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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마하연론 제4권
釋摩訶衍論 卷第四
용수 지음
벌제마다 한역
이인혜 번역
龍樹菩薩造 姚秦三藏筏提摩多奉 詔譯
이상은 성정본각을 자세히 설하는 문[廣說性淨本覺門]이고,
다음은 근본무명 주지를 설명하는 문[根本無明住地門]이다.
【論】 불각(不覺)이란 무엇인가?
진여의 법이 하나인 줄을 여실하게 알지 못하기 때문에 불각심이 일어나 염(念)이 있게 되지만 염은 자상(自相)을 갖지 않기 때문에 본각과 분리되지 않음을 말한다. 비유를 들어보자. 길을 잃은 사람은 향해 갈 방향이 있기 때문에 길을 잃는 것이니, 향해 갈 방향을 떠나면 길을 잃는 일도 없다. 중생도 마찬가지로 각(覺)이 있기 때문에
길을 잃는 것이니, 각성(覺性)을 떠난다면 불각도 있을 수 없다. 불각의 망상심이 있기 때문에 명칭[名]과 의미[義]를 알기에 진각(眞覺)을 설하지만, 불각의 망상심을 떠난다면 진각의 자상(自相)이라고 할 것도 없다.
【釋】 위 글은 두 가지 부문으로 나뉜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불각(不覺)에 대해 갖가지 경에서 설하는 이설들의 관계를 따져보는 문[異說相應契當門]이고,
둘째는 차례에 따라 개별적으로 해석하면서 불각을 여러 각도로 살펴보는 문[隨次別釋散說門]이다.
첫 번째 문은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한다.
크게 깨달으신 석가세존께서 일대에 거쳐 설하신 성스러운 가르침 중에불각을 여러 가지로 설하셨으니
명무명[明]ㆍ암무명[暗]ㆍ구무명[俱]ㆍ비무명[非],공무명[空]과 구족무명[具足]이라.
이 여섯 가지 무명은의미에 따라 다른 명칭을 세운 것이니체를 따져보면 차별이 없다네.
【釋】 석가모니 세존께서 일대에 거쳐 불각에 관해 설하신 갖가지
이설들을 다 모아 보면 모두 여섯 가지가 있다.
무엇이 여섯 가지인가?
첫째는 밝음의 무명[明無明],
둘째는 어둠의 무명[暗無明],
셋째는 밝은 동시에 어두운 무명[俱是無明],
넷째는 밝음도 어두움도 아닌 무명[俱非無明],
다섯째는 공무명(空無明),
여섯째는 구족무명(具足無明)이다.
이것이 불각에 대한 여섯 가지 이설이다.
이상 여섯 가지는 의미에 따라 세운 명칭이니, 체(體)를 따져보면 차별이 없다.
밝음의 무명이란 글자는 어떤 차별된 특성을 갖는가?
게송으로 말한다.
결국에는 다른 것이 없기 때문에 무(無)라 하고
통달하여 밝게 드러나기 때문에 명(明)이라 하니
이러한 인연 때문에
총제적인 개념이지만 의미는 구별해서 밝힌다네.
【釋】 궁극적으로 볼 때 불각에는 다른 것이 없기 때문에 무(無)라 하고, 통달하여 분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에
명(明)이라 한다. 원만한 반야의 해가 법계 어디에나 두루하여 그 어떤 법도 밝지 않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무명이 총체적 개념이지만 의미는 구별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광명실지계경(光明實智契經)』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한다.
“이 때 사리불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께서는 무슨 인연으로 대중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까?
내가 모든 경에서 설한 글자 하나하나, 구절 하나하나에 한량없는 모든 내용이 다 들어가지만, 이제 근기가 둔한 중생을 위해 갖가지 언설을 통해 다르게 설명할 뿐이라고. 만일 세존의 말씀대로라면 오류를 범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무명이란 글자의 뜻은 흑품(黑品)만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반야지혜의 밝은 성질은 나타낼 수 없으며,
무상이라는 글자의 뜻은 생멸하는 모습만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상주하는 무위(無爲)의 진실한 이치를 나타낼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세존께서는 어째서 이와 같이 말씀하십니까?’
이 때 세존께서 사리불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지금 한 말에는 어떠한 오류도 없다. 어째서 그런가?
무명이라는 글자가 반드시 흑품만을 나타낸다고 말할 수도 없다. 그대는 지혜의 힘이 좁고 미약하며
보고 들은 것이 적기 때문에 그러한 의심을 품은 것이다. 그러나 이 무명이라는 글자는 모든 반야지혜의
밝음을 다 포섭하기에 구족하고 원만하여 아무것도 빠뜨리는 것이 없다. 무슨 말인가?
무명은 구경(究竟)의 뜻을 갖기 때문에, 어디나 두루하다는 뜻을 갖기 때문에,
원만하다는 뜻을 갖기 때문에,
평등하다는 뜻을 갖기 때문에,
남음이 없다는 뜻을 갖기 때문에 그것을 무(無)라고 하는 것이다.
또한 통달한다는 뜻을 갖기 때문에,
밝게 드러난다는 뜻을 갖기 때문에,
관조한다는 뜻을 갖기 때문에,
현전한다는 뜻을 갖기 때문에,
장애가 없다는 뜻을 갖기 때문에 그것을 명(明)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는 이어서 자세하게 설하였다.
어둠의 무명[暗無明]이란 글자는 어떤 차별된 특성을 갖는가?
게송으로 말한다.
모든 지혜의 밝음[明]을
숨기고 덮어서 나올 수 없게 하나니
어둠 속의 장엄구처럼
훌륭한 모습을 가졌어도 소용없다네.
【釋】 근본무명은 모든 다라니 지혜의 밝음을 덮어서 나오지 못하게 막는다. 비유를 들어보자. 어둠 속에 있는
장엄구가 아무리 훌륭한 모습을 지녔을지라도 어둠에 가려져 있기 때문에 저 훌륭한 모습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것을 어둠의 무명이라고 이름한다. 이에 대해서는 “모든 중생은 세 가지 지혜를 구족하고 있으나
전도되었기 때문에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한다”라고 설한 『원만계경(圓滿契經)』의 말씀을 경증으로 들 수 있다.
밝은 동시에 어두운 무명[俱是無明]이란 글자는 어떤 차별된 특성을 갖는가?
게송으로 말한다.
오직 한 가지 무명일 뿐이나 어떤 때는 밝고, 어떤 때는 어두우며,
어떤 때는 밝음과 어둠이 함께 하니 비유하면 하나의 어두운 색을
두 사람이 각기 다르게 본다네.
【釋】 무명은 한 종류뿐이지만 어떤 때는 밝기도 하고 어떤 때는 어둡기도 하다.
이것은 한 가지 색을 두 사람이 다른 색으로 보는 데에 비유할 수 있다. 무슨 뜻인가?
말하자면, 가라구사나(迦羅鳩奢那)와 사람의 무리에 속하는 유정[人同分]이 아주 깜깜한 밤,
같은 장소에서 이 어둠의 색을 보는 것과 같다.
가라구사나의 경우에는 오직 청정한 광명의 색만을 보는 반면,
사람의 경우에는 오직 한결같이 어둡고 까만색만을 본다.
동시에 어두운 무명[俱是無明]도 마찬가지다.
오직 하나의 무명일 뿐인데 어떤 때는 밝은 지혜가 되고
어떤 때는 어두운 흑법(黑法)이 됨으로써 두 가지를 갖추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근본무명은 허깨비 사람[幻人] 속에서는 허깨비 물건[質]을 지어 내며,
덕스러운 사람[德人] 속에서는 덕 있는 물건을 만들어 낸다.
그러므로 하나의 형태를 취한다고 해서 하나가 된다고는 할 수 없다”고
설한 『심심밀엄계경(甚深密嚴契經)』의 설을 경증으로 들 수 있다.
밝음도 어두움도 아닌 무명[俱非無明]이란 글자는 어떤 차별된 특성을 갖는가?
게송으로 말한다.
무명은 무시이래로부터
언설을 소의로 삼는 법이 없으며
요별(了別)에 의한 전변[轉]을 멀리 떠났으니
멀리 멀리 떠났기 때문이라네.
【釋】 밝음도 어두움도 아닌[俱非]라고 한 이유는
무명에는 언어라는소의(所依)가 없기 때문이며,
마음의 전변[心轉]을 떠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밝음도 어두움도 아닌 무명[俱非無明]이라고 이름한다.
『팔승천자계경(八勝天子契經)』에서 다음과 같이 설한다.
“이때 광명자재화보묘륜천자(光明自在華寶妙輪天子)가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아서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무명이란 있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대답하셨다. ‘아니다.’
‘그러면 없는 것입니까?’ ‘아니다.’
‘그렇다면 있는 동시에 없기도 한 것입니까?’ ‘아니다.’
‘그렇다면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은 것입니까?’ ‘아니다.’
‘그렇다면 아니라는 그것이 바로 무명입니까[非是]?’
‘아니라는 그것이 무명이 될 수 없다[非非].’
‘어째서 그렇습니까?’
‘무명에는 밝다고 할 만한 것이 없기 때문이니,
이런 이유에서 무시이래로 내려오는 무명[無始無明]이라고 하는 것이다.’”
공무명(空無明)이라는 글자는 어떤 차별된 특성을 갖는가?
게송으로 말한다.
체와 용이 없으므로 공(空)이라 하고 토끼 뿔과 같아서 없다[無] 하며
이러한 도리가 분명하므로 밝다[明]고 설한다네.
【釋】 공무명(空無明)이란
무명의 체와 용이 모두 공하다는 이유에서 무(無)라 하고,
이러한 도리가 명료하게 현전한다는 의미에서 명(明)이라 한다.
이것은 마치 토끼 뿔이라는 것이 본디 체가 없다는 사실을 모든 사람들이 분명히 아는 경우와 같다.
이에 대해서는 “근본무명은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이기 때문에 구체적인 체[事]를 가질 수 없다”고
설한 『무시계경(無始契經)』의 설을 경증으로 들 수 있다.
구족무명(具足無明)이라는 글자는 어떤 차별된 특성을 갖는가?
게송으로 말한다.
더러운 법과 깨끗한 법 모두를 출생하고 증장시키니
이러한 인연으로 구족이라는 명칭을 붙인다네.
【釋】 구족(具足)이라는 명칭은 근본무명이 모든 염법(染法)과
정법(淨法)을 나오게 하고 자라나게 하므로 붙여진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무명의 종자로부터 각지(覺知)의 나무가 나오고 각지의 나무로부터
공덕과 지혜의 꽃이 피고 공덕과 지혜의 꽃은 두 바퀴와 같은 역할을 하여 법신해탈(法身解脫)의
열매를 맺는다”고 설한 『불성해탈계경(佛性解脫契經)』의 말씀과 그 다음에 이어지는 자세한
말씀을 경증으로 들 수 있다.
이상 여섯 가지 근본무명은 『마하연론』의 본문에서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으니,
해당하는 부분을 잘 맞추어 보면 될 것이기에 우선은 생략하고,
여기서는 어둠의 무명[暗無明]에 대해 자세히 설하겠다.
어둠의 무명이라는 글자는 어떤 차별된 특성을 가지며,
경전에서는 몇 가지로 다르게 설하고 있는가?
게송으로 말한다.
무명에는 모두 열 가지 명칭이 있으니
경에서 다르게 설하고 있기 때문이라네.
견일처주지(見一處住地)무명과
보은무진(報恩無盡)무명과
무시유종(無始有終)무명과
무등등생(無等等生)무명과
생득(生得)무명과
관만(觀滿)무명
지애(智礙)무명과
불각(不覺)무명
각료(覺了)무명과
자장(子藏)무명
이와 같은 열 가지 명칭은의미(義)와 작용[義用]에 따라
차별되는 것이라서오직 하나의 어두운 무명일 뿐이라네.
【釋】 부처님께서 일대에 걸쳐 설하신 갖가지 경전에서
무명에 관해 설한 것은 모두 열 가지가 됩니다. 무엇이 열 가지인가?
첫째는 견일처주지,
둘째는 보은무진주지,
셋째는 무시유종주지,
넷째는 무등등생주지,
다섯째는 생득주지,
여섯째는 관만주지,
일곱째는 지애주지,
여덟째는 불각주지,
아홉째는 각료주지,
열째는 자장주지다.
이것이 갖가지 경전에서 설하는 무명에 관한 열 가지 설이다.
이 열 가지 명칭은 오직 하나의 체이지만 작용과 의미에 따라
차별되는 것이니 자세히 관찰해야 한다.
견일처주지(見一處住地)라는 글자는 다른 것과 어떻게 구별되는 특성을 갖는가?
게송으로 말한다.
원만한 반야의 지혜로 일법계를 현견(現見)함에
무명의 체가 한번에 끊기므로 견일처라고 이름한다네.
【釋】 금강심(金剛心)에 이르지 못한 자는 지혜가 원만하지 못하고
복덕이 미약하고 적어서 일심의 한가운데와
실다운[中實] 곳에 통달하지 못하기 때문에 근본무명을 아직 벗어나지 못하다가,
만행(萬行)을 거느리고 과위(果位)에 도달할 때 시각(始覺)의 반야가 분명히 드러나고
본유한 공덕이 구족하고 원만하여 하나이면서 중심이 되는
법계의 심이 안립하여 머무는 곳을 현견(現見)함으로써
근본무명을 남김없이 한 번에 끊기 때문에,견일처혹(見一處惑)이라는 명칭을 붙인다.
『광엄동자계경(光嚴童子契經)』에서 설한 다음과 같은 말씀을
경증(經證)으로 들 수 있다.
“그리고 어떤 혹(惑)은 모든 성문과 벽지불과 십지보살까지도 끊을 수
없으니, 그것은 견일처무명주지(見一處無明住地)를 말한다. 이러한
주지는 일법계를 증득하여 청정하게 깨달은 자만이 끊을 수 있다.”
보은무진주지(報恩無盡住地)라는 글자는 다른 것과 어떻게 구별되는 특성을 갖는가?
게송으로 말한다.
한량없는 모든 부처님께서는 미래가 다하도록 끝없이
무명의 은혜에 보답하므로 보은무진이라고 이름한다네.
【釋】 시방삼세의 모든 부처님께서는 미래가 다하도록 끝없이 무명의 은혜를 갚으신다. 어째서 그런가?
깨달은 자는 누구든 무명을 통해 무위(無爲)의 인(因)을 지어서 법신의 과를 구족하게 장엄하기 때문이다.
『본래청정계경(本來淸淨契經)』에서 설한 다음과 같은 말씀을 경증으로 들 수 있다.
“문수사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께서는 한량없는 겁 동안 몸과 목숨을 아끼지 않고,
모든 악을 끊고 모든 선을 닦으셨습니다. 그리하여 인이 되는 행을 원만히 구족하시고
법성의 바다를 장엄하셨으므로 즐거움[喜樂]이 자재하시고 덕용(德用)이 무애하십니다.
그런데 무슨 인연으로 부처님께서는,
≺나는 많은 은혜를 입어서 미래가 다하도록 다 갚을 수가 없다≻고하십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무명으로 바탕을 삼아서 정각의 도를 이루었기에,
진겁(塵劫)이 다하도록 지중한 은혜를 다 갚지 못한다고 한 것이다.’”
무시유종주지(無始有終住地)라는 글자는 다른 것과 어떻게 구별되는 특성을 갖는가?
게송으로 말한다.
과거로 거슬러 가면 끝나는 시점이 없지만
미래로 나아가면 다하는 데가 있으니
이러한 인연 때문에
무시유종이라 이름한다네.
【釋】 근본무명은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면 본래 시작한 점[本際]이 없기 때문에 시작이 없다[無始]고 이름한다.
한편 미래로 나아가면 반드시 끊어지는 때가 있으므로 끝이 있다[有終]고 이름한다.
『반야바라밀계경(般若波羅蜜契經)』에서 설한 다음과 같은 말씀을 경증으로 들 수 있다.
“시각의 청정한 지혜는 시작은 있으나 끝은 없고, 무명주지는 시작은 없으나 끝이 있다.”
무등등생주지(無等等生住地)라는 글자는 다른 것과 어떻게 구별되는 특성을 갖는가?
게송으로 말한다.
항하수보다 많은 상번뇌(上煩惱)는 전후 없이 일시에
다 갖추어서 나오기 때문에 무등등생이라 이름한다네.
【釋】 근본무명은 수승한 힘을 갖기 때문에 항하의 모래알보다 많은 상번뇌가 전후 없이 일시에 나오므로,
번뇌를 생함에 있어서는 아무것도 견줄 것이 없다[無等等生]는 명칭을 붙인다.
『자체계경(自體契經)』에서 설한 다음과 같은 말씀을 경증으로 들 수
있다.“대자재천에 사는 천마파순(天魔波旬)은 다른 것과는 견줄 수 없을
정도로 색력(色力)과 수명과 권속의 무리와 도구가 자재하고 수승하다.
대력주지(大力住地)도 이와 같아서 거친 무명이나 미세한 무명이나,
혹은 시간적으로 앞서느냐 뒤에 오느냐에 관계없이, 전후가 일시에 나와서 자라난다.”
생득주지(生得住地)라는 글자는 다른 것과 어떻게 구별되는 특성을 갖는가?
게송으로 말한다.
생(生)이란 세 가지 생을 말하며
득(得)이란 건립하고 성취함을 말한다네.
무명이 저렇게 성립하기에
생득이라 이름한다네.
【釋】 생이라고 한 것은 세 가지 생상(生相)을 말한다.
득이라고 한 것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건립(建立)한다는 뜻이고,
둘째는 성취(成就)한다는 뜻이다.
근본무명이 저 세 가지 상을 잘 성립해 내므로, 생하고 성립해 내는 주지[生得住地]라고 이름한다.
『십종망상계경(十種妄想契經)』에서 설한 다음과 같은 말씀을 경증으로 들 수 있다.“
아들에서 아들로 내려오면서 전전한다는 뜻에서 생득주지라고 한 것이지,
무명 자체를 근거로 해서 생득이라고 이름한 것이 아니다.”
관만주지(觀滿住地)라는 글자는 다른 것과 어떻게 구별되는 특성을 갖는가?
게송으로 말한다.
근본무명의 체는 금강심 이전에는 다하지 않고
반드시 원만한 과위를 기다려야 하기에 관만이라 이름한다네.
【釋】 근본무명은 금강심 이전에는 아직 다하지 않고 남아 있으며, 반드시 만위(滿位)를 기다려서야
영원히 남김없이 끊긴다. 그러므로 관이 원만성취되기를 기다리는 주지[觀滿住地]라고 이름한다.
『무상보리계경(無上菩提契經)』에서 설한 다음과 같은 말씀을 경증으로 들 수 있다.
“근본무명이 반드시 구경도를 기다리는 것을 관이 원만히 성취되었다고표현하며,
반면 갖가지 희론의 식이 위(位)에 따라 점점 제거되는 것을 관이 부분적으로 성취되었다고 한다.”
지애주지(智礙住地)라는 글자는 다른 것과 어떻게 구별되는 특성을 갖는가?
게송으로 말한다.
일체종지(一切種智)를 장애하며 세간의 통달하는 것을 거슬러
상위(相違)의 과실이 지극히 무거우므로 지애라고 이름한다네.
【釋】 근본무명은 아득하고 막막하여 지극히 어두운 반면, 일체 종지는 지극히 밝고 명료하게 드러난다.
이렇게 밝음과 어두움이 서로 어긋나는 허물이 매우 심각하므로 지혜를 장애하는 주지[智礙住地]라고 이름한다.
『심심인연계경(甚深因緣契經)』에서 “염법인 번뇌애[染煩惱礙]는 정체지(正體智)와 상위되는 허물이
과중하여 장애라는 개념을 건립하며, 반야의 지혜애[般若慧礙]는 후득지(後得智)와 상위되는 허물이
과중하므로 장애라는 개념을 건립한다” 하고, 이어서 자세히 베푸신 말씀을 경증으로 들 수 있다.
불각주지(不覺住地)라는 글자는 다른 것과 어떻게 구별되는 특성을 갖는가?
게송으로 말한다.
모든 중생은 시작 없는 때로부터 삼신(三身)의 보리를 갖추고
사덕(四德)의 열반을 원만히 성취하였으나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므로 불각이라 한다네.
【釋】 모든 중생은 무시이래로 삼신을 구족하고 사덕을 원만히 하여, 자성이 청정하고 속박을 멀리 떠났다.
그러나 무명 때문에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기에 불각주지(不覺住地)라 이름한다.
『대본능가계경(大本楞伽契經)』에서 설한 다음과 같은 말씀을 경증으로 들 수 있다.“반야에는 지가 없다[無知].
갖가지 희론의 식은 다름 아닌 지가 없음[知無]을 말하고 근본무명은 다름 아닌 불각을 말한다. 어째서 그런가?
각(覺)임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시고는 이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셨다.
각료주지(覺了住地)라는 글자는 다른 것과 어떻게 구별되는 특성을 갖는가?
게송으로 말한다.
십지(十地)보살이 알 수 있는 경계도 아니고
범부와 소승이 알 수 있는 경계도 아니라
오직 크게 깨달은 자만이 요달할 수 있기에 각료라고 한다네.
【釋】 근본무명은 십지보살도 완전히 알지 못하는데, 하물며 범부나 소승이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오직 크게 깨달은 자만이 남김없이 끝까지 안다. 그러므로 각료주지라고 이름한다.
『보적계경(寶積契經)』에서 설한 다음과 같은 말씀을 경증으로 들수 있다.
“부처님만이 알 수 있는 경계라서 여타의 사람들은 알 수 없으니,
부처님께서는 무명을 완전히 깨달았기[覺了] 때문이다.”
자장주지(子藏住地)라는 글자는 다른 것과 어떻게 구별되는 특성을 갖는가?
게송으로 말한다.
무명장(無明藏)의 큰 바다는
상번뇌(上煩惱)를 다 거두어들이고 유지시키니
마치 씨앗이 자기 인자[子]를 유지하듯 하기에
자장(子藏)이라 한다네.
【釋】 무시무명은 번뇌를 거두어들이고 유지시킴으로써 번뇌가 의지하고
머물 수 있도록 한다. 이는 마치 갖가지 씨앗이 드러난 형태의 인자든
숨은 형태의 인자든 다 간직하는 경우와 같으므로 자장주지(子藏住地)라 이름한다. 『본업계경(本業契經)』에서
“씨앗이 갖가지 인자를 간직하고 있는 것이 마치 인드라망[天網]과 같다”고 하신 말씀을 경증으로 들 수 있다.
무슨 까닭에 열 가지 마다 주지(住地)라는 이름을 붙였으며,
‘주지’라는 글자는 어떤 특성을 갖는가?
게송으로 말한다.
무명의 힘이 커서
모든 염법을 머물게 하고 지탱시키는 일이
마치 대지(大地)가 네 가지를 짊어지고 있듯 하기에
주지(住地)라고 이름한다네.
【釋】 근본무명은 가장 큰 힘을 갖고 있어서 모든 염법을 아주 잘 머물러 지탱시킬 수 있다.
이는 네 가지 무거운 짐을 질 만큼 가장 절 힘을 가진 대지에 비유된다.
그러므로 이들 무명에 주지(住地)라는 명칭을 붙인다.
무엇이 대지가 짊어진 네 가지 짐인가?
첫째는 큰 바다,
둘째는 모든 산,
셋째는 초목,
넷째는 중생이니, 이것이 네 가지다.
『승만계경(勝鬘契經)』에서 “세존이시여, 이러한 무명주지의 힘은 유애주지(有愛住地)를 포함한
사주지(四住地)를 말하는데 이 중에 무명주지가 가장 큰 힘을 갖습니다” 하고,
이어서 자세히 설한 말씀을 경중으로 들 수 있다.
이제까지는 불각(不覺)에 대해 갖가지 경전에서 설하는
이설들의 관계를 따져보는 문[異說相應契當門]을 설하였고,
다음부터는 차례에 따라 개별적으로 해석하면서
불각을 여러 각도로 살펴보는 문[隨次別釋散說門]을 설하겠다.
‘불각(不覺)이란 무엇인가’라고 한 구절은 근본불각과 지말불각 모두를
전체적으로는 내거는 말이고, 그 아래로는 불각에 대해 해석하면서 간략하게 보여주는 문장이다.
이 중에서 첫 번째는 근본불각을 해석한 문장이고, 다음으로는 거기서 분리되어 나온 권속의 불각을
해석한 문장이다. 근본이 되는 불각은 자세하게 해석하고 지말이 되는 불각은 간략히해석하였으니
자세히 관찰해 보면 될 것이다.
‘진여의 법이 하나일 줄을 여실하게 알지 못하기 때문에 불각심이 일어나’라고 한 구절은
근본불각이 일어나는 인연을 나타낸다.
근본불각은 어떤 인연으로 일어나서 있게 되는가?
여여하지 못한 데[不如]서 일어나 있게 된다. 어떠한 법들에 대해서 여여하지 못하다는 말인가?
세 가지 법에 대해서 여여하지 못하다는 말이다.
여여하지 못하다는 말은 어떤 뜻을 갖는가? 거스른다[違逆]는 뜻을 갖는다. 무엇이 세 가지 법인가?
첫째는 여실하게 아는[實知] 일법(一法)이고,
둘째는 진여의 일법이며,
셋째는 일심의 일법이다. 이것이 세 가지다.
여실하게 아는 일법이란
능히 통달하는 지혜[能達智]로서의 일체의 각(覺)을 말한다.
진여의 일법이란
통달할 바의 경계[所達境]인 평등한 이치를 말한다.
일심의 일법이란
소의가 되는 체[所依體]로서 일법계를 말한다.
이 세 가지 법을 거스르기에 무명이 일어나게 된다.
그러므로 본론에서 ‘진여의 법이 하나인 줄을 여실하게 알지 못하기 때문에 불각심이 일어난다’고 하였다.
저 세 가지 법은 모두 하나[一]이면서중심[中]인 것을 놓지 않기 때문에 ‘일(一)’이라는 명칭을
공통적으로 붙인다.이 아래로는 근본불각에서 분리되어 나온 권속불각(眷屬不覺)을
간략하게 나타낸 문장이다.‘염(念)이 있게 되지만’이라고 한 구절은 근본불각에서 분리되어 나온 무명을 나타낸다. 근본이 성립되고 난 후에는 그에 따른 모든 권속이 있게 되기 때문이다. 이 아래로 이어지는 문장은
두 부문으로 나뉜다.
무엇이 두 부문인가?
첫째는 본유의 덕으로 돌아가려는 환상을 만드는 데서 무명이 힘을갖느냐 갖지않느냐는 문제를 논하는문
[歸德成幻力無力門]이고,
둘째는 망법을 반연함으로써 진을 드러내는 데서 무명이 힘을 갖느냐 갖지 않느냐는 문제를 논하는 문
[攀妄顯眞力無力門]이다.
무슨 뜻에서 ‘귀덕성환문’이라 하는가?
모든 무명은 그 체를 따져보면 자체의 상이 없고 본각에 의지해서만 성립할 수 있다. 비유를 들어보자.
길에서 방향을 잃은 사람은 길을 의지했기 때문에 길을 잃는 일이 생긴 것이므로, 만일 길을 버리면
길을 잃는 일도 없다. 본론에서는 이를, ‘염(念)은 자상(自相)을 갖지 않기 때문에 본각과 분리되지 않음을 말한다.
비유를 들어보자.
길을 잃은 사람은 향해 갈 방향이 있기 때문에 길을 잃는 것이니, 향해 갈 방향을 떠나면 길을 잃는 일도 없다. 중생도 마찬가지로 각(覺)이 있기 때문에 길을 잃는 것이니, 각성(覺性)을 떠난다면 불각도 있을 수 없다’고 하였다.
무슨 뜻에서 ‘반망현진문’이라 하는가?
법신의 반야는 스스로를 드러낼 능력이 없어서 반드시 불각을 의지한 후에야 명칭과 의미를 드러내 완전히
현전(現前)할 수 있다. 비유를 들어보자. 용맹스런 사나이는 많은 군졸무리들에 섞여 있어야 비로소 높은 위치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본론에서는 이를, ‘불각의 망상심이 있기 때문에 명칭과 의미[名義]를 알기에
진각(眞覺)을 설하지만, 불각의 심을 떠난다면 진각의 자상(自相)이라고 할 것도 없다’고 하였다.
이제까지는 근본무명주지에 관해서 밝히는 문이었고,
다음으로는 권속무명주지에 대해 밝히겠다.
권속무명주지를 결택하는 문은 이중으로 되어 있다. 무엇이 이중인가?
첫 번째는 미세한 권속무명을 밝히는 문[微細眷屬門]이고,
두 번째는 추중한 권속무명을 밝히는 문[麤重眷屬門]이다.
첫 번째 문은 어떠한가?
【論】 다음으로 불각에 의지하기 때문에 세 가지 상을 내니,
세 가지 상은 저 불각과 상응하여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 무엇이 세 가지 상인가?
첫째는 무명업상(無明業相)이다. 불각에 의지하기 때문에 마음이 움직이는 것을 업(業)이라 한다.
깨닫기만 하면 움직이지 않지만 움직이면 바로 괴로움이 있게 되니, 과는 인과 분리되지 않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능견상(能見相)이다. 움직임에 의지하기 때문에
보는 공능[能見]이 생기므로 움직이지 않으면 보는 일도 없다.
세 번째는 경계상(境界相)이다. 보는 공능에 의지하기 때문에
경계가 망령되이 나타나므로 보는 일을 떠나면 경계도 없다.
【釋】 위 문단은 이중으로 되어 있다. 무엇이 둘인가?
첫째는 내용 전체를 간략하게 내거는 문[摠標略示門]이고,
둘째는 내건 주제어에 대해 해석하면서 동시에 완전하게 논증하는 문[標釋俱成門]이다.
첫 번째 문에서 ‘불가에 의지하기 때문에 세 가지 상을 내니, 세 가지 상은 저 불각과 상응하여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고 한 구절은, 지말불각이 본체의 기력(氣力)을 받아서 성립한다는 사실과 저 본체는 지말불각의 상(相)에서
가지[枝]와
양분[養]을 받아 성립한다는 사실을 드러내 보여주는 내용이다. 이것은 마치 서로가 서로에게 인(因)이 되어주면서 성립하는 부자관계와 같다. 이런 뜻에서 ‘상응하여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고 한 것이다.
만일 그렇게 말한다면, 십지(十地) 이상의 모든 보살 등은 당연히 무명을 끊어 묘각(妙覺)과 같아야 하지 않은가?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그들은 거친[麤] 무명의 상은 끊었으나 미세한 세 가지 상을 아직 끊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아래로는 두 번째 문을 해석한다. 이 세 가지 상 중에
첫 번째인 업상(業相)은 능견(能見)과 소견(所見)의 차별이 없고 심왕(心王)과 염법(念法)이 나뉘지 않으니,
정밀하게 움직이고 은밀하게 흐른다는 뜻에 한정해서 업(業)이라는 명칭을 쓴다.
이런 식으로 움직이고 흐르는것은 오직 불각(不覺)에 의존한다. 그러므로 깨달기만 하면 움직이지 않지만
움직이면 바로 괴로움이 있게 된다. 어째서 그런가?
업상의 최초의 과(果)는 무명의 최초의 인(因)을 떠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를 본론에서는, ‘첫째는 무명업상(無明業相)이다.
불각에 의지하기 때문에 마음이 움직이는 것을 업(業)이라 한다. 깨닫기만 하면 움직이지 않지만
움직이면 바로 괴로움이 있게 되니, 과는 인과 분리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두 번째는 전상(轉相)이다. 업상의 염을 소의로 삼기 때문에 전전하여[轉] 능연(能緣)을 짓고
흘러서 요별하는 상[了相]을 만든다. 그러므로 업상에서 염을 움직이는 분위(分位)가 없다면 요별하는
전상의 견분(見分)도 당연히 있을 수 없다. 이 움직임에 의지해서 저 전변하는 일이 있기에,
그것을 전상(轉相)이라 이름한다. 본론에서는 이것을, ‘두 번째는 능견상(能見相)이다.
움직임에 의지하기 때문에 보는 공능[能見]이 생기므로 움직이지 않으면 보는 일도 없다’고 하였다.
세 번째는 현상(現相)이다. 요별(了別)의 전변을 소의로 삼기 때문에 희론의 경계가 빠짐없이 현전하고 소연(所緣)의 상분(相分)이 원만하게 늘어선다. 그러므로 요별견식(了別見識)의 분위를 떠난다면 소연경계로서의 대상도 있을 수 없다. 이 견분(見分)에 의지하여 저 경계상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마치 밝은 거울에 의지하여 갖가지 색상이 나타나는 것과 같기 때문에 상을 나타낸다[現相]는 보현을 쓴다. 본론에서는 이것을
‘세 번째는 경계상(境界相)이다. 보는 공능[能見]에 의지하기 때문에 경계가 망령되이 나타나므로, 보는 일을 떠나면 경계도 없다’고 하였다.이 세 가지 상이 명칭으로는 구별되지만 다 같이 본식(本識)을 나타내는 것임은 앞서 결택분(決擇分)에서 이미 자세히 설하였다. 이 세 가지 상 중에서
첫 번째 업상은 능(能)과 소(所)가 차별 없는 동체(同體)다.
가운데 능견상은 오직 능견만 있고 소견은 없다.
마지막 현상은 능과 소가 완전히 다 갖추어져 있다.
근본무명에는 또 어떠한 차별이 있는가? 이는 어떤 의심에서 유래하는가?
무명 자체는 명료하지 못하다는 의심에서 나왔기 때문일 것이다.
무슨 말인가? 만일 심체가 움직임이 없다는 면을 기준으로 해서 무명이라는 명칭을 붙인 것이 아니냐고 한다면, 사실이 그렇지 않다. 어째서 그런가?
불각을 무명업상과 능견상과 경계상 세 가지로 나누는 대목[三者分]에서 ‘불각에 의지하기 때문에 마음이 움직이는 것을 업(業)이라 한다’고 했기 때문이다. 또 움직임이란 업식(業識)의 분위를 말하는 것이지 무명(無明)을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사실이 그렇지 않다. 어째서 그런가?
교량분(校量分, 에서 ‘일법계를 요달하지 못하므로 마음이 상응하지 않아
홀연히 망념이 일어나는 것을 무명이라 한다’고 했기 때문이다.
움직인다는 것과 일어난다는 두 문장은 업식과 관련해서
그렇게 말한 것이지 무명을 두고 하는 말은 아니다. 어째서 그런가?
능히 움직이고 일어나는 것은 근본무명이고
따라서 움직이고 일어나는 것은 업식이다.
이런 의미로 본다면 모순되는 오류가 없다.
만일 그렇다면 근본무명 자체는 어떻게 심체를 움직여서 갖가지 망념을 일으키는가?
이 점은 알기 어렵기 때문에 십지보살이 알 수 있는 경계도 아니고 삼현보살이 헤아릴 수 있는 경계도 아니며,
오직 부처님만이 끝까지 알아낸 경계이니, 함부로 말을 붙일 것이 못 된다. 그러나 경의 말씀에 근거해서 언설을 빌어 억지로 ‘불각’이라는 명칭을 붙여본 것에 불과하다.
염(念)이 생겨나는 인연에 대해서는 결택분에 가서 분명히 밝히겠다.
업상(業相)의 미세한 염은 능과 소가 나뉘지 않아서 상과 경계를 분별할 수 없다.
무슨 인연으로 움직임이라는 명칭을 써서 업상을 해석하는가?
이 문제에 대해서도 함부로 말을 붙일 수 없으며, 반드시 경설을 근거로 해야만 이와 같이 말할 수 있다.
“업상의 본식은 능료(能了)의 작용도 없고 소료(所了)의 작용도 없어서 분석하고 구분지울 수 없다.
오로지 정밀하게 움직이고 은밀하게 흐르기 때문에 ‘건마(鍵摩)’라는 명칭을 붙일 뿐이다.”
만일 어떤 중생이 갖가지 말을 빌어다 이 경계를 수식하려 한다면,
아서라, 종일토록 해도 말로는 다 설하지 못할 일이다.
이제까지는 미세한 권속무명을 설명하는 문[微細眷屬門]을 설했고,
다음부터는 추중한 권속무명을 설명하는 문[麤重眷屬門]을 설하겠다.
【論】 경계(境界)의 연(緣)이 있기 때문에 나아가 여섯 가지 상이 생하니, 무엇이 여섯 가지인가?
첫째는 지상(智相)이다. 경계에 의지하여 마음으로 분별을 일으키고,애착하거나 애착하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는 상속상(相續相)이다. 지상에 의지하기 때문에 괴롭다거나 즐겁다는 망념을 내고,
괴롭다거나 즐겁다는 마음으로 분별망념을 일으켜 서로 상응하면서 단절하지 않기 때문이다.
셋째는 집취상(執取相)이다. 상속상에 의지함으로써 경계를 연하고 염하여
고락을 머물러 지탱하면서 마음으로 집착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넷째는 계명자상(計名字相)이다. 허망하게 집착하는 집취상에 의지해서
거짓 명자[假名]와 언설상[言相]을 분별하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기업상(起業相)이다. 계명자상에 의지해서 그 명칭을 탐색하고 집착하여 갖가지 업을 짓기 때문이다.
여섯째는 업계고상(業繫苦相)이다. 업에 의지하여 과보를 받아서 자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釋】 이상 여섯 가지는 모든 의식의 지[意識地]에서 일어나는 일이지,
다른 식에서 일어나는 법이 아니다. 어째서 그런가?
『대본경(大本經)』에서 이와 같이 설하기 때문이다. 이 문제에 관련된 결택분(決擇分)에는
어떤 경들이 해당하는가? 『능가경』이 해당된다. 저 경에서는 어떻게 설하고 있는가?
『분류능가경(分流楞伽經)』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한다.
거대한 바다의 물결이 사나운 바람 때문에 일어나
커다란 파도가 바닷속 깊은 곳을 두들기며 끊어질 때가 없듯이
상주(常住)하는 장식(藏識)의 바다도 경계라는 바람에 흔들려
갖가지 식(識)의 물결이 날도 뛰듯 계속해서[轉] 생겨나네.
파랑ㆍ빨강 등 각종 색깔과 구슬[珂]과 우유와 석밀과
담담한 맛과 여러 가지 꽃이나 열매가 그것이네.
해와 달이 그 빛과다르지도 않고 다르지 않은 것도 아니듯이,
바닷물이 파도를 일으키듯이, 칠식(七識)도 마찬가지로
마음과 본래적[俱]으로 화합해서 생한다네.
마치 바닷물이 변하여 갖가지 파도로 일어나듯이
칠식도 마찬가지로 마음과 본래적으로 화합해서 생한다네.
저 장식(藏識)이라는 처소에서 갖가지 모든 식이 전변[轉]하니
저 의식(意識)으로써 갖가지 상의 의미를 사유한다는 말이네.
파괴되지 않는 상(相)에 여덟 가지가 있으니
무상(無相)이라는 것 역시 어떠한 상도 가질 수 없다네.
이 경문에 근거해서 해석했기 때문에 권속불각을
여섯 가지 상으로 설한 문장이 나온 것이다.
무슨 뜻을 밝히기 위해서 위 경문을 인용했는가?
현식(現識)이라는 바다의 성품은 원래 상주(常住)하는 것인데
육진경계(六塵境界)의 바람에 의해 움직인다.
위 경문은 이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 인용한 것이다.
일곱 가지 전식[七轉識]과 현식(現識)의 체가 내적인 인[內因]이 되고
육진경계가 외적인 연[外緣]이 되어 여섯 가지 추중(麤重)한 상을
무성하게 일으키기 때문이다.이 내용을 인용한 경문의 부분은 다음과 같다.
거대한 바다의 물결이 사나운 바람 때문에 일어나
커다란 파도가 바다 속 깊은 곳을 두들기며 끊어질 때가 없듯이
상주(常住)하는 장식(藏識)의 바다도 경계라는 바람에 흔들려
갖가지 식의 물결이 날고뛰듯 계속해서 생겨나네.
무엇을 경계의 바람이라고 하며, 그 바람은 어떤 형상을 갖는가?
파랑ㆍ빨강 등 갖가지 색깔[顯色]이 안식(眼識)을 일으키고,
보가(寶珂) 등 구슬이 갖가지로 묘하고 뛰어난 소리를 내서 이식(耳識)을 일으키고,
전단나무와 우유 등의 향은 갖가지 아름다운 향기를 퍼뜨려 비식(鼻識)을 일으키고,
목라(木羅)와 석밀(石蜜) 등 갖가지 편안한 촉감이 화합한
아름다움으로 즐거움을 주는 도구는 신식(身識)을 일으키고,
달거나 담담한 등의 맛은 어울리는 데 따라서 갖가지 맛을 내어 설식(舌識)을 일으키고,
현재 피어 있는 꽃과 미래에 열릴 열매 등 갖가지 법진(法塵)은
저 식이 연할 바의 경계를 따라 의식(意識)을 일으킨다.
위 경문에서는 진(塵)을 들어서 식(識)까지 포함한 것이니 자세히 관찰해야 한다.
저 말나식(末那識)은 다름 아닌 의식(意識)의 미세한 분위(分位)로서, 독립된 체를 갖는 것이 아니다.
이와 같은 육진(六塵)이 심체(心體)를 움직여 산란케 하는 것이, 마치 사나운 바람과 같기에 바람에 비유하였다.
이 내용을 인용한 경문의 부분은 다음과 같다.
파랑ㆍ빨강 등 각종 색깔과
구슬[珂]과 우유의 석밀과
담담한 맛과 여러 가지 꽃이나 열매가 그것이네.
이러한 칠식(七識)과 장식(藏識)은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니, 양쪽[二邊]을 떠났기 때문이다.
해와 햇빛, 또는 물과 파도는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다.
칠식과 장식이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닌 이치도 이와 같다.
이 내용을 인용한 경문의 부분은 다음과 같다.
해와 달이 그 빛과 다르지도 않고 다르지 않은 것도 아니듯이,바닷물이 파도를 일으키듯이,
칠식(七識)도 마찬가지로마음과 본래적[俱]으로 화합해서 생한다네.
저 장식(藏識)이라는 처소에서 갖가지 모든 식이 전변[轉]하니
저 의식(意識)으로써 갖가지 상의 의미를 사유한다는 말이네.
현식(現識)과 일곱 가지 전식(轉識)의 여덟 가지 심식(心識)은 한결같이
생멸하는 무상한 상으로만 나타나는가, 아니면 실상의 상주하는 상으로도 나타나는가?
이상 여덟 가지 식은 무시이래로 삼제(三際)로도 움직일 수 없고 사상(四相)으로도 변화시킬 수 없다.
이는 진실하고 상주하며 자성이 청정하여 무너지지 않는 상이라 아무거도 빠뜨린 것 없이 구족하고 원만하다.
그리하여 이러한 모든 공덕이 법계와 동일하기 때문에 이상이 없다.
이상(二相)이 없기 때문에 오직 하나의 상[一相]이며, 하나의 상이기 때문에 무상(無相)이 된다.
전적으로 무상이기 때문에 무상이라는 것 역시 아무 상도 가질 수가 없다.
이 내용을 인용한 경문의 부분은 다음과 같다.
파괴되지 않는 상(相)에 여덟 가지가 있으니
무상(無相)이라는 것 역시 어떠한 상도 가질 수 없다네.
이 『능가경』에서는 식을 모두 몇 가지로 밝히고 있는가?
두 가지 문으로 나눈다. 무엇이 두 가지 문인가?
첫째는 간략히 설하는 문이고,
둘째는 자세히 설하는 문이다.
이 두 가지 문을 세 가지 본(本)의 『능가경』에서 각기 다르게 설한다. 어떻게 다르게 설하는가?
『능가경』 계통의 어떤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한다.
“대혜(大慧)여, 간략히 설하면 세 가지 식이 있고, 자세히 설하면
여덟 가지 상이 있다. 무엇이 세 가지인가?
진식(眞識)과 현식(現識)과 분별사식(分別事識)이다.”
또 하나의 능가경 계통의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한다.
“대혜여, 자세히 설하면 여덟 가지 식이 있고,
간략히 설하면 두 가지 식이 있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요별식(了別識)이고,
둘째는 분별사식(分別事識)이다.”
또 하나의 『능가경』 계통의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한다.
“대혜여, 간략히 설하면 네 가지 식이 있고, 자세히 설하면
일곱 가지 식이 있다. 무엇이 네 가지인가?
업식(業識)ㆍ전식(轉識)ㆍ현식(現識)ㆍ분별사식(分別事識)이다.”
이상 세 가지 경설은 모두 진실된 교설이므로 마땅히 귀의해야 한다.
어떤 『능가경』들이 있는가?
『인연능가경(因緣楞伽經)』ㆍ
『사라능가경(沙羅楞伽經)』ㆍ
『반시다능가경(盤尸多楞伽經)』
에 의거하여 세 가지 경에서 다르게 설한 문장을 위치 짓고
회통하여 해석하겠으니, 차례에 따라서 자세히 관찰해야 한다.
첫 번째 경의 설을 해석하겠다.
첫째의 진식이란 근본무명에 훈습된 본각진심을 말한다.
둘째의 현식이란 현상(現相)의 아리야식을 말한다.
셋째의 분별사식이란 의식(意識)을 말하는데,
거친 분위는 의식이 되고,
미세한 분위를 말나식(末那識)이 된다.
무슨 이유로 이 경에서는 의식의 미세한 분위를 말나타식(末那陀識)으로 세우면서
삼세(三細) 중에 업식과 전식은 거론하지 않고 생략하는가?
이 문제를 두 가지 부문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양쪽을 들어서 세 가지 부류를 완전하게 드러내는 문[擧兩顯三備數門]이고,
둘째는 위의 것을 끌어다가 아래 부류에 이르도록 완전하게 드러내는 문[率上達下備數門]이다.
무슨 뜻에서 첫 번째 문을 시설했는가?
거칠고 강력한 것을 들어서 미세하고 약한 것까지 드러내려 하기 때문이다. 무슨 말인가?
삼세(三細) 가운데 거친 것은 현식이고,
칠식(七識) 가운데 강력한 것은 의식(意識)이니,
거친 현식을 들어서 미세한 업식과 전식까지 드러내고자 했기 때문에 현식만을 거론한 것이며,
강력한 의식을 들어서 미약한 말나까지 표시하고자 했기 때문에 의식만을 거론한 것이다.
그러므로 말은 생략했지만 내용에는 결함이 없다.
이것이 ‘양쪽을 들어서 세 가지 부류를 완전하게 드러내는 문’이다.
무슨 뜻에서 두 번째 문을 시설했는가?
전과 후를 섞어서 명자(名字)글 원만하게 밝히고자 했기 때문이다. 무슨 말인가?
경의 윗부분에서, 모든 식은 전상(轉相)과 업상(業相)과 진상(眞相) 세 가지 상을 갖는다는 말이 나온다.
첫 번째 전상은 삼세에 들어가는 전식을 말하고,
두 번째 업상은 삼세에 들어가는 업상을 말하며,
세 번째 진상은 의식의 미세한 분위에 속하는 말나식을 말한다.
이 경문을 끌어다가 아래 나오는 경문의 내용까지를 포함함으로써 명자를 빠짐없이 밝히고 의미를
다 갖추고자 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위의 것을 끌어다가 아래 부류에 이르도록 완전하게 드러내는 문’이다.
이 계경에서 설하는 여덟 가지 식이란 무엇인가?
아리야(阿梨耶)와 말나(末那)와 의식(意識)과 오식신(五識身)을여덟 가지 식이라 한다.
어떻게 해서 여덟 가지가 되는가?의식 하나에서 일곱 가지가 나뉘기 때문이다.
위에 소개한 세 가지 경 가운데 두 번째 『능가경』에서
첫째로 든 요별식(了別識)이란 현상의 아리야식을 말하고,
둘째로 든 분별사식(分別事識)은 의식을 말하니 앞에서 설한 내용과 같다.
말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첫 번째 경에서 든 진상(眞相)과 이 경에서 든 지상식(智相識)은 명칭은 다르지만 의미는 같다.
말나의 위[末那位]에서야 비로소 혜(慧)의 부류가 생겨 진(塵)을 분별하기 때문에 지상식(智相識)이라고
이름하며, 이러한 지식(智識)이 연하는 바의 경계 중에서 진실상에 대한 이해를 내서 전전하기 때문에
진상(眞相)이라고 이름한다. 이 경에서 말하는 여덟 가지 식은 앞에서 설한 것과 비교해 보면 알 것이다.
세 가지 경 중에 마지막 경에서 든 네 가지 식법(識法)은 문맥에서 내용이 분명하게 드러나므로
여기서는 생략한다. 칠식이라고 한 이유는 말나식과 의식을 합해서 하나로 보았기 때문이다.
거칠고 미세함이 다르기는 하지만 하나의 식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법계법륜계경(法界法輪契經)』에서 “제육의식(第六意識)이 육진(六塵)의 경계를 연할 때에는 반드시
말나(末那)를 소의(所依)의 근(根)으로 삼은 뒤에야 비로소 일어날 수 있다”고 하신 말씀을 전거로 들 수 있다.
그러므로 의식은 능의(能依)가 되고 말나식은 소의(所依)가 된다.
능의와 소의는 한 가지 종류가 될 수 없는데, 어째서 여기서는 독립되지 않은 하나의 체라고 설하는가?
경마다 의도하는 바가 다르기 때문이니, 모순이 되는 오류는 없다. 즉,
저 경에서는 별종(別種)을 세우는 데 의도가 있었던 반면,
지금 이 경에서는 동종(同種)을 세우는 데 의도가 있기 때문이다.
경에 나오는 어떤 문장을 보고 분별사식이 말나에 의지하지 않고 일어난다고 분명하게 알 수 있는가?
『능가경』에서 분명히 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 경에서 어떻게 설하는가?
『능가경』 계통의 한 경에서는
“대혜여, 요별사식(了別事識)과 분별사식(分別事識), 이 두 가지 식은 차별이 없고 서로가 서로에게
인(因)이 되는 관계에 있다”고 설하였으며, 또 다른 『능가경』 계통의 한 경에서는 “대혜여, 현식과 분별사식
이 두 가지 식은 파괴되는 상과 파괴되지 않는 상을 통해 서로가 서로에게 因이 되어주는 관계에 있다”
의식(意識)은 현식(現識)에 의지해 일어나는 것이지 말나(末那)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다.
의식과 말나는 거칠고 미세함이 있어서 차이가 나기는 하지만 결국 동일한 종류다.
그러므로 『능가경』에서 식을 일곱 가지로 설명한 논리에 자신의 설이 부합하고 있음을 주장한다.
(論記 卷4, 卍續藏經 73, 96상)고 설하였다. 이 경문으로 미루어 보건대,
의식은 오직 현상의 아리야식을 내적인 소의[內所依]로 삼아서 일어나고 움직이며 전변할 뿐,
말나에 의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일 수 있다.
또한 『대본능가계경(大本楞伽契經)』에서 다음과 같이 설했기 때문이다.
“이때 묘엄보살(妙嚴菩薩)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거친 상을 갖는 의식과 미세한 상을 갖는 의식은
무엇을 인으로 삼고 무엇을 연으로 삼아 상속하고 전변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거친 의식과 미세한 의식은 현경식(現鏡識)으로 인을 삼고 육진(六塵)의 경계로연을 삼아 상속하고 전변한다.’”
이러한 뜻으로 보건대, 제칠말나(第七末那)는 육진의 경을 연하여 소연으로 삼아 전변한다는 이치가 성립한다.
어째서 그런가? 경의 게송에서, “경계의 바람에 의해 움직여 칠식의 물결이 일어난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경에서 말하는 현식(現識)이란 다름 아닌 말나를 가리키는 것이므로 의식은 그것을 인으로 삼는다”고
헤아리는 중생이 있다면, 아서라, 그것은 지침이 될 만한 설이 아니다.이제까지는 경설을 근거로 들었나.
다음으로는 논의 본문을 해석하겠다. 본론의 이 부분은 본디 두 문으로 나뉜다.
무엇이 두 가지 문인가?
첫째는 내용 전체를 간략하게 제시하는 문[摠標略示門]이고,
둘째는 표제에 따라 해석하면서 이치를 빠짐없이 논증하는 문[標釋俱成門]이다.
‘경계(境界)의 연(緣)이 있기때문에 나아가 여섯 가지 상이 생하니’라고 한 구절은 첫 번째 문에 해당한다.
무슨 뜻을 밝히기 위해 이 문장을 썼는가?
저 하나의 의식에서 나오는 여섯 가지 거친 상[六塵相]은, 현경식(現鏡識) 중에 육진경계(六塵境界)를 일어나는
연(緣)으로 삼고 현경식의 체(體)를 의지할 연(緣)으로 삼아서 생장하고 상속하고 구족하게 전변한다는 사실을
밝히기 위함이다. 만일 그렇다면 어째서 경계를 연으로 삼는다는 말만 하고,
저 본식이 인이 된다는 점은 말하지 않는가?
의미가 드러나기때문에 생략한 것이지 그런 이치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주장한다면,
현식은 말나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의근(意根)이 저 의식에게 직접적인 소의(所依)가 되는 경우와 마찬가지로,
의식에게 직접적인 소의가 되는 것은 현식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두 가지 의도를 살핌으로써 이 문제를 해명할 수 있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 번째는 부정한다는 뜻이고,
두 번째는 인정한다는 뜻이다.
부정한다는 것은 별종(別種)이라는 점을 부정한다는 말이다.
인정한다는 것은 아리야(阿梨耶)와 말나(末那)가 별종임을 인정한다는 말이다.
자교과(自敎過)란 인명(因明) 33과(過) 중 자교상위과(自敎相敎過)를 말한다.
자종(自宗)에서 인정하는 종의(宗義)에 위배되는 사실을 종(宗)으로 세우는 오류로서,
에를 들어 ‘소리는 무상하다’고 주장하는 승론학파(勝論學派)의 논자가 ‘소리는 항상하다’고 주장하는 경우다.
상부과는 33과 중 상부극성과(相符極成過)를 말한다. 종(宗)의 주사(主辭)와 빈사(賓辭)가 완전 논증되어 상대방에게 승인되어 있는 주장일 경우, 새삼스레 논의할 필요가 없으므로 입론(立論)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지적이다.
이에 대한 의심과 질문은 대말나(大末那)를 결택하는 부분에 가면 이치가 분명해진다.
이 아래로는 표제에 따라 해석하면서 이치를 빠짐없이 논증하는 문을 풀이하겠다.
이 여섯 가지 거친 중에 앞에 나오는 두 가지 상은
법집(法執)에 해당하고,
중간의 두 가지 상은 인집(人執)에 해당하며,
뒤의 두 가지 상은 업인과 과보의 차별상을 나타낸다.
한편 소단(所斷)이라는 면에서 본다면,
앞의 두 가지는 지상(地上)에서 끊는 상이고,
중간의 두 가지는 삼현위(三賢位)에서 끊는 상이며,
뒤의 두 가지는 십신위(十信位)에서 떠나는 상이다.
한편 거칠고 미세한 면에서 본다면,
앞의 두 가지는 미세한 상에 해당하고,
뒤의 네 가지는 거친 상에 해당한다.
또는 첫 번째 하나만을 미세한 상으로 보고 뒤의 다섯 가지를 거친 상으로 볼 수도 있으며,
앞의 다섯 가지를 미세한 상으로 보고 마지막 하나만을 거친 상으로 볼 수도 있다.
또는 여섯 가지 모두를 거친 상으로 볼 수도 있다.
또는 여섯 가지 모두에 미세한 상도 없고 거친 상도 없다고 볼 수도 있다.
차례에 따라서 자세히 사유해 보면 될 것이다.
이제까지 추중한 권속무명을 설명하는 문(麤重眷屬門)을 밝혔다.
다음은 무명의 존재에 대한 의심을 결택하는 것을 밝히는 문[顯示無明有決疑門]을 설명하겠다.
【論】 그러므로 무명(無明)이 모든 염법(染法)을 생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모든 염법은 예외 없이 불각(不覺)의 상(相)을 갖기 때문이다.
【釋】 위 문장은 두 문으로 나뉜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 번째는 무명이 있게 되는 이치를 직접적으로 보여 주는 문[直示得有門]이고
두 번째는 내용을 해석함으로써 의심을 풀어 주는 문[釋相決疑門]이다.
첫 번째 문은 어떤 내용인가?
게송으로 말한다.
나무를 볼 때 씨앗[種子]이 있음을 당연히 알듯이
갖가지 상번뇌(上煩惱)를 보면 무명이 있음을 알 수 있네.
【釋】 어떤 사람이 숲이나 나무를 본다면 반드시 그 나무에 씨앗이 있었음을 알듯이,
갖가지 번뇌를 보면 무명이 있음을 알 수 있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본론에서, ‘그러므로 무명(無明)이 모든 염법(染法)을 생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고 하였다.
두 번째 문은 어떤 내용인가?
어떤 중생은 “무명주 오직 하나이고 염법은 한량없는데, 어떻게 하나인 무명이 많은 번뇌를 일으키는가?”
하는 이러한 의심을 품어 불신하는 마음을 일으킨다. 저런 의심을 결단하려면 이렇게 말해야 할 것이다.
“단 하나 뿐인 씨앗이 셀 수 없이 많은 꽃과 열매와 가지와 잎 등 일체
부류를 생하듯이, 근본무명도 이와 같아서 오직 하나 뿐인 근본무명이
셀 수 없이 많은 모든 번뇌의 염법을 일으켜낸다”고.
모든 번뇌가 다 무명에서 생긴다는 사실을 어떻게 아는가?
저 모든 염법이 예외 없이 불각의 상을 갖는다는 사실을 통해 알 수 있다.
이상의 해명이라면 저 의심은 풀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본론에서,
‘모든 염법은 예외 없이 불각(不覺)의 상(相)을 갖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이제까지는 본상무명(本上無明)에 관해 간략히 해석하였다. 이제부터는 염법과 정법을 전체적으로 모아서,
그것의 동일성과 차별성[同異]을 따지는 문을 시설하여 이 논을 지은 진실한 본뜻을 나타내 보이겠다.
그 내용은 어떠한가?
【論】 다음으로 각과 불각의 상에 대해 부연하자면
각(覺)과 불각(不覺)은 두 가지 상을 갖는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동상(同相)이고,
둘째는 이상(異相)이다.
동상(同相)이란 어떤 것인가?
마치 갖가지 모양의 질그릇들이 똑같이 미세한 흙[微塵]의 성품과 모습을 갖듯이,
갖가지 무루(無漏)와 무명의 허깨비 같은 업도
모두 진여의 성품과 모습을 갖는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同相]고 한다.
그러므로 경에서 이러한 이치에 의거하여, “모든 중생은 본래부터 상주하여 열반에 들어간다”고 설하였다.
보리의 법은 닦을 수 있는 상(相)도 아니고 만들어낼 수 있는 상도 아니어서 끝끝내 얻을 수 없고 색상(色相)으로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색상을 볼 수 있게 되는 것은 그것은 오직 염법을 따르는 허깨비 같은 업이
지어내는 것이지 지색(智色)의 불공(不空)한 성품이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지혜의 모습[智相]은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상(異相)이란 어떤 것인가?
마치 갖가지 질그릇들이 각각 다른 모습을 갖듯이,
무루와 무명이 염법을 따라 허깨비같이 차별된 모습을 가지며
성품이 물들어 허깨비같이 차별된 모습을 갖는다는 뜻에서 이상이라 한다.
【釋】 위 글은 두 가지 문으로 나뉜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동상문(同相門)이고,
둘째는 이상문(異相門)이다.
무슨 뜻을 밝히기 위해 동상문을 건립하는가?
모든 법은 오직 진여 하나일 뿐 그 밖에 다른 법은 있을 수 없다는 점을 드러내 보여 주기 위함이니,
이 동상문은 진여문(眞如門)에 해당한다. 무슨 뜻을 밝히기 위해 이상문을 건립하는가?
하나뿐인 진여가 모는 법을 만들어 내는데 그 법들은 명칭과 모습이 각기 다르고
의미와 작용이 각각 다르다는 점을 드러내 보여주기 위함이니,
이 이상문은 생멸문(生滅門)에 해당한다.
이 두 가지 문은 어느 경에 근거해서 건립하였는가?
『문수사리답제일경(文殊師利答第一經)』에 근거하였다.
그 경에서는 여기에 해당하는 내용을 어떻게 설하는가?
저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한다.
“부처님께서 문수에게 물으셨다. ‘그대는 아주 오래 전부터 쉴 새 없이
시방의 국토를 두루 돌아다녔는데, 그러면서 어떤 수승한 것을 보았는가?
문수가 답하였다.
‘저는 오래 전부터 다른 일은 보지 못했고 단지 미세한 티끌[微塵]만을 보았을 뿐입니다.
’ 부처님께서 다시 물으셨다
‘그대는 백 년 동안 그릇 만드는 집에서 기거했는데 갖가지 모습의 질그릇을 보지 못했는가?’
문수가 대답했다.
‘저는 미진만을 보았을 뿐, 질그릇 등은 보지 못했습니다.
’ 부처님께서 또 물으셨다.
‘그대는 정말로 땅ㆍ물ㆍ불ㆍ바람, 산천ㆍ수풀ㆍ나무 등 갖가지 모습을 보지 못하였는가?
문수가 대답했다.
‘저는 정말로 그러한 모습들을 보지 못했습니다. 본 것이라고는 오직 미진뿐입니다.’
이런 식으로 부처님의 물음과 문수의 대답이 백 차례나 이어졌고,
이어서 부처님께서 물으셨다. ‘문수여, 그대는 미진을 보는가?’
문수가 대답했다.
‘저는 아주 오래 전부터 미진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자 세존께서 문수에게 말씀하셨다.
‘훌륭하고 훌륭하도다. 보살인 그대는 한 모습임[一相]을 깨달았구나.
한 모습임을 깨달았으니 무상법(無相法)을 깨달은 것이다.
문수사리여, 훌륭한 그대 한 사람만 깨달은 것이 아니다.
이 일상문에 의지해서 모든 중생은 본래 상주하며 열반과 보리의 법에 들어 있다. ……
왜냐하면 지혜의 모습은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마멸보살은 바로 이 경문을 근거로 동상문을 세웠는데,
인용문에서 내용이 분명히 드러나므로 중복해서 해석하지 않겠다.
이상문에 대해서는 저 경에서 다음과 같이 설한다.
“부처님께서 신자(身子)에게 말씀하셨다.
‘그대는 이 국토를 볼 때, 어떠한 심견(心見)을 짓는가?’
신사가 대답했다. ‘저는 이 국토가 산천과 수풀과 나무ㆍ모래와 자갈ㆍ물과 돌ㆍ해와 달ㆍ
궁전과 집 등 갖가지 모습을 지니고 있으며, 각각의 형상에 따라 각각 다른 명자를 갖는다는 것을 봅니다.
’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대는 지혜의 힘이 미약하고 협소하며, 마음에 높고 낮음이 있기 때문에 그런 차이를 보는 것이다.
그대 한 사람뿐이 아니라 모든 중생들도 그렇게 본다. 나아가 갖가지 모든 법도 그러하다.
진여와 망념이 서로를 훈습하고 염법과 정법이 상대적인 관계를 이루어 공덕과 허물,
형상과 명자에 각각 차별이 있다.
범부의 마음에 따라 세워진 명상(明相)이란, 있기는 하지만
실다운 것은 아니라서 모두가 요술로 만든 허깨비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는 이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셨다. 마명보살은 이 경문에 근거해서
뜻을 탐구한 끝에 이상문을 세웠는데, 인용문에서 내용이 분명히 드러나므로 중복해서 해석하지 않겠다.
이 두 가지 문 중에 첫 번째 문이 있는 이유를 깊이 사유해야 할 것이다.
여기까지 본분(本分:立義分) 가운데 ‘심생멸(心生滅)’이라는글자에 대한 해석을 마쳤다.
이 아래에서로는 생멸의 인연을 직접적으로 밝히겠다.
【論】 다음으로 생멸의 인연을 세운 이유는, 중생이 심(心)에 의지하여
의(意)와 의식(意識)으로 전변[轉]한다는 사실을 밝히기 위해서다. 무슨 뜻인가?
아리야식(阿梨耶識)에 의지하여 무명이 있다고 말한다.
무명이 있음으로 해서 불각(不覺)이 일어나
경계를 보고[能見]
경계를 나타내고[能現]
경계를 취하고[能取] 망념을 일으켜 끊임없이 상속한다.
이런 뜻에서 의(意)를 시설한 것이다.
이 의(意)에는 다섯 가지 명칭이 있다. 무엇이 다섯 가지인가?
첫 번째는 업식(業識)이라는 명칭으로서,
무명의 힘으로 불각의 망심이 움직이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한다.
두 번째는 전식(轉識)이라는 명칭으로서,
움직이는 마음에 의지하여 상을 보는 공능[能見]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한다.
세 번째는 현식(現識)이라는 명칭으로서,
모든 경계를 나타내는 공능[能現]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한다.
마치 밝은 거울이 색상을 나타내듯, 현식도 마찬가지로 오진(五塵)이
마주해서 다가오면 전후 없이 즉시 나타내 주니,
언제든지 자동적으로 일어나 항상 눈앞에 있기 때문이다.
네 번째는 지식(智識)이라는 명칭으로서,
염법과 정법을 분별하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한다.
다섯 번째는 상속식(相續識)이라는 명칭으로서,
망념과 단절하는 때 없이 상응(相應)하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한다.
【釋】 위 문장들은 두 가지 문으로 되어 있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 번째는 차별된 뜻을 총괄해서 주장하려는 이치를 드러냄으로써 이해하게 하는 문[攝義顯宗生解門]이고,
두 번째는 본문을 따라 해석하면서 의심을 풀어주는 문[隨文散說決疑門]이다.
첫 번째 문은 어떤 내용인가?
이 인연은 이중구조로 되어 있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불상응(不相應)의 생멸인연이고,
둘째는 상응(相應)의 생멸인연이다.
첫째 인연은 어떤 내용인가?
게송으로 말한다.
저 근본무명은 연(緣)을 따르는 본각(本覺)이니
각각 인연을 구족하여 세 가지 불상응(不相應) 염법에게
정인연(正因緣)이 되어주기 때문이라네.
미세한 생멸의 인연에 대해서는
정신을 차려 관찰하고 이치를 세심히 살펴야 하네.
【釋】 근본무명(根本無明)과 수염본각(隨染本覺)은 각각 인(因)과 연(緣) 두 가지 이치를 갖추어
세 가지 불상응(不相應) 염법에게 정인연(正因緣)이 되기 때문에 미세한 생멸인연의 문을 설한다.
이 이치는 구족형상산설문(具足形相散說門)에 가서 명백히 밝혀진다.
그 다음 인연은 어떤 내용인가?
게송으로 말한다.
현경식(現鏡識)의 자체와 육진경계(六塵境界)의 상은
저 세 가지 상응(相應) 염법에게 인연이 되기 때문이라네.
【釋】 현경식(現鏡識)의 체(體)와 육진경계는 순서대로 저 세 가지 상응 염법에게 인(因)과 연(緣)이 되어주기 때문에 거친 생멸인연의 문을 시설한다. 현식(現識)의 체에는 연(緣)이 뜻도 함께 있다는 사실을 세밀하게 사유해야
한다. 이 생멸에는 또 다른 이중구조를 갖는 인연이 있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본편인연(本遍因緣)이고,
둘째는 말편인연(末遍因緣)이다.
본편이란,
근본무명과 본각심(本覺心)을 기준으로 볼 때
그것들이 육진의 상에 대해 인연의 뜻을 갖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한다.
말편이란,
업상과 전상을 기준으로 볼 때 그것들이 세 가지 상응염법에 대해
인연의 뜻을 갖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한다. 생멸에는 또 다른 이중구조를 갖는 인연이 있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위에서 아래로 가는 인연[上下因緣]이고,
둘째는 아래에서 위로 가는 인연[下上因緣]이다.
위에서 아래로 간다고 한 이유는,
무명이 시작이 되고 과보가 끝이 되어 그 부류를 넘나들지 않고 아래로
아래로 힘을 부여하면서 인연이 되어준다는 의미에서 그렇게 말한다.
아래에서 위로 간다고 한 이유는,
과보가 시작이 되고 무명이 끝이 되어 그 부류를 넘나들지 않고 위로 위로 힘을 부여하면서
인연이 되어준다는 의미에서 그렇게 말한다. 또한 생멸하는 모든 유위법(有爲法)은 찰나 동안도 머물지 않으니,
인도 없고 연도 없기 때문이다. 또한 인연에 의해 생한 법은 공하여 주재자[主]가 없으니, 사실을 따져보면
그 자성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얻을 수 없는 법이기에 얻을 수 없다는 것조차 성립할 수 없다.
이러한 차례에 의해 세심하게 사유해서 가려보아야 한다.
이제까지 차별된 뜻을 총괄해서 주장하려는 이치를 드러냄으로써 이해하게 하는 문[攝義顯宗生解門]을 설하였고, 다음으로는 본문을 따라 해석하면서 의심을 풀어주는 문[隨文散說決疑門]을 설하겠다.
이것은 두 가지문으로 되어 있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전체 내용을 제시하는 문[摠標門]이고,
둘째는 자세히 해석 하는 문[廣釋門]이다.
‘다음으로 생멸의 인연을 세운 이유는,중생이 심(心)에 의지하여
의(意)와 의식(意識)으로 전변한다는 사실을 밝히기 위해서다’라고한 구절은
첫 번째 문에 해당한다.
무슨 뜻을 밝히기 위해 이 문장을 썼는가?
소의(所依)와 능의(能依)가 차별된다는 뜻을 밝히기 위함이다.
무엇이 소의기 되는가?본각심(本覺心)이 소의가 된다.
무엇이 능의가 되는가?중생(衆生)이 능의가 된다.
중생이란 어떤 법을 말하는가? 의(意)와 의식(意識)을 말한다.
무슨 이유로 의와 의식을 중생이라 하는가?
의와 의식은 모든 염법이 모여서[衆] 생(生)하므로 중생이라 한다.
그러나 의와 의식은 독립된 체가 없이 오직 심을 의지할 체로 삼기때문에 ‘심에 의지하여 전변한다’고
설한 것이다.이제까지 전체 내용을 제시하는 문을 설했고, 다음부터는 자세히 해석하는 문을 설하겠다.
이 문에는 두 가지 품(品)이 있다.
먼저 말나(末那)의 전변을 설하고 뒤에 의식(意識)의 전변을 설했으니, 문맥을 보면 뜻이 드러난다.‘무슨 뜻인가?’
라고 한 구절은 두 가지 전변을 전체적으로 물은 것이다. 이 아래로는 본문에 띠라 여러 각도로 설명한 것이다.
이 의(意)의 전변을 밝히는 문은 어느 경에 근거해서 건립하였는가?
『현료경(顯了經)을 근거로 하였다.
저 경에서 어떻게 설하고 있는가?
『현료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한다.
“갖가지 심식(心識)이 비록 셀 수 없이 많으나 오직 말나의 전변일 뿐, 그 밖에 다른 법은 없다. 어째서 그런가?
말나식은 열한 가지 뜻을 갖추어 짓지 않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저 경에서는 열한 가지 명칭에 대해 따로 설하지 않고 생략했다.
그래서 논자는 열한 가지로 구별되는 명칭을 빠짐없이 꼽아 분명히 보여 주겠다
무엇이 말나의 열한 가지 명칭인가?
첫째는 근본무명(根本無明),
둘째는 업상(業相),
셋째는 전상(轉相),
넷째는 현상(現相),
다섯째는 지상(智相),
여섯째는 상속상(相續相),
일곱째는 업식(業識),
여덟째는 전식(轉相),
아홉째는 현식(現識),
열째는 지식(智識),
열한째는 상속식(相續識)이다. 이것이 열한 가지다.
이것을 본문에서는 ‘아리야식(阿梨耶識)에 의지하여 무명이 있다고 말한다.
무명이 있음으로 해서 불각이 일어나 경계를 보고[能見]
경계를 나타내고[能現]
경계를 취하고[能取]
망념(念)을 일으켜 끊임없이 상속한다. 이런 뜻에서 의(意)를 시설한 것이다
이 의(意)에는 다섯 가지 명칭이 있다. ……
다섯 번째는 상속식(相續識)이라는 명칭으로서, 망념과 단절하는 때 없이 상응(相應)하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한다’ 하고 이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였다.
『본지계경(本地契經)』에서 “대말나식(大末那識)은 열두 가지 전변을 갖추었다”고 한 이유는
소의(所依)의 본각을 하나로 보기 때문이다.
상(相)과 식(識) 두 글자는 어떤 차별이 있길래 하나의 부류로 독립해서 건립하는가?
매우 크게 구별되기 때문이다.
어떤 차별이 있다는 말인가?
권속염법은 예외 없이 각각 두 가지 뜻을 갖는다.무엇이 두 가지 뜻인가?
첫째는 신령하게 이해한다는 뜻[神解義]이고,
둘째는 어둡고 아둔하다는 뜻이다.
본각으로부터 유전(流轉)된다는 면에 근거해서 신령하게 이해한다는 뜻을 세우고,
무명으로부터 유전된다는 면에 근거해서 어둡고 아둔하다는 뜻을 세운다.
신해문에 의거해서 식(識)이라는 명칭을 세우고
암둔문에 의거해서 상(相)이라는 명칭을 세운다.
두 가지 문이 차별되는 이지를 위와 같이안아야 한다. 어째서 그렇게 차별되는가?
식이라는 말은
이해하고 깨닫는다는 뜻을 갖기 때문에 본각에 순응하는 반면,
상이라는 말은
본각을 배반한다는 뜻이 있기 때문에 무명을 쫓아간다.
이에 대해서는 『상주불성계경(常住佛性契經)』에서 설한 다음 경문을 근거로 들 수 있다.
“‘모든 중생에게 불성이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압니까?’
답하였다. ‘모든 중생에게 심식(心識)이 있으므로 불성이 있는 줄을 당연히 알 수 있다. 어째서인가?
부처님께서는 일체법을 잘 비추고 통달하기 때문에 깨달은 자라고 부르는 데,
중생의 몸 가운데 이 깨달은 자가 있다.’”
이런 이유에서 모든 중생에게 요별식(了別識)이 있다는 사실이 성립한다.
무슨 뜻이 있길래 의(意)라는 명칭을 붙이는가?두 가지 뜻이 있기 때문이다.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근(根)의 뜻이고,
둘째는 신(身)의 뜻이다.
근이란 생하는 능력을 갖는다는 뜻[能生義]이고,
신이란 의지처가 된다는 뜻[依止義]이다.
무슨 이치로 근본무명과 수염본각이 각기 인과 연을 갖추는가?
서로가 서로에 대해 상대적인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무슨 뜻인가?
본각과 무명의 입장에서 세 가지 식을 관련지어 보면 본각이 인이 되고 무명이 연이 된다.
저 두 가지를 한꺼번에 세 가지 상에 관련지어 보면 무명이 인이 되고 본각이 연이 된다. 어째서 그런가?
가까운 데로부터 나온 것이 인(因)이 되고
먼 데로부터 나온 것이 연(緣)이 되기 때문이다.
앞에서는 분별지상(分別智相)과 상속상(相續相)은 의식의 미세한 분위[細分]로 언급했으면서
여기서는 어째서 그것들을 말나에 포함시키는가?
말나와 의식은 하나의 체일 뿐,
두 가지가 다르지 않다는 뜻을 증명하기 위해서다.
그렇다면 어째서 거친 분위[麤分]는 의(意)로 치지 않고 생략하는가?
사실대로 말하자면 모두 의(意)라고 할 수 있으나 생략해도 이치가 빠짐없이 드러나기 때문에 생략했을 뿐이다. 그러므로 경에서 “짓지 않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의식(意識)의 전변을 별도로 건립한
이유는, 능의와 소의의 법문을 건립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결택에 의거한다면 세 가지 미세한 상의 말나를 자세히 통달할 수 있을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다음 사실을 밝히기 위함이다.
즉, 아리야식은 아리아식으로서 결정성을 갖는 것이 아니고,
말나는 말나로서 결정성을 갖는 것도 아니며,
의식은 의식으로서 결정성을 갖는 것도 아니다. 정해진 바가 없기 때문이다.
장식(藏識)도 말나(末那)이고말나도 장식이며,
의식도 장식이고 장식도 의식이며,
이 모두가 장식이 되기도 하고
말나가 되기도 하고 의식이 되기도 하며, 그 어느 것도 아닐 수도 있다.
이렇게 결정된 바가 없기 때문에 무상하며,
무상하기 때문에 진실이 아니며,
진실이 아니기 때문에 요술로 만든 허깨비 같으며,
요술로 만든 허깨비 같은 것이기에
자성이 공무(空無)하며,
자성이 공하기 때문에 결정코 적멸이며,
적멸이기 때문에 적멸이라는 것조차 적멸하다.
이에 대해서는 『금강삼매계경(金剛三昧契經)』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설을 경중으로 들 수 있다.
“지장보살이 말하였다. ‘불가사의한 중에서도 가장 불가사의합니다.
취(聚)에는 제칠식[七]과 전오식[五]이 생하지 않고
제팔식[八]과 제육식[六]이 적멸하며
구상(九相:三細六麤)이 공무(空無)이 공이 있음도 없고 공이 없음도 없습니다.’”
그런가 하면 위 인용문에 앞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는 것이 있으면 그것은 허망하다. 어째서 그런가?
일체 만유는 생하는 일도 없고 모습도 없어
그 자체에 명칭을 붙일 수 없는 완전히 공적한 것이다.
모든 법의 상도 마찬가지며
모든 중생도 마찬가지다.
신(身)도 없는데 하물며 보는 일이 있겠는가?”
이제까지 본문은 따라 해석하면서 의심을 풀어주는 문[隨文散說決疑門]에 관해 설하였고,
다음부터는 상속식의 업용이 어떤 차별을 갖는지 밝히는 문[相續業用差別門]에 관해 설하겠다.
【論】 한량없는 과거세 동안 지은 선업이나 악업을 지탱하여 유실되지 않게 하기 때문이며,
또한 현재와 미래에 즐거운 과보나 고통스러운 과보를 오차 없이 성취하게 하기 때문이며,
현재나 이미 지난 일을 홀연히 생각하게 하기도 하고 미래의 일을 모르는 사이에
허망하게 사려하게 하기 때문이다.
【釋】 이 상속식(相續識)에는 세 가지 뜻이 있다. 무엇이 세 가지인가?
첫째는 전에 지었던 업을 다 포섭하여 유실되지 않게 한다는 뜻이고,
둘째는 업에 맞는 과보를 불러 성취케 한다는 뜻이고,
셋째는 허망한 사려로 두루 연한다는 뜻이다.
무슨 이유에서 첫 번째 뜻이 성립하는가?
이 상속식은 업을 불려나가는 번뇌를 일으켜 과거 무명에서 일으킨 갖가지 모든 선업과 불선업으로 하여금
과(果)를 이루게 하는 작용력을 갖기 때문이다. 이것을 본론에서 ‘한량없는 과거세 동안 지은 선업이나
악업을 지탱하여 유실되지 않게 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무슨 이유에서 두 번째 뜻이 성립하는가?
뿐만 아니라 이 상속식은 생(生)을 불려나가는 번뇌를 일으켜 이미 이루어진 업으로 하여금 과보를
결정해서 맞는 곳에 배속시키기 때문이다. 이것을 본론에서 ‘또한 현재와 미래에 즐거운 과보나
고통스러운 과보를 오차 없이 성취하게 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무슨 이유에서 세 번째 뜻이 성립하는가?
이 상속식은 연을 붙잡고[攀緣] 점점 더 넓게 분별하면서 강력해지는데, 이미 아는 경계를 연하여
즐거운 마음이나 즐겁지 않는 마음을 일으키고 현전하는 경계를 대하여 사랑하는 마음이나 사랑하지 않는
마음을 덧붙이며 아직 알지 못하는 경계를 연하여 착실하게 알지도 못하는 것을 가지고 허망하게 헤아리기
때문이다. 이것을 본론에서 ‘현재나 이미 지난 일을 홀연히 생각하게 하기도 하고 미래의 일을 모르는
사이에 허망하게 사려하게 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이 상속식은 끊임없이 생사를 이어지게 하기
때문에,이런 이유에서 ‘상속식’이라고 이름한다.
이제까지 상속식의 업용(業用)이 어떤 차별을 갖는지 밝히는 문에 관해 설하였다.
다음으로는 갖가지 법이 오직 마음에서 굴러 나왔음을 밝히는 문[唯心迴轉諸法門]을 설하겠다.
【論】 그러므로 삼계는 헛것이며 오직 마음으로 지어낸 것일 뿐이니,
마음을 떠나면 육진경계(六塵境界)도 없다. 무슨 뜻인가?
일체법은 다 마음으로부터 일어나고 망념에서 생겼으므로 모든 분별은
바의 자심(自心)을 분별하는 것이다. 마음은 마음을 보지 못하는데,
왜냐하면 마음은 얻을 만한 모습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간의 모든 경계는 다 중생의 무명과 망심에 의해 지탱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결론적으로 모든 법은 거울 속에 나타난 영상과 같아서 체(體)를 얻을 수 없으며
오직 마음에서지어낸 허망한 것이다. 왜냐하면 마음이 생하면 갖가지 법이 생하고
마음이 멸하면 갖가지 법이 멸하기 때문이다.
【釋】 무슨 뜻을 밝히기 위해 위 문장을 썼는가?
모는 법이 오직 마음에서 굴러 나온 것일 뿐, 그 밖에 다른 법이 없음을 밝히기 위해서다. 어째서 그런가?
마음이 있는지 없는지에 따라서 갖가지 차별된 법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기 때문이다.
모든 법이 오직 마음일 뿐이라면, 이 마음은 있는 것인가? 이와 같은 심법(心法)도 얻을 수 없다.
그렇다면 오직 마음일 뿐이라는 이치가 어떻게 성립할 수 있는가?
그 역시 마음이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는가?
경에서 명확히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경에서 어떻게 설하는가?
『능가경』 계통의 경에서 “무심의 심량(心量)을 나는 심량이라고 설하느니라”라고 설했기 때문이다.
위 경문에서 ‘마음을 얻을 수 없다’고 한 구절로부터 대공(大空)의 이치가 성립하고,
‘무심의 심량’이라는 구절로부터
허깨비 같은 법이 차별을 갖는다는 이치가 성립한다.나아가 대공의 이치로부터
제법이 설립하고 허깨비 같은 법이 차별을 갖는다는 이치로부터 공의 이치가 환히 드러난다.
또한 상대적인 것[相觀]이므로 양쪽이 결정성을 갖지 않으며 양쪽이 없으므로 한쪽도 성립하지 않는다.
또 한쪽도 없으므로 설립하지 않는다는 것조차 성립하지 않는다. 위 순서대로 세심히 관찰해야 한다.
이제까지 광대한 말나가 전변하는 상을 밝히는 문[廣大末那轉相門]을
설했고, 다음으로 분별사식이 전변하는 상을 밝히는 문[分別事識轉相門]을 설하겠다.
【論】 다음으로 의식(意識)이란 다름 아닌 상속식(相續識)을 말한다.
모든 범부가 점점 더 깊이 소유하고 집착하여 아(我)와 아소(我所)를 헤아리고 갖가지
허망한 집착으로 일[事]에 따라 반연(攀緣)하여 육진(六塵)을 분별한다는 뜻에서 의식이라는 명칭을 붙인다.
이 의식을 분리식(分離識), 또는 분별사식(分別事識)이라고도 한다.
이 식은 견번뇌(見煩惱)와 애번뇌(愛煩惱)를 의지해서 자라난다는 뜻을 갖기 때문이다.
【釋】 위 글은 네 가지 문으로 되어 있다. 무엇이 네 가지인가?
첫째는 의식의 동분에 속하는 무리들을 가설함으로써 아닌 데
속하는 무리들을 가려내는 문[揀擇假者同分門]이고,
둘째는 추중한 번뇌를 일으켜서 전변하는
양상을 밝히는 문[建立名字差別門]이고,
셋째는 의식이라는 명자의 차별을 건립하는 문[生起麤重轉相門]이고,
넷째는 안립한 소의를 드러내 보여 주는 문[顯示安立所依門]이다.
허가(虛假)를 가려낸다는 것은 세 가지 범부를 들어서 지상(地上)의
성인을 가린다는 뜻이다. 무엇이 세 가지 범부인가?
첫 번째는 뿌리[根]가 없는 눈 멀고 귀 먼 범부다.
두 번째는 비람에 날리는 털끝과 같이 향방을 알수없는 [毛頭難角]범부다.
세 번째는 금강(金剛)처럼 파괴될 수 없는 범부다.
이상 이 세 가지 범부다.
이것을 본론에서는 ‘모든 범부가 ……한다는 뜻에서’라고 하였다.
已說廣說性淨本覺門,次說根本無明住地門。本曰:‘ 所言不覺義者,謂不如實知、眞如,法一故,不覺心起,
而有其念。念無自相,不離本覺,猶如迷人,依方故迷。若離於方,則無有迷,衆生亦爾。依覺故迷,
若離覺性,則無不覺,以有不覺妄想心故,能知名義,爲說眞覺。若離不覺之心,則無眞覺自相可說。
’論曰:則此文中,自有二門。云何爲二?一者異說相應契當門,二者隨次別釋散說門。初門云何?
頌曰:牟尼大覺尊 一代聖說中 摠有六種說謂明闇俱非。 空及與具足 如是六無明隨義立異名 剋體無差別。
論曰:凡集牟尼尊一代中,種種異說,
摠有六種。云何爲六?
一者明無明,
二者暗無明,
三者俱是無明,
四者俱非無明,
五者空無明,
六者具足無明。是名爲六。
如是六種隨義立名,據體無別,明無明者,字義差別,其相云何?
頌曰:究竟無餘無 通達顯了明 以此因緣故言摠意別明。
論曰:究竟無餘故,名爲無;通達顯了故,名爲明。所謂圓滿般若之日,周遍法界,無一一法而非明故。
是故當知如是無明言摠意別。光明實智契經中,
作如是說:爾時,舍利弗則白佛言:世尊,何因緣故,
於大衆中,唱如是言:我今所說一切契經中,一一字字,一一句句,盡攝一切無量所詮,而爲鈍根衆生故,
以種種言說而談論耳。若如世尊說,當應有過失。何以故?如無明字,唯表黑品,不能表示般若智明,
乃至無常字,唯表生滅之相,不能詮表無爲常住眞實理焉。如何世尊,作如是說?
於是世尊告舍利弗言:我今所說實無過失。何以故?如無明字,不可得言唯表黑品。汝智慧之力狹劣,
小見小聞故,作如是疑,而此無明字,盡攝一切般若智明,具足圓滿,無所闕失。所謂究竟義故,周遍義故,
圓滿義故,平等義故,無餘義故,說言爲無通達義故,顯了義故,觀照義故,現前義故,無㝵義故,說言爲明,乃至廣說故。暗無明者,字義差別,其相云何?頌曰:一切般若明 隱覆令不生 譬如暗中具無有殊勝事。
論曰:根本無明能覆一切摠持慧明,㝵令不生,譬如暗中莊嚴具,雖有勝妙相,而爲暗障故,彼殊勝事不得出現。是故名爲暗之無明。圓滿契經中,作如是說:一切衆生具足三智,由顚倒故,不知不覺故。俱是無明者,
字義差別,其相云何?頌曰:唯一種無明 或明或暗俱 譬如一暗色二人各異見。
論曰:一種無明或明,或暗。譬如一色二人異見。此義云何?謂如迦羅鳩奢那及人同分,極暗夜分中,
同在一處,見此暗色,若迦羅鳩奢那唯見淸淨光明之色,若人同分唯見一向黑暗之色,俱是無明,亦復如是。
唯一無明,或智慧明,或黑法暗,具二事故。甚深密嚴契經中,作如是說:根本無明於幻人中,能作幻質,
於德人中,能作德質。不可取一,非一故。俱非無明者,字義差別,其相云何?
頌曰:從無始已來 無有言說依 遠離了別轉遠離遠離故。論曰:言俱非者,無言依故,離心轉故,是故名爲俱非無明。八勝天子契經中,作如是說:爾時,光明自在花寶妙輪天子則承佛神力,
白佛言:世尊,無明有耶?
答曰:非也。
問曰:無耶?
答曰:非也。
問曰:亦有亦無耶?
荅曰:非也。
問曰:非有非無耶?
荅曰:非也。
問曰:非是耶?
荅曰:非非也。
問曰:何故如是耶?
荅曰:以無可明之事故。
是故說言無始無明故。空無明者,字義差別,其相云何?頌曰:無體用則空 譬如兔角無 如是道理了是故說言明。論曰:空無明者,體用俱空故,名爲無。如是道理明了現前故,名爲明。譬如兔角,本來無體,一切人衆皆悉現知。無始契經中,作如是說:根本無明無所有事,遍計所執性故。
具足無明者,字義差別,其相云何?頌曰:染淨一切法 通出生增長 以此因緣故建立具足名。
論曰:言具足者,根本無明能生一切染淨諸法,令增長故,立具足名。佛性解脫契經中,作如是說:從無明種,出覺知樹,從覺知樹,出功德智慧花,從兩輪花,結法身解脫果,乃至廣說故。如是六種根本無明,於論文中,明了說故,安立配屬且略而已。且暗無明名字差別,
其相云何?
契經異說其數幾有?頌曰:摠有十種名 契經異說故 見一處住地或報恩無盡。
或無始有終 或無等等生或生得觀滿 智㝵及不覺。 覺了與子藏如是十種名 隨義用差別 唯一暗無明。
論曰:凡集一代種種契經,摠有十種。
云何爲十?
一者見一處住地,
二者報恩無盡住地,
三者無始有終住地,
四者無等等生住地,
五者生得住地,
六者觀滿住地,
七者智㝵住地,
八者不覺住地,
九者覺了住地,
十者子藏住地。是名爲十。如是十名,
唯是一體,隨義用別,應審觀察。見一處住地者,字義差別,其相云何?
頌曰:圓滿般若慧 現見一法界 無明體頓斷故名見一處。
論曰:金剛心還,智慧未滿,福德微少,不達一心中實處故,根本無明猶未出離,而率萬行到果位時,
始覺般若分明顯了,本有功德具足圓滿,現見一中法界之心安立住處,根本無明頓斷無餘。是故名爲見一處惑。光嚴童子契經中,作如是說:復次,有惑,一切聲聞、辟支佛及十地菩薩所不能斷。謂見一處無明住地。
如是住地,證一法界淸淨覺者,乃所能斷故。
報恩無盡住地者,字義差別,其相云何?頌曰:無量一切佛 報無明之恩 盡未來無窮故名恩無盡。
論曰:十方三世一切諸佛報無明恩,盡未來際,無有窮盡。所以者何?一切覺者,無明作無爲因,
具足莊嚴法身果故。本來淸淨契經中,作如是說:文殊師利則白佛言:世尊,無量劫中,不惜身命,
斷一切惡,修一切善,圓滿行因,莊嚴性海,喜樂自在,德用無㝵。何因緣故,作如是言,我有多恩,
盡未來際,不能盡報?佛言:我由無明,以之爲質,成正覺道。是故我說有極重恩,於塵劫中,
報恩不盡。以此義故,無明住地,亦名報恩無盡住地故。
無始有終住地者,字義差別,其相云何?頌曰:卻過去無際 進未來有盡 以此因緣故名無始有終。
論曰:根本無明若卻過去,無其本際,名爲無始。若進未來,必有閒斷,名爲有終。般若波羅蜜中,
作如是說:始覺淨智有始無終,無明住地無始有終故。無等等生住地者,字義差別,其相云何?
頌曰:過恒上煩惱 無前後一時 具足出生故名無等等生。論曰:根本無明有勝力故,
過於恒沙諸上煩惱,無有前後,一時俱生。是故名爲無等等生。自體契經中,作如是說:譬如天魔波旬,
於大自在天,色、力、壽命、眷屬、衆具、自在殊勝,無等等生大力住地,亦復如是。麤細前後,無有前後,
一時生長故。生得住地者,字義差別,其相云何?頌曰:生謂三種生 得謂立成就 無明彼成立故名爲生得。
論曰:所言生者,所謂卽是三種生相。所言得者,卽有二義。
'云何爲二?
一者建立義,
二者成就義。根本無明能善成立彼三種相。是故名爲生得住地。
十種妄想契經中,作如是說:據子子轉,
生得住地,非據自體,名爲生得故。
觀滿住地者,字義差別,其相云何?頌曰:根本無明體 金剛還不盡 當待果滿位故名爲觀滿。
論曰:根本無明金剛心還猶存不盡,當待滿位,永斷無餘。是故名爲觀滿住地。
無上菩提契經中,作如是說:根本無明待究竟道,名爲觀滿,諸戲論識隨位漸除,
名爲觀分故。智㝵住地者,字義差別,其相云何?
頌曰:㝵一切種智 逆世閒通達 相違過極重故名爲智㝵。
論曰:根本無明漠冥極暗,一切種智顯了極明,如是明暗相違,過失極重深故。是故名爲智㝵住地。
甚深因緣契經中,作如是說:染煩惱㝵與正體智,相違過極,建立爲障。般若慧㝵與後得智相違過重,
建立爲障,乃至廣說故。不覺住地者,字義差別,其相云何?
頌曰:從無始已來 備三身菩提 圓四德涅盤不能覺不覺。
論曰:一切衆生從無始來,具足三身,圓滿四德,自性淸淨,遠離繫縛,而由無明,不知不覺。
是故名爲不覺住地。大本楞伽契經中,作如是說:般若無知,諸戲論識卽是知無,根本無明卽是不覺,
所以者何?不覺覺故,乃至廣說故。覺了住地者,字義差別,其相云何?
頌曰:十地非境界 凡小亦非境 唯大覺者了故名爲覺了。
論曰:根本無明十地菩薩未能盡知,何況凡小能善知之?唯大覺者,窮了無餘。是故名爲覺了住地。
寶積契經中,作如是說:唯佛境界,非餘能知,覺了無明故。
子藏住地者,字義差別,其相云何?頌曰:無明藏大海 攝持上煩惱 譬如種持子故名爲子藏。
論曰:無始無明攝持煩惱,令得住止,譬如諸種持隱顯子。
是故名爲子藏住地。本業契經中,作如是說:子子種藏譬如天網故。何因緣故,皆名住地?
字義差別,其相云何?頌曰:無明力大故 住持諸染法 如地持四擔故名爲住地。
論曰:根本無明其力最大,能善住持一切染法。譬如大地有勝力故,
持四重擔故,名爲住地。
云何爲四?
一者大海,
二者諸山,
三者草木,
四者衆生。是名爲四。
勝鬘契經中,作如是說:世尊,如是無明住地力,於有愛數四住地,無明住地其力最大,乃至廣說故。
已說異說相應契當門,次說隨次別釋散說門。所言不覺義者者,摠標本末,一切不覺,自此已下,
作釋略示。於是初釋根本不覺,次釋分離眷屬不覺,本廣末略,應審觀察。謂不如實知、眞如、法一故,
不覺心起者,卽是顯示根本不覺之起因緣,根本不覺何因緣故得起而有?因不如故,得起而有。
何等法中,而不如耶?
謂三法中,而不如故,言不如者,當有何義?
謂違逆義故。云何三法?
一者實知一法,
二者眞如一法,
三者一心一法。是名爲三。實知一法者,謂一切覺卽能達智。
眞如一法者,謂平等理卽所達境。一心一法者,謂一法界卽所依體。於此三法,皆違逆故,無明得起。
是故說言謂不如實知眞如法一故,不覺心起,彼三種法皆守一中,終不捨離故,通名爲一。
自此已下,眷屬略示,而有其念者,卽是顯示分離無明,謂本已立,一切眷屬皆得有故。
自此已下,卽有二門,
云何爲二?
一者歸德成幻力無力門,
二者攀妄顯眞力無力門。
歸德成幻門者,一切無明若剋其本,無自體相,依止本覺,而得成立。譬如迷道路人,依道路故迷。若離道路,無迷亂事故,如本‘念無自相,不離本覺,猶如迷人,依方故迷。若離於方,卽無有迷。衆生亦爾,依覺故迷,
若離覺性,卽無不覺故。’攀妄顯眞門者,法身、般若不能自顯,當待不覺,然後方乃讚揚名義具足現前。
譬如勇猛丈夫,伏諸軍衆,然後方乃得高勝位故。
如本‘以有不覺妄想心故,能知名義,爲說眞覺。
若離不覺之心,則無眞覺自相可說故’已說根本無明住地門,次說眷屬無明住地門。
此決擇中,自有二重,云何爲二?
一者顯示微細眷屬門,
二者顯示麤重眷屬門。
初門云何?本曰:‘復次,依不覺故,生三種相,與彼不覺,相應不離。
云何爲三?
一者無明業相,以依不覺故,心動,說名爲業,覺則不動,動則有苦,果不離因故;二者能見相,
以依動故,能見,不動則無見;三者境界相,以依能見故,境界妄現,離見,則無境界。
’論曰:就此文中,卽有二重。
云何爲二?
一者摠標略示門,
二者標釋俱成門。
第一門言依不覺故,生三種相,與彼不覺相應,不離者,卽是顯示末相承賴本體之氣力故,而得成立。
復彼本體爲受末相之枝養故,而得止住。譬如父子互相爲因,得成立故。是故說言相應不離。若如是說,
八地已上諸菩薩等,應斷無明,同妙覺耶?是事不爾。雖斷麤相,微細三相猶未斷故。
自此已下,釋第二門。此三相中,第一業相能見、所見無有差別,心王念法不可分析。唯由精動隱流之義故,
名爲業。如是動流,只由不覺。若覺不動,動卽有苦。所以者何?業相之初果,不離無明之初因故。
如本‘一者無明業相,以依不覺故心動說名爲業覺則不動動則有苦果,不離因故。’故。第二轉相以業相念,
爲所依故,轉作能緣,流成了相。若無業相動念之分位,當無了別轉相之見分。依此動,作彼轉,名爲轉相。
如本‘二者能見相,以依動故,能見不動,卽無見#’故。第三現相以了別轉,爲所依故,戲論境界具足現前,
所緣相分圓滿安布。若離了別現識之分位,卽無所緣境界之塵相。依此見分,現彼相分,譬如依明鏡故,
現諸色像名爲現相。如本‘三者境界相,以依能見故,境界妄現,離見則無境界故。如是三相雖名字別,
同是本識,前決擇中,已廣說故,此中三相初能及所同體,無別,中唯能見,則無所見。後能與所具足圓滿,
根本無明復有何別?此何所疑?無明自體不明了故,所謂若言心體無動,就此時故,名無明者,此事卽不然。
所以者何?三相分言以依不覺故,心動,說名爲業故。若言動是業識分位,非無明者,此事亦不爾。
所以者何?校量分言以不達一法界故,心不相應,忽然念起,名爲無明故。動起二文,皆就業識作如是說,
非彼無明。所以者何?能動能起,根本無明,隨動隨起,卽是業識。以此義故,無相違過。若爾,
根本無明自體,如何能動心體,能起諸念?此處難了,十地非境,三賢不量,唯佛窮了,不可妄說。
然依經說,假言强稱,但曰不覺。得有因緣,次決擇中,自當顯說。業相細念能所未分,相及境界不可分別。
何因緣故,立動名字,釋業相耶?此事亦復不可妄說。唯依經說,作如是言:業相本識無能了作,
無所了作不可分析,不可隔別,
唯由精動,隱流義故,名爲鍵摩而已。若有衆生,須種種辭,綺語此處,咄哉!終日不堪了說。
已說顯示微細眷屬門,次說顯示麤重眷屬門。
本曰:‘以有境界緣故,復生六種相
云何爲六?
一者智相,依於境界,心起分別愛與不愛故。
二者相續相,依於智故,生其苦樂覺。心起念,相應不斷故。
三者執取相,依於相續,緣念境界,住持苦樂,心起著故。
四者計名字相,依於妄執,分別假名言相故。
五者起業相,依於名字,尋名取著,造種種業故。
六者業繫苦相,以依業受果,不自在故。
’論曰:如是六相#皆意識地,非餘識法。所以者何?
大本經中,如是說故。此決擇分當釋何經?謂楞伽經。
彼契經中,當何說耶?謂分流楞伽契經中,
作如是說:譬如巨海浪 斯由猛風起 洪波鼓溟壑無有斷絕時。
藏識海常住 境界風所動種種諸識浪 騰躍而轉生。 靑赤種種色珂乳及石蜜 淡味衆花果 日月與光明。
非異非不異 海水起波浪 七識亦如是心俱和合生。 譬如海水變 種種波浪轉七識亦如是 心俱和合生。
謂彼藏識處種種諸識轉 謂以彼意識 思惟諸相義。不壞相有八 無相亦無相。依此經文,作解釋故,
起六相文。今此經文,爲明何義?謂欲顯示現識之海,性自常住,爲彼六塵境界之風,所飄動故。
七種轉識現識之體,以爲內因,六塵境界以爲外緣,興盛六種麤重相故,
如經。‘譬如巨海浪 斯由猛風起 洪波鼓溟壑無有斷絕時。
藏識海常住 境界風所動種種諸識浪 騰躍而轉生。’云何名爲境界之風,其風形狀當如何耶?
謂靑黃等種種顯色,能起眼識,寶珂等珠出現種種勝妙音聲,能起耳識;檀乳等香熏布種種芬芬香氣,
能起鼻識;木羅、石蜜等。諸安觸著,和種種諸善美樂具,能起身識,甘淡等味隨其所應,出種種味,
能起舌識;現在之花未來之果,種種法塵,隨爲彼識所緣境界,能起意識。今此文中,擧塵取識,
應審觀察。彼末那識卽是意識微細分位,無別體耳。如是六塵,能動心體,令使散亂,譬如猛風。
故名爲風。如經。‘靑赤種種色 珂乳及石蜜 淡味衆花果。’如是七識及與藏識同耶,異耶?
非同非異,離二邊故。譬如日與光明,水與波浪,非同非異,
七識、藏識非同非異,義亦如是。如經。‘日月與光明 非異非不異 海水起波浪七識亦如是 心俱和合生。
’如是七識從何處所來入藏識,作七種數,流轉起動,無斷絕時?如是七轉識,不從內來,不從外來,
不從中來,唯藏識體變,作七識。譬如海水變作波浪。
如經。‘譬如海水變 種種波浪轉 七識亦如是心俱和合生。
謂彼藏識處 種種諸識轉謂以彼意識 思惟諸相義。
’如是現識及七轉識、八種心識,唯有生滅,無常相耶,亦有實相常住相耶?
如是八識,從無始來,三際不動,四相不遷,眞實常住,自性淸淨不壞之相,具足圓滿,
無所闕失,而如是等一切功德同法界故無有二相無二相故唯是一相,唯一相故,
亦是無相。皆以無相故,無相亦無相。如經。‘不壞相有八 無相亦無相。
’此楞伽經凡明幾識?卽有二門。
云何爲二?
一者略說門,
二者廣說門。如是二門中,
三本各異說。
云何異說?
謂一本分流楞伽契經中,作如是說:大慧,略說有三種識。廣說有八種相。
何等爲三?謂眞識、現識、分別事識。
又一本分流楞伽契經中,
作如是說:大慧,廣說有八種識,
略說有二種識。何等爲二?
一者了別識,
二者分別事識。
又一本分流楞伽契經中,作如是說:大慧,略說有四種識,廣說有七種識。
云何爲四?謂業識、轉識、現識、分別事識。如是三經直是眞說,當應歸依。
何等楞伽?因緣楞伽、沙羅楞伽、盤尸多楞伽等,此四種經卽是僞假說故,
不可歸依。今當依彼十萬六千嗢拕南頌大本楞伽,
三經異相安立會釋。如其次第,應審觀察。
初契經中,
第一眞識直是根本無明所熏本覺眞心,
第二現識直是現相阿梨耶識,
第三分別事識直是意識。麤分意識細分卽末那故,
何故此經意識細分末那陁識,三細之中業識、轉識,且略不示?
卽有二門。云何爲二?
一者擧兩顯三備數門。
二者率上達下備數門。
初門云何?謂擧麤强顯細劣故。此義云何?
於三細中,麤是現識於七識中强是意識擧麤現識顯細業轉,
唯言現識,擧强意識,示劣末那,唯言意識。是故言略而義圓耳。是名擧兩顯三備數門。
後門云何?謂渾前後,滿名字故,此義云何?
經上文言:諸識有三種相,謂轉相、業相、眞相。
第一轉相卽是三細所攝轉識,
第二業相卽是三細所攝業識,
第三眞相卽是意識細分所攝之末那識。率此經文,及於下文,
圓滿名字,義理具足。是名率上達下備數門。
此契經中,八種識者,謂阿梨耶、末那、意識及五識身。
是名爲八。何故成八?一意識中,分七種故。中契經中,
第一了別識直是現相阿梨耶識。
第二分別事識直是意識
,義如前說#同說末那,彼初經中,名言眞相。此中經中,智相識者,異名同義。末那位中,
始有慧數,分別於塵,名智相識。如是智識所緣境中,作眞實之相解,而轉故,名眞相。此中八識,
比前可知。後契經中,四種識法文相明故,且略不說。言七識者,末那、意識摠爲一故,麤細雖別,
唯一識故,法界法輪契經中,
作如是說:第六意識分別六塵境界時#中,必依末那爲所依根,方得生起。是故意識當是能依,
彼末那識當是所依,能依所依不能一種。何故今說一體無別?經意別故,無相違過。謂彼經中,
立別種故。今此經中,立同種故,以何文故,分明現知分別事識,不依末那而得生起?楞伽經中,
明了說故。彼契經中,云何說耶?謂分流楞伽中,作如是說:大慧,了別事識,分別事識,
彼二種識無有差別,迭共爲因。又一本分流楞伽中,作如是說:大慧,現識及分別事識,此二壞不壞相,展轉爲因,由此文故,明知。意識,
唯以現相阿梨耶識,爲內所依,生起動轉,不依末那。
復次,大本楞伽契經中,作如是說:爾時,妙嚴菩薩則白佛言:麤相意識、細相意識,以何爲因,
以何爲緣,相續而轉?佛言:如是麤細意識以現鏡識而爲其因,以六塵境而爲其緣,相續而轉故。以此義故,
第七末那緣六塵境,爲所緣轉義,已成立。何以故?經伽他中,作如是說:境界風所動,七識波浪轉故。
復次,若有衆生,經現識者,卽是末那。是故意識以之爲因。咄哉!此言不可指南。已說經本,次釋論文。
卽此文中,自有二門。云何爲二?一者摠標略示門,二者標釋俱成門。以有境界緣故,復生六種相者,
卽是初門。此文爲明何義?謂爲顯示彼一意識六種麤相,現鏡識中六塵境界,以爲起緣,現鏡識體以爲依因,
得長相續,具足轉故。若爾,何故唯言以境界爲緣,不說以彼本識爲因?義相顯故,且略而已。其理非無。
若爾,現識卽應末那。爲彼意識親所依故,猶如意根,解釋此義,卽有二意。
云何爲二?
一者遮意,
二者許意。遮者,遮別種故。許者,許阿梨耶、末那故。如是疑難,至大末那決擇分中,其理自顯。自此已下,釋第二門。此六相中,第一、二相卽是法執,第二二相卽是人執,第三二相卽是業因果報別相。
復次,初二地上所斷中,二三賢所斷,後二十信所離。復次,初二則是細相,後有四相則是麤相。
復次,初一則是細相,後有五種,卽是麤相。復次,初五則是細相,後一麤相。復次,六相皆是麤相。
復次,六相皆無細相,亦無麤相。如其次第,應審思惟。已說顯示麤重眷屬門,次說顯示無明得有決疑門。
本曰:‘當知無明能生一切染法,以一切染法皆是不覺相故。
’ 論曰:卽此文中,自有二門。
云何爲二?
一者直示得有門,
二者釋相決疑門。初門云何?頌曰:譬如見樹木 當知有種子 見諸上煩惱知無明亦爾。
論曰:譬如有人,見林樹等,決定當知有其種子,見諸煩惱,知無明有義,亦如是。
如本‘當知無明能生一切染法故,後門云何?謂有衆生作如是疑,無明唯一,染法無量。豈一無明生諸煩惱,
起不信心?若決彼疑,應作是言。譬如種子唯一,出生無量無邊花果枝葉等一切類。根本無明亦復如是。
唯一無明能生一切無量無邊煩惱染法。以何得知一切煩惱皆無明生者?由彼諸染法皆不覺相故。若須是言,
彼疑便決。如本‘以一切染法,皆是不覺相故。從上已來,本上無明略釋已焉。
自此已下,摠蘊一切染淨諸法,更作同異之二種門,表示造論眞實本意,其相云何?
本曰:‘ 復次,覺與不覺,有二種相,
云何爲二?
一者同相,
二者異相。言同相者,譬如種種瓦器皆同微塵性相,如是無漏、無明種種業幻,皆同眞如性相。
是故修多羅中,依於此義,說一切衆生本來常住,入於涅盤菩提之法,非可修相,非可作相,
畢竟無得。亦無色相可見,而有見色相者,唯是隨染業幻所作,非是智色不空之性。以智相無可見故。
言異相者,譬如種種瓦器各各不同,如是無漏、無明隨染幻差別、性染幻差別故。
’ 論曰:卽此文中,故有二門。
云何爲二?
一者同相門,
二者異相門。爲明何義故,建立同相門?
爲欲顯示一切諸法唯一眞如,無餘法故,當眞如門。爲明何義故,
建立異相門?爲欲顯示唯一眞如,作一切法,名相各別,義用不同故,當生滅門。
如是二門,依何契經,所建立耶?謂文殊師利荅第一經。彼契經中,當何說耶?
謂彼契經中,作如是說:佛問文殊:汝久遠來,恒無休息,普遍遊行十方剎中,見何殊事?
文殊荅曰:我久遠來,不見餘事,唯見微塵。
又佛問言:汝百年中,居於輪家,不見種種瓦器相耶?
文殊對曰:我唯見塵,不見瓦器。
又佛問言:汝實不見地、水、火、風、山、川、林樹等種種相耶?
文殊對曰:我實不見如是等相,唯見微塵。如是如是世尊問詰,
文殊荅曰:至一百數,
佛問文殊:見微塵耶?
文殊對曰:我久遠來,不見微塵。
爾時,世尊告文殊言:善哉,善哉!汝是大士,能覺一相。能覺一相,卽無相法。
文殊師利,汝一仁者,非如是覺,依一相門,一切衆生本來常住,入於涅盤菩提之法,乃至以智相無可見故。
馬鳴菩薩依彼經文,立同相門。文相明故,不須重釋。
異相門者,彼契經中,作如是說:佛告身子:汝見此土,作何心見?
身子荅曰:我見此土,山川、林樹、沙礫、土石、日月、宮殿、舍宅等種種相,各各形相名字差別不同。
佛言:汝智慧力下劣狹少,心有高下,見如是異。唯汝一人非如是見,一切衆生亦復如是。乃至諸法亦復如是。眞妄互熏,染淨相待,功德、過患、形相、名字,各各差別,隨凡夫心,所立名相,有而不實,皆幻化法。
乃至廣說。依此文故,尋義之述,立異相門,文相明故,不須重釋。此二門中,所存初門,應審思惟。從上已來,釋本分中,是心生滅字句已焉。自此已下,直釋因緣。
本曰:‘復次,生滅因緣者,所謂衆生依心、意、意識轉故。此義云何?
以依阿梨耶識,說有無明不覺,而起能見,能現,能取境界,起念相續故,說爲意。此意復有五種名。
云何爲五?
一者名爲業識,謂無明力不覺心動故;
二者名爲轉識,謂依於動心,能見相故;
三者名爲現識,所謂能現一切境界,猶如明鏡,現於色像,現識亦爾,
隨其五塵對至,卽現無有前後,以一切時任運而起,常在前故;
四者名爲智識,謂分別染淨法故;
五者名爲相續識,以念相應不斷故。
’ 論曰:卽此文中,自有二門。
云何爲二?
一者攝義顯宗生解門,
二者隨文散說決疑門。
初門云何?此中因緣有其二重。云何爲二?
一者不相應生滅因緣,
二者相應生滅因緣。初重因緣,其相云何?
頌曰:彼根本無明 是隨緣本覺 各因緣具足爲三不相應。
正作因緣故 細生滅因緣更作意觀察 應審其義理。論曰:根本無明、隨緣本覺,各各因緣二義具足,
能爲三種不相應染,正作因緣。是故說言微細生滅之因緣門。具足形相散說門中,其理自明。次重因緣,
其相云何?頌曰:現鏡識自體 六塵境界相 爲三種相應能作因緣故。論曰:現鏡識體、六塵境界,如其次第,
爲彼三種相應染法,能作因緣。是故說言麤重生滅之因緣門。現識體中,
又有緣義,應審思惟。復次,更有二重因緣。
云何爲二?
一者本遍因緣,
二者末遍因緣。
言本遍者,擧根本無明及本覺心,望於六麤相,有因緣義故。
言末遍者,擧業轉相,望於三相,應有因緣義故。
復次,更有二重因緣。
云何爲二?
一者上下因緣,
二者下上因緣。言上下者,無明爲始,果報爲終,
下下與力,不越其數,作因緣故。言下上者,果報爲始,無明爲終,上上與力,不越其數,作因緣故。
復次,一切有爲生滅之法,剎那不住,無因無緣故。
復次,因緣之法空而無主,其實自性不可得故。
復次,不可得法不可得,亦不可得故。如其次第,應審思擇。已說攝義顯宗生解門,
次說隨文散說決疑門。此中有二門。
云何爲二?
一者摠標門,
二者廣釋門。
復次,生滅因緣者,所謂衆生依心、意、意識轉故者,
卽是初門。此文爲明何義?謂欲顯示所依、能依之差別故。云何所依?謂本覺心。
云何能依?謂卽衆生。言衆生者,當何法耶?謂意、意識。何故意及意識名爲衆生?
意及意識一切衆染合集而生故,名衆生,而無別自體,唯依心爲體。是故說言依心而轉。
已說摠標門,次說廣釋門。此中,二品先說末那轉,後說意識轉,文相可見。此義云何者,摠問二轉。
自此已下,作釋散說。此意轉門,依何契經,所建立耶?謂顯了經。彼契經中,當何說耶?
謂顯了契經中,作如是說:種種心識雖有無量,唯末那轉無有餘法。所以者何?
是末那識具足十一義,無所不作故。
彼契經中十一義,名略不別說。是故論者具擧十一種之別名,分明顯示。
云何名爲十一種名?
一者根本無明,
二者業相,
三者轉相,
四者現相,
五者智相,
六者相續相,
七者業識,
八者轉識。
九者現識,
十者智識,
十一者相續識。
是名十一。
如本‘以依阿梨耶識說有無明不覺,而起能見,能現,能取境界,起念相續故,說爲意。此意復有五種名,
廣說乃至。五者名爲相續識。以念相應不斷故’故。本地契經中,作如是說:大末那識具十二轉者,
所依本覺以爲一故。相識兩字,何差別故,更加其數,別建立耶?
甚大別故。云何差別?
謂一切諸眷屬染法,
皆悉各各有二義故。
云何爲二?
一者神解義,
二者暗鈍義。神解義者,據從本覺流轉邊故。闇鈍義者,據從無明流轉邊故。依初門故,建立識名,依後門故,建立相名。二門差別,應如是知。何故如是?所言識者,解了義故,順於本覺。所言相者,背本義故,
順於無明。是故常住佛性契經中,作如是說:以何得知一切衆生悉有佛性?荅曰:一切衆生皆有心識故,
當知有佛性。何以故?佛名覺者,能善照達一切法故。衆生身中,有此覺者故。是故一切衆生得有了別識耳故。以何義故,名爲意耶?
謂有二義故。
云何爲二?
一者根義,
二者身義,言根義者,能生義故。言身義者,
依止義故。以何義故,根本無明、隨染本覺,各具因緣?互相望故。
此義云何?謂擧本覺及與無明,望於三識,本覺爲因,無明爲緣,
同擧彼二,望於三相,無明爲因,本覺爲緣。所以者何?以由親爲因,由疏爲緣故。
何故上言分別智相及相續相意識細分,今此文中,末那識攝?爲欲成立末那、意識唯是一體,無二別故。
若爾,何故略去麤分,不以爲意?約實,皆意,而理盡故,且略而已。是故經言無所不作。然別建立意識轉者,爲欲建立能依、所依之法門故。擧此決檡,三相末那應廣通達。復次,爲欲顯示阿梨耶識非定阿梨耶,
末那非定末那,意識非定意識,以無定故,藏識末那,末那藏識,意識藏識,藏識意識,亦皆藏識。皆是末那,皆是意識,亦復皆非#如是無定故,皆是無常。無常故,非眞實。非眞實故,皆是幻化。以幻化故,自性空。
無自性空故,決定寂滅。寂滅故,寂滅亦寂滅。
故金剛三昧契經中,作如是說:地藏菩薩言:不可思議不思議聚,七五不生,八六寂滅,
九相空無,有空無有,無空無有,乃至上文言。佛言:見則爲妄。何以故?
一切萬有無生無相,本不自名,悉皆空寂。一切法相亦復如是,一切衆生身亦復如是。身尚不有,
云何有見故。已說隨文散說決疑門,次說相續業用差別門。本曰:‘住持過去無量世等善惡之業,令不失故。
復能成就現在未來苦樂等報,無差違故,能令現在已經之事,忽然而念未來之事,不覺妄慮。
’ 論曰:此相續識卽有三義。
云何爲三?
一者攝前不失義,
二者感果成就義,
三者妄慮遍緣義。
初義云何?此相續識而能發起潤業煩惱,住持過去無明所起一切種種善不善業,而能令作成果力用故。
如本‘住持過去無量世等善惡之業,令不失故,中義云何?此相續識又能發起潤生煩惱,而能令使已成辦業,
決定果報安立,屬當故。如本‘復能成就現在未來苦樂等報,無差違故。後義云何?此相續識攀緣轉廣,
分別更强,緣已知境,發樂不樂之心,對現前境,增愛不愛之心,緣未知境,不了妄計故,
如本‘能令現在已經之事,忽然而念未來之事,不覺妄慮故,如是此識,連續生死,令不斷絕。
是故名爲相續識焉。已說相續業用差別門,次說唯心迴轉諸法門。本曰:‘ 是故三界虛僞,唯心所作,
離心則無六塵境界。此義云何?以一切法皆從心起妄念而生,一切分別卽分別自心,心不見心,無相可得。
當知世閒一切境界,皆依衆生無明妄心而得住持。是故一切法如鏡中像,無體可得,唯心虛妄。以心生,
則種種法生;心滅,則種種法滅故。’ 論曰:此文爲明何義?爲欲顯示一切諸法,唯心迴轉,無餘法故。
所以者何?隨心有無,諸差別法有無有故,諸法唯心,此心有耶?如是心法,亦不可得故。若爾,唯是心義,
云何成立?此亦心故,以何現知?經文明故,云何說耶?謂分流楞伽契經中,作如是說:無心之心量,
我說爲心量故。復次,由心不可得之句故,成立大空之義,由無心之心量句故,成立幻差別之義。
復次,由大空之義故,諸法得成,由幻差別之義故,空理得顯。復次,由相觀故,無定二事,無二事故,
不成一事,無一事故,不成亦不成。如其次第,應審觀察。已說廣大末那轉相門,次說分別事識轉相門。
本 曰:‘復次,言意識者,卽是相續識。依諸凡夫,取著轉深,計我我所,種種妄執,隨事攀緣,分別六塵,
名爲意識。亦名分離識。又復說名分別事識,此識依見、愛煩惱增長義故。
’ 論曰:卽此文中,自有四門。
云何爲四?
一者揀擇假者同分門,
二者生起麤重轉相門,
三者建立名字差別門,
四者顯示安立所依門。
揀擇假者門者,擧三種凡夫,揀地上聖故。
云何三凡?
一者無根盲聾凡夫,
二者毛頭難角凡夫,
三者金剛不變凡夫。是名爲三。如本依諸凡夫故,
추중한 번뇌를 일으키는 문이란 어떤 것인가?
갖가지 사정취(邪定聚) 중생의 경우에는, 항상 희론분별의 식과 함께 하면서 갖가지 모든 경계를 집착하고
한계를 모른 채 그것을 점점 더 깊고 두껍게 해서 시작도 끝도 없이 불려나가 항상 끊일 때가 없기 때문에
이 문을 설한다.
이를 본론에서는 ‘점점 더 깊이 소유하고 집착하여’라고 하였다. 갖가지 부정취(不定聚) 중생의 경우에는,
멸상(滅相)이 결정적으로 불선(不善)임을 깨달아 작의(作意)하지 않는 마음을 일으키기는 하나
인공(人空)을 깨닫는 지혜가 아직 현전하지 않았으므로 갖가지 경계와 신분(身分)을 연하면
아(我)와 아소(我所)를 헤아려 굳게 집착하고 놓아버리지 못
하기 때문에 이 문을 설한다.
이것을 본론에서는 ‘아(我)와 아소(我所)를 헤아리고’라 하였다. 삼현위(三賢位)에 있는 모든 중생의 경우는,
이미 인공반야(人空般若)를 성취해서 이상(異相)이 꿈과 같은 줄을 깨닫기는 했으나 진실된 법공(法空)의
지혜가 아직 현전하지 않았으므로 갖가지 집착을 일으켜 법이 실유한다고 굳게 집착하며 나타나는 일[事]에
따라 사려해서 평등한 바른 이치를 통달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 문을 설한다.
이것을 본론에서는 ‘허망한 집착으로 일[事]에 따라 반연(攀緣)하여 육진(六塵)을 분별한다’고 하였다.
명자를 건립하는 문에 세 가지가 있다. 무엇이 세 가지인가?
첫 번째는 의식이 미세함을 소의로 삼는다는 뜻에서 붙인 명자[所依微細名麤]고,
두 번째는의식이 거칠게 드러나는 것을 소의고 삼는다는뜻에서 붙인 명자 [所依麤現名字]고,
세 번째는 의식이 경계를 따른다는 뜻에서 붙인명자[隨順境界名字]다.
이상이 세 가지다. 첫 번째 명자에는 어떤 뜻이 있는가?
이 식은 저 미세한 말나에 의지해서 그것을 의지할 근(根)으로 삼아 자리를 얻기 때문에
의식(意識)이라고 한다. 본론에서는 이것을 ‘의식(意識)이라는 명칭을 붙인다’고 하였다.
가운데 명자에는 어떤 뜻이 있는가?
이 식은 저 안(眼) 등 오근(五根)을 의지해서 그것을 의지할 근으로 삼아 오진(五塵)을 분별하기 때문에
분리식(分離識)이라고도 한다. 이것을 본론에서는 ‘분리식(分離識)이라고도 한다’라고 하였다.
맨 뒤의 명자에는 어떤 뜻이 있는가?
이 식은 현재 나타난 일[事]의 경계를 연하여 그것을 점점 더 분별함으로써,
이치 그대로를 자신의 경계로 삼지 못하기 때문에 분별사식(分別事識)이라고 한다.
본론에서는 이것을 ‘또는 분별사식(分別事識)이라고도 한다’고 하였다.
소의(所依)를 드러내 보여주는 문이란 어떤 것인가?
견혹(見惑)과 수혹(修惑) 두 가지가 본식(本識)을 훈습하여 이 훈습력으로 의식이 건립되고
더욱 불어나 계속 이어지고 끊임없이 전변하면서 머물고 지탱된다는 뜻에서 이 문을 설한다.
이것을 본론에서는 ‘이 식은 견번뇌(見煩惱)와 애번뇌(愛煩惱)를 의지해서 자라난다는
뜻을 갖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이제까지 생멸의 인연을 밝혔다.
이 아래에서는 수승하고 불가사의한 인연의 상을 드러내 보여주겠다.
【論】 무명의 훈습에 의해 일어난 식(識)은 범부가 알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이승(二乘)의 지혜로 깨달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보살의 경우, 처음 바른 믿음으로부터 출발해서 발심하고 관찰하여 법신(法身)을 증득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부분적으로 안 것이며, 나아가 보살의 구경지(究竟地)에 가서도 완전히 알지는 못한다.
오직 부처님만 끝까지 아신다. 어째서 그런가?
이 마음은 본래부터 자성이 청정하지만 무명이 있어서 그 무명에게 물이 들어 염심(染心)이 있게 되며,
비록 염심이 있기는 하지만 항상하여 변치 않는다. 그러므로 이러한 이치는 오직 부처님만이 알 수 있다.
무슨 말인가? 심성(心性)에는 항상 상주하여 망념이 없기 때문에 망상하여 변치 않는다고 하였으며,
일법계를 통달하지 못하기 때문에 마음과 상응하지 못해서 홀연히 망념이 일어나는 것을 무명이라 한다.
염심에는 여섯 가지가 있다. 무엇이 여섯 가지인가?
첫 번째는 집상응염(執相應染)이니,
이승에서 해탈한 경지와 신상응지(信相應地)를 의지하여
염심을멀리 떠나기 때문에 그렇게이름한다.
두 번째는 부단상응염(不斷相應染)이니,
신상응지(信相應地)를 의지하여 방편을 닦아 점차적으로 버려서
정심지(淨心地)를 얻으며 완전히 떠나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한다.
세 번째는 분별지상응염(分別智相應染)이니,
구계지(具戒地)를 의지하여 점차 떠나 무상방편지(無相方便地)에
이르러 완전히 떠나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한다.
네 번째는 현색불상응염(現色不相應染)이니,
색자재지(色自在地)를 의지해서 떠나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한다.
다섯 번째는 능견심불상응염(能見心不相應染)이니,
심자재지(心自在地)를 의지해서 떠나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한다.
여섯 번째는 근본염불상응염(根本業不相應染)이니,
보살지를 의지하여 여래지에 들어가야 떠나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한다.
일법계의 의미를 요달하지 못하는 자도 신상응지로부터 관찰하고 수학하고 끊어서
정심지에 들어가면 능력에 따라 열심을 떠날 수 있으며, 여래지에 이르러 완전히 떠날 수 있다.
상응(相應)한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마음과 염법(念法)이 달라서 염법과 정법의 차별에 의지하기 때문에
지상(知相)과 연상(緣相)이 같아진다는 뜻이다.
상응하지 않는다[不相應]는 말은 무슨 뜻인가?
마음 그대로가 불각(不覺)이라서 항상 다름이 없으니 지상(知相)과
연상(緣相)이 같지 않다는 뜻이다.
염심(染心)은 진여의 근본지(根本智)를 장애하기 때문에 번뇌애(煩惱礙)라고도 한다.
무명은 세간(世間)의 자연업지(自然業智)를 장애하기 때문에 지애(智礙)라고도 한다. 무슨 뜻인가?
염심에 의지해서 상을 보고[能見] 상을 나타내고[能現] 망령되이 경계를 취함으로써 평등성을 어기기 때문이며, 일체법은 항상하고 적정(寂靜)하여 상을 일으키는 일이 없으나 무명불각 때문에 망령되이 법과 어긋나기 때문이다. 이것은 세간의 일체 경계를 있는 그대로 따라서 갖가지로 아는 지혜를 얻지 못하게 하는 연유이다.
【釋】 위 글은 다섯 가지 문으로 되어 있다. 무엇이 다섯 가지인가?
첫 번째는 수행인을 열거하고 가장 수승한 지위를 드러내는 문[擧人顯示殊勝門]이다.
두 번째는 염심의 연을 밝혀서 의심을 풀어 주는 문[顯示染緣決疑門]이다.
세 번째는 장애를 열거하고 대치하는 방법을 제시하여 해당하는 것끼리배속시키는 문[擧障示治配當門]이다.
네 번째는 상응과 불상응의 차별을 드러내는 문[顯應不應差別門]이다.
다섯 번째는 두 가지 애와 장의 차별된 작용을 건립하는 문[立二礙別障用門]이다. 이상이 다섯 가지다.
첫 번째 문에는 세 종류의 사람이 있다. 무엇이 세 가지 사람인가?
첫 번째는 부분적인 증득과 완전한 증득 두 가지에 전혀 관계없는 사람[分滿俱絶人]이다.
사정취(邪定聚) 범부와 모든 이승(二乘)은 매우 우매하고 어리석기 때문이며, 지혜가 열등하기 때문이다.
본론에서는 이것을, ‘무명의 훈습에 의해 일어난 식(識)은 범부가 알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이승(二乘)의 지혜로 깨달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라고 하였다.
두 번째는 부분적인 증득만 있고 완전한 증득은 없는 사람[有分無滿人]이다.
오십위(五十位)에 있는 자들은 시각반야가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본론에서는 ‘보살의 경우,
처음 바른 믿음으로부터 출발해서 발심하고 관찰하여 법신(法身)을 증득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부분적으로
안 것이며, 나아가 보살의 구경지(究竟地)에 가서도 완전히 알지는 못한다’고 하였다.
세 번째는 완전한 증득만 있고 부분적인 증득은 없는 사람[有滿無分人]이다.
불과위에서는 대원경지(大圓鏡智)가 빠짐없이 현전(現前)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본론에서는
‘오직 부처님만 끝까지 아신다’고 하였다. 이것이 세 가지 사람이다.
이제까지 수행인을 열거하고 가장 수승한 지위를 드러내는 문을 설하였고,
다음으로 염심의 연을 밝혀서 의심을 풀어주는 문을 설하겠다.
두 가지 의도에서 이 문을 시설했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상주하면서 무상한 측면[常無常門]이고,
둘째는 무상하면서 상주하는 측면[無常常門]이다.
무슨 의미에서‘상주하면서 무상한 측면’이란 명칭을 붙이는가?
자체상의 본각심은 무시이래로 결정코 상주하며 체성이 변치 않아서
무상할 때가 없으나 변화하지 않는 때가 없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한다.
본론에서는 이것을, ‘어째서 그런가? 이 마음은 본래부터 자성이 청정하지만 무명이 있어서
그 무명에게 물이 들어 염심(染心)이 있게 되며’라고 하였다.
무슨 의미에서 ‘무상하면서 상주하는 측면’이라는 명칭을 붙이는가?
이 본각심은 무시이래로 항상 무상하며 항상 변하지만 상주하지 않은 때가 없으므로 그렇게 이름한다.
본론에서는 이것을, ‘비록 염심이 있기는 하지만 항상하여 변치 않는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이러한 이치는 오직 부처님만이 알 수 있다’고 한 구절은 가장 뛰어난 지위를 결론적으로
맺는말이다. 그 아래로는 두 구절로 위의 두 구절을 다시 해석하는 내용이니 문맥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제까지 염심(染心)의 연을 밝혀서 의심을 풀어주는 문을 설했고,
이제부터는 장애를 열거하고 대치하는 방법을 제시하여 해당하는 것끼리 배속시키는 문을 설하겠다.
두 가지 의도에서 이 문을 시설했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염심의 전변에따라 대치하는 분위를시설하는 문[隨轉對治分位門]이고,
둘째는 근본무명을 대치하는 분위를 시설하는 문[根本對治分位門]이다.
염심의 전변에 따라 대치하는 분위를 시설하는 문이란
여섯 가지 염심은 위에서 말한 상에 따라 차례를 갖는다는 뜻이다.
즉, 발심을 처음으로, 묘각을 끝으로 해서 해당하는 지위에 맞게 염심을 떠난다는 뜻이다.
본론에서는 이것을, ‘염심에는 여섯 가지가 있다. 무엇이 여섯 가지인가?
첫째는 집상응염(執相應染)이니,
이승에서 해탈한 경지와 신상응지(信相應地)를 의지하여 염심을 멀리 떠나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한다…….
여섯째는 근본업불상응염(根本業不相應染)이니,
보살지를 의지하여 여래지에 들어가야 떠나기 태문에 그렇게 이름한다’고 자세히 설하였다.
근본무명을 대치하는 분위를 시설하는 문이란 대력무명은 극희지(極喜地)를 처음으로
묘각을 끝으로 해서 해당하는 지위에 맞게 염심을 떠나기 때문이다.
본론에서는 이것을, ‘일법계의 의미를 요달하지 못하는 자도 신상응지(信相應地)로부터 관찰하고
수학하고 끊어서 정심지(淨心地)에 들어가면 능력에 따라 염심을 떠날 수 있으며,
여래지에 이르러 완전히 떠날 수 있다’고 하였다. 극희지에서 근본무명과
수상(隨相)의 염심을 대치하는 형상을 어떻게 구분하는가?
후득지(後得智)로 끊는 것을 무명(無明)이라 하고 정체지(正體智)로 끊는 것을 수상(隨相)이라고 한다.
극희지의 경우처럼, 위에서 설한 모든 지위도 마찬가지라는 시실을 이와 같이 알아야 한다.
이제까지 장애를 열거하고 대지하는 방법을 제시하여 해당하는 것끼리
배속시키는 문을 설하였다. 다음으로 상응과 불상응의 차별을 드러내는 문을 설하겠다.
상응(相應)이란 무슨 뜻인가?
심품(心品)과 염법(念法)이 다르다는 뜻이다.
무엇을 심품이라 하는가?
본각이 염(染)을 따르는 마음을 말한다.
무엇을 염법이라 하는가?
무명에 직접적으로 의지해서 생하고 자라나는 망법(妄法)을 말한다.
무슨 의미에서 상응이라 하는가?
서로가 서로에게 힘을 부여한다는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무슨의미에서 이 두 가지 법이 다르다고 하는가?
근본이 각각 다르기 때문이다.
본론에서는 이것을 ‘상응(相應)한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마음과 염법(念法)이 달라서’라고 하였다. 염법은 더러운 법에 의지하고
심품은 청정한 법에 의지한다. 이렇게 두 법은 물과 불의 관계처럼 각각 차별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무슨 이유로 상응한다는 뜻이 성립하는가?
지상(知相)과 연상(緣相)이 만나서 계합[契同]하기 때문이다.
무엇을 지상의 계합이라고 하는가?
심품과 염법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관계로 화합해서 전전하기 때문이다.
무엇을 연상의 계합이라고 하는가?
이와 같은 두 품(品)은 소연(所緣)이 같기 때문이다. 이것을 본론에서는
‘염법과 정법의 차별에 의지하기 때문에 지상과 연상이 같아진다는 뜻이다’라고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세 가지 상은 같다. 다르기 때문에 같음이 성립한다.
만일 같은 것이라면 그것은 같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한 『대본금강삼매계경(大本金剛三昧契經)』의 설을 경증으로 들 수 있다.
그렇다면 어째서 『부종계경(部宗契經)』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하는가?
“세 가지 추중한 염법은 두 가지 이치로 전전한다.
무엇이 두 가지 이치인가?
첫 번째는 거스름으로써 전전함이고
두 번째는 따름으로써 전전함이다.”
그리고는 이에 대해 자세히 설하였다.
상법[上]에 대해서는 거스르고 하법[下]에 대해서는 따른다는 뜻에서
그렇게 설한 것일 뿐 다른 뜻은 없다. 불상응과 상응은 거스름으로써
적전하는 측면에서 설한 것이니 자세히 관찰해야 한다.
이제까지 상응과 불상응의 차별을 드러내는 문을 설했고,
다음으로는 두 가지 애(礙)와 장(障)의 차별된 작용을 건립하는 문을 설하겠다.
저 번뇌애(煩惱礙)는 다분히 흩어지고 움직이는 성품을 갖는 반면,
이 진여지(眞如智)는 단지 적정(寂靜)한 성품을 갖는다.
이렇게 상위하기 때문에 가리운다[障]는 개념을 건립한다.
이를 본론에서는 ‘염심(染心)은 진여의근본지(根本智)를 장애하기 때문에 번뇌애라고도 한다’고 하였다.
저 지애(智礙)는 모호하고 어두운 성품을 갖는 반면, 업을 이루어 내는 이 지혜는 총명한 성품을 갖는다.
이렇게 상위하기 때문에 막힌다[礙]는 개념을 건립한다.
이것을 본론에서는 ‘무명은 세간의 자연업지(自然業智)를 장애하기 때문에 지애라고도 한다’고 하였다.
‘무슨 뜻인가?’ 아래로 이어지는 문장은 그렇게 되는 인연을 밝힌 내용이니, 자세히 사유해서 헤아려야 한다.
두 가지 장과 두 가지 애는 이 밖에 어떤 차별을 갖는가?
두 가지 장[二障]은 끊는다는 것에만 일방적으로 의거하는 반면,
두 가지 애[二礙]는 끊음과 끊지 않음 두 가지에 의거한다. 이렇게 알아야 하고 이렇게 관찰해야 한다.
여기까지 해서 수승한 인연을 결택하는 부문[因緣殊勝決擇分]에 대한 설명을 마친다.
生起麤重門者,若據邪定聚,諸衆生常興戲論分別之識,取著一切種種境界,轉轉深厚,無有邊際,無有始終,常恒增長,無斷絕故。如本‘取著轉深故。’若據不定聚諸衆生,雖覺滅相定是不善,起不作意,而人空智未現前故,緣諸境界及身分等,計我我所,堅執不捨故。如本‘計我我所’故,若據三賢位諸衆生,雖已成就人空般若,
覺異相夢,而眞法空智猶未現前故,起種種著,堅執法實,隨事思慮,不能通達平等正理故。如本‘種種妄執,
隨事攀緣分別六塵故。
’建立名字門者,卽有三種。
云何爲三?
一者所依微細名字,
二者所依麤現名字,
三者隨順境界名字。是名爲三。
初名云何?此識依彼微細末那,以爲止根而得安立故,名意識。如本‘名爲意識’故。
中名云何?此識依彼眼等五根,以爲止根,分別五塵。是故亦名爲分離識。如本‘亦名分離識’故。
後名云何?此識今緣事之境界,而轉分別,未以如理爲自境界。是故名爲分別事識。
如本‘又復說名分別事識’故。顯示所依門者,見修二惑熏於本識,由此熏力,麤分意識建立增長,相續恒轉,
得住持故。如本‘此識依見、愛煩惱增長義故故,從上已來,生滅因緣決擇已焉。自此已下,
顯示因緣殊勝不可思議之相。本曰:‘ 依無明熏習所起識者,非凡夫能知,亦非二乘智慧所覺。
謂依菩薩從初正信發心觀察,若證法身,得少分知,乃至菩薩究竟地,不能知盡,唯佛窮了。
何以故?是心從本已來,自性淸淨,而有無明,爲無明所染,有其染心。雖有染心,而常恒不變。
是故此義唯佛能知。所謂心性常無念故,名爲不變,以不達一法界故,心不相應,忽然念起,名爲無明。
染心者,有六種。
云何爲六?
一者執相應染,依二乘解脫及信相應地遠離故;
二者不斷相應染,依信相應地,修學方便,漸漸能捨,得淨心地,究竟離故;
三者分別智相應染,依具戒地,漸離乃至無相方便地,究竟離故;
四者現色不相應染,依色自在地,能離故;
五者能見心不相應染,依心自在地,能離故;
六者根本業不相應染,依菩薩地盡,得入如來地,能離故。不了一法界義者,從信相應地,觀察學斷,
入淨心地,隨分得離,乃至如來地,能究竟離故。言相應義者,謂心念法異,依染淨差別,而知相、
緣相同故。不相應義者,謂卽心不覺常無別異,不同知相、緣相故。又染心義者,名爲煩惱㝵。
能障眞如根本智故。無明義者,名爲智㝵。能障世閒自然業智故。此義云何?以依染心,能見能現,
妄取境界,違平等性故,以一切法常靜,無有起相,無明不覺,妄與法違故,
不能得隨順世閒一切境界種種知故。
’ 論曰:卽此文中故有五門。
云何爲五?
一者擧人顯示殊勝門,
二者顯示染緣決疑門,
三者擧障示治配當門,
四者顯應不應差別門,
五者立二㝵別障用門。是名爲五。
第一門中,卽有三人。
云何爲三?
一者分滿俱絕人,邪定凡夫一切二乘,愚癡深故,智慧劣故,
如本‘依無明熏習所起識者,非凡夫能知,亦非二乘智慧所覺故。’
二者有分無滿人,五十位人始覺般若未圓滿故,如本‘謂依菩薩,
從初正信發心觀察,若證法身,得少分知,乃至菩薩究竟地,不能知盡故;
三者有滿無分人,佛果位中,大圓鏡智遍現前故;如本‘唯佛窮了故,’是名爲三。
已說擧人顯示殊勝門,次說顯示染緣決疑門。此中有二意。
云何爲二?
一者常無常門,
二者無常常門。言常無常門者,自相本覺之心從無始來,決定常住,體性不變,無非無常時,無非變化處故。
如本‘何以故?是心從本已來,自性淸淨,而有無明,爲無明所染,有其染心故。言無常常門者,
此本覺心從無始來,常恒無常,恒常變異,無非常住時,無非不變處故。如本‘雖有染心,而常恒不變故。
是故此義唯佛能知者,摠結殊勝,自此已下,更以二句,釋上二句文相可見。已說顯示染緣決疑門,
次說擧障示治配當門。卽此門中,自有二意。云何爲二?一者隨轉對治分位門,二者根本對治分位門。
隨轉對治門者,六種隨相如其次第,發心爲初妙覺,爲後隨應離故。
如本‘染心者,有六種。
云何爲六?
一者執相應染依,
二乘解脫及信相應地遠離故,廣說乃至。六者根本業不相應染,依菩薩地盡,得入如來地,能離故’故,根本對治門者,大力無明極喜爲初,妙覺爲後,隨應離故。如本‘不了一法界義者,從信相應地觀察學斷,入淨心地,
隨分得離,乃至如來地,能究竟離故。’極喜地中根本、隨相、對治形相,當如何別?謂後得智之所斷者,
名爲無明,及正體智之所斷者,名爲隨相。應如是知,如說極喜,上一切地亦復如是。已說擧障示治配當門,
次說顯應不應差別門。云何名爲相應義耶?言相應義者,所謂心品及念法異。
云何心品?所謂本覺隨染之心。
云何念法?所謂直依無明,生長妄法。以何義故,名爲相應?謂相與力故,
如是二法何故名異?本各別故。如本‘言相應義者,謂心念法異’故。念法之依染,心品之依淨,
如是二法各各差別,猶如水火。而何故言成相應義?知相,緣相合契同故。云何名爲知相契同?
心品念法不相捨離,和會轉故。云何名爲緣相契同?如是二品所緣同故。如本‘依染淨差別,
而知相緣相同故’故。大本金剛三昧契經中,作如是說:三種相同,異故成同。
若同不同故,若爾,何故部宗契經中,作如是說?三種麤染二義故轉。
云何二轉?
一者相違轉,
二者隨順轉,乃至廣說。逆上順下作如是說:無別意趣,不相應義相應相違,應審觀察。已說顯應不應差別門,次說立二㝵別障用門。彼煩惱㝵多散動性,是眞如智直寂靜性。如是相違故,立爲障。如本‘又染心義者,
名爲煩惱㝵。能障眞如根本智故。’彼智慧㝵漠溟之性,是作業智聰明之性,如是相違,故立爲障。
如本‘無明義者,名爲智㝵,能障世閒自然業智故。’此義云何下,顯示其因緣,應審思擇。二障二㝵復有何別?
立二障門,據一向斷,立二㝵門,據斷不斷,應如是知,應如是觀,從上已來,因緣殊勝決擇分已焉。
釋摩訶衍論卷第四丙午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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