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매기의 꿈
서용숙
배고픈 자의
심정을 헤아려 본다.
종일 거센
물보라 주변에서 배회하는
갈매기의 꿈을
경포 습지
서용숙
이제 수련잎마저 자취를 감추고
철없는 영산홍 예쁘게 꽃피었지만
추위에 벌 나비 오지 못하고
수련 습지에서 살던 잉어
먹이사슬로 풀숲에 버려지니
자연계 삶의 현장 앞에서 고이는 눈물
아무것도 본 것 없고 아는 것도 없다는 듯이
햇살을 받으며 몸을 꼿꼿이 세운 갈대는
하얗게 웃으며 일광욕을 즐기고 있다
참새떼들도 모르는 척 귀따가운 소리
그중의 한 사람
서용숙
탄생 후
떠나간 인연의 시간 들을
맑은 가을날 바닷가에서
이제는 무디어져 가는 영육으로
삶의 고를 가늠 하며
희열과 후회를 반복하는 일상입니다.
태어나서 허공의 어디쯤
잠시 나들이 갔다 돌아온 나는
흰 머리카락을 세어보고
주름살을 눈가로 당겨보다가
지나간 날들에 다만 감사하자며
웃습니다
어둠 속에서 바스락바스락 나뒹구는
낙엽의 애처로운 소리를 들으며
설령 낙엽처럼 머지않은 날
한 움큼의 흙이 된다고 해도
나를 사랑했던 사람들을 축복하면서
두 손을 모아 봅니다
그중의 한 사람 당신을 사랑합니다.
두 개의 태양
서용숙
늦가을 아침
낡은 아파트 1층
온 집안에 가득한 눈부신 맑은 햇살
태양은 정 동쪽 정동진을 지나서
동남쪽 남대천 가에 있는 우리 집까지 와서
아침이 싫은 나를 깨웁니다.
온 집안에 가득한 햇살의 비밀은
앞 동 어느 집 유리창에 마주한
또 한 개의 복사 태양
막 잠에서 깨어난 나는 눈부심에
비틀거리며 얼른 눈을 가렸습니다.
그런데 감은 눈앞에 기적같이 서 있는 이
지나간 밤 낙엽같이
추워 떨었던 세상의 모든 절망을
따뜻이 안아주는 희망
그는 햇볕이었습니다.
.
모정의 탑
서용숙
오래전 쌀쌀한 강릉의 어느 해 이른 봄
강릉시 왕산면 대기리
외나무다리 건너서 숲길을 한참을 가다 보면 보이기 시작하는 돌무지들을 지나고 지나서 만난 맑디맑은 계곡 여울에서는 아직도 작년 가을의 갈색 낙엽들이 맑은 빛깔로 뒹굴고 있고 징검다리 건너편 지붕 낮은 초라한 농막 한 채, 굴뚝에서는 하얀 연기가 모락모락 오르고 있어서 한참을 바라보았다 표현하기 어려운 정서가 거기 그렇게 있었다.
주변 돌담에는 군데군데 네모난 칸들이 뺑 돌아 가면서 있고 그 네모 칸 안에는 작은 촛불들이 켜져 있었다. 그 따뜻한 농막 안에서 귀하게 마신 커피 (모카골드) 한잔에 마음이 동하여 가만히 5,000원 놔두고 나왔는데 돌 나르는 지게꾼 보살이 헐레벌떡 따라와서는 이름을 가르쳐주고 가라고 해서 이름이 없다고 하는데도 굳이 그러면 되돌아가서 5,000원을 가지고 가야 한다고 하면서 성씨라도 알려달라고 간곡하게 말씀하셔서 애들 성을 알려주고 오면서 다음에 초를 준비해 가지고 가서 돌담 뺑 돌아가면서 촛불 한 번 켜드리리라 했건만
다시 찾아갔을 때는 그분은 이미 돌아가시고 그곳은 사연 있는 관광지가 되어 외나무다리는 없어지고 주차장과 튼튼한 시멘트 다리가 놓여 있고 사연이 적힌 커다란 노추산 모정의 탑 안내판을 지나 숲속 깊숙한 곳 아직은 남아있는 물 건너 농막, 청아한 계곡의 물소리에 쌓여 들려오는 그분의 목소리 “추워 보이는데 커피 한잔 마실래요? 믹스커피만 있어요” “어머! 그래도 되나요? 저는 저 방 안으로 들어가고 싶어요” “그래요 들어가서 따뜻하게 앉아서 마시고 가요”
그분의 다정한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삶의 의미
서용숙
나는 요즘
또 노트를 사서
노트 언저리에 눈물방울 흘리며
신세 한탄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이른 아침 화로에 숯불을 담던 사람
미소로 답하며 앞치마를 두르면
화로에는
뚝배기의 막장이 구수하게 끓고 있었지.
행복이라는 것이
평범한 삶의 낙으로
소유할 수 있는 것이라고 믿는 것이
어리석다고 말하는 이가 있다면
말없이 돌아와
억겁을 기약한 한 사람만을
그리워하며 살겠노라고
스스로 약속하리라
극복한다는 것이 참으로 어려워서
찾아간 바닷가 백사장에는
하얗게 밀려온 파도가 물거품이 되어
내 마음속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아브라카다브라
서용숙
아브라카다브라
주문을 외웠더니
졸고 있던 태양도 눈부시게 빛나고
잿빛 하늘은 파란빛으로 바뀌었지
아브라카다브라
현상에만 집중하는
무심한 순리의 바다는
무한한 생명력을 이어 가겠지
아브라카다브라
이승 저승 어디에 있더라도
속울음 울던 우리 삶의 흔적들이
바다처럼 서로의 가슴속에 남아있겠지.
인삼주 두 잔
서용숙
삼계탕집에서 준 인삼주 두 잔
운전하는 사람 몫까지 거푸 다 마시고
알 수 없는 허무감에 눈물 뚝뚝 흘리며
너무 쉽게 한 사람 떠나보내고 받은 업보
밤새 가슴속 열기가 머릿속으로 올라가
끝내 후회를 다 태우지 못하고
종일 손전화기 바라보다가
허허 저 혼자 눈물에 지쳐 버렸다.
밤새워 내린 비가 종일 내리고 계절은
깊은 고독의 시간 속으로 떠나는데
참새들은
아직 남아있는 노란 은행잎에 깃들고 있다
침묵하는 사람들
서용숙
침묵하는 사람들의
그 고요한 정서를 뺏지 말자
답답한 건 그들이 아니라
나
약속이나 한 것처럼
한꺼번에 침묵하는
그 사람, 그리고 그 사람,
그리고, 또 그 사람
당황스럽지만
인연의 끝이어도 어쩔 수 없다
다만 침묵을 지켜보는
또 하나의 침묵은
이제는 그 누구의 침묵을 깰만한
애끓는 마음도 기운도 없다.
침묵의 정서는 고요해서
나의 숨소리까지 들린다
시절 인연
서용숙
여름철 바닷가 방풍림
때로는 도깨비바늘을 만나러 솔숲 산책로가 아닌
길이 없는 풀숲으로 들어가 걷는다
햇볕이 따스하게 들어오는 솔숲에 들어서면
살아야 한다는 희망의 미소가 저절로 생겨 나온다.
잔설을 밟으면 그 아래 누런 솔잎의 푹신함,
그 아래 봄이 있다. 도깨비바늘이 숨 쉬고 있다
우주의 티끌 하나인 너와 내가 봄을 위하여
소나무들과 같이 호흡하며 햇볕에 겨울을 녹인다.
태양은 내 가슴속에도 있다.
그 볕은 푸른 잎이 무성한 나무 한 그루 키우고 있고
그 나무는 네가 있어 잎이 더 푸르다.
시절 인연의 자연스러움은 오고 가는 것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