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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격 높은 문학 수필을 위한 도전
문학과 철학 - 니체의 철학과 사상이 문학에 끼친 영향
김영관
수필가, 조선대학교 영문학과 명예교수, 영문학 박사
목차
I.서론
II.본론
-i. 신의 죽음
-ii. 니힐리즘(Nihilism 허무주의)
-iii. 초인(Ubermensch, 영어: Overman)의 도래를 예고
-iv.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문학성
-v. 힘의 의지(Will zur Macht) (영어: Will to Power)
-vi. 모든 가치관의 전도(Umwertung aller Werte)`
-vii. 아모르 파티(Amor fati)
-viii.영원회귀(Eternal Recurrence)
-viiii. 1) 디오니소스 (라틴어:Dionysos, 영어:Dionysus, 로마:Bachus 신)의 긍정
2)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
III. 결론
I. 서론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Also Sprach Zarathustra. 영어:Thus Spoke Zarathustra)』의 1부는 1883년 2월3일부터 13일까지 겨우 10일 동안이라는 기간에 단숨에 쓴 뒤, 2부는 1부가 탄생한 해와 같은 해 여름에 실스마리아에서 이것 역시 불과 2주일 동안에 쓰여졌다. 그리고 3부는 다음 해인 1884년 1월, 남프랑스 니스에서 10일 동안에 완성한다. 1883년부터 1885년 사이에 1,2,3,4,가 각각 독립적으로 출간되었고, 후에 한 데 묶인 책이다. 각 1.000부씩 인쇄하여 800부도 팔리지 않는 그야말로 독자들의 외면 속에 탄생된 작품이다. 3부로 마감 지으려는 생각을 바꾸어 4부를 출판했는데, 단 40부가 인쇄되어 지인들에게만 우편으로 송부하였고 일반인에게 공개된 것은 1892년이다.
니체는 40여 년 의식세계에 살면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포함해서, 19편의 저서를 출간했고, 1.000여 개의 아포리즘을 세상 사람들에게 쏟아낸 후“나는 다이나마이트다”라는 세상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끝으로 의식을 잃는다. 정신병원을 나와 나움베르크에 있는 어머니의 집에서 8년간, 어머니 사후 바이마르의 동생 엘리자베스 곁에서 2년 간의 보호 속에 살다가 점차 높아져 가는 자신의 명성도 알지 못한 채 1900년 8월25일 사망한다.
니체는 자신이 죽은 먼 훗날 사람들이 자신 작품들의 위대성을 알아볼 것이라고 말했지만, 『미스 쥴리(Miss Julie)』와 『강자(The Stronger)』 등의 작품을 쓴 스웨덴 극작가 아우구스트 스트린드베리(August Strindberg)와 『절규』의 화가 뭉크를 시작으로 인간 내면세계의 표출에 관심을 갖는 표현주의 예술가들이 그에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다. 니체는 현대 작가들이 그리스 비극을 모범 삼아야 한다는 신념을 토로한 바가 있었다. 그래서인지 미국에서 희곡작가로는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유진 오니일(Eugene O'Neill)이 『위대한 신 브라운(Great God Brown)』에서 주인공 브라운의 내면에 존재하는 아폴론적 요소와 디오니소스적 요소가 충돌하는 매우 이색적인 극을 발표했다. 그 이후 『라자러스 웃다(Lazarus Laughed)』를 발표했는데 주인공 라자러스는 니체가 말하는 초인의 마지막 단계인 어린아이가 되어 초월의 웃음을 웃는 실험적인 비극이다. 조지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는 『범인과 초인(Man and Superman)』에서 니체의 초인사상과 생명력(Life Force)을 차용해 온 것이다. 까뮈의 『시지포스 신화(The Myth of Sisyphus)』와 미국의 부조리 극작가 에드 올비가 『동물원 이야기(The Zoo Story)』에서는 무의미하고 허무주의적인 삶에서 벗어나 니체의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삶’의 철학에 영향을 받았음을 보인다. 그 이후로 니체의 영향을 받은 예술가들이 속속 나타나는데 이는 결론 부분에서 부연해 설명토록 하겠다.
20세기 철학과 종교, 예술 분야에 끼친 영향은 지대해 니체를 가리켜 사람들은 ‘20세기 모더니즘의 선구자’라고 칭송한다. 그 주장은 2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유효하다는 게 제 입장이다.
니체의 사상과 철학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II. 본론
“신은 죽었다”라는 선언은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철학의 출발점이다. 니체는 신의 죽음으로 도래한 허무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여러 철학의 원리를 제시하였다. 먼저 인간에게 ‘초인’이라는 표를 제시한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극복하여 초인이 되기 위해서는 ‘힘의 의지(Will to Power)’를 가져야 한다. 또한 니체는 기존의 형이상학적 토대를 전복하고 새로운 가치를 만들 수 있도록 ‘모든 가치의 전도’라는 방법론을 제시한다. 초인은 현재의 삶이 수없이 되풀이되어도 긍정하는 ‘영원회귀(The Eternal Recurrence)’ 사상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비록 오늘의 삶이 고통스럽더라도 절망하지 말고 ‘아모르파티(Amor fati)’, 즉 자신의 운명을 사랑해야 한다. 영원회귀와 아모르파티는 현재의 삶에 대한 사랑이 없이는 성립될 수 없는 개념이다. 따라서 이 두 사상은 ‘디오니소스적 긍정’이라는 세계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최고의 긍정 양식으로 귀결한다.
장재형은 『마흔에 읽는 니체』에서 니체의 사상을 이해하기 쉽게 말하고자 다음과 같은 도표를 만들어 각항을 설명하고 있다.
신의 죽음
↓
허무주의
↓
초인
↙ ↓ ↘
힘의 의지 모든 가치의 전도 아모르파티
↓
영원회귀의 사상
↓
디오니소스적 긍정
-i. 신의 죽음
니체의 가장 유명한 아포리즘(aphorism. 금언, 잠언), 이다. 인간은 고통스러운 현실과 불안한 미래를 견디기 위해 신이라는 개념을 만들었다. 지난 2000년 동안 유럽인의 삶에 신은 절대적 의미였다. 니체가 살던 19세기 유럽에도 기독교 사상이 모든 이념과 가치 기준일만큼 지배적이었다. 인간이 스스로 만든 신이라는 절대적 가치에 따라 삶을 평가했다. 그런데 삶의 의미이자 목적이었던 신이 더는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었다.
니체는 기독교적 신이 오히려 인간을 병들게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기독교에서는 인간은 죄를 지은 병든 존재이기 때문이다. 무의미하고 두려운 삶을 극복하기 위해 만든 신이 결과적으로 인간을 더욱 나약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더는 필요 없게 된 것이다.
니체는 단순히 기독교의 “신이 죽었다‘는 것만을 의도하지 않았다. 그는 유럽 사람들의 전통적 토대였던 모든 철학, 종교, 도덕의 이념과 가르침에 죽음을 선언한 것이다.
“서양 철학은 플라톤 철학의 각주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철학자 화이트 헤드는 말했다. 플라톤의 형이상학적 이분법은 근대 철학에 이르기까지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플라톤은 세계를 ‘이데아의 세계’와 ‘현실의 세계’로 나누었다. 이데아의 세계는 영원히 변치 않는 존재의 세계로 참 세계이다. 반면에 현실의 세계는 생성, 변화, 소멸을 하는 세계로 시시로 변하는 가상세계이다.
플라톤 철학의 영향을 받은 기독교 역시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계’와 죽어서 영원한 구원을 통해 가야하는 천국이라는 ‘저 세계’로 나누었다. 기독교는 이 세계를 죄와 고통으로 가득한 세계, 즉 참된 세계가 아니기 때문에 암묵적으로 폄하한다.
니체의 “신은 죽었다”라는 말에는 참된 세계이자 신의 세계였던 ‘저 세계’를 사라지게 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 이제 남은 것은 이 세계이다. 이 세계의 주인은 바로 우리 인간이다.
-ii. 니힐리즘(Nihilism 허무주의)
신의 죽음을 통해 니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허무주의의 도래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시지포스는 바위를 힘겹게 정상까지 밀어 올려놓으면 그 바위는 무게 때문에 다시 아래로 굴러 떨어진다. 그렇게 시지포스는 똑같은 일을 무한히 반복해야 하는 형벌을 받고 있다. 우리도 자신에게 물어 볼 수가 있다.
“내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니체는 허무주의를 가리켜 “모든 방문객 가운데 가장 기분 나쁜 존재”라고 말한다. 그는 “니힐리즘이란 여러 가지가 그 가치를 박탈당한다는 것, 즉 목표가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라고 말한다. 인간은 자기 자신과 삶의 의미를 든든하게 지탱해주었던 토대가 사라지자 무엇 때문에 살아가는지 그 의미를 잃어버리고 방황하게 되었다.
삶의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삶의 목표일 것이다. 삶이 주는 허무주의는 결국 의식의 변화를 일으킨다. 매너리즘에 빠져 매일매일 권태로운 삶을 살아가는 자기 자신에게서 벗어나야겠다는 결단을 내야한다.
-iii. 초인(ϋbermensch, 영어: Overman)의 도래를 예고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서양 고전에서 가장 난해한 책일 것이다. 그 이유는 메타포, 즉 비유와 상징, 페러디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니체는 “모두를 위한 그리고 아무를 위하지도 않는 책”이라는 부제를 붙였다.
차라투스트라는 니체를 대변해서 니체의 사상을 전파하는 인물이다. 이 작품은 니체의 대표작품으로 ‘초인’, ‘힘의 의지’, 그리고 ‘영원회귀’라는 세 가지 핵심 사상을 가르친다.
‘초인’은 이 책에서 처음 등장하는 말로, 초인 사상은 산에서 10년간 고독하게 생활한 차라투스트라(Zaratustra)(Zoroaster교의 창시자를 차용해옴) j가 세상으로 내려와 설파한 철학적 사유이다. 2000년 동안 유럽을 지배해 온 이원론적으로 플라톤주의와 그리스도교의 세계관은 이제 그 가치가 전도되었다. ‘모든 가치의 전도로 니힐리즘에 빠진 인간은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답으로 초인이라는 새로운 인간 유형을 제시한다.
니체가 말하는 초인은 ‘힘의 의지’에 의해 자신을 극복하고 초월하는 인간 유형을 의미한다. 영원한 존재였던 신은 죽었고, 영원불변한 이데아의 세계였던 천국도 사라졌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남은 것은 이 세계, 이 대지뿐이다. 차라투스트라는 말한다.
“초인이 이 대지의 뜻이 되어야 하며, 대지에 충실하고, 하늘나라에 대한 희망을 말하는 자들을 믿지 마라!”
-iv.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문학성
니체는 그의 대표작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철학서로는 독특한 모양새를 갖고 있으면서 동시에 문학이라는 외관을 걸치고 있다. 철학적 사유인 무엇? 대신에 ‘어떻게’를 통해 등장한다.
홍익대 철학과 백승영 교수의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니체 문체의 특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문체상으로 예언가 시인의 목소리다. 개념적 사유 대신 아포리즘이 동원된다. 온갖 메타포들, 수많은 비유와 상징 그 장치들이 가득하다. 어린아이, 숲속의 성자, 줄타는 춤꾼, 예언자, 마술사, 낙타, 사지, 독수리와 뱀, 태양, 달, 무지개, 해뜨기 전, 오전, 정오, 오후, 밤, 자정, 등 시간마저도 상징적 의미를 담은 메타포로 사용된다.
당대의 종교, 문학, 철학, 예술, 사회 모든 분야에 걸친 사상과 저작자들을 종횡무진으로 아우른다. 호머의 『일리아드』, 『오디세이』, 플라톤의 『폴리테이아』, 소크라테스의 『변명』, 쇼펜 하우어의 『의지의 표상으로서의 세계』, 괴테의 『파우스트』, 셰익스피어의 『햄릿』, 에머슨, 하이네, 바그너 등이 그 대상이 된다. 무엇보다도 성서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시작부터 마지막 부분에 이르기까지, 때로는 서사 모티브이자 틀로, 때로는 사유적 갈등 구조로, 때로는 인용부를 생략한 형태 등 다양한 방식으로 등장한다. 여기에 페러디도 등장한다. 그리스도교의 『성서』와 『성서』 속 예수의 행적에 대한 페러디는 그 양과 질면에서 압권이다. 이 페러디는 『성서』를 잘 알수록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더 잘 이해할 수가 있다. 광야에서 40일간 예수가 유혹 속에서 명상한 것에 대비해서 차라투스트라는 산속에서 10년간 명상을 했다고 하는 것은 의도적 대비이다.
니체는 독일어판 루터의 『성서』의 문체에 대해 독일 산문의 걸작은 당연히 가장 위대한 그 설교자(루터)에 의하여 이루어진 걸작이다. 성경은 지금까지 가장 훌륭한 독일 서적이다, 라고 했다. 니체는 루터의 문체를 본받고 있다.
-v. 힘의 의지(Will zur Macht) (영어: Will to Power)
니체는 쇼펜하우어의 ‘의지의 철학’에 영향을 받아 그가 말한 ‘삶의 의지’라는 개념을 빌려 자신이 말하는 의지에 ‘힘의 의지’라는 이름을 붙였다. ‘힘의 의지’를 추구하여, 신의 죽음으로 인해서 다가오는 허무주의를 극복하는 능동적 허무주의이다. 단순히 살아남기 위한 의지가 아니라 삶과 맞서 싸우고 새로운 삶을 창조하는 원동력이다.
존재하는 모든 생명은 자신의 힘이 증대하기를 추구한다면, 그만큼 힘이 강해지는 경우에 쾌감을 느낄 것이다. 반대로 힘이 약해지는 경우라면 불쾌감이 따를 것이다. 따라서 ‘힘의 의지’는 단순히 생존을 위한 투쟁이나 자신이 보존하려는 자기보존의 충동이 아니라 자신의 힘을 강화하여 자기 ‘자신을 극복하고 상승하려는 힘’이다.
-vi. 모든 가치관의 전도(Umwertung aller Werte)
인간의 삶을 지배하는 힘의 의지가 드러나는 방식이 바로 가치 평가이다. 니체는 “가치 평가란 곧 창조가 아닌가? 가치 평가가 없다면 현존재라는 호두는 껍데기에 불과하다.”라고 말한다. 결국 창조하려는 자가 되려면 끊임없이 기존의 것들을 파괴해야만 한다. 혼돈 속에서 춤추는 별(초인)을 탄생시키기 위해서, 창조자는 새가 알에서 깨어나듯이 과거의 낡은 것들을 부수어야 한다.
니체는 기존의 형이상학적 토대를 전복하고 철학적 사유의 새로운 지평을 ‘모든 가치의 전도’를 통해서 새로운 지평을 열려고 한다. 이것은 니체 철학의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방법론으로 『우상의 황혼』의 서문에 등장한다.
니체가 말하는 신의 죽음, 초인, 힘의 의지, 영원회귀 사상 등은 전부 ‘가치 전도’라는 방법론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는 신의 죽음을 통해 저편의 세계보다는 이 대지의 삶에 충실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지금까지 사람들에게 최근의 가치로 여겨진 것들을 재평가했다. 또한 지금까지 삶을 지배해왔던 모든 도덕적, 형이상학적, 종교적 가치의 정당성을 의심하면서 새로운 가치를 제시한다.
니체는 모든 가치의 전도를 통해 짐승에서 인간으로, 다시 인간에서 초인으로 나아가는 목표를 달성할 수있다는 것이다. 굴레를 벗어나는 자만이 삶의 기쁨을 위해 산다고 말할 자격이 있다는 것이다.
굴레를 벗어나는 삶을 살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a) 지금 내가 알고 있는 것들이 신뢰할만한지 의심하라
b) 진리에 대해 질문하는 법을 바꾸어라
예를 들면 ‘무엇?’이라는 질문에서 ‘왜’라는 질문으로
무엇 때문에 내가 사는가?→ 나는 왜 사는가?
사랑이란 무엇인가?→왜 우리는 사랑을 해야 하는가?로
c) 기존의 가치를 부정하고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라
-vii. 아모르파티(Amor fati)
아모르파티는 니체의 사상의 중심을 이루는 것 중 하나다. “네 운명을 사랑하라.”라는 운명애는 『즐거운 학문』의 「새해」에 처음 나타난다. 새로운 해를 맞이하면서 모든 사람이 자신의 가장 소중한 희망을 표현하듯이 니체도 자신의 새해 소망과 신조를 말한다. 그때 특별히 스친 첫 번째 생각이 바로 ‘운명에 대한 사랑’이다.
니체는 운명애에 대한 사랑은 삶에서 필연적으로 다가오는 모든 것을 아름답게 바라보는 태도이다. 필연적인 것을 아름답게 본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곧 자신의 ‘운명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는 마음 자세’이다. 곧 자신의 운명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마음 자세이다. 어차피 피할 수 없이 부딪혀야할 운명이라면 그것을 견뎌 내야한다.
니체가 말하는 운명애는 삶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숙명론과는 거리가 멀다. 숙명적인 삶은 우리가 추구해야할 초인의 삶이 아니다. 니체의 운명애는 자신의 운명을 있는 그대로 용하되 성장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 니체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II(Human, All-Too-Human II)』에서 미래 지향적인 사람은 “너 자신을 알라.”라는 격언에 따라 행동하지 않는다고 한다. 대신 “자신을 원하라, 그러면 자신이 될 것이다”라는 명령에 따라 행동한다고 한다. 이미 결정된 것은 없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나의 모습은 변해갈 수가 있다. 운명의 여신은 항상 자신의 바람직한 모습을 적극적으로 꿈꾸는 사람에게 더 많은 선택권을 준다.
우리는 삶이 아무리 고달프고 괴로울지라도 자신의 운명을 긍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그래서 그는 “진정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viii. 영원회귀(Eternal Recurrence)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모든 것은 가고, 모든 것은 되돌아온다. 존재의 수레바퀴는 영원히 굴러간다. 모든 것은 죽고, 모든 것은 다시 꽃 피어난다. 존재의 세월은 영원히 흘러간다.”라고 말하고 있다.
영원회귀에는 그 무엇 하나 새로운 것이 없다, 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쾌락, 근심과 걱정, 크고 작은 온갖 일이 단 하나도 빠지지 않고 삶이 되풀이된다. 즐겁고 행복했던 일 뿐만 아니라 슬프고 괴로웠던 일 모두가 똑같은 순서와 맥락으로 되돌아온다. 모래시계의 모래가 아래로 모두 떨어지게 되면 원래 상태로 되돌아가듯 영원회귀 사상은 순환적 시간관을 갖는다.(니체는 동양 사상에 관심이 많았는데 영원회귀 사상은 불교의 ‘윤회 사상’과 일맥 상통한다고 말하고 있다-필자 주)
우리는 과거와 미래가 교차되는 지점인 현재의 이 순간에 서 있다. 지금 이 순간은 영원한 흐름 속에서 지속된다. 니체가 진정 하고 싶었던 말은 “우리의 삶에서 지금 이 순간은 단 한 번밖에 없다.”라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는다면 삶을 과거로 되돌릴 수는 없지만 바꿀 수는 있다. 다시 말해 나의 운명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은 이번 인생을 포기한 사람은 다음 세상도 똑같다는 것이다. 무의미한 삶이 영원히 반복된다는 것이다. 영원회귀의 사상은 삶에서 만나는 필연적인 것을 긍정하고 사랑하는 ‘아모르파티’의 개념과 이어진다.
니체의 영원회귀의 사상은 괴로운 이 삶을 포기할지, 아니면 괴로운 이 삶을 다시 한번 최고의 의미를 부여하여 극복하고 살지를 선택할 것을 요구한다. 후자의 삶은 힘의 의지를 가진 초인의 삶이다.
-viiii 1) 디오니소스(라틴어: Dionysos, 영어:Dionysus, 로마: Bachus 신)의 긍정
초인이 되려는 사람에게는 ‘정신의 세 단계의 변화’가 필요하다.
첫 번째는 정신이 낙타로 변하는 ‘낙타정신’의 단계이다. 낙타의 정신은 무거운 짐을 지고 견뎌내는 삶의 태도를 말한다. 곧 강인한 정신과 인내심을 의미한다. 낙타는 체념한 자세로 “나는 해야 한다.”라며 주인의 명령에 복종할 뿐이다. 무겁기 그지없는 짐을 지고 사막을 건너는 낙타처럼 우리도 무거운 삶이 짐을 지고 있다. 여기에서 무거운 짐은 전통적인 철학과 종교가 인간에게 요구하는 진리, 도덕, 신념, 관습과 규율, 신에 대한 순종과 믿음을 의미한다. 현대인이 노예적인 모습에 대한 비유이다. 삶을 비판적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우물안 개구리 같은 삶을 살아가는 낙타정신은 천한 인간의 모습이다.
두 번째는 ‘사자의 정신’의 단계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외롭기 그지없는 사막에서 두 번째의 변화가 일어난다.”라고 말한다. 고독한 사막에서 낙타 정신이 드디어 사자의 정신으로 변신을 합니다. 사자는 ‘자유의 정신’을 의미한다. 사자의 정신은 자유를 쟁취하기 위하여 사막의 주인이 되고자 한다. 그래서 지금까지 짊어지고 있었던 무거운 짐을 부정하고자 한다. 사자는 이제 그의 마지막 주인인 거대한 용과 일전을 벌인다.
사자는 용과 싸워 승리함으로써 “나는 마땅히 해야 한다”라는 명령에 맞서 ‘나는 하길 원한다’라고 하는 자유의지의 주인이 된다. 그러나 사자의 정신은 새로운 가치 창조를 위한 자유는 쟁취할 수 있지만, 기존의 가치를 파괴할 뿐 새로운 가치는 창조하지 못한다.
세 번째는 ‘아이 정신’의 단계이다. 이제 사자 정신은 아이의 정신으로 변해야 한다. 여기에서 아이의 정신이란, 어린아이가 놀이에 흠뻑 빠져 몰두하듯이 자기 삶에 긍정적으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마지막 변화인 아이의 정신은 자기극복을 위한 최고의 경지에 이른 모습이다. 니체는 아이의 정신이 특징은 순진무구함, 망각, 새로운 출발, 놀이, 스스로 도는 수레바퀴, 최초의 움직임, 성스러운 긍정으로 표현한다.
니체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놀이에 집중하는 순진한 아이의 모습에서 진정한 창조자의 모습을 발견했던 것이다. 낙타, 사자, 아이로 세 번의 변화를 거쳐 우리는 초인이 되는 방법을 외부세계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니체가 지적한 것처럼 소크라테스는 낙천주의 예술은 삶의 추한 면을 아름다운 가상이라는 환상의 베일로 가리고 아폴론적인 것만을 중시했다. 디오니소스적인 것을 무시하는 예술은 결과적으로 인간의 무의식 충돌을 무시하는 예술이다. 왜냐하면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인간의 삶과 문화를 창조하는 토대이자 힘이기 때문이다. 결국 음악과 비극적 신화는 디오니소스적인 능력의 표현이며 서로 분리할 수 없다. 다시 말해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아폴론적인 것과 비교할 때 영원하고 근원적인 예술의 힘이다.
2) 아폴론적인 것과 과 디오니소스적인 것
첫 작품 『비극의 탄생(The Birth Of Tragedy)』을 1872년에서 니체는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이라는 예술을 바라보는 두 가지 근본 원리를 소개했다. 니체는 “예술은 이 두 가지의 이중성과 결합되어 있다.”라며 이러한 이름들은 그리스인에게서 빌린 것이라고 말한다.
『비극의 탄생』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리스와 로마의 시하에 잘 등장하는 두 예술의 신 아폴론(Apolon)과 디오니소스(라틴 문자 Dionysos, 영어 Dionysus, 로마 신화 Bacchus)를 알아야 한다.
아폴론은 제우스와 레토의 아들이다. 그는 올림포스 12신 중 한 명으로 태양신이자 음악, 시, 의술, 궁술을 관장하는 신이다. 로마식으로는 아폴로로 불린다. 특히 그는 예언의 신이기 때문에 델포이에 있는 아폴론 신전은 미래의 일을 예언하는 신탁을 하는 장소로 유명하다. 아폴론 신은 빛, 이성, 예지력, 예술을 상징한다.
디오니소스는 제우스와 인간 세멜레의 아들이다. 제우스가 뱀의 모습으로 둔갑해 페르세포네에게 접근하여 디오니소스를 낳는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제우스의 아내 헤라는 질투심으로 티탄에게 디오니소스를 죽이라고 명령한다. 티탄은 디오니소스를 일곱 조각으로 갈기갈기 찢어먹어 버린다. 다행히 아테네의 여신이 디오니소스의 심장을 치워 놓았는데, 제우스는 그 심장을 세멜레에게 먹게 하였다. 디오니소스는 다시 세멜레에게서 태어나게 되었다. 그래서 디오니소스는 다시 살아난 부활의 신이자 기쁨과 광란의 신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는 포도나무와 포도주의 신이며 다산과 풍요의 신이기도 하다.
빛의 신으로 ‘빛나는 자’라는 뜻의 ‘포이보스’라는 별칭을 갖고 있는 아폴론은 밝음, 이성, 질서, 균형, 예지력, 꿈, 가상 등을 표상한다. 따라서 ‘아폴론적인 것’은 조형예술, 즉 조각과 시각, 예술에서 구현되는 힘이다. 반면 디오니소스는 무질서, 도취, 황홀, 강한 생명력을 표상함으로,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비조형적 음악 예술에서 구현되는 힘이다.
그리스 비극은 디오니소스적인 것과 아폴론적인 것이 계속해서 새로운 탄생을 되풀이하고 서로를 강화시키며 발전해 왔다
고대 그리스 시민들은 다신 숭배자들이어서 1년 내내 여러 신을 모시는 제사를 올렸는데 그중에 주신이며 풍요의 신인 디오니소스를 모시는, 소위 “디오니소스 축제”라는 것이 있었다. 이 축제 기간에만 허용되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극경연이다. 3편의 비극과 1편의 희곡을 선정해서 극작가와 극 공연 팀에게 시상을 했던 것이다. 이 공연을 위해 부자는 재산을 기부하고 시민들은 배우와 코러스 일원이 되어 극 공연에 적극 참여한다.
이 축제 기간 동안에는 죄수들도 일정 기간 석방해주었고 술과 광란을 허용했던 것이다. 이 기간에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아이들이 잉태되기도 했다.
디오니소스 극 경연대회에서 우승한 작가들 가운데서 그리스 비극의 3대 작가로 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를 꼽는다. 아이스킬로스의 작품으로는 『결박당한 프로메테우스』, 『아가멤논』 등이 있다. 『오이디푸스 왕』과 『안티고네』는 소포클레스의 작품이다. 『메데이아』는 에우리피데스의 작품이다. 니체는 아이스킬로스와 소포클레스의 작품은 아포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이 균형을 잘 이루었다고 생각했다. 이에 비해 에우리피데스 작품은 소크라테스의 이성 중심 철학이 지배하면서 디오니소스적인 요소가 비극에서 분리되어 예술성이 떨어진다고 생각했다.
바그너 음악의 천재성을 칭송하기 위해 구상된 『비극의 탄생』에서 그리스 신 아폴론과 디오니소스를 인간에게 내재하는 양면 속성으로 니체는 설명하려 했다.
중세 독일인들이 성 요한 제나 성 파이트 제를 휩쓸고 다닌 광분한 군중과 바그너의 <트리스탄>에서 고대 그리스의 바쿠스 합창단을 그려 보았던 것이다. 바그너를 찬사하기 위한 저술한 비극의 탄생에서의 디오니소스적인 것을 바그너와 결별한 다음에도 이를 삶의 의지, 즉 죽음과 변화를 넘어 영원한 삶에 대한 긍정적 요소로 보고 있다. 니체는 남성적이고 서정적인 요소를 디오니소스적인 것으로, 여성적이고 서사적인 것을 아폴론적인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III. 결론
종교의 쇠락과 실증주의, 다윈의 진화론으로 시작된 20세기는 니체의 등장과 그의 설파는 전 세계인들을 놀라게 했다. 특히 앞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우리들의 후손들이 초인으로 살아가야 할 덕목, 아무리 현실이 고통스럽더라도 이겨내야 하고, 기왕에 받아들일 거면 숙명이라 생각하지 말고 적극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는 이 이론은 당대의 많은 유명 문인, 화가, 조각가, 음악가, 무용가 등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니체의 삶』(박선영 옮김)과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박승영 지음)에서 니체의 영향을 받은 작가들로 슈테판 게오르게, 토마스 만, 헤르만 헤세, 라이너마리아 릴케, 알버트 슈바이쳐, 앙드레 지드 등을 언급하고 있다.
이 서적들에서는 그 후에도 많은 작가들의 이름들, 즉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제임스 조이스, T.S. 엘리엇 등이 있음을 말하고 있다. 그 이후로도 미국에서는 시어도어 드라이저, 에즈라 파운드, 잭 런던 등이 그의 영향을 받은 작가군으로, 프랑스에서는 아폴리트 텐, 잘보르도, 앙드레 지드, 폴 바레리, 이탈리아에서는 가브리엘레 다눈치오, 베니토 무솔리니 등이 그를 신봉한 사람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음악에서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어서 총 219명의 작곡가와 350개의 곡, 89개의 음악 관련 텍스트가 차라투스트라의 영향권에 있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그리고 현대무용의 창시자인 이사도라 덩컨은 늘 『차라투스트라』를 지니고 다녔다고도 말한다.
철학도 니체의 가면 벗기기에 늦게 동참하였다. 현대 철학을 대표하는 베냐민, 아도르노, 하이데거, 야스퍼스, 푸코, 데리다에서 차라투스트라의 정신이 목격되고 있다고 말한다. 심리학이나 정신 분석학에서도 예외는 아니어서 프로이트, 융(의식과 무의식, 페르소나)도 니체의 영향을 받은 심리학 자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P S. 니체의 수려한 수필 형태의 글과 진지한 자세는 우리 문학인들의 글쓰기에 귀감이 될것이라 생각됩니다. 여러 가지로 부족한 제 발표를 끝까지 경청해 주신 선후배 문인 여러분께 감사 인사를 올립니다. 여러분의 건강과 문운을 빕니다.
※니체의 저서
1. Ed. by Walter Kaufman 『The Portable Nietzsche』(The Viking Press.1968)
2. 곽복록 역 『비극의 탄생』 (서울: 도서출판 범우사, 1989.10.20. 초판 3쇄)
3. 황문수 역 윌 듀란트 『철학 이야기』(서울: 도서출판 문예 4.20.개판 6쇄)
※ 주) 참고문헌
1. 백승영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서울: 도서 출판 세영) (2023. 초판 2쇄)
2. 박미정 옮김 시라토리 하루히코 『니체의 말I』 『니체의 말II』 (서울: samho media)(2014)
3. 박선영 옮김 슈프리노 지음 『니체의 삶』
4. 장재영 『마흔에 읽는 니체』 (서울: 도서출판 유노북스) (2023. 1판53쇄)
5. 황문수 역 윌 듀란트 저 『철학 이야기』 (서울: 도서출판 문예) 1991. 개판 6쇄)
6. Daniel W. Conway 『Nietzsche Critical Assessment I, II, II.IV』(London and New York)(1998)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