 찍으세요’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소품들을 챙기며 은하가 말한다.
‘그리고 캘린더나 좀 가리고나 재계약 연장을 말씀하시지 무슨-…’
쓴 소리도 잊지 않고 사무실을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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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채널을 열어볼까-…’
고민이 많은 은하는 신호등을 앞에 두고도 바닥만 본다. 초록 불이 켜진 것도 모르고 여전히 서 있다가 바삐 지나치는 주변 사람들의 발걸음들에 정신을 차린다.
급히 건너려는 은하를 누군가가 껴안는다.
‘..은하씨 위험합니다’
잊지 못하고 놓지 못하던 꿈속의 목소리가 들린다.
고개를 든 은하는 대답보다도 먼저 흐르는 눈물에 시야가 흐려진다.
‘미안합니다’
‘…’
‘…미안합니다. 울지 마세요’
‘…전하가 왜요-..전하가 왜 미안해요’
‘..꿈에서조차.. 고생을 시키고 이렇게 울려서 미안합니다’
‘…’
고여 흐르는 은하의 눈물을 엄지로 훔쳐주던 그때처럼 여전히 지환은 은하의 눈물을 훔쳐준다.
‘..은하씨 미안합니다’
‘….’
여전히 미안하다 말한다.
‘…아니요..- 아니요. 전하- 왔잖아요. 오셨잖아요’
‘..늦어서 미안합니다’
‘…꿈이 좀 길었어요’
‘…나랏일이..많았습니다’
계절이 돌아올 때마다 허공에 물었던 그리움들이 답이 되어 돌아온다.
‘…꿈을 꾸길 잘했어요’
‘꿈에서 깨길..잘했습니다’
이번 겨울에는 허공이 아닌 서로에게 질문할 수 있게 된 두 사람이다.
‘..많이 기다렸습니까’
‘..네. 기다린다고 했던 내가 미울 만큼..그만큼..오래 기다렸어요’
이번 겨울에는 못다 한 이야기들을 나누고 눈사람을 만들 것이다.
‘사랑합니다’
‘..사랑해요’
드디어 서로를 사랑한다 고백하고 키스하는 두 사람에게는 어쩌면 겨울 뿐아니라 돌아오는 사계절을 함께 맞이 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