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 한파가 몰아치던 시절이 아직도 생생하다. 뼛속까지 시리게 만드는 겨울은 아니었지만, 삶을 얼어붙게 만드는 시기였다. 회사에 늦게 입사한 여덟 명만 한순간에 해고 대상이 되었다. 군대에서 제대한 후 성실히 일한 죄밖에 없었다.
그 회사는 오전 9시 출근, 오후 9시 퇴근. 매주 철야는 두 번씩, 당연한 일처럼 반복됐다. 하루 36시간씩 일하는 게 그 당시의 일상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게 어떻게 가능했는지 믿기지 않지만, 그때는 그런 시절이었다.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정리해고 후, 나는 다시 일자리를 찾아야 했다. 어느 날, 같은 처지에 있던 동료 동수씨가 나에게 상선 타러 가자고 제안했다. 나는 생각해본다고 했고 먼저 부모님과 형제들에게 그 이야기를 전했다. 집안이 들썩거렸다.
누나의 추천으로 미용직업전문학교에 등록하게 되었다. 6개월 과정이었고, 수업은 오전 9시부터 오후 4시까지였다.
첫 수업은 자기소개로 시작됐다. 수강생은 모두 36명, 그중 남자는 6명, 여자는 30명이었다. 자기소개가 막바지에 다다랐을 때, 키 150cm 정도의 매운 고추 같은 여자가 나서서 말했다. 그녀는 자신을 소개하며 덧붙였다. “전에 사귀던 남자랑 헤어졌어요. 남자친구 구해요.” 그 말에 모두가 한바탕 웃음을 터뜨렸다.
저녁시간이 다 되어가는 집의 푸세식 화장실에 쪼그리고 앉아서 곰곰이 생각을 해봤다. 괜찮은 여성이라 생각됐다. 미용직업전문학교 사무장님께 전화를 했다. “전번 좀 가르쳐 주세요.”하니 가르쳐 주셨다.
바로 전화를 했다. 서로에 대해 6개월간 사겨보고 결정하기로 합의점을 찾았다. 그녀가 영미다.
곧바로 오토바이에 시동을 걸고 ‘영미’에게 달려갔다. 이야기에 빠진 영미는 막차를 놓쳤다. 영미의 집은 영천시와 맞닿은 곳에 있었다. 나는 영미를 오토바이에 태우고 집까지 데려다주었다.
그 시절 나는 미용에 전념하고 있었다. 가을 소풍은 남산으로 갔는데, 등산에 대한 안 좋은 기억이 있어 내키지 않았다. 그 기억은 교회에서 주최한 계룡산 등반대회에서 생긴 것이다. 상금이 걸린 대회였고, 군대에서 산을 많이 탔던 나는 젊음과 기운으로 3시간 코스를 뛰어서 넘었다. 1등을 했지만, 2등과의 30분 차이가 무색하게도 2등이 상장과 상품을 받아갔다. 나는 아무것도 받지 못했다. 심사위원이 도착하기 전에 산을 넘어버린 것이 이유였고, 교회에 다니지 않는 것도 불리하게 작용했다.
그 후로 나는 등산을 좋아하지 않게 되었다. 다른 사람들과도 얘기를 나누었는데, 한 여자애도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먼저 출발했고, 우리 둘만 남았다. 나는 오토바이에 시동을 걸었고, 그 여자애가 “나도 태워 줘”라며 자연스럽게 뒤에 탔다. 약간의 눈치는 보였지만 우리는 오토바이로 남산을 넘었다.
6명씩 한 조로 나뉘었고, 나는 6조, 영미는 4조였다.
저녁 회식은 조별로 따로 진행되었다. 회식 중간에 나는 영미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디에 있어? 갈게”라고 물었지만, 영미의 대답은 예상 밖이었다. “뭐 하러 전화해? 그 애랑 있지”라는 말에서 질투가 묻어났다. 그때는 힘들었지만 가까스로 그녀를 달랠 수 있었다. 비가 와서 땅이 굳어가는 것처럼, 무거운 기분이 들었다.
미용사 자격증을 딴 사람은 총 4명이었다. 나와 영미, 그리고 다른 두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떨어졌다. 우리는 함께 경로당에서 봉사활동을 했다. 나는 이발을, 다른 선생님들은 파마를 했다. 그렇게 6개월의 교육과정이 끝났다.
작고 활발한 영미는 미용실의 보조 미용사가 되었다. 파마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나는 다방을 차렸다. 영미는 쉬는 날마다 자기 일처럼 다방에 와서 청소도 도와주었다. 나는 하루에 3시간도 못 자면서 오토바이로 영미를 집에 데려다주었고, 목숨 걸고 다방 운영에 몰두했다. 그런데도 손 한 번 잡지 못한 채 2년이 지나갔다.
엄격한 단속 때문에 다방 문을 자주 닫아야 했고, 적자가 쌓여갔다. 그러던 중 카지노 사업 제안이 들어왔다. 1층은 중식 뷔페, 2층은 라이브 카페와 카지노 시설이었다. 불법 카지노가 아니라며 허가증까지 보여주었다. 나는 분배 조건으로 사업자 등록증에 이름을 올렸고, 체어맨 리무진 두 대와 산타모 한 대까지 뽑았다. 마치 영화처럼 앞뒤에 TV가 설치된 차들은 빛나 보였다. 그렇게 멋진 삶이 시작되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어느새 나는 연대 보증으로 2억 4천만 원의 빚을 지고 있었다. 영미와는 매일 만났지만 즐거울 수 없었다. 나락에 빠진 현실 때문이었다.
어느 날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났다. 내가 없던 사이 경찰이 카지노에 있던 사람들을 모두 잡아갔다. 서울에서 온 딜러 두 명은 1년 6개월의 실형을 받았다. 나는 일단 피해야겠다는 생각에 매일 2만 원씩 여관비를 내며 여관방에 머물렀다. 밤에는 영미와 노래방에 가서 술을 마시고, 그런 만남을 이어갔다.
“집에서 일요일에 선을 보라고 하더라. 어떡하지? 나 가기 싫은데... 너는 어떡할 거야?” 영미는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한번 가서 봐” 나는 그렇게 말하며 확답을 피했다. 나에게는 미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도피 생활이 6개월을 넘기면서 점점 지쳐갔다.
마음과 달리 만남도 뜸해졌다. 마지막 재판 출석날이 다가왔고, 나는 도망치지 않고 판사와 1대1로 재판에 응했다. 진실을 이야기했더니, 판사는 선처를 베풀어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감사합니다”라고 인사하고 법정을 나왔지만, 빚쟁이들 때문에 집에는 돌아갈 수 없었다. 후배가 운영하는 유리 가게의 컨테이너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가끔 유리 시공 일을 도왔다. 번 돈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러던 중 영미가 시집가야 한다며 내게 책임지라고 말했다. 아무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고, 빚만 가득한 나는 나중에 이야기하자며 그녀를 떠밀었다. 그 후로 만남도 연락도 하지 않았고, 하루에도 열 번 넘게 울리는 전화는 부담으로 다가왔다.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며 나는 1년 가까이 숨어 살았다.
3월 14일, 화이트데이에 나는 사탕 바구니를 들고 영미가 근무하는 곳을 찾아갔다. 영미는 무안해하며 나왔고, 나는 사탕 바구니를 내밀었다. 영미는 받지 않으려 했지만 끝내 주었다.
“받아도 되나?” 영미가 말했다.
“너 주려고 가져왔으니 당연히 받아야지” 내가 대답했다.
“사실은 도저히 기다릴 수가 없었어. 4월 25일에 결혼식 해. 꼭 와줬으면 좋겠어” 영미의 목소리에는 아쉬움이 담겨 있었다.
“그래, 갈 수 있으면 갈게.”
나는 무너지는 마음을 느껴야 했다. 감정을 주체할 수 없는 기분으로, 목적지도 정하지 않고 차를 몰았다. 시내를 수십 번 돌던 중, 영미가 다른 남자의 손을 잡고 웃으며 걸어가는 모습을 보았다. 그 순간 모든 것이 현실로 다가왔고, 나는 영미에 대해 다시 생각할 시간을 가졌다.
행복해 보이는 모습에 앞이 깜깜했지만, 다행이라고 이를 꽉 물어 버렸다. 모든 게 다 꿈인 것만 같았다. 하늘이 내게 내려준 선물 같은, 내게 너무 과분한 영미였다. 지금까지도 표현 못했던, 기억 속의 퍼즐들을 이제야 전해본다.
첫댓글
하루를 감사하고
잠에 들고
아침을 맞이하는 일
주어진 하루를
하루살이처럼 지내는 일
제게는
기적이고 선물이랍니다
이광호 선생님, 앞으로는 좋은 일만 가득하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