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대사도 흐른다. 8
ㅡ 단군신화와 고조선시대 (2) ㅡ
현재 고조선 역사는 단군조선-위만조선의 2개 시기 또는 단군조선-기자조선-위만조선 3개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우리민족 차원에서 보기에는
'단군조선'은 단군왕검이 세웠고, '위만조선'은 위만이 세웠다고 생각해 별 문제없이 보는데
문제는 '기자조선'이다.
여기서 '기자조선'이 '위만조선'보다 먼저라는 것을 잘 기억하기 바란다.
시험에 잘 나오고 헷갈리기 때문이다.
기자조선은 중국 상나라 왕족인 '기자'가 조선에 와서 왕이 되었다는 이야기에서 시작된다.
기자조선은 기자라는 사람이 기원전 1122년에 5천여명 무리와 함께 조선에 와서 왕이 되어 조선을 지배했다는 것이다.
'한서지리지' 등에서 '기자'는 은나라 충신으로서 은나라 멸망을 전후해 조선으로 망명해 백성을 교화 시켰으며, 이에 주(周)나라는 기자를 조선제후에 봉했다고 함으로써 '기자조선'이 만들어진 것이다.
하지만 오늘 날은 남한이나 북한 모두가 '기자조선'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중화사상(중국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사상)과 동북공정에 입각하여 중국이 고조선까지도 자기네 역사로 포함시키려는 의도가 담겨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한국사에서는 기자조선에 대한 인식은 고려시대 기록인 '삼국유사'에서는 '단군조선'과 구분하지 않고 '단군조선' 속에 포함시켰다.
고려후기 문신 이승휴가 우리나라와중국의 역사를 운율시 형식으로 서술한 역사서 '제왕운기' 에서는 '후조선'으로 표현해 '기자'를 다르게 강조하고 있지않다
그러나 성리학을 지배이념으로 삼아 건국한 조선시대는 왕도정치 구현과 사대관계 유지가 이상적인 정치와 외교로 인식되던 시대였다.
그러므로 '기자'와 같은 중국 현인이 조선왕조와 국호가 같았던 고조선에 와서 백성을 교화한 사실을 자랑 스러운 일이었다고 믿었다.
조선사대부들은 '기자동래설'을 긍정적으로 받아 들였고, 기자릉(箕子陵)에 대한 제사도 국가적차원 에서 거행했다.
우리가 최고 대왕으로 치는 조선 '세종실록'을 보면, '세종'은 기자조선 유교적 전통을 계승하고자 노력 했다. 특히, 세종은 기자조선 도덕과 예의, 문물제도를 중요한 모범으로 삼았고, 이를 바탕으로 조선의 통치 이념을 확립하려 했다.
현대 민족사학자들이 '기자조선'을 '한씨조선'(韓氏朝鮮)이라고 바꿔 부른다. 이는 중국 '잠부론'(潛夫論) 역사적기록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후한시대에 '왕부'가 쓴 '잠부론' 기록에 의하면, 주나라 선왕 때에 연나라 근처에 '한후'(韓侯)라는 국가가 있었으며, 한나라의 서쪽에서도 성씨를 '한'(韓)이라고 하는 등 세력을 떨쳤는데, "위만에게 망하여 바다를 건너갔다"는 기록이 있다.
위만에게 패망해 달아난 왕은 바로 고조선 '준왕'(準王)이므로, 이 기록에서 언급한 한씨는 준왕과 동일한 혈통 세력으로 볼 수 있기 때문에 준왕 성씨가 '한'씨(韓氏)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위만에게 패망하여 왕위를 빼앗기고 달아난 준왕 성씨는 ‘기'씨가 아니라 '한'씨(韓氏)라고 하는 새로운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다시말해 기자는 중국에서 온 인물이 아니고 토종 고조선 사람이라는 것이다.
'위만조선'은 '위만'을 시조로 하며, 중국 '사기' <조선전>(朝鮮傳)과 '한서' <조선전> 등의 중국 문헌 기록에 등장하는 고대 국가로, 기원전 194년 ~ 108년, 86년 동안 존속했다.
중국사서에는 시조인 '위만'은 중국 연나라 출신인 걸로 되어있다.
중국사서 '사기'에서는
[ '연왕'과 '노관'이 한나라에 반역하다 실패하여 흉노로 도망하자 연나라 사람이었던 '위만'이 무리 1,000여 명을 모아 동쪽으로 가 패수를 건너 '상하장'이라는 곳에 정착했다. 당시 고조선은 '비왕'의 뒤를 이어 평안도 지역에 정착한 '준왕'의 시대로, 이 당시 위만은 요동태수로부터 변방을 방어하는 직함을 받았다. 그런데 차츰 그는 진번국ㆍ 연(燕)·제(齊)의 유민들을 모아 왕 노릇을 하다가, 끝내는 고조선 준왕을 내몰고 '왕검성'에 도읍을 정했다.
이때가 한나라 효혜제 1년(기원전 194년)이었다.]
'위만'은 중국어(상고 한어)와 고조선 말에 능통했고, 주변 사정에 정통했으며,주위의 진번국, 임둔국, 옥저 등을 복속시켜 영토확장을 꾀한 것으로 보아 상당히 유능한 무장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위만이 본래 조선사람 이었다는 설이 있다. 그 증거는 "상투를 틀었다"와 "오랑캐 옷을 입었다"가 있다. 정확히는 위만이 연나라에서 조선으로 올 때 “상투를 틀고 조선 옷을 입었다(魋結蠻夷服)”고 묘사되어 있다. 이 기록만 가지고 위만이 토종 고조선인 이라는 것을 증거로 삼기는 무리가 있다. 그러나 당시 상황을 살펴보면 충분히 가능성있는 이야기이다.
위만이 중국출신이 아니라 고조선 출신이라는 이유는 위만이 당시 조선정권을 뺏은 이후 국호를 그대로 '조선'이라 하였으며 법과 문화 등에 일체 손을 대지 않고 그대로 유지한 점, "왕권이 약할 때는 듣보잡이가 왕위에 오르면 쫒겨나거나, 내분이 일어나거나 해서 자기 수족을 요직에 앉혀 권력을 강화시키려 한다." 그러나 위만은 그렇게 하지 않았고 쭉 고조선에 살아온 현지인들을 높은 관직에 많이 등용 했다는 기록도 있는 점, 또 위만이 왕이 된 후에도 고조선 세력이 약해지지 않았다 점을 근거로 든다. 그래서 위만을 중심으로 해서 유이민 세력과 고조선의 결합이 매우 자연스러웠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들로 위만을 조선인 계통 자손으로 볼 수 있다.
요즘 학자들은 '위만 = 조선인'설은 고조선 중심지에 대한 학설 중 정설로 받아들여지는 '요동 => 평양 중심 이동설'을 전제로 하고 있다.
고조선은 연나라 장수 '진개'에게 사방 2,000리를 뺏기고 나서 고조선 중심지가 요동에서 평양 지역으로 이동했다는 것이다.
이 이동설을 기본으로, 연나라 장수 '진개'에게 침략당한 이후 많은 조선인들이 중국에 끌려가거나 연나라와 그 뒤를 이은 진나라의 지배 아래 요동 지방에서 지냈는데, 위만이 그들 중 하나였고, 요동지방 고조선인들을 이끌고 당시 고조선에 귀순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 연나라가 고조선을 쳐부수고 요동일대와 청천강 이서일대를 영역으로 확보는 했으나, 직접 지배는 요동을 반으로 가르는 천산산맥 서쪽까지만 실시 했고 천산산맥 동쪽에서 청천강 이서까지는 거점만 건설한 후 그 나머지는 기존 예맥계 실력자들에게 대폭 자치를 허용한 걸로 드러난다. 위만도 이런 연나라 영역 내부의 조선계 실력자였을 가능성이 높다.
사실 당시는 위만이 중국인인가 고조선인 인가는 큰 의미가 없었다.
당시는 민족에 대한 개념이 거의 없었다.
예를들어 남베트남에 중국 진나라 장군 출신인 '조타'가 갔다고 해서 그 당시 베트남이 진나라 역사가 되는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위만이 조선인이든 아니든 위만의 출신 성분이 그 당시 고조선 정체성을 결정하지는 않는다. 즉 민족이나 출신은 고려할 바가 아니다.
'민족주의'는 역사적으로는 자기민족을 다른민족이나 국가와 구별하고그 통일·독립·발전을 지향하는 사상 혹은 운동이며, 정치적으로는 민족을 사회공동체의 기본단위로 보고 그 자유의지에 의하여 국가적 소속을 결정하려는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민족주의는 근대적인 운동이다. 미국 독립혁명과 프랑스 혁명을 기하여 비로소 만개했으며, 19세기는 유럽에서 민족주의의 시대로 불리었다. 이 이전에는 민족이란 개념이 희박했다.
그래서 고대사에서 민족논쟁은 당시의 시각이 아닌 요즘 시각 으로만 보기때문이다. 특히 중국 동북공정이 이런 민족주의 논쟁을 더 촉발시키고 있는 것이다.
민족을 떠나 역사적으로만 보았을 때 '위만'의 등장은 외래 강대한 세력에 의해, 중국과 떨어져 있었던 조선이 한나라 시대 확장에 의해 직접적인 교류가 생기고, 동북아시아 역사에 편입되었다는 의미를 가질 뿐이다.
어쨌든 기자나 위만이 중국에서 왔다는 당시 기록은 중국 사서에만 등장한다. 중국사서들은 중국 위주로 기록해야했기 때문에 '기자' '위만'을 중국출신으로 기록했던 것은 당연하다 보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당시 상황을 자세히 살펴보면 기자나 위만 둘 다 중국출신이 아닌 고조선 토종출신이라는 게 아직도 치열하게 진행중인 논쟁이라는 것이다.
어쨌든 위만은 왕위를 아들에, 다시 손자에 이어 주었는데 아들에 대해선 기록이 없고, 위만 손자가 고조선 마지막 왕인 '우거왕'이다
위만조선은 우거왕 대에 이르러서는 '진번', '임둔' 등 주변지역을 복속해 현재의 한반도 북부 대부분 지역 및 남만주 일부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한반도 남부지역과 중국 간 교류를 방해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그러나 '전한' 무황제 유철의 확장 정책하에서 기원전 109년 ~ 108년 고조선 원정이 있었으며 왕검성 전투등이 벌어졌다. 원정 자체는 실패로 끝났으나 그 원정으로 고조선 왕자인 '장'을 비롯한 주요 세력들이 자발적 이탈이 빌미가 되어 고조선은 스스로 자멸했다.
이처럼 중국 '한 무제'에 의하여 고조선은 무너지고 그 자리에 '한사군'이 설치된다.
고조선 왕족과 귀족들은 살길을 찾아 북쪽과 남쪽으로 갈려 뿔뿔이 헤어져 갔다.
북쪽으로 간 무리들은 만주와 압록강가에 자리를 잡고 '부여'와 '고구려'를 세웠다.
남쪽으로 내려온 무리들은 한강가에다 진국을 건설하였는데, 얼마 후에 '마한', '진한', '변한'의 삼국으로 갈렸다.
이 삼국을 ‘삼한’이라고 한다. 즉 삼한도 고조선의 후예들이 세운 나라라는 것이다. '삼한정통론'의 근거이기도 하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삼한정통론'이라는 논리가 생겨 났는데 '마한정통론'이라고도 불린다.
이 이론은 조선후기 국학계열 실학자들에 의해 제기된 이론으로, '기자조선'이 가지고 있었던 한국사 왕조 정통성이 '위만조선'으로 이어지지 않고, '마한'으로 곧 바로 이어진다는 논리이다.
그 이유는 '위만'은 찬탈자로 유교적 사상에 근거하면 적통으로 볼 수 없고, 적통인 준왕이 쫓겨 내려 와 '마한왕'이 되었기 때문에 '기자조선' 적통은 '마한'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때부터 준왕의 씨족은 기씨(箕氏)에서 한씨(韓氏)로 바뀌었다는 내용들이 있다. 이런 내용은 민족사학자들 주장과 배치되는 점이 있다.
민족사학자들은 '기자' 자체가 토종 고조선 사람으로 한씨로 보고 있는데 조선사대부 삼한정통론자들은 위만에 쫒겨 마한에 온 뒤에야 기씨를 한씨로 바꾸었다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유교적 소중화주의에 빠져있던 조선사대부들은 중국출신 후예라는 것을 더 자랑스럽게 여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자 혈통과 유지는 마한, 더 넓게는 삼한으로 계승되었고, 삼한이 한국사로 이어진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러한 사상은 현대적인 실증 사관은 아닌 조선시대의 관념론적 사관이었다.
기자가 기씨였던 한씨였던 것을 떠나 최근 마한세력과 한씨조선 사이에 있는 고고학적 연속성이 확인되면서 삼한정통론도 어느 정도는 사실에 근거한 것으로 볼 수는 있게 되었다.
중국 적통운운에서 의미 찾는 이들은 이제 더 이상 없지만, 마한 일대가 위만 이전 조선과 강력한 연계가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게 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요즈음 전라도에서는 '전라도천년사' 출판과 함께 '마한'에 대해 뜨거운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전라도천년사 편찬위원들은 "한가람연구소 '이덕일'소장이 한국고대사학계가 해방이후 식민사학 극복을 통해 이룩한 마한, 백제, 가야사 등 관련 연구성과를 ‘식민사학’으로 규정하고 있다”면서 “공람기간이 끝났는데도 도민연대는 전라도천년사 폐기를 거듭 주장하면서 자체 전라도역사문화연구소 설립, 독립운동사관을 계승한다는 등 편향적 역사 이해를 보이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덕일'은 식민사관이 우리 고대사를 한반도에만 제한하여 망치고 있다고 주장하며 마한이 한반도에만 존재한 것이 아니며 중국에도 있었고 마한은 백제가 계승한 것이 아니라 고구려가 계승했다고 주장한다.
'환단고기'와 비슷한 논리이다.
이 논쟁에는 내가 끼어들만한 전문적 지식이 없으니 그들 주장을 객관적으로 전할 뿐이다. 이는 '임나일본부' 논쟁과도 관련이 있다.
이 문제들은 길어지니 따로 한 편으로 정리 하겠다.
이처럼 고조선처럼 신화가 나오는 고대사나 삼국시대 초기역사는 정확한 사료가 너무 부족한 만큼 여러가지 이설들이 있을 수 있다.
특히 '이덕일' 주장과 '환단고기'같은 책은 우리 고대사를 송두리째 바꿔 놓는다.
이덕일주장은 본인이 친일사학계로 치부하는 우리나라 정통사학계로 부터 인정받지 못 하고 있고 '환단고기' 또한 위서논란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어쨌든 우리민족의 최초 주류는 천강족(하늘에서 내려온 환웅의 후손 )이라는 미명아래 고조선을 거쳐(몇 번의 중국의 침략이 있었지만) '삼국시대'를 맞이한다.
우리나라 최초 국정 정통역사서로 여기는 '삼국사기'도 삼국시대 건국신화부터 시작된다.
이어서 <고조선 이후, 삼국시대 이전 시기>가 이어집니다.
ㅡ 초롱박철홍 ㅡ