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평론 189호 중에서~]
작동 불능 상태에 빠진 국가를 쇄신하기 위한 방편으로 헌법개정이 논의되고 있다. 그러나 대통령 중심제와 의원내각제 둘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는 문제인 것처럼 개헌 논의를 왜곡, 축소하고 있는 언론과 정치인 등 기득권층의 계략에 말려서는 안될 것이다.
이 중요한 문제를 정치인들에게 위임하는 것은 고양이에게 어물전을 맡기는 것과 다름없다. 이번 헌법개정의 핵심은 ‘민주공화국’을 실질적으로 구현할 장치들을 확립하고, 그것을 국가권력이 실천에 옮기도록 강제하는 내용을 담는 것이 되어야 하는데, 당사자인 시민들이 주축이 되지 않고서 그런 일이 가능할 것이라고 기대하기는 어렵다.
이 일을 맡을 기구로는, 아일랜드 등의 사례에서 유용성이 여러 차례 입증된 시민의회를 고려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시민의회의 장점은 무척 많지만, 지금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현실을 고려한다면 특히 다음 세 가지 측면에서 독보적인 강점을 갖는다.
첫째, 시민의회는 파편화된 문화, 양극화된 사회, 고립된 개인이라는 문제를 극복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 선거대의제에 익숙한 우리는 다수결을 민주주의의 원리라고 생각하지만, 시민의회는 합의가 민주주의의 원칙이라는 점을 상기시킨다. 다수결은 한 명이라도 더 많이 내 편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상대방을 헐뜯는 일이 자연히 수반된다. 그러므로 패배한 쪽은 앙심을 품고―극단적인 경우에는 투표과정에 부정이 개입되지 않았는가 하고 의심하면서―다음 기회를 벼르게 되는 것이다. 한편, 합의에 이르기 위해서는 경쟁이 아닌 토의(숙의)가 필요하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모든 참가자는 의견을 개진할 수 있기 때문에 자신의 뜻이 관철되지 않아도 마음에 앙금이 남지 않는다. “내 의견이 존중받는 특별한 경험을 했다.” “나와 다른 관점을 가진 누군가와 깊이 이야기를 나누고 그의 입장에서 생각해본 것은 처음이다.” 시민의회에 참가했던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다.
둘째, 시민의회는 저마다 다른 현실에 갇혀 있는 사람들을 구출할 것이다. 시민의회의 절차를 살펴보면, 주어진 주제를 두고 균형 잡힌 객관적 정보를 제공받으면서 학습하는 데서 출발한다. 오늘날과 같이 가짜뉴스가 판을 치는 시대에, 시민들이 이런 식으로 신뢰할 수 있는 정보에 접근할 기회를 갖는 것은 그 자체로 대단히 유의미한 일이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투명성을 보장하기 위해서 시민의회에서 진행되는 모든 일이 텔레비전이나 인터넷방송으로 전 국민에게 생중계되기 때문에 교육효과는 널리 미칠 수 있다.
셋째, 시민의회는 추첨으로 구성되기 때문에 구조적으로 불편부당하다. 헌법재판소 등 기성체제의 기관들에서 내린 결정에 수긍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자신과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사람들이 함께 숙의하여 합의한 내용에 대해서 쉽게 납득하고 선선히 따른다는 것 역시 지금까지의 시민의회 사례들에서 거듭 확인된 사실이다.
어쩌면 우리가 바라는 대로 헌법이 개정될 것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는 부차적인 것일 수도 있다. 시민들이 개헌운동을 통해서 참된 민주주의가 무엇인지를 다시 확인하고, 그런 원칙이 실현될 수 있는 방안을 주도적으로 만들어낸다는 사실 자체에 의의가 있기 때문이다.
요즘 법치주의를 회복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많이들 하는데, 법은 근본적으로 권세를 가진 자들이 힘없는 약자들에게 횡포를 부리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 사회에서 그 틀이 잘 작동하는 것 같지 않으니까 헌법을 손보자는 것이다. 독재의 잔재를 청산하고, 우리 삶을 둘러싼 객관적인 조건들이 더 악화되기 전에 공동체의 미래에 대해서 함께 토론하기 위한 장(場)으로서도 개헌운동이 필요해 보인다. 그러나 법은 원래, 공동생활에서 일어나는 갈등을 건전한 상식과 양심으로 해소할 수 없을 때 동원하는 최후의 수단이다. 법이 지배하는 사회는 민주주의의 눈으로 보면 수준 낮은, 초라한 공동체라는 사실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 같다.[김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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